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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 25. 유후장량(留侯張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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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세가25. 유후장량(留侯張良)



1. 장량자진시황(張良刺秦始皇)

- 장량이 창해역사(蒼海力士)를 시켜 진시황을 저격하다. -


유후(留侯) 장량(張良)의 선조는 한(韓)나라 귀족이다. 조부 한개지(韓開地)는 한소후(韓昭侯)①와 선혜왕(宣惠王)② 및 양애왕(襄哀王)③ 밑에서 상국을 지냈고, 부친 한평(韓平)은 리왕(釐王)④ 및 도혜왕(悼惠王)⑤ 밑에서 상국을 지냈다. 도혜왕 23년 기원전 230년 장량의 부친 평이 죽고 그리고 20년 후인 기원전 230년에 한나라는 진나라의 침략으로 망했다. 그때 장량은 아직 나이가 어렸음으로 한나라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다. 한나라가 망했을 때 장량의 집에는 가노가 300여 명이나 있었으나, 동생이 죽었을 때 장례도 치르지 않고 전 가재를 털어 자객을 구해 진왕을 암살하여 한나라에 5대에 걸쳐 상국을 지낸 그의 조부와 부친을 위해 한나라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장량이 회양(淮陽)에서 예를 배운 후에 동쪽으로 여행하다가 창해군(倉海君)⑥을 만나서 장사 한 사람을 얻어 그를 위해 120근 짜리 철퇴를 만들었다.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수 나왔을 때 장량과 창해역사는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⑦에서 저격했으나, 뒤따르던 부거(副車)를 잘못 맞추었다. 진시황이 대노하여 천하에 대 수색령을 내려 자객이라고 의심나는 사람들을 매우 급하게 붙잡아 들였는데 이것은 모두 장량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장량이 이름과 성을 바꾸고 하비(下邳)⑧로 도망가 숨었다.


주석

1)한소후(韓昭侯)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363년에 즉위하여 337년에 죽은 전국 때 한나라 군주로 한리후(韓釐侯)의 아들이다. 즉위하자 진(秦), 송(宋), 위(魏) 등의 열국들로부터 여러 번 침략을 받아 많은 군사를 잃고 국토를 침탈당했다. 후에 재상으로 등용한 신불해(申不害)의 활약으로 한나라 국세가 어느 정도 신장되어 나라가 안정이 되었으나 만년에 사치한 생활에 빠져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구제하지 않았다.

2)한선혜왕(韓宣惠王) : 기원전 332년에 군위에 올라 312년에 죽은 전국 때 한나라의 군주로 왕호를 사용하기 전에는 한위후(韓威侯)다. 한소후의 아들이고 한양왕의 아버지다. 재위 시 합종과 연횡을 반복하여 수차에 걸쳐 진나라의 침략을 받았다. 기원전 312년 선혜왕 21년, 진나라와 연횡하여 초군을 단양에서 대파하고 8만의 목을 베었다.

3)한양애왕(韓襄哀王) : 한양왕(韓襄王)으로도 불리며 재위 기원전 312-296년. 재위 중 시세에 따라 여러 나라에 반복무상하다가 진나라와 연계하여 초나라를 정벌하여 초장 당매(唐昧)를 패주시켰다. 만년에 태자가 죽자 여러 공자들이 그 자리를 놓고 다투어 내란이 일어났다.

4)한리왕(韓釐王) : 재위 기원전 296-273년. 국력이 급격하게 신장된 진나라의 빈번한 침략에 의해 한나라는 많은 군사와 그 장수를 잃었다. 기원전 284년 진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군을 격파하고 제민왕(齊湣王)으로 하여금 제나라를 밖으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후에 조와 위 두 나라로부터 공격을 받자 진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진나라가 구원군을 보내자 조위(趙魏) 연합군은 화양(華陽)의 포위를 풀었다.

5) 한도혜왕(韓悼惠王) : 한환혜왕(韓桓惠王)이라고도 불리우며 재위 272 - 239년이다. 한리왕의 아들로 재위기간 중 진나라가 맹렬한 기세로 6국을 병탄하기 위해 빈번히 한나라를 침략했다. 이에 한나라는 형(陘), 성고(成皐), 형양(滎陽) 등 10여 개 성을 진나라에 빼앗겼다.

6)창해군(倉海君) : 진나라 말 동이(東夷)의 군장(君長)으로 이름은 실전되었다. 지금 한국의 중부 지방에 있었던 예맥(濊貊)의 군주로 한무제 때 그 땅에 창해군(倉海郡)을 설치했기 때문에 사마천은 이로 인해서 그 군주를 창해군(倉海君)이라 명명한 것이다. 진나라 때 현인의 칭호라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은 남쪽의 이민족인 제오(諸奧)의 군장으로 그 선조는 월왕(越王) 무강(無彊)으로 초나라가 월나라를 멸하자 무강의 아들이 자립하고 창해군(倉海君)이라 호칭했다고 했다.

7)박랑사(博浪沙) : 지금의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동남을 말한다.

8)하비(下邳) : 지금의 강소성 수녕현(睢寧縣)으로 사수(泗水)와 기수(沂水)가 합류하는 곳에 세워진 고을이다.


2. 이상노인(圯上老人)

- 하비에서 이상노인으로부터 《태공병법》을 얻다. -


장량이 하비에 숨어 있을 때 어떤 다리 위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때 노인 한 사람이 갈포로 지은 옷을 입고 장량이 있던 곳으로 오더니 곧바로 그의 신발을 벗어 다리 아래로 던지고 나더니 장량을 보고 말했다.

「젊은이, 내 신발 좀 줏어다 주게나!」

장량이 놀라 그 노인을 두들겨 패주려고 하다가 그가 나이 먹은 노인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화를 참으며 다리 밑으로 내려가 신발을 주어다 주었다. 이에 다시 그 노인이 장량에게 말했다.

「신발을 신겨주게나.」

기왕에 신발을 주어왔음으로 노인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그에게 신발을 신겨주었다. 발을 뻗어 장량에게 신발을 신기게 한 노인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 길을 갔다. 장량이 마음속으로 놀라며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노인이 일 리쯤 가다가 다시 돌아와 장량을 향해 말했다.

「자네는 내가 가르칠 만 하구만! 닷새 후에 아침이 밝아올 때 여기서 다시 만나세!」

장량이 마음속으로 더욱 괴이하게 여기며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윽고 닷새 후 아침에 장량이 약속한 장소에 나갔으나 그 노인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으면서 화를 내며 말했다.

「젊은 사람이 노인과 약속을 해 놓고 늦게 왔으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노인이 돌아가면서 장량을 향해 말했다.

「닷새 후 새벽에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세나!」

그리고 닷새 후 장량은 새벽닭이 우는소리를 듣고 약속 장소에 나갔다. 그러나 그때도 노인이 먼저와 기다리고 있다가 장량을 보고 늦게 왔다고 화를 내며 닷새 후 새벽에 다시 그곳으로 나오라고 하면서 가버렸다. 그리고 닷새 후 장량은 그 전날 야밤도 미처 되기 전에 그곳에 나가서 노인을 기다렸다. 이윽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노인이 나타나며 기뻐하며 말했다.

「젊은이라면 마땅히 이래야지!」

이윽고 노인이 소맷자락 속에서 책 한 권을 내놓으며 말했다.

「이 책을 배워 통달하면 장차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0년 후 새로운 왕이 일어나고 다시 3년 후에 너는 나를 제수(濟水)의 북쪽에서 볼 것인데, 곡성산① 아래의 황석(黃石)이 바로 나이니라!」

그리고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 그 책을 살펴보니 바로 <태공병법(太公兵法)>②이었다. 장량이 기이한 일이라고 여겨 그 책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읽고 외웠다.

장량이 하비에 머물며 협객이 되었는데 그때 항백(項伯)③이란 사람이 살인하여 죄를 얻자 장량이 그를 구해 숨겨주었다.


주석

1)곡성산(穀城山) :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東阿縣) 동북에 있던 황산(黃山)을 말한다.

