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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를 저술한 햇수[司馬遷作史年歲]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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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를 저술한 햇수[司馬遷作史年歲]에 대하여

사마천(司馬遷)①은 임안(任安)에게 답하는 편지②에서 “몸이 궁형을 당했으면서도 몰래 참으며 구차하게 살아 온 이유는 죽고 나서 문채(文采)가 후세에 드러나지 않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③라고 하였다. 마침내 논자들은 사마천이 이릉(李陵)④)으로 인한 재난⑤을 만나 비로소 발분하여『사기(史記)』⑥)를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의 자서전격인『태사공자서』에서, 아버지 사마담(司馬談)⑦이 죽음에 임하여 사마천에게 자기가 못다 이룬 역대의 역사를 논하고 저술하라고 유언했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 후에 사마천이 태사령(太史令)⑧이 되어 곧 석실금궤(石室金匱)⑨의 책을 모았다고 했다. 태사령이 된 지 5년 후인 태초(太初) 원년(B.C. 104)에 정삭(正朔; 曆法)을 고쳤다.⑩ 바로 공자(孔子)의 『춘추(春秋)』⑪ 이후 5백 년이 되는 때에 해당한다.⑫ 이에 그 문장을 논술하고 차례를 정하였는데, 마침 초고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때에 이릉으로 인한 재난을 만나니, 그것이 완성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겼으므로 형을 받으면서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하였다.⑬ 이는 사마천이 태사령이 되면서 바로 사서를 편찬하였다는 것인데, 5년이 되는 해가 태초 원년이므로 처음 태사령이 된 때는 곧 원봉(元封) 2년(B.C. 109)이다. 원봉 2년에서 천한(天漢) 2년(B.C. 99) 이릉으로 인한 재난을 당할 때까지는 이미 10년이 흘렀다. 또, 임안에게 답하는 편지 가운데에서 ‘그대 임안은 생사를 헤아릴 수 없는 죄를 품었으니, 장차 늦겨울이 다가와⑭ 갑자기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당하게 되면 내 뜻을 끝내 전할 수 없을까 염려되므로 저간의 사정을 알려드립니다.’⑮라고 하였다.
정화(征和) 2년 기원전 92년, 무고(巫蠱)의 란⑯)을 일으킨 강충(江充)⑰이 그 주범으로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⑱를 모함하여 함정에 빠뜨렸다. 궁지에 몰린 태자가 강충을 죽이고 태자 궁의 군사를 동원하여 란을 일으켜 조정의 군사들과 싸웠다. 그때 임안은 황제의 특명으로 사자가 되어 북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태자가 수레에 서서 북군이 지키는 남문 밖에서 임안을 불러 부절을 주고 군사를 출동시키라고 했다. 임안이 부절을 받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성문을 닫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무제는 임안이 거짓으로 부절을 받았다가 태자에게 붙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임안이 북군의 돈을 관리하는 말단 관리의 부정을 적발하여 태형을 쳐서 모욕을 준 일이 발생했다. 그 관리가 서장을 황제에게 올려 임안이 태자에게 부절을 받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고했다.
「원컨대 저에게 정예한 군사를 주시기 바랍니다.」
서장을 받아 읽어 본 황제가 말했다.
