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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1:46:449122 
노주공세가(魯周公) 3.노(魯)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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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세가3.노주공(魯周公)

755. 依之違之(의지위지)

어떤 제후들은 복종하였고 또 어떤 제후들은 따르지 않았다.

756. 周公綏之(주공수지);

주공이 이것을 안정시키고

757. 憤發文德(분발문덕),

문덕을 베푸는데 한층 분발하자

758. 天下和之(천하화지);

천하가 이에 호응하였다.

759. 輔翼成王(보익성왕),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좌했음으로

760. 諸侯宗周(제후종주),

제후들은 주나라를 종주로 삼았다.

761. 隱桓之際(은환지제),

그러나 은공(隱公)과 환공(桓公) 시대 때는

762. 是獨何哉(시독하재)?

어찌하여 유독 편안하지 못했던가?

763. 三桓爭强(삼환쟁강),

삼환이 서로 세력을 다투었기 때문에

764. 魯乃不昌(노내불창).

노나라는 결국은 크게 번창하지 못했다.

765. 嘉旦<金縢>(가단<금등>)

주공단이 행한 금등(金縢)의 아름다운 행위를 칭송하여

766. 作<周公世家>第三(작<주공세가>제삼)

<주공세가>제삼을 짓는다.

주공(周公) 단(旦)은 주무왕(周武王)의 동생이다. 문왕(文王)이 살아 있을 때 단은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효성이 지극했였다. 단은 문왕의 말을 잘 따랐고 그 성격은 충후하고 인자하였다. 또한 남을 지극히 사랑하여 다른 형제들과는 달랐다. 문왕이 죽고 무왕이 그 뒤를 잇자 단은 항상 무왕 곁을 떠나지 않고 보필하였다. 단은 수많은 정무를 맡아 무왕을 도왔다. 무왕 9년에 무왕이 친히 동정하여 맹진(盟津)에 이르렀을 때 주공도 같이 종군하였다. 다시 무왕 11년에 왕이 은주(殷紂)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목야(牧野)의 벌판에 이르렀을 때 주공도 같이 따라가 곁에서 보좌하며 『목서(牧誓)1)』를 써서 바쳤다. 주공단이 그때도 종군하여 무왕을 도와 참전하였다. 주나라 군사들이 은나라 군사들을 파한 다음 상궁(商宮)으로 진입하여 주왕을 죽였다. 주공은 대월(大鉞)을 소공(召公)은 소월(小鉞)을 손에 들고 무왕 곁에 서서 호위하였다. 태공이 끌고 온 희생을 잡아 땅에 제사 지내고 주왕의 죄를 하늘에 고하고 은나라 백성들에게 공포하였다. 주왕에 의해 감옥에 갇혀있던 기자를 석방하고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綠父)를 은의 고토에 봉하여 그 유민을 다스리며 사직의 제사가 끊이지 않게 했다. 무왕이 그의 동생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등을 은나라의 삼감(三監)에게 명하여 무경 녹보를 감시하게 하였다. 이어서 공신들과 동성의 종족들 및 형제들을 모두 제후로 봉했다. 주공은 오제(五帝)의 한 사람인 소호(少昊)2)가 도읍했던 곳인 곡부(曲阜)의 땅에 봉했다. 그래서 주공을 노공(魯公)이라고도 불렀다. 주공은 봉지에 가지 않고 호경(鎬京)에 머물러 무왕을 도왔다.

은주(殷紂)를 토벌한 다음 해에 무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 때는 비록 은주를 멸했다고는 하나 천하통일의 위업은 아직 이루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는데 무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주나라의 군신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태공과 소공이 귀갑(龜甲)을 태워 점을 쳐 길흉을 알아보려고 했다. 주공이 말했다

「우리 선왕들께 근심과 슬픔을 끼쳐 드릴 수 없다.」

그리고는 주공이 스스로 무왕 대신 자기의 몸을 바치겠다며 세 개의 제단을 쌓게 하고 그 앞에 북면(北面)하면서 손에는 벽옥(璧玉)과 홀(笏)3)을 손에 들고 태왕(太王), 왕계(王季), 문왕(文王)의 신위(神位)에 고했다. 태사(太史)가 죽간의 축문을 큰 소리로 읽었다.

