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각이냐, 대반격이냐… 보시라이 운명 기로에

오관철 특파원 okc@kyunghyang.com

2007년 12월 당시 중국 상무부장이던 보시라이(薄熙來·63)는 총리 후보로 거론되다가 충칭(重慶)시 서기로 좌천됐다. 충칭이 속한 서남부는 중국에서 변방에 속한다. 절치부심하며 중앙 정계 복귀를 노려온 그는 올가을 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발표될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것이란 설이 유력했다.

그러나 최측근인 왕리쥔(王立軍·53) 충칭 부시장의 미국 망명 시도로 정치적 위기에 몰려있다. 그의 상무위원 진입 여부는 공산당 주요 계파인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과 태자당(공산당 고위 간부 자제) 간 세력구도가 4 대 3이 되느냐 3 대 4가 되느냐의 분기점이란 점에서 중요하다.

왕리쥔이 국가안전부에 체포된 뒤에도 공식 일정을 수행하고 있는 보시라이는 지난 12일 충칭시 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주요한 발언을 내놓은 것으로 14일 확인됐다. 중경일보(重慶日報) 등 현지 언론들은 보시라이가 과학적 발전 추진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과학적 발전관은 후진타오(胡錦濤·70) 주석의 국가 경영철학으로, 성장과 분배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공정한 분배론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공청단과 마찰을 빚어온 보시라이가 후 주석에게 코드를 맞추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여론을 통해 윗선 지도자와 대결을 마다하지 않는 정치인으로 여겨지던 보시라이도 위기 앞에서 납작 엎드린 셈이다.

보시라이는 자신의 정치적 무게를 은연중 내비치고 있다. 보시라이가 14군 사령부를 방문하고 군 박물관 등을 찾은 것은 군부 내 지지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려는 시도로 해석됐다. 그의 장인은 인민해방군 원수를 지낸 군부의 실력자였다.

그러나 보시라이에 대한 당 차원의 진상조사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공산당 관계자는 13일 파이낸셜타임스에 “충칭의 무장경찰 병력을 300㎞ 떨어진 청두(成都)까지 보낸 것은 심각한 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당 차원에서 그의 비리 파일을 축적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왕샹웨이(王向偉)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중국어판 칼럼에서 “최근 중국 고위공직자가 베이징에서 친구와 식사하다 문자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왕리쥔이 보시라이의 불법행위를 자세하게 기록해 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에 보냈다는 내용이었다”고 밝혔다. 일부 분석가들은 보시라이가 왕리쥔의 미국 망명 시도를 조국에 대한 배신행위로 몰아가면서 탈출을 시도할 것이란 관측도 내놓고 있지만 수용될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물론 보시라이의 실각을 단정하기엔 이르다는 관측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의 나이를 감안할 때 올가을은 임기 5년의 상무위원 진입을 위한 마지막 기회란 점에서 사생결단의 자세로 나올 수도 있다. 만약 그가 예상대로 실각한다면 공청단파인 왕양(汪洋·57) 광둥(廣東)성 서기가 상무위원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상무위원 9명 가운데 공청단이 4명으로 태자당(3명)보다 우위를 점하게 된다.

보시라이가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면 최고 사정기관인 중앙기율검사위를 맡을 것이란 예측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청단으로서는 그를 쳐낼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기도 하다. 보시라이가 천시퉁(陳希同) 전 베이징시 서기,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시 서기 등과 함께 부패 혐의로 숙청된 불운한 정치인으로 공산당 역사에 기록될지, 기로에 서 있다.

시진핑, 보시라이 축출 암묵적 동의했나?

ㆍ중국 총리 자리 노리자 태자당·공청단 물밑 합의설

시진핑(習近平·59) 중국 국가부주석이 보시라이(薄熙來·63) 충칭(重慶)시 서기의 정치적 낙마에 사실상 동의했다는 관측이 베이징 정가에서 제기되고 있다. 왕리쥔(王立軍·53) 충칭시 부시장의 미국 망명시도 파문에는 보시라이를 견제하기 위한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과 태자당(공산당 고위 간부 출신 자제) 세력 사이의 암묵적 합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내용이다.

베이징 외교소식통은 13일 “후진타오 주석의 정치기반인 공청단과 시진핑을 중심으로 한 태자당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왕리쥔 파문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보시라이 왕따설’로, 그를 주저앉히기 위해 양 세력이 최측근인 왕리쥔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시 부주석은 보시라이와 같은 범태자당 세력이나 보시라이를 부담스러워해 반대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13일 “시 부주석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면서 “그러나 일부 분석가들은 보시라이의 야망이 크다는 점에서 시 부주석이 불편해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보시라이에 대한 공격은 상하이방(上海幇)으로 분류되는 허궈창(賀國强) 공산당 기율검사위 서기(서열 8위)가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보시라이는 충칭시에서 허궈창이 발탁한 인물을 대거 숙청하면서 오래전부터 그의 불만을 샀다는 얘기가 있었다.

공청단이 보시라이의 대중적이고 튀는 정치행태와 홍색 캠페인(공산당의 혁명가요 부르기 등 좌파운동)을 탐탁지 않게 여겨왔다는 것도 정설이다.

베이징 정가에서는 지난해 10월쯤 보시라이의 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에 계파 간 합의가 어느 정도 이뤄졌으나 올해 들어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말도 흘러나온다. 한 소식통은 “보시라이가 총리 자리를 노리면서 집중적인 견제를 받고 위기에 몰렸다”고 말했다. 공청단파는 물론 태자당 세력도 힘의 균형을 깨려는 보시라이의 야망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보시라이는 중국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대중적 접촉을 즐기며 중국 정계의 록스타로 불려왔다.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저널리즘 석사과정을 마쳤고 기자회견을 하면 2시간을 넘기는 적도 있다.

중국의 반체제 사이트인 보쉰닷컴은 전·현직 국가 지도부가 보시라이에 대한 감찰 조사 후 조속히 결론을 내리자는 데 견해를 같이했다고 13일 보도했다. 6년 전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서기가 숙청당할 때도 각계 원로의 동의와 중앙상무위원회의 표결을 거쳤다.

그러나 태자당 세력은 이익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보시라이 카드를 살려두려 할 경우 재기가 가능하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홍콩 명보(明報)는 보시라이가 지난 9일 밤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했다고 보도해 중앙 정치인들을 만나 구명운동을 벌였을 가능성을 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