2)태공병법(太公兵法) :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商)이 지었다는 병법서다. 태공은 주문왕과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한 주나라의 창업공신이다. 그 공으로 후에 제나라에 봉해졌다.

3)항백(項伯) : 항우의 숙부다. 항우가 함곡관을 돌파하고 희수(戱水)에 진을 치고 패상(覇上)의 유방을 공격하려고 하자 이때의 일로 은혜를 입은 항백이 장량을 구하기 위해 유방의 진영으로 달려가 그 일을 알렸다. 장량은 다시 유방에게 알려 항우가 마련한 홍문연(鴻門宴)에 같이 참석했다. 유방은 항백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후에 한나라를 창건할 수 있었다. 후에 한나라를 창건한 고조는 항백에게 유(劉) 씨 성을 하사하고 사양후(射陽侯)에 봉했다.


3. 귀종패공(歸從沛公)

- 패공 유방에게 귀의하다. -


그리고 10년 후에 진섭(陳涉) 등이 기병하자① 장량도 역시 젊은이 100여 명을 모았다. 그때 경구(景駒)②가 스스로 초나라의 대리왕이 되어 유읍(留邑)에 머물렀다. 장량이 경구를 찾아가던 도중에 패공을 만났다. 그때 패공은 휘하에 수천의 무리를 이끌고 하비의 서쪽을 공략하고 있었다. 장량은 패공의 휘하에 들어갔다. 패공은 장량을 구장(廐將)③에 임명했다. 장량이 패공에게 자주 《태공병법(太公兵法)》을 유세하자 패공이 좋아하여 그때마다 장량의 계책을 실전에 사용하곤 했다. 장량이 다른 사람에게도 《태공병법》에 관해 논했으나, 패공 외는 아무도 깨닫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장량은 속으로 생각했다.

「패공은 아마도 하늘이 낸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장량은 패공을 따르기로 하고 경구(景駒)에게 가지 않았다.

패공이 설읍(薛邑)에 가서 항량을 접견했다. 그때 항량은 이미 초나라 왕족의 후예인 웅심(熊心)을 찾아 추대하여 초왕으로 모시고 있었다. 초나라를 웅심을 초회왕(楚懷王)이라고 불렀다. 장량이 항량에게 말했다.

「장군께서 이미 초나라 왕실의 후손을 찾아 왕으로 세우셨으니, 한나라 왕실의 후손들 중 횡양군(橫陽君) 성(成)이 어진 이름을 얻고 있어 그를 한왕으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를 한왕으로 세워 한나라의 잔존 세력들을 규합하시기 바랍니다.」

항량이 장량을 시켜 한성(韓成)을 찾아 한왕으로 세우라고 했다. 장량은 한왕 성(成)의 사도(司徒)가 되어 그와 함께 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한나라 땅을 공략하여 몇 개의 성을 얻었으나, 그때마다 즉시 반격한 진나라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장량과 한왕 성은 영천(穎川)④ 일대에서 정처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주석

1)진(秦) 이세황제 원년인 기원전 209년에 진섭(陳涉)이 진나라에 반기를 든 대택향기의(大澤鄕起義)를 말한다.

2)경구(景駒) : 반진군의 영수 진승(陳勝)이 싸움 중 전사하자 진가(秦嘉)에 의해 초왕으로 추대되었다. 팽성에 주둔하고 있던 경구에게 복속하기 위해 유방과 장량이 찾아가려고 했으나 이때 하비(下邳)에 주둔하다가 북진하려던 항량(項梁)의 군사들과 그의 북상을 저지하려고 하던 경구와 진가의 군사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경구와 진가는 항량과의 싸움에서 지고 달아나다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동남에서 잡혀서 죽고 그들의 군사들은 모두 항량의 군대에 합쳐졌다. 이에 유방과 장량은 항량의 군대에 합류했다.

3)구장(廐將) : 군마를 관장하는 직책이다.

4)영천(穎川) :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 일대를 말한다.


4. 좌책입관(佐策入關)

패공이 장량의 계책으로 관중으로 들어가다. -


패공이 낙양에서 남쪽으로 나아가 환원산(轘轅山)①으로 진격했을 때 장량도 군사를 이끌고 그의 뒤를 따라 출전하여 한나라 땅의 십여 개 성을 함락시키고 양웅(楊熊)의 군사를 격파했다. 패공은 이어서 한왕 성(成)에게 양책(陽翟)②에 머물며 지키라 명하고 자기와 장량은 남쪽으로 나아가 완성(宛城)③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계속해서 서쪽으로 진격하여 무관(武關)으로 들어갔다. 패공이 2만의 군사로 요관(嶢關)④에 있는 진나라 군사들을 공격하려고 하자 장량이 계책을 내어 말했다.

「진나라 군대는 아직도 그 세력이 강하여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제가 듣기에 진나라 장수들은 모두 장사꾼 출신들이라, 장사꾼은 이로써 유혹하면 마음이 쉽게 움직입니다. 패공께서 일단 보루를 지키면서, 사람을 앞서 보내 5만 명의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고, 산봉우리에는 모두 깃발을 빽빽이 꽂아 의병(疑兵)을 세우고, 다시 역이기(酈食其)에게 금은보화를 주어 진나라 진영으로 보내 적장들을 이로써 달래 항복을 권유하시기 바랍니다.」

과연 진나라 장수가 반하여 패공의 군사와 연합한 후에 서쪽으로 진격하여 함양을 습격하려고 했다. 패공이 진군과 함께 함양을 공격하려고 하자 장량이 다시 말했다.

「아마도 그 계획은 진나라 장수 혼자만의 생각이라 혹시 그 부하 군사들이 명령을 받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진나라 군사들이 장수의 말을 따르지 않게 되면 필시 위험에 빠지게 되니 차라리 그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공격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에 패공이 즉시 군사를 이끌고 진군을 공격하자, 진군은 크게 무너졌다. 도망가는 진군의 뒤를 추격하여 남전(藍田)에서 다시 싸웠다. 진나라 군사들은 결국은 남전에서 와해되고 패공은 함양에 입성해서 진왕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았다.

패공이 진나라 궁궐로 들어가 보니 그 궁실에는 휘황찬란한 휘장, 옥이나 금으로 만든 개와 말 모양의 노리개, 천하의 진기한 보물 그리고 수천 명에 달하는 미녀들로 가득차 있었다. 이에 마음이 동한 패공이 마음속으로 궁궐에 머물려고 했다. 번쾌가 궁궐 안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고 간했으나 패공은 듣지 않았다. 그래서 장량이 나서서 말했다.

「진나라가 포학무도했음으로 해서 패공께서 이곳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무릇 천하사람들을 위해 진나라의 남은 포악한 잔적들을 제거하려면 마땅히 청렴과 근검을 본분으로 삼아야 합니다. 지금 막 진나라 도성에 입성하자마자 즐거움만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사람들이 말하는 ‘걸(桀)을 도와 학정을 펼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어떤 일을 행하는 데는 이롭고, 성분이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다’⑤라고 했습니다. 원컨대 패공께서는 번쾌의 간언을 받아 들이십시오.」

패공은 장량의 말을 받아들여 함양성에서 나와 패상에 주둔했다.


주석

1)환원산(轘轅山) :지금의 하남성 언사현(偃師縣) 동남쪽에 있던 산이름으로 낙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있던 곳이다.

2)양책(陽翟) : 전국 때 한나라 영토로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이다. 하왕조가 도성으로 삼은 곳이다. 진나라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는 이곳 상인 출신이었다.

3)완성(宛城) :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에 있었던 성읍이다. 춘추 때 초나라 땅이었다가 전국 때 한나라 령이 되었다. 다시 기원전 291년 진나라가 빼앗아가 남양군을 설치했다.

