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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본기(周本紀)4-1 -서주(西周)-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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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주본기(周本紀)4-1

- 서주(西周) -

1. 농신후직(農神后稷)

주나라의 시조는 후직(后稷)이고 이름을 기(棄)다. 그의 모친은 유태씨(有邰氏) 부족의 딸로써 이름을 강원(姜嫄)이라고 했다. 강원은 제곡(帝嚳)의 정비가 되었다. 강원이 성밖의 야외로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즐거워져 밟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몸속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기운이 느껴지더니 마치 애를 밴 상태가 되었다. 실제로 애를 밴지 10 달이 되자 아들을 낳았다.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 아기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사람이 다니지 않는 좁은 길에다 버렸다. 그러나 지나가는 말이나 소 등이 아기의 주위를 돌며 몸을 피하며 밟지 않고 지나갔다. 그래서 다시 그 아기를 깊은 숲속으로 데려가 버리도록 하였더니 이번에는 인적이 드물던 숲 속에 사람의 왕래가 갑자기 많아졌다. 그래서 다시 그 아기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이번에는 그 아기를 얼어붙은 도랑의 얼음 위에 버렸으나 새들이 날아와 날개로 아기의 밑을 깔아 주기도 하고 위를 덮어 주기도 하였다. 강원이 매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결국은 아이를 데려와 기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 아기를 버리려고 했기 때문에 이름을 기(棄)라고 지어 부르게 되었다.

기(棄)는 어렸을 때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마음속에 높은 뜻과 원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놀 때는 항상 삼나무나 콩 종류의 작물을 즐겨 심었으며 그가 심은 삼나무와 콩은 크게 자라서 무성하게 되었다. 성인으로 자란 그는 농사짓는 일을 좋아해서 농사에 적합한 땅을 살펴 좋은 종자를 파종하여 많은 양의 곡식을 수확하였다. 백성들이 기에게 와서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 요임금이 기를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인 농사(農師)에 임명하였다. 천하가 기(棄)로부터 농사짓는 법을 배워 많은 이득를 얻게 되어 기는 큰공을 세우게 되었다. 순(舜) 임금이 말했다.

「농사를 관장하는 관직을 맡은 기(棄)는 백곡(百谷)을 골라 파종하여 굶고 있던 백성들의 허기를 면하게 했다.」

순임금이 기를 태(邰)에 봉하고 관직을 이름으로 부르게 하여 후직(后稷)이라 하고 희(姬) 성을 하사하였다. 후직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당요(唐堯), 우순(虞舜), 하우(夏禹)를 거치면서 세상에 아름다운 선행을 베풀어 덕망이 높았다.

2. 거기지양(居歧之陽) 실시전상(實始翦商)

- 기양(歧陽)으로 나라를 옮겨 상나라를 잠식하기 시작하다. -

후직이 죽고 그의 아들인 불줄(不窋)이 뒤를 이었다. 불줄 말년에 하후씨(夏侯氏)의 정치가 문란하게 되어 농사(農師)의 관직을 폐하여 다시는 농업을 돌보지 않았다. 농사(農師)의 직을 잃게 된 불줄은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융적(戎狄)의 땅으로 흘러 들어갔다.

불줄이 죽고 아들 자국(子鞠)이 뒤를 잇고 다시 자국이 죽고 그의 아들 공류(公劉)가 뒤를 이었다.

공류(公劉)는 비록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다시 후직의 업을 일으켜 농업을 돌보며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과 곡식의 종자를 찾아 나섰다. 칠수(漆水)와 저수(沮水)①를 건너고 다시 위수(渭水)를 건너 벌목한 목재를 가져와 종족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주었다. 또한 종족들 중 외지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비를 주고 나가지 않고 종족들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해 저축을 해 주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다른 종족들도 모두 그의 선행에 감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주나라의 기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노래를 불러 그의 덕을 칭송했다. 공류가 죽고 그의 아들 경절(慶節)이 뒤를 잇고 빈(豳) 땅에 도읍 하여 나라를 세웠다.

경절(慶節)에 이어 황복(皇僕), 차불(差弗), 훼유(毁隃), 공비(公非), 고어(高圉), 아어(亞圉), 공숙조류(公叔祖類)가 각각 부자 상속의 원칙에 따라 차례로 뒤를 이었다. 공숙조류가 죽고 그의 아들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섰다.

후직(后稷)과 공류(公劉)의 업을 되살려 덕을 쌓고 의로운 일을 행한 고공단보를 백성들은 모두 받들어 존경했다. 융적(戎狄) 가운데에 훈육(薰育)②이라는 부족이 침입하여 주나라의 재물을 약탈해 가려고 했다. 고공단보가 재물을 모아 그들에게 주어 물러가게 하였다. 다시 쳐들어온 훈육은 그때는 영토를 빼앗고 주족을 붙잡아 노예로 삼으려고 했다. 분노한 백성들이 모두 훈육을 공격하려고 했다. 고공단보가 백성들을 향해 말했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군주를 옹립하는 목적은 그가 백성 모두들의 이익을 이루어 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융적이 침범해 온 목적은 우리들의 땅과 백성들을 빼앗기 위해서인데, 백성들이 나를 따르던, 융적을 따르던 그들에게 있어서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백성들이 나로 인하여 싸움을 하게 된다면 이는 내가 백성들의 부자(父子)나 형제(兄弟)들을 희생(犧牲)시켜서 그들의 군주 노릇을 하게 되는 일일 뿐이다. 그 일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하겠다.」

그런 다음 고공단보는 백성들을 이끌고 빈(豳)③ 땅을 떠나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 다시 양산(梁山)을 넘어 기산(岐山) 밑에 당도하여 그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빈읍(豳邑)에 살던 모든 백성들이 노약자들은 부축하고, 어린아이들은 가슴에 안고 고공단보의 뒤를 따라 기산으로 옮겼다. 이웃나라에 살던 다른 백성들도 고공(古公)이 어질고 백성들을 사랑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달려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래서 고공은 백성들로부터 융적의 풍속을 없애버릴 수가 있었으며 성곽(城郭)을 축조하고 궁궐을 짓고 각기 나누어 살도록 했다. 나라의 일을 오관(五官)④을 두어 돌보게 했으며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며 노래를 부르며 고공단보의 덕을 칭송했다.⑤

주석

1)칠수(漆水)와 저수(沮水) : 지금의 섬서성 빈현(彬縣)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섬서성 주지현(周至縣) 서쪽에서 위수(渭水)와 합류한다. 칠수는 상류를 저수는 하류를 말한다.

2)훈육(薰育) : 훈육(獯鬻)이라고도 하며 고대 북방에 살던 이민족으로써 하(夏)나라 때는 훈육(薰育), 주나라 시대에는 험윤(玁狁), 전국(戰國), 진한(秦漢) 때에는 흉노(匈奴)라 했다.

3)빈(豳) : 현 섬서성(陝西省) 순읍현(旬邑縣) 서남쪽으로 《시경·국풍》의 《빈풍(豳風)》은 당시 주족(周族) 사이에 불려지고 있는 노래를 수집한 시가다.

4)오관(五官) :사마(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 사구(司寇), 사사(司士)등의 다섯 관직을 말하며 사마(司馬)는 군사의 일을, 사공(司空)은 토지의 관리와 토목공사를, 사사(司士)는 례(禮)를, 사구(司寇)는 법률의 집행을, 사도(司徒)는 교육을 맡았다.

5)《시경(詩經)·대아(大雅)》의 《문왕지습(文王之什)》 중 《면(棉)》편은 고공단보의 행적을 노래한 시가다.

3. 단서수계(丹書受戒)

- 주문왕 희창이 하늘로부터 계율이 적힌 단서를 받다. -

고공의 장자는 태백(太伯)이고 차자는 우중(虞仲)이다. 태강(太姜)이 막내아들 계력(季歷)을 낳고 계력은 태임(太任)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태임도 태강과 마찬가지로 덕이 높은 부인이었다. 태임이 창(昌)을 낳았을 때 성스러운 조짐이 있었다. 고공단보가 말했다.

「우리 종족을 융성하게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창(昌)이리라!」

장자 태백(太伯)과 차자 우중(虞仲)은 고공(姑公)이 계력(季歷)을 세워 그 후계를 창에게 전해주려는 마음을 알고, 두 사람은 계력에게 주족의 후계자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형만(荊蠻)으로 달아나 만족의 습속을 따라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를 짧게 깎아 그 부족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윽고 고공이 죽자 계력이 섰다. 이가 공계(公季)다. 공계는 고공의 도를 이어받아 더욱 힘써 의로운 일을 행하여 주위의 제후들을 복종시켰다.

공계가 죽고 그 아들 창(昌)이 뒤를 이었다. 이가 서백(西伯)이다. 서백의 시호는 문왕(文王)이다. 창이 후직과 공류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받들고 고공과 공계의 법도를 따라 어진 일에 매진하고 노인을 공경하며, 어린아이들에게는 자애롭게 대하였다. 밑에 사람들을 예로써 대하며 현자를 좋아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식사를 할 틈도 없이 어진 선비를 접대하였다. 사방의 수많은 선비들이 달려와 창에게 귀의하였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원래 고죽국(孤竹國) 사람이었는데 서백이 노인을 공경한다는 소문을 듣고 주나라에 와서 창을 받들었다. 태전(太顓), 굉요(閎夭), 산의생(散宜生), 죽자(鬻子), 갑신대부(甲辛大夫) 같은 사람도 모두 달려와서 창을 도왔다.

숭후(崇侯) 호(虎)가 서백을 은(殷)의 주왕(紂王)에게 참소하며 말했다.

「서백이 선행을 베풀어 덕을 쌓고 있어 천하 제후들의 인심이 모두 서백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장차 임금께 해를 끼칠 것입니다.」

주왕(紂王)이 즉시 서백을 잡아다가 유리(羑里)①에 유폐시켰다. 굉요(閎夭) 등의 신하들이 걱정하여 유신씨(有莘氏)의 미녀 및 여융(驪戎) 산의 문마(文馬)②와 유웅씨(有熊氏)의 사마(駟馬)③ 9조, 그리고 세상의 진기한 보물들을 모아 은나라의 총신 비중(費仲)을 매수하여 주왕(紂王)에게 가져다 바쳤다. 주왕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들이 가져다 바친 한 가지만으로도 서백을 석방하기에 족한데 하물며 이렇게 진기한 물품들을 많이 가져다 바치니 내가 그를 풀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주왕은 즉시 서백을 사면하여 그에게 붉은 활과 화살 및 부월을 하사하여 서백으로 하여금 인근의 제후들을 정벌할 수 있도록 명하며 말했다.

「서백을 참소한 자는 숭후 호(虎)다.」

이에 서백은 락읍(洛邑)의 서쪽 땅을 주왕에게 바쳐 포락(炮烙)④의 형벌을 중지해 주기를 청하자 주왕이 허락했다.