「이는 세상 물정에 노련한 관리로다! 거병한 태자를 보고 앉아서 승패를 관망하다가 이기는 쪽을 따르려고 하는 두 가지 마음을 품고 있는 자로다. 임안은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음에도 내가 항상 살려주었다. 오늘 다시 속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참으로 불충한 자로다!」
무제가 임안을 체포하여 옥리에게 넘겨 사형에 처하게 했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천한 2년에서 임안이 처형되는 정화 2년까지는 8년의 시차가 있다. 사마천이『사기』를 지은 기간을 모두 계산해 보면 전후로 모두 18년이다. 임안이 죽은 뒤에도 사마천은 6년을 더 살아 기원전 86년까지 생존했음으로 당시로써는 방대한 분량의 서책에 대한 교정작업을 했을 것으로 미루어 보아 책이 완성되는 데에는 모두 20여 년이 걸렸을 것이다. 그는 자서전에 해당하는 『태사공자서』편의 끝에 ‘황제(黃帝)로 시작하여 태초 연간(B.C. 104~101)에 이르러 끝냈다’라고 했는데, 이는 곧 사기가 서술한 역사의 기간이 태초 연간에서 끝난다는 뜻이지, 『사기』의 집필이 태초 연간에 이르러서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이연수(李延壽)⑲가『남사(南史)』와 『북사(北史)』를 짓는 데 모두 17년이 걸렸고, 구양수(歐陽修)와 송기(宋祁)가 『신당서(新唐書)』를 수찬하는 데 역시 17년이 걸렸으며, 사마광(司馬光)이『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짓는데 모두 19년이 걸렸으니, 사마천이『사기』를 지은 세월은 다시 그것을 초과한다. 반고(班固)⑳가 『한서(漢書)』를 지은 기간과 함께 아울러 살펴보면, 역사적 사건을 엮어 바로잡는 일이란, 잠시 동안의 글쓰기 정도로 이룩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원(元)나라 말엽에 『송사(宋史)』,『요사(遼史)』, 『금사(金史)』 세 사서를 수찬하는 데 3년을 넘지 않았고㉑ 명(明)나라 초에 『원사(元史)』를 지은 것도 두 차례 편찬 부서를 설치하였지만 1년을 넘지 않았으니㉒ 정밀하지 못하고 황당하여 역사가들이 가장 부실한 사서라고 여기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주석



①사마천(司馬遷) : 기원전 145년에 태어나서 86년에 죽은 서한의 역사가로 지금의 섬서성 하양(夏陽) 출신에 자는 자장(子長)이다. 일설에서는 135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87년 한무제가 죽기 전에 처형했다고도 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10세에 고문을 암송했으며, 20세가 되자 천하를 돌아다니며 고적을 답사하고 풍속을 살폈으며 전설을 채집했다. 낭중(郎中)이 되었다가, 원봉(元封) 3년인 기원전 108년, 아버지의 직책을 물려받아 태사령이 되어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태초(太初) 원년 기원전 104년, 당도(唐都), 낙하굉(落下閎) 등과 함께 역법(曆法)을 개정하여 장기간 누적된 착오를 바로잡았다. 천한(天漢) 2년 기원전 99년, 5천에 불과한 소수의 병력으로 8만의 흉노 기병과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항복한 이릉(李陵)을 위해 변호했다. 이 일로 인해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에 처해졌다. 석방 후 환관의 신분으로 중서성(中書令)이 되어, 각고의 노력 끝에 53만여 자로 된『사기』를 완성했다.
②『한서·사마천전』에 실려있고『문선(文選)』에는『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로 수록되어있다. 소경(少卿)은 임안(任安)의 자다.
③ 원문은 “所以隱忍苟活, 幽於糞土之中而不辭者, 恨私心有所不盡, 鄙沒世而文采表於後世也”으로『논어·위영공(衛靈公)』편의 “군자질몰세이명불칭넌(君子疾沒世而名不稱焉)”과 같은 뜻이다.
④이릉(李陵(?~B.C. 74) : 전한의 농서군(隴西郡) 성기현(成紀縣 : 지금의 감숙성 진안현(秦安縣)) 출신으로 자는 소경(少卿)이다.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이며 기사(騎射)에 능했다. 한무제 때 도기위(騎都尉)가 되었다. 천한(天漢) 2년 기원전 99년, 5천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 땅 깊숙이 들어가 8만에 달하는 적군과 싸웠으나 힘히 다하여 투항하였다. 선우는 그의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 우교왕(右校王)에 봉했다. 후에 흉노의 땅에서 병사했다.
