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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2. 보임안서(報任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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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보임안서(報任安書)

【보임안서(報任安書)】

【보임안서(報任安書)】

《임안에게 보내는 답장[보임안서(報任安書)]》은 사마천(司馬遷)이 한무제(漢武帝)와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 사이에 벌어진 내전(內戰)에 연루되어 얻은 죄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임안(任安)에게 보낸 서신이다.
임안은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출신에 자는 소경(少卿)으로 한무제 밑에서 익주자사(益州刺史)와 북군사자호군(北軍使者護軍)이 되었다. 임안에 대해서는 후한의 저소손(褚少孫)이 그의 행적에 대해 보찬(輔贊)해서《사기·전숙열전(田叔列傳)》의 말미에 붙였다. 평소에 사마천과 교유가 있었던 임안이 익주자사 시절 치욕스러운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된 사마천에게 황제를 곁에서 시종하면서 현인을 천거하라고 편지를 보내 조언했다. 궁형을 받아 선비들이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했던 환관의 신분으로 전락한 사마천에게는 임안의 편지는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을 찔렀다.
분만(憤懣)한 마음을 가슴에 묻어두고 《사기》의 저술에 몰두하던 중, 한무제 정화(征和) 2년 기원전 91년, 무고(巫蠱)의 란이 일어났다. 감천궁에 기거하던 무제가 병이 들자 총신 강충(江充)이 그 병은 무고(巫蠱)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신에 미혹된 무제는 강충에게 무고의 옥사를 다스리게 했다. 대대적인 옥사를 일으킨 강충은 경사와 군국의 수만 명을 연루시켜 살해했다. 강충은 한술 더 떠서 평소에 자기와 사이가 나쁜 태자를 모함하여 제거하기 위해 무당 호무(胡巫)를 시켜 궁중에 무고의 기운이 있다고 고하게 했다. 무제는 강충과 안도후(安道侯) 한열(韓說)과 함께 궁궐에 들어가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명했다. 강충은 무제에게 태자궁의 땅 밑에서 목우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고했다. 그해 7월 꼼짝없이 함정에 빠진 태자가 동궁의 위병을 동원하여 강충 일당을 살해하고 란을 일으켰다. 한무제가 승상 유굴리(劉屈釐)에게 명해 군사를 동원하여 태자를 공격하도록 했다. 황제와 태자의 군대가 5일 간을 계속해서 싸워 싸움 중에 죽은 자가 다시 수만 명에 달했다. 싸움에서 진 태자는 성을 나가 호현(胡縣) 천구리(泉鳩里)의 민가에 숨었으나 얼마 후에 관군에게 발각되어 포위당한 끝에 자살하고 말았다. 그때 북군사자호군(北軍使者護軍)이 되어 황제의 명을 받아 특파되어 북군(北軍)을 장악하고 있었던 임안은 군사를 내어 자신을 도우라는 태자의 명을 거부하고 성문을 닫고 움직이지 않았으나 한무제는 그의 행동이 성패의 결과를 보려는 두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요참형을 언도했다. 당시 임안이 장악하고 있었던 북군(北軍)은 장안성의 경비를 맡고 있었던 지금의 말하면 수도경비사령부에 해당했다.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임안에게 사마천은 옛날 그의 편지에 대해 쓴 답장이 다음의『보임안서(報任安書)』이다. 그는 자신이 치욕적인 궁형을 받고서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는 부친의 유명을 받아 저술하고 있던 사기의 완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죽기 전의 임안에게 알려 그이 오해를 풀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쓴 편지다.



【보임안서(報任安書)】
소나 말처럼 천한 태사공 사마천이 소경 족하께 재배를 드립니다. 지난 번 외람되게 편지를 보내시어 공경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는 일을 직책의 본분으로 삼아야한다고 하면서 그 뜻이 간절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은 제가 마치 소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속인들의 의견을 추종한다고 원망하는 뜻이 있었습니다마는 어찌 제가 그럴 수가 있었겠습니까? 제가 비록 지친 말처럼 노둔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일찍이 훌륭하신 분들의 유풍을 보고 배워 익히 알고는 있습니다. 다만 스스로 생각하여 한 번 움직이려고 했으나 신체는 찢어져 비루한 신세로 전락하고 허물만 덮어썼으며, 유익한 일을 하려고 했으나 손해만 잔뜩 당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울한 생각을 혼자서 삭일 뿐 누구 하나 호소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속담에 “누구를 위하여 연주하고, 누구에게 들려 줄 것인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백아(伯牙)는 죽을 때까지 거문고를 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힘을 쓰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해 몸을 가꾸기 때문입니다. 그러난 저는 이미 몸이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수후지주(隨侯之珠)나 화씨지벽(和氏之璧)과 같은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거나, 허유(許由)나 백이(伯夷)처럼 고결한 절개를 지니고 있다한들 종내에는 영예를 누릴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해 스스로 제 몸을 더럽힐 뿐입니다.