유리에서 석방되어 주나라로 돌아온 서백이 아무도 몰래 일을 잘 판결하자, 제후들이 자주 와서 분쟁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당시 우(虞)⑤와 예(芮)⑥나라 사이에 영토 다툼이 일어나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자 그에 대한 판결을 서백에게 의뢰하려고 했다. 우와 예의 군주가 송사의 판결을 서백에게 부탁하기 위해 주나라 경계에 들어와 보니 농부들은 모두 자기 밭의 경계를 상대방에게 양보하고 젊은 사람들은 모두 나이 먹은 어른들을 공경하고 있었다. 우와 예의 군주가 서백을 만나보기도 전에 부끄럽게 생각하여 서로 말했다.

「우리가 국경 문제로 다투는 행위는 주나라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서백을 찾아가 봤자 스스로가 욕됨을 얻게 될뿐이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다투고 있던 땅을 서로 양보하였다. 제후들이 이에 대한 일을 듣고서 모두 말했다.

「서백이 장차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천자가 되겠구나!」

다음 해에 서백이 견융(犬戎)을 정벌하였다. 그 다음 해에 밀수(密須)⑦를 정벌하고 또 그 다음 해에 기국(耆國)⑧이 침범했으나 주나라가 그들의 군사들을 패퇴시켰다. 은나라의 조이(祖伊)가 서백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매우 두려워하여 그 일을 주왕(紂王)에게 고했다. 주왕이 듣고 말했다.

「천명이 없는데 그가 무엇인들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다음 해에는 우(邘)을 정벌했다. 이어서 숭후 호(虎)를 토벌하고 그 곳에 풍읍(豊邑)을 축조한 후에 기산(岐山) 밑에 있었던 주나라의 도성을 옮겼다. 다음 해에 서백이 죽고 태자 발(發)이 뒤를 이었다. 이가 주무왕(周武王)이다.

서백(西伯)은 모두 50년 간 재위에 있었다. 그가 유리에 갇혀서 지낼 때 주역(周易)의 8괘(卦)를 늘려 64괘로 만들었다. 이에 시인(詩人)들이 서백을 칭송했다. 주나라가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칭왕(稱王)을 한 것은 우(虞)와 예(芮)나라 사이에 있었던 송사(訟事)가 해결된 뒤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10년 후에 서백(西伯) 창(昌)이 죽었다. 시호를 문왕이라 하고 은(殷)나라의 법률과 제도를 바꾸고 새로운 역법(曆法)을 제정하였다. 고공단보(古公亶父)를 태왕(太王)으로 공계(公季)를 왕계(王季)로 추존했다. 고공단보부터 추존한 이유는대체적으로 주나라가 제왕이 될 상서로운 조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석

1)유리(羑里) : 유리(牖里)라고도 한다.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탕음현(湯陰縣) 북쪽에 있었다.

2)문마(文馬) : 몸에 여러 가지 색의 털을 가진 아름다운 말을 일컫는다.

3)사마(駟馬) : 네 마리의 말로 구성된 수레를 끌기 위한 말의 단위. 9사는 36마리다.

4)포락지형(炮烙之刑) : 은나라 때 혹형(酷刑)의 한가지이다. 구리로 만든 원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그 밑에 불을 떼어 활활 달군 다음 죄인을 구리기둥 위로 걸어가게 하여 사람이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중간에 밑으로 떨어져 불에 태워 죽게 만든 형벌로 그 모습을 보고 달기(妲己)가 웃었다.

5)우(虞) : 요(堯)임금에게서 임금의 자리를 선양 받은 순임금이 세운 나라 이름이다. 순임금을 우순(虞舜)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하남성 평륙현(平陸縣) 북쪽에 있었다. 후에 문왕의 아들 무왕이 주나라를 정벌하고 천하에 희씨성을 제후로 봉할 때 우중(虞仲)을 후손을 찾아 이곳에 봉했다.

6)예(芮) : 상나라 때 봉해진 제후국으로 지금의 대려현(大荔縣) 조읍(朝邑) 남에 있다가 후에 진목공 때 섬진에 병합되었다.

7)밀수(密須) : 밀국(密國)을 말한다.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영대현(靈臺縣) 서남쪽의 제후국으로 상나라 때 봉해진 제후국이다. 후에 주문왕이 멸하고 그 땅에 희성(姬姓)을 봉했다. 주공왕(周共王)이 경수(涇水)의 상류로 놀러갔을 때 당시의 군주인 밀강공(密康公)이 호종했다가 세 미녀를 천자에게 바치라는 그 모친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 이에 주공왕은 밀나라를 멸했다.

8)기국(耆國) : 지금의 산서성 장치시(長治市) 서남에 있었던 상나라 때의 제후국으로 후에 주문왕과의 싸움에서 진 바 있다. 춘추 때 나라를 산서성 여성(黎城)으로 옮겨 나라이름을 여국(黎國)이라고 했다.

9)우(邘) : 지금의 하남성 심양현(沁陽縣) 우태진(邘台鎭)에 있던 제후국으로 상나라 말기 때 주문왕이 정벌하여 영토로 삼았다. 춘추 때 정나라 영토가 되었다가 후에 다시 주나라 령이 되었다.

4. 멸상건주(滅商建周)

- 상나라를 멸하고 주나라 천년 왕조를 창건하는 주무왕. -

무왕이 즉위하여 태공망(太公望)을 태사(太師)로 삼고 주공(周公) 단(旦)을 보상(輔相)②으로 삼았다. 소공(召公)과 필공(畢公)은 좌우에 두고 자기를 보좌하게 하였다. 무왕은 문왕의 전례를 본받고 그의 위업을 계승하려고 했다. 무왕 9년에 필(畢)③에서 문왕을 위해 하늘에 제사지냈다. 군사를 열병하고 동쪽으로 나가 맹진(盟津)④에 당도했다. 무왕이 문왕의 목주(木主)를 수레에 싣고 중군에 두었다. 무왕은 자기를 태자(太子) 발(發)이라고 칭하고 은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문왕의 명에 의해서이지 감히 자기가 독단으로 행한 일은 아니라고 하였다. 이어서 사마(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등에게 왕명을 받들어 부절(符節)을 잡게 하고 뭇 관원들에게 고했다.

「엄숙하고 성실한 자세로 들을지어다. 나는 본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나 오로지 선조들이 베푸신 덕행에 힘입어 공업을 이어받게 되었다. 지금 이미 각종 상벌제도를 만들었으니 너희들은 힘을 다하여 선조들의 공업을 완성하여 공을 세우도록 하라!」

말을 마친 무왕 발은 군사들에게 진군명령을 내렸다. 태공망(太公望) 사상보(師尙父)가 전군을 향하여 명령을 발했다.

「너희들은 노를 빨리 저어 모두 시간에 맞추어 집결지에 도착하라! 시간에 맞추어 오지 못하는 자는 모두 참하리라!」

무왕이 강을 건너기 위해 배에 올라 강 가운데에 이르자 한 마리의 하얀 물고기가 무왕이 탄 배 위로 뛰어올랐다. 무왕이 몸을 굽혀 그 고기를 잡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희생으로 사용했다. 무왕의 일행이 강을 모두 건너자 일단의 불길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무왕이 있던 막사 위로 떨어졌다. 그 불길은 멈추지 않고 막사 주위를 맴돌다가 갑자기 적홍색(赤紅色) 머리의 한 마리 검은 갈가마귀로 변했다. 그 갈가마귀는 ‘까악. 까악’ 새 소리를 내어 울며 막사 주위를 돌았다. 그때 제후들은 비록 미리 약속한 바는 없었으나 출동하여 맹진에 집합하고 있었는데 모두 합하여 8백이 넘었다. 제후들이 한 목소리로 무왕에게 말했다.

「지금 주왕(紂王)을 토벌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무왕이 듣고 제후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아직 하늘의 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지금은 아직 은주(殷紂)를 토벌할 때가 아니다.」

이어서 무왕은 군사들을 이끌고 회군하여 주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2년이 지났다. 무왕은 주왕(紂王)이 더욱 포학하여 그 도가 지나쳐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잡아서 감옥에 가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은나라의 태사(太師)가 병이 들자 그 밑의 소사(少師)가 은나라의 악기들을 지니고 주나라로 도망쳐왔다. 그래서 무왕은 천하의 제후들을 향하여 선포하며 말했다.

「은주의 포학함이 매우 엄중하니 토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무왕은 문왕의 유지를 따라 병거 300승(乘), 호분(虎賁)⑤ 3,000명,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 45,000명을 이끌고 은주를 토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하였다.

무왕 재위 11년 12월 무오(戊午) 일에 주나라의 군사들은 모두 맹진에서 하수를 건넜다. 천하의 제후들도 무왕을 돕기 위해 달려왔다. 무왕이 군사들을 향해 외쳤다.

「분발하고 노력하여 절대 해이한 마음을 갖지 말라!」

무왕이 《태서(太誓)》⑥를 지어 주나라의 군사들에게 선포하게 하였다.

「오늘 은주는 부인의 말을 듣고 스스로 하늘의 도를 끊었으며 천지인(天地人)의 정도(正道)를 훼손하고 그의 친족과 형제들을 멀리했다. 또한 그의 조상들이 물려준 악기와 음악을 포기하고 음탕한 소리를 지어 부르게 하여 정아(正雅)한 음악을 어지럽혀서 여인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이로 말미암아 지금 나 희발(姬發)은 하늘이 내린 징벌을 집행하려고 하니 모든 사람들은 나의 뜻을 헤아려 있는 힘을 다해 주기 바란다. 이런 일은 두 번 혹은 세 번 다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해 2월 갑자(甲子) 일 여명(黎明)에 무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은나라 도성 밖 교외인 목야(牧野)⑦에 나가 출병하기 전에 군사들을 모이게 하여 맹세하였다. 무왕이 왼손에는 황월(黃鉞)을 오른 손에는 백모(白旄) 기를 들고 휘두르며 군사들을 향하여 외쳤다.

「저 멀리 서방의 땅에서 온 군사들이여 노고가 많았도다!」

무왕이 계속해서 외쳤다.

「여러 나라의 군주들이여, 사도(司徒), 사마(司馬), 사공(司空), 아려(亞旅), 사씨(師氏), 천부장(千夫長), 백부장(百夫長)들이여 그리고 용(庸), 촉(蜀), 강(羌), 모(髳), 미(微), 로(纑), 팽(彭), 복(濮)⑧에서 온 군사들이여! 과(戈)를 높이 들고 방패를 정열 하라. 그리고 창을 세우고 내 앞에서 맹세하라!」

무왕이 계속 외쳤다.