⑤기원전 99년 대완(大宛)에서 개선한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는 한무제로부터 흉노 정벌을 명령받고 기병 3만 명으로 주천(酒泉)에서 출격하였으나, 군사의 2/3를 잃는 패전을 당했다. 이때 이릉은 이광리를 지원하기 위해 5천의 보군을 이끌고 거연(居延)으로 출격한 이릉(李陵)은 흉노의 선구가 이끄는 8만에 달하는 만나 수십 일 동안 잘 싸웠지만, 식량은 떨어지고 지원군은 오지 않아 어쩔 수 없어 항복하였다. 한나라 조정은 적에게 항복한 이릉의 죄를 논하게 되었는데, 사마천이 변호하다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거세를 당하는 궁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⑥『사기(史記)』의 원래 제목은『태사공서(太史公書)』였으나, 『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사부(史部)』편에 으뜸으로 『사기(史記)』를 올려 이후로『사기(史記)』로 굳어졌다. 모두 130편으로 12본기(本紀), 8서(書), 10표(表), 30세가(世家), 70열전(列傳)으로 구성되었다. 원제(元帝)ㆍ성제(成帝) 때 저소손(褚少孫)이 각 편을 보충하였으며, 한무제 천한(天漢) 연간 이후의 기록을 집어넣었다. 후대 사람들이 주석을 달았는데, 유송(劉宋) 배인(裴駰)의 『집해(集解)』, 당(唐) 사마정(司馬貞)의 『색은(索隱)』, 장수절(張守節)의 『정의(正義)』가 유명한데 삼가주(三家注)라고 칭하고 있다. 북송 때 삼가(三家)의 주(注)를 분별하여 정문(正文) 아래에 배열하고 한 편으로 합하여 읽기 쉽게 만들었다.
⑦사마담(司馬談 : ?~B.C. 110) : 전한의 하양(夏陽) 출신으로 한무제 건원(建元 기원전 140~135년) 태사령(太史令)에 임명되었다. 저서에『논육가지요지(論六家之要指)』가 있다. 도가(道家) 황노지술(黃老之術)을 숭배했는데, 그것이 유가(儒家)ㆍ묵가(墨家)ㆍ명가(名家)ㆍ법가(法家)ㆍ음양가(陰陽家) 등 선진(先秦) 각 학파의 장점을 종합하였다고 보았다. 일찍이 『세본(世本)』 『국어(國語)』 『전국책(戰國策)』 『초한춘추(楚漢春秋)』 등을 참고하여 사서의 편찬을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아들 사마천에게 완성하라고 유언으로 넘겼다.
⑧태사령(太史令) : 서주와 춘추 때 문서를 기초하고, 제후나 경대부들의 책명을 작성하여 사서에 기록하는 일을 맡은 관리의 장이다. 상주(商周) 양대에는사서를 편찬하고, 전적, 천문, 역법, 제사 등을 주관하는 대신 중의 한 명이었으나 진한(秦漢) 때 설치한 태사령(太史令)은 그 직위가 매우 낮았다.
⑨석실금궤(石室金匱) : 국가의 도서를 보관해 두는 곳을 말한다.
⑩태초(太初) 원년인 기원전 104년)에 역법을 개정하여 이제까지 세수(歲首)로 하던 10월을 고쳐 정월(正月)로 하게 하였고, 연말에 두던 윤달을 정월 달 뒤에 두었다. 즉 태초력(太初曆)의 채용이다.
⑪『춘추(春秋)』 : 공자가 필삭(筆削)하여 편찬했다는 춘추 때 노(魯)나라의 역사다. 노은공(魯隱公) 원년인 기원전 722년부터 애공(哀公) 14년인 기원전 481년까지의 전쟁, 회맹(會盟), 조빙(朝聘), 혼상(婚喪), 제사(祭祀), 천상(天象) 등을 기록한 편년체로 된 노나라의 역사서다. 내용이 간략하여 후세 학자들이 해석을 가했는데, 이를 전(傳)이라 하며 『좌씨전(左氏傳), 『공양전(公羊傳)』,『곡량전(穀梁傳)』 이 『춘추삼전(春秋三傳)』으로 지금까지 전한다.