옛날 보내주신 서신에 답장을 바로 했어야 했지만 황제폐하를 따라 동쪽 지방을 갔다 왔고, 여러 가지 사소한 일로 바빴었습니다. 만나 뵐 기회도 마땅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창졸지간에 시간을 내어 제 마음 속의 생각을 다 펼쳐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소경께서는 생사가 달린 죄를 지어 옥에 갇혀 이제 한 달이 지나면 사형이 집행 될 겨울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는 저는 다시 황제를 수행하여 옹현(雍縣)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시일이 촉박하여 갑자기 피할 수 없는 일이 소경에게 발생할까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제가 종내에 마음 속의 분만(憤懣)을 좌우에게 피력하여 밝히지 못한다면, 세상을 떠나는 당신 혼백의 사사로운 원한은 영원무궁토록 풀리지 않을 겁니다. 이에 청컨대 저의 고루한 생각을 개략적이나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랫동안 적조하게 지내면서 답장을 이제야 보내는 저의 허물을 나무라지 않으시면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다.

저는 들어 알고 있기를「자기 몸을 수양하는 행위는 지(智)의 징표이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함은 인(仁)의 단초이다. 또 주거나 받는 정도는 의(義)를 드러내는 행위이고, 치욕(恥辱)을 받게 되면 용기(勇氣)를 결단하게 되며, 행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름을 세우는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고 나서야 선비는 세상에 나가 군자의 대열에 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익을 탐하는 행위보다 더 비참한 앙화는 없고, 마음을 상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슬픔은 없습니다. 또 선조들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짓은 없고, 궁형을 받는 것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궁형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다른 일반사람들과 비교하지 않는 것은 지금 한 세대에 걸친 일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그래왔습니다. 옛날 위영공(衛靈公)이 환관 옹거(雍渠)를 자기 수레에 태우자 실망한 공자가 위나라를 떠나 진(陳)나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상앙(商鞅)이 환관 경감(京監)의 천거를 통해 진효공(秦孝公)에게 유세하여 뜻을 이루자, 조량(趙良)은 그것을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고 비난했습니다. 한(漢)나라에 이르러 제 선친과 같은 이름자를 쓰는 환관 조담(趙談)이 한문제(漢文帝)의 수레를 같이 타자 원앙(袁盎)은 얼굴색을 바꿔가며 항의했습니다. 그런 모든 일들은 옛날부터 환관을 치욕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무릇 재능이 중간 정도의 보통사람도 환관과 연루되면 기가 상하지 않는 법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항차 기개 있는 선비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조정에는 인재가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된 처지의 제가 천하의 호걸들을 천거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선친이 남기신 유업 덕분에 천자가 타는 수레의 바퀴 아래에서 벼슬을 받아 대죄하기를 2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 생각하기를, 위로는 충성과 믿음을 다 바치지 못하고, 기이한 계책이나 재능이 있다는 칭송도 듣지 못해 결국은 내 스스로 밝으신 주상의 신임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다음으로 또 국가의 누락 된 정책을 수습하고 부족한 인재들을 보충하거나, 현인을 초빙하거나 천거하여 벼슬길로 나아가게 할 수 없었으며, 현명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 세상을 비웃으며 바위굴에 살고 있는 은사들을 드러나게 할 수도 없었습니다. 밖으로는 군대의 행군 대열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야전의 공성전이나 적장의 목을 베고 적군의 깃발을 빼앗아 공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또한 밑으로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쌓은 공로가 없어 높은 관직을 차지하지도, 후한 녹봉을 받지도 못해 친척들이나 친구들에게 황제의 은총을 나누어줄 수도 없었습니다. 이 네 가지 중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구차하게 남의 비위나 맞추고 영합해서 크건 작건 아무런 공도세우지 못했음을 이 일로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옛날 하대부의 신분이었을 때 말단에 끼어 조정의 논의에 참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이용하여 올바른 기강도 이끌어내지도, 사려 깊은 의견도 다 펼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망가진 몸으로 청소나 하는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버린 지금에 와서 머리를 들고 미간을 치껴 뜨며 시시비비를 논한다면 그것은 조정을 경시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천하의 군자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 아! 저와 같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일의 본말이란 쉽게 밝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멋대로 자라서 고향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은 적이 없었었습니다. 