4)요관(嶢關) : 지금의 섬서성 상현(商縣) 서남의 요산에 설치했던 관문이다. 남양분지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5)忠言逆耳利于行, 毒藥苦口利于病



5. 홍문투지(斗智鸿门)

홍문의 연에서 지혜를 발휘하여 패공을 사지에서 구출해내다. -


항우가 이윽고 홍문(鴻門)①에 이르러 파상(灞上)②의 패공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항백(項伯)이 야음을 틈타 패공의 진영에 당도하여 아무도 몰래 장량을 만나 그곳을 빠져나가자고 했다. 장량이 듣고 항백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한왕(韓王)을 위해 패공에게 파견된 사람입니다. 오늘 일이 급하게 되었다고 나 혼자 도망친다면 그것은 의가 아닙니다.」

장량이 즉시 패공에게 달려가 그 일을 고했다. 패공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장차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패공께서 함곡관으로 군사를 보내 항우를 막으려고 하셨다는데 정말로 항왕에 반기를 들려고 하셨습니까?」

「어떤 천박하고 무지한 놈이 나보고 말하기를 함곡관에서 제후군을 막게 되면 진나라 땅은 모두 차지할 수 있다고 했소. 그래서 내가 그의 말을 따랐소.」

「그렇다면 패공께서는 지금 항우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패공이 한 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결코 항우와 대적할 수 없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장량이 항백을 억지로 패공 앞으로 데려와 회견을 시켰다. 항백을 접견한 패공은 그에게 술잔을 올려 축수를 하고 그들 자녀들을 혼인시켜 인척 관계를 맺기로 했다. 그래서 항백은 초군의 진영으로 돌아가 패공이 감히 항우를 배반할 생각을 안 했으며, 단지 관에서 제후군에게 항거한 일은 도적들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해 주었다. 패공이 항우를 접견한 후에 화해를 했다.


이하는 홍문(鴻門)의 연(宴)에 관한 《항우본기》 기사다.


패공이 다음날 새벽 백여 기(騎)의 군사들만을 거느리고 항왕의 진영이 있는 홍문(鴻門)에 당도하여 항우를 접견하며 사죄의 말을 올렸다.

「신과 장군은 온 힘을 기우려 진나라와 싸웠습니다. 장군은 하북(河北)에서 싸웠고, 신은 하남에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무관(武關)을 통과하여 관중에 먼저 들어오게 되어 다행히 장군을 이곳에서 뵙게 되었습니다. 오늘 소인배 한 사람의 말 때문에 장군과 신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

항우가 대답했다.

「그 일은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이 일러준 것이오. 그의 말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이곳에 있겠소?」

항왕이 즉시 패공을 자기 진영에 머물도록 하며 음주를 즐기기 위해 연회를 베풀도록 좌우에게 명했다. 항왕과 항백은 동쪽을 향해 앉았고, 아부(亞父) 범증(范增)은 남쪽을 향해 앉았다. 패공은 북쪽을, 장량은 서쪽을 향해 앉았다. 범증이 여러 번에 걸쳐 항왕에게 눈짓을 하다가, 다시 패옥(佩玉)을 들어 보이며 세 번이나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항우는 결코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자리에 일어나 밖으로 나온 범증이 항장(項莊)을 불러 말했다.

「군왕의 마음이 모질지 못하니 그대가 연회장에 들어가 축수를 드리고 검무를 추겠다고 청하시오. 춤을 추다가 유방의 자리와 가까워졌을 때 칼을 내리쳐 죽이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그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오.」

항장이 범증을 말을 듣고 연회장에 들어가 칼을 뽑아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항우의 곁에 앉아있던 항백이 일어나 칼을 뽑아 검무를 추어 항장을 상대하면서 패공을 보호했다. 항장은 항백 때문에 패공을 찌를 수 없었다. 그때 장량이 연회장을 빠져 나와 군문 밖에 있던 번쾌를 불렀다. 번쾌가 장량을 보고 말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일이 매우 급하게 되었소. 지금 검무를 추고 있는 항장이 패공을 찔러 죽이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소.」

「그렇다면 패공의 목숨이 참으로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청하여 연회장에 들어가 목숨을 걸고 패공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번쾌가 즉시 칼을 허리에 찬 채로 방패를 들고 군문으로 들어갔다. 극을 든 호위무사들이 연회장으로 들어가려는 번쾌의 앞을 막았다. 번쾌가 방패를 휘두르자 무사들이 땅에 쓰러졌다. 번쾌가 연회장으로 들어가 장막을 거두고 서쪽을 향해 서서 항왕을 노려보았다. 그의 머리털은 모두 꼿꼿이 서서 위로 향하고 부릅뜬 눈은 그 눈꼬리가 찢어지는 듯했다. 항왕이 번쾌의 모습을 보더니 칼을 집어들고 자리에 일어설 자세를 취하며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하는 자인가?」

장량이 끼어들며 말했다.

「패공의 참승(驂乘)③ 번쾌라는 자입니다.」

「참으로 장사로다. 그에게 한 말 들이 잔에 술을 따라주도록 하라!」

번쾌가 감사의 절을 올리고 일어나 꼿꼿이 서서 술을 받아 단숨에 마셨다. 항우가 다시 말하여 안주로 돼지 앞다리를 주도록 했다. 번쾌에게 주어진 안주는 익히지 않은 생고기였다. 번쾌가 방패를 땅에 엎어놓고 칼을 뽑아 허벅지 부분부터 잘라먹기 시작했다. 항왕이 보고 말했다.

「장사는 더 마실 수 있는가?」

「신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인데 술 한 말 정도야 마다할 리 있겠습니까? 무릇 호랑이와 승냥이와 같은 진왕(秦王)이 사람을 아무리 많이 죽여도 다 죽이지 못할까 걱정하고, 아무리 중한 죄를 주어 죄인들을 처벌해도 그 벌이 무겁지 않을까 걱정하는 바람에 천하가 모두 반기를 들었습니다. 옛날 회왕(懷王)과 여러 장수들이 모두 약속하기를 ‘진나라 군대를 파하고 먼저 함양에 들어간 자를 그곳의 왕으로 삼는다’라고 했었습니다. 오늘 패공이 먼저 진나라를 파하고 함양에 먼저 들어가서도 추호도 감히 재물을 탐내지 않고 궁실과 부고를 모두 봉한 후에 물러나 패상(霸上)에 주둔하며 대왕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장수 몇 사람을 함곡관에 보내 도적들의 출입을 방비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않은 뜻밖의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온갖 고생 끝에 이룬 큰공이 이와 같음에도 아직까지 후작에 봉하여 상을 내리지 않고 있으면서 오히려 소인배들의 말에 귀를 기우려 공이 있는 사람을 죽이시려 하고 있습니다. 망한 진나라의 행위와 하나도 다르지 않으니 대왕께서는 삼가 그 전철을 밟지 마십시오.」

항왕이 번쾌의 말에 미처 응대하지 못하다가 이내 소리쳐 자리에 앉으라고 명했다. 번쾌가 장량 곁에 앉아 좌정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패공이 변소에 간다며 자리에 일어나면서 번쾌를 불러 같이 밖으로 나갔다.

패공이 연회장을 빠져나가 한참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자 항왕이 도위(都尉) 진평(陳平)을 시켜 자리에 돌아오도록 시켰다. 패공이 번쾌를 향해 말했다.

「지금 대장군에게 작별인사도 못하고 연회장을 떠나니 후에 후환이 있지 않겠는가?」

「크게 행하는 일은 세세한 몸가짐은 신경 쓰지 않으며, 큰 예절은 조그만 비난은 감수하는 법입니다. 지금 사람이 바야흐로 도마 위에 놓여져 어육이 되려고 하는 마당인데 어찌 인사 따위의 일을 걱정하십니까?」

이에 패공이 자기 진영으로 가려고 하면서 장량에게 자기 대신 항왕에게 인사를 대신 올려달라고 말했다. 장량이 물었다.