「‘암탉은 새벽을 알리지 않으며 만일에 암탉이 울어서 새벽이 왔음을 알게 되었다면 그 집안은 망하게 된다.’는 옛말이 있다. 오늘 은주는 오로지 부인들의 말만을 듣고 제사를 끊었으며 선조들의 일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큰 과업인 정사를 팽개쳐 돌보지 않았으며 친족과 형제들을 멀리하여 임용하지 않고 오히려 천하의 죄와 악행을 저질렀다. 도망친 자들을 규합하여 그들의 장점을 높이 사서 믿고 높여서 중용하니, 그들의 횡포함으로 상나라에 난리가 일어나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오늘 나 발(發)은 여러분들과 같이 하늘을 대신하여 그 벌을 내리고자 한다. 오늘 우리들의 작전은 6보나 7보를 전진하고 멈추어 다시 대오를 새롭게 정돈한 후에 앞으로 나아가려 하니 여러 장사들은 따르도록 힘써 노력하라! 또한 은나라의 군사들과 교전이 할 때는 단지 4, 5차나 6, 7차를 공격한 후에 멈추어 대오를 다시 새롭게 정비하여 싸움을 계속하려고 하니 여러 장사들은 힘써 싸움에 임해 주기 바라노라! 원컨대 여러 장사들은 위풍당당하게 그리고 용기백배하여 마치 맹호나 대웅(大熊)처럼, 시랑(豺狼)이나 이무기와 같이 싸움에 임하기 바라노라! 은나라의 군사들이 우리들에게 투항하러 오는 자는 막지 말고, 우리는 먼 서방에서 온 군사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있는 힘을 다해 싸우라! 만일 그렇지 않고 싸움에 온 힘을 쏟지 않는다면 너희들은 은나라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을 명심할지어다!」

무왕이 맹세의 의식을 끝내자 제후들이 끌고 온 군사들의 수가 모두 4,000승에 달해 목야(牧野)의 벌판에 전개하여 진을 쳤다.

무왕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은주도 역시 군사 70만 명을 동원하여 목야로 나가 무왕을 막으려고 했다. 무왕이 사상보(師尙父)와 백명의 용사를 시켜 싸움을 걸게 하였다. 그 뒤를 따라 무왕이 대졸(大卒)⑨의 군사로써 제주(帝紂)의 군사들 진영으로 돌격했다. 주왕(紂王)의 군사들은 수가 비록 많았으나 모두가 싸우려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고 오히려 무왕이 빨리 진격해 오기를 바라고 있었을 뿐이었다. 주왕의 거느린 군사들은 모두 무기를 거꾸로 잡고 오히려 무왕을 위해 길을 열어주었다. 무왕이 앞으로 돌격을 감행하자 은나라 군사들은 주왕의 곁을 떠나 모조리 흩어져 버렸다. 주왕(紂王)이 도망가서 녹대(鹿臺)⑩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제주(帝紂)는 보옥(寶玉)으로 치장한 옷을 입고 불기둥 속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왕이 손으로 대백기(大白旗)를 흔들며 제후들을 지휘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무왕을 향해 배례(拜禮)를 드리자 무왕도 역시 두 손을 높이들이 읍을 하여 예를 취했다. 모든 제후들은 무왕의 곁으로 다가와 모였다. 무왕이 주왕의 궁궐이 있는 은나라 도성인 조가(朝歌)에 입성하기 위해 행군을 계속하자 조가성(朝歌城)의 백성들은 모두 성밖으로 나와 무왕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무왕은 군신들로 하여금 상나라 백성들을 향해 큰 소리로 알리게 하였다.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서 그대 백성들에게 큰복을 내리셨도다!」

상나라의 국인들은 모두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무왕에게 절을 올렸다. 무왕도 국인들을 향해 절을 하여 답례를 하였다. 제후들이 모두 무왕 곁으로 모였다. 무왕과 제후들이 상나라의 국인들의 뒤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가 주왕이 죽은 녹대에 이르렀다. 무왕이 스스로 활에 화살을 메겨 주왕의 시체를 향해 세 발을 쏘고 나서 수레에 내렸다. 다시 경려검(經呂劍)으로 주왕의 시체를 찌른 후에 황월(黃鉞)로 참한 주왕의 머리를 대백기(大白旗)의 깃대 위에 걸어 백성들에게 보였다. 그런 다음 주왕이 총애하던 두 후궁(後宮)이 살던 궁궐로 들어 갔다. 두 후궁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무왕이 다시 화살을 세 발을 쏘고 칼로 시체를 내리친 후에 흑월(黑鉞)로 참한 폐첩(嬖妾)의 머리를 소백기(小白旗)의 깃대 위에 걸어 국인(國人)들에게 효시(梟示)했다. 무왕은 성밖으로 나와 자기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다음날이 되자 무왕은 사람들에게 길을 청소하고 주왕이 살던 궁궐과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을 수리하도록 시켰다. 이윽고 준비가 다 되자 백 명의 장사들에게 한기(罕旗)⑪를 들게 하여 앞장서게 하였다. 무왕의 동생 숙진탁(叔振鐸)은 태상기(太常旗)⑫가 꽂힌 의장차(儀仗車)를 몰고, 주공(周公) 단(旦)은 손에 대부(大斧)를, 필공(畢公)은 소부(小斧)를 들고, 무왕 곁에서 시위하고 산의생(散宜生), 태전(太顓), 굉요(閎夭)는 모두 칼을 들고 호위하였다. 무왕이 성안으로 들어가 제단의 남쪽에 대졸(大卒)들을 열병하고 그 왼쪽에 서자 군신들은 모두 무왕의 뒤편에 도열했다. 모숙정(毛叔鄭)이 밝은 달밤에 이슬을 받아 만든 정한수를 두 손으로 받들어 제단에 바쳤으며 위강숙(衛康叔)은 풀로 엮어 만든 돗자리를 길 위에 깔고 소공(召公) 석(奭)은 채색비단을 무왕에게 바쳤다. 사상보(師尙父)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 희생으로 쓸 짐승을 끌고 왔다. 이윽고 이일책(伊佚策)을 시켜 축문을 읽게 만들었다.

「은의 마지막 후손인 계주(季紂)는 선왕들의 밝은 덕을 모조리 훼손하여 없앴으며 하늘을 모멸하여 제사를 중지하고 상나라의 백성들에게 포악하여 그 행위가 하늘의 상제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무왕은 이어서 머리를 숙여 두 번 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대명을 받자와 은나라의 악정을 혁파하고 밝은 하늘이 내린 성스러운 유지를 받들겠나이다!」

무왕이 다시 머리를 땅에 대고 재배한 후에 제단 앞에서 물러나왔다.

이어서 무왕은 은주의 아들 녹보(綠父)를 은나라 유민이 살던 곳에 봉했다. 그러나 무왕은 은나라 백성들의 마음이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그의 동생 관숙선(管叔鮮)과 채숙탁(蔡叔度)을 녹보의 상(相)으로 명하고 은나라 유민을 다스리는 일을 감시하게 하였다. 다시 소공(召公)에게 명하여 감옥에 갇힌 기자(箕子)를 풀어주게 하고, 필공(畢公)에게는 죄 없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은나라 백성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그 결과 상나라의 촌락 구석에 살던 백성들조차도 무왕의 덕을 칭송하게 되었다. 남궁괄(南宮括)에게 명하여 녹대의 창고에 있던 금은보화와 전재(錢財) 등을 모두 꺼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으며 다시 거교(鉅橋)에 있던 양식 창고를 털어 노약자나 노예들에게도 나누어주도록 했다. 계속해서 남궁괄과 사일(史佚)에게 명하여 구정(九鼎)⑬과 보옥을 전시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구경시켰다. 굉요에게는 비간(比干)의 무덤을 찾아 봉분을 조성하고 제단을 세우게 하였다. 다시 제사를 주관하는 축관(祝官)에게 명하여 싸움 중에 죽은 장수들과 군졸들의 망령을 군중에서 제사 지내게 하였다. 그런 다음 곧바로 군사들을 이끌고 서방의 주나라 도성으로 되돌아갔다. 회군 중에 무왕은 중도의 여러 제후국들을 순시하였다. 정사를 기록하여 《무성(武成)》이라는 책을 지어 은나라를 멸하여 무공(武功)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천하에 알렸다. 다시 천하를 나누어 제후들을 봉하고 가져온 은나라 종묘(宗廟)의 제기들을 고루 나누어주고《분은지기물(分殷之器物)》이라는 책을 만들어 무왕의 명령과 각 제후들이 받은 하사물(下賜物)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주석

1)태공망(太公望) : 주문왕의 조부인 고공단보의 별호가 태공(太公)이다. 태공은 항상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와서 주나라를 도와 천자의 나라가 되게 만들 것이다.”라고 했다. 후에 문왕이 위수 강변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을 만나 궁궐로 데리고 와서 사상보(師尙父)로 삼아 주나라의 기업을 일으켰다. 태공망은 강태공 여상이 태공이 기다리던[望] 사람이라는 뜻이다.

2)보상(輔相) : 고대의 제왕은 전후좌우의 각 방향에 한 사람씩의 상을 명하여 국정을 행했다. 전(前)의 상을 의상(疑相), 후(後)의 상을 승상(丞相), 좌(左)의 상을 보상(輔相), 우(右)의 상을 필상(弼相)이라 했다. 보필(輔弼)이란 말의 어원이다.

3)필(畢) :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咸陽市) 동북의 주문왕이 아들 필공(畢公) 고(高)가 봉해진 희성(姬姓) 제후국이다. 필공 고의 후손 필만(畢萬)이 진헌공(晉獻公)에게 출사하여 공을 세우고 지금의 산서성 예성(芮城)인 위(魏)에 봉해져 후에 전국칠웅(戰國七雄) 중의 하나인 위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4)맹진(盟津 : 중국 고대에 황하를 건너는 유명한 나루터다. 지금의 하남성 맹진현(孟津縣) 동북이다.

5)호분(虎賁) : 중국 고대에 있어서 귀족 자제로 이루어진 왕이나 군주의 근위병(近衛兵)을 말함.

6)태서(太誓) : 《고문상서(古文尙書)》의 편명(篇名)으로 원래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위작이다.

7)목야(牧野) : 지금의 하남성 급현(汲縣)이다.

8)용(庸)은 현 호북성(湖北省) 방현(房縣), 촉(蜀)은 현 사천성(四川省) 성도시(成都市) 일대(一帶), 강(羌)은 당시 서융(西戎)이 살던 지역으로 지금의 감숙성 경내, 모(髳)는 당시 사천성 동부지역에 살던 서융 족이고, 미(微)는 지금의 섬서성 미현(眉縣) 일대, 로(纑)는 지금의 호북성 서부 일대, 팽(彭)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팽선현(彭宣縣) 일대, 복(濮)은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원릉현(沅陵縣) 일대의 부족들이다.