「바라옵건대 조상님들의 원손(元孫)인 왕발(王發)은 정사에 열심히 일하다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습니다. 만일 세 분 선왕들께서 하늘에 진 빚이 있어서 그 자손 한 사람을 희생으로 바쳐야 한다면 청컨대 이 단으로 하여금 왕발의 몸을 대신하여 죽게 하여 주옵소서! 이 단은 재주가 뛰어나고 다재다능하여 귀신들을 잘 모실 수 있지만 왕발은 이 단 보다 다재다능하지 못하여 귀신을 잘 받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왕발은 천제의 궁정에서 세상을 두루 보살피고 그 능력을 발휘하여 조상님들의 자손들을 이 땅 위에 정착하여 살 수 있도록 하라는 천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백성들은 모두 그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또한 능히 하늘이 땅에 내려주신 천명을 실추시키지 않을 것이며, 세 분 선왕님들 역시 그가 바치는 제사상을 영원히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거북등의 점괘로 명을 받은 바 조상님들이 만일 나의 청을 허락하신다면 나는 벽옥과 홀을 바치고 그 명을 받들 겠으며 만일 저의 청을 허락하시지 않으신다면 저는 벽옥과 홀을 거두어 돌아가겠습니다.」

주공이 이미 태사에게 령을 내려 죽간의 축문을 태왕, 왕계와 문왕에게 고하고 무왕 발을 대신하려는 마음에서 즉시 삼왕에 대해 점을 치게 했다. 복인(卜人)이 점괘가 모두 길(吉)하게 나왔다고 하면서 길조(吉兆)의 점사를 보여주었다. 점사는 과연 길했다. 주공이 대단히 기뻐하며 다시 점서 보관한 함을 열고 길조를 확인했다. 무왕이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간 주공이 축하의 말을 올리며 말했다.

「왕께서는 이제 아무런 해를 입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단이 선대 삼왕으로부터 조금 전에 명을 받은바 왕께서는 오로지 주왕실 천하의 장구하고 원대한 계책만을 염두에 두시고 다른 일은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상제께서 천자로 하여금 주도면밀하게 나라의 일을 보살피라는 배려에서 입니다.」

주공이 말을 마치고 그 죽간에 쓴 축문을 금등궤(金藤匱)에 넣어 밀봉하고 관리에게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다음날 무왕이 병에 차도가 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무왕은 결국 죽었다. 당시 무왕의 태자인 성왕(成王)은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였다. 주공은 무왕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천하가 반할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주공은 스스로 보좌에 올라 성왕을 대신하여 섭정으로써 나라를 다스렸다. 관숙(管叔)과 그 밖의 동생들이 나라에 유언비어 퍼뜨렸다.

「주공은 장차 성왕을 해치고 스스로 천자의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다.」

주공이 듣고 태공과 소공에게 말했다.

「내가 의심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대리하여 섭정하는 이유는 천하의 제후들이 주왕실을 배반하지나 않을까 걱정해서입니다. 그래서 내가 섭정의 자리오 오른 일을 우리들의 선대이신 삼왕께 고할 수 없었습니다. 삼왕들께서 오랫동안 천하를 위해 걱정하고 애를 쓴 나머지 이제야 비로소 공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무왕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시고 성왕의 나이는 너무 어려서 다만 주나라의 왕업을 완성하고 싶어서 섭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함께 성왕을 도왔다. 한편 주공은 장자 백금(伯禽)을 자기의 봉지 노(魯)에 부임하여 자기 대신 다스리게 했다. 주공이 임지로 떠나는 백금에게 당부의 말을 했다.

「나는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동생이며 성왕의 숙부이니 나 역시 천하에 천한 신분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한 번 목욕하는데 머리카락을 세 번 움켜쥐고 달려 나갔고 한 번 식사하는데 입에 씹고 있던 음식물을 세 번씩이나 뱉어가며 일어나 어진 선비들을 접대하여 천하의 현인들을 놓칠까 걱정하였다.4) 너는 노나라에 당도하면 나라를 갖게 되었다고 절대 사람들을 대할 때 교만하면 안 된다.」

관숙과 채숙이 무경 녹보와 모의하여 결국은 회이(淮夷)의 군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이 즉시 성왕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일으켜 정벌 길에 나섰다. 주공이 『대고(大誥)』라는 글을 지어 세상에 널리 공포하고 반란군을 진압하고 관숙과 무경을 잡아서 죽이고 채숙은 변경 밖으로 내쫓았다. 은나라 유민들이 사는 위(衛) 땅에 강숙(康叔)을 봉하고 은나라 고토의 백성들의 일부를 송 땅으로 이주시켜 주왕의 서형 미자개(微子開)를 송공에 봉하여 은나라 선조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계속해서 동쪽에 주둔하여 회이들을 정벌하고 2년 만에 귀환했다. 이윽고 제후들이 모두 주왕실에 복종하게 되었다.

