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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4-10 15:49:118095 
[列國志 兵法 ①]부패·내분, 민심 무시한 수도이전으로 몰락한 周왕조
양승국
일반

 

다음은 신동아에 연재된 박동운 선생의 글이다. 열국지 전편에 걸쳐 현대적인 시각에서 분석한 글로 열국지에 대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옮겨 싣는다(관리자)

朴東雲
● 1921년 평북 신의주 출생
● 경성제대 법문학부 졸업
● 고려대, 동국대 등에서 정치학 강의. 한국일보 논설위원, 샘터사 편집위원 역임
● 現 북한연구소 이사
● 저서 : ‘통치술’ ‘민족사상론’ ‘정치병법’ 등

 

춘추전국의 인간관계와 전략전술

고대 중국의 대변혁기였던 춘추전국시대는 혼란과 불안의 시대, 그야말로 난세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상당수 지식인도 어지러운 세상사를 개탄하며 춘추전국시대를 떠올린다. 난세를 헤쳐나간 중국의 인학(人學) 고전 ‘열국지’를 오늘의 시각으로 다시 읽으며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이 시대, 가슴에 새길 교훈을 찾아본다. [편집자]


혼란과불안의 시대를 난세(亂世)라고 한다.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가 대표적이다. 역사적으로는 중국 고대사의 대변혁기에 해당하는 약 500년간의 난세를 가리킨다(B.C. 770~221).

오늘날 한국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은 세상사의 어지러운 현실을 개탄하면서 자주 전국시대를 거론한다. 또 언론사들은 ‘춘추필법(春秋筆法)’을 표방하는데, 이는 나라의 정통성을 수호하면서 대의명분을 밝히고 시비와 선악을 가려나가겠다는 자세의 다짐인 것 같다. 나아가 일반 서민들은 적응해야 할 객관적 정세의 사태발전에 대한 판단이 매우 어렵다는 데서, 가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고 푸념한다. 이른바 ‘불확실성의 시대(Age of Uncertainty)’로 일컬어지는 난세의 답답한 분위기를 적확하게 묘사한 ‘민중의 예술적 표현’이라 할 만하다. ‘uncertainty’는 불안과 불신 그리고 인생의 허무 등 함축적 의미를 지닌 단어다.

난세의 특징은 혼란과 불안의 소용돌이, 즉 위기의 연속이다. 그러니 기성의 권위와 질서, 도덕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처음엔 명분과 체면을 고려하지만, 나중엔 이나마 돌볼 겨를이 없어진다. 살아남기 위한 각박한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곧 ‘춘추’가 ‘전국’으로 이행하는 셈이다.

원래 춘추란 ‘봄’과 ‘가을’의 합성어로, 시간의 경과, 계절의 변화, 시대의 변천 등을 뜻했다.

춘추는 또한 특정한 역사책을 지칭한다. 즉 공자가 편집·수정했다는 노(魯)나라의 국사책이라고 오랫동안 인식돼왔고, 한국의 유학자들도 그렇게 믿어왔다. 이 책은 용어 선택 하나에도 철저하게 시비를 가렸다. ‘춘추필법’이란 성어(成語)가 여기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중국 역사학자(대만해협의 양안에 걸쳐) 가운데 이를 공자의 집필이라고 고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애독서였다고 한다.

시대 변천의 착잡한 전주곡

역사적으로 춘추시대는 주(周) 왕조의 평왕(平王)이 수도를 섬서성에서 하남성으로 옮긴 소위 ‘동천(東遷)’ 이후, 국세(國勢)가 급전직하로 추락해 멸망으로 치닫게 된 시기를 말한다.

이어진 전국시대는, 한족(漢族) 사회에서 구심점이 없어진 후 약육강식이 벌어지고 그것이 7대 강국간의 경쟁적 상극(相剋)으로 정리됐다가 끝내 진(秦)왕조의 시황제(始皇帝)에 의해 이른바 ‘천하통일’이 달성되기까지 피비린내 나는 전쟁시기를 가리킨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인권이 크게 유린당해 인명이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시대는 한족의 정신문명이 훌륭하게 다져진 시기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공자와 맹자, 노자, 장자, 손자, 오자, 한비자 등이 모두 이 시대 사람이다. 그후 각 시대에 출현한 것은 이들 사상의 계승 또는 변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동시에 과학기술 분야의 발명·발견도 눈부셨다. 광석에서 쇠붙이를 골라내는 야금술과 철제공구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도 춘추시대 초기의 일이다.

