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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1:51:2811898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70-I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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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1

태사공자서는53만 자의 한자로 저술된 사기(史記)의 총130편 중 마지막 편으로 서문에 해당하며 사마천(司馬遷)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즉 사마천이 자신을 대상으로 저술한 사마천열전(司馬遷列傳)에 해당한다. 사마천은 이 자서에서 사기 전편(全篇)에 대한 집필 동기, 구성 및 각 편의 서술 이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일생에 대해 기술해 놓았다. 이 편은 또한 사마천이 사기의 각 장을 지은 이유를 밝힌 사기의 중요한 자료이다.

1.昔在顓頊(석재전욱)

옛날 전욱 임금이

▶전욱/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의 한 사람으로 황제(黃帝)의 손자이자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그는 성격이 침착하고 지략에 뛰어났고, 사리에 통달했다. 또한 그는 알맞은 땅을 골라 곡물을 생산하였고 우주의 운행에 따라서 계절에 맞는 일을 하였으며, 귀신의 권위에 의지하여 예의를 제정하고, 백성을 교화하였으며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천지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는 북쪽으로는 유릉(幽陵), 남쪽으로는 교지(交趾), 서쪽으로는 유사(流沙), 동쪽으로는 반목(蟠木)에까지 이르렀다. 각종 동물, 식물, 그리고 크고 작은 산천의 아들,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이면 어디든 평정하여 귀속시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출전 동서 오제본기 중 전욱(顓頊) 항)

▶유릉(幽陵)/지금의 북경지방인 유주(幽州)를 말함.

▶교지(交趾)/지금의 베트남과의 경계지방인 광서성(廣西省)과 운남성(雲南省)을 말함.

▶유사(流沙)/지금의 내몽고 고비사막을 말함.

▶반목(蟠木)/정확한 위치를 추정할 수 없으나 일성에는 동해바다 가운데의 도색산(度塞山)이라고도한다.

2.命南正重以司天(명남정중이사천)

남정의 중(重)에게 명하여 하늘을 맡아 다스리게 하고

▶남정(南正)/전욱이 설치한 관직의 이름으로 하늘과 천문에 관한 일을 관장했다.

▶중(重)/사람 이름

3. 北正黎以司地.(북정려이사지)

북정의 려(黎)에게는 땅을 다스리게 하였다.

▶북정(北正)/화정(火定)이라고도 하며 고대 중국의 땅을 관장하던 직책

▶려(黎)/사람 이름

4. 唐虞之際(당우지제),

요와 우임금 시대에 이르기 까지

▶당(唐)/요(堯)임금이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익성현(翼城縣) 부근에 세운 나라 이름으로 당요(唐堯)를 말함.

▶우(虞)/순임금 요임금에게서 선양받아 지금 산서성(山西省) 영제현(永濟縣) 경내의 포판(蒲阪)에 세운 나라의 이름. 우순(虞舜)을 말함.

5. 紹重黎之后使復典之(소중려지후사복전지),

중(重)과 려(黎)의 후손들에게 잇게하여

하늘과 땅의 일을 계속 맡아보게 하여

6. 至于夏商(지우하상),

하(夏)와 상(商) 왕조에 이르렀다.

▶하(夏)/순임금 밑에서 황하의 치수 공사에 공을 세운 우(禹)가 세운 나라. 지금의 산서성 하현(夏縣)인 안읍(安邑)이 하나라의 수도였다.

▶상(商)/탕(湯)이 하를 멸하고 건국한 나라 이름. 상은 건국하여 주무왕(周武王)에게 멸망할 때까지 그 도읍을7 번을 옮겼다. 마지막 도읍지가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소둔촌(小屯村)인 은(殷)이었던 관계로 은(殷)나라라고 칭하게 되었다. 즉 상나라는 반경(盤庚)이라는 왕이 지금의 곡부 부근인 엄(奄)이라는 곳에서 옮겨 망할 때까지 약200여 년간 은을 도읍으로 하였다. 즉 상(商)이라는 이름은 자칭이고 은(殷)이라는 이름은 타칭이다.

▶위의 하(夏), 상(商)에 주(周)나라를 더하여 삼대(三代)라고 한다.

7. 故重黎氏世序天地( 고중려씨세서천지).

그런 이유로 중(重)과 려(黎)씨들은 대를 이어 하늘과 땅의 일을 맡아보았다.

8. 其在周(기재주)

이어서 주왕조 때

9.休甫其后也(휴보기후야)

정백(程伯)에 봉해졌던 휴보(休甫)도 그 후예였다.

▶정(程)/지금의 섬서성 함양시(咸陽市) 경내의 동북에 있었던 서주(西周) 때의 제후국. 휴보(休甫)는 정나라 군주의 이름이다 .

10. 當周宣王時(당주선왕시)

주선왕 때에 이르자

▶주선왕(周宣王)/ 기원전827년부터782년까지 재위했던 주나라의11대 왕. 그 부왕은 려왕(厲王)으로서 위무(衛巫)를 시켜 공포정치를 한 결과 려왕은 국인들에게 쫓겨나 체(彘)라는 곳으로 달아났다. 그 해가 공화(共和) 원년인 기원전841년이다. 사마천의 사기 중 제후연표(諸侯年表)는 이 해부터 시작되고 중국 역사도 모든 기록은 이 해부터 분명하게 되었다. 또한 려왕이 체로 달아나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왕을 대신해서 다스리다가 려왕이 체 땅에서 죽자 태자 정(靜)을 주왕으로 추대하고 주나라의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태자 정이 주선왕이다. 한편 려왕이 달아나 왕 없이 다스린 기원전841년부터826년 까지의14년간의 시기를 공화(共和)라 하여 지금 쓰고 있는Rebpulic에 해당하는 공화국(共和國)의 어원이 되었다. 주나라는 주선왕의 아들인 유왕(幽王)대에 이르러 망하고 낙읍으로 동천하여 동주시대를 열었다.

11.失其守而爲司馬氏(실기수이우사마씨)

정백(程伯)은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사마씨가 되었다.

▶ 사마(司馬) / 서주(西周) 때 설치한 관직의 이름으로 하관(夏官)인 대사마(大司馬)에 속한 관리. 군사마(軍司馬), 여사마(輿司馬), 행사마(行司馬) 등이 있어 군정과 군역을 담당했다. 춘추, 전국시대에 이르자 제후국들도 그 제도를 따라 사마라는 관직을 설치했다. 춘추 때 당진(唐晋)이 군사조직을 삼군(三軍)으로 할 때 매 군마다 사마라는 직을 두어 그 직위는 대장(大將)과 부장(副將)에 이서 세 번째로 하였다. 그 임무는 군사의 일에 대한 참모 역할과 군법의 시행을 관장하는 일이었다 .

12.司馬氏世典周史(사마씨세전주사)

후에 사마씨는 주나라의 사관이 되어 대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13. 惠襄之間(혜양지간)

주나라 혜왕(惠王)과 양왕(襄王)의 대에 이르러

▶ 혜왕(惠王)/ 재위 기원전676-652. 동주의 삼대 왕으로 당시 중원의 패자는 제환공(齊桓公: 재위 기원전686-643년)이었다.

▶ 양왕(襄王)/ 재위 기원전651-619년. 혜왕이 그의 왕비가 일찍 죽자 후비를 얻어 왕자 숙대를 낳았다. 혜왕은 당시 태자였던 양왕을 폐하고 숙대를 새로이 그의 후계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제환공과 관중의 계획으로 양왕은 주나라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

13. 司馬氏去周適晉(사마씨거주적진).

사마씨는 주나라를 떠나 당진(唐晉)으로 갔다.

▶ 당진(唐晋)/ 고대 중국에 있어서 당(唐)이나 진(晉)이라는 말은 지금의 산서성 일대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요임금이 산서성 일대에 세운 나라 이름인 당(唐)이라는 말에서 유래하였고 후에 주나라 성왕 때 그의 동생인 숙우(叔虞)를 당 땅에 봉해 당숙우(唐叔虞)라 칭했다. 그러나 당 땅에서 반란이 일어나 당(唐) 대신에 진(晉)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국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국이었던 당제국은 창건자 이세연(李世淵)이 산서성의 태원 세력을 근거로 하여 세웠기 때문에 왕조 이름을 당이라고 했다. 중국의 왕조 이름은 모두가 그 창건자나 그 종족들이 거주하던 지방의 이름을 사용함을 전통으로 하였으나 이 관습은 금나라와 원나라로부터 관념적인 이름을 취하기 시작했다. 즉 원나라 이전의 중국 왕조 이름은 모두가 지명을 근거로 취했다.

14. 晉中軍隨會奔秦(중중군수회분진)

당진의 중군원수 수회가 섬진으로 달아나자.

▶ 중군(中軍)/ 천자국인 주나라는 육군(六軍)을, 제후국들은 그 제후들의 작위에 따라 일군에서 삼군까지 두었다. 당시의 일군은 약 만 명의 군사로 구성되었다. 당지 당진국은 중군과 좌우 이군을 합하여 삼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수회는 그 중 중군원수였다. 당진국의 재상직은 중군원수의 당연직이었다.

▶ 수회(隨會)/ 당진의 상경(上卿)을 지낸 사회(士會)를 말한다. 그의 식읍이 수(隨)와 범(范)이었던 관계로 수회(隨會) 혹은 범회(范會)라고도 부른다. 주양왕31년 기원전621년 당진(唐晋)의 양공(襄公: 진문공의 아들)이 죽자 그는 당시 당진의 재상이었던 조돈의 명을 받고 섬진(陝秦)에 가있었던 양공의 동생 공자(公子) 옹(雍)을 데려와 당진의 군주자리에 앉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돈이 마음을 바꿔 당진의 군주를 양공의 아들인 이고(夷皐: 晉靈公)로 세우고 군사를 내어 공자옹 일행을 공격하자 수회는 섬진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얼마 후에 조돈의 허락을 받아 다시 당진으로 돌아왔다. 사회의 후손들은 당진의 유력한 여섯 가문 중의 하나가 되어 그 세력을 다투다가 패하여 기원전491년 순씨들과 함께 제나라로 이주하였다.

15. 而司馬氏入少梁(이사마씨입소량)

사마씨도 그 뒤를 따라 섬진의 소량(少梁)으로 들어갔다.

▶소량(少梁)/ 지금의 산서성 한성현(韓城縣) 동남의 소량촌을 말한다. 이민족 국가였던 梁나라의 도성이었으나 섬진의 진목공에 의해 멸망하고 그 영토로 편입 되었다가 강공4년 기원전617년 당진에게 빼앗겼다. 기원전327년 섬진의 혜문왕이 위(魏)나라로부터 탈환하고 그 이름을 하양(夏陽)으로 개명했다.

16.自司馬氏去周適晋(자사마씨거주적진)

사마씨가 주나라를 떠나 당진(唐晋)으로 들어갈 때

17.分散(분산)

그들은 서로 뿔뿔이 흩어져

18.或在衛(혹재위)

일부는 위나라에

19. 或在趙(혹재조),

일부는 조나라에

20. 或在秦(혹재진).

그리고 일부는 섬진(陝秦)으로 들어가 살았다.

21. 其在衛者(기재위자)

위나라에 들어가 살았던 사마씨의 후손 중의 한 사람은

22. 相中山(상중산).

중산국의 재상이 되었고

▶ 중산국(中山國)/ 전국시대 때 지금의 하북성 정현(定縣)과 당현(唐縣) 일대에 있었던 이족(夷族)의 제후국으로써 위나라 위문후(魏文侯) 19년 기원전406년 위나라의 장수 악양(樂羊)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영토는 위(魏)나라에 편입되었다. 후에 중산국의 후손들이 원래의 위치에서 서쪽인 지금의 하북성 평산현(平山縣) 경내인 영수(靈壽)라는 곳에 나라를 다시 세워 명맥을 유지했으나 기원전296년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고 그 영토는 조나라에 편입되었다. 위문후의 명을 받아 악양이 중산국을 정벌할 때 중산국의 군주가 악양(樂羊)의 아들을 죽인 후 끓여 만든 인육탕을 보내자 그 국물을 마시고 중산국을 정벌한 이야기가 전국책(戰國策) 위책(魏策)과 사기 魏世家에 실려있다.

23.在趙者(재조자),

조나라로 들어가 살았던 사마씨들은

24. 以傳劍論顯(이전검논현)

검술을 논함으로써 이름을 날렸다.

25. 蒯其后也(괴기후야)

괴외(蒯聵)는 그 후손이다.

▶ 괴외(蒯聵)/ 당조의 장수절(張守節)이 지은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의하면 자객열전의 형가(荊軻)가 태자 단(丹)을 만나기 전 천하를 유랑할 때 유차(楡次)에 들려 검술을 논했던 개섭(蓋聶)이라는 사람을 칭한 것이라 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26.在秦者名錯(재진자명조)

섬진으로 들어간 사마씨 중에는 이름이 조(錯)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27.與張儀爭論(여장의논쟁)

장의와 더불어 논쟁하였다.