⑫공자가 돌가신 이래 지금 500년이 되었으니[孔子卒后至于今五百歲]라고 했으나 공자는 춘추 후기인 기원전 479년에 죽고 사마담이 사마천을 만나 죽을 때 유언을 한 시점은 기원전 113년의 일로 공자탄생부터 사마담이 죽을 때까지의 기간은 500년이 아니라 사실은 363년 만의 일이다.
⑬『사기(史記)·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의 다음 구문이다.
「그래서 사서의 문장을 차례로 논하기 시작해서 7년 째 되는 해에 태사공은 이릉(李陵)의 화를 당하여 포승줄에 묶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갇힌 태사공은 깊이 탄식하며 말했다. “어째서 이것이 나의 죄란 말인가! 몸은 망가져 이젠 쓸모가 없게 되었구나!” 태사공은 물러 나와 깊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무릇 시경과 서경의 내용이 깊고 그윽하면서도 간략한 것은 그 지은이가 마음속에 뜻하고 있던 바를 이루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고 옛날에 서백은 은나라의 주왕(紂王)에게 잡혀 유리(羑里)에 갇혀 있으면서 주역을 더하여 풀이하였고 공자는 진(陳)과 채(蔡)나라 사이를 지나다가 곤경에 처해진 와중에서 『춘추』를 지었으며 굴원은 추방되어 상수(湘水) 강변을 배회하면서 이소를 노래했다. 좌구명은 실명을 했음에도 『국어(國語)』를 지을 수 있었으며, 손빈은 다리의 슬개골이 잘려 앉은뱅이가 되었으나 책을 써 병법을 논했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유배되어 불우하게 되었음에도 만세에 전해질 『여람(呂覽』『을 편찬했고, 한비자는 진나라에 가서 감옥에 갇힌 중에 『세난(說難)』과 『고분(孤憤)』을 저술했다. 『시(詩)』 3백편도 대체로 현인과 성인들이 모두 자기 마음속에 맺혀 있던 울분을 토로하기 지은 시가이며, 그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맺혀 있는 자기의 이상과 주장을 풀어 버릴 방법을 얻지 못한 나머지 옛날 일을 말하여 미래의 일을 생각한 것이다.[於是論次其文. 七年而太史公遭李陵之禍, 幽於縲紲. 乃喟然而歎曰, ‘是余之罪也夫! 是余之罪也夫! 身毀不用矣.’ 退而深惟曰, ‘夫詩書隱約者, 欲遂其志之思也. 昔西伯拘羑里, 演周易; 孔子戹陳蔡, 作春秋; 屈原放逐, 著離騷; 左丘失明, 厥有國語; 孫子臏腳, 而論兵法; 不韋遷蜀, 世傳呂覽; 韓非囚秦, 說難﹑孤憤; 詩三百篇, 大抵賢聖發憤之所為作也. 此人皆意有所鬱結, 不得通其道也, 故述往事, 思來者.]」
⑭한나라의 법에는 사형은 동절기에 처하게 했다.
⑮『한서(漢書)·사마천전(司馬遷)傳)』의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지금 불측의 죄를 안고 계시는 소경께서는 만 1개월이 지나 형을 집행하는 12월이 임박하였습니다. 저는 또 천자를 좇아 옹(雍)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혹시라도 갑자기 당신께서 차마 말 못할 일을 당하시고 저는 끝내 저의 분만(憤懣)을 가까운 사람에게 말할 수도 없게 된다면 당신의 혼백은 영원히 가고 저의 한(恨)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의 고루한 생각을 대략이나마 말씀드리고자 하며, 오랫동안 답장 올리지 못한 저를 허물치 말아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今少卿抱不測之罪, 涉旬月, 迫季冬, 僕又薄從上上雍, 恐卒然不可諱. 是僕終已不得舒憤懣以曉左右, 則長逝者魂魄私恨無窮. 請略陳固陋. 闕然不報, 幸勿過.]」
⑯무고(巫蠱) : 나무로 만든 인형에 바늘을 꼿고 흙 속에 묻어 저주하는 상대의 죽음을 비는 무속이다.