그런데 선친의 덕분에 주상전하의 은혜를 입어 시원찮은 재주지만 나라에 공헌할 기회를 얻어 궁중을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물동이를 이고는 하늘을 볼 수 없듯이 부족한 재주로 직무에 열심이다 보니 다른 사사로운 일을 돌볼 수 없게 되어 빈객들과 왕래를 끊었고, 집안일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밤낮으로 불초한 재주를 다 바쳐 일심으로 직무에 힘써 금상폐하의 마음에 들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일은 제가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크게 잘못 되고 말았습니다. 저와 이릉은 태사령(太史令)과 시중(侍中)이라는 관직을 맡아 같은 시중조(侍中曹)에 속하기는 했지만 평소에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태사령이라는 문관으로 이릉은 무장으로 각기 진로를 달리했음으로 술 한 잔 같이 한 적도 없고, 은근한 교제의 정도 나눈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릉이라는 사람의 인품을 살펴 본 바 그는 스스로를 지킬줄 아는 뛰어난 재사(才士)였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구에게는 신의가 있으며,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주고받는 것에는 의(義)가 있었습니다. 겸양하는 분별력이 있었고, 다른 사람을 공경했으며, 그는 항상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가 위난할 때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평소에 가슴에 품고 있는 생각만으로도 국사의 풍도가 있다고 저는 생각했었습니다. 무릇 남의 신하된 자가 국가가 위험에 빠지자 만 번의 죽음을 무릅쓰고 일생일대의 계책을 내어 뛰어 들었으니 그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이미 매우 보기 드문 훌륭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일 중에 한 가지가 잘 못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몸과 처자식만을 감싸기에 급급한 신하들이 서로 부화뇌동하여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 음해하고 죄를 조장하는 것을 보고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5천에 불과한 보졸을 이끌고 흉노의 땅에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왕정을 짓밟았습니다. 마치 호랑이 입에 드리운 먹이가 되는 위험한 행동도 마다않고 종횡무진 달리면서 강성한 흉노군에 도전했습니다. 억만에 달하는 선우의 기병을 올려다보며 쉬지 않고 싸우기를 10여 일만에 절반이 넘는 흉노의 군대를 살해했습니다. 털가죽을 입은 흉노의 군장들은 공포에 떨며 감히 사상자들을 구할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이에 흉노의 선우는 좌우(左右) 현왕(賢王)에게 활을 당길 수 있는 나라 안의 모든 군사들을 징집하여 일국의 전 군사력으로 이릉의 군사들을 포위한 후에 공격했습니다. 싸움을 하면서 천리를 행군하자 화살을 떨어지고 길은 막혔으나 구원군은 오지 않아 죽거나 부상당한 사졸들은 계속 쌓여만 갔습니다. 그러나 이릉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한 번 소리쳐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군사들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얼굴의 피를 닦고 울음을 삼키면서 맨주먹을 불끈 쥐고 적군의 예리한 칼날을 향해 서로 다투어 죽음을 불사하고 뛰어들었습니다.

이릉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을 때 그가 보낸 사자가 와서 고하자 한나라 조정의 왕후와 공경들은 술잔을 들어 황제에게 경축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이릉이 싸움에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황제께서는 음식 맛을 잃으시고 조회에서도 불편한 심기가 역력했습니다. 대신들은 황공해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비천한 신분임을 망각한 제가 참혹한 심정으로 슬픔에 젖어 있는 황제 폐하를 보고 어리석은 생각이나마 정성을 다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이릉이 장병들과 평소에 동고동락하면서 능히 그들로 하여금 목숨을 아끼지 않고 행동하게 만든 것은 고대의 명장이라도 따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몸은 비록 흉노의 진영에 포로로 있게 되었지만 평소의 그가 품고 있는 뜻을 짐작해보면 장차 때가 되면 한나라에 보답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은 이미 어찌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가 적을 무찌르고 패퇴시킨 공은 천하에 드러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제가 그런 뜻을 알리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던 차제에 마침 금상폐하께서 나를 불러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생각했던 바대로 이릉의 공을 말씀드려 주상의 마음을 넓혀 드리고 증오에 찬 신하들의 비난을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기도 전에 이사장군(貳師將軍)을 모함하고 이릉을 비호한다고 생각한 황제폐하께서는 저를 정위(廷尉)에게 넘겨 죄를 물으라고 하셨습니다. 정성을 다한 저의 충정은 끝내 다 밝힐 수 없었으나 결국은 주상을 헐뜯었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당시 가난한 저는 속죄금을 낼 수 있는 돈이 없었고, 대신 대속해줄 친구도 찾을 수 없었으며, 황제의 측근들은 아무도 나를 위해 변호해주지 않았습니다. 목석이 아닌 저의 몸은 홀로 법관의 뒤를 따라서 깊은 감옥에 갇히는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으니 그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일은 얼마 전에 실제로 소경께서 경험하셨음으로 제가 당한 일과 어찌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이릉은 살아서 항복하여 가문의 명성을 무너뜨리고, 저는 거세된 후에 잠실에 내던져져 다시 한 번 세상의 조소거리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슬프고도 슬픈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은 속인들에게 하나하나 세세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의 선조들은 공신이 되어 부절(符節)을 받거나 단서(丹書)로 새겨질만한 큰 공적을 세우지 못하고 단지 문장, 역사, 천문, 역법 등의 일을 해오셨습니다. 