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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2:03:319190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5-3. 오기(吳起)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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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오기(吳起)

1. 殺妻求將(살처구장)

- 부인을 죽여 장군이 되다. -

오기(吳起)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병사의 일을 즐겨했다. 옛날에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노나라 군주를 섬겼다. 제나라가 군사를 내어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는 오기를 장수로 삼아 제군을 물리치려고 했으나 오기의 부인이 제나라 출신의 여인이라 노후가 의심했다. 오기가 공명을 취할 욕심으로 그의 처를 죽여 제나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혔다. 노나라는 결국 오기를 대장으로 삼아 제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오기의 그러한 행위를 싫어한 어떤 노나라 사람이 말했다.

「오기란 위인은 시기심이 많고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가 어렸을 때 수천금의 가재를 털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벼슬을 구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은 그 집안이 망했습니다. 그의 고향 사람들이 그의 행위에 대해 비웃자 오기는 자기를 비방하던 사람 30여 명을 죽이고 위나라 도성의 동쪽으로 난 곽문(郭門)을 통하여 도망치면서 자기의 두 팔목을 이빨로 물어뜯고 가슴을 두드리며 그 모친에게 맹세의 말을 하기를 ‘ 이 기가 경상(卿相)이 되기 전에는 위(衛)나라 땅을 밟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노나라로 도망쳐 증자(曾子)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기가 증자의 제자가 되고 나서 얼마 후에 그 모친이 죽었으나 오기는 결국은 위나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증자가 이를 괘씸하게 여겨 박절하게 대하며 오기와 사제지간의 정을 끊었습니다. 증자에게서 파문을 당한 오기는 병법을 배워 노나라에서 벼슬을 얻었습니다. 노나라 군주가 오기를 의심하자 그는 자기의 처를 죽여 노나라의 장군의 자리를 구했습니다. 대저 노나라 같은 작은 나라가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명성을 얻게는 되었지만 그것은 곧 열국의 제후들이 노나라를 엿보게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노(魯)와 위(衛) 두 나라는 형제의 나라이기 때문에, 노나라 군주가 위나라 출신의 오기를 기용하는 것은 이는 위나라를 저버린 행위도 될 것입니다.」

노나라 군주가 그 사람의 말을 전해 듣고 오기를 의심하여 멀리했다.

오기는 당시 위(魏)나라의 문후(文侯)가 어질다는 소식을 듣고 위나라에 가서 벼슬을 구하려고 했다. 문후가 이극(李克)을 불러 물었다.

「 오기는 어떤 사람입니까?」

「 오기는 탐욕스럽고 여자를 밝히는 위인입니다. 그러나 군사를 부리는 재주는 사마양저(司馬穰苴)라도 그를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

2. 吮疽之仁(연저지인)

- 사졸의 고름을 입으로 빨다. -

그래서 위문후는 오기를 대장으로 삼아 진(秦)나라를 공격하여 그 다섯 개의 성을 빼앗았다.

오기가 대장이 되자 가장 신분이 낮은 군졸들과 동일하게 옷을 같이 입고 음식을 먹었다. 잠을 잘 때는 잠자리를 깔지 않았으며 행군을 할 때는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았다. 대장의 신분이면서도 자기의 식량을 직접 등에 짊어지고 다니며 사졸들과 함께 고생을 같이 나누었다. 어느 날 병졸 한 사람이 종기가 나자 오기가 직접 입으로 그 병사의 종기에서 고름을 빨아주었다. 그 병졸의 어머니가 그 소식을 듣고 슬피 울었다. 어떤 사람이 그 어머니에게 물었다.

「 당신의 아들은 말단 병사인데, 대장군이 스스로 그 종기를 빨아 주었다는 말을 듣고 어찌 그리 슬피 우는 것입니까?」

그 어머니가 말했다.

「 대장군이 내 아들을 사랑한 것에 대해 슬피 우는 것이 아니라, 오기장군이 옛날 그 부친의 고름을 빨아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내 남편은 싸움터에 나가 감격한 나머지 물러설 줄 모르며 열심히 싸우다가 적군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오기장군이 다시 내 아들의 종기를 빨아 주었으니 이 사람은 그가 죽을 데가 어디인 줄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슬피 우는 것입니다. 」

위문후(魏文侯)는 오기가 용병을 잘하고, 청렴하며 공평무사하여 사졸들의 마음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서하(西河) 태수로 임명하여 진나라와 한나라의 공격을 막게 했다.

3. 舟中敵國(주중적국)

- 덕으로써 정치를 행하지 않으면 이 작은 배도 적국으로 변할게 될 것이다. -

위문후가 죽자 오기는 그 아들 무후(武侯)를 섬겼다. 무후가 오기와 같이 배를 타고 하수의 물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중류되는 곳에 다다르자 오기를 쳐다보며 말했다.