⑰강충(江充 : ?~B.C. 91) : 전한 때 조(趙)나라의 한단(邯鄲) 사람으로 자는 차천(次倩)이고 본명은 제(齊)이다. 누이가 조나라 태자 유단(劉丹)에게 시집가 강충은 조왕의 상객(上客)이 되었다. 후에 太子와 사이가 틀어져 집안사람들이 피살되자 장안(長安)으로 도망하여 이름을 충(充)으로 바꾸고 유단의 죄를 밀고했다. 한무제는 유단을 서인으로 폐하고 강충을 곁에 두어 총애했다. 무고(巫蠱)의 란을 일으켜 수만 명에 달하는 고관과 관민을 살해하고 평소에 사이가 나쁜 황태자 유거(劉據)를 무고죄로 함정에 빠뜨렸으나 태자의 반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⑱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 : 여태자는 한무제의 황태자였던 유거의 시호다. 한무제의 총애를 받아 직지수의사(直指繡衣使)가 된 강충(江充)은 귀척자제들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황제에게 지나치게 아부하여 황태자와 위황후(衛皇后)의 미움을 받게 된 강충(江充)은 당시 66세의 한무제가 죽으면 태자에게 주살될 운명이었다. 이에 강충은 태자의 비행을 조사한다고 하면서 거처를 수색하여 자기가 미리 묻어 놓은 오동나무로 만든 인형 여섯 개를 발견했는데 모두 침이 꽂혀 있었다[巫蠱之事]. 함정에 빠진 태자는 태자소부(太子少傅) 석덕(石德)과 상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명목으로 강충을 체포하여 목을 베었다. 태자 측에서 군사들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승상부(丞相府)를 공격하자, 무제도 병력을 동원하여 대응했다. 이로써 장안(長安)은 닷새 동안 이어진 전투로 사망자가 수만 명에 이르는 유혈사태에 빠졌다. 사마천(司馬遷)의 친구 임안(任安)도 이때 태자(太子)로부터 부절(符節)을 받고 참전을 요구받았으나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두 마음이 있다고 하여 사형에 처해졌다. 결국 태자군은 패배했고, 태자는 성을 빠져나가 민가에 숨었으나 이내 발각되자 자살하고 말았다. 무제는 후에 태자가 강충(江充) 때문에 무고하게 죽은 사실을 알고 사자궁(思子宮)을 지었으며 ‘여(戾)’라는 시호를 내렸다.
⑲이연수(李延壽) : 당나라 상주(相州) 사람으로 자는 하령(遐齡)이며, 서량(西涼) 무소왕(武昭王)의 9세손이다. 정관(貞觀) 연간 숭현관학사(崇賢館學士), 어사대주부(御史臺主簿), 부쇄랑겸수국사(符璽郞兼修國史)를 역임하였다. 저작랑(著作郞) 경파(敬播)와 함께 『오대사지(五代史志)』를 편찬하였다. 아버지 이대사(李大師)가 남북조사(南北朝史)를 편찬하려고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이연수(李延壽)가 그 뜻을 계승하여 16년 동안 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ㆍ위(魏)ㆍ제(齊)ㆍ주(周)ㆍ수(隋)의 역사를 보충하여 『남사(南史)』 100권과 『북사(北史)』 80권을 편찬하였다.