그것은 옛날부터 복축(蔔祝) 즉 점쟁이나 무당과 같은 부류들이 해온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상께서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희롱의 대상으로 여겨 악공(樂工)이나 배우와 같은 부류로 양성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부터 경시를 당해왔습니다. 가령 제가 법에 저촉되어 주살당한다고 하더라도 그 죽음은 구우일모(九牛一毛)와 같아 땅강아지나 개미 한 마리가 죽은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세상 사람들은 저를 절개를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하기보다는 죄가 너무 극악하고 컸기 때문에 아무리 궁리를 해도 스스로 면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할 겁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평소에 스스로 쌓은 일들이 일이 이렇게 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원래 한 번 죽게 되지만 어떤 때는 태산보다 중하고, 또 어떤 때는 새털보다 가벼울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선조들을 욕보이지 않고, 그 다음은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으며, 다음은 인간의 도리와 체면을 지키는 일입니다. 계속해서 그 다음은 언사나 언행으로 인해 욕됨을 입지 않는 것이고, 다음은 남에게 몸을 굽히는 굴욕을 당하지 않는 일이며, 다음은 죄수복을 입고 치죄를 당하는 처지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고, 다음은 차꼬를 차거나 포승줄에 묶여 채찍으로 매질을 당하는 치욕을 당하지 않는 일이고, 또 다음은 머리를 깎인 후 쇠고랑을 차는 형벌을 받아 치욕을 당하지 않는 것이고, 다음은 자자형을 당해 피부를 손상당하고 사지가 잘리는 치욕을 당하지 않는 일이며, 가장 치욕스러운 일은 궁형을 받아 환관의 신세로 떨어지는 일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대부 이상의 고귀한 인사에게는 형벌을 적용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선비는 지조를 지키기 위해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나운 호랑이가 깊은 산중에 있을 때는 온갖 짐승들은 공포에 떨지만 함정에 빠져 우리에 갇히게 되면 꼬리를 흔들면서 먹을 것을 구걸합니다. 아무리 백수의 왕이지만 굴복당해서 그 위엄이 점점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비는 땅 위에다 선을 그어 감옥으로 삼는다 해도 기세 상 그 안에 들어가지 않는 법입니다. 또한 나무를 깎아 법관으로 삼은다 해도 논의 상 그 심문을 받지 않으니 이것은 이미 계획된 바가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저의 손발은 묶였고, 머리에는 형구를 쓰고, 몸은 발가벗겨져 몽둥이와 채찍으로 맞아가면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옥리를 보면 머리를 조아리게 되고 징역을 사는 형도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려 숨을 죽이게 되는데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있게 되어 기세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지경까지 가서도 치욕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소위 얼굴가죽이 두꺼운 사람이라고 할 겁니다. 어찌 이런 사람들을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문왕이 서백(西伯)이었을 때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잡혀가 유리(羑里)에 갇혔고, 이사(李斯)는 진나라의 승상을 지냈지만 오형(五刑)을 받은 치욕을 당했습니다. 또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은 제후왕의 고귀한 신분이었지만 진(陳) 땅에서 사로잡혀 차꼬에 채워졌고, 팽월(彭越)과 장오(張敖) 등은 남면하여 고(孤)를 칭했지만 옥에 갇혀 죄를 추궁당했습니다. 강후(絳侯) 주발(周勃)은 제려(諸呂)의 난을 평정하고 황제를 세운 공으로 여 권력은 오패(五霸)와 견줄만 했으나 결국은 죄수가 되어 대신들이 수감되는 청실(請室)에 갇혔고, 두영(竇嬰)은 대장군이었지만 죄수가 되어 붉은 옷을 입고 목과 손 및 발 등에 형구가 채워지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또 계포는 목에 형구에 채워져 주가(朱家)의 노예로 보내졌으며, 관부(灌夫)는 감옥에서 치욕스러운 일을 당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몸은 왕후장상의 신분에 명성은 이웃 나라까지 알려졌지만 죄의 그물이 좁혀오는데도 우유부단한 마음에 차마 자결하지 못하고 결국은 옥중의 더러운 먼지구덩이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똑 같은데 어찌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았다고 할 있겠습니까? 이것으로 보건대 용감하거나 비겁한 것은 기세이고, 강함과 약함은 형세에 의해서 그리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어찌 그것이 이상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포승줄에 묶여 묵형을 받기 전에 스스로 자결의 길을 택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조금씩 시간을 끌다가 결국은 매질을 당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스스로 절개를 지키고자 하니 그것은 너무 늦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옛 사람들이 대부들에게 형벌을 중하게 내리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무릇 사람의 정이란 삶에 애착을 갖고 죽음을 싫어하며, 부모를 염려하고 처자를 돌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의리에 자극받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데 그것은 부득이한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불행히도 조실부모하고 형제나 친척도 없는 홀몸으로 도와줄 사람도 없습니다. 