그러한 발전의 비결은 부단한 전란의 와중에서도 다양한 경쟁 주체가 존재했으며, 그들간에 능력 본위로 인재를 모으려는 경쟁의식과 시장경제적 사고활동이 가동한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개인미신 독재체제가 ‘가문 조작’으로 세습전제를 일삼고, ‘계급투쟁’을 표방해 노동귀족이 횡행하는 한편에 수백만이 굶어죽었으나 단 한 사람의 국제적 학자도 나오지 못한 북한의 사례와는 판이하다.

그런데 춘추·전국시대에 역사적 행동단위였던 제후의 나라들은 흔히 ‘동주열국(東周列國)’이라 통칭된다. 이러한 명칭은 주 왕조가 비록 동쪽으로 천도한 후 멸망했으나, 유교적 정통성의 표식인 종주권의 구심점다운 지위를 보유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다지 설득력 있는 칭호로 여겨지지 않는다.

한편으론 역사소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의 성립 경위를 보면, 원래 명(明)나라 사람 여소어(余邵魚)가 역사책에 민간설화를 섞어서 ‘열국지전(列國志傳)’을 썼고, 그것을 명말(明末)의 풍몽룡(馮夢龍)이 정정해 ‘신열국지’로 고쳤으며, 청(淸)나라 때의 채원방(蔡元放)이 손질해 ‘동주열국지’로 펴냈다고 한다.

필자는 그러한 문학작품의 묘사를 참고하지만, 난세의 처세술과 전략·전술의 논거로는 정사(正史)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중시했다. 아울러 현대의 관련 연구를 섭렵하고자 노력했으나 한계를 느꼈다.


난세의 최우선 과제는 ‘살아남기’다. 싸울 바엔 이겨야 하고, 승산 없는 싸움은 애당초 하지 말아야 한다. 양면작전(兩面作戰)은 패망의 길이다. 더구나 우유부단이나 무지몽매로 싸워보지도 않고 굴복해 망국노 신세를 자초하는 짓은 어불성설이다. 난세에 살아남으려면 비스마르크의 갈파대로 ‘자기의 경험뿐만 아니라 타인의 경험에서도 교훈을 찾아낼 줄 알아야’ 한다.

유왕(幽王)의 봉화 장난과 최후

주 왕조는 초창기에 섬서성의 서안(西安) 부근을 본거지로 삼고 광대한 중원(中原) 일대를 지배하면서 위세가 대단했다. 왕조 창건자와 역대 군주들이 현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12대 유왕(幽王)에 이르러 암매한 폭군이 행패를 일삼다 급기야 왕조가 일단 멸망하고 말았다. 유왕 자신도 전란의 와중에 살해당했다. 그의 아들인 평왕이 등극해 수도를 하남성 낙양(洛陽)으로 이전했으니, 그후가 동주이고, 곧 춘추·전국시대다. 유왕까지는 서주(西周)라 부른다.

유명한 영국인 로렌스(Lawrence of the Arabs)가 전제군주들을 비교연구한 것에 따르면 현명한 군주와 암매한 군주 의 차이는 지극히 간단명료하다. 즉 현군(賢君)은 자기의 행복이 ‘타인들의 호의’에 의존한다는 도리를 헤아린다. 반대로 암군(暗君)은 소위 ‘가문’이 좋아서 특권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든지, 또는 혼자 잘나서 호화방탕을 일삼아도 된다는 식으로 착각하다 패망한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의 유왕이 그러한 유형의 암군이었다.

유왕은 즉위 4년 만에 군대를 동원, 제후의 나라인 포(褒)국을 공격했다.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본때를 보여준다는 것이었는데, 원래 멸망할 통치자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일 벌이기를 좋아한다. 이에 공포에 질린 포후가 평화를 애걸하면서 궁중에 있던 보물과 미인들을 모조리 바쳤는데, 그중에 천하절색인 포사가 있었다. 유왕은 열일곱 살의 미인 포사를 얻자 바로 매료됐다. 포사는 2년 후 아들을 낳았는데 백복(伯服)이라 이름지었다.

유왕은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포사를 왕후로,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앞서 유왕은 신후(申后)를 왕비로, 그 소생인 의구(宜臼)를 태자로 세웠는데, 모두 폐하고 내쫓다시피 했다. 이에 격분한 왕후의 부친, 즉 의구의 외조부인 신후(申侯)가 이 일로 진언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고 도리어 유왕의 미움을 샀다.

새 왕후 포사는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자라 기구한 운명으로 웃음을 잃은 터였다. 유왕은 사랑하는 왕후에게 웃음을 되찾아주려고 여러모로 애썼으나 별무효과였다. 이에 눈치 빠른 간신 석부(石父)가 유왕에게 기발한 아이디어를 진언했다.

