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답사기- 풍경과 마음의 대응

한때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나는 그 책을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읽은 다음에야 비로소 읽었다. 별로였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느려터진 ‘느림’을 견딜 수 없었다. 쿤데라 대신 라트릭 쥐스킨트를 읽었다. 그 경쾌함과 속도라니…. 요즘 세상에 책이 얇다는 것은 미덕이다. 퇴근길 전철 안에서 후딱 읽어치울 수가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책을 다시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 책갈피를 해가며 아침 출근길에 읽고 저녁 퇴근 길에 읽고…. 며칠씩 똑같은 책을 들고 다닌다는 것은 얼마나 지겨운 일인가. 쿤데라라면 혀를 끌끌 찼겠지만 나도 이미 ‘속도’에 중독되어 있는지 모른다.

우치우위(余秋雨)의 저서 <중국문화답사기>(미래M&B 刊)는 쿤데라에 대한 나의 미안함을 덜어주었다. 이 책은 ‘느린’ 책이다. 눈은 언제나 과거의 흔적들을 향한다.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도움 안 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발은 누구도 머물지 않는 다 허물어진 무덤가에서 머뭇거린다. 그러다 보니 그의 발걸음은 느려질 수밖에. 경쾌하고 유쾌한 답사기라기보다는 고통스러운 여행의 기록이다. 책을 읽다보면 원제가 왜 <문화고려>(文化苦旅)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여행기를 ‘풍경의 기록’이라고 할 때, 그 풍경은 마음의 풍경을 포함한다. 그가 바라보는 산수는 그냥 자연의 산수가 아니라 인문적 산수이다. 우치우위는 책의 여러 곳에서 ‘대응’(對應)이라는 표현을 쓴다. 육체를 수고롭게 한 다음에야 얻어지는 대응, ‘문장은 영달을 싫어한다.’ 여산(廬山)울 힘겹게 올라 삼첩천(三疊泉)이라는 폭포를 바라본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마음과 육신이 진동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어떤 감탄이나 사설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그 자리에 서서 촉촉한 생명을 드러낼 뿐이었다. 마침내 우리들은 하나의 대응, 오늘날에는 거의 볼 수 없는 대응을 찾게 되었다.” 풍경과 마음의 대응, 그의 말투를 흉내내자면 풍경의 마음이고 마음의 풍경이다.

이 책은 저자의 발품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발을 이끄는 것은 단지 풍경의 경이로움이 아니라 인문적 관심이다. 그의 여로는 멀리는 돈황에서 저장성까지 거의 중국 전역을 포함한다. 가는 곳마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그의 눈은 항상 이름없는 것들, 하찮은 사람들, 역사의 뒤안길에 버려진 존재들들 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을 만리장성이 아니라 쓰촨의 도강언(都江堰)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쓰촨의 행운, 더 나아가 중국의 행운’ 이빙(李氷)을 떠올린다. 이빙은 도강언을 만든 쓰촨의 관리였다. 동정호의 악양루에서도 그는 변혁을 꿈꾸다 귀양을 떠나게 된 비운의 정치인 범중엄을 떠올린다. 또 난창에서는 주답과 서위를, 저우쭈앙에서는 심만산을, 평생을 서적 모으는데 바치고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유명한 장서루를 만든 범흠(范欽)과 그 후손들, 낭산의 허름한 묘지에서 그는 낙빈왕(駱賓王)을 찾아낸다.

우치우위의 작업은 고고학자들의 발굴 작업을 연상시킨다. 그의 입김이 닿으면 죽음같은 잠을 자던 폐허들이 세월의 먼지를 털고 생생한 역사의 현장으로 깨어나고, 잊혀졌던 이름들이 비로소 다시 불려진다.

이 책은 분명 전통적이고 다분히 동양적이다. 그래서 느리다. 앞보다는 뒤를 돌아보기 때문에. 그러나 우치우위를 회고주의자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가 헤맨 곳, 찾아낸 사람들을 짜맞추어 보면 그는 잃어버린 역사의 복원, 혹은 우리에게 익숙한 승자와 패자의 역사에 대한 배반을 꿈꾸는지 모른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역사이다. 그리고 그것이 누대에 걸쳐 축적되면서 문화를 이룬다고 믿는다.

속도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은 다른 미덕 두 가지를 더 갖추고 있다. 굳이 순서를 따라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과 혹여 지루해지면 그냥 훌쩍 건너뛰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3부 ‘밤비 속의 서정’은 건너뛰지 않았으면 한다. 만일 책을 읽다가 저자의 광대한 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에 기가 죽는다면 3부를 먼저 읽는 것도 방법이다. 어깨에 힘을 뺄 수 있을 것이다.

(MBC가이드, 2001년 7월호, ‘이 달의 책’ . p.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