9)대졸(大卒) : 병거 350승, 사졸(士卒) 26,250명, 호분(虎賁) 3,000 명으로 구성된 고대의 군대편제

10)녹대(鹿臺) : 지금의 하남성 탕음현(湯陰縣) 조가진(朝歌鎭) 남쪽에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紂王)이 지었던 대(臺)로 주위가 3리, 높이가 천 척(尺)에 달했다.

11)한기(罕旗) : 바람에 펄럭이도록 만든 9주를 상징하는 9개의 깃발

12)태상기(太常旗) : 천자의 행차를 알리기 위해 의장차에 꽂는 해와 달을 그린깃발

13)구정(九鼎) : 하나라의 우임금이 천하의 물길과 땅을 평정한 후에 중국 땅을 구주(九州)로 나누고 그것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정(鼎)을 주조(鑄造)하였다. 이후로 천하의 최고 권력을 상징하는 전국(傳國)의 보물이 되었다. 상탕(商湯)이 구정을 상읍(商邑)으로 옮기고 주무왕이 다시 낙읍(洛邑)으로 옮겼다.

5. 봉건제후(封建諸侯)

- 주무왕이 제후를 책봉하다. -

무왕이 고대의 성왕(聖王)들의 덕을 기리어 신농씨(神農氏)의 후손들은 초(焦)①에, 황제(黃帝)의 후손들은 축(祝)②에, 요(堯)임금의 후손은 계(薊)③에 순(舜) 임금의 후손은 진(陳)④에, 하우(夏禹)의 후손은 기(杞)⑤에 각각 봉했다. 이어서 공신들과 모사(謀士)들을 분봉하여 제후로 삼았다. 그 중에 사상보(師尙父)의 공이 제일 크다고 하여 가장 먼저 상보의 출신지인 영구(營口)⑥에 봉하고 나라 이름을 제(齊)라고 했다.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 단(旦)은 곡부(曲阜)에 봉하고 나라 이름을 노(魯)라고 했다. 또한 소공(召公) 석(奭)은 연(燕)에 봉했다. 동생 숙선(叔鮮)은 관(管)⑦에, 다른 동생 숙탁(叔度)은 채(蔡)⑧에 봉했다. 기타 다른 사람들도 각기 순서에 따라 분봉을 하여 제후에 임명했다.

이어서 무왕은 구주(九州)의 장관들을 불러 같이 빈(豳) 땅의 언덕에 올라 상나라 쪽을 한참 동안 쳐다보고 다시 도성인 호경(鎬京)으로 돌아왔으나 그 날 이후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공 단이 왕의 침소에 와서 위로의 말을 전했다.

「무슨 일로 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십니까?」

무왕이 대답했다.

「내가 너에게 말해주겠다. 우리가 은나라의 제기(祭器)를 사용해서 지내는 제사를 하늘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구나. 내가 세상에 태어난 지 이제 60이 되었지만 지금도 도성 밖 교외(郊外)에 미록(麋鹿)⑨과 같은 괴수가 나타나고 해충이 발생하여 온 들판을 덮고 있다. 하늘이 은나라를 더 이상 돌보지 않고 우리들을 시켜 은나라를 망하게 한 후에 주나라를 세우게 하셨다. 하늘이 일찍이 은나라를 세우게 할 때 현인 360명을 등용하여 천하를 다스리게 하였다. 비록 그들의 업적이 뛰어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은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은나라를 지금까지 멸하지 않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했다. 우리 주나라의 국운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내가 어찌 한가롭게 잠을 이룰 수 있겠느냐?」

무왕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 주나라의 국운이 개변하지 않고 안정되면 상제가 사는 곳에 가까이 다가가서 악인들을 색출하여 내가 은주에게 내린 징벌을 가하겠다. 나는 앞으로 밤과 낮을 구분하지 않고 계속해서 노력하여 서방의 땅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여러 가지 사정들을 잘 처리하여 공덕을 쌓아 사방으로 뻗어나게 하겠다. 락수만(洛水灣)에서 이수만(伊水灣)에 이르는 땅은 지세가 평탄하여 험준한 지형지물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옛날 하(夏)나라가 이곳에 나라를 세워 도읍을 세웠다. 내가 남쪽으로 삼도(三涂)⑩를, 북쪽으로는 산악지방을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황하를 살펴보며, 자세히 지세를 관찰한 결과 락수(洛水)에서 이수(伊水)에 이르는 지방은 천제(天帝)가 계신 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도읍을 정해도 좋은 지방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락읍(洛邑)의 땅에 새로이 도읍을 축조하기 위해 땅을 측량하고 구획정리를 한 후에 그곳에서 떠났다. 다시 화산(華山)⑪의 남쪽 산록에서는 말을, 도림(桃林)⑫의 땅에는 소를 방목하여 키우도록 했다. 다시 군사들에게 무기를 거꾸로 잡게 하고 정돈한 후에 해산시켜 각기 자기의 고향으로 보내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무왕은 천하에 다시는 군사들을 동원하지 않겠다고 공포하였다.

무왕이 은주(殷紂)를 정벌하여 싸움에서 승리를 취한 후 2년이 되는 해에, 기자(箕子)를 불러 은나라가 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마음속으로 은나라의 멸망에 대해 슬픔을 참지 못하던 기자가 무왕을 향하여 일반적인 나라의 존망에 대한 도리만을 강술하였다. 무왕 역시 기자의 슬픈 마음을 알고 고의로 말을 바꾸어 기자에게 천지자연의 운행 법칙에 대해서 물었다.

무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때 천하는 아직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나라의 대신들은 그것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신들은 몸을 정결히 한 후에 거북점을 쳤다. 주공이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어 무왕의 몸에서 재앙을 사라지게 하고 사악한 기운을 제거하여 그것들을 자기 몸에다 모두 옮겨 자기가 무왕 대신 죽게 해 달라고 빌었다. 무왕의 병은 점점 호전되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무왕은 죽었다. 태자 송(誦)이 무왕의 뒤를 이어 주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주성왕(周成王)이다.

주석

1)초(焦) : 지금의 안휘성 박현(亳縣)이라는 설과 하남성 섬현(陝縣) 남이라는 설이있다. 춘추 때 당진의 영토였다가 전국 때 위(魏)나라 땅이 되었다. 기원전 329년에 진(秦)나라의 혜문군이 초(焦)를 포위하자 항복했다. 2년 후에 진나라가 점령한 곡옥(曲沃)과 같이 위나라에 돌려주었다.

2)축(祝) : 세가지 설이 있다. ①지금의 강소성(江蘇省) 감유현(竷楡縣) 서북, ② 산동성 역성(歷城) 서남, ③ 산동성 비성현(肥城縣) 남 등의 설이 있다.

3)계(薊) : 중국 고대 까지의 계성(薊城)은 북경시 일대를 말하고 지금의 계현(薊縣)은 천진시 관할로 북경(北京) 동쪽 80키로 경계에 있다.

4)진(陳) : 기원전 672년 진(陳) 나라에서 권력다툼이 일어나 진나라의 공자 경중(敬仲) 완(完)이 제나라로 망명하여 그 후손들이 전씨(田氏)로 성을 바꾸고 번성하다가 기원전 386년 전화(田和)의 대에 이르러 태공의 후손들인 강씨를 몰아내고 전씨의 정권을 세웠다. 본국인진나라는 기원전 479년 멸망하고 초나라에 병합되고 기원전 278년에 진나라의 장군 백기(白起)에 의해 초나라의 도성 영도(郢都)가 함락되자 초나라는 나라를 진(陳)으로 옮겼다.

5)기(杞) : 주나라 초기 때 하우(夏禹)의 후손이 봉해진 나라로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에 있었다. 후에 지금의 산동성 창락현(昌樂縣)인 연릉(緣陵)으로 옮겼다가 다시 기원전 6세기 전반기에 기문공(杞文公)이 다시 지금의 산동성 안구(安丘)인 순우(淳于)로 옮겼다가 기원전 445년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6)영구(營口) : 제나라의 도성이었던 임치(臨淄)의 옛 이름. 지금의 산동성 임치시(臨淄市) 동북에 당시의 성터가 남아있다.

7)관(管) : 봉지는 지금의 하남성 정주시(鄭州市) 일대로 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의 주왕(紂王)을 죽이고 은나라의 고토(故土)에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 녹보(綠父)를 봉하고 다스리게 하면서 그의 동생들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 세 사람을 삼감(三監)에 임명하여 은나라를 감시하게 하였다. 무왕이 죽고 주나라의 정사를 주공단이 독단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관숙 등 삼감은 녹보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주공이 소공(召公) 석(奭)과 힘을 합쳐 녹보의 란을 진압하고 관숙을 죽이고 채숙과 곽숙은 나라 밖으로 추방했다. 이로써 관국(管國)은 폐해졌다.

8)채(蔡) : 주공단에 의해 나라 밖으로 추방당한 채숙(蔡叔)은 유랑 중에 죽고 그의 아들인 채호(蔡胡)가 그의 부친의 잘못을 뉘우치며 덕을 쌓고 선행을 행하였다. 주공단이 듣고 채호를 불러 노나라의 경사(卿士) 직을 맡겼다. 채호의 노력에 의해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지자 주공단이 그 공을 높이사서 성왕에게 품하여 호를 채읍에 봉하고 채숙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채호가 채중(蔡仲)이다. 후에 나라를 여러 번 옮겨다니다가 초소왕 42년 기원전 447년에 망하고 초나라의 군현이 되었다.

9)미록(麋鹿) : 사불상(四不象)이라고 한다.. 네 종류의 짐승을 닮았으나 그 짐승은 아니라고 해서 사불상이라고 했다. 뿔은 사슴과 비슷하지만 같지 않고, 머리는 말과 비슷하지만 말은 아니며, 몸통은 당나귀와 비슷하지만 당나귀는 아니고, 발굽은 소와 비슷하지만 소가 아닌 신화상의 괴수다.

10) 삼도(三涂) : 삼도(三塗)라고도 하며 하남성 낙양시 숭산현(嵩山縣) 서남의 해발 340미터의 산이다. 도산(涂山), 회계(会稽)라고도 부른다. 하우(夏禹)의 비(妃) 도산씨(涂山氏) 부락이 살던 곳으로 하나라가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신산이다. 하우는 일찍이 제후들과 부족의 수령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제천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他提到周穆王有“涂山之会”的功业,杨伯峻指出涂山在今安徽省怀远县东南八里,淮河东岸

11)화산(華山) : 지금의 하남성과 섬서성 경계의 황하 남안에 있던 산 이름으로 중국의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이다.

12)도림(桃林) : 산서성과 하남성의 경계를 이루는 황하의 남쪽 연안에 있던 산맥이름으로 동쪽의 효산(崤山)과 연이어져 있다. 지금의 하남성 영보현(靈寶縣)의 함곡관(函谷關) 이서와 섬서성 동관시(潼關市) 이동 지역 사이의 산악지대이다. 도림새(桃林塞)라고도 한다.