예나 지금이나 간신의 첫째 무기는 아첨이고, 그 전제조건은 통치자의 암매(暗昧)다. 석부의 착상에 의하면, 유년기의 불행 때문에 웃음을 잃은 포사를 웃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기발한 부조리로 세상 사람들을 당황망조(唐慌罔措)케 하는 엉뚱한 일을 벌이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론 국왕이 무사태평을 누리면서도 봉화(烽火)를 올려 제후들을 급거 소집한 뒤 그들로 하여금 ‘만화적 풍경’을 연출케 한다는 것.

유왕은 석부의 진언을 채택, 한 여인을 웃게 하려고 비상시가 아닌 데도 봉화를 올리게 했다. 깜짝 놀란 각지의 제후들은 급거 기병과 보병을 거느리고 국왕을 수호하기 위해 서울로 달려왔으나 와보니 아무 일도 없었다. 이들은 실망과 허탈과 불신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한편 제후들이 허둥지둥하며 당황하는 장면을 바라보던 포사가 드디어 웃음을 지었고, 포사의 웃음을 본 유왕은 크게 기뻐했으며 간신에게 큰 상을 내렸다. 공사(公事)를 그르친 시초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포사의 얼굴에서 다시 웃음이 사라지자 유왕은 더 크게, 더 빈번히 봉화를 올리게 했다. 제후의 군대가 더 많이 모여들었으나 역시 허사였다. 속임수가 거듭되자 제후들의 국왕에 대한 불신이 커져만 갔다. 이솝(Aesop)의 우화를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포사의 미소도 잠깐으로 그쳤다. 한편 신후는 왕비였다가 쫓겨 돌아온 딸과 태자였던 외손자를 받아들이면서 국왕에 대한 불만과 반감의 골이 깊어만 갔다.

유왕은 새 구상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대군을 준비하되, 작전계획이 작성되는 대로 신후를 정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정의 작전계획 수립이란 게 새어나가기 쉽고 시간도 더디게 마련인 법. 전투에 아마추어인 문관들의 어설픈 발언이 잦고, 관여자가 많기 때문이다. 또 보고나 회의, 통달 과정이 번거롭고 스피치 라이터 선정 등 거쳐야 할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보가 비밀 루트를 통해 신후의 진영에 속속 전달됐다.


신후와 서융군의 선제공격

그러면 유왕군의 침공에 맞설 신후군의 대응책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병력 면에서 신후군은 유왕군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세였다. 게다가 전쟁이 장기화하면 유왕을 불신하는 제후들도 결국은 국왕인 종가를 편들어주는 추세로 흐르게 될 터였다.

하지만 유왕군의 약점도 허다했다. 그들은 즉각 동원이 어려워 군사행동의 지체가 불가피했다. 근위군이라 해도 폭군의 행패 아래 군기가 문란하고 사기가 추락했으며 방비가 산만했다. 결정적으로 제후들이 유왕을 믿지 않았다.

이에 비해 신후군은 단결이 공고했고, 소수 병력의 이점을 살려 즉각 동원과 신속 투입이 가능했다. 게다가 이웃 이민족 서융(西戎)군을 동맹군으로 끌어들일 계획도 갖고 있었다. 섬서성 서부 인접한 곳에 거주하던 서융군은 유목민답게 상재전장(常在戰場)의 태세를 갖췄으며 즉각 투입이 가능했다.

결국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전략·전술의 대지침으로 ‘선발제인(先發制人)’ 전법이 채택됐다. 먼저 행동하며 선수를 써서 주도권을 장악, 적군으로 하여금 여기저기 대응하기에 바쁘게 만들었다가 간단히 섬멸한다는 것이다. 전투의 시간과 장소를 아군 마음대로 선택, 적에게 불의의 기습을 가하는 이점을 살리겠다는 계산이다.

