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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07 14:41:344390 
유럽이 통일에 실패한 까닭2 - 종교차별이 끼친 영향
운영자
일반

진시황의 축객령(逐客令) 이사의 간축객령(諫逐客令) 그리고 유럽의 통일 실패

- 출신지를 불문하고 자국의 인재를 추방하는 행위는 적군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도적에게 양식을 보내주는 것 -

중국의 진시황은 로마제국의 네로 등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드러낸 장점에 대해 거론하는 경우를 찾기가 매우 힘들다. 그런데 폭군으로 알려진 진시황이 보여줬던 장점이라니 도대체 뭐가 있을까?

외국인과 내국인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했다는 점이 바로 진시황의 대표적인 장점이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대표적인 적국으로 치열하게 패권을 다투었던 초나라의 관리 출신임에도 진나라 재상의 자리까지 오른 이사는 그러한 진시황의 장점을 잘 보여준 인재라고 할 수 있다.

초나라의 하급관리였던 이사는 어느 날 화장실의 쥐와 곡식창고의 쥐를 비교해보고 충격을 받았다. 화장실의 쥐는 사람이 오면 놀라 도망치기 바빴지만 곡물 창고의 쥐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쥐조차도 사는 곳에 따라 삶의 격이 다른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깨달음을 얻은 이사는 한 때 전국시대 최고의 강국이었으나 이제는 점점 기울어가고 있는 조국 초나라를 떠나 당대 최고의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인 순자를 찾아가 공부를 했다. 이윽고 기나긴 공부를 마친 이사는 진나라로 향했다.

진나라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점점 더 높은 직위로 나아가던 이사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아 진왕-진시황-에게 자신의 중국통일 전략을 주장했다. 이사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한 진왕은 이사를 더욱 높은 직책인 장사로 임명했고 적극적으로 이사의 계책을 실행에 옮겼다. 이후 이사가 제시한 여러 방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자 그를 객경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모든 게 순조로워만 보이던 그 때 중대한 사건이 터졌다.

정국이란 토목기술자가 한나라 간첩이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양승국 선생님의 [열국연의]-www.yangco.net-사이트에 따르면 사마천의 사기 이사 열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있다.

「그때 마침 한나라 사람 정국(鄭國)이라는 토목기술자가 구거(溝渠)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진나라와 들어와 간첩활동을 하다가 이내 발각되고 말았다. 진나라의 왕족과 대신들 모두가 들고 일어나 진왕에게 상주했다.

“ 산동의 여러 제후국의 인사가 진나라에 들어와 진왕을 받들고 있는 것은 그들 대부분이 자기들 제후를 위해 유세하여 진나라의 군신을 이간시키고 있습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타국 출신들의 객인들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시기 바랍니다. ”」

이러한 주장에 귀가 솔깃해진 진왕이 축객령(외국출신 관리 추방령)을 내렸다. 축객령에 따라 초나라 출신인 이사도 추방을 면치 못할 것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사는 가만히 손을 놓고 앉은 채 추방을 기다리고 있지만 않았다. 이때 이사는 진시황에게 축객령의 부당함을 간하는 글을 올렸는데 역사상 명문으로 인정되고 있는 간축객령(諫逐客令)이다.

「관리들이 객인들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기 위해 의논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옛날 목공께서는 서쪽의 융(戎)으로부터 유여(由餘)를 얻고, 동쪽의 완(宛)에서는 백리해(百里奚)를, 다시 송(宋)나라에서 건숙(蹇叔)을 얻었습니다. 또한 당진(唐晉)에서는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枝)가 찾아왔습니다. 이 다섯 사람은 모두 진나라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목공께서는 중용해서 서융의 패자가 되었습니다. 후에 효공(孝公)의 대에 이르러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하고 풍속을 바꾸어 백성들의 생활은 풍성하게 되었으며 나라는 부국강병을 이루었습니다. 백성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부역에 임했으며 제후들은 기쁜 마음으로 복종했습니다. 이어서 밖으로는 초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천리에 달하는 땅을 얻어 지금까지 정치는 안정되고 나라는 강성하게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혜왕(惠王)께서는 장의(張儀)의 계책에 따라 삼천(三川) 지방을 공격하여 차지했으며, 서쪽으로는 파(巴)와 촉(蜀)을 진나라 땅으로 병탄했습니다. 또한 북쪽으로는 상군(上郡)을, 남쪽으로는 한중(漢中)을 공략하여 점령하고 구이(九夷)를 망라하고 초나라의 언영(鄢郢을 제압했습니다.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성고(成皐)의 요새를 거점으로 하여 비옥한 땅을 차지하여 육국의 합종을 흩어지게 했습니다. 그 결과 제후들은 서쪽으로 머리를 조아려 진나라를 받들게 되어 지금까지도 그 공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시 소양왕께서는 위나라에서 들어온 범수(范睢를 얻자 진나라 출신 양후(穰侯)를 폐하고 화양군(華陽君)을 내쫓아 공실의 힘을 길러 왕족과 귀족들의 세력을 눌렀습니다. 또한 범수의 계책을 이용하여 제후들의 땅을 잠식함으로 해서 진나라는 제업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네 분의 진나라 군주들이 이룬 공업은 모두가 객경들의 도움에 힘입은 것입니다.