▶전국 시대의 대표적인 종횡가(縱橫家) 중의 한 사람인 장의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온 국력을 한(韓)나라를 정벌하는 데 집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으나 사마착조는 진나라의 배후에 있는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의 촉(蜀) 나라를 정벌하고 광활한 사천평원의 비옥한 농지를 확보하여 국력을 보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진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은 사마조의 주장을 따라 그에게 군사를 주어 촉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촉(蜀) 땅을 점령한 진나라는 사천평원의 풍부한 물산을 확보함으로써 경제력이 획기적으로 신장되었으며 또한 지리적인 이점도 차지하게 되어, 춘추전국시대 전 기간을 통해 남방의 강국으로 군림했던 초나라를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사마조가 촉나라를 정벌한 시기는 혜문왕9년 기원전316년이었다. 그리고 그해로부터38년 후인 진 소양왕(昭陽王) 29년 기원전278년에 진나라의 장군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가 촉 땅에서 기병하여 장강(長江)의 물길을 따라 진격하여 초나라의 도성이었던 영성(지금의 호북성 강릉)을 점령하고 그 땅에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초나라는 진나라의 세력에 밀려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 일대로 쫓겨갔다.

28.于是惠王使錯將伐蜀(우시혜왕사착장벌촉)

섬진의 혜문왕은 사마조의 의견을 받아들여 촉 땅을 정벌하게 하였다.

29.遂拔(수발),

촉 땅을 점령한 사마조는

30.因而守之(인이수지)

그 공로로 촉 땅의 태수가 되었다.

31.錯孫靳(착손근),

사마조의 손자 사마근(司馬靳)은

32. 事武安君白起(사무안군백기)

무안군 백기를 섬겼다.

33.而少梁更名曰夏陽(이소량갱명왈하양)

한편 섬진은 소량(少梁)을 하양(夏陽)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하양(夏陽)/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남

34.靳與武安君阬趙長平軍(근여무안군갱조장평군)

사마근과 무안군은 장평의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군사40만 명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 장평(長平)/지금의 산서성 고평현(高平縣) 서북. 진나라 장군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가 기원전260년 이곳에서 조괄(趙括)이 이끌던 조나라의 군사들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40여 만 명을 구덩이 속에 파묻어 죽였다. 이 전투 이후로 진나라의 유일한 대항 세력이었던 조나라가 패망의 길을 걷게 되고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35.還而與之俱賜死杜郵(환이여지구사사두우)

진나라로 개선하였으나 두 사람 모두 두우에서 사사되었다.

▶ 두우(杜郵)/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西安市) 경내의 북서쪽

36.葬于華池(장우화지)

그 두 사람의 시신은 화지(華池)에 묻혔다.

▶ 화지(華池)/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남

37.靳孫昌,

사마근의 손자 사마창은

38.昌爲秦主鐵官,

진나라에서 철을 관장하는 관리가 되었다.

39.當始皇之時.

그때는 진시황이 재위에 있을 때였다.

40.蒯聵玄孫卬爲武信君將而徇朝歌.

진나라가 망하고 한초(漢楚)가 서로 다툴 때 괴외(蒯聵)의 현손 사마앙은

무신군의 장수가 되어 조가(朝歌)를 정복했다.

▶무신군(武信君)/ 사기에 무신군의 칭호를 갖은 사람은 세 사람이 있다. 항우의 숙부인 항량(項梁), 소진(蘇秦)과 함께 종횡가(縱橫家)를 대표했던 장의(張儀)와 진나라 폭정에 항거하여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난을 일으킬 때 같이 참여한 무신(武臣)이다. 여기서는 무신을 말한다. 무신은 진승에 의해 장군으로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 땅을 점령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무신군(武信君)이라고 칭하고 조왕(趙王)이 되었으나 후에 부하 장수인 이량(李良)에 의해 살해되었다.

▶조가(朝歌)/ 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을 말한다. 춘추 초기 위(衛)나라의 도읍이며 시경(詩經) 국풍(國風) 패풍(邶風)에 나오는 이자승주(二子乘舟)의 무대이다.

41.諸侯之相王,

세상이 어지러워져서 제후들이 서로 왕으로 봉해짐에

42.王卬于殷.

사마앙은 항우에 의해 은왕(殷王)이 되었다.

▶은왕(殷王)/ 은왕조의 도읍은 하남성 안양시(安陽市)였다. 안양시는 조가 북쪽50여키로에 있어 사마앙은 안양시를 포함한 조가 일대를 영지로 하는 제후왕이 되었음을 말한다.

43.漢之伐楚,

한고조가 초패왕 항우를 정벌할 때

44.卬歸漢,

사마앙은 한나라에 귀순하여

45.以其地爲河內郡.

하내군(河內郡)을 영지로 받았다.

▶하내군(河內郡)/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따른 군현이름. 관할지역은 지금의 하남성 황하 이북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안양시(安陽市), 서쪽으로는 제원현(濟源縣), 동쪽으로는 활현(滑縣), 남쪽으로는 황하를 경계로 했다. 치소는 지금이 무척현(武陟縣) 남의 회현(懷縣)이다.

46.昌生無澤,

사마근의 손자 사마창은 무택을 낳았고

47.無澤爲漢市長.

무택은 한나라의 주철을 담당하는 시장이 되었다.

▶시장(市長)/ 전국시대 때 만들어져 당조 때까지 있었던 관직의 이름으로 성 안에 특정지역을 설정하여 상업지구로 지정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한나라 때 장안성(長安城) 안에 시장을 조성하고 그 감독을 위해 파견한 관리를 시령(市令)이라고 했으며, 기타 다른 지방의 감독관을 시장(市長)이라고 불렀다.

48.無澤生喜,

사마무택의 아들 희는

49.喜爲五大夫,

그 봉작이 오대부까지 올랐다.

▶오대부(五大夫)/전국 때 진(秦)나라가 군공에 따라 수여하는20 등급 중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작위로서 한나라도 그 제도를 받아 들여 시행했다. 세읍(稅邑) 300호를 받아 조세를 거둘 수 있고 죄를 짓게 될 경우 사면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50.卒,

이들은 모두 죽은 뒤에

51.皆葬高門.

고문이라는 곳에 묻혔다.

▶고문(高門)/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서남의 고문원(高門原)을 말함.

52.喜生談,

사마희의 아들 담은

53.談爲太史公.

한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느 태사공(太史公)이 되었다.

▶태사공/태사라는 관직은 은주(殷周) 교체기에 설치된 것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사서를 편찬하며, 국가의 중요한 전적(典籍), 천문(天文), 역법(曆法), 제사(祭祀) 등을 관장했던 조정의 대신이었다. 진한(秦漢) 때에는 태사령(太史令)이라고 했지만 그 지위는 매우 낮았다. 사마천은 자기 부친과 자기를 같이 태사공이라고 호칭하였고 여기서의 태사공은 자기 부친을 지칭했다.

54.太史公學天官于唐都(태사공학천관우당도)

태사공은 당도(唐都)로부터 천문학을 배우고

▶당도(唐都)/한나라 문제(文帝: BC180-157)와 무제(武帝: BC 141-87) 연간에 살았던 천문학자 겸 방술사. 일월오성(一月五星: 해와 달 및 화, 수, 목, 금, 토 등의 행성) 즉7개 별들 간의 거리와 머무는 장소 및 위도를 측정하여 하늘을28개의 구역으로 나눴다. 그는 또한 무제의 명을 받아 원봉(元封) 연간 기원전80년에 태초력(太初曆)을 제정하였다.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당도에게서 천문학을 수학했다.

55.受<易>于楊何(수<역>우양하)

양하로부터<주역>을 전수받았으며

▶양하(楊何)/ 산동성 치천(淄川) 사람으로 자는 숙원(叔元)이다. 동무(東武) 사람왕동(王同)에게서 주역을 배워 통달하였다.

56.習道論于黃子(습도론우황자)

황자(黃子)에게서 도학을 익혔다.

▶황자(皇子)/ 서한(西漢) 때의 황노(黃老) 사상가. 황생(黃生)이라고도 한다. 황노의 도학을 연구하여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를 역임하여 황제 앞에서 유생(儒生) 원고생(轅固生)과 은나라 탕(湯)임금이 하나라 걸왕(桀王)을, 주나라와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죽인 것은 토벌한 것이 아니라 윗사람을 죽인 시해(弑害)의 죄를 지은 것이라고 했다. 사마담은 황자로부터 도가의 학설을배웠다.

57.太史公仕于建元元封之間(태사공사우건원원봉지간)

태사공은 건원(建元)과 원봉(元封) 년간에 벼슬을 하면서

▶건원(建元)/ 한무제의 연호로 기원전140-136년 동안의 기간이다.

▶원봉(元封)/ 한무제의 연호다. 기원전110-108년

58.愍學者之不達其意而師悖(민학자지부달기의이사패)

뜻에 통달하지 못한 학자들이

스승들의 본 뜻을 훼손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59.乃論六家之要指曰(내론육가지요지왈)

육가들이 세운 학설의 중요한 요지를 논했다.

60.<易.大典>(<역대전>):

주역의 계사전(繫辭傳)에 따르면

▶계사전(繫辭傳)/주역(周易) 64괘(卦)의 각각에 붙여진 점사(占辭)를 말한다. 각 괘에 붙여진 점사를 단사(彖辭) 혹은 괘사(卦辭)라 하고 괘의 구성 단위인 각 효(爻)에 붙여진 점사를 효사(爻辭)라 한다.

61.天下一致而百慮(천하일치이백려),

천하 사람들은 그 도달하려고 하는 이치는 하나인데

그 생각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며

62.同歸而殊塗.(동귀이수도)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같은데 가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63.夫陰陽, 儒, 墨, 名, 法, 道德(부음양, 유, 묵, 명, 법, 도덕),

무릇 음양가(陰陽家), 유가(儒家), 묵가(墨家), 명가(名家), 법가(法家), 도가(道家)들은

64.此務爲治者也(차무위치자야),

세상을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지만

65.直所從言之異路(직소송언지이로),

다만 말하는 바를 따르는 방법은 서로 다르니

66.有聲不聲耳(유성불성이)

어떤 것은 살피나 어떤 것은 살피지 않는다.

67.學竊觀陰陽之術(유성불성이학절관음양지술),

일찍이 가만히 음양가의 술법을 살펴보건대

68.大祥而衆忌諱(대상이중기휘),

그것은 대체로 길흉의 징조를 나타내나, 여러 가지로 금하는 일이 많아

69.使人拘而多所畏(사인구이다소외);

사람들을 억눌러 많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다.

70.然其序四時之大順(연기서사시지대순),

그러나 일년 사시가 변하는 운행의 법칙은

71.不可失也(불가실야).

결코 버릴 수가 없을 것이다.

72.儒者博而寡要(유자박이과요),

유가의 설은 범위가 넓으면서도 요체가 빈약하고

73.勞而少功(노이소공),

노력은 많이 들고 그 효용성은 적다.

74.是以其事難盡從(시이기사난진종);

이것 때문에 유가들이 주장은 모두 따르기가 어렵다.

75.然其序君臣父子之禮(연기서군신부자지례),

그러나 유가의 설은 군신과 부자 사이의 예의를 바르게 하고

76.列夫婦長幼之別(열부부장유지별),

부부와 장유의 구별은

77.不可易也(불가이야).

절대로 바꾸면 안 되는 일이다.

78.墨子儉而難遵(묵자검이난준),

검약만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묵가의 주장은 지키기 어렵다고 해서

79.是以其事不可遍徇(시이기사불가편순);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따를 수는 없지만

80.然其强本節用(연기강본절용),

그러나 그 근본을 강조하고 재화의 사용을 아껴야 한다는 주장은

81.不可廢也(불가폐야).

결코 폐하면 안 된다.

82.法家嚴而少恩(법가엄이소은);

법가의 이론은 엄격하고 사람들에게 각박하지만

83.然其正君臣上下之分(연기정군신상하지분),

그 러나 그 군신 상하간의 직분을 바르게 정하는 일은

84.不可改矣(불가개의).

절대 바꾸면 안 된다.

85.名家使人儉而善失眞(명가사인검이선실진);

사람으로 하여금 근검하게 만든 명가의 이론은 진실성을 쉽게 잃게 하지만

86.然其正名實(연기정명실),

그러나 그 명분과 실리를 바르게 하는 일을

87.不可不察也(불가불찰야).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88.道家使人精神專一(도가사인정신전일),

도가의 학설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한 곳으로 집중하게 하고

89.動合無形(동합무형),

그 움직임을 무형의 도에 합치게 하며

90.瞻足萬物(첨족만물).

또한 세상의 만물을 풍성하게 한다.

91.其爲術也(기위술야),

그 학술은

92.因陰陽之大順(인음양지대순),

음양가의 큰 순리에 따른 것이지만

93.采儒墨之善(채유묵지선),

유가와 묵가의 선한 것을 취했으며

94.撮名法之要(촬명법지요),

명가의 법가의 요점을 채택했다.