「대왕께서는 이곳에 오실 때 어떤 예물을 들고 오셨습니까?」

「항왕을 위해서는 백벽 한 쌍을, 아부(亞父)를 위해서는 옥으로 만든 주기(酒器) 한 쌍을 가져 왔으나 그들이 노하는 바람에 감히 바치지 못했소. 공은 나를 대신하여 그것들을 바치기 바라오.」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당시 항왕의 군진은 홍문(鴻門)에 있었고, 패공의 군진은 파상에 있어 서로 40여 리 떨어져 있었다. 패공은 항우에게서 몸을 빼내어 수레에서 떼어낸 말을 타고 자기 군진으로 달아났다. 번쾌(樊噲), 하후영(夏侯嬰), 근강(靳强), 기신(紀信) 등 4명의 장수들은 칼과 방패를 들고 말을 탄 패공의 뒤를 따랐다.패공의 일행은 이윽고 여산(驪山)을 돌아 지양(芷陽)④에 당도했다. 패공이 항우의 군진을 빠져 나올 때 장량에게 말했었다.

「여기서부터 우리 진영이 있는 곳까지는 불과 20여 리에 불과하오. 우리가 진영에 무사히 당도했을 때쯤에서 공께서는 항왕의 군중에 들어가 고하시기 바랍니다.」

패공은 소로를 이용하여 패상의 군진으로 돌아가고, 장량은 다시 홍문의 연회장으로 들어가 항우를 접견하며 말했다.

「패공께서는 취기를 이기지 못해 인사도 올리지 못하게 되어 삼가 신에게 백벽 한 쌍을 주어 대왕께 바치고, 다시 옥으로 만든 술잔 한 쌍은 대장군 족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

항왕이 물었다.

「지금 패공은 어디에 있소?」

「패공은 대왕께서 지나치게 자신을 책할 것이라고 소문을 듣고 두려워한 나머지 혼자 몸으로 몸을 빼내어 이미 자기 군중으로 돌아갔습니다.」

항왕이 장량에게서 벽백을 받아 상좌에 놓았다. 아부(亞父)가 옥잔을 받아 땅에 놓고는 칼을 빼어 옥잔을 쳐 깨뜨리며 말했다.

「참으로 애통하구나! 어린아이와 함께 일을 도모했으니 일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항왕으로부터 천하를 뺏어갈 자는 필시 패공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여기 있는 우리들은 그의 포로가 되고 말리라!」

패공은 자기 진영에 돌아가 조무상을 잡아서 죽였다.


주석

1)파상(灞上) : 지금의 섬서성 백록원(白鹿原) 북쪽이다. 서안(西安)의 동쪽으로 흐르는 파수에 기인한 지명이다. 패수(覇水)라고도 한다.

2)홍문(鴻門) : 임동현 동쪽에 있었던 구릉 이름이다. 지금은 항왕영(項王營)으로 부르고 있다.

3)참승(驂乘) : 고대에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닐 때 그 중앙에는 말을 모는 어자(御者)가, 어자의 오른쪽에는 시종이나 호위를 하는 사람이 타고 왼쪽에는 주인이나 장군이 탔다. 병거의 경우는 차우(車右)라 했고 수레의 경우는 참승이라 했다.

4)지양(芷陽) : 지금의 섬서성 서안(西安)의 동쪽으로 패상으로 가는 소로가 시작되는 곳이다.


6. 화소잔도(火燒棧道)

- 잔도를 불태워 항우의 의심을 피하다. -


한 원년 기원전206년 정월 패공이 한왕이 되어 파(巴)①와 촉(蜀)②땅을 다스리게 되었다. 한왕이 장량에게 황금 100일(鎰)③과 주옥(珠玉) 2말을 하사했다. 장량은 그 모두를 다시 항백에게 주었다. 한왕 역시 장량을 통해 항백에게 많은 재물을 주어 한중(漢中)의 땅을 항우에게 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항우가 허락하자 한왕은 마침내 한중의 땅을 얻을 수 있었다. 한왕이 그 봉지에 부임하러 갈 때 장량은 포중(褒中)④까지 따라와 한왕을 전송했다⑤. 한왕은 포중에서 장량을 한나라에 돌아가게 했다. 장량이 한왕과 헤어지면서 말했다.

「대왕께서는 잔도를 지나간 다음 반드시 불태워 절대 관중이나 중원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천하의 제후들에게 밝히십시오. 항왕이 보고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왕은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지나온 잔도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주석

1)파(巴) : 지금의 중경시(重慶市) 일대를 말한다.

2)촉(蜀) :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 일대다.

3)일(鎰) : 고대 중국의 중량의 단위로서 20량 혹은 24량을 일이라고 했다. 춘추전국 시대 때의 한 량은 16g이고 한 일은 약 300그람에서 400g이다. 즉 황금 100일은 지금의 단위로 환산하면 30키로에서 40kg이다.

4)포중(褒中) : 지금의 사천성 면현(勉縣)으로 포수(褒水)와 야수(斜水) 강안을 연결한 포야도(褒斜道) 상의 고을이다.

5)한왕이 섬서성 패상(覇上)에서 봉지인 한중으로 들어간 길은 《고조본기》 내용과는 상이하다. 포중(褒中)은 지금의 사천성 면현(勉縣)으로 포수(褒水)와 야수(斜水) 강안을 연결한 포야도(褒斜道) 상의 읍이고 《고조본기》에는 지금의 섬서성 서안 동남의 두현(杜縣)에서 출발해서 당시 장안에서 진령(秦嶺)을 넘어 한중으로 들어가는 곡도(谷道)인 자오곡(子午谷="혹은" 락곡(駱谷))과 식중(蝕中) 위에 건설된 잔도(棧道)를 이용했다고 했다.


7. 하읍헌책(下邑獻策)

- 하읍에서 천하를 차지할 수 있는 계책을 내다. -


이윽고 장량이 한왕과 헤어지고 한나라에 이르렀으나 항왕은 한왕(韓王) 성(成)이 옛날 장량의 권유로 한왕을 따랐다고 해서 자기 봉국으로 보내지 않고 동쪽의 팽성으로 데리고 갔다. 장량이 항왕에게 말했다.

「한왕이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잔도를 불태워 길을 끊은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그곳에서 중원이나 관중으로 나올 생각이 없는 듯 합니다.」

장량은 이어서 항왕에게 제왕 전영(田榮)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편지를 써서 고했다. 항왕은 이로써 서쪽의 한왕에 대한 걱정을 떨쳐 버리고 그의 군사를 이끌고 북쪽의 제나라를 공격했다.

항왕은 봉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한왕 성의 작위를 후로 깎은 후에 다시 팽성에 이르자 죽였다. 장량이 도망쳐 소로를 이용하여 한왕에게 돌아왔다. 그 사이에 한왕은 한중에서 나와 삼진(三秦)을 평정했다. 한왕에 의해 성신후(成信侯)에 봉해진 장량은 함곡관을 나와 동쪽으로 진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는 한군에 종군했다. 한왕이 팽성에 이르렀으나 초군과의 싸움에서 지고 패퇴했다. 한왕이 하읍(下邑)①에 이르렀을 때 말에서 내려 말안장에 기대어 장량에게 물었다.

「내가 함곡관 동쪽의 땅을 떼어서 다른 사람과 나누려고 하오. 누가 능히 나와 함께 통일천하를 건립하여 대공을 세울 수 있겠소?」

장량이 대답했다.

「구강왕 경포(黥布)는 초나라의 맹장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초왕과 틈이 벌어져 사이가 소원한 상태고, 팽월(彭越)은 제왕(齊王) 전영(田榮)과 함께 양나라 땅에서 항우에게 반기를 들었으니 이 두 사람을 급히 불러 쓰십시오. 그리고 대왕의 장수 중에는 오직 한신만이 큰 일을 맡기면 한 방면의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땅을 나누시려고 하신다면 이 세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야만 초나라를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한왕은 즉시 수하(隨何)②를 사자로 보내 구강왕 경포를 설득하도록 하고 팽월에게는 별도의 사람을 보내 연락을 취하도록 했다. 이윽고 위왕(魏王) 표(豹)가 배반하자 한신을 장수로 삼아 그를 공격하게 했으며, 계속해서 연(燕), 대(代), 제(齊), 조(趙) 등의 땅을 공략하게 했다. 한왕이 초나라를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세 사람의 힘 때문이었다.