이로써 살펴 보건데 어찌하여 객경들이 진나라에 손해를 끼친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네 분의 군주들이 오히려 객경들을 물리쳐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상소에 귀를 기우리지 않았다면 진나라는 부유하게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강국으로써의 위명도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폐하께서는 곤강(昆岡)의 옥을 모으고, 수후지주(隨侯之珠)와 화씨벽(和氏璧)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야광주(夜光珠)는 몸에 두르시고 보검 태아(太阿)는 허리에 차고 섬리마(纖離馬)가 모는 수레에 취봉기(翠鳳旗)를 꽂고 그 옆에는 우레와 같이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영타(靈鼉)라는 북을 달고 계십니다. 제가 말씀드린 보물들은 모두 진나라 산이 아님에도 폐하께서는 그것을 소유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계시는 이유는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의 말대로라면 반드시 진나라에서 나온 것이라야만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초나라에서 바친 야광주로 조정을 장식한다거나, 코뿔소 뿔이나 상아로 만든 기물들을 즐긴다거나 음악과 가무에 특히 뛰어난 정나라나 위나라 여인들을 데려와 후궁으로 채울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결제(駃騠라는 명마로 궁궐 밖의 마굿간을 어떻게 가득 채울 수 있었겠습니까?

그밖에 강남에서 산출되는 금과 주석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며 서촉(西蜀)에서 채취한 단청(丹靑)으로 궁궐의 누각을 아름답게 색칠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 후궁을 장식하고 충당한 희첩들로 인해 기쁜 마음에 귀와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도 필히 진나라 것이어야만 한다고 말한다면 완(宛) 땅에서 나는 진주로 장식한 비녀나 주옥을 박은 귀거리 및 아읍(阿邑) 산의 횐 비단으로 만든 의복과 자수를 놓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치장품과 같은 것은 폐하에게 헌상되지 않을 것이며 세속의 유행에 따라 고아하고 아름다우며 화려한 조나라 여인은 폐하의 곁에서 시중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무릇 질그룻과 질장군을 두드리고 쟁이를 타면서 넓적다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어야디야 소리와 함께 노래 불러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진나라의 전통적인 음악입니다. 정(鄭), 위(衛). 상간(桑間), 소(昭), 우(虞), 무(武), 상(象)은 모두 타국의 음악입니다. 지금 질그릇과 질장군을 두드리는 진나라 고유음악을 버리고 정나라와 위나라의 음악을 듣고, 다시 쟁이를 타는 것을 물리치고 소(韶)와 우(虞) 음악을 듣는 것은 어째서인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곧바로 마음에 유쾌해지며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지금 폐하께서 사람을 쓰시는 일을 이처럼 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의 됨됨에 대한 가부를 묻지 않고, 일의 옮고 그름을 논하지도 않으며, 진나라 사람이 아니면 모두 내쳐 객인들은 모두 나라 밖으로 쫓아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자와 주옥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람을 경시하는 것으로써 천하를 굽어보며 제후들 위에 군림하는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신은 듣기에 땅이 넓어야 산출하는 곡식이 많고 나라가 커야 백성이 많으며 군대가 강해야 병사들은 용감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태산이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큰 산이 되었고 황하는 한 줄기의 실개천의 물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왕자는 한 명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덕을 능히 밝힐 수 있어 사방으로 끝이 없는 땅을 영토로 삼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백성들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사시사철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고 귀신들은 복을 내립니다. 이것은 오제(五帝)나 삼왕(三王)에게 적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버린 백성들은 적국으로 가서 그 나라의 자원이 되고, 축출된 빈객들은 제후들을 도와 패업을 이루게 할 것입니다. 또한 천하의 재사들로 하여금 감히 서쪽을 향하려는 생각을 못하게 하여 그들의 발을 싸매어 진나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 적군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도적에게 양식을 보내주는 것’입니다. 무릇 진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 중에서 보배로운 것이 많은 것처럼, 진나라 출신이 아닌 선비들도,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오늘 빈객들을 내 쫓는 것은 적국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며, 자국의 백성들을 줄여서 원수의 나라에 보태주는 것입니다. 그 결과 나라 안은 저절로 비게 되고 나라 밖에서는 제후들로부터 원한을 사게 되어 그때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고 해도 어쩔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에 진왕은 축객령을 취소하고 이사의 관직을 복직시켜 그의 계책을 채용하고 그의 벼슬은 정위(廷尉)로 높였다. 진나라는 20여 년 동안 마침내 천하를 병합하고 군주를 황제(皇帝)로 높였으며 이사는 승상(丞相)이 되었다. 군현의 성벽을 허물고 병기들을 모두 녹여 다시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였다. 또한 한 뼘의 땅도 나누어 봉토로 내주지 않기 위해 황실의 자제나 공신들을 제후왕으로 세우지 않은 것은 전란의 화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수백년 전만해도 고만고만한 약소국 중 하나에 불과했던 진나라가 당대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는데 있어 외국의 인재를 차별하지 않고 기용한 정책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다양한 역사적 실례와 비유를 들어 설득력 있게 피력한 이사는 마침내 흔들리던 진왕의 마음을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진왕은 곧바로 축객령을 취소했으며 외국인과 내국인을 차별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기용한 진나라는 마침내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중요한 요인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내외국인과 신분에 따른 차별이 컸다면 과연 진나라가 그렇게까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유럽은 무슨 이유로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래 한 번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분열을 지속했는가?

