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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5-16 11:33:025399 
무고(巫蠱)의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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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지란(巫蠱之亂)

[1] 사건의 전개

1. 사건의 단초

한무제가 건장궁(建章宮)에 머물렀는데 한 사람이 검을 차고 궁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유사에게 명을 내려 그 자를 체포하라고 명했으나 잡지 못하자 다시 성문을 폐쇄하고 대대적으로 수색했으나 결국 잡지 못했다. 그래서 무제는 황명으로 양릉대협(陽陵大俠)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협객 주안세(朱安世)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2. 이에 승상 공손하가 주안세를 체포하면 공금횡령죄로 하옥된 자기 아들 공손경성(公孫敬聲)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황제에게 청했다. 무제가 허락했다. 우여곡절 끝에 주안세를 체포한 공손하는 그를 장안으로 압송만 시키면 자기 아들의 죄는 사면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3. 주안세(周安世)의 고발

승상 公孫賀의 아들이며 太僕의 직에 있던 공손경성이 한무제와 황비 위자부(衛子夫) 사이의 딸 양석공주(陽石公主)와 사통하고 한무제를 저주하며 무고를 행했다고 주안세가 고변하자 공손하 일족은 멸족되고 양석공주와 동생 제읍공주도 함께 처형되었다. 공손하는 위청의 죽마고우로 흉노정벌전에 참가하여 세운 전공으로 후에 봉해지고 그의 아내 위군유(衛君孺)는 위황후의 언니로 대장군 위청과는 처남매부 사이이고 한무제에게 손윗동서가 된다. 공손하는 석경(石慶)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고 공손하가 재직하고 있던 태복의 자리에는 아들 공손석경에 물려받아 부자가 함께 구경과 승상의 자리에 있었다.

4. 환관 강충(江充)을 무고의 옥사 책임자로 임명.

평소에 태자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던 강충이 태자 유거(劉據)가 한무제를 무고했다고 호무(胡巫)와 공모하여 날조한 목우(木偶)로 모함했다.

5. 태자의 선발제인(先發制人)

꼼짝없이 강충이 꾸민 함정에 빠진 태자가 먼저 군사를 동원하여 강충을 살해하자 한무제의 명을 받은 승상 유굴리(劉屈氂)가 관군을 동원하여 태자를 공격했다. 싸움에서 패한 유거는 장안성에서 도망쳐 숨어있던 곳이 발각되어 두 아들과 함께 죽고 위자부도 뒤를 따라 자살했다. 태자와 함께 죽은 장남 유진균(劉進均)의 아들 유병기(劉病己)는 당시 강보에 싸인 채로 투옥되었다. 이 사건으로 연루어 되어 살해된 사람들은 모두 4만여 명이 넘었다.

6. 유병기가 갇힌 감옥에서 천자의 기운이 뻗친다는 말을 들은 한무제가 사람을 보내 감옥의 죄수는 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7. 이때 감옥의 정위감(廷尉監)이었던 병길(丙吉)이 천자의 명을 거부하여 유병기가 목숨을 건졌다.

8. 한무제가 임종에 앞서 태자가 강총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황태손 유병기 이하 태자의 반란 사건으로 연루된 모든 죄수들을 사면했다.

9. 한무제가 어린 나이의 아들 유불릉(劉弗陵)을 세자로 세우고 유불릉의 생모인 구익부인(鉤弋夫人)을 죽였다. 한무제는 자신이 죽게 되면 구익부인이 어린 황제의 섭정이 되어 전횡한다고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소제(昭帝)로 즉위한 유불릉은 창읍왕(昌邑王) 유하(劉賀)를 황태제로 세웠다. 소제가 제위 12만인 20세의 나이로 죽어 그 뒤를 유하가 제위에 올랐으나 황음무도했음으로 곽광(霍光) 이하 대신들이 모의하여 폐위시키고 유거(劉據)의 손자인 유병기(劉病己)를 대신 황제로 옹립했다. 유하는 황제의 자리에 추대된 지 20여 일만에 축출되었다. 유병기는 병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민가에서 자랐다. 유병기가 한선제(漢宣帝)다.