95.與時遷移(여시천이),

시대와 더불어 옮겨지고

96.應物變化(응물변화),

사물에 응하여 변화하며

97.立俗施事(입속시사),

풍속을 세우고 일을 추진하니

98.無所不宜(무소불의),

옳지 않은 것이라고는 없다.

99.指約而易操(지약이이조),

그 뜻하는 바가 간단하고 시행하기가 쉬워

100.事少而功多(사소이공다).

노력하는 정도는 적으면서 그 효과는 크다.

101.儒者卽不然(유자즉불연).

그러나 유가의 학설은 그렇지 않으니

102.以爲人主天下之儀表也(이위인주천하지의표야),

사람들에게 있어서 군주는 천하의 의표임으로

103.主倡而臣和(주창이신화),

임금이 주창하면 신하가 화답하고

104.主先而臣隨(주선이신수).

임금이 앞서가면 신하가 뒤를 따르며

105.如此則主勞而臣逸(여차즉주노이신일).

이와 같이 행한다면 임금은 수고스럽겠지만 신하는 편안하게 된다.

106.至于大道之要(지우대도지요),

대도의 요체에 이르게 되면

107.去健羨(거건선),

굳센 것과 탐욕하는 마음을 버리고

108. 聰明(출총명),

밝은 지혜를 버리게 될 것인데

109.釋此而任術(석차이임술).

이것을 멀리함으로 해서 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할 것이다.

110.夫神大用則竭(부신대용즉갈),

무릇 정신을 너무 많이 쓰게 되면 곧 마르게 되고

111.形大勞則幣(형대로즉폐).

신체를 크게 수고롭게 한다면 곧 몸이 쇠약해 질 것이다.

112.形神騷動(형신소동),

몸과 정신이 쇠미하게 되면 마음의 병이 나게 될 것이며

113.欲與天地長久(욕여천지장구),

만일 하늘과 땅처럼 영원히 함께 하려고 한다는 말은

114.非所聞也(비소문야).

내가 들은 바가 아니다.

115.夫陰陽四時(부음양사시),

무릇 음양가라는 것은 사시사철의 변화와

116. 八位(팔위),

팔위와

▶팔위(八位)/주역에서 말하는 팔괘(八卦)에 따라 지칭하는8가지 방향을 말함. 즉 각 팔괘가 칭하는 여덟 가지 방향은 다음과 같다.

동/진(震), 서/리(離), 남/태(兌), 북/감(坎), 서북/건(乾), 서남/ 곤(坤), 동남/손(巽), 동북/간(艮)

117. 十二度(십이도),

십이도와

▶십이도(十二度)/고대 중국 사람들은 일월오성(日月五星)의 운동법칙을 밝히기 위해 하늘의 황도(黃道)를12개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것을 십이차(十二次)라고도 부른다. 후에 한조(漢朝) 때에 이르러 그 명칭이 정해지고12차는 다시 적도와 경도로 나뉘어24절기가 생겼다. 12도의 각각 명칭은 다음과 같다.

성기(星紀), 현효(玄枵), 추자(棷訾), 강루(降婁), 대량(大梁), 실심(實沈), 순수(鶉首), 순화(鶉火), 순미(鶉尾), 수성(壽星), 대화(大火), 석목(析木).

118.二十四節各有敎令(이십사절각유교령),

24절기 등은 모두가 각기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규범을 갖고 있어

▶이십사절(二十四節)/ 24절기를 말한다. 즉 입춘(立春), 우수(雨水), 경칩(驚蟄), 춘분(春分), 청명(淸明), 곡우(穀雨), 입하(立夏), 소만(小滿), 망종(芒種), 하지(夏至), 소서(小暑), 대서(大暑), 입추(立秋), 처서(處暑), 백로(白露), 추분(秋分), 한로(寒露), 상강(霜降), 입동(立冬), 소설(小雪), 대설(大雪), 동지(冬至), 소한(小寒), 대한(大寒) 등이다.

119.順之者昌(순지자창),

사람들이 이 규범을 따르는 자는 번창하지만

120.逆之者不死則亡(역지자불사즉망),

거스리는 자는 죽지 않는다면 망한다고 했다.

121.未必然也(미필연야),

그러나 그렇다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122. 故曰“使人拘而多畏.(고왈사인구이다외)”

그래서 말하기를"사람들로 하여금 구속을 받도록 해서

두려움을 느끼기 위한 것"ࡓ라고도 했다.

123.夫春生夏長(부춘생하장),

무릇 세상의 사물은 봄에 태어나서 여름에 성장하고

124.秋收冬藏(추수동장),

가을에 수확했다가 겨울에 저장한다.

125.此天道之大經也(차천도지대경야),

이 천도야 말로 하늘의 가장 큰 법도이다.

126.弗順則無以爲天下綱紀(불순즉무이위천하기강),

만일 사람들이 이 천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천하에 기강을 세울 수 없다.

127. 故曰ࡒ四時之大順,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ࡒ사계절이 변화하는 하늘의 커다란 순리를

128.不可失也(불가실야).ࡓ

결코 버리면 안 된다ࡓ라고 말했다.

129.夫儒者以<六藝>爲法(부유자이<육예>위법).

대저 유가들은 육예(六藝)로서 그 법도로 삼는다.

▶육예(六藝)/육경(六經)을 말한다. 즉 예(禮), 악(樂), 서(書), 시(詩), 역(易), 춘추(春秋)를 가리킨다. 이중 예경은 일실되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또한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말하기도 한다.

120. <六藝>經傳以千萬數(<육예>경전이천만수),

<육예>에 관한 경(經)과 전(傳)의 종류는 천만 가지가 넘어

▶경(經)/육경(六經)을 말한다.

▶전(傳)/경의 해설서를 말한다. 즉 시경의 경우 모전(毛傳), 춘추의 경우, 춘추좌전, 춘추공양전 등과 같은 해설서를 가르킨다.

121.累世不能通其學(누세불능통기학),

누대에 걸쳐 배워도 그 학문에 통달할 수 없으며

122.當年不能究其禮(당년불능구기례),

평생을 바쳐 예경 한 가지에만 매달린다 할지라도 다 구명할 수 없다.

123.故曰ࡒ博而寡要, 勞而少功.(고왈, 박이과요, 노이소공)ࡓ

그런 이유로 해서" 유학이란 범위가 넓으면서도 요체가 적고

노력은 많이 들지만 그 이루는 바는 적다" 한 것이다.

124.若夫列君臣父子之禮(약부열군신부자지례),

그러나 세상의 모든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예를 바르게 세우고

125.序夫婦長幼之別(서부부장유지별),

남편과 아내를 구별하고, 어른과 아이의 순서를 정해 놓은 것은

126.雖百家弗能易也(수백가불능영야).

비록 백가가 몰려온다 할지라도 고칠 수 없는 것이다.

127.墨子亦尙堯舜道(묵자역상요순도),

묵가(墨家)의 학설은 요순의 도를 따른 것이며

128.言其德行曰(언기덕행왈):

두 임금의 덕행을 칭송했다.

129. ࡒ堂高三尺(당고삼척),

요임금과 순임금이 살았던 집의 높이는 겨우 석자에 달했으며

130. 土階三等(토가삼등),

그 마루로 올라가는 흙으로 만든

섬돌은 세 계단 밖에 되지 않았다.

131.茅茨不?(모자불전)

모자(茅茨)로 이어서 올린 지붕은

그 끝을 쳐서 가지런히 정리도 하지 않았고

133. 采椽不刮(채연불괄)

서까래는 그 겉을 다듬지도 않았다.

134.食土 (식토궤),

식사는, 흙으로 빚어 만든 밥그릇과

135. 土刑(철토형),

국그릇에 담아서 먹었다.

136. 粱之食(여량지식),

현미나 기장으로 밥을 짓고

137.藜藿之羨(여곽지선).

명아주잎과 콩잎으로 국을 끓여 먹었다.

138.夏日葛衣(하일갈의),

여름에는 갈포로 만든 옷을 입고

139.冬日鹿 (동일녹구).ࡓ

겨울에는 사슴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입고 다녔다.

140.其送死(기송사),

두 임금이 죽자

141.棟棺三寸(동관삼촌),

그들을 위해 준비한 오동나무 관의 두께는 세치를 넘지 않았으며

142.擧音不盡其哀(거음불진기애).

백성들이 소리는 높여 곡을 했으나 그 슬픔을 다 표현하지 않았다.

143.敎喪禮(교상례),

그리고 상례를 가르칠 때는

144.必以此爲萬民之率(필이차위만진지솔).

반드시 이와 같이 행함으로서 만백성들을 다스렸다.

145.使天下法若此(사천하법약차),

만약에 천하의 법이 이와 같이 행해진다면

146.則尊卑無別也(즉존비무별야).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귀하고 천한 구별이 없어질 것이다.

147.夫世異時移(부세이시이),

대저 세상의 풍속이 변한다면

148.事業不必同(사업불필동),

사람이 행하는 것도 항상 같을 필요가 없다.

149.故曰 ࡒ儉而難遵.ࡓ(고왈, 검이난준)

그런 이유로ࡒ검약이란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다ࡓ라고 했다.

150.要曰强本節用(요왈강본절용),

묵가의 요체는 근본을 강화하고 사물을 아껴 씀으로서

151.則人給家足之道也(즉인급가족지도야).

사람이나 가정을 풍족하게 만드는 길이다.

152.此墨子之所長(차묵자지소장),

이것은 묵가의 뛰어난 점으로서

153.雖百家弗能廢也(수백가불능폐야).

비록 백가가 달려온다 할지라도 폐할 수 없는 장점이다.

155.法家不別親疎(법가부별친소),

법가의 설은 그 사이가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하지 않고

156.不殊貴賤(불수귀천),

귀하고 천한 것을 구별하지 않으며

157.一斷于法(일단우법),

오로지 법에 따라 모든 것은 결정하니

158.則親親尊尊之恩絶矣(즉친친존존지은절의).

이는 곧 친할 사람은 친하고 높여야 할 사람은 높여 은혜를 끊어지게 만든다.

159.可以行一時之計(가이행일시지계),

이렇게 행하는 것은 일시적으로는 뜻하는 바를 이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160.而不可長用也(이불가장용야),

결코 오래도록 쓰지는 못한다.

161.故曰ࡒ嚴而少恩(고왈, 엄이소은)ࡓ.

그런 이유로ࡒ법가의 도는 엄하기만 하고 그 베푸는 은혜가 적다ࡓ라고 했다.

162.若尊主卑臣(약존주비신),

그러나 임금을 높이고 신하는 낮추며

163.明分職不得相逾越(명분직부득상유월),

각각의 직분을 분명히 구분하여

상하간이 서로가 범할 수 없도록 한 점은

164.雖百家弗能改也(수백가불능개야).

비록 백가가 달려온다 할지라도 바꿀 수 없다.

165.名家苛察 繞(명가가찰격요),

명가는 뒤엉켜서 복잡하게 된 사물을 철저하게 살펴봄으로서

166.使人不得反其意(사인부득반기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뜻을 어기지 못하게 하고

167.專決于名而失人情(전결우명이실인정),

오로지 명분에 따라서 일을 행함으로서 사람으로서의 정을 잃게 만든다.

168.故曰ࡒ使人儉而善失眞ࡓ(고왈, 사인검이선실진).

그런 이유로, ࡒ사람으로 하여금 명분에 구속되어

진실 된 마음을 잃게 만든다.ࡓ라고 했다.

169.若夫控名責實(약부공명책실),

그러나 명실상부함을 구하기 위하여

170.參伍不失(삼오불실),

명과 실을 상호 비교함으로서 그것들을 잃지 않도록 한 점은

171.此不可不察(차불가불찰)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172.道家無爲(도가무위),

도가의 설은 무위이면서

▶무위(無爲)/도가 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의 하나. 도가사상에서는 일체의 만물을 생성하고 소멸시키면서 그 자신을 생멸(生滅)을 넘어선 초감각적 실재 내지 천지자연의 이치로서의 도의 본질을 체득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데, 그 도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무위(無爲)라는 개념이다. 무위란 인위의 부정을 뜻하며, 결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적 영위을 위(僞)로서 부정하고 천지자연의 이치에 그대로 따른 참된 위를 실현하는 일이며, 정확히는 무위의 위이다. 노자는 인간이 지(知) 또는 욕(欲)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세상에 대위대란(大爲大亂)을 초래하는 계기가 됨으로 될 수 있는 대로 무리하지 말고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두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하였다. 그의 무정부적 사상은 이 사항에 기초를 둔 것이다. 장자에 와서는 개인적인 면이 뚜렷이 나타나 사회적으로 무위한 것을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톨로 보았다. (출전/동서문화백과대사전)

172.又曰無不爲(우왈무불위),

또한 무불위라고도 말하고

▶ 무불위(無不爲)/만물을 생육한다는 뜻이다. 도가의 무위사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연의 변화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정정함을 지켜 나간다면, 만물은 장차 자화하여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낸다는 것이다.

