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오신 사장님이 오늘 귀국을 하셨습니다. 비행기가 상해에서 11시 출발. 통상적으로 출발 1 시간 전서부터 소속을 밝아야 합니다. 거기에 아침도 같이 먹고 필요한 물건도 좀 살 겸해서...

그 분이 묵고 있는 포동(浦東)지역의 샹그리라호텔에서 저의 거처까지는 자동차로 35-40분 정도의 거리... 행여 차가 막히지 않을까 싶어 아침 7시에 출발, 호텔에서 그 분을 픽업하면 8시 정도, 공항에 도착하면 9시 정도 되리라 예상을 했는데...

하이고야, 막상 아침 7시에 출발을 하니 평소같으면 자동차가 빽빽히 들어차 오도가도 못할 정도로 막혔던 길이 오늘 뻥 ! 뚫려 있습니다. 불과 15분만에 호텔에 도착한 것이지요.

사장님은 호텔로비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중국인친구도 배웅 나왔다고 해서 공항까지 동행하려고 한다,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럭저럭 기다리는 동안 시간을 죽일 수 있었던 거지요. 안 그랬으면 인적도 드문 공항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떼우고 있었을텐데...

너무 아침 일찍이라 그런지 사장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약간 피곤한 것 같았어요. 마침 같은 자리에 있는 서양사람 하나가 종이컵으로 무언가 홀짝홀짝 마시고 있더군요. 커피인 것 같아서리... 어디에 커피가 있냐고 물었지요. 손가락으로 커피있는 장소를 가르쳐 주네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커피를 두 잔 탔습니다. 종이컵에 커피 믹스를 넣은 다음, 뜨거운 물을 붓고, 그리고는 다시 우유를 타고.... 설탕 두어 봉지를 집어 들고 막상 자리에 오니... 아차 ! 설탕을 넣고 휘휘 저을만한 도구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지요.

같은 자리에 있던 그 서양사람, 눈치 참 빨라요. 자기가 커피를 좀더 마시려고 하는데 같이 갖다 주겠다네요. 사양하는 저의 말보다 그의 동작이 더 빨랐습니다. 이렇게 해서리 결국 그는 우리들의 말동무가 되었습니다.

제가 지금 사는 동네도 외국인들이 많은 동네인데... 정말 상해는 국제도시입니다.  북미에서 왔는지 아니면 유럽에서는 왔는지 모르겠지만 노랑머리에 눈 파란 사람들, 드러나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인들, 깔끔한 듯 은근히 지저분해 보이는 일본인들(특히 중년남성들-한국인들이 옆에 뒤에 머리를 깔끔하게 치는데 반해 일본인들은 더부룩한 편임. 그래서 그런 것 같음), 그리고 스스로 밝히기 전까지는 알기 어려운 대만, 홍콩사람들, 화교들... 하지만, 비동양권 사람하고는 서로 얼굴 맞대고 대화하기는 이번 처음이었습니다. 길거리에서 가끔씩 보는 서양사람들한테는 별 관심이 없던 저지만, 이 아저씨는 우리에게 작게나마 호의를 베풀었으니...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의례 하는 이야기들... 당신은 무슨 일을 해요, 서부터 시작해서 중국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 까지...

드뎌 그 서양 사람의 모든 것(?)이 한 꺼풀 두 꺼풀 벗겨지기 시작합니다. 국적은 미국이고, 이스트만 코닥에서 일한다고 하는군요. 코닥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한편으로는 반가운 생각도 듭니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요. 아버진 카메라는 일제였지만(소시적에 일제카메라 좀 많아졌습니까 ? 요즘이야 디카가 대중화되어서 국산화비율이 높아졌지만..) 필름만큼은 코닥을 고집하셨지요.

제 아버지는 “피-움” 이라고까지 발음하시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F 발음만큼은 확실히... 그 덕에 저도 F발음 때문에 고생은 안했고, 급기야는 대학교에서 F학점을 한번 받았습니다. 범주해운에서 근무할 때 아버지의 필름에 대한 사랑이야기, 거래처인 후지필름에다가는 절대 이야기 안 했습니다.(후지필름에 바친 충성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여름이 다가오자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필름값 할인하는데, 필름 좀 뿌려달라고.... 한 200통 넘게 사내에 뿌렸지요)

뭘 담당하냐고 물으니, 자기는 구매담당이라고 합니다. 필름제조기계의 부품 등을 구입한다고 하는군요. 중국에 얼마나 있을 거냐고 물으니 다음 2주일은 더 머물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프랑스로 떠난다고 하는군요. 그 이후에는 귀국했다가 다시 멕시코로... 이야 ~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한편으로는 억수루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억수루 부러운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까 뉴욕에서 차로 8시간 거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손자가 보고 싶다고 하는군요. 겨우 55살 밖에 안 된 아저씨가 벌써 손자가 있냐고 물으니 벌써 4살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자기도 늙었다고 농담을 하는군요.

우리는 그에게 명함을 건넸지만, 그 사람은 자기 명함을 자기 방에다 두고 나왔다고 하면서 자기 이름을 적어줍니다. Larry Pearcy, 그의 이름이랍니다.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면서 전 그에게서 아주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말이 억수루 느리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말이 참 느리다고...

외국인들하고 대화를 많이 하다보니 말이 자연적으로 느려지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자기는 할 줄 아는 언어가 영어 하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표정에는 다소 미안한 듯한 감정이 배어있는 듯 합니다. 외국인들하고 대화를 함에 있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말을 느리게 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이...

저는 저대로 이야기를 했지요. 당신네 나라 사람들의 말은 너무 빠르고 “R"발음이 너무 심하다, t하고 d까지 r하고 비슷하게 발음하기 때문에 참 알아듣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영국 영어를 공부한다고...(물론 지금은 영어는 물론 중국어공부도 안 하고 맨날 뺀질뺀질 놀고만 있지만...) 영국식 영어가 정통영어고, 사실 미국영어는 비주류....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괜히 자존심 건드릴 것 같은 생각도 들고, 혀도 짧아서 포기... 기회가 되면 외국어를 공부해 보고 싶다길래, 저는 주저없이 "Korean"을 배워보는 것이 좋을 거라고 했습니다.

대화 도중에 이 처음 보는 이방인은 무언가 사람을 흡입하는 능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훈련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든간에 말입니다. 물론 우리 한국인도 친절합니다. 그렇지만 어쩌면 우리 한국인들은 여유가 없어 보인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 아저씨는 남을 편안하고 여유롭게 해주는 재주가 있는 아저씨 같았습니다. 미국인들이라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 아저씨만 그런 것인지....

약간 머리가 벗겨지고 수염이 더부룩한 이 젊은 할아버지한테서는 조지 부시의 어리석은 광신성도, 럼즈펠드의 음흉한 미소도, 라이스의 표독스러움도 없었습니다. 그저 조용하고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었지요. 그 아저씨의 미소에서 어느 무고한 이라크인의 시체 옆에서 환하게 미소 짓던 그 미친 年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불과 30분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최소한 그 아저씨는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저한테는 “양키”라고 불리우는 신세는 면했으니까요.

대화 내내 사장님은 그 아저씨의 친절한 배려와 저의 어ㄴ-ㅜ-ㄹ하고도 더, 더, 더, 더듬는 영어실력을 경탄해 마지않는 표정이십니다...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