[2] 간개(簡介)

한무제는 중국의 전통적인 미신인 무고(巫蠱)의 행위가 사람을 실제로 해칠 수 있다고 믿었다. 무고란 인형을 만들어 저주한 후에 땅에 묻는 행위를 말한다. 한무제는 만년에 자주 몸이 아픈 이유를 좌우의 측근들이 무고를 행하기 때문이라고 의심했다. 정화(征和) 원년(前92年),승상 공손하(公孫賀)가 무당을 시켜 저주를 행하고 그 인형을 황제가 다니는 치도(馳道)을 파고 묻었다는 고변이 들어와 공손하 부자는 옥중에서 살해되고 그 가족은 멸족되었다. 흉노 정벌전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워 승상의 자리에 오른 공손하는 위자부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당시 대장군 위청에게는 매제였고 황제와는 동서지간이었다. 다음 해 강충이 나무인형을 만들어 궁중에 묻었다고 태자 유거(劉據)를 고발하자 태자가 강충을 살해했다. 태자가 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한 무제가 군사를 동원하여 잡으려고 하자 황제와 태자의 군대가 5일 동안 성내에서 격전을 치러 쌍방간 4-5만의 인명이 살해되었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싸움에서 패한 태자가 천짐(泉鴆)이라는 곳으로 달아났다. 소식을 들은 위황후는 궁중에서 자살하고 황제는 관리를 보내 태자를 체포하려고 했다. 태자는 자살하고 그의 두 아들 역시 살해당했다.

[3] 사건의 배경

그의 통치 만년에 이른 한무제는 사치에 빠지고 빈번히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부고를 비게 만들었다. 혹리를 좋아한 무제는 형벌을 잔혹하게 적용하여 사람의 인명을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태자 유거는 항상 무제에게 백성들을 쉬게 하고 백성들의 부담하고 있는 각종 세금과 부역을 줄여주어 관대하고 너그러운 정책을 시행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한무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유거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다.

태자 유거 외에 한무제에게는 5명의 어린 아들이 있었다. 태자를 포함한 6명의 아들 중 한무제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유불릉(劉不陵)이었다. 한무제는 유불릉이 자기의 모습과 닮았다고 신하들에게 과장되게 자랑하곤 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태자 유거를 폐하고 유불릉은 대신 세우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승상 공손하(公孫賀)의 아들 공손경성(公孫敬聲)이라는 위인은 교만하고 사치한 성격에 법을 지키지 않고 자기 멋대로 군비 1900만 전을 유용했음으로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그때 마침 무제가 황명으로 양릉대협(陽陵大俠)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협객 주안세(朱安世)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승상 공손하가 주안세를 체포하면 자기 아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황제에게 청했다. 무제가 허락했다. 우여곡절 끝에 주안세를 체포한 공손하는 그를 장안으로 압송만 시키면 자기 아들의 죄는 사면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공손하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주안세가 그 사실을 알고 웃으면서 말했다. “승상에게 닥칠 화는 그의 종족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남산의 대나무를 다 베어도 내 말을 받아 적을 수 없고 야곡(斜谷)의 나무를 다 베어도 나를 옥죌 형틀을 만들지 못한다.” 이윽고 장안에 호송되어 옥에 갇힌 주안세는 황제에게 글을 올려 공손경손은 무제와 딸 양석공주와 사통하면서 무고를 행한 나무인형을 황제의 전용도로인 치도(馳道)에 묻어 저주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래서 공손하 부자는 옥중에서 요참형에 처해지고 그들의 종족들은 멸족되고 말았다.