173.其實易行(기실이행),

그 실제는 행하기는 쉬우나

174.其辭難知(기사난지).

그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175.其術以虛無爲本(기술이허무위본),

도가의 이론을 시행하는 방법은 허무를 근본으로 삼고

176.以因徇爲用.

인순(因循)을 수단으로 삼는다.

▶인순(因循)/ 자연에 순응한다는 뜻

177.無成勢(무성세),

고정된 세도 없고

178.無常形(무상형),

일정한 형상도 없다.

179.故能究萬物之情(고능구만물지정).

고로 만물의 진실을 밝힐 수 있다.

180.不爲物先(불위물선),

사물에 앞서지도 않고

181.不爲物后(불위물후),

사물에 뒤지지도 않는다.

182.故能爲萬物主(고능위만물주).

고로 능히 만물을 주제할 수 있다.

183.有法無法(유법무법),

법칙이 있으나 없다고도 할 수 있으며

184.因時爲業(인시위업);

시대에 응하여 사업을 이루기도 한다.

185.有度無度(유도무도),

사물을 재는 척도가 있으나 일정한 것이 없어

186.因物與合(인물여합).

사물에 따라 더불어 합친다.

187.故曰 ࡒ聖人不朽(고왈, 성인불후),

그런 연유로ࡒ성인의 사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며,

188.時變是守(시변시수).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켜진다.

189.虛者道之常也(허자도지상야),

허무는 도의 변하지 않는 모습이고

190.因者君之綱ࡓ也(인자군지강야).

자연에 순응하는 것은 임금이 지켜야 할 강령이다."라고도 말해진다.

191.君臣幷至(군신병지),

임금이 신하와 같이 이르게 되면

192.使各自明也(사각자명야).

임금은 신하들 각자가 스스로의 재능을 발휘하도록 한다.

193.其實中其聲者謂之端(기실중기성자위지단),

이때 신하들의 실제가 그 명성에 부합하는 것을 단(端)이라 하고

194.實不中其聲者謂之窾(실부중기성자위지관).

그 실제가 부합하지 않는 것을 관(窾)이라 한다.

195. 言不聽(관언불청),

신하들의 헛소리를 듣지 않음으로

196.奸乃不生(간내불생),

간사스러운 신하가 생기지 않으며

197.賢不肖自分(현불초자분),

어진 자와 불초한 자는 스스로 분별되어

198.白黑乃形(백흑내형).

흑백과 같이 형체를 확연히 드러내게 된다.

199.在所欲用耳(재소욕용이),

단언(端言)과 관언(窾言)을 적재적소에 따라 쓰기만 한다면

200.何事不成(하사불성).

무슨 일인들 이루어 내지 못하겠으며

201.乃合大道(내합대도),

이것은 곧 대도에 부합되는 일이다.

202.混混冥冥(혼돈명명).

어지러우며 칠흑같이 어둠 속에서도

203.光耀天下(광요천하),

천하를 빛낼 수 있어

204.復反無名(반복무명).

반복해서 무명(無名) 상태로 돌아간다.

▶무명(無名)/ 노자의 도가사상에서 나온 말로 천지의 모든 만물은 물체가 형성되고 나서 인간에 의해 규정지어 진 것임으로 그 이전의 상태를 무명이라 한 것이다. 그럼으로 도란 것도 무명인 것이다. 인위적인 예악, 인의 등을 반대하는 노자의 무명론은 유가의 정명론(正名論)과 대립된다.

205.凡人所生者神也(범인소생자신야),

무릇 사람이 살아 있음은 정신이 있음을 말하며

206.所托者形也(소탁자형야).

정신이 맡기고 있는 것은 그 육체이다.

207.神大用則竭(신대용즉갈),

정신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쇠갈(衰竭) 하고

208.形大勞則幣(형대노즉폐),

육체를 지나치게 혹사하면 피로해 진다.

209.形神離則死(형신리즉사).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면 즉 죽음에 이르게 된다.

210.死者不可復生(사자불가복생),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으며

211.離者不可復反(이자불가복반),

육체를 떠난 정신은 다시 돌아와 결합할 수 없다.

212.故聖人重之(고성인중지).

고로 성인은 정신과 육체를 다 같이 중히 여긴다.

213.由是觀之(유시관지),

이런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214.神者生之本也(신자생지본야),

정신이란 살아 있는 사람의 근본이며

215.形者生之具也(형자생지구야).

육체는 그 정신이 깃들게 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216.不先定其神形(불선정기신형),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육체를 먼저 안정시키지 않고서

217.而曰 ࡒ我有以治天下ࡓ何由哉?ࡓ(이왈, 아유이치천하, 하유재)

오히려ࡒ내게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ࡓ

라고 말하니 그것은 무슨 이치에서인가?

218.太史公旣掌天官(태사공기장천관),

태사공의 직분은 천문에 관한 일을 관장하고

219.不治民(불치민).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220.有子曰遷(유자왈천).

태사공에게는 이름이 천(遷)이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221.遷生龍門(천생용문),

천은 용문(龍門)에서 태어나서

▶용문(龍門)/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부근으로 태원 북쪽에서 발원하여 산서성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분수(汾水)가 하수(河水)와 만나는 곳이다. 그 북쪽에 용문산(龍門山)이있다.

222.耕牧河山之陽(경목하산지양).

그는 하수의 근처의 태항산(太行山) 남쪽에서 농사와 가축을 기르며 살다가

223.年十歲則通古文(연십세즉통고문).

나이가10 살이 되자 고문(古文)을 익혀 통달하게 되었다.

▶고문(古文)/진시황이 중국의 문자를 금문(今文)으로 통일하기 전에 사용했던 선진시대의 문자.

224.二十而南游江, 淮,(이십이남유강회)

나이가20세에 이르자 남쪽의 강회(江淮) 사이를 유람하고,

▶강, 회(江淮)/강수(江水) 즉 양자강(揚子江)과 회수(淮水)를 말한다 .

225.上會稽(상회계),

월(越) 땅의 회계산에 올라

▶회계산(會稽山)/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소흥시(紹興市)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하(夏)왕조를 세운 우(禹) 임금이 그곳에 올라 천하의 제후들을 불러모아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행한 곳이라 하여 이름을 회계라 지은 것이다. 회계(會稽)는 곧 회계(會計)이다. 춘추 말기에 월나라의 구천(句踐)이 오나라의 부차(夫差)에게 쫓겨 회계산으로 달아나 농성하다가 결국은 항복하였으나 후에 권토중래하여 부차를 멸망시키고 당시 중국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는 오월동주(吳越同舟)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의 무대이기도 하다.

226.探禹穴(탐우혈),

우(禹)임금이 묻혔다는 굴을 찾아 보고

▶ 우혈(禹穴)/ 우임금이 회계에 순수(巡狩)차 회계산에 들렸다가 사망하여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우임금은 죽은 것이 아니라 회계산 산중에 있는 굴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는데 우혈이란 그것을 말한다.

227.窺九嶷(규구억),

다시 구억산에 올라 순임금의 행적을 살펴보았으며

▶구억산(九嶷山)/ 창오산(蒼梧山)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호남성 영원현(寧遠縣) 남쪽에 있는 산으로 순임금이 순수를 나왔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산. 영원현은 광동성과 인접해 있는 호남성 남쪽에 있는 산으로 상수(湘水)의 발원지이다.

228.浮于沅, 湘( 부우완,상);

그곳을 흐르던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두 강에서 배를 타고 다녔다.

▶원수(沅水)/귀주성과 호남성 경계에서 발원하여 호남성을 동서로 가로질러 동정호로 흐르는 양자강의 지류이다.

▶상수(湘水)/광서성, 광동성, 호남성과의 접경지대의 구억산(九嶷山)에서 발원하여 호남성을 남북으로 흐르다가 상담시(湘潭市)와 호남성의 성도(省都)인 장사(長沙)를 지나 동정호(洞庭湖)로 유입되는 양자강의 지류이다. 장사시에서50여 키로 남쪽에 있는 상담시(湘潭市)는 모택동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또한 순임금이 구억산으로 순수 나왔다가 그곳에서 죽자 요임금이 딸이었던 순임금의 두 부인이 상심한 나머지 상수에 빠져 죽은 전설이 있다. 상군(湘君)과 상부인(湘夫人)은 상수에 빠져 죽은 순임금의 두 부인을 말한다.

229.北涉汶, 泗,( 북섭문,사)

다시 북쪽으로 나아가 문수(汶水)와 사수(泗水)를 건너

▶문수(汶水)/춘추전국시대 때 제나라와 노나라 사이를 가로질러 두 나라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강 이름. 시경의 제풍(齊風)과 노풍(魯風)에 나오는 시가의 무대로 많이 나온다.

▶사수(泗水)/태산(泰山)에서 발원하여 노나라의 도성이었던 곡부를 거쳐 회수와 합쳐지는 회수의 지류.

230.講業齊, 魯之都(강업제, 노지도),

제(齊)와 노(魯) 두 나라의 도성에서 학문을 논했으며

231.觀孔子之遺風(관공자지유풍),

공자가 남긴 유풍을 살펴보고,

232.鄕射鄒,嶧(향사추,역);

추(鄒)와 역(嶧) 땅의 향사(鄕射)를 참관했다.

▶추(鄒)/지금의 산동성 추현(鄒縣)에 있었던 고을 이름으로 맹자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역(嶧)/추현 동남쪽에 있었던 산 이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자 이 산에 올라 자기의 공적비를 세웠다.

233.厄困鄱, 薛, 彭城, (액곤파, 설, 팽성)

파(鄱)와, 설(薛), 팽성(彭城)에서 곤경에 처했다가

▶파(鄱)/지금의 산동성 등현(滕縣)을 말하고

▶설(薛)은 등현 경내에 있었던 춘추전국시대 때 중소제후국이었다가 제나라에 편입되었다. 후에 맹상군(孟嘗君)의 아버지인 전영(田嬰)이 이곳에 봉해져 설공(薛公)이라 했고 다시 맹상군이 그 작위를 물려받았다.

▶팽성(彭城)/지금의 강소성 서주시(徐州市)를 말한다. 진시황이 죽고 한초(漢楚)가 천하를 놓고 다툴 때 초의 항우(項羽)가 도성으로 삼은 곳이다.

234.過梁, 楚以歸(과량, 초이귀).

양(梁)과 초(楚)를 지나 도성으로 들어갔다.

▶양(梁)/전국시대 때 위(魏)나라의 처음 수도는 지금의 산서성 남쪽의 하현(夏縣)에 있었던 안읍(安邑)이었으나 후에 진나라의 세력에 밀려 그 도읍을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로 옮기고 그 이름을 대량(大梁)이라 불렀다. 이어서 위나라는 나라이름을 양(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맹자의 양혜왕(梁惠王)이란 위혜왕을 가리킨다.

▶초(楚)/춘추전국시대 때 호북과 호남성 일대에 걸쳐 있었던 나라이름. 처음에는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荊州市)를 도읍으로 했으나 진나라의 세력에 밀려 지금의 하남성 진현(陳縣)으로 쫓겨 갔다. 다시 안휘성 거양(巨陽)을 거쳐 다시 지금의 수현(壽縣)인 수춘성(壽春城)으로 옮겼다가 그곳에서 진나라에게 멸망당했다.

235.于是遷仕爲郎中(우시천사위낭중),

그리고 천(遷)은 조정에 나가 낭중이 되어

▶낭중(郎中)/진한시대 때 황제의 시위(侍衛)를 담당했던 관직명. 진나라 때 시위의 직분을 셋으로 나누었다. 황제의 여인들이 묶고 있는 곳을 드나들며 시위하도록 했던 직위를 중랑(中朗), 궁중에 거하며 황제를 시위했던 직위를 낭중(郎中), 궁중 밖에서 황제를 시위했던 직위를 외랑(外朗)이라 했다.

236.奉使西征巴,蜀以南(봉사서정파,촉이남),

황제의 명을 받들어 서쪽으로는

파(巴)와 촉(蜀) 이남 지방을 정벌한 다음,

▶ 파촉(巴蜀)/(巴)파는 지금의 중경시(重慶市) 일대를, 촉(蜀)은 성도(成都) 일대를 말한다.

237.南略邛, 笮, 昆明(남략공,착,곤명),

다시 남쪽으로는 공, 착, 곤명을 공략하고,

▶공(邛)/사천성 서창(西昌) 지구 일대에 살던 이민족 이름. 한무제(漢武帝) 때 이곳에 월수군(越嶲郡)을 두었다.

▶착(笮)/사천성 한원(漢源) 일대에 살던 이민족 이름. 한무제 때인 기원전110년에 이곳에 심려군(沈黎郡)을 설치했다.

▶곤명(昆明)/지금의 운남성(雲南省) 대리주(大理州) 일대에 살았던 이민족 이름이다. 운남성의 주도(州都)인 곤명(昆明)은 이 민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38.還報命.

돌아와 복명하였다.

239.是歲天子始建漢家之封(시세천자시건한가지봉),

이해에 천자는 처음으로 한나라 황실의

봉선(封禪) 의식을 행하기 시작했다.