⑳반고(班固 : 32~92) : 우부풍(右扶風) 무릉현(茂陵縣 : 현 섬서성 함양 동) 사람으로 자는 맹견(孟堅)이며, 반표(班彪)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편찬하다가 끝내지 못했던『사기후전(史記後傳)』을 완성하려다가 개인적으로 국사(國史)를 편찬한다고 고발되어 하옥되었으나 아우 반초(班超)가 이를 변호하여 풀려났다. 란대령사(蘭臺令史)가 되어 진종(陳宗) 등과 함께 『세조본기(世祖本紀)』를 편찬하였으며, 공신(功臣)ㆍ평림(平林)ㆍ신시(新市)ㆍ공손술(公孫述) 등의 열전(列傳)과 재기(載記)를 편찬하였는데, 명제(明帝)가 알고 부친의 저작을 완성하도록 명하였다. 20여 년에 걸친 끝에 『한서(漢書)』를 완성하였다. 영원(永元) 원년 서기 89년 중호군(中護軍)이 되어 대장군(大將軍) 두헌(竇憲)의 흉노(匈奴) 정벌전에 종군하여 군정(軍政)에 참여하였다. 후에 두헌(竇憲)이 숙청되어 자살하자 그도 연루되어 옥사했다. 저작에는 『양도부(兩都賦)』『백호통의(白虎通義)』 등이 있으며, 후세 사람들이 그의 글을 정리하여 『반란대집(班蘭臺集)』을 편찬했다.
㉑『송사(宋史)』,『요사(遼史)』,『금사(金史)』 등의 세 사서는 원순종(元順宗) 지정(至正) 3년(1336) 3월에 편찬이 시작되어 지정 5년 10월에 완성되었다. 『송사』는 400여 권으로 가장 상세하지만 사료의 취사선택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번잡하다. 『요사』는 가장 간단하여 2백여 년 역사를 쓴 것임에도 37년 동안을 다룬 『수서(隋書)』의 절반 정도 분량이다. 『금사』는 세 사서 중에서는 가장 잘 된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 이유는 금말원초(金末元初)의 유명한 문인 원호문(元好問) 등이 지은 사서가 『금사』의 편찬에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㉒『원사(元史)』 편찬은 명나라 홍무(洪武) 2년(1369) 2월에 시작하여 8월에 일단 완성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제(順帝) 시대(1332~1367)의 사적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북경에 사신을 보내 자료를 모아서 홍무 3년(1370) 2월 두 번째로 편찬 부서를 설치하여 여섯 달 만에 완성했다. 본기 47권, 지(志) 53권, 표(表) 6권, 열전(列傳) 96권으로 이루어진 『원사』는 고염무(顧炎武)의『일지록(日知錄)』등에서 역대 정사 중 가장 부실한 내용의 사서라고 혹평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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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12-03-08
[일반] 사마천의 자기소개서

<한양대 이인호 교수님 홈페이지에서 전재했습니다.> 저는 중국민족의 공통시조 황제(黃帝)로부터 제가 살았던 당시 한무제(漢武帝)에 이르
운영자 12-03-08
[일반] 사기의 구성과 체계(김원중)

[사기]의 구성과 체계 [사기]는 ‘본기(本紀)’ 12편, ‘표(表)’ 10편, ‘서(書)’ 8편, ‘세가(世家)’ 30편, ‘열전(列傳)’ 70편 등 모두 1
운영자 11-12-20
[일반] 사기의 집필동기 (김원중)

사기의 집필동기와 역사적 평가 [사기]의 집필 목적 사마천이 [사기]를 쓴 목적은 무엇일까. [태사공 자서]와 [보임소경서(報任少卿
운영자 11-12-20
[일반] 사기[史記]의 탄생(김원중)

사기(史記)의 탄생 사기 - 동양 역사서의 근간이자 인간학의 보고(寶庫) 동양뿐 아니라 세계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사기(史記)]는 사성(史
운영자 11-12-20
[일반] 사마천의 중국 주유도

220.有子曰遷(유자왈천). 태사공에게는 이름이 천(遷)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221.遷生龍門(천생용문), 천은 용문(龍門)에서 태어나서
master 0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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