6. 주공섭정(周公攝政)

- 주공이 어린 왕을 대신해 섭정의 자리에 올라 주나라 기업을 지키다. -

무왕의 동생 주공 단은 성왕은 나이가 어리고 또한 주나라가 선지 얼마 되지 않아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후들이 주나라를 배반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에 주공은 성왕의 섭정으로 즉위하여 정무를 주관하여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렸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등의 형제들은 주공이 성왕에게서 왕위를 찬탈하지나 않을까 의심하여 은허(殷墟)에 봉해진 은주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綠父)와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이 성왕의 명을 받들어 반란을 진압한 후에 무경과 관숙을 죽이고 채숙은 나라 밖으로 쫓아내어 유랑하게 만들었다. 주공은 다시 은주의 서형 미자개(微子開)로 하여금 무경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고 은나라 유민을 이끌고 송(宋) 땅으로 가게 하여 그곳에 도읍을 세우게 하였다. 다시 무왕의 막내 동생인 강숙(康叔)을 은나라의 고토에 봉하고 나머지 은나라 유민을 다스리게 하였다. 성왕의 동생 진당숙(晉唐叔)이 한 줄기에 두 개의 이삭이 달린 벼를 얻어 성왕에게 바쳤다. 성왕이 다시 그것을 멀리 원정 나가있던 주공의 군영에 보냈다. 동방에 있던 주공이 벼이삭을 받고 성왕이 하늘로부터 성스러운 명을 받았다고 칭송했다. 주나라 왕실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관숙과 채숙을 토벌하기 위하여 주공이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3년 동안 철저하게 평정하였다. 그래서 먼저《대고(大誥)》라는 글을 지워 천하의 제후들을 향하여 반역의 무리들을 토벌하는 큰 도리를 천명하고 계속해서《미자지명(微子之命)》이라는 글을 써서 미자(微子)로 하여금 은나라 조상들의 뒤를 이으라고 명하였다. 다시《귀화(歸禾)》와《가화(嘉禾)》라는 글을 써서 천자가 가화(嘉禾)를 내려 준 덕을 기술하고 찬양하였다. 다시《강고(康誥)》,《주고(酒誥)》,《재재(梓材)》 등의 글을 써서 강숙(康叔)을 은에 봉하면서 술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는 훈계를 하고 동시에 백성들을 다스리는 도를 가르쳤다. 주공이 성왕을 대신하여 주나라를 7년간 다스리다가 성왕이 장성하여 성인이 되자 정권을 성왕에게 돌려주고 자기는 옥좌(玉座)에서 내려가 신하의 반열에 서서 성왕의 정무를 도왔다.

7. 성강지치(成康之治)

- 성왕과 강왕이 정사에 매진하여 치세를 이루다. -

성왕이 풍읍(豊邑)에 살면서 소공(召公)을 락읍(洛邑)에 다시 보내어 그곳의 토지를 측량하도록 하여 무왕의 유지를 받들려고 하였다. 주공이 다시 점을 쳐보고 여러 번 반복해서 지형을 관찰한 후에 공사를 시작하여 결국은 락읍에 성곽을 축조하는데 성공했다. 주공은 은나라의 도성에서 가져온 구정(九鼎)을 락읍에 옮기면서 말했다.

「이곳은 천하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사방의 제후들이 공물을 가지고 쉽게 내조할 수 있는 곳이다!」

락읍의 지형을 측량하고 성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조고(詔誥)》와 《락고(洛誥)》라는 글을 썼다. 성왕이 은나라의 유민들 일부를 락읍으로 옮겨 살게 하자 주공은 그들에게 성왕의 명이라고 하면서 은나라 유민들을 훈계하는 《다사(多士)》,《무일(無佚)》이라는 글을 써서 공포하였다. 소공(召公)은 태보(太保)의 직을, 태공(太公)은 태사(太師)를 담임하여 회이(淮夷)를 정벌하기 위해 동정하여 엄국(奄國)①을 멸하고 그 군주를 박고(薄姑)②의 땅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성왕이 원정군을 따라갔다가 돌아와 종주(宗周)에 머물면서 《다방(多方)》이라는 글을 써서 천하의 제후들을 경계(儆戒)하였다. 성왕이 은왕조의 잔존세력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회이(淮夷)를 습격하여 토벌한 후에 풍읍(豊邑)으로 돌아와서《주관(周官)》이라는 글을 써서 주나라의 관직의 직분과 그 관직에 임용하는 규범을 설명하고 새로이 예의(禮儀)를 규정하고 노래를 악보로 만들고 법령, 제도들을 모두 당시의 세상물정에 맞게 고쳤다. 이어서 백성들은 서로 화목하게 되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천하의 사방에서 주왕조를 찬양하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성왕이 동이를 정벌하고 풍읍으로 돌아가자 식후(息侯) 신(愼)이 내조하여 경하의 말을 올렸다. 성왕이 영백(榮伯)에게 명하여 《회식신지명(賄息愼之命)》이라는 글을 써서 주게 하였다.

성왕이 임종시에 태자 교(釗)가 국사를 게을리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소공(召公)과 필공(畢公)에게 명하여 제후들을 통솔하게 하고 태자를 보위에 올리도록 하고 그를 도와 정사를 보살피게 하였다. 이윽고 성왕이 죽자 소공과 필공이 제후들을 이끌고 태자 교(釗)를 부축하여 선왕들을 모신 종묘에 배알시킨 후에 다시 문왕과 무왕이 주나라를 열 때 어려웠던 일을 반복해서 태자에게 경계(儆戒)의 말을 전했다. 계속해서 온 힘을 다하여 근검절약하고 탐욕 하는 마음을 버리며 있는 힘을 다하여 국정을 돌봐야 한다고 간했다. 《고명(顧命)》이라는 글을 써서 대신들로 하여금 태자 교를 보좌하고 밝은 길로 이끌도록 했다. 태자 교가 주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강왕(康王)이다. 강왕이 즉위하자 천하의 제후들에게 문왕, 무왕이 이룬 업적을 선포하고 반복하여 《강고(康誥)》라는 글을 써서 설명하였다. 이로써 성왕과 강왕의 치세에 이르러 천하는 안정되고 일체의 형벌은 필요 없게 되어 40년 동안이나 사용하지 않아 사문화 되다시피 하였다. 강왕이 필공에게 명하여《책서(策書)》를 쓰도록 하여 백성들을 구분하여 촌락을 정하여 살게 하고 주나라 도성의 교외를 경계로 삼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성을 방어하게 하였다. 필공이 강왕의 명을 받아 이것을 적은 글을 《필명(畢命)》이라고 이름지었다.

주석

1)엄국(奄國) : 지금의 산동성 곡부시(曲阜市) 동쪽에 있었던 영성(嬴城)의 제후국이다. 은나라의 무경에게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주공에게 멸망당했다.

2)박고(薄姑) : 박고(亳姑)라고도 하며 지금의 산동성 박흥현(博興縣) 동남에 있었던 상나라 때의 제후국이다. 무경에게 동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주공이 정벌하여 멸했다. 제호공(齊胡公) 때 제나라가 도성을 영구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8. 준형치국(峻刑治國)

- 엄혹한 법으로 나라를 다스린 주목왕 -

강왕이 죽고 그 아들 소왕(昭王) 하(瑕)가 뒤를 이었다. 소왕이 재위에 있을 때 천자의 위엄이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소왕이 천하를 순시하기 위해 남방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것은 남방의 토인들이 소왕을 미워하여 그의 일행에게 아교를 붙여 땜질한 배를 주어 결국은 배가 강심으로 갔을 때 물이 새어 배와 같이 가라앉아 익사했기 때문이었다. 소왕이 죽었을 때 제후들에게 강왕의 상을 통고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일을 제후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왕의 뒤를 그의 아들 만(滿)이 이었다. 이가 목왕(穆王)이다. 목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그의 나이는 이미 50세였다. 주나라의 왕도가 쇠미해진 이유는 문왕의 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애통해 한 목왕은 즉시 백경(伯冏)에게 명하여 《경명(冏命)》이라는 글을 써서 국정을 맡고 있던 태복(太僕)에게 주어 경계하도록 했다. 그러자 천하가 다시 안정을 찾았다. 목왕이 견융(犬戎)을 정벌하려고 하자 채공(祭公)이 말리면서 간했다.

「불가합니다. 선왕께서 덕을 세상에 펼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무릇 평시에 군사들의 역량을 축적해 놓았다가 필요한 시기에 맞추어 출동시켜야 하며 일단 출동하게 되면 군사들의 힘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무력만을 과시하고 아무런 위력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다른 사람들이 아랑곳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아무도 우리의 군사들을 겁내지 않게 됩니다. 그런 이유로 주문왕(周文王)을 찬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노래 불렀습니다.①

載戢干戈(재집간과)

간과를 거두어라

載櫜弓矢(재고궁시)

궁시를 활집에 넣어라

我求懿德(아구의덕)

내가 아름다운 덕을 구하여

肆于時夏(사우시하)

중국에 전하노니

允王保之(윤왕보지)