중국과 유럽의 역사를 비교분석함으로 해서 유럽이 통일에 실패한 원인에 대해 알아보자.

고대 지중해 세계를 통일했던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유럽은 단 한번도 로마제국 수준의 통합에 이르지 못했다. 프랑크 왕국이 한 때 상당한 판도를 자랑했지만 결코 과거 로마제국에 비견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봉건제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나라 통일 이전에 주나라가 있었지만 그 당시 중국에 대해 통일되었다고 하진 않는다. 주나라도 봉건제에서 벗어나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를 실현한 진나라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왕조로써 인정받는 것이다.

프랑크 왕국은 얼마 가지 않아 형식적인 통합조차 유지 못하고 분열되어 이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지역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남쪽의 스페인은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거듭하면서 잃었던 영토를 조금씩 되찾아나갔다. 영국에선 원주민인 켈트 족 세력이 앵글로 색슨, 노르만 등 외부 세력에 의해 점차 밀려나갔다. 유럽에선 15세기나 되어서야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다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독일, 이탈리아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통일에 성공할 정도로 진행속도가 지지부진하기 그지없었다.

어쨌든 로마제국 멸망 이후론 EU를 결성한 현재까지도 유럽은 로마제국 당시 수준의 통합을 이루진 못했다. 그러한 원인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지리적 조건이 통합을 가로막았다는 가설이다.

한글의 우수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외국 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국내에도 적지않이 알려진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선 중국의 만성적 통일과 유럽의 만성적 분열부터 이해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도 지도에서 짐작할 수 있다. 유럽의 해안선은 섬에 버금갈 만큼 고립되어 있는 큰 반도가 다섯 개나 있어 매우 들쭉날쭉하며 각각의 반도에는 모두 독립적인 언어와 민족 집단과 정부(그리스, 이탈리아, 이베리아, 덴마크, 노르웨이-스웨덴)가 들어섰다.

반면에 중국의 해안선은 훨씬 완만하며 별개의 중요성을 갖게 된 곳은 인근 한반도밖에 없다. 유럽에는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고 자기들의 언어와 민족성을 유지할 만큼 큰 두 섬(그레이트브리튼과 아일랜드)이 있고 그중 한 섬(그레이트브리튼)은 유럽의 중요한 독립 강국의 하나가 될 만큼 크고 또한 유럽 본토와도 가깝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에는 가장 큰 두 섬인 타이완과 하이난조차도 각각 아일랜드 면적의 절반 이하에 불과하며, 최근 타이완이 부상하기 전까지는 둘 다 중요한 독립강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일본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탓에 최근까지 아시아 본토로부터 정치적으로 격리되어 있었는데, 그레이트브리튼과 유럽 본토의 경우보다 훨씬 그 정도가 심했다.

