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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2-06 06:14:126689 
신릉군(信陵君)이 조(趙)나라를 구원한 일에 대하여
양승국
일반

신릉군(信陵君)이 조(趙)나라를 구원한 일에 대하여

당순지(唐順之)

사람들은 병부를 도적질한 일을 신릉군의 죄라고 하지만, 나는 이것을 신릉군의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당시 진나라의 포악은 극도에 달했다. 진나라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조나라를 공격해 조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 조나라는 위(魏)나라의 입장이 같아 조나라가 망하면 위나라도 따라서 망할 수밖에 없었다. 조와 위 두 나라는 또한 초(楚), 연(燕), 제(齊) 등의 나라의 입장과 같아 조위 두 나라가 망하면 초연제 세 나라도 같이 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천하에 이보다 더 급한 대세는 없었다. 그럼으로 조나라를 구하는 일은 곧 위나라를 구하는 일과 같으며, 한(韓)나라를 구하는 일은 곧 여섯 나라를 구하는 일이었다. 위나라 병부를 훔쳐 위나라의 근심을 덜어주고, 또한 위라는 한 개의 나라 병력을 빌려 여섯 나라의 재난은 해결했는데, 어찌하여 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신릉군에게는 과연 죄가 없다는 말인가? 이 또한 그렇지 않다. 내가 신릉군을 책망하는 이유는 신릉군의 마음가짐이다. 신릉군은 한갓 일 개 공자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고 위나라에는 엄연히 왕이 있었다. 그런데도 조나라는 위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신릉군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이는 조나라가 위나라에 신릉군이 있다는 점만을 생각하고, 위나라에 왕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은 행동이다. 평원군은 인척관계를 이용하여 신릉군을 부추겼고, 또한 신릉군도 인척관계 때문에 조나라를 구하려고 서둘렀으니, 이는 신릉군이 인척만을 염두에 두고 왕을 염두에 두지 않은 행동이다. 그가 병부를 훔친 행위는 위나라를 위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육국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바로 조나라를 위한 일이었다. 그것도 조나라를 위한 행위였다기 보다는 평원군 개인을 위한 일이었다. 만일 조나라가 위험을 당하지 않고 다른 나라가 당했다면, 위나라와 다섯 나라의 성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신릉군은 결코 구해주지 않았겠고 만약 조나라에 평원군이 없었거나 평원군 역시 신릉군과 인척관계가 아니었다면, 비록 조나라가 망한다 해도 신릉군은 조나라를 분명히 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조나라 왕과 사직의 경중이 평원군의 일보다 중요하지 못했다. 위나라의 사직을 지켜온 군대가, 겨우 신릉군의 한 인척을 위해 사용되었을 뿐이다. 다행히 싸워서 이겼으니 망정이지, 불행하게도 싸워 패배하여 진나라의 포로가 되었다면, 위나라 수백 년간의 사직이 인척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신릉군이 위나라 왕에게 어떻게 사죄했을는지 나도 알 수 없다.

사실 병부를 훔친 일은 후생이 생각해 낸 계략에 여희(如姬)가 이루었다. 후생이 신릉군에게 병부를 훔치라고 가르쳤고, 여희가 신릉군을 위해 왕의 침실에서 병부를 훔쳤으니, 이 두 사람도 신릉군만을 염두에 두고 왕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나는 신릉군이 스스로 계획을 세우면서, 조와 위 두 나라가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다는 점을 위왕에게 강력하게 간해야 했다고 생각한다. 간해도 듣지 않으면 진나라 군사에게 죽으려했던 마음으로 위나라 왕 앞에서 죽었다면, 왕도 깨달았을 것이다. 이렇게 했다면 신릉군은 위나라도 조나라도 저버리지 않고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후생이나 여희 두 사람도 왕을 저버리지 않게 되고 신릉군도 또한 저버린 것이 아니다. 어찌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했는가? 신릉군은 혼인 관계에 있는 조나라만 염두에 두고, 위나라 왕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안으로는 왕이 총애하는 여희가, 밖으로는 이웃 나라가, 그리고 재야에서는 후생이, 신릉군만을 염두에 두고 왕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니 위나라에는 한갓 외로운 왕이 있었을 뿐이었다.