▶봉선(封禪)/태산(泰山)에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을 봉(封), 낮은 구릉인 양보산(梁父山)에 단을 만들어 땅에 지내는 의식을 선(禪)이라 하여 합하여 봉선(封禪)이라 한다. 봉선은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은 천자만이 행할 수 있다.

240.而太史公留滯周南(이태사공유체주남),

그러나 태사공은 주남(周南)에 머물러

▶주남(周南) :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241.不得與從事(부득여종사),

봉선을 행하기 위해 태산으로 간 천자를 따라갈 수 없었다.

242.故發憤且卒(고발분차졸).

그것 때문에 울화병이 들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243.而子遷適使反,(이자천적사반)

이때 마침 그의 아들 사마천이 천자의 사자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244.見父于河洛之間.(견부우하락지간)

하수와 락수 지간에 그의 부친을 뵙자

245.太史公執遷手而泣曰:(태사공집천수이읍왈)

태사공은 사마천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246.ࡒ余先周室之太史也.(여선주실지태사야)

우리들의 선조들은 주나라의 태사였다.

247.自上世嘗顯功名于虞夏, (자상세상현공명우우하)

우리 종족들은 까마득한 옛날인 하나라 때부터 공명을 세상에 들어낸 이래

248.典天官事. (전천관사)

하늘에 관한 일을 주관해왔다.

249.後世中衰, (후세중쇠)

그러나 후세에 이르자 쇠락해지기 시작하더니

250.絶于予乎?(절우예호)

나의 대에 이르러 끊어지려고 한다.

251.汝復爲太史,(여복위태사)

너는 다시 나의 뒤를 이어 태사가 되어

252.則續吾祖矣. (즉송오조의)

우리들 조상들이 해 왔던 일을 계승해야 한다.

253.今天子接千歲之統, (금천자접천세지통)

지금 천자께서는 천년 대통을 이어 받아

254.封泰山, (봉태산)

태산에 봉선을 행하시려고 가셨는데

255.而余不得從行, (이여부득종행)

나는 부득이 따라가 수행할 수 없었다.

256.是命也夫, (시명야부)

이것은 단지 천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구나!

257.命也夫! (명야부)

진실로 천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구나!

258.余死, (여사)

내가 죽으면

259.汝必爲太史;(여필위태사)

너는 반드시 나의 뒤를 이어 태사가 되어야 한다.

260.爲太史, (위태사)

너는 태사가 되어

261.無忘吾所欲論著矣(무망오소욕론저의),

내가 논하여 저술하려고 했던 바를 결코 잊으면 안 된다.

262.且夫孝始于事親, (차부효시우사친)

무릇 효도는 그 부친의 뜻을 받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263.中于事君, (중우사군)

출사하여 그 군주를 섬기다가

264.終于立身. (종우입신)

입신하는데서 끝나며

265.揚名于後世, (양명우후세)

후세에 이름을 남겨

266.以顯父母, (이현부모)

그 부모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267.此孝之大者. (차효지대자)

효도의 가장 큰 도리다.

268.夫天下稱誦周公(부천하칭송주공),

무릇 천하 사람들이 주공을 칭송하고 있는 이유는

▶주공(周公)/주나라를 세운 주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이 죽고 어린 그의 아들 성왕이 즉위하자 스스로 섭정의 자리에 앉아 주나라를 통치하다가 성왕이 장성하자 섭정의 자리에서 내려와 신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예악을 정비하고 전장(典章)제도를 만들어 주나라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공자를 비롯한 유가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269.言其能論歌文武之德(언기능론가문무지덕),

그가 능히 문왕과 무왕의 덕을 시가(詩歌)로서 논했으며

▶문왕(文王)/원래 지금의 섬서성 기산(岐山) 일대에 거주하던 주족(周族)의 수장으로 상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에 의해 서백(西伯)에 봉해졌다. 후에 그의 아들 주무왕이 상을 멸하고 주왕조를 창건할 때 문왕으로 추존되었다.

270.宣周邵之風(선주소지풍),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노래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시경 국풍(國風)에 실려 있는 장의 이름이며 주공(周公) 단(丹)과 소공(召公) 석(奭)이 함께 문왕의 명을 받들어 남쪽의 양자강 유역에 원정을 나갔다가 그곳의 시가를 수집해 왔는데 주공이 수집한 시가집을 주남, 소공이 수집한 시가집을 소남이라고 했다는 설이 있다. 소(邵)는 소(召)와 통한다.

271.達太王王季之思慮(달태왕왕계지사려),

결국은 태왕(太王)과 왕계(王系)의 사려 깊은 지혜에 통하게 되고

▶태왕(太王)과 왕계(王季)/태왕은 주문왕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古公亶父)를 말한다. 원래 주족은 지금의 섬서성 순읍현(旬邑縣) 서남의 빈(豳) 땅에 살았으나 이민족인 훈육(燻淯)의 침입을 받자 고공단보는 주족을 이끌고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 기산 밑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고공단보는 아들을 셋을 두었다. 장자가 태백, 둘째는 우중이고 막내는 계력(季歷)이다.. 그러나 고공단보는 주족들을 번성하게 할 사람은 왕계의 아들인 창(昌)(후에 주문왕)이 라는 것을 알고 자기의 족장 자리를 계력에게 넘기려고 하자 태백과 우중은 남쪽으로 달아나 오랑캐의 습속으로 바꾸고 그곳의 추장이 되었다.

272.爰及公劉(원급공류),

마침내는 공류의 공적에 미치고

▶공류(公劉)/후직의 자손으로 사방으로 흩어졌던 주족을 다시 일으키고 후직이 시작했던 농사의 일을 부흥시켰다. 다음은<주본기(周本紀)>에 나오는 공유 부분이다.

『후직이 죽고 그의 아들인 불줄(不窋)이 뒤를 이었다. 불줄 말년에 하후씨의 정치가 문란하게 되어 농사(農師)의 관직을 폐하여 다시는 농사(農事)의 일을 돌보지 않았다. 불줄이 농사(農師)의 직을 잃게 되자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융적(戎狄)의 땅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었다.불줄이 죽고 아들 자국(子鞠)이 뒤를 잇고 다시 자국이 죽고 그의 아들 공유(公劉)가 뒤를 이었다. 공유(公劉)는 비록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다시 후직의 업을 일으켜 농사의 일을 돌보며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과 곡식의 종자를 찾아 나섰다.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고 다시 위수(渭水)를 건너 목재를 벌목하여 가져와 종족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주었으며 종족들 중 외지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비를 주고 나가지 않고 종족들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해 저축을 해 주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다른 종족들도 모두 그의 선행에 감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주나라의 기업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노래를 불러 그의 덕을 칭송했다.』

273.以尊后稷也(이존후직야).

후직까지 높인 까닭이다.

▶후직(后稷)/ 주족의 시조로 요임금과 순임금 때 농사의 일을 관장했던 기(棄)를 말한다. 후직은 농사의 일을 관장했던 벼슬 이름이다. 다음은 사기<주본기>의 후직에 관련된 부분이다.

『주나라의 시조는 후직(后稷)이며 이름을 기(棄)다. 그의 모친은 유태씨(有邰氏) 부족의 딸로써 이름을 강원(姜原)이라고 했다. 강원은 제곡(帝?)의 정비가 되었다. 강원이 성밖의 야외로 나가게 되었는데 거인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즐거워져 밟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몸 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더니 마치 애를 밴 것 같이 되었다. 실제로 애를 밴지10 달이 되자 아들을 낳았다.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 아이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사람이 다니지 않는 좁은 길에다 버렸다. 그러나 지나가는 말이나 소 등이 아기의 주위를 돌며 몸을 피하며 밟지 않고 지나갔다. 그래서 다시 그 아이를 깊은 숲 속으로 데려가 버리도록 하였더니 이번에는 인적이 드물던 숲 속에 사람의 왕래가 갑자기 많아졌다. 그래서 다시 그 아기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그 아기를 얼어붙은 도랑의 얼음 위에 버렸으나 새들이 날아와 그 날개로 아기의 밑을 깔아 주기도 하고 위를 덮어 주기도 하였다. 강원이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결국은 아이를 데려와 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 아기를 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이름을 기(棄)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棄)는 어렸을 때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마음속에 높은 뜻과 원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놀 때는 항상 삼나무나 콩 종류의 작물을 즐겨 심었으며 그가 심은 삼나무와 콩은 크게 자라서 무성하게 되었다. 그가 성인이 되자 농사를 짓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농사에 적합한 땅을 살펴 좋은 종자를 파종하여 많은 량의 곡식을 수확하였다. 백성들이 기에게 와서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 요임금이 기를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인 농사(農師)에 임명하였다. 천하가 기(棄)로부터 농사짓는 법을 배워 많은 이를 얻게 되어 기는 큰공을 세우게 되었다. 순(舜) 임금이 말했다.

“ 기(棄)는 백성들이 굶기 시작하자 농사를 관 장하는 관직을 맡아 백곡(百谷)을 골라 파종하여 백성들의 허기를 면하게 했다.”

순임금이 기(棄)를 태(邰)에 봉하고 관직을 이름으로 부르게 하여 후직(后稷)이라 하고 희(姬) 성을 하사하였다. 후직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당요(唐堯), 우순(虞舜), 하우(夏禹)를 거치면서 세상에 아름다운 선행을 베풀어 덕망이 높았다. 』

274.幽厲之后(유려지후),

유왕과 려왕 이후

▶유왕(幽王)/ 서주의 마지막 왕으로 포사(褒姒)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다가 이민족인 견융(犬戎)의 침입을 받아 유왕은 싸움 중에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평왕(平王)이 그 도읍을 지금의 낙양으로 옮겼다. 이때가 기원전771년 동주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려왕(厲王)/ 서주의11대 왕으로 공포정치를 펼치다가 기원전841년 국인(國人)들의 반란으로 지금의 산서성 곽현인 체(彘) 땅으로 달아나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한편 서주는 달아난 려왕을 대신해서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서로 협력하여 왕대신 나라를 다스렸다. 중국 역사상 기원전841년부터828년까지의14년 동안의 기간을 공화시대라 한다. 이윽고 려왕이 체 땅에서 죽자 두 대신은 려왕의 아들인 선왕을 왕으로 추대했다. 선왕의 아들인 유왕(幽王)이 서주의 마지막 왕이다.

275.王道缺(왕도결),

왕도가 무너지고

276.禮樂衰(예악쇠),

예악이 쇠하게 되자

277.孔子脩舊起廢(공자수구기폐),

공자께서 옛것을 고치고 버려진 것을 다시 일으켜

278.論<詩>, <書>(논시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논하셨고

279.作<春秋>(작춘추)

춘추(春秋)를 논하자

280.則學者至今則之(즉학자지금즉지).

후세의 학자들은 규범으로 삼아 지금까지 전했다.

281.自獲麟以來四百有餘歲(자휘린이래사백유여세),

획린한 이래400여 년 동안

▶획린(獲麟)/공자가 편찬한 춘추는 춘추시대 때인 노은공(魯隱公) 식고(息姑) 원년 기원전722년에 시작하여 노애공(魯哀公) 장(將) 39년 기원전481년에 끝나는242년 간의 노나라 역사책이다. 노애공 치세 때 노나라에 기린이 나타났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죽여 버리자 공자는 그것은 군주들이 무도하여 하늘의 뜻을 받들지 못한 것이라고 한탄하며 춘추를 끝냈다. 이를 획린(獲麟)이라고 한다. 공자는2년 후인 기원전479년에 죽었다.

282.而諸侯相兼(이제후상겸),

제후들은 서로 다투어 나라를 넓히는 일에만 몰두하여

283.史記放絶(사기방절),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284.今漢興(금흥한),

지금 한나라가 흥기하여

285.海內一統(해내통일)

온 세상이 하나로 통일되었고

286.明主賢君忠信死義之士(명주현군충신사의지사),

밝고 어진 임금과 충신들과 의로운 선비들이 가득하나

287.余爲太史而弗論載(여위태사이불논재),

내가 태사령이 되었음에도 이를 논하여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288.廢天下之史文(패천하지사문),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 폐하게 되었도다!

289.余甚懼焉(여심구언),

나는 이를 심히 두려워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290.余其念哉(여기념재)!“

너는 나의 이 뜻을 마음속에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291.遷俯首流涕曰(천부수유체왈):

사마천이 머리를 수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부친에게 말했다.

292.“小子不敏(소자불민),

소자가 불민하나

293.請悉論先人所次舊聞(청슬노넌인소차구문)

선조들이 정리하여 놓은 옛날의 기록들을 논하여 기록하도록 하고,

294.弗敢闕(불감궐).“

하나도 빠뜨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296. 卒三歲而遷爲太史公(졸삼세이천위태사공),

사마천은 그 부친이 세상을 뜬지3년 후에 태사공이 되어,

297. 紬史記石室金櫃之書(유사기석실금궤지서).