「 참으로 훌륭하도다, 이 험고한 산하여! 이 위나라의 보배로다!」

「 나라의 보배는 덕에 있는 것이지 험고한 산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삼묘씨(三苗氏)1)가 세운 나라는 왼쪽으로는 동정호(洞庭湖), 오른쪽으로는 팽려호(彭蠡湖)2)를 끼고 있었으나 덕으로써 정치를 하지 않고 신의를 세우지 않아 하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라의 걸왕(桀王)이 있었던 곳은 하수(河水)와 제수(濟水)가 그 왼쪽에 있고 화산(華山)과 태산(泰山)이 그 오른 쪽에 있으며, 그 남쪽에는 이궐(伊闕)3)이 그 북쪽에는 양장(羊腸)4)이 있었지만 인정을 베풀지 못했기 때문에 상나라를 세운 탕임금에게 추방당했습니다. 또 상왕조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의 나라는 왼쪽으로는 맹문산(孟門山)5) 오른쪽으로는 태항산(太行山), 북쪽으로는 상산(常山)6)이 있고 남쪽에는 하수(河水)가 지나고 있었지만 덕으로써 정치를 하지 않아 결국은 주무왕(周武王)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중요한 것은 덕에 있는 것이지 산천의 험고한 지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군께서도 덕과 신의로 정치를 행하지 않는다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모두 적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옳은 말이오!」

4. 전문(田文)이 오기를 제치고 재상이 된 이유

오기(吳起)가 서하의 태수가 되어 그 이름이 더욱 높아졌으나 위나라가 그 재상으로 전문(田文)을 임명했다. 오기가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여 전문을 찾아가 말했다.

「 그대와 함께 누가 더 높은 공을 세웠는지에 대해 토론해보고자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좋습니다.」

「삼군을 이끌며 그 사졸로 하여금 싸움에 임해 즐거운 마음으로 죽기를 불사하게 만들어 적국으로 하여금 감히 이 나라를 넘보지 못하게 만든 것은 그대와 나 둘 중에 누가 공이 높다 하겠소?」

「나의 공이 그대보다 높지 못하오.」

「백관을 다스리고, 만민과 친근하게 지내며, 나라의 부고를 가득 채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것은 그대와 나 둘 중에 누가 더 공이 높다 하겠소?」

「나의 공이 그대보다 높지 못하오.」

「서하(西河)의 땅을 굳게 지켜 진나라가 감히 동쪽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막고, 한(韓)과 조(趙) 두 나라가 사신을 우리 위나라에 보내 복종을 하게 만든 것은 그대와 나 둘 중 누가 더 공이 높다 하겠소?」

「나의 공이 그대보다 높지 못하오.」

「이 세 가지 점에서 나보다 그대가 못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대의 지위가 나보다 높단 말이오?」

「지금 나라의 주인은 나이가 어려 민심이 매우 불안하고 대신들은 복종하지 않으며, 백성들은 나라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있소. 바로 이러한 어려운 때에 재상의 자리에 당신을 앉게 하겠소? 아니면 나를 앉게 만들겠소?」

오기가 전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대가 재상으로 적합하다고 하겠소!」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보다 윗자리를 차지한 까닭이오.」

오기는 비로소 자기의 재능이 전문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승복했다.

5. 提婚測心 旁加幹擾(제혼측심 방가간우)

- 혼인으로 마음을 떠보고 곁에서 근심을 부추기다. -

이윽고 전문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위나라 재상이 된 공숙좌(公叔痤)는 위나라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 오기가 자기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 공숙좌는 오기를 해치려 하였다. 공숙좌를 모시던 하인이 말했다.

「오기가 이 나라를 떠나게 만드는 일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어떤 방법이 있는가?」

그 하인이 말했다.

「오기라는 위인은 절조가 있고 청렴하며 명예를 중히 여깁니다. 대감께서 주공에게 ‘오기는 재능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위나라는 영토가 작고 강국인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신은 그가 과연 우리 위나라에 오래 머물려고 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라고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공께서 어찌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물을 것입니다. 그때 상국께서는 주공께 ‘ 공주를 오기에게 아내로 주겠다고 하면서 그의 마음을 떠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대답하십시오. 그런 다음 오기를 이 집에 초대하여 상국의 부인이신 공주의 화를 일부러 돋워 대감을 업신여기도록 하십시오. 오기는 공주가 대감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주공의 제안을 거절할 것입니다. 」

이윽고 공숙좌의 집에 초대된 오기는 공주가 위나라의 재상인 공숙좌에게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과연 위무후의 혼인 요청을 거절했다. 위무후는 오기가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여 그 후로는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 오기는 죄를 얻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위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갔다.

6. 伏身王尸 死後報仇(복신왕시 사후보구)

- 왕의 시신 위에 엎드려 죽은 목숨으로 원수를 갚다.