나아가 승리한 뒤에는 신속히 제후들에게 연락해 사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촉구하며, 공동 추대로 원래의 태자 의구를 새 국왕으로 즉위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외래 세력인 서융군은 그들이 노획한 전리품과 함께 철수케 한다. 이러한 정략(政略)은 일견 근사했으나 끌어들인 외국 군대는 간단히 물러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급기야 군사행동이 벌어지고 보니 유왕군의 붕괴는 예상외로 빨랐다. 물론 유왕은 봉화를 올렸지만, 제후들은 ‘두 번 속지 세 번은 안 속는다’며 어느 누구도 구원하러 달려오지 않았다. 근위군 또한 난폭한 독재자를 위해 개죽음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뿔뿔이 흩어져 살길을 찾아 탈출하느라 바빴다. 서융군은 쉽게 궁전을 점령하고는 유왕과 포사가 낳은 태자 백복을 무참히 죽였다. 많은 재물과 귀중품을 약탈하고 포사까지 전리품이라며 납치했다. 그러고는 방화를 일삼아 궁전 일대를 폐허로 만들었다. 나중에는 승리감에 도취해 궁을 떠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신후가 제후들에게 통첩을 보내 합세해서 서융군을 몰아내자고 제의했다. 그래서 진(晋)·위(衛)·진(秦)·정(鄭) 등 4개 제후국 군대가 힘을 모아 가까스로 서융군을 축출했다. 신후와 여러 제후가 상의하여 원래의 태자인 의구를 새 국왕으로 추대했으니, 그가 곧 평왕이다.

종법제와 분봉제

하지만 이질적 문화를 가진 다른 종족의 무력, 즉 서융군의 침공과 궁전 유린은 결코 일시적 사변이나 군주의 교체를 가져온 단순한 전란이 아니었다. 실로 그 충격은 중국인의 문화생활을 규제해온 통일천하 질서에 대한 중대 타격이며, 제도면의 변혁을 촉진하는 일대 전환으로 번져나간 것이다.

공자가 춘추시대의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 옛날 황금시대의 기축(機軸)사상과 생활규범으로 되돌아가자며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가르친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하지만 그 변란의 부정적 영향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중국을 비롯, 한국을 포함한 세칭 유교문화권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원래 주 왕조의 국가 질서를 떠받친 두 개의 큰 기둥은 종법제(宗法制)와 분봉제(分封制)였다. 이 제도적 기틀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뿐 아니라, 멀리 한반도의 가족제도에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종법제란 부계가장제와 장자상속권을 핵심으로 가족 성원들의 신분을 구분해 그 고하(高下)와 친소(親疏)를 차별하는 가족제도 규범이다. 이 질서체계에서는 대종(大宗·본가 또는 종가)과 소종(小宗·분가)의 구별이 엄격하다. 대종은 시조 아래 장자 장손 또는 그 정통 후대로 이어지는 가부장이 재산권·상속권을 장악한다. 그 특권으로 관혼상제의 주재권을 보유하며, 나아가 일족의 유사시에는 동원·명령권까지 행사한다.

소종은 장자 외의 아들과 첩의 소생 내지 그 후대들의 계통이다. 소종의 내부에서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시 대종과 소종의 구별이 진행된다.

이러한 가족제도의 질서체계는 왕가로부터 제후 및 대부(大夫) 내지 사인(士人), 더 내려가서 서민으로 뻗어가는데, 그 복잡다단한 계통의 정점에 국왕이나 황제, 즉 최고통치자가 있다. 그래서 종법제의 붕괴는 군주의 권위상실에서 비롯된다. 고대 중국의 경우 종법제는 춘추시대에 약화되다 전국시대에 보편적으로 이완되고 말았다. 그후 내실 없이 형식화된 채 명분상 위선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주변 국가의 민법 한구석이라든지, 선량하고 소박한 서민들의 가족생활에서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분봉제란 국왕의 자제들과 특출한 공신에게 영토를 나눠주고 세습적으로 통치권을 행사케 하면서 제후의 신분을 부여하는 제도다. 교통·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광대한 천하를 다스리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제후들은 특권을 누리는 대신 조정에 공물을 바치고, 천자가 주재하는 제사 등 중대 행사나 회의에 참가한다. 대공사의 징용에도 협력해야 하고, 특히 전시에는 군대를 이끌고 참여해 천자의 지휘를 받을 의무가 있었다. 한국은 분봉제가 아닌 중앙집권 관료제였다.


그러한 통치제도 밑에서 태평성세라면 이른바 ‘하늘 아래 왕토 아닌 곳이 없고, 어디를 가나 왕신 아닌 사람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고 할 정도로 정세가 안정됐다. 그러나 이러한 국세도 춘추시대에 흩어지더니 전국시대엔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난세가 도래한 것이다.

평왕의 수도 이전

새로 즉위한 평왕은 옛 궁전의 폐허를 보고는 처량한 감회를 금치 못했다. 가슴을 때리는 통탄과 부조리로 얼룩진 과거사의 기억들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부왕(父王)은 맞아죽고, 포사는 끌려가고, 평왕 자신이 어린 시절 모친인 왕후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던 온갖 보물은 서융군에게 약탈당했다. 웅장했던 궁전은 깨진 기왓장만 남긴 채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평왕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이 서울 호경(鎬京·오늘의 섬서성 장안현)엔 애착을 둘 수 없다… 그러니 수도를 이전해야 하는데, 천도(遷都)의 목적지는 일찍이 정을 두었던 낙읍(洛邑·하남성 낙양시)이다. 한마디로 동천(東遷)이다’라고.