장량은 평소에 잔병이 많아 일찍이 군사들을 직접 지휘해서 싸움에 임한 적이 없었고, 항상 계책을 내는 신하가 되어 때때로 한왕을 따라 종군하며 옆에서 도왔다.


주석

1)하읍(下邑) : 지금의 안휘성 탕산현(碭山縣)이다.

2)수하(隨何) : 초한쟁패 시 고조의 알자(謁者)로 당시 항우의 부하였던 경포(黥布)를 설득하여 초나라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투항하게 했다. 한나라가 창건되자 그 공으로 호군중위(護軍中尉)가 되었다.



8. 차저조봉(借箸阻封)

- 장량이 한왕의 젓가락을 빌려 분봉책의 잘못을 간하다. -


한 3년 기원전 204년, 항우가 형양에서 포위되어 맹공을 받은 한왕은 매우 두려워하며 역이기(酈食其)와 함께 초나라 세력을 약화시킬 계획을 궁리했다. 역이기가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옛날 탕왕은 하나라의 걸왕(桀王)을 토벌하고 나서, 하나라의 후손들을 기(杞)①에 봉했고, 은주(殷紂)를 토벌한 주무왕은 은나라의 후손들을 송(宋)에 봉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흥기하자 덕과 도를 저버리고 각 제후국들을 침략하여 6국을 멸하고 그 후손들의 대를 끊어 그들은 송곳 하나 세울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진실로 육국의 후예들을 제후로 다시 세우시고 그들 모두에게 제후의 인수(印綬)를 나누어주신다면, 그 나라의 군신들과 백성들은 폐하의 은덕에 감읍하여 대왕에게 달려와 귀의할 것이고, 폐하의 도의를 앙모하여 기꺼이 폐하의 신민이 되기를 자청할 것입니다. 세상에 도덕과 정의가 행해지면 페하께서는 남면하여 패자를 칭하게 될 수 있으며, 초왕은 틀림없이 의관을 정제하여 공손한 태도로 달려와 폐하께 조배를 올릴 것입니다. 」

한왕이 역이기의 말을 찬동하며 말했다.

「좋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제후들을 위한 인장을 새길 것이니, 선생은 그것들을 직접 들고 제후들을 찾아가 전하십시오.」

역니기가 미처 행차를 떠나기 전에 장량이 마침 외지에서 돌아와 한왕을 알현했다. 한왕이 막 식사를 하려다 말고 장량을 향해 말했다.

「자방(子房)께서는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오. 문객으로 있던 사람 중에 초나라의 세력을 깎을 수 있는 계책을 낸 사람이 있었소.」

이윽고 한왕이 장량에게 역이기의 계책을 모두 말하고 물었다.

「자방께서는 그의 계책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도대체 어떤 자가 이따위 생각을 폐하께 올렸습니까? 그렇게 하신다면 폐하께서 도모하려고 하는 대사는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청컨대 대왕 앞에 놓여있는 젓가락을 잠시 저에게 빌려주시면 제가 대왕을 위해 당면한 형세를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장량이 이어서 한왕에게 설명했다.

「옛날 걸왕을 토한 탕왕이 그의 후손들을 기(杞) 땅에 봉한 일은 걸왕을 사지에 몰아넣어 능히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능히 항적을 사지에 몰아넣어 그를 제압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제후들을 새로 세울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고 그 후예들을 송나라에 봉한 일은 주왕의 머리를 이미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는 항적(項籍)의 머리를 능히 얻을 수 있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었소.」

「그것이 불가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이 은나라에 들어갈 때 상용(商容)②이 살았던 마을의 이문(里門)에서 그의 어진 마음을 표창했고, 감옥에 갇혀있었던 기자(箕子)를 석방했었으며, 또한 주왕에게 죽임을 당한 비간(比干)의 무덤에 흙을 더 쌓아 그 높이를 높여주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능히 성인의 분묘를 다시 새로 쌓고, 현인이 살았던 마을의 이문에서 그의 덕을 칭송하며, 재능있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앞을 지나며 그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실 수 있습니까? 」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거교(鉅橋)③의 창고에 있던 식량과 녹대(鹿臺)④에 쌓여있던 금품을 꺼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능히 부고에 있는 식량과 금품을 모두 꺼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실 수 있습니까? 」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네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은나라를 멸한 일이 끝나자, 병거를 개조해서 수레를 만들고, 병장기를 모두 거꾸로 세워 창고 속에 넣고 모두를 호랑이 가죽으로 덮음으로써 천하에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무력의 사용을 중지하고 문치를 행하여 다시는 병장기의 사용을 금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다시 화산(華山)의 남쪽 기슭에 전마들을 풀어놓고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해 천하에 보였습니다. 오늘 폐하께서는 전마들을 풀어주어 다시는 그 말들을 전쟁에 쓰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주무왕은 은나라를 멸하고 돌아와 소들을 도림(桃林)⑤ 북쪽 기슭에 풀어놓고 다시는 용병의 일로 군수품과 양초를 운반하거나 모으지 않을 것임을 천하에 보였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수레를 끄는 소들을 풀어 방목시킴으로써 천하에 군수품과 양초를 운반하거나 모으지 않겠다는 뜻을 보일 수 있으십니까? 」

「할 수 없소.」

「그것이 불가한 일곱 번째의 이유입니다. 또한 천하를 돌아다니는 선비들이 그들의 친척과 이별하고, 조상의 분묘를 버리며, 옛 친구들과 떨어져 폐하를 따라 천하를 전전하는 것은 단지 매일 밤 한 뼘의 땅이나마 떼어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오늘 육국(六國)을 복국시켜 한(韓), 위(魏), 연(燕), 조(趙), 제(齊), 초(楚) 등의 후손들을 제후왕으로 세운다면, 천하의 선비들은 각기 그 주인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들의 친척과 친구 그리고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갈 버릴 것인데, 폐하께서는 누구와 함께 천하를 얻기 위해 싸우려고 하십니까? 불가한 여덟 번째 이유입니다. 더욱이 지금 초나라보다 더 강대한 나라는 없어, 세력이 약한 6국의 제후국들은 결국은 초나라를 다시 따를 것입니다. 폐하께서 어떻게 그들을 신하로 삼으실 수 있겠습니까? 문객의 계책을 시행하신다면 폐하가 도모하려고 하는 일은 모두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한왕이 장량의 말을 다 듣더니 입안에 있던 음식을 뱉어내고는 역이기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유생 놈 때문에 하마터면 천하의 공사(公事)를 망칠뻔 했구나!」

한왕이 즉시 명을 내려 조각하고 있던 인장들을 모두 녹여버리라고 했다.


주석

1)기(杞) : 주무왕(周武王)이 은주(殷紂)를 멸하고 제후들을 봉할 때 하우(夏禹)의 자손인 동루공(東樓公)을 찾아내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인 옹구(雍丘)에 봉했다. 춘추 때는 지금의 산동성 안구현(安丘縣)인 순우(淳于)로 옮겼다가 기원전 445년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기우(杞憂)라는 고사가 생긴 곳이다.

2)상용(商容) : 은나라 주왕 때의 현인으로 한때 악관(樂官)으로 있었으나 후에 주왕의 폭정을 피해 태항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주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기 위해 진군하다가 그가 살던 마을 입구의 이문(里門)에서 그를 표창했다.

3)거교(鉅橋) : 은나라 주왕 때 나라의 식량창고가 있던 땅 이름으로 지금의 하북성 곡주현(曲周縣)이다.

4)녹대(鹿臺) :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이 축조한 대(臺)의 이름으로 전설에 의하면 폭이 사방 3리(里), 높이가 1000자(尺)에 달했다고 했다. 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 경내에 있었으며 주왕이 백성들을 수탈한 재물과 폭정으로 동원한 백성들을 노역으로 녹대를 지어 놓고 상나라의 모든 재화들을 이곳에 보관하려고 하였다. 주무왕과의 싸움에서 패한 주왕은 녹대에 올라가 불길에 뛰어들어 죽었다.