소경께서는 평소에 제가 처자를 어떻게 대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또한 용감한 사람이라고 해서 구태여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으며, 또한 겁이 많은 사람이라도 능히 의를 쫓자고 하면 어찌 애써 힘쓰지 않겠습니까? 저는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라 구차하게 삶을 탐했지만, 그래도 생사의 명분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몸이 포박되는 치욕 속으로 스스로 빠져들 수 있겠습니까? 무릇 노복이나 비첩들도 능히 자결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저의 부득이한 경우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에 은인자중하며 구차하게 살기 위해 더러운 감옥에 갇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까닭은 제가 품고 있었던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비루하게 죽어 사라져버린다면, 후대에 나의 글이 드러나지 않을까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옛날 부귀하면서도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은 수 없이 많았지만, 오로지 뜻이 크고 기개있는 인물만이 칭송을 받았습니다. 주문왕께서는 은나라의 주왕에게 잡혀가 구금 중에《주역(周易)》을 저술하셨고, 공자는 곤궁하셨을 때《춘추(春秋)》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굴원(屈原)은 추방되어 유랑하면서《이소(離騷)》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장님이 되고나서야《국어(國語)》와《좌전(左傳)》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손빈(孫臏)은 월형(刖刑)을 당하고서《병법(兵法)》을 편수(編修)했으며, 여불위(呂不韋)는 촉(蜀) 땅으로 유배를 당해《여람(呂覽)》을 지어 세상에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한비(韓非)는 진나라에 들어가 죄수가 되어《세난(說難)》과 《고분(孤憤)을 지었고, 《시(詩)》에 올라있는 삼백 편의 시도 대개 성현들이 울분을 토로하여 지은 것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뜻이 응어리져 사람들에게 전할 방법을 찾지 못하다가 지난 일을 글로 써서 후인들에게 전했습니다. 좌구명은 장님이고, 손빈은 발이 잘린 앉은뱅이라 종내에는 임용되지 못했음으로 초야로 물러나 서책으로 자기가 품고 있던 뜻을 논해 마음 속의 울분을 풀고 헛된 문장이라도 써서 자신의 뜻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저는 건방지게도 근자에 이르러 스스로 생각하기를 무능한 글솜씨를 의지하여 천하의 실전되거나 잃어버린 옛날 이야기를 망라하여 간략하게 그 일을 고증하고 시작과 끝을 종합하여 성패와 흥망의 이치를 살펴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위로는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로부터 시작해서 밑으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표(表)》10편, 《본기(本紀)》12편,《서(書)》8편, 《세가(世家)》30편,《열전(列傳)》70편 등 모두 130편을 지으려고 계획했었습니다. 하늘과 인간과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古今)의 변화에 두루 통하게 하여 일가의 문장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초고를 작성하기도 전에 화를 당하게 되어 아직까지 그것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음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극형을 당하고서도 화를 드러내지 못하고 가슴 속에 삭이고 있는 이유입니다. 저는 지금 진실로 이 책을 완성하여 명산에 감추어두었다가 저와 뜻을 같이 한 사람에게 전하여 성읍이나 도회로 전파되어 천하 사람들에게 읽히게 된다면 제가 앞서 당한 치욕스러운 일에 대해 다소나마 보상을 받을 수 있으니, 제가 비록 만 번을 죽는다 한들 어찌 후회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말은 지혜있는 사람에게나 할 수 있지 속인들에게 분명한 뜻을 밝히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치욕을 당한 자가 살아가기는 쉽지 않고 지위가 비천한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왕왕 비방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말로 인해 참화를 당했고 다시 고향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어 선조들을 욕보였습니다. 그러니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의 묘소에 올라 인사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백 세대가 지난다 해도 그 치욕은 더욱 더 심해질 겁니다. 그래서 저의 창자는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뒤틀리고 집안에 있을 때는 마치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하고 집을 나서서는 갈 곳을 잃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저의 치욕적인 신세를 생각할 때마다 식은 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몸은 궁궐의 내전을 지키는 환관이 되었으니 어찌 스스로 깊은 바위굴 속에 숨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세속의 부침에 따르고 시세에 맞춰 오르내리며 미치고 어리석은 자들과 왕래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에 소경께서는 저에게 어진 선비를 천거하라고 주신 가르침은 제가 처한 상황과는 동떨어진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제와서 제가 스스로를 꾸미고 미사여구로 변명한다 한들 세상에는 무익할 뿐만 아니라 속인들의 불신을 사고 치욕만 더할 따름입니다. 요컨대 제가 죽고나서야 시시비비가 가려질 겁니다. 글로써는 저의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어 대략 고루한 생각만을 말씀드렸습니다. 삼가 재배드립니다.

《보임안서 끝》



【사기(史記)·임안전(任安傳)】


저선생(褚先生)이 말한다.