역사 기록과 석실의 금궤 속에 보관되어 있던 서책들을 편철(編綴)하였다.

298.五年而當太初元年,

그리고5년 뒤인 태초(太初) 원년,

▶태초(太初) 원년/ 한무제37년인 기원전104년이다. 진나라가 통일한 역법은 그 시작을 매년10월로 했으나, 1월을 그 해의 시작으로 고쳐 태초력이라 하고 연호를 원봉(元封)에서 태초(太初)로 개원했다. 태초력은 그때부터1911년 신해혁명까지2000여 년 동안 중국의 역법으로 사용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음력(陰曆)을 말한다. 한무제(漢武帝)는 그의 재위54년 동안 연호를 모두11번 바꿨다. 태초(太初)는 한무제 기원전104년부터 기원전101까지 사용했던 한무제의7번 째 연호이다.

299.十一月甲子朔旦冬至(십일월갑삭단동지)

11월 갑자일 초하루 동짓날에

300.天曆始改(천력시개)

역법을 개정하여 새롭게 시작하고

301.建于明堂(건우명당),

명당을 세워

▶명당(明堂)/중국 고대에 있어서 천자나 황제가 정사를 돌보던 곳으로, 조회, 제사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거행되었다. 다음은 명당을 노래한 명당부(明堂賦)다.

『빛나는 명당은 양지 녘에 자리 잡고 하늘을 향하여 우뚝 솟아 천하를 내려다본다. 하늘 아래 한 명뿐인 천자가 정령을 발하면 만국의 제후들이 달려와 배알하며 조공을 바친다. 명당의 내부는 종횡(縱橫)으로 각각 세 개씩의 방을 만드니 모두 아홉 개의 방으로 나누어지고 정 가운데의 큰방에 태묘(太廟)를 모시고 태묘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태실(太室)을 두었다. 또한 각 태실의 한 가운데는 토지신(土地神)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유(牖)를 두었다. 열고 닫는 단짝 문으로36개의 문을 내고72개의 창문을 열을 지어 달았다. 왼쪽 것과 오른 쪽 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은 그 직분이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명당의 윗 모습은 둥글고 아래 모양은 네모진 것은 하늘과 땅이 기수(奇數)와 우수(隅數)로 이루어진 법칙에 따른 것이다. 관리들이 서는 곳을 여러 군데 만들어 놓은 것은 관리들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은 삼공(三公)이라 마땅히 명당의 가운데 계단에 늘어서서 여러 군신들과는 같이 서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며, 작위가 후작(侯爵)인 제후들은 동쪽 계단의 동쪽 편에 서서 서쪽을 쳐다보다가 천자가 나타나면 북쪽으로 몸을 돌려 절을 올리고, 백작(伯爵)들은 서쪽 계단의 서쪽으로 서서 동쪽을 바라보며 천자에게 절을 올린다. 자작(子爵)들은 정문의 동쪽 편에 늘어서고, 남작(男爵)들은 자작들의 서쪽 맞은편에 도열한다. 융족은 금(金)이니 서문 밖에, 이(夷)족은 목(木)이니 동문 밖에, 북문 밖에는 화(火)의 종족인 적(狄)족이, 남문 밖에는 수(水)의 종족인 만(蠻)족이 선다. 천하 구주(九州)의 지방 관원들은 명당 담장 밖에서 오른 쪽으로 열을 서서 도열하고, 변경을 지키는 수장들은 담장 밖에 도열하여 지방 관원들의 맞은편인 왼쪽에 서서 도열한다. 주홍색 방패와 옥으로 자루를 장식한 의장용 도끼들은 마치 수많은 나무들이 우뚝 솟아나서 앞 다투어 천자에게 배알하듯이 하고, 표범 가죽으로 깃대를 장식한 용이 그려진 천자의 깃발은 바람에 힘차게 펄럭이며 또한 엄숙하고 무성한 모습에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이룬 듯 하다. 연기가 걷히고 여러 백관들이 일제히 도열하면 하늘에서 태양이 나타나면, 천자께서 주옥을 꿰어 늘어뜨린 면류관을 쓰시고 임하시어 명당의 용좌에 앉으신다. 비단에 도끼의 문양을 수놓은 병풍을 뒤에 둘러치시고, 남쪽을 향하여 앉으시어 천하 제후들과 구름 같은 관리들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는 것을 굽어보시면서 온 천하가 복종하고 있음을 아신다.』

302.諸神受紀(제신수기).

여러 신들에게 기년이 바뀌어 천하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고했다.

▶제신수기(諸神受紀)/남북조 때 남송(南宋)의 배인(裵駰)이 쓴 사기집해(史記集解)의ࡒ告于百神, 與天下更始, 著紀于是ࡓ를따랐다.

303.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말했다.

304.“先人有言(선인유언):

돌아가신 부친께서 나에게 당부하시기를

305.“自周公卒五百歲而有孔子(자주공졸오백세유공자)

“주공이 죽고5백 년이 지나 공자(孔子)가 태어나셨고

▶주공(周公)의 정확한 사망 연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기원전 1100년에서1000년 사이로 보며 공자의 탄생은 기원전551년이다.

306.孔子卒后至于今五百歲(공자졸후지우금오백세),

다시 공자가 돌아가신 이래 지금500년이 되었으니,

▶공자는 춘추 후기인 기원전479년에 죽고 사마담이 사마천을 만나 죽을 때 유언을 한 시점은 기원전113년의 일이니 공자탄생부터 사마담이 죽을 때까지의 기간은500년이 아니라 정확히363년 만의 일이다.

307.而能紹明歲(이능소명세),

누가 능히 그 뜻을 이어받아 밝은 시대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308.正<易經>(정역경),

주역(周易)을 바르게 잡으며

309.繼<春秋>(계춘추),

춘추를 계승하여 끊어진 역사기록을 잇게 하고

310.本<詩,書,禮,樂之際>(본시서예악지제)?“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경(禮經), 악경(樂經)의

근본을 밝히지 않겠는가? 라고 말씀하셨다.

311.意在斯乎 意在斯乎(의재사호, 의재사호)!

아버님의 뜻이 여기에 있지 않았던가! 여기에 있지 않았던가!

312.小子何敢讓言(소자하감양언).

소자가 어찌 감히 그 일을 마다하겠습니까?”

313.上大夫壺遂曰(대부호수왈):

대부 호수(壺遂)가 물었다.

▶호수(壺遂)/전한 무제 때 사람으로 양(梁), 즉 지금의 개봉시(開封市) 출신이다. 사마천과 함께 율력을 제정하여 무제에게 건의하였다.

313.“昔孔子何爲而作<春秋>哉(석공자하위이작춘추)?”

“옛날 공자께서는 무엇을 위해 춘추를 지으셨는가?”

314.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대답했다.

315.ࡒ余聞董生曰(여문동생왈):

“나는 동중서(董仲舒)에게서 듣기를

▶동중서(董仲舒)/전한 때의 유학자. 그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학문은 오직 유학뿐이라고 무제에게 건의하여 한나라가 유학을 통치철학으로 삼게 만들었다. 이후로 유학은2000여 년 이상 중국 봉건 사회의 정통적 통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의 학설은 기존의 유학에 음양오행설을 가미시킨 것으로 사람의 인성은 가르침을 받아야만 선해진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을 주장했다.

316.周道衰廢(주도쇠폐),

주나라의 왕도가 쇠퇴하게 되어 행해지지 않은 때에

317.孔子爲魯司寇(공자위노사구),

공자께서 노나라의 사구(司寇)가 되었으나

▶사구(司寇)/춘추전국 시대 때 관직이름으로 주로 관리의 규찰과 형옥을 담당한 관서의 장(長)을 말한다.

318.諸侯害之(제후해지),

제후들은 해치려 하고

319.大夫雍之(대부옹지).

대부들은 뜻을 펼치려는 공자님의 앞길 방해하였다.

320.孔子知言之不用(공자지언지불용),

공자께서는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321.道之不行也(도지불행야),

추구하려는 도(道)도 세상에 행해지지 않게 될 것을 아시고

322.是非242年之中(시비242년지중),

242년에 걸친 역사의 시비를 따짐으로서

■242년/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는 노은공(魯隱公) 원년인 기원전722년부터 시작하여 노애공(魯哀公)14년 기원전481년까지의242년 동안의 역사책이다. 춘추는 편년체(編年體)로서 춘하추동(春夏秋冬) 방식으로 저술되어 그것을 줄여 춘추라 한 것이고 이어서 동주가 시작된 기원전771년부터 지금의 산서성에 있던 북방의 강국 당진(唐晋)이 한(韓), 위(魏), 조(趙)로 나뉘어 전국시대가 열린 기원전453년까지의 기간을 춘추시대라 명명한 것이다. 후에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自治通鑑)은 춘추와 같은 편년체 사서(史書)로서 춘추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323.以爲天下儀表(이위천하의표),

천하의 본보기로 삼으려 하셨다.

324.貶天子(폄천자),

비록 천자라 할지라도 잘못이 있으면 깎아 내리고

325.退諸侯(퇴제후),

옳지 않은 제후들은 물리치며

326.討大夫(토대부),

직분을 지키지 못한 대부들은 성토하여

328.以達王事而已矣.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관한 일을 달성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했다.

329.子曰: 我欲載之空言(자왈, 아욕재지공언),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내가 실제적이지 않은 말로 기록하려고 했으나,

330.不如見之于行事之深切著明也(불여견지우행사지심절저명야)

그 보다는 차라리 재위에 있는 자들이 행한 일의 시시비비를 거론하여,

그 일을 더욱 더 절실하고도 명백하게 할 수 있었다."라고 말씀하셨다.

331.夫<春秋>(부<춘추>)

공자께서 지으신 춘추는

332.上明三王之道(상명삼왕지도),

위로는 삼왕의 도를 밝히고

▶삼왕(三王)/ 하(夏) 나라를 세운 우(禹)임금, 상(商)나라를 세운 탕(湯)임금, 주나라를 세운 문왕(文王)을 말한다.

333.下辯人事之紀(하변인사지기),

아래로는 인간사의 기강을 논하여

334.別嫌疑(별혐의),

의심스러운 것을 밝히고

335.明是非(명시비),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했으며,

336.定猶豫(정유예),

사람들이 망설이는 것을 확실히 하게 했고

337.善善惡惡(선선악악),

옳은 일은 옳다고, 그른 일은 그르다고

338.賢賢賤不肖(현현천불초),

어진 사람은 어질다 하고, 불초한 자는 천하다고 했다.

339.存亡國(존망국),

망한 나라의 이름은 보존하게 하여

340.繼絶世(계절세),

그 끊어진 대를 계속 잇게 만들었으며

341.補弊起廢(보폐기폐)

낡아서 해진 것을 보충하고

폐하여 없어진 것은 다시 일으켜 세웠으니

342.王道之大者也(왕도지대자야).

가장 큰 왕도를 세웠다고 할 수 있다.

343.<易>著天地陰陽四時五行(역저천지음양사시오행),

역경(易經)을 저술한 목적은

천지(天地), 음양(陰陽), 사시(四時), 오행(五行)을 밝히기 위해서임으로

344.故長于變(고장우변):

사물의 변화를 아는데 그 뛰어난 장점이 있고

345.<禮經>紀人倫,故長于行(예경기인륜, 고장우행);

예경(禮經)은 인륜의 기강에 대해 서술했음으로,

인간의 행위를 밝히는데 뛰어나며

346.<書>記先王之事(서기선왕지사),

서경(書經)은 선왕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라

347.故長于政(고장우정);

정치 방면에 대한 기술이 뛰어나다.

348.<詩>記山川谿谷禽獸草木牝牡雌雄(시기산천계곡금수초목빈모자웅),

또한 시경(詩經)은 산천(山川)과 계곡(溪谷), 들짐승과 날짐승, 초목,

빈모(牝牡)와 자웅(雌雄)에 관한 기록이기 때문에

349.故長于風(고장우풍);

풍속과 사람들 사이의 애증에 관한 기술에 장점이 있다.

350.<樂>樂所以立(악악소이립),

악경은 음악을 논술함으로서 사람이 서야 할 곳을 가리키는 경전인 관계로

351.故長于和(고장우화);

화목하게 하는데 뛰어난 점이 있다.

352.<春秋>辯是非(춘추변시비),

춘추는 옳고 그름을 판별한 책이기 때문에

353.故長于治人(고장우치인).

정치하는 사람이 읽으면 깨닫는 바가 많게 되고

354.是故<禮>節人(시고예절인),

예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절제하게 만든다.

355.<樂>以發和(악이발화),

악경은 그 소리로서 화합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며

356.<書>以道事(서이도사),

서경은 정사를 밝히고

357.<詩>以達意(시이달의),

시경은 사람의 감정을 전달하는데 그 편찬한 뜻이 있으며

358.<易>以道化(역이도화),

주역은 세상사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359.<春秋>以道義(춘추이도의).

춘추는 세상의 의에 대해 말했다.

360.撥亂世反之正(팔란세반지정),

그런 까닭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돌려놓아 올바르게 만드는 데는

361.莫近于<春秋>(막근우춘추).