하늘이 복을 내려 당숙(唐叔) 우(虞)가 벼이삭을 얻었는데 두 줄기의 벼에서 한 개의 이삭이 팬 것이었다. 성왕이 그것을 당시 동쪽의 회이의 땅에 주둔하고 있던 주공에게 보냈다. 성왕이 다시 당숙에게 명하여 동쪽의 땅을 증정하게 하고 『궤화(饋禾)』라는 글을 짓게 하였다. 주공이 천자가 내린 벼이삭을 받고 천자의 명을 칭송하여 『가화(嘉禾)』라는 글을 지어 바쳤다. 동쪽의 회이를 마침내 평정하자 주공이 돌아와 성왕에게 복명하고 시를 지어 『치효(鴟梟)』5)라는 제목을 붙여 바쳤다. 왕도 역시 감히 주공을 비난하지 못했다.

성왕 7년 2월 을미(乙未) 일에 호경에서 무왕의 묘를 참배하고 다시 도보로 걸어 풍읍(豊邑)으로 가서 문왕의 묘를 참배한 성왕이 태보(太保) 소공에게 명하여 락읍(洛邑)에 가서 그 지형을 살펴보라고 했다. 그해 3월에 주공이 성주(成周)의 락읍(洛邑)에 성을 축조하기 위하여 점을 치게 하니 점괘가 길하게 나오자 도성으로 삼았다.

성왕이 장성하여 능히 정사를 돌볼 수 있게 되자 주공은 즉시 주나라의 정권을 성왕에게 돌려주었다. 성왕은 조정의 정사에 임했다. 주공이 성왕을 대신하여 배의(倍依)6)를 치고 남면하여 주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7년 후에 성왕에게 통치권을 돌려주고 북면하여 신하의 반열에 서서 두려운 모습을 하고 성왕을 섬겼다.

처음에 성왕이 어렸을 때 병이 들자 주공이 곧바로 자신의 손톱을 잘라 황하에 던지고 하늘에 기도를 드리며 맹세했다.

「왕이 어려 아직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늘의 명을 어긴 자는 바로 이 단입니다.」

주공이 명하여 그 말을 죽간에 적어 부고에 간직하도록 했다. 성왕의 병이 이윽고 완쾌 되었다. 병상에서 일어난 국정을 직접 맡게 된 성왕에게 좌우의 측근들이 주공을 참소했다. 주공은 초나라도 도망쳤다. 성왕이 부고를 뒤져 주공의 죽간을 찾아 읽고 눈물을 흘리며 주공을 돌아오게 하였다.

주공이 돌아와서 장성한 성왕이 황음방탕(荒淫放蕩)한 태도로 주나라를 다스릴까 걱정하여 『다사(多士)』와 『무일(毋逸)』이라는 글을 지어 바쳤다. 『무일(毋逸)』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모가 오랜 세월동안 이룩한 공업을 그 자손 된 자가 교만, 사치, 황음, 방탕한 생활을 함으로써 잃어버리고 가업을 망치나니 자식 된 자가 삼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옛날 은왕(殷王) 중종(中宗)7)이 재위에 올라 천명을 공경하고 받들었으며 스스로 법률을 엄격히 지키며 백성들을 다스렸고 조심스러운 마음과 근신하는 자세로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조상들의 사업을 중지하지 않고 안락에 빠지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중종은 75년간 재위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후의 고종(高宗)8)은 오랫동안 성 밖에 나가 노역을 하면서 노역에 종사하는 천민들과 같이 생활을 하다가9) 왕위를 계승하여 재위에 오는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부왕이 죽자 삼년을 말을 하지 않고 살았다.10) 그리고 말문을 열기 시작하자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고종이 감히 안락에 빠지지 않고 은나라를 안정시키고 천민이나 제후들이나 모두에게 원한을 사지 않고 다스렸기 때문에 55년 동안 재위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조갑(祖甲)11)의 대에 이르자 그는 자기가 장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왕 무을(武乙)이 형 대신 자기를 후계자로 세우는 일은 의롭지 않다고 생각하여 성밖으로 오랫동안 도망쳐 살았다. 그래서 무을은