내가 랑의 신분이었 때 전인(田仁)이 임안(任安)과 서로 친했다고 했다. 임안은 형양(滎陽) 출신이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빈곤하게 살았음으로 남을 위해 수레를 끌다가 어떻게 해서 장안에 들어오게 되어 머물며 하급 관리의 자리나마 구했으나 기회가 닿지 않아 결국 스스로 호적을 만들어 무공(武功)에 정착했다. 무공은 부풍(扶風)①의 서쪽 경계에 있던 작은 고을로 골짜기 입구는 촉(蜀)으로 통하는 잔도(棧道)가 가까이 있었다. 임안이 무공에 머물렀던 이유는 그곳이 작은 고을이기 때문에 호족이 없어 지위를 쉽게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임안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구도(求盜)와 정부(亭父)②)가 되었고 후에는 정장(亭長)③으로 승진했다. 임안은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냥을 나가서 잡은 사슴이나, 꿩, 토끼 등을 사람들에게 분배하고 사냥할 때의 맡은 일도 노인과 어린아이 및 장정들을 어렵고 쉬운 것을 구분하여 안배했다. 사람들은 그런 임안을 보고 모두 기뻐하며 말했다.
「아무 근심이 없구나! 임소경은 평등하게 분배할 줄 알고 지략이 있도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모이게 하니 참석한 자기 수백 명이었다. 임소경이 그들에게 물었다.
「아무개는 어째서 오지 않았소?」
사람들은 모두 그가 사람을 그렇게 빨리 인식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후에 그는 삼로(三老)④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친민(親民)⑤에 천거되어 삼백석(三百石)의 관리⑥에 임명되어 백성들을 다스렸다. 후에 황제가 출행했을 때 공장(共帳)⑦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음으로 파면되고 말았다.
후에 대장군 위청(衛靑)의 사인으로 들어가 전인(田仁)과 만나게 되어 두 사람이 같이 위장군 문하가 되어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집이 가난했음으로 대장군의 가감(家監)에게 비위를 맞출 수 있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가감은 그들을 사람을 무는 사나운 말을 기르게 했다. 두 사람이 같이 침대에 누워 잠을 자다가 전인이 조용히 말했다.
「가감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그러자 임안이 대꾸했다.
「장군도 사람을 볼줄 모르는데 어찌 가감인들 알 수 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위장군이 두 사람을 이끌고 평양공주(平陽公主)⑧ 집을 방문했다. 공주의 가령(家令)은 두 사람과 기노(騎奴)들을 방석 하나에 앉혀 밥을 먹게 했다. 두 사람은 허리의 칼을 뽑아 방석을 잘라 떨어져 앉아서 먹었다. 공주의 가노들이 이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싫어했으나 감히 책하지는 못했다.
후에 황제의 명으로 위장군의 사인 중에서 랑을 뽑게 되었다. 장군은 사인들 중 부유한 자를 골라 그들에게 안장과 마구에 강의(絳衣)와 옥구검(玉具劍)⑨을 갖추게 한 후에 궁궐로 데려가 고하려고 했다. 그때 마침 현능한 대부라고 이름이 높은 소부(少府)⑩ 조우(趙禹)⑪가 위장군에 집에 들르자 위장군은 천거하려는 사인들을 불러 그에게 보였다. 조우가 차례로 몇 가지 질문을 해 봤지만 10명 중 한 사람도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지략을 갖춘 자가 없었다. 조우가 위장군에게 말했다.
「장군의 문하에는 반드시 장군이 될만한 동류의 사람이 있다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옛말에 전하기를 ‘그 주인 된 사람을 알 수 없으면 그가 부리는 사람을 보고, 그의 아들을 알 수 없으면 그가 사귀는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지금 조명을 따라 장군의 사인을 천거하라고 한 이유는 이 일로써 장군께서 능히 현능한 문무(文武)의 인사들을 얻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장군께서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만 뽑아 천거하려고 하시는데 그들은 모두 지략이 없어 마치 비단 옷을 입혀 놓은 나무인형과 같은 자들입니다. 장차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그리고는 조우는 위장군 집의 100여 명에 달하는 사인들을 모두 불러 차례로 물어 전인과 임안 두 사람을 얻고서는 말했다.
「오로지 이 두 사람만이 쓸만하고 나머지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자들입니다.」
두 사람이 가난한 사실을 알고 있던 위장군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조우가 가자 위장군이 두 사람을 불러 말했다.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마구, 안장 및 강의를 새로 준비하도록 하시오.」
두 사람이 대답했다.
「집이 가난하여 마구를 살 돈이 없습니다.」
위장군이 화를 내며 말했다.
「지금 그대 두 사람은 스스로 자기 집이 가난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내가 그대들을 천거하려고 함에도 앙앙불락하며 나에게 무슨 선심이라고 베풀 듯이 하는데 어째서인가?」
위장군은 부득이 황제에게 부책(簿冊)만을 만들어 고했다. 이윽고 위장군의 사인을 접견한다는 황제의 조명이 내리자 두 사람이 황제 앞으로 나아가 뵈었다. 황제가 직접 묻자 두 사람은 서로 양보하여 상대방을 칭찬했다. 전인이 먼저 말했다.