춘추만한 책이 없다.

362.<春秋>文成數萬(춘추문성수만),

춘추는 수만 자의 책에 불과하나

▶춘추는 실제로16,500자에 불과하다.

363.其指數千(그지수천).

그러나 그 뜻하는 바는 수천 가지이다.

364.萬物之散聚皆在<春秋>(만물지산취개재).

만물이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 모두 춘추 안에 있으며

365.<春秋>之中(춘추지중),

춘추의 기록에는

366.弑君三十六(시군삼십육)

살해당한 군주는36명이며

377.亡國五十二(망국오십이)

망한 나라는52개국에

368.諸侯奔走不得保其社稷者不可勝數(제후분주부득보기사직자부가승수).

그 사직을 보존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달아난

제후들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369.察其所以(찰기소이),

그런 일들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370.皆失其本已(개실기본이).

모두가 그 본분을 잃었기 때문이다.

371.故<易>曰失之豪厘(고역왈실지호리),

그런 까닭에 역경에서 말하기를“잃은 것은 터럭이나

372.差以千里(차이천리)”.

그 차이는 천리만큼이나 크다고 했다.”

373.故曰臣弑君(고왈신시군),

또한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하고

374.子弑父(자시부),

아들이 그 아비를 죽인 것은

375. 非一旦一夕之故也(비일단일석지고야),

단지 하루아침에 일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376.其漸久矣(기점구의).

오랫동안의 일이 점차적으로 쌓였다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377.故有國者不可以不知<春秋>(고유국자불가이부지춘추),

그런 까닭에 위정자들은 춘추를 읽지 않으면 안 된다.

378.前有讒而弗見(전유참이불견),

춘추를 알지 못하면 바로 코앞에서 아첨하는 자도 알아보지 못하고

379.後有賊而不知(후유적이부지).

뒤에 숨어서 역심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380.爲人臣者不可以不知<春秋>(위인신자불가이부지춘추),

남의 신하가 되려고 하는 자도 춘추를 모르면 안 되고

381.守經事而不知其宜(수경사이부지기의),

춘추를 알지 못한 관계로 평상시의 일만을 알뿐 적절하게 대처할 줄 모르고

382.遭變事而不知其權(조변사이부지기권).

변고를 만났을 때는 그 임기응변의 기지를 발휘할 줄 모른다.

383.爲人君父而不通于<春秋>之義者(귀인군부이불통우춘추지의자),

사람이 남의 군주나 아비가 되었음에도 춘추의 대의에 통하지 못한다면

384.必蒙首惡之名(필몽수악지명).

그 사람은 필시 악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385.爲人臣子而不通于<春秋>之義者(위인신자이불통우춘추지의자),

남의 신하나 자식이 된 자가 춘추의 대의를 깨닫지 못한다면

386.必陷纂弑之誅(필함찬시지주),

필시 찬역이나 시해의 일에 연루되어 주살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고

387.死罪之名(사죄지명).

죽을죄를 지었다는 악명을 얻는다.

388.其實皆以爲善(기실개이위선),

사실은 그들은 옳다고 여겨 행한 일이지만

389.爲之不知其義(위지부지기의),

춘추의 대의를 알지 못하고 행했기 때문에

390.被之空言而不敢辭.

사가들로부터 사실이 아닌 말로 시역죄를 저질렀다고

단죄를 받는다 해도 감히 변명하지 못하게 된다.

391.夫不通禮義之旨(부불통예의지지),

무릇 예와 의의 요지를 모른다면

392.至于君不君(지우군불군),

결국은 군주는 군주답지 못하게 되고

393.臣不臣(신불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게 되며

394.父不父(부불부),

아비 되는 자는 아비답지 못하고

395.子不子(자불자).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게 된다.

396.夫君不君則犯(부군불군즉범),

대저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신하들로부터 범함을 입게 되고

397.臣不臣則誅(신불신즉주),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군주에 의해 주살됨을 피할 수 없게 되며

398.父不父則無道(부불부즉무도),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면 무도한 아비가 되고

399.子不子則不孝(자불자즉불효).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불효자식이 된다.

400.此四行者(차사행자),

이 네 가지를 행위야말로

401.天下之大過也(천하지대과)

천하의 가장 큰 잘못이다.

402.以天下之大過予之(이천하지대과여지)

이 천하의 가장 큰 죄과를

403.則受而弗敢辭(즉수이불감사).

뒤집어쓰면서도 감히 아무런 대꾸도 못할 것이다.

404.故<春秋>者(고춘추자),

그런 까닭에 춘추는

405.禮義之大宗(예의지대종).

예와 의를 밝히는 가장 큰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406.夫禮禁未然之前(부례금미연지전),

무릇 예란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고

407.法施已然之後(법시이연지후);

법은 이미 일어난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408.法之所爲用者易見(법지소위용자기견),

그런데 법이 소용되는 바는 누구든 쉽게 알고 있으면서도

409.而禮之所爲禁者難知(이예지소위금자난지)

예는 어떤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소용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410.壺遂曰(호수왈):

호수가 말했다.

411.孔子之時(공자지시),

공자께서 살아계실 때는

412.上無明君(상무명군),

위로는 밝은 임금이 없었고

413.下不得任用(하부득임용),

아래로는 그 자신도 임용되지 못했음으로

414.故作<春秋>(고작춘추),

춘추를 지어,

415.垂空文以斷禮義(수공문이단예의),

공허한 글을 나열하여 예의를 끊어

416.當一王之法(당일왕지법).

당대의 왕으로 하여금 법전으로 삼게 만들었습니다.

417.今夫子上遇明天子(금부자상우명천자),

그러나 지금 그대는 위로는 밝은 천자를 만났고

418.下得守職(하득수직),

아래로는 관직에 있으니

419.萬事旣具(만사기구),

만사가 이미 갖추어졌으므로

420.咸各序其宜(함각서기의),

게다가 세상의 모든 것은

질서가 정연하여 각기 있어야할 곳에 있는데,

423.夫子所論(부자소론),

그대가 지금 논하는 바는

424.欲以何明(욕이하명)?

무엇을 밝히기 위해서입니까?

425.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말했다.

426. 唯唯, 否否, 不然(유유, 부부, 불연).

아, 예!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427.余聞之先人曰(여문지선인왈):

저는 돌아가신 선친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428. “伏羲至純厚(복희지순후),

옛날 복희(伏羲)씨는 지극히 순박하고 후덕하여

▶복희(伏羲)/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삼황(三皇) 중 태호(太昊)를 말하며 그는 자기의 형매인 여왜(女媧)와 혼인하여 인류의 조상이 되었고 주역의 팔괘를 만들었으며, 백성들에게 어업과 목축을 가르쳤다. 삼황은 복희씨와, 신농(神農) 염제(炎帝), 황제(皇帝) 헌원(軒轅)을 말한다.

429.作<易>八卦(작역팔괘).

백성들을 위하여 주역의 팔괘를 만들고

430.堯舜之盛(요순지성),

번성했던 요순시대에

431.<尙書>載之(상서재지),

상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432.禮樂作焉(예악작언).

예와 악이 만들어졌으며

433.湯武之隆(탕무지융),

탕임금과 무왕이 새로이 나라를 일으킨 일은

434.詩人歌之(시인가지).

시인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고 있다.

435.<春秋>采善貶惡(춘추채선폄악),

춘추는 선을 취하고 악을 물리쳐

436.推三代之德(추삼대지덕),

하상주(夏商周) 삼대의 덕을 추앙하고

437.褒周室(포주실),

주나라 왕실을 높였으니

438.非獨刺譏而已也(비독자기이이야).

이는 단지 풍자와 비방만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439.漢興以來(한흥이래),

한나라가 새로 일어난 이래

440.至明天子(지명천자),

영명한 천자가 나타나시니

441.獲符瑞(획부서),

하늘에서 상서로운 징조 있어

442.封禪(봉선),

태산과 양보산(梁父山)에 봉선을 행하게 되었고

443.改正朔(개정삭),

해와 달의 시작하는 날을 바꿔 새로운 역법을 시행했으며

▶정삭(正朔)/ 정(正)은 한 해의 첫째 달이고, 삭(朔)은 한 달의 초하루이다 .

444.易服色(역복색),

관복의 색을 바꿔

▶관복의 색을 바꾼 것은 오행설에 의해 진나라 때 시작된 수덕(水德)을 의미하는 검은 색의 관복을 화덕(火德)을 의미하는 적색으로 바꿨음을 말한다.

445.受命于穆淸(수명우목청),

하늘로부터 미덕으로 교화를 이루라는 천명에 따랐음으로

▶목청(穆淸)/미덕(美德)으로 이룬 교화(敎化)를 말함

446.澤流罔極(택류망극),

사방으로 베푼 은혜는 미치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447.海外殊俗(해외수속),

또한 나라 밖의 습속이 같지 않은 이민족 국가들이

448.重譯款塞(중역관색),

통역에 통역을 거치며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우리 중국의 변방을 지키는 관문에 당도한 후에

449.請來獻見者(청래헌견자),

천자께 조현을 드리고자 청한 자들의 숫자는

450.不可勝道(불가승도),

하도 많아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451.臣下百官力誦聖德(신하백관력송성덕),

그러나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성상 폐하의 높으신 덕을

힘껏 칭송하고 있다고는 하나

452.猶不能宣盡其意(유불능선진기의).

아직도 그 뜻을 충분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453.且士賢能而不用(차사현능이불용),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어질고 유능한 선비들을

불러서 다 쓰지 못하고 있음은

454.有國者之恥(유국자지치),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에게는 치욕이며

455.主上明聖而德不布聞(주상명성이덕불포문),

주상께서 밝고 성스러운 덕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세상에 널리 알리지 못하고 있음은

456.有司之過也(유사지과야).

바로 관원들의 잘못입니다.

457.且余嘗掌其官(차여상장기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미 그 일을 맡은 관리가 되었으나

458.廢明聖盛德不載(폐명성성덕부재),

밝고 어진 성상폐하의 크나큰 성덕을 폐하고 기록하지 않으며

459.滅功臣世家賢大夫之業不述(멸공신세가현대부지업불술),

공신, 세가, 현대부들이 이룩한 업적을 인멸하고 기술하지 않는다면

460.墮先人所言(타선인소언),

선친께서 나에게 당부한 유언을 지키지 못한 일이 되어

461.罪莫大焉(죄막대언).

제가 저지른 죄는 너무나 클 것입니다.

462.余所謂述故事(여소위술고사),

제가 기술하려고 하는 소위 옛날 일은

463.整齊其世傳(정제기세전),

대대로 전승해온 기록들의 정리이지

464.非所謂作也(비소위작야),

내가 지어내는 일은 아닙니다.

465.而君比之于<春秋>(이군비지우),

그런 까닭에 대부께서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을 춘추와 대비함은

466.謬矣(유의).

잘못 된 일입니다.

467.于是論次其文, (우시논차기문)

이에 연유로 사서의 문장을 차례로 논하게 되었습니다.”

468.七年而太史公遭李陵之禍, (칠년이태사공조이릉지화)

사서를 논하기 시작해서7년 째 되는 해에 태사공은 이릉(李陵)의 화를 당하여

▶이릉지화(李陵之禍)/ 기원전88년 한무제(漢武帝) 2년에 기도위(騎都衛)였던 이릉(李陵)이 흉노를 정벌하러 출정했다가 준계산(浚稽山)에 이르렀을 때 한나라 군사들보다 몇 배나 많은 흉노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었으나 끝까지 항전하다 결국은 힘이 다하여 흉노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한무제가 중국에 남아 있던 이릉의 가족을 잡아들여 죽이려고 하자 사마천이 나서 이릉을 변호했다. 이에 한무제가 노하여 사마천을 하옥시키고 궁형에 처했다. 이 일에 대해 사마천의 심경을 자세하게 토로한 글이 한서의 사마천열전 중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실려있다.

469.幽于縲絏(유우유설).

포승줄에 묶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470.乃喟然而嘆曰:(내위연이탄왈)

감옥에 갇힌 태사공은 깊이 탄식하며 말했다.

471." 是余之罪也夫! (시여지죄야부)

어째서 이것이 나의 죄란 말인가!

472.身毁不用矣."(신훼불용의)

몸은 망가져 이젠 쓸모가 없게 되었구나!"

473.退而深惟曰: (퇴이심유왈)

태사공은 물러 나와 깊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474." 夫<詩>, <書>隱約者, (부시서은약자)

무릇 시경과 서경의 내용이 깊고 그윽하면서도 간략한 것은

475.欲遂其志之思也.(욕수기지지사야)

그 지은이가 마음속에 뜻하고 있던 바를 이루고 싶어서였기 때문이었고

476.昔西伯拘羑里,(석서백구유리)

옛날에 서백은 은나라의 주왕(紂王)에게 잡혀

유리(羑里)에 갇혀 있으면서

▶서백(西伯)/주문왕 창(昌)을 말한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에 의해 서백(西伯)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주무왕(周武王)에 이르자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의 주인이 되었다.