5)도림(桃林) : 지금의 하남성 영보현(靈寶縣) 이서와 섬서성 동관시(潼關市) 이동 지역 사이의 산악지방을 말한다.



9. 섭족봉왕(蹑足封王)

- 한왕의 발등을 밟아 한신을 제왕에 봉하게 하다. -


한왕 4년 기원전 203년, 한신이 제나라를 정벌하여 점령하고 스스로 제왕(齊王)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사자를 한왕에게 보냈다. 한왕이 대노하여 한신을 공격하려고 했다. 장량이 한왕에게 한신을 제왕에 봉해야 한다고 권했다. 한왕은 장량에게 제왕신(齊王信)이라고 새겨진 인장을 주어 한신에게 사자로 보냈다. 이 일은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그해 가을 한왕은 초군의 뒤를 추격하여 하양(夏陽)의 남쪽에 이르러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고릉(固陵)으로 후퇴하여 보루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며 약속한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당도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에 한왕이 장량의 계책을 따르자 제후들이 이윽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다. 이 일은 <항우본기(項羽本紀)>에 기록되어 있다.


『이하는 《회음후열전》의 기사다.』

「제나라 사람들은 속임수가 많고 변화무쌍하니 반복이 심한 나라입니다. 또한 초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제가 이곳의 가왕(假王)이라도 되어 진정시키지 않는다면 정세가 안정이 안 되어 후일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초나라는 바야흐로 한군을 형양(滎陽)에서 포위하고 맹공을 가하고 있어 한왕은 한신이 제나라의 군사들을 휘몰아 구원해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이윽고 한신의 사자가 당도하여 그가 보낸 편지를 본 한왕은 불같이 화를 내며 한신을 향해 욕을 해댔다.

「지금 이곳에서 초군에게 포위되어 곤경에 처해있는 내가 아침저녁으로 구원군이 언제나 당도하나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는데, 그 놈은 오히려 왕자리만 탐내고 있단 말인가?」

곁에 있던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한왕의 발등을 일부러 밟으며 제지하고는, 귓가에 입을 대고 은밀히 말했다.

「지금 한나라는 매우 불리한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어찌 왕이 되려는 한신의 생각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그를 제후왕으로 세우고 그를 잘 대우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를 지키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마도 큰 변란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한왕이 즉시 깨닫고 다시 큰 소리로 한신을 욕하며 말했다.

「사내자식이 제후가 되었으면 진왕(眞王)이 되어야지, 하필이면 가왕(假王)이 뭐란 말인가?」

한왕은 즉시 장량을 보내 한신을 제왕으로 세우고, 그 군사들을 동원하여 초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10. 운주장악 결승천리

장막 안에서 술잔을 기우리며 천리 밖의 전쟁을 승리를 이끌다. -


한 6년 기원전 201년 정월, 항우를 멸하고 공신들에게 논공행상을 했다. 장량은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가 싸워 세운 공이 없었음에도 고조가 일부러 장량이 세운 공에 대해서 언급했다.

「군중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내어 천리 밖의 승부를 결정지었다. 이것이 자방이 세운 공로이다. 장량으로 하여금 제나라 땅의 3만 호를 스스로 골라서 봉읍으로 갖게 하라!」

이에 장량이 사양하며 말했다.

「원래 저는 하비(下邳)에서 몸을 일으켜 경구(景駒)를 찾아가다가 도중에 유(留) 땅에서 폐하를 우연히 뵙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저에게 폐하를 만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저의 계책을 받아 주셨고, 다행히 저의 계책은 적중하게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이룬 공이 아니라 폐하의 배려로 인한 일이라, 저는 단지 유현(留縣)에 봉해지는 것만으로 과분하온데, 어찌 감히 제가 3만 호의 봉지를 바라겠습니까?」

그래서 장량은 유(留) 땅을 봉지로 갖는 유후(留侯)가 되어, 소하(蕭何) 등과 같이 봉해졌다.


11. 옹치선후(雍齒先侯)

- 가장 미워했던 옹치를 제일 먼저 후에 봉해다.-


황제가 이미 큰공을 세운 20여 명의 공신들에게 상과 봉지를 주었으나, 그밖의 공신들에 대해서는 매일 서로 공을 다투어, 서열을 매길 수 없어, 오랫동안 봉읍과 상작을 결정할 수 없었다. 황제가 낙양의 남궁(南宮)에 머물며 다리 위를 지나가다가 다리 밑의 모래밭에 일단의 장수들이 모여 앉아 서로 간에 무엇인가를 의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황제가 곁에서 시종하고 있던 유후 장량에게 물었다.

「저들은 지금 무엇을 의논하고 있소?」

「폐하께서는 아직도 그것을 모르시고 계십니까? 저들은 반란을

획책하고 있는 중입니다.」

「천하가 이미 안정되어 가려고 하는 마당에, 무엇 때문에 모반

을 의논한단 말이오.」

「폐하께서는 평민의 신분으로 일어나, 저들의 힘으로 천하를 얻으시어, 지금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봉읍과 상작을 내린 사람들은 모두 소하(蕭何)나 조참(曺參)과 같은 폐하와 가깝거나 총애하는 옛 친구들 뿐이고, 폐하께서 살해한 자들은 모두 살아오면서 원한을 품은 자들입니다. 지금 군리(軍吏)들이 저들과 같은 사람들의 공로를 모두 계산해 본 바, 천하의 땅을 전부 가지고도 그들 모두에게 봉읍과 상작을 주기에는 부족하다고 했음으로, 저들은 폐하께서 자기들 모두에게 봉읍을 내려주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또 평소에 자기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 의심받아 살해될까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저렇게 삼삼오오 모여서 모반을 하려고 의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소?」

「폐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군신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미워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옹치(雍齒)라는 놈은 나와 오랜 원한이 있소. 그 놈은 옛날 나를 난처한 처지에 빠지게 해서 욕을 여러 번 보게 했소. 내가 여러 번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가 세운 공이 많이 차마 죽이지 못하고 참고 있는 중이오.」

「지금 급히 옹치를 먼저 봉하여 군신들이 보게 하십시오. 봉읍과 상작을 받게 되는 옹치를 보면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자기도 틀림없이 봉작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조가 주연을 마련하여, 그 자리에서 옹치를 십방후(什方侯)①에 봉했다. 이어서 고조는 군신들 앞에서 승상과 어사(御史)를 재촉하여 공신들의 공을 평가하여 봉읍과 상작을 하루빨리 결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윽고 주연이 끝나자 군신들은 모두 기뻐하며 말했다.

「옹치도 후에 봉해졌는데, 우리 같은 사람이야 어찌 걱정하겠는가?」


주석

1)십방후(什方侯) : 십방은 진나라가 설치한 현 이름으로 지금의 사천성 십방시(什邡市) 남쪽이다.



12. 권도관중(勸都關中)

- 관중을 도읍으로 삼아야한다고 권하다. -


유경(劉敬)①이 고조에게 유세했다.

「관중을 도성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고조는 의심하며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고조의 좌우에 있던 대신들은 모두가 관동(關東) 출신이라 그 대부분이 낙양을 도성으로 삼을 것을 권하면서 그 이유를 말했다.

「낙양의 동쪽에는 성고(成皐)가 있고, 서쪽에는 효산과 민지(澠池)가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황하에 의지하고 있고,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마주 대하고 있어 그 험준한 지형과 견고한 성곽에 의지한다면 가히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장량이 자기 의견을 말했다.