[4] 사건의 경과

무제가 총신 강충(江充)을 시켜 무고사건을 조사하도록 시키자 평소에 태자와 사이가 나빴던 강충이 태자를 모함하여 해치려고 했다. 강충은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여 안도후 한열(韓說), 흉노출신에 무당을 겸하고 있던 환관 소문(蘇文) 등 4명과 모의하여 나무인형을 발굴한다고 하면서 여러 곳을 파헤쳐 나무인형을 찾아냈다. 관련된 사람은 모두 잡아다 불에 달군 철차꼬를 채우고, 인두로 지지거나 강제로 자백하게 만들어 그가 누구인지 관계하지 않고 일단 강충의 친 그물에 걸려들기만 하면 황제를 저주했다는 죄명으로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며칠 사이에 강충이 파 놓은 함정에 빠져 살해된 자는 수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와 같은 참혹한 옥사가 일어나던 과정에서 승상 공손하(公孫賀) 일족과 양석공주(陽石公主)、제읍공주(諸邑公主),장평후(長平侯) 위항(衛伉) 등도 모두 무고 사건에 연루되어 참살되었다. 공손하의 부인은 황후 위자부의 언니로 한무제와는 동서간이고 양석공주와 제읍공주는 위황후 사이에 낳은 공주이며 위항은 위청의 아들로 한무제에게는 생질이다. 골육인 친딸은 물론 친척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살해하는 한무제의 잔인한 처사를 목도하게 된 강충은 한층 더 대담한 생각을 품었다. 그는 무당을 시켜 한무제에게 말하게 했다.

“황궁 내에 황상을 저주하는 사람이 있어 고기(蠱氣)가 매우 짙게 깔려 있습니다. 만약 나무 인형을 파내어 없애지 않는다면 황상의 병세는 완쾌될 수 수 없습니다.”

한무제는 강충에게 대대적으로 나무인형을 파내기 위해 황궁을 수색하는 책임을 맡겼다. 강충 일당은 먼저 한무제와 소원한 후궁들의 처소부터 시작하여 곧바로 위황후와 태자 유거의 숙소로 들어가 수색했으나 궁밖이나 궁안에서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자 강충은 태자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오동나무로 만든 인형을 아무도 몰래 태자궁 밑에 묻어 놓고 파내고서는 큰 소리로 외쳤다.

“ 태자궁 안에서 수 많은 오동나무 인형을 찾아냈을 뿐만 아니라 태자가 쓴 백서에 황상을 저주하는 글이 써있었다. 나는 마땅히 지금 즉시 황상에게 고해 그의 죽을죄를 다스려야 겠다.”

이때 한무제는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장안을 떠나 감천궁에 머물고 있었다.

이에 태자 유거는 소부 석덕(石德)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태자의 사부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무고의 사건에 연루되어 살해되지나 않을까를 두려워한 석덕이 말했다.

“승상 공손하(公孫賀)와 일족과 두 공주님 및 장평후 위항 등 모두 무고의 란과 연좌되어 처형되었습니다. 지금 태자의 궁 안에서 오동나무 인형이 발견되었으니 우리들은 스스로 결백을 증명할 수 있는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황후와 우리가 보낸 사자는 강충 일당의 방해로 황상에게 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황상을 접견할 수도 없으며 더욱이 황상은 도성에 없어 이 일의 내막을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간신이 꾸몄습니다. 태자께서는 진나라의 부소가 어떻게 죽었는지 잊으셨습니까? ”