평소에 오기가 현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초도왕(楚悼王)7)은 그가 초나라에 당도하자 그 즉시 재상으로 임명했다. 오기는 초나라의 법령을 정비하고 다시 밝히고, 불요불급한 관직을 없앴으며, 왕실의 먼 공족들은 귀족의 지위를 박탈했다. 그로써 생긴 재화는 전사들을 양성하는데 사용했다. 오기가 시행하려고 했던 정치의 요체는 병력을 길러 실제적인 무장역량을 확충하여 합종(合縱)이니 연횡(連橫)이니 하는 유세객들의 주장을 물리치는데 있었다. 오기의 개혁에 힘입어 초나라는 남쪽의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진(陳)과 채(蔡) 두 나를 멸하고 초나라의 땅으로 만들었으며, 삼진(三晋)의 공격을 막아냈다. 서쪽으로는 강력한 진나라를 정벌하여 열국의 제후들은 초나라의 강성함을 근심하였다.

오기의 개혁정책으로 인해 권리가 박탈된 초나라의 귀척(貴戚)들은 모두 오기를 해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이윽고 초도왕이 죽게 되자 종실과 대신들이 란을 일으켜 오기를 공격했다. 오기는 달아나 도왕의 시신 위에 엎드렸다. 오기를 공격하던 무리들이 활을 쏘아 그를 죽이면서 많은 화살이 도왕의 시신을 맞추었다. 도왕의 장례가 끝나고 태자가 그 뒤를 이어 초왕의 자리에 앉았다. 초왕은 즉시 영윤(令尹)에게 명을 내려 오기를 죽이면서 화살을 쏘아 부왕의 시신을 맞춘 자들을 색출하여 모두 죽이도록 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세상에는 군사의 일을 말하는 사람들은 다 <손자(孫子) 13편>과 오기(吳起)의 <병법(兵法)>을 말한다. 이 두 저서는 세상에 많이 알려져 음으로 그 내용에 대해는 언급하지 않고 그들이 행한 사적과 정책을 논한다. 옛말에 <실행을 잘 하는 사람이 반드시 말도 잘 하는 것은 아니며, 말을 잘하는 자가 반드시 실행을 잘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손빈(孫臏)이 방연(龐涓)을 계략으로 함정에 빠뜨린 것은 지혜라고 하겠으나 일찍이 자기에게 닥쳐올 환난과 형벌은 구제하지 못했다. 오기는 위무후(魏武侯)에게 지형이나 지세의 험준한 것이 덕을 닦는 것만 못하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 초나라에서 행한 정치는 각박하고 포악했으며, 또한 은혜를 베푸는데 인색하여 그 몸을 망친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라 하겠다.

- 오기열전 끝 -

1)삼묘씨(三苗氏)/ 장강(長江), 회수(淮水) 및 형주(荊州) 일대에 분포되어 살던 고대의 소수민족 이름. <오제본기> 순임금 조에 삼묘씨가 삼위(三危)로 옮겨가 서융(西戎)이 되었다고 했다.

2)팽려호(彭蠡湖)/ 지금의 강서성의 파양호(鄱陽湖)를 말한다.

3)이궐(伊闕)/이궐새(伊闕塞)를 말함. 지금의 하남성 낙양의 남쪽에 있으며 두 산봉우리가 이수(易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어 마치 궁궐과 같이 보인다고 해서 이궐이라 했다. 기원전 293년 진나라의 백기(白起)가 한위(韓魏) 두 나라의 연합군을 이 곳에서 격파하고 그 군사 24만을 참수했다. 후에 용문(龍門)이라고 했으며 유명한 용문석굴(龍門石窟)이 있는 곳이다.

4)양장(羊腸)/태항산(太行山 : 지금의 하북성과 산서성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의 이름으로 옛날부터 태항산 서쪽은 산서, 동쪽은 산동이라 칭했다.)에 있는 산길로써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길이라고 해서 양장판(羊腸坂)이라 칭했다.

5)맹문산(孟門山)/지금의 하남성 휘현 서쪽의 십자령(十字嶺)을 말함.

6)상산(常山)/ 항산(恒山)의 별명. 중국 오악(五嶽) 중 북악. 한문제(漢文帝)의 이름이 유항(劉恒)이었던 관계로 그 이름을 휘(諱)하여 상산(常山)이라 개칭한 것이다. 지금의 하북성 곡양현(曲陽縣) 서북과 산서성과의 접경지대에 걸쳐 있다.

7)초도왕(楚悼王)/ 전국 때 초나라 군주로 기원전 401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381년에 죽었다. 그의 집정 기간 중에 오기(吳起)를 재상으로 기용하여 초나라의 내정을 개혁하고 법령을 밝혀 군대의 전투력을 높였다. 수구세력인 공실귀족의 발호를 억압하여 초나라 왕실의 위엄을 높였다. 대외적으로는 남쪽으로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진(陳)과 채(蔡) 두 나라를 복속했으며 서쪽으로는 진(秦)나라를 정벌하여 국세가 크게 일신되었다. 21년을 재위하다가 죽었을 때 옛날 오기로 하여금 탄압 받았던 공실의 귀족들이 그 틈을 타서 란을 일으켜 오기를 활로 쏘아 죽임으로써 초나라의 개혁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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