유럽은 여러 개의 높은 산맥(알프스, 피레네, 카르파티아, 노르웨이 국경의 산맥 때문에 언어, 민족, 정치 등의 측면에서 각각 독립적인 단위들로 조각조각 나누어져 있는 반면 중국에서 티벳 고원 동쪽에 있는 산맥들은 그리 대단한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중국의 중심부는 충적토로 이루어진 비옥한 유역을 가로질러 흐르는 두 개의 큰 강(양쯔강과 황허강)이 있어서 동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두 강 사이를 남북으로 잇는 통로들도 비교적 평탄한 편이다(결국에는 두 강이 운하로 연결되었다.) 그 결과 중국은 매우 일찍부터 생산성 높은 두 개의 거대한 핵심 지역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두 지역이라고는 해도 분리 상태가 그리 심하지 않았으며 결국 하나의 핵심 지역으로 합쳐졌다.

그에 비하면 유럽에서 가장 큰 두 개의 강인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은 규모가 작아서 훨씬 좁은 지역밖에 연결해 주지 못한다. 중국과 달리 유럽은 작은 핵심 지역이 여기저기 산재하고 있는데, 다른 지역들을 오랫동안 지배할 만큼 큰 지역은 하나도 없고 각 지역이 만성적 독립 국가의 중심지다.

B.C. 221년 마침내 중국이 통일되자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다른 독립국가가 창건되어도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물론B.C. 221년 이후에도 몇 차례의 분열 시대가 있었지만 언제나 재통일로 마감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경우 샤를마뉴 대제, 나폴레옹, 히틀러 등 강력한 정복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통일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절정기의 로마제국도 유럽 면적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지 못했다.>-[총, 균, 쇠], p605~607

<강대국의 흥망>으로 일반에도 널리 알려진 폴 케네디 또한 지리적 조건을 중요한 요인으로 생각했다. <강대국의 흥망>에서 폴 케네디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6세기의 세력권의 지도(지도 1, 2 참조)에서 당장 눈에 띄는 유럽의 특징 중의 하나는 정치적으로 분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하나의 제국이 무너진 뒤 후계왕조가 중앙집권통치의 끈을 다시 거머쥘 사이에 잠시 발생하는 것과 같은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유럽은 항상 정치적으로 조각난 상태여서 로마인들도 안간힘을 썼지만 라인과 다뉴브강 이북을 정복하지 못했다. 로마의 멸망 이후 1,000년 동안 기독교와 기독교문화의 꾸준한 팽창과 비교할 때 정치세력의 기본단위는 소규모이고 국지적이었다.

예컨대 서유럽의 카를대제(Karl der Grosse, 742~814)나 동유럽의 키에프 공국의 경우와 같은 권력의 집중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으로 통치자의 교체, 내부의 반란 또는 외부의 침입으로 막을 내렸다.

유럽의 정치적 분산성은 거의 지형 때문이다. 유목민족의 제국이 전격적인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던 거대한 평원도 없고 혹사당하는 인민과 쉽게 정복되는 농민을 먹일 식량을 제공해준 갠지스, 나일,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황하 그리고 장강 주변과 같은 비옥한 강변지역도 없다.

유럽의 지형은 아주 울퉁불퉁하여 산맥과 삼림 사이의 계곡에 인구가 분산되어 있다. 동서와 남북의 기후차이도 극심하다. 이 때문에 중요한 결과가 많이 나타났다. 우선 강력한 골수 군벌이라 해도 통일된 지배권을 확립할 수 없었으며 몽골 기마원정군과 같은 외부세력에 의해 유린될 가능성도 희박하였다.