무력을 동원하여 강충 일당을 체포하여 그들의 음모를 밝히라는 석덕의 건의를 태자는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정화(征和) 2년(前91年)7월 임오일, 태자는 사람을 사자로 가장하여 강충 일당을 체포하려고 했다. 강충의 조수 한열(韓說)이 사자의 신분을 의심하여 조칙을 받들려고 하지 않자 태자가 보낸 사람에게 살해 당했다. 태자는 사람을 황후에게 보내 일의 전말을 고하고 다시 시위에게 무기를 지급한 후 동원했다. 태자는 백관들을 향해 강충이 모반했다고 선포하고 강충을 살해했다. 당시 강충의 심복 환관 소문(蘇文)은 현장에서 벗어나 무제가 있는 곳으로 달아났다. 소문이 태자가 난을 일으켰다고 고하자 무제는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사자를 보내 태자를 불렀다. 그러나 사자는 감히 태자가 있는 곳을 가지 못하고 돌아와 무제에게 태자이 이미 모반을 일으켜 성공하고 사자로 간 자신을 참수하려고 했기 때문에 도망쳐 돌아왔다고 고했다. 무제는 대노하여 승상 유굴리(劉屈髦)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태자의 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내렸다. 태자는 수만 명을 규합하여 승상이 이끄는 군사들과 5일 동안 격전을 치르는 과정에서 죽은 자만 수만 명에 달했다. 장성 성에는 태자가 모반했다는 소문이 퍼져 결국 태자의 세력은 고립되어 약해졌음으로 싸움에 지고 말았다. 태자는 장안에서 달아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빠졌다. 한무제는 종정(宗正) 유장락(劉長樂)에게 조명을 내려 집금오(執金吾) 유감(劉敢)으로 하여금 명을 받들어 황후의 인장을 회수하게 했다. 황후 위자부는 자살을 택했고 태자의 수 많은 빈객들 역시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그때 장안성의 성문의 책임자였던 전인(田仁)은 성밖으로 탈출하는 태자를 저지하지 않았다. 태자는 장안을 빠져 나가 호현(湖縣 : 지금의 하남 영보(靈寶) 서)의 한 가난한 농가에 숨어들었다. 집주인은 짚신을 삼아 판 돈으로 태자가 필요한 음식 및 물품을 대주었다. 얼마 후에 태자가 호현으로 도망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신안(新安)의 현령 이수(李壽)가 군사를 동원하여 태자를 체포하려고 출동했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게 된 태자는 문설주에 줄을 메달아 목을 메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이 두 아들과 농가의 주인은 이수의 부하인 장부창(張富昌) 등에게 살해 당했다.

태자는 삼남일녀를 두었는데 그 중 이름이 남아 있는 아들은 사황손(史皇孫) 유진(劉進)으로 후에 한선제(漢宣帝)로 즉위하는 유순(劉詢)의 부친이다. 그들은 모두 무고의 란 때 목숨을 잃고 오로지 유진의 아들인 손자 유순만이 살아남았다. 유순은 병기(病己)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5] 신원(伸寃)

원래 전천추(田千秋)는 고조능의 관리를 책임진 고침랑(高寝郎)이라는 하급관리였다. 전천추 등이 서장을 올려 태자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들이 아버지의 병장기를 가지고 논 행위에 대한 죄는 태형에 불과할 뿐이고 천자의 아들이 잘못으로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어찌 그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습니까? 신은 일전에 꿈속에서 백두옹에게서 이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사건의 내막을 조사하게 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황후와 태자는 나무인형을 땅에 묻은 일이 없었고 그 일은 모두 강충과 소문 일당이 꾸민 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황제는 무고의 화로 인하여 태자와 두 손자를 죽게 한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후회했다. 무제는 강충의 일족을 멸족시키고 환관 소문은 산채로 화형에 처했다. 또한 호현(胡縣)의 천구리에 군사를 끌고가서 태자를 자살로 몰고 태손을 칼로 찔러 죽인 이수와 장부창 이하 하수인들을 잡아 처형히키고 기타 그 일에 관여된 대신들은 모두 사형에 처했다. 처음에 태자를 잡아 죽인 공로를 치하하여 신안 현령 이수는 북지군 태수로 승진시키고 장부창은 후로 책봉했었다.

태자의 죽음에 대해 크게 후회한 한무제는 호현에 사자를 보내 궁전을 축조하게 하여 이름을 사자궁(思子宮)이라고 지었으며 또한 한 채의 높은 누각을 지어 태자 유거와 두 손자가 그리워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른 뜻의 “귀래망사지대(歸來望思之台)”라는 이름을 지어 불렀다.

[6] 에피소드

정화(征和) 3년 곽양(郭穰)이 다음과 같이 밀고했다.

「승상 유굴리(劉屈氂)의 부인이 황상을 저주하고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와 함께 사당에서 창읍왕(昌邑王)으로 하여금 제위를 잇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렸다.」

이 일로 인해 유굴리는 동시(東市)에서 요참형에 처해지고 그의 처는 화양가(華陽街)에 효수되었으며 이사장군의 처자는 모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당시 기병 6만과 보병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출전하여 흉노와 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이광리는 일족이 무고의 란에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휘하의 군사들과 함께 흉노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사장군을 따라 출정했던 16만의 군사들 중 무사히 돌아온 군사는 천 명도 안 되었다.

출전 : 百度知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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