「손에 북채와 북을 들고 군문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사대부들로 하여금 전투에서 기꺼이 죽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제가 임안에 못 미칩니다.」
임안도 전인을 평가했다.
「무릇 혐의를 판결하고 시비를 가리며 관리를 다스려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하는 마음을 먹지 않게 하는 능력은 제가 전인보다 못합니다.」
무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훌륭하다.」
황제는 임안을 북군을 감호(監護)하게 하고 전인은 하상(河上)으로 보내 변방의 둔전과 곡식을 감독하도록 시켰다. 이로써 두 사람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에 임안은 익주자사(益州刺史)⑫가 되었고 전인은 승상부의 장사(長史)로 승진했다. 전인이 서장을 황제에게 올렸다.「천하의 각군 태수들 대부분이 법을 어겨 사리를 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삼하(三河) 지역이 더욱 심합니다. 이에 신은 먼저 삼하를 조사하여 밝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삼하의 태수들은 모두 궁중 내의 귀인들에 의지하고 있거나, 삼공(三公)과 친척관계에 있어 두려워하거나 거리끼는 바가 없습니다. 마땅히 먼저 삼하의 지역을 바로잡아 천하의 간사한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할 것입니다.」
당시 하남과 하내 태수는 모두 어사대부 두주(杜周)⑬의 부형자제(父兄子弟)였고,하동태수(河東太守)는 승상 석경(石慶)의 자손들이었다. 그때 석씨들은 9명이 2천석의 고관 자리에 있어 바야흐로 권세와 존귀함이 한창 때였다. 전인이 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여러 번 이 일을 고했다. 이에 어사대부 두주와 석씨들은 사람을 보내 전소경(田少卿)에게 사죄하며 말했다.
「우리들이 감히 다른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컨대 소경께서는 무고하여 우리를 더럽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전인은 이미 삼하 지역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삼하의 태수들을 모두 체포하여 형리에 넘겨 사형시켰다. 전인이 경사에 돌아와 복명하자 무제가 기뻐하며 전인은 능히 권세가 있거나 강포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승상부의 사직(司直)에 임명했다. 이로써 전인의 이름은 천하를 진동시켰다. 후에 태자의 거병사건이 일어나자 승상 유굴리(劉屈釐) 가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나와 사직이었던 전인에게 성문을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 전인은 태자가 황제와는 골육지친일 뿐만 아니라 부자지간의 일에는 너무 깊이 간여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서 태자의 일행으로 하여금 여러 능침(陵寢)이 있는 곳을 통과하게 했다. 당시 감천궁(甘泉宮)에 머물고 있던 황제가 어사대부 포승지(暴勝之)를 보내 승상을 책망하도록 했다.
「무슨 이유로 태자를 풀어주었는가?」
승상이 포승지를 통해 고했다.
「성문을 지키던 사직이 명을 위반하고 성문을 열어 태자를 놓아주었습니다.」
이어서 황제게 서장을 올려 사직의 죄를 묻기 위해 체포할 수 있다고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전인은 형리에게 넘겨져 사형에 처해졌다.

그때 임안은 북군의 사자가 되어 호군(護軍)하고 있었다. 태자가 수레에 서서 북군이 지키는 남문 밖에서 임안을 불러 부절을 주고 군사를 출동시키라고 했다. 임안이 부절을 받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성문을 닫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무제는 임안이 거짓으로 부절을 받았다가 태자에게 붙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임안이 북군의 돈을 관리하는 말단 관리의 부정을 적발하여 태형을 쳐서 모욕을 준 일이 발생했다. 그 관리가 서장을 황제에게 올려 임안이 태자에게 부절을 받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고했다.
「원컨대 저에게 정예한 군사를 주시기 바랍니다.」
서장을 받아 읽어 본 황제가 말했다.
「이는 세상 물정에 노련한 관리로다! 거병한 태자를 보고 앉아서 승패를 관망하다가 이기는 쪽을 따르려고 하는 두 가지 마음을 품고 있는 자로다. 임안은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음에도 내가 항상 살려주었다. 오늘 다시 속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참으로 불충한 자로다!」
임안을 형리에게 넘겨 사형에 처하게 했다. 무릇 달이 차면 기울고 사물이 성하게 되면 쇠하게 됨은 천지 간의 법칙이다. 나아갈 때만 알고 물러날 때를 모르며 오래도록 부귀한 지위에 있게 되면 그것이 빌미가 되어 화가 미친다. 따라서 범려(范蠡)가 월나라에서 벼슬과 작위를 사직하고 월나라를 떠나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하여 만세토록 잊혀지지 않고 있으니 어찌 그를 지혜를 따를 수 있겠는가? 후세 사람들은 진퇴를 결정할 때는 이를 경계로 삼기 바란다.