역으로 이같은 다채로운 지형은 분산된 세력의 성장과 존속을 부채질함으로써 지방 왕국과 영주국, 고지의 벌족동맹과 저지의 도시동맹들로 로마멸망 이후 유럽의 정치도는 언제나 조각이불 같았다. 분산의 양상은 시기에 따라 달랐지만 통일된 제국의 양상을 띤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유럽의 다양한 기후는 서로 교환하기 좋은 다양한 생산물을 낳게 했고 시간이 흘러 시장관계가 발전하자 생산물은 강과 취락지 사이를 가로막은 숲의 소로를 따라 운반되었다. 이러한 교역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동방의 캐러밴들이 운반하는 사치품이 아니라 급증하는 15세기 유럽인구를 먹여살릴 목재, 곡물, 포도주, 양털, 생선 등의 벌크 생산물이 교환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도 지리적 위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즉, 이들 생산물의 운반에는 수로수송이 대단히 경제적인데 유럽에는 통행에 적합한 강이 많았다. 바다로 둘러싸여 있음으로 해서 조선산업이 발달하여 중세 후기에는 발트해, 북해, 지중해 그리고 흑해를 무대로 해상무역이 활발하였다.

물론 이 무역은 전쟁으로 중단되기도 하고 흉작이나 전염병 등과 같은 지역적 재난의 영향을 받았지만 대체로 지속적으로 번성하여 유럽의 번영과 식생활을 풍요롭게 함으로써 한자동맹 도시나 이탈리아의 도시와 같은 새로운 부의 중심지를 형성시켰다.

또한 정기적인 장거리 교역으로 말미암아 어음거래, 신용제도, 국제금융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상업신용과 그에 따른 어음이 존재하였다는 점에서 상인들이 그때까지 생각도 못했던 경제적 환경이 기본적으로 마련될 가능성이 내보였다.>-[강대국의 흥망], p43~p45

이미 눈치 채신 분도 있겠지만 유럽의 분열이 지형적 장벽 때문이라는 폴 케네디의 주장은 그 자신이 바로 뒤에 쓴 강과 바다를 통한 경제적인 수송이 가능했고 이로 인해 경제발전에 혜택을 보았다는 주장과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목재, 곡물 등 부피가 많이 나가는 물품이 수로와 해로로 수송이 가능했으니 병력과 보급품을 실은 함대 혹은 수송선도 마찬가지 혜택을 볼 수 있음은 자명하다. 또한 유럽 내륙에서 군사작전 시에도 수로를 통한 보급품 이송이 강과 운하가 연결된 지역에서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북유럽의 바이킹이 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건조하고 개량해 온 뛰어난 성능의 롱십-바이킹 특유의 배-을 이용해 유럽 해안지방 곳곳은 물론 깊숙한 내륙까지 강을 따라 군대를 이동시켜 침략과 약탈을 재빠르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최종적으론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과 영국 등을 정복해 유럽의 지배적인 세력 중 하나로 대두했다.

다른 글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10세기 유럽 바이킹의 항해능력은 심지어 북아메리카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콜럼버스처럼 대서양을 바로 가로질러 간 것은 아니지만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북아메리카를 경유하는 바이킹의 항로 또한 매우 도전적이고 위험한 경로였다.

이처럼 10세기의 바이킹조차도 유럽의 다양한 해로와 수로를 자유자재로 이용해 군사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데 하물며 근대의 훨씬 발전된 유럽 국가들이 더욱 효과적으로 군사력을 이동시키고 보급을 유지할 수 없다고 볼 이유가 전혀 없다.

중세 이래로 유럽의 수상운송능력은 나날이 발전해 1492년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하였으며 1498년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운하와 도로 등 내륙의 교통 여건 또한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 영국의 강력한 해군력에 제압당해 해로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음에도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가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전유럽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은 유럽 내륙 교통의 발달이 뒷받침되지 않고선 도저히 불가능한 얘기일 것이다.

그러므로 제레드 다이아몬드와 폴 케네디의 주장을 비판없이 받아들여 유럽의 기나긴 분열을 설명하는 유일한 근거가 지리적 조건이었다고 결론을 내려버리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분열을 지속시킨 여러 요인 중 하나로써 지리적인 장애를 꼽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그러나 다른 요인에 대해서도 좀 더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지리적인 장애 이외 다른 어떤 요인이 유럽의 분열을 지속시켰을까?

앞서 분석한 진시황과 이사의 사례야말로 수수께끼의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 역사를 살펴보면 고금을 막론하고 진시황의 <축객령> 혹은 그보다 훨씬 더 강경한 조치가 비일비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강년 회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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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일반 일본 : 귀신숭배와 허튼소리 운영자 13-04-17 3986
177 일반 고우영 삼국지 운영자 13-01-07 4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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