왕이시어 부디 보중하소서

선왕(先王)들께서 백성들에게 몸가짐을 단정하게 하고 덕을 쌓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순후(順厚)한 성품을 갖도록 노력하셨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재물이 늘어나도록 하셨으며, 농사짓는 기구를 개량하셨고, 백성들로 하여금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의 소재를 알게 하셨습니다. 예법으로 백성들을 교화시키셨고, 백성들이 세상에 이로운 일에만 전력을 다하게 만들고 세상에 해로운 일은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마음은 항상 덕정을 베풀려는 생각뿐 형벌을 사용하여 위엄을 세우게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될까봐 걱정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선왕께서는 선조들의 유업을 보전하여 후세에 물려주어 대가 더할수록 선왕의 업적이 크게 되었습니다. 옛날에 우리들의 선조들께서는 농사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농사(農師)의 직에 계시면서 우(虞)나라의 순(舜)임금과 하(夏)나라의 우(禹)임금을 위해 일하셨습니다. 하왕조의 왕도가 쇠락하게 되었을 때 우리 선조들이 대를 이어 맡고 있던 농사(農師)의 직을 폐하고 농업에 관한 일을 돌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님 중 불줄(不窋) 님은 관직을 잃게 되어 천하를 유랑하다가 융적(戎狄)의 땅으로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농업에 대한 일을 감히 게을리 할 수 없어 시시때때로 선조님들이 일으킨 덕행을 융적들에게 선양하며 기(棄)님이 일으킨 사업을 계속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융적의 사람들에게 법도를 가르쳐 교화시키고 아침저녁으로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근면 노력하고 돈후하고 독실한 태도를 견지하고 충성스럽고 성실한 태도로 살았습니다. 불줄님이 돌아가시고 그 후손들이 그의 미덕을 계승하여 선조님들의 위업에 한 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문왕과 무왕의 대에 이르러 선조들의 밝은 덕을 빛내고 더하여 자비롭고 화평한 덕을 더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과 땅의 신을 받들고 백성들을 보살펴 세상에는 모두 기뻐해야 할 일만 있게 되었습니다. 상왕(商王) 제신(帝辛)이 포악하여 백성들에게 큰 죄악을 저지르자 참지 못한 백성들이 무왕을 기쁜 마음으로 추대하자 융(戎)의 땅에서 일어난 우리 주나라는 목야의 들판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선왕께서는 무력에 의존하시지 않으시고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보살펴 그것을 없애려고 자나깨나 정사를 열심히 보살폈습니다. 무릇 선왕께서 천하의 땅을 구분하는 규정을 만드셨습니다. 국도 근교 사방 500리 안의 지역인 방내(邦內)는 전복(甸服), 사방 500리 밖의 지역인 방외(邦外)는 후복(侯服), 후복(侯服)에서 위복(衛服)에 이르는 사방 2천5백리 지역은 총칭하여 빈복(賓服), 사방 2천5백리 밖의 만이(蠻夷)가 사는 땅은 요복(要服), 북쪽의 융적(戎狄)이 사는 땅은 황복(荒服)이라 하셨습니다. 전복에 사는 제후들은 천자가 그의 조부와 부친에게 제사를 드릴 때 소용되는 제품(祭品)을, 후복의 땅에 사는 제후들은 천자가 그의 증조와 고조에게 제사를 올릴 때 소요되는 제품을, 빈복에 사는 제후들은 천자가 그의 고조부 이상 되는 먼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낼 때 소용되는 제품을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요복의 땅에 사는 만이들은 단지 매년 공물을 바치도록 했는데 이것은 곧 천자가 일 년에 한 번씩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낼 때 소요되는 제품을 바치도록 한 것이었으며 황복에 사는 융적들에게는 내조하여 천자를 조현만 올리도록 했습니다. 조부와 부친에 대한 제사는 매일 한 번씩, 고조와 증조에게는 매월 한 번씩, 고조 외의 먼 선조들께는 계절마다 한 번씩, 하늘과 땅의 신들에게 지내는 제사는 일 년에 한 번씩 그리고 융적의 군주가 천자를 접견하는 의례는 그가 살아있을 동안 한번만 하도록 했습니다.②. 선왕께서 그와 같은 유훈을 남기신 이유는 조부와 부친에게 매일 제사를 올리면서 자기의 생각을 새롭게 하라는 뜻이며, 고조와 증조에게 매 월 사(祀)를 올리라고 한 이유는 자기가 내린 호령 중에 잘못된 바가 없는지를 살펴보라는 뜻이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먼 조상들에게 형(亨)을 지내라 한 목적은 자기가 정한 법과 제도가 잘못되지 않았을까 살펴보라는 뜻에서였습니다. 또한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세공(歲貢)을 가져와 바치라고 한 이유는 상하(上下)와 존비(尊卑)의 구분을 분명히 하라는 뜻이며 또한 이족(夷族)의 군주에게 일생 동안 한번만이라도 내조하여 천자를 조현 하라는 명은 인의예악(仁義禮樂) 등을 그들에게 가르쳐 왕화의 덕을 베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상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그 의무를 행하라고 했음에도 옛날과 같이 그 규정을 따르지 않으면서 제품이나 공물을 바치지 않고 또한 이족(夷族)의 수장들은 내조하여 조현을 행하지 않을 경우는 그 위반한 제후들이나 군주들에게 죄를 주거나 정벌했습니다. 매일 지내는 제(祭)에 제품을 보내지 않는 제후들은 잡아와 형벌을 내리고, 매 달 지내는 사(祀)에 제품을 보내지 않은 제후들은 군사를 보내어 공벌(攻伐)③을 행하고 계절마다 지내는 형(亨)에 제품을 보내지 않은 제후들은 정토(征討)④하고, 매 년 공물을 보내지 않는 만이의 군주들은 사자를 보내어 그 잘못을 꾸짖었으며, 내조하여 조현의 예를 행하지 않은 융적(戎狄)의 군주들은 사자를 보내어 잘못을 밝혀 스스로 그 잘못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래서 형벌에 관한 법률이 생겼고 공벌(攻伐)을 하기 위한 군사에 관한 법을 만들었으며 정토(征討)를 하기 위한 무기와 장비를 마련했습니다. 또한 위엄을 갖추어 왕명을 위반한 제후들을 꾸짖었으며 조현을 행하지 않은 이족의 군주들에게는 문서를 만들어 그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명령을 선포하고 공문을 써서 회유를 함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제품을 바치지도 않고 또한 조현을 하러 오지 않는다면 더욱 덕을 새롭게 쌓아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백성들을 소집하여 멀리 원정길에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가까이 있는 제후들은 명을 받들지 않는 자가 없었고 또한 멀리 있다고 해서 복종하지 않는 제후들도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천하는 크게 안정이 되었고 견융의 군주들인 대필(大畢)과 백사(伯士)가 죽자 황복의 견융이 내조하여 천자를 조현을 행했습니다. 천자께서 견융의 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매년 조공을 올리지 않는다면 네가 보고 있는 저 천자의 군사들로 정벌을 할 것이다.’

천자께서는 선왕께서 군사의 위력을 과시하여 이족(夷族)들을 다스리지 말라는 유훈을 버리셨으니 장차 이 일로 해서 많은 고초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견융의 백성들이 이미 돈후한 풍습을 갖추고 우리 조상들이 전래시킨 미덕을 지켜 시종여일하게 군주가 바뀔 때마다 한 번씩 입조 하여 조현의 의무를 이행해 왔습니다. 내조하러 왔던 그들을 보니 우리들에게 대항할 역량이 있어 보였습니다.」

목왕이 채공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은 서융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출동했으나 결과는 단지 백랑(白狼)과 사슴 네 마리만을 잡아 가지고 돌아올 수 있을 뿐이었다. 이 일로 해서 그 후로는 황복의 땅에 살던 견융은 결코 내조의 예를 행하지 않았다.

천하의 제후들이 서로 간에 불화하기 시작했다. 보후(甫侯)⑤가 목왕에게 자기가 초안한 형법(刑法)을 제정해야 한다고 청했다. 목왕이 보후의 청을 허락하고 천하에 공포했다.

「나라를 가지고 있는 천하의 제후들이여! 채읍(采邑)을 가지고 있는 대신들이여! 내가 그대들에게 훌륭하고 완벽한 형법을 이르겠노라! 지금 그대들이 백성들을 안무하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마땅히 어질고 덕이 높은 인재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백성들을 엄하게 대하여 복종시키는데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바로 형법이 아니겠는가? 여러 가지 송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죄에 해당하는 법을 적용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원고와 피고가 모두 대령하면 옥관(獄官)들은 다섯 가지 방면을 말하는 오사(五辭)⑥의 방법으로 양쪽을 살펴봐야 한다. 오사의 결과 확실하게 믿을 만하면 죄형에 따라 오형(五刑)⑦ 중에서 해당하는 합당한 형을 판결해야 하며 그러나 만일 오형 중에 마땅한 조항을 적용시키기가 어려울 때는 속죄금을 내는 오벌(五罰)⑧ 중에 한 가지로 판결하고, 오벌을 적용하기가 마땅치 않으면 오과(五過)⑨를 적용하라. 오과의 어려운 점은 관옥(官獄)⑩과 내옥(內獄)⑪이다. 이런 경우는 관리와 죄수의 죄를 고관 귀족을 시켜 그들의 죄상을 분명하게 조사하게 하여 범죄자와 동일하게 벌을 주어야 한다. 오형을 내리기에 의심나는 점이 있으면 죄를 감하여 오벌로 하고 오벌을 내리기에 의심나는 부분이 있으면 그 죄를 면밀히 살펴서 억울한 사람이 생기게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 조사하는 방법이 합당해야 백성들의 신임을 얻을 수 있고, 심문할 때는 오로지 근거에 입각해야 하며, 증거가 적당하지 않아 의심나는 점이 없다면 모두가 하늘의 도리를 받들어 함부로 형벌을 사용하면 안 된다. 경형(黥刑)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나 그 사안이 미심쩍으면 감하고 백율(百率)⑫을 적용하여 황철(黃鐵) 600량을 바치게 하고 그 죄를 적어 세상에 널리 알려라. 의형(劓刑)의 죄를 지었으나 그 죄에 미심쩍은 바가 있다면 죄를 감하여 이백율(二百率)을 적용하여 황철 1200량을 바치도록 하고 그의 죄목을 나열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라. 빈형(臏刑)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나 그 증거가 확실하지 않을 때는 그 죄를 감하여 삼백율(三百率)을 적용하여 황철(黃鐵) 1800량을 바치도록 하고 그 죄를 적어 공포하도록 하라. 궁형(宮刑)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나 의심나는 부분이 있다면 그 죄를 감형하여 오백율(五百率)을 적용하여 황철 3000량을 바치도록 한 후에 그 이유를 적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도록 하라.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으나 그 혐의가 확실치 않으면 그 죄를 사하여 천율(千率)을 적용하여 황철 6000량을 바치게 하여 그 죄를 열거하도록 하라. 묵형(墨刑)과 의형(劓刑)에 해당하는 죄는 각각 1000 가지, 빈형에 해당하는 죄는 500가지, 궁형에 해당하는 죄는 300가지,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200가지로 다섯 가지 죄에 해당하는 죄는 모두 합하여 3000가지이다.」

목왕(穆王)이 법을 공포하고 이를 《보형(甫刑)》이라고 이름 지었다.

주석

1)《시경(詩經)·주송(周訟)》중《시매(時邁)》의 마지막 구절이다.

2)일제(日祭), 월사(月祀), 시형(時亨), 세공(歲貢), 종왕(終王)

3)공벌(攻伐) : 천자가 제후에게 명하여 죄를 지은 제후를 공격하여 토벌하게 하는 행위.

4)정토(征討) : 천자가 왕실 직속의 군사를 직접 출동시켜 죄를 지은 제후를 토벌하는 행위.

5)보후(甫侯) : 여후(呂侯)라는 설도 있다. 초목왕의 대신으로 목왕에게 형벌에 관한 법률을 건의했다. 목왕이 허락하여 공포했음으로 보후가 제정한 법은 《상서(尙書)》에《보형(甫刑)》 혹은 《여형(呂刑)》이라는 편명으로 올라 지금까지 전한다.

6)오사(五辭) : 죄인들을 심문할 때 살펴보는 다섯 가지 방법. 즉 사청(辭聽), 색청(色聽), 기청(氣聽), 이청(耳聽), 목청(目聽)을 말한다[周禮云 辭不直則繁, 目不直則視眊, 耳不直則對答惑, 氣不直則數喘]. 즉 첫째 말을 듣고, 둘째 안색을 보며, 셋째 분위기를 살피고, 넷째 귀로 듣고, 다섯째 눈으로 살피는 것을 말하며 답하는 자의 억양, 안색, 눈빛 등을 관찰하여 판단하는 방법이다.