「낙양은 비록 그와 같이 지리적인 이점과 견고한 성곽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사이의 땅은 너무 협소하여 사방 백리에 불과합니다. 또한 토지는 척박하고, 사면에서 적군의 침입을 맞이할 수 있어 이와 같은 땅은 결코 군사적으로 유리한 땅이 아닙니다. 관중의 동쪽에는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이 있고, 서쪽에는 농산(隴山)②과 민산(岷山)이 있어 그 사이의 비옥한 땅은 사방 천리에 달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쪽으로는 물산이 풍부한 파(巴)와 촉(蜀) 두 군(郡)과 접하고 있고, 북쪽에는 호(胡) 땅의 대초원이 있어 능히 가축을 방목하여 기를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③그래서 삼면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굳게 지킬 수 있고, 단지 동쪽 한 방면만을 통해 제후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제후들이 안정되어 있으면, 하수와 위수(渭水)를 이용하여 관동에서 산출되는 양식과 물자들을 관중으로 수송할 수 있으며, 제후들이 반하여 천하에 변란이 일어나면 위수나 하수의 순류를 타고 병사들과 그 군수품을 수월하게 수송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천리에 달하는 철옹성과 같은 땅이며 하늘이 내려준 천혜의 창고입니다. 유경(劉敬)의 올린 건의가 옳습니다.」

그래서 고조는 즉시 마음을 결정하고 어가를 움직여 서쪽의 관중으로 들어가 그곳에 도읍을 정했다.

장량도 고조를 따라 관중에 들어가 살았다. 그러나 그는 원래 몸에 잔병이 떠나지 않았던 허약한 체질이었기 때문에 도인(道引)④의 술(術)을 행하며 오곡(五穀)으로 음식을 먹지 않으며, 일 년여 동안을 대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주석

1)유경(劉敬) : 원래는 루(婁) 씨로 제나라 출신이다. 고조 5년 기원전 202년 낙양에 머물고 있던 유방을 알현하고 수도를 장안으로 옮기라고 건의했다. 고조가 루경의 헌책을 받아들여 그 공으로 유씨 성을 하사했다. 그는 유방에 의해 낭중(郎中)에 임명되고 봉춘군(奉春君)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후에 관내후(關內侯)로 승진되어 건신후(建信侯)에 봉해졌다. 유방이 흉노와의 싸움에 패하고 들어간 성안에서 겹겹히 포위되어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는 한나라 황실의 여자를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보내 강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방이 그를 흉노에게 사자로 보내 화친을 청하고 강화를 맺음으로써 한나라와 흉노와의 관계는 우호적이 되었다. 이에 다시 육국의 귀족 자제들과 후손들을 모두 관중으로 옮겨 살게 하여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사기열전·유경숙손통열전99》 참조

2)농산(隴山) : 지금의 섬서성과 감숙성을 남북으로 가르는 육반산(六盤山) 남단의 옛날 별칭이다. 산세가 험하여 섬서평원과 감숙고원의 분계로 옛날부터 관중을 지키는 4개의 천연적인 요새 중 하나로 지칭되어 왔다.

3)원문은 호원지리(胡苑之利)다. 호는 흉노족의 땅, 원(苑)은 짐승들을 풀어 방목할 수 있는 초원을 뜻하는 말로 즉 유목을 할 수 있는 북쪽의 초원지대를 의미한다.

4)도인(道引) : 도가의 양생법이다. 호흡을 조절하면서, 손발을 굽혔다 폈다 해서 혈액을 순환시켜 신체의 건강을 증진시켰다.



13. 지보태자(智保太子)

- 지혜로 태자를 보호하다. -


고조가 태자를 폐하고 척(戚)부인의 아들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대신 세우려고 했다. 대부분의 대신들이 부당함을 간했지만 아무도 굳게 결심한 고조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이를 두려워한 여후는 어찌 줄 모르고 곤혹스러워했다. 어떤 사람이 여후에게 말했다.

「유후(留侯)는 원래 계책을 잘 내어, 황제께서는 그의 말을 잘 듣습니다.」

여후가 그의 동생 건성후(建成侯) 여택(呂澤)을 보내 유후에게 위협을 가해 대책을 말해 달라고 하면서 말했다.

「당신은 일찍이 황제를 보좌하는 모신(謀臣)이오. 그런데 지금 황제께서 그 태자를 폐하려고 하는 마당에 어찌 베개를 높이 하고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있단 말이오.」

「옛날 황제께서 여러 번에 걸쳐 위급한 상황에 처하셨을 때, 저의 계책을 채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천하가 안정되었고, 또한 황제께서 사랑하는 아들이 있어 태자를 바꾸려고 하십니다. 그 일은 황실이 골육간에 일어난 문제라 나와 같은 사람 백 명이 간한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여택이 장량에게 한사코 계책을 마련하라고 위협하며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당신은 나를 위해서 계책을 마련해 주어야겠소.」

「이 일은 말로 다투어 이루어 낼 수 없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 하겠소. 황제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초빙하려 했으나 얻지 못한 네 사람이 있소. 이미 나이가 들어 연로한 그 네 사람은 황제가 사람을 오만무례하게 대한다고 해서 초빙을 거절하고 몸을 피해 산중으로 도망가 숨어버렸오. 그들은 도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한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황제께서는 그들 네 사람을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지금 대감께서 금은이나 재물을 아까워하지 마시고 충분히 준비한 후에, 태자로 하여금 친히 공손한 말로 편지를 쓰게 하여 구변이 좋은 변사에게 주어, 안거(安車)①를 끌고 가 그들을 간절하게 청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초빙에 응할 것입니다. 일단 그들이 오게 되면 문객으로 삼아 시시때때로 입조하여 황제폐하를 접견하게 하면, 폐하께서는 필시 놀라 그 연유를 묻게 될 것입니다. 황제께서는 이미 그 네 사람이 어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심으로 태자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여후는 여택에게 명하며 태자가 친필로 공손하게 쓴 편지와 많은 예물을 가지고 가서 이 네 사람을 맞이하라고 했다. 이윽고 그 네 사람이 부름에 응해 도성에 당도하자 건성후가 문객으로 삼아 그의 부중에 머물게 했다.

한나라 11년 기원전 196년,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때 황제는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태자를 대신 보내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했다. 그 네 사람이 서로 의논하며 말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장차 태자의 자리를 보존하기 위함이다. 태자가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 될 것이다.」

네 사람이 건성후 여택을 찾아가 말했다.

「태자가 군사를 인솔하여 출전해서 공을 세운다면, 태자는 이미 높은 자리에 있으니 아무런 실익이 없게 될 것이오. 그러나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그때는 화가 미치게 될 것이오. 또한 태자와 함께 출전하는 여러 장수들은 이미 옛날 황제폐하와 함께 천하를 종횡한 사나운 장수들이오. 지금 태자가 그들의 대장이 된다는 것은 마치 온순한 양이 사나운 이리들의 대장이 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소. 따라서 여러 장수들은 태자를 위해 온 힘을 다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되면 틀림없이 아무런 공을 세울 수 없을 것이오. 저희가 듣기에 ‘어미를 사랑하면 그 자식을 품에 안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척부인이 매일 밤 폐하의 곁에 있으면서 시중을 들고 있습니다. 이에 폐하께서는 나이 어린 조왕 여의(如意)를 항상 품에 안고 계시면서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불초한 자식을 사랑하는 자식 위에 앉게 할 수 없게 만들겠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조왕 여의를 태자 대신 세우려는 폐하의 뜻은 분명합니다. 대감께서는 급히 달려가 황후께서 황제를 기회를 보아 배알하면서 눈물로써 ‘경포는 천하의 맹장에 용병을 귀신같이 행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출전하게 되는 여러 장수들은 모두 폐하의 옛날 친구로써 흉맹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들이 태자의 부하가 된다면 그것은 마치 온순한 양으로 하여금 사나운 이리를 통솔하라는 것과 같아 태자는 결코 그들을 부릴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경포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북을 힘껏 치며 이곳 도성을 향해 쇄도해 달려 올 것입니다. 폐하께서 비록 병중이라고 하지만, 억지로라도 큰 수레를 준비하게 하여 오르시어, 누워서라도 장수들을 감시한다면, 그들은 감히 온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디 폐하의 처자들을 위해 억지로라도 힘을 써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간청을 올리도록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여택이 그날 밤으로 급히 여후에게 달려가 네 사람의 말을 전했다. 여후는 틈을 보아 황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네 사람이 일러 준대로 호소했다. 고조가 듣고 말했다.