(사기(史記)·전숙열전(田叔列傳)44)





주석
①부풍(扶風) : 한나라 때 장안을 포함한 수도 주위에 설치한 행정구역 중 하나로 위성(渭城) 이서를 관할하는 우부풍(右扶風)의 준말이다. 장안을 관할하는 경조윤(京兆尹), 장릉(長陵) 이북을 관할하는 좌풍익(左馮翊)과 함께 삼보(三輔)라고 했다.
②구도(求盜)와 정부(亭父) : 구도는 도적을 쫓아 체포하는 일을 하는 정(亭)의 하급관리고, 정부는 정의 일반 업무를 보는 하급관리다.
③정장(亭長) : 진(秦)나라가 제정한 말단 지방행정조직으로 한나라가 답습했다. 매 10리 마다 정(亭)을 설치하고 그 책임자인 정장에게 치안과 소송사건을 관장하게 했다. 한나라를 창건한 한고조는 산동성 패현(沛縣)의 사수정(泗水亭)의 정장 출신이다.
④삼로(三老) : 매 10정을 묶어 향(鄕)이라 했는데 향에는 현에서 지명하는 삼로 한 명을 두어 향민들의 교화를 담당하게 했다.
⑤친민(親民) : 향읍의 일을 관장하는 지방관리로 백성들을 교화하여 선으로 이끄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史記會注考)
⑥삼백석(三百石)의 관리 : 한나라 제도에 만 호 이상 고을의 현령의 녹봉은 천 석에서 육백석이고 만 호 이하의 현령은 오백 석에서 삼백 석이었다. 즉 임안은 만 호 이하의 현령에 임명되었음을 말한다.
⑦공장(共帳) : 공장(供帳)으로 황제가 출행할 때 소요되는 장막과 휘장 등을 공급하는 일이다.
⑧평양공주(平陽公主) : 한경제의 장녀이고 한무제의 누이다. 원래는 양신장공주(陽信長公主)라고 불렀으나 조참(曹參)의 증손 평양이후(平陽夷侯) 조시(曹時)에게 출가하여 평양공주라고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일찍이 무제에게 이연년(李延年)을 천거하고 다시 무제에게 원래 자기 집에서 노래부르는 가희였던 위자부(衛子夫)를 무제에게 보여 후에 황후가 되게 하였다. 조시가 악질에 걸려 별거하다가 무제의 조칙으로 대장군 위청(衛靑)에게 개가했다.
⑨강의(絳衣)와 옥구검(玉具劍) : 한나라 때 궁궐을 지키고 황제를 호위하는 숙위(宿衛)들이 입는 아주 진한 붉은 옷을 말하고 옥구검은 칼집의 입구와 칼자루에 옥으로 장산한 검을 말한다.
⑩소부(少府) : 전국시대 때 시작된 관제로써 진한(秦漢)이 답습했다. 진한 때의 9경 중의 한 명으로 산과 바다, 소택지에서 나오는 수입 및 황실에서 운영하는 수공업을 관장하여 황제의 사적인 재산을 관리하는 장관이다. 녹봉은 중2천석이다.
⑪조우(趙禹) : 서한의 대신으로 지금의 섬서성 무공시(武功市) 서남 태(斄) 출신이다. 현의 말단 관리인 좌사(左史)의 신분으로 경사로 불려가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가 청렴함으로 승진되어 영사(令史)가 되어 승상 주아부(周亞夫)를 모셨다. 무제 때 직급이 태중대부로 올랐고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법을 엄격하게 집행한 혹리로써 장탕과 함께 율령을 제정했다.
⑫자사(刺史) : 한무제 원봉 5년(전 106) 전국의 행정구역을 13자사부로 나누고 매 주마다 자사를 두어 관할지역의 관리들을 감찰하게 했다. 봉록은 600석으로 군의 태수보다 낮았다. 후에 군태수를 관할하는 주목(州牧)으로 바뀌어다.
⑬두주(杜周) : 태어난 해은 알 수 없고 기원전 94년에 죽은 한무제 때의 혹리다. 자는 장유(長孺)다. 자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서남 경내의 두연(杜衍) 출신이다. 원봉(元封) 2년(전109년) 정위(廷尉) 직을 맡았던 혹리 장탕(張湯)의 속관인 사(史)가 되었다. 무제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어사중승(御史中升)이 되었다. 옥사를 다스릴 때 법에 의하지 않고 오로지 황제의 뜻에 부합했음으로 장탕의 후임으로 정위가 되어 옥에 갇히는 백성들이 날이 갈 수록 늘어나 10만 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천한(天漢) 2년 (전99) 정위의 직에서 물러나 집금오(執金吾)로 자리를 바꾸었다. 천한 3년 도적을 소탕하고 상홍양(桑弘羊) 등의 사건을 처리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해서 어사대부로 승진시켰다. 후에 자손들은 모두 관리가 되고 자신은 삼공의 작위를 누리며 재산은 수만 관에 달했다.

『임안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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