7)오형(五刑) : 고대의 다섯 가지의 형벌로 얼굴에 글을 새기는 묵형(墨刑), 코를 배는 의형(劓刑), 종지뼈를 제거하여 앉은뱅이를 만드는 빈형(臏刑),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宮刑), 그리고 사형에 처하는 대벽(大辟)이다. 빈형(臏刑)을 당한 사람으로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제나라의 병법가 손빈(孫臏)이 있고 궁형을 받은 사람은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 있다.

8)오벌(五罰) : 형보다 가벼운 죄를 벌(罰)이라 하는데 속죄금(贖罪金)으로 죄를 용서받는 형벌이다. 지금의 경범죄에 해당한다. 속죄금의 액수에 따라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9)오과(五過) : 다섯 가지의 과실. 《상서(尙書)·여형(呂刑)》 편에 의하면 오과(五過)는 관(官), 반(反), 내(內), 화(貨), 래(來)를 말하며 관(官)은 벼슬의 위세를 부리는 것, 반(反)은 개인적인 친분이나 원한에 따라서 하는 행위, 내(內)는 총애받는 여자를 통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 화(貨)는 뇌물을 주는 행위, 래(來)는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하여 청탁하는 행위라고 했다.

10)관옥(官獄) : 관리가 권세를 이용하여 공(公)을 사칭하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로써 판관(判官)과 죄수가 옛날에 같은 동료였던 경우의 옥사다.

11)내옥(內獄) : 연줄을 통해서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 판관과 죄수가 연줄을 통해서 아는 사이의 옥사다.

12)백율(百率) : 일율(一率)은 황철(黃鐵) 6량이다. 백율은 황철 600량 임.

9. 삼녀상국(三女喪國)

- 미녀을 탐해 나라를 잃은 밀강공(密康公) -

목왕이 재위 55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공왕(共王) 예호(繄扈)가 즉위하였다. 공왕이 경수(涇水)에 나가 물놀이를 할 때 밀국(密國의 강공(康公)이 따라가 수행하였다. 그 때 미모의 세 여인이 강공을 찾아와 몸을 의탁하였다. 강공의 모친이 그것을 보고 말했다.

「너는 그 여인들을 반드시 왕에게 바치거라! 무릇 짐승도 세 마리가 모이게 되면 무리를 지을 수 있고 미녀 셋이 모이면 세상을 아름답게 빛내는 찬(粲)이라고 한다. 제후가 왕과 같이 사냥을 할 때는 왕보다는 짐승을 많이 잡아서는 안 되고, 또한 왕과 같이 출행을 나갈 때는 백성들로 하여금 수레에서 내리게 해서 자기에게 인사를 시켜서도 안 되며, 군왕도 비빈(妃嬪)을 취할 때 한 집안에서 같은 자매 셋을 동시에 취하는 일을 삼가하고 있다. 지금 너에게 몸을 의탁하러 온 여인 셋은 모두 아름답기가 그지없는데 너는 무슨 덕이 있다고 그 여인들은 모두 취하려고 하느냐? 군왕도 아직까지 그러한 일을 감당하지 못했거늘 너 같은 소인이 무슨 덕으로 이 세 미녀를 감당하려고 하느냐? 무릇 소인이 귀중한 보물을 취하게 되면 결국은 그것으로 인하여 멸망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밀강공(密康公)은 세 여인을 공왕에게 바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일 년 후에 공왕은 밀국을 멸했다.

공왕이 죽고 그의 아들 의왕(懿王) 간(艱)이 뒤를 이었다. 주왕실은 더욱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시인들이 이때부터 시를 지어 주왕실의 일을 풍자하는 노래를 불렀다.

의왕이 죽자 공왕의 동생인 벽방(辟方)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효왕(孝王)이다. 제후들이 효왕을 쫓아내고 의왕의 태자였던 자섭(子燮)을 옹립하였다. 이가 이왕(夷王)이다.

10. 국인폭동(國人暴動)

- 폭군 여왕(厲王)이 국인폭동으로 나라밖으로 달아나다. -

이왕이 죽고 그 아들 려왕(厲王) 호(胡)가 즉위하였다. 려왕이 30년 동안 재위하면서 이(利)를 탐하여 영이공(榮夷公)을 총애했다. 대부 예량부(芮良夫)가 려왕에게 간했다.

「왕실이 장차 쇠약해지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영이공이 눈앞의 이만 탐하고 있는 행위는 장차 나라에 큰 재난을 몰고 올 화근이라는 사실을 어찌하여 모르십니까? 무릇 이(利)란 온갖 일에서 발생하며, 또한 천지만물의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을 홀로 독점하니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악이 발생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천지간의 만물은 모든 사람이 취하여 같이 사용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유독 한 사람에게만 독점하게 하십니까? 장차 백성들이 이로 인하여 분노를 하게 되면 그때는 아무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영이공이 재물과 이로써 대왕의 마음을 혹하게 하니 대왕께서는 어찌 오랫동안 왕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왕 된 자는 마땅히 각종 재물을 개발하여 나온 이익을 상하 군신들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며, 신(神)과 사람 및 만물로 하여금 각기 그들의 몫을 얻게 하시고 또한 매일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않을까 조심하시고 두려워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송(訟)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①

思文后稷(사문후직)

문덕 많으신 후직께서는

克配彼天(극배피천)

하늘과 함께 배향되실 만한 어른일세

立我烝民(입아증민)

우리 백성들이 안전된 것은

莫匪爾極(박비이극)

모두 그분의 큰 은덕이시네

貽我來牟(이아래모)

우리에게 보리와 밀을 내리시어

帝命率育(제명솔육)

하느님께서 기르라고 명하시니

無此疆爾界(무비강이계)

이 경계 저 경계를 안 따지시고

陳常于時夏(진상우시하)

하화 땅에 바른 도를 펴시었다.

또 대아(大雅)②에 노래하기를

陳錫載周(진석재주)

두루 복을 내리사 주나라 천하가 되었도다

이것은 이익을 두루 나누어주면서도 오히려 환난이 일어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조심했기 때문에 우리 주나라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천자께서 이익을 독점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하시니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필부가 이익을 독점하려 하면 사람들은 그를 도적과 같은 사람이라고 욕을 하는데 하물며 왕이 이러한 일을 행하려 하니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만약 천자께서 영공(榮公)을 계속 쓰신다면 주나라는 조만간에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려왕은 채공의 말을 듣지 않고 마치내 영공을 경사(卿士)에 임명하여 주나라의 국정을 맡겼다.

려왕이 포학무도(暴虐無道)하고 방종교오(放縱驕傲)하니 국인들이 모두 왕을 비방하였다. 소공이 간하여 말했다.

「백성들이 천자의 명을 감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왕이 노하여 위(衛)나라에서 무당을 불러와 천자를 비방하는 국인들을 감시하게 했다. 위무(衛巫)에게 고변 당하는 국인들은 모두 잡아다가 죽였다. 그러자 왕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없어지고 제후들은 입조하여 조현을 들이지 않았다. 려왕 34년 백성들을 더욱 엄하게 다스리니 국인들이 길을 가다가 만나도 말을 하지 못하고 서로 눈짓만을 하며 지나쳤다. 려왕이 기뻐하며 소공에게 말했다.

「내가 능히 국인들의 비방하는 말을 막았다. 이제는 아무도 함부로 나를 비방하지 못하고 있다.」

소공이 말했다.

「이것은 장(障)이라 국인들의 입을 막아서 억지로 말을 못하게 막는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의 입을 막는 행위는 마치 물길을 막는 것과 같아 막힌 물이 일단 터지면 둑이 무너져 몸을 상하는 사람이 많게 됩니다. 백성들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수를 하는 자들은 물길을 열어서 물을 흐르게 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자는 그들이 말을 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 연유로 왕이 정사를 돌볼 때 공경들로부터 사(士)에 이르는 일반 관리들에게는 정치의 득실을 논한 시(詩)를 지어 바치게 하고, 악사(樂師)들에게는 악곡을, 사관(史官)에게는 역서(曆書)를, 악관(樂官)들의 장인 태사(太師)에게는 잠언(箴言)을 짓게 해서 바치게 했습니다. 또한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공경과 사대부들이 지어서 바친 시를 읊게 하고, 실명한 장님에게는 태사가 지은 잠언(箴言)을 낭독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백관들에게는 왕에게 간하도록 하고 서인들에게는 자기들의 뜻을 전하여 왕에게 알리도록 했으며 좌우의 근신들에게는 백관들이 바르게 간하도록 살펴보도록 했습니다. 또한 왕의 종친들이나 친족들에게는 왕이 잘못한 점을 보완하게 하고 태사(太師)와 태사(太史)는 잠언(箴言)과 사서(史書)로써 왕을 교도(敎導)하도록 하고, 백관들 중 나이가 많이 든 사(師)나 부(傅)의 직에 있는 기애(耆艾)③들은 항상 왕에게 훈계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연후에 왕은 이 모든 것들을 참작하여 일을 행하여 낭패를 당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입이 있음은 마치 세상에 소용되는 재물들이 생성되어 나오는 땅의 산과 내가 있는 것과 같고, 또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나오는 고원(高原), 저습지(低濕地), 평원(平原), 관개수(灌漑水)가 흐르는 옥야(沃野) 등의 땅과 같습니다.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하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모두 나타나게 되어 좋은 일은 행하고 나쁜 일에 대해서는 대비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땅에서 얻어지는 재물들을 모두 백성들이 먹고 입는 것에 사용하게 됩니다. 무릇 백성들이 마음속으로 걱정하는 바를 입 밖으로 내어 하는 말은 여러 번 생각한 끝에 나온 것입니다. 그럼에도 만일 백성들의 입을 막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가겠습니까?」

려왕이 소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 안에서는 아무도 감히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그런 상태로 3년이 되던 해에 백성들이 일제히 일어나 려왕을 습격하였다. 려왕은 백성들을 피해 체(彘)④로 달아났다. 이해가 공화(共和) 원년으로써 기원전 841년의 일이었다.

려왕의 태자 정(靜)이 소공의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국인들이 몰려와 소공의 집을 에워싸고 태자를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다. 소공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내가 여러 번 도망친 왕에게 간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난리가 일어나게 되었다. 오늘 만일 왕태자를 잡아서 죽인다면 나는 군왕의 원수가 되어 나를 원망하지 않겠는가? 무릇 군주를 모시는 자는 자기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그 군주를 원망하지 않는 법이고 군주가 자기를 책망하더라도 노하면 안 되는 법인데 하물며 천자를 모시는 사람으로써 어찌 내가 그의 원수가 될 수 있겠는가?」

소공이 말을 마치고 즉시 그의 아들을 대신 백성들에게 내주어 죽게 하고 태자 정을 달아날 수 있게 하였다.