「내가 원래 그 어린아이를 보낼만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소. 내가 직접 가겠소.」

그래서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출정하니 도성을 지키게 된 여러 신하들은 무도 파상(灞上)까지 나와 전송했다. 그때 장량도 심한 병을 앓고 있었으나 억지로 몸을 일으켜 황제를 따라 종군했다. 행렬이 곡우(曲郵)②에 이르렀을 때 장량이 황제를 보고 말했다.

「신이 마땅히 종군해야 하나, 병이 너무 심합니다. 초나라 군사들은 날쌔고 용맹하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그들과 싸울 때 정면으로 맞서서 무기로 다투지 마시기 바랍니다.」

장량이 다시 기회를 보다가 황제에게 권했다.

「태자를 장군으로 삼아 도성의 군사들을 감독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방이 비록 병중이기는 하지만, 누워서라도 힘써 태자를 보좌하도록 하시오.」

그리고 고조는 숙손통(叔孫通)을 태부로 장량을 소부로 삼아 자기가 없는 동안 태자를 보좌하도록 했다.

한나라 12년 기원전 195년 고조가 경포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도성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태자를 바꾸려고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장량이 간했으나 마음을 바꾸지 않자, 태부 숙손통이 고금의 일을 예로 들어 죽음을 각오하고 태자의 일을 간했다. 고조가 짐짓 숙손통의 간언을 받아들이는 척 했으나 여전히 태자를 바꾸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윽고 군신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어 술을 돌릴 때 태자가 곁에서 수행했다. 그때 그 네 사람의 은자들도 태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나이가 이미 80이 넘어 하얀 수염과 눈썹에 의관이 매우 위엄이 있었다. 황제가 보고 괴이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저 네 사람의 노인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네 노인들이 차례로 앞으로 나오면서 자기들은 이름은 각기 동원공(東園公), 각리선생(角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이라고 했다. 황제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몇 년에 걸쳐 초빙했으나 당신들은 모두 나를 피해 달아나 버리더니, 지금은 무슨 연유로 내 아들을 스스로 찾아와 사귀고 있는 것이오?」

네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선비들을 업신여겨 자주 욕설을 퍼붓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것을 추구하는 저희들은 욕됨을 피하기 위해 폐하로부터 도망쳐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가만히 들어보니 태자께서는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선비들을 공경하고 사랑함으로 해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목을 길게 빼고 태자를 위해 목숨이라도 걸어 모시려하고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에 저희들이 태자님을 찾아 모시고 있습니다.」

「번거롭겠지만 공들은 태자를 잘 이끌어 주기 바라오.」


주석

1)안거(安車) : 앉아서 타고 다니는 작은 수레로써, 옛날의 수레는 대체적으로 서서 탔었다. 고관이 나이가 들어 퇴직했거나, 명망이 높은 은사(隱士)들을 불러 임용할 때 존경하는 표시로 앉아서 탈 수 있는 작은 수레를 보내 초빙했다.

2)곡우(曲郵) :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동쪽



14. 우익이성(羽翼已成)

- 태자의 날개가 이미 자라 하늘 높이 날으니 내가 어찌 할 수가 없구나 -


네 노인이 고조에게 축수를 올리고 총총걸음으로 물러갔다. 고조가 척희를 불러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네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태자를 바꾸고 싶으나, 저 네 사람이 태자를 보좌하고 있으니, 그것은 이미 태자의 날개가 자라버렸음이라! 이제는 나도 어쩔 수가 없구나! 여후는 당신의 주인이로다!」

척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자 고조가 말했다.

「나를 위해 초나라 춤을 추시오. 내가 그대를 위해 초나라 노래를 불러주리다!」

고조가 척희의 노래에 맞춰 노래했다.


鴻鵠高飛 一擧千里(홍곡고비 일거천리)

높고 높이 나는 홍곡, 한 번 날면 천리를 가는 홍곡,



羽翮已就 橫絶四海(우핵이취 횡절사해)

날개가 이미 자라, 천하를 마음껏 날아다니네


橫絶四海 當可奈何(횔절사해 당가나하)

온 천하를 마음껏 날아다니니, 이제는 어쩌겠는가?



雖有矰繳 尙安所施(수유증격 상안소시)

비록 주살이 있다 한들, 이제는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고조가 노래를 연달아 몇 번 부르자, 척부인이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다. 고조가 일어나 안으로 들어가니 주연이 파했다. 고조가 결국은 태자를 바꾸지 못한 것은 모두 옛날 장량이 네 사람의 은자를 태자의 손님으로 초빙하게 한 것 때문이었다.


15. 공성신퇴(功成身退)

- 대공을 이루고 초야로 물러나다. -


장량이 대(代) 땅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출정한 황제를 따라 종군하다가 마읍(馬邑)에서 기이한 계책을 내었고, 다시 소하를 상국에 임명하도록 건의하는 등, 황제와 함께 천하 대사를 표시 안나게 논의한 것은 매우 많았지만, 모두가 천하의 존망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록하지 않는다. 장량은 그 즈음에 늘 말하곤 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나라의 재상을 지냈고, 이윽고 진나라에 의해 한나라가 멸망하자 만금의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강포한 진나라에 원수를 갚으려고 하다가 천하를 진동시켰다. 오늘 이 세 치 혀로 황제의 스승이 되고 만호의 봉읍을 받았으며, 그 지위는 열후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포의로 시작한 사람으로는 지극히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라 나는 이것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 세상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적송자(赤松子)의 뒤를 따라가 노닐고자 한다.」

이어서 장량은 선식을 배워 오곡을 먹지 않았고, 도인(道引)을 행하여 몸을 가볍게 했다. 이윽고 고조가 세상을 뜨자 여후가 장량의 은혜를 생각하고 강제로 음식을 먹게 하면서 말했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마치 흰 망아지가 문틈으로 지나가는 것과 같이 찰나의 일과 같은데, 어찌 그와 같이 스스로 고통스럽게 사십니까?」

장량은 부득이 선식을 중단하고 억지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8년 후(기원전 187년)에 죽었다. 시호는 문성후(文成侯)고 아들 장불의(張不疑) 작위를 물려 받았다.


장량이 옛날 하비(下邳)의 다리 위에서 만난 노인으로부터 《태공병법(太公兵法)》을 받은 지 13년 후에 고조와 함께 제북(濟北)을 지나다가 과연 곡성산(穀城山) 밑 밑에서 황석(黃石)을 보게 되었다. 장량이 그 황석을 거두어 가지고 와서 보물처럼 간수하며 사당을 지어 제사까지 지내주었다. 장량이 죽자 그 자손들이 그 황석과 함께 묻었다. 그후 장량의 후손들은 복일(伏日)이나 납일(臘日)이 되면 장량과 같이 황석에게 제사를 올렸다.

유후 장불의(張不疑)는 효경제(孝景帝) 5년 기원전 175년에 불경죄를 짓고 그의 봉지는 몰수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귀신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또한 괴이한 일이 있다고 말한다. 한 노인이 장랑에게 병서를 준 일과 같은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고조가 여러번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그때마다 장량이 계책을 내어 공을 세웠으니 어찌 그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고조가「무릇 장막 안에서 게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 승부를 결정 짓는 것은 내가 장량만 못하다.」라고 했다. 나는 장량의 외모가 매우 우람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화상을 보니 참으로 아녀자와 같이 예뻤다. 그래서 공자가 한 말이 있다. 「외모로써 사람을 취한다면 내가 자우(子羽)①에게 실수를 한 것과 되리라!」 유후에게도 해당된다고 하겠다.


주석

1)자우(子羽) : 노나라 출신의 공자의 제자다. 외모가 매우 추한 자우가 공자에게 배우려고 하자, 공자는 그가 재주와 덕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제자로 받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자의 수업을 받은 자우가 품성이 어질고 덕망이 높은 것을 본 공자는 ‘나는 말 잘하는 것으로 사람을 골랐다가[以言取人(이언취인)] 재여(宰予)에게 실수하였고, 생김새만을 보고 사람을 가리다가[以貌取人(이모취인)] 자우에게 실수하였다’라고 자신을 탓했다.



【유후장량세가2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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