아! 세상에 도가 쇠미해진 이래,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익을 버리고 사당(死黨)의 행동에 익숙해져, 절개를 지키고 나라를 위해 힘쓰는 도리를 잊고 있다. 막중한 권력을 가진 재상은 있으나 위엄있는 왕은 없으며, 개인적인 원한은 있으나 정의를 위한 분노는 없어졌다. 진(秦)나라 사람들은 양후(穰侯)만을 염두에 두고 진왕은 염두에 두지 않았고, 우경(虞卿)은 포의지교(布衣之交)만을 염두에 두고 조나라 왕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왕은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있을 뿐 아무런 권력이 없게 된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신릉군의 죄는 병부를 도적질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위나라와 나머지 다섯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면, 병부를 훔쳤다 해도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조나라와 친척만을 위한 일이었다면, 비록 위나라 왕에게 청하며 병부를 공공연하게 얻었다 하더라도 죄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위나라 왕에게도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병부가 왕의 침실에 숨겨져 있는데, 신릉군이 그것을 어떻게 훔칠 수 있었겠는가? 신릉군이 위나라 왕을 꺼려하지 않고, 직접 여희에게 병부를 가져오도록 한 행위는, 평소에 신릉군은 위왕을 찬찬하지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희가 위나라 왕을 꺼리지 않고 감히 병부를 훔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위나라 왕의 총애를 믿었기 때문이다. 나무가 썩으면 거기에 나무굼벵이가 생기는 법이다. 옛날 임금들은 위에서 권력을 잡고 있으면, 내외 사람들이 감히 그에게 경외심을 잃지 않게 했다. 그랬다면 신릉군이 어찌 조나라와 사사로운 결탁을 할 수 있으며, 조나라는 어찌 사적으로 신릉군에게 구원을 요청할 있으며, 여희는 어찌 신릉군의 은혜에 감복할 수 있었으며, 신릉군이 어찌 여희에게 은혜를 팔 수 있었겠는가? 서리를 밟으면 겨울이 장차 온다고 생각할 수 있는 법인데, 어찌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많은 사람들이 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왕 자신도 명목만 있고 실질적인 권한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신릉군은 신하로써 파당을 짓는 일을 경계해야 했고 위나라 왕은 왕으로써 실권을 잃은 경우를 경계해야 했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노계자(魯季子)가 진나라 대부 원중(原仲)을 법에 맞지 않게 장사를 지냈다‘라고 했고 휘(翬)가 군대를 통솔하였다’라고 했다. 아,아! 성인의 생각은 너무 심원하시다.

당순지(唐順之)

1507년에 태어나서 1560년에 죽었다. 자는 응덕(應德),혹은 의수(義修)이고 호는 형천(荊川)이다. 한족이고 지금의 강소성 상주(常州)인 무진(武進) 출신이다. 명왕조 대유학가, 군사가, 산문가로 왜구를 물리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정덕(正德) 2년 10월 초5일 상주 성내에의 창과항(青果巷) 역서당(易書堂)에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嘉靖) 8년(1529) 과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한림원편수(翰林院編修)에 제수되었고 후에 병부주사(兵部主事)로 옮겼다. 당시 왜구가 명나라의 연해지역을 빈번히 침범해 노략질을 심하게 하자 당순지는 병부랑(兵部郎)이 되어 절강의 군사를 감독하다가 친히 병선을 인솔하여 숭명도(崇明島)의 앞 바다에서 왜구의 함대를 격파했다. 숭명도는 상해 북쪽 양자강 하구의 강심에 있는 면적이 1200㎦에 달하는 중국에서 3번 째로 큰 섬이다. 우첨도어사(右僉都禦史)로 승진하여 순무봉양(巡撫鳳陽)이 되었고 1560년 4월 병인일에 지금의 강소성 남통(南通)인 통주(通州)에서 죽었다. 숭정(崇禎) 때 양문(襄文)이라는 시호를 내라고 학자들은 그를 형천선행(荊川先生)이라고 호칭했다. 가정팔자(嘉靖八子) 중의 한 명이고 귀유광(歸有光)、왕신중(王慎中) 등과 함께 가정삼대가(嘉靖三大家)로 불린다. 무예와 병법에 정통했으며 자기를 살해하려던 자객을 붓을 던져 살해할 정도로 공력이 고강한 무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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