주석

1)《시경(詩經)·주송(周訟)》의《사문(思文)》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시조인 후직(后稷) 기(棄)를 하늘에 배향하면서 교사(郊祀)를 지낼 때 불렀던 제가(祭歌)다.

2)《대아·문왕지습(文王之什)》의《문왕(文王)》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3)기애(耆艾) : 나이가 60이 넘은 노인을 기(耆)라 하고 50이 넘은 사람을 애(艾)라고 한다.

4)체(彘) :지금의 산서성 곽현(霍縣) 부근에 있던 성읍이다.

11. 공화중흥(共和重興)

- 주공과 소공이 왕없이 나라를 다스려 주나라를 중흥시키다. -

소공과 주공이 상국이 되어 왕 대신 주나라를 다스렸다. 이 기간 동안을 공화(共和)①라고 한다. 공화 14년 즉 기원전 828년에 려왕이 체(彘)에서 죽었다. 그때 태자 정(靜)은 소공의 집에서 숨어살면서 장성하게 되었다. 두 상국이 뜻을 같이하여 태자 정을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이가 선왕(宣王)이다. 선왕이 즉위하자 두 상국이 보좌하여 주나라의 정치가 크게 쇄신되어 문무(文武)와 성강(成康) 때의 유풍을 본받게 되자 천하의 제후들이 다시 주나라를 섬기게 되었다. 선왕 12년 즉 기원전 816년에 노무공(魯武公)이 입조하여 천자를 조현했다.

선왕이 천무(千畝)②에 가서 적전(籍田)③을 경작하지 않자 괵공(虢公)이 간하여 불가함을 말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선왕 39년 즉 기원전 789년에 천무에서 강융(羌戎)과 싸웠으나 싸움에서 패하여 군사를 크게 잃었다.

선왕이 남방의 강회지간(江淮之間)④에서 동원한 군사를 천무의 싸움에서 모두 잃어버리자 그 충원을 위해 태원(太原)⑤의 백성들을 징집하기 위해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중산보(仲山甫)가 불가함을 간했으나 선왕이 듣지 않고 결국은 백성들을 징집하였다.

주석

1)공화(共和) : 주려왕(周厲王)이 국인들의 난을 피해 체(彘) 땅으로 도망치자 주공과 소공이 왕 대신에 주나라를 다스렸다. 려왕이 체로 도망간지 14년만에 그곳에서 죽자 주공과 소공이 태자 정을 왕으로 세웠다. 태자 정이 주선왕(周宣王)이다. 즉 려왕이 도망간 기원전 841년에서 그가 죽은 828년까지의 14년 동안의 기간이다. 공화 원년부터 《사기》의 연표가 시작되고 또한 중국의 역사 연대가 분명해 지기 시작했다.

2)천무(千畝) : 지금의 산서성 안택현(安澤縣) 동북. 《사기색은》과 《사기지명고》에 따르면 지금의 산서성 개휴현(介休縣) 일대라고 추정했다.

3)적전(籍田) :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왕이 친히 경작하던 전답이다.

4)강회지간(江淮之間) : 강수(江水) 즉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사이의 땅

5)태원(太原) : 현 영하성(寧夏省) 고원현(固原縣) 일대다.

12. 봉화희제후(烽火戱諸侯)

- 포사의 웃음을 사기 위해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희롱하다. -

선왕 46년 즉 기원전 782년 선왕이 죽고 그의 아들 궁생(宮湦)이 뒤를 이었다. 이가 유왕(幽王)이다. 유왕 2년 즉 기원전 780년 서주의 삼천(三川)에 지진이 났다. 태사(太史) 백양보(伯陽甫)가 말했다.

「주나라가 장차 망하려는 징조입니다. 무릇 천지의 기(氣)란 순서가 흐트러지면 안 되는 일이며 만약 그 순서가 무너졌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지럽혔기 때문입니다. 양기가 안에 머물러 밖으로 나올 수 없고 음기가 안에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내몰려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지진이 일어납니다. 이번에 삼천에 일어난 지진도 양기가 없어지고 음기가 쌓여서 그리 되었습니다. 양기가 없어지고 음기만 만연하게 되었으니 땅에 흐르던 기운이 막혀 이로써 수원(水源)이 막히고, 수원이 막히면 나라는 필시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무릇 물과 땅은 기름져야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여 재화를 생산할 수 있으며, 토지가 있다 하나 물이 흐르지 않아 기름지지 못하다면 백성들은 재화가 부족하게 되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이수(伊水)와 락수(洛水)의 물이 마르자 하나라가 망했고, 하수(河水)가 마르자 또한 상(商)나라가 망했습니다. 오늘 주나라의 덕이 마치 하은(夏殷) 두 대의 말년과 같아 우리나라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삼천(三川)이 막습니다. 이는 곧 삼천의 물이 마르게 된다는 예고입니다. 무릇 나라의 정권은 산천에 의지하게 되어있어 산이 붕궤되고 하천이 마르는 천재는 망국의 징조입니다. 또한 하천의 물이 마르면 필시 산이 붕궤되고, 나라는 10년이 넘지 않아 망하게 될 운명입니다. 10년은 숫자가 시작되고 끝나는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나라를 망하게 할 때는 10년을 넘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해에 삼천의 물이 마르고 다시 기산(岐山)이 붕궤되었다.

13. 용시정령(龍漦精靈)

- 용의 침으로 잉태되어 태어나는 포사 -

유왕 3년 즉 기원전 779년 유왕은 포사(褒姒)를 얻어 매우 사랑하였다. 포사가 백복(伯服)이라는 아들을 낳자 유왕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대신 세우려고 했다. 태자의 모친은 신후(申侯)의 딸로써 정궁(正宮)이었다. 후에 유왕이 포사를 얻어 사랑하게 되자 신후(申后)를 폐했다. 그와 동시에 태자도 폐하고 포사를 정궁으로 하고 백복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다. 태사 백양보(伯陽父)가 큰 소리로 역서(歷書)를 읽으면서 외쳐 한탄하였다.

「주나라는 이제 망하게 되었다.」

옛날 하후씨(夏后氏) 말년에 두 마리의 신룡(神龍)이 하나라 임금의 궁정(宮庭)에 날아와 말했다.

「우리들은 포성(褒城)의 옛날 군주들이다. 」

하나라 임금이 점을 치니 죽이거나, 쫓거나 궁 안에 머무르게 하거나 모두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다시 점을 치게 하니 용의 타액을 받아 보관하면 길하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래서 제단을 만들어 폐백을 제물로 올리고 간책(簡冊)에 글을 써서 두 마리의 용에게 고하자 용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용의 침만 남아있었다. 하나라 임금이 명하여 용의 타액을 목갑에 넣어 부고(府庫)에 깊숙이 보관하도록 했다. 하나라가 멸망하고 그 목갑은 은나라에 전해지고 다시 은나라가 망하고 주조에 전해졌다. 삼대가 지나도록 아무도 감히 그 목갑을 열어보지 못했으나 주나라 려왕(厲王) 말년에 목갑을 열어 살펴보게 되었다. 목갑을 열자 그 안에 들어 있던 용의 침이 궁정의 뜰 위로 흘러 청소하려 했으나 없애지 못했다. 려왕이 명하여 여자들로 하여금 옷을 벗게 하여 벌거벗은 몸으로 큰 소리로 떠들어 주문을 외우게 했다. 그러자 용의 타액이 갑자기 검은 색의 큰 자라로 변하더니 왕비가 사는 후궁으로 기어 들어갔다. 후궁에서 왕비를 모시던 육 칠 세 가량의 어린 궁녀가 자라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가 성년이 되어 아이를 배어 남자와 접촉하지 않고 아이를 낳게 되자 남의 이목이 두려워 아이를 밖에다 내다 버렸다.

선왕(宣王) 때 어린 계집아이들이 동요를 불렀다.

檿弧箕箙(염호기복)①

염호기복으로

實亡周國(실망주국)

주나라가 망하리라!

선왕이 듣고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기초풀로 엮어 만든 전통을 만들어 팔고 있던 부부를 잡아서 죽이라고 명하자 그 부부는 먼저 알고 도망치다가 대로에서 동녀(童女)가 낳아서 버린 갓난아기를 발견했다. 한밤중에 큰 소리로 울어대는 아기가 불쌍하다고 여긴 부부가 거두어 안고 포성(褒城)으로 달아났다.

후에 유왕에게 죄를 지은 포성의 군주가 미인을 구해서 왕에게 바치며 속죄를 청했다. 그 미인은 동녀가 낳아서 버린 아기였다. 아기가 자란 곳이 포성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포사라 했다. 유왕 3년 즉 기원전 779년에 유왕은 포사를 얻어 사랑하여 후궁으로 삼아 그 사이에서 백복(伯服)을 낳았다. 이에 유왕은 신후(申后)와 태자를 폐하고 포사를 정비로 삼고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태사 백양보가 한탄하며 말했다.

「화가 이미 닥쳤으나 이를 어찌할 수가 없구나!」

포사는 평소에 웃지 않았다. 유왕이 포사를 웃게 만들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그녀는 결코 웃지 않았다. 유왕이 봉화를 올리고 북소리를 크게 울려 오랑캐가 쳐들어 왔다고 거짓으로 알렸다.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황급히 달려왔으나 외적이 쳐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허탈해 하자 포사가 크게 웃었다. 포사가 웃는 모습을 본 유왕이 기뻐하여 계속해서 봉화를 올리게 하였으나 그 후로는 제후들이 믿지 않고 달려오지 않았다.

유왕이 괵석보(虢石父)를 경사(卿士)로 삼아 국정을 맡기자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석보라는 위인은 남의 비위를 잘 맞추어 아첨에 능하고 재물을 탐하는 자였으나 유왕이 총애하여 국정을 맡겼다.

신후(申侯)가 노하여 증국(繒國)과 서이(西夷)의 견융(犬戎)과 힘을 합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유왕을 공격하였다. 유왕이 봉화를 올려 구원병을 불렀으나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온 제후들은 한 명도 없었다. 결국은 유왕은 여산(驪山) 밑에서 죽고 포사는 사로잡혔다. 신후는 주나라의 부고에 있던 모든 재물들을 견융과 증국에 주어 그들의 군사들을 물러가게 하였다. 그런 다음 신후가 제후들과 상의하여 유왕의 태자였던 의구를 불러 주나라의 왕위를 잇게 하고 주나라 사직에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이가 평왕이다.

주석

1)염호기복(檿弧箕箙) : 염(檿)은 산뽕나무이고, 호(弧)는 활이고, 기(箕)는 기초풀이고 복(箙)은 화살을 담는 전통이다.

【서주본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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