▶유리(羑里)/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남 탕음현(湯陰縣) 경내에 있었던 은나라 때의 성읍 이름.

477.演<周易>; (연주역)

주역을 더하여 풀이하였고

▶주역(周易)의 성립은 확실한 것은 아니나 복희씨(伏羲氏)가8괘를 만들고 다시 신농씨(神農氏)가64괘로 나누었으며 주문왕(周文王)은 각 괘에 사(辭)를 붙였다고 했다. 이어서 주문왕의 동생인 주공(周公) 단(丹)이 효사(爻辭)를 공자가 십익(十翼)을 붙였다고 했다. 주문왕이 유리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주역에 괘사(卦辭)를 만들어 붙인 것을 말한다 .

478.孔子厄陳蔡, (공자액진채)

공자는 진(陳)과 채(蔡)나라 사이를 지나다가 곤경에 처해진 와중에서

▶주경왕(周敬王) 31년, 기원전489년 초소왕(楚昭王) 진(珍)이 채(蔡)와 진(陳)나라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던 공자에 관한 소식을 듣고 공자의 일행을 초나라에 초빙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채와 진 두 나라의 대부들은 공자가 초나라로 가서 중용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군사를 보내어 공자 일행을 포위함으로서 공자와 그 제자들이 양식이 떨어져 매우 곤란한 처지에 노이게 되었던 것을 말한다.

479.作<春秋>; (작춘추)

<춘추>를 지었으며

480.屈原放逐, (굴원방축)

굴원은 추방되어 상수(湘水) 강변을 배회하면서

▶굴원(屈原)/굴평(屈平)을 말한다. 평(平)은 이름이고 원(原)은 자(字)이다. 초나라 왕족 출신으로 초회왕(楚懷王) 밑에서 상관대부(上官大夫)와 좌도(左徒)의 벼슬을 살면서 내정과 외교에 많은 활약을 했으나 다른 신하들의 시기를 받았다. 초회왕이 진(秦)나라의 계교에 빠져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다가 그 곳에서 객사하자 회왕의 장남이 경양왕(頃襄王)으로 즉위하고 막내아들인 자란(子蘭)이 초나라 상국이 되었다. 자란의 잘못으로 인하여 초회왕이 진나라에 잡혀갔다고 생각한 굴원은 그를 비난하였다. 자란은 굴원을 경양왕에게 참소하여 대부의 직에서 파직하고 쫓아내자 굴원은 초왕을 걱정하며 지금의 동정호(洞庭湖)와 상수(湘水) 부근을 배회하다가 멱라수(汨羅水)에 돌을 품고 빠져 죽었다. 고대 시가문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초사문학을 창시한 사람으로 저작에는<이소(離騷)>, <어부사(漁父詞)>, <천문(天問)>, <구장(九章)> 및<초혼(招魂)> 등이 있다.

481.著<離騷> (저이소),

이소를 노래했다.

▶이소(離騷)/이소는 모두2490자로 된 굴원의 대표적인 서사이다. 이(離)는 별(別), 소(騷)는 수(愁) 즉'이별의 슬픔'이라는 왕일(王逸) 설과'근심을 만나다'라는 반고(班固) 설이 있다. 굴원은 이소의 시에서 그의 충정과 비탄, 애국과 원망, 참회와 절망, 끝으로 절명의 심정을 노래했다.

482.左丘失明(좌구실명),

좌구명은 실명을 했음에도

▶좌구(左丘)/ 춘추 때 노나라의 태사(太史) 좌구명(左丘明)을 말한다. 공자 직전 혹은 동시대 인. 두 눈을 실명한 장님이다. 춘추좌전(春秋左傳)의 작자이며 또한<국어(國語)>의 작자라는 설도 있다.

483.厥有<國語> (궐유국어)

국어(國語)를 지을 수 있었으며

▶국어(國語)/국어(國語)가 좌구명의 작품이라는 설은 사마천의 본 구절 때문인데 본서의 기술 내용과는 달리 그 작자가 정확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국어의 집필 연대는 전국시대로 보고 있다. 모두21권으로 되어 있으며 주(周), 노(魯), 제(齊), 진(秦), 정(鄭), 초(楚), 오(吳), 월(越) 등의 나라로 나누어 편집되었으며 주나라 목왕(穆王: 재위 기원전10세기 전반)부터 시작되어 노도공(魯悼公: 기원전466- 429)까지 역사를 기술한 사서이다. 서술방법은 춘추좌전과 같은 편년체이다.

484.孫子臏脚,(손자빈각)

손빈은 다리의 슬개골이 잘려 앉은뱅이가 되었으나

▶손빈(孫臏)/동문수학한 방연(龐涓)의 음모로 무릎의 슬개골(膝蓋骨)을 제거 당하여 앉은뱅이가 되었으나 후에 제나라의 장군 전기(田忌)의 군사가 되어 계릉(桂陵)과 마릉(馬陵) 싸움에서 방연이 이끌던 위(魏)나라 군사들을 대파하였다. 위나라는 이 싸움에서 패함으로서 전국시대 초반에 확보했던 주도권을 상실하고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손자병법은 원래 손자라고 불리우던 춘추 초기의 손무(孫武)의 작품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왔으나1972년 산동성(山東省) 임기시(臨沂市) 은작산(銀雀山)에서 발굴된 한나라 때 조성된 묘에서 손빈이 저술한 병서13편의 죽간이 출토되었다. 손무의 병법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그 내용이 풍부하고 문학적 가치가 높은 병서이다 .

485.而論兵法; (이논병법)

책을 써 병법을 논했고

486.不韋遷蜀,(불위천촉)

여불위는 촉나라로 유배되어 불우하게 되었음에도

▶여불위(呂不韋)/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235년에 죽었다. 전국시대 때 진(秦)나라의 대신이며 위(衛)나라 복양(濮陽) 사람으로 원래는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에 있었던 양책(陽翟)의 대상인이었다. 당시 진나라의 공자 이인(異人)이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을 보고"참으로 기화(奇貨)로다"라고 생각하고 많은 돈을 들여 그와 교우를 맺었다. 이어서 진나라에 들어가 당시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의 부인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 유세하여 이인(異人)을 그녀의 적자로 삼게 만들었다. 화양부인과 안국군 사이에는 적자가 없었다. 진소양왕(秦昭陽王)이 죽고 안국군이 진왕의 자리에 오르자 이인은 그의 태자가 되었다. 안국군의 시호는 효문왕(孝文王)이다. 효문왕이 소양왕의 상을 치르는 동안 갑자기 죽자 이인이 그 뒤를 이어 진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장양왕(庄襄王)이다. 장양왕은 여불위를 진나라 상국에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하고 그 식읍으로10만호를 내렸다. 장양왕에게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 여불위가 자기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던 애첩을 장양왕에게 바쳐서 낳은 아들이 바로 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다. 장양왕이 재위3년만에 죽고13세의 진시황이 즉위하자 여불위는 계속 상국의 자리를 차지하고 진시황은 여불위를 중보(仲父)로 높여 부르다가 여불위가 자기의 옛날 애첩이었던 태후에게 천거한 노애(嫪毐)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시황은 그를 연루시켜 상국의 자리에서 파면하고 사천으로 유배 시켰다. 여불위는 사천으로 가던 도중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불위는 진나라의 상국으로 재직 중에 모두26권으로 된<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지었다. 여불위가<여씨춘추>를 사천으로 유배가서 지었다는 사마천의 기술은 잘못이다.

487.世傳<呂覽>; (세전여람)

만세에 전해질 여람을 편찬했고

▶여람(呂覽)/여씨춘추(呂氏春秋)를 말함. 여불위가 진나라 상국으로 있을 때 심혈을 기우려 만든 일종의 백과사전을 말한다. 그가 거느린3천여 명의 식객들로 하여금 그들이 갖고 있던 견문과 학설 및 설화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 처음 편찬할 때에는 팔람(八覽), 육론(六論), 십이기(十二紀)로 되어 있어 이 책의 이름을 여람(呂覽)이라고 했으나 후에 십이기(十二紀), 팔람(八覽), 육론(六論)으로 그 순서가 바뀌었다. 이 책의 편찬 목적은 십이기의 마지막 편인<서의편(序意篇)>에' 사람들을 통해서 자연의 이치를 알고, 인륜 규범을 깨닫고 실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밝혔다. 12기는 맹춘(孟春), 중춘(仲春), 계춘(季春), 맹하(孟夏), 중하(仲夏), 계하(季夏), 맹추(孟秋), 중추(仲秋), 계추(季秋), 맹동(孟冬), 중동(仲冬), 계동(季冬)의 각5편 씩과 서의편(序意篇)을 합한61편과, 팔람(八覽)은 효행(孝行), 신대(愼大), 선식(先識), 심분(審分), 심응(審應), 이속(離俗), 시군(恃君)의 각8편과 유시(有始)의 각7편 씩을 합하여63편 및 육론의 개춘(開春), 신행(愼行), 귀직(貴直), 불구(不苟), 사순(似順), 사용(士容)의 각6편 씩의36편을 합하여 여씨춘추는 모두160편으로 되어있다. 또한 유가(儒家), 법가(法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음양가(陰陽家), 병가(兵家), 농가(農家) 등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설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어 진나라 시대 때의 사상 연구을 위한 귀중한 자료이다 .

488.韓非囚秦,(한비수진)

한비자는 진나라에 가서 감옥에 갇힌 중에

▶한비(韓非)/ 중국 전국시대 때의 사상가. 법가의 대표적 인물. 원래 한나라의 공족 출신으로,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하는데 큰공을 세웠던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荀卿) 즉 순자(荀子)에게서 동문수학했다. 도가(道家), 유가(儒家), 묵가(墨家)의 사상을 흡수하여 뒤에 법가사상을 집대성하였다. 조국 한나라의 쇠약함을 한탄하며 한왕에게 여러 번에 걸쳐 변법을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변설에 능하지 않아 등용되지 못했으나 현실 분석과 대책에 뛰어나 탁월한 저서를 남겼다. 순자의 성악설을 계승하여 군신, 부자, 부부관계 등 인간의 일체의 행위가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다는 인성이기설(人性利己說)을 주장하였다. 도를 모든 사물이 운동하는 객관적 법칙으로, 이(理)를 구체적 사물이 운동하는 특수법칙으로 보고,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로 다 같이 사물 속에 존재하며 부단히 변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를 통해 인류사회 역사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그 변화에 따라 법률이나 제도도 변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역사관을 피력하였다. 또한 유가적 덕치를 바탕으로 한 인정(仁政)을 시대착오라고 비판하고, 주관적인 지(智)나 신(信)이 아니라 객관직인 법과 세에 의존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 실무본위(實務本位)의 법치를 주장하였다. 상앙(商鞅)의 법, 신불해(申不害)의 술, 신도(愼到)의 세를 도모하였으며, 노자의 무위허정(無爲虛靜)을 근본으로 군주의 통치술을 제시하였다. 현실정치에 대한 그의 견해는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영향을 주었다. 화평사신으로 진나라에 갔을 때 진시황이 그를 등용하려 하였으나 이사(李斯), 요가(姚賈)의 무고(誣告)로 옥사하였다 .

489.<說難><孤憤>;(세난고분)

세난과 고분을 저술했다.

▶세난(說難)/세란 다른 사람을 말로써 설득하여 동감하게 만드는 유세의 의미이다. 그래서 세난이라 하면 남을 유세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전국시대에 유세의 행위란 재주 있는 자들이 벼슬을 얻을 수 있는 등용문이었다. 하지만 성공하는 사례는 소수에 불과하였으니 한비 또한 그 같은 어려움을 토로하고자 이 글을 지었다.

▶고분(孤憤)/외롭게 홀로 울분에 가득 차 있다는 뜻이다. 고립무원에 처한 법술가(法術家)들이 권신들의 방해를 받아서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중용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비 자신이 처한 불만의 심경을 토로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490.<詩>三百篇, (시삼백편)

시3백편도

▶시삼백편(詩三百篇)/공자가 편찬한 시경을 말한다. 정확히 시경에는305 수의 시가(詩歌)가 실려있다.

491.大抵賢聖發憤之所爲作也.(대저현성발분지소위작야)

대체로 현인과 성인들이 모두 자기 마음속에 맺혀 있던 울분을 토로하기 위해 책을 저술한 것이며,

492.此人皆意有所郁結,(차인개의유소욱결)

그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맺혀 있는

493.不得通其道也, (부득통기도야)

자기의 이상과 주장을 풀어 버릴 방법을 얻지 못한 나머지

494.故述往事, (고술왕사)

옛날 일을 말하여

495.思來者." (사래자)

미래의 일을 생각한 것이다."

496.于是卒述陶唐以來,(우시졸술도당이래)

그래서 결국은 요임금과 순임금이래

497.至于麟止,(지우린지)

획린(獲麟)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저술했다.

498.自黃帝始.(자황제시)

이에 본서는 황제(黃帝)부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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