그러나 평왕의 수도 이전은 개인의 감상적 동기에서 출발했다. 당시의 수도권, 즉 관중(關中) 인민들의 동의나 납득이 없었고, 게다가 제후나 중신들과 진지하게 토의하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천도 이후 중국은 왕조의 쇠퇴와 민생의 절망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동주열국시대는 춘추전국시대라고 불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심과 안보였다. 당시의 전통적 수도권인 관중의 인민들은 평왕이 수도 이전을 한다고 하자 이른바 ‘기민(棄民)의식’으로 몸을 떨었다. 군주가 자기들을 버리고 떠나려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한 배신감과 분노의 정서는 급기야 ‘비협력’을 만연시켰고, 나중에는 반항과 보복심리로 번졌다. 게다가 수비대로 남은 군인들마저 왕실이 떠나간 땅을 사수하려 들지 않았다. 이래저래 관중은 당시에 퍽 이색적인 제후였던 진(秦)국의 근거지로 변했다. 후일 진군은 낙양을 점령하고 주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 대목에서 또 하나 떠올려볼 만한 일이 있다. 기원전 200년 무렵의 일로, 한(漢) 왕조의 창건자 유방(劉邦)이 관중을 근거지로 활용해 항우(項羽)를 패망시키고 천하통일을 이룩하자 정도(定都)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중론은 결국 관중이냐 낙양이냐 하는 양자택일로 집약됐다. 이때 루경(婁敬) 등 소수의 식자가 관중을 주장했다. 안보에 유리하고 근거지로서 탁월한 조건을 갖췄으며 민심수습도 순조로울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들은 전통적 수도권의 거대한 인구를 상기시키면서 그 민심을 얻기 위해 덕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다수파는 낙양을 지지했다. 그들은 각 지방의 제후들이 수도 왕궁으로 찾아드는 거리상의 평준화 따위를 강조했다. 당시 대신들 중엔 관동(關東) 출신이 많았는데, 이렇게 보면 다수 의견은 애향심이니 지역감정에다 근시안적 이해타산으로부터 출발한 셈이다. 부질없는 명분을 꾸미고는 낙양을 선택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유방은 끝으로 자신이 가장 존중한 참모장 장량(張良)의 견해를 물었다. 그러자 장량은 루경의 주장대로 관중이 좋겠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안보와 민심인데, 왜 하필이면 관중 근거지를 버리고 방어하기 곤란한 사면수적(四面受敵)의 지형을 가진 낙양으로 천도하겠냐는 것이었다. 유방은 이에 동의했다.

현대의 인문지리학에서도 인간의 정치·경제·문화활동과 수도 문제의 관련을 지극히 중시하며 특히 안보태세와 의식형태에 유의한다. 일반적으로 수도는 정치의 중심이고 경제의 핵심이며 문화의 보금자리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수호되고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마땅하며 협소한 이해타산에 치우칠 바가 아니라고 한다. 숱한 토론을 거쳐 여론이 납득할 만한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도리 때문에 고대 중국의 유방조차 그토록 신중을 기하면서 언로(言路)를 개방한 것이다.

마침내 한 왕조의 수도는 관중의 함양(咸陽)으로 낙착됐는데, 건의한 공로가 크다고 하여 루경은 낭중(郎中)으로 임명됐다. 왕가의 성씨도 하사했다(루경을 유경(劉敬)으로 고쳐 불렀다).

유방이 주는 교훈

다시 앞서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평왕의 수도 이전으로 주 왕조의 운명은 재기나 부흥이 아니라 쇠퇴와 몰락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 꼴이 됐다. 형식적으로는 서주의 멸망이 동주의 개막으로 이어졌지만 후자는 첫 걸음부터 도피적인 방향을 설정, 일을 그르친 것이다. 왕조 창시(創始)의 전통적 근거지를 포기하다시피 하고 진이라는 이색적인 제후국에 내맡겼으니 돌이킬 수 없는 오류라 하겠다.

하지만 중국인은 실패와 좌절로 얼룩진 처량한 운명이라도 자포자기하지 않고 수용하는 인내심과 포용력을 가졌다. 대세에 순응하면서도 거꾸로 섭취·동화해 강화할 줄 안다. 난세를 살아남아 억세게 자라는 그 슬기로운 생명력의 비결과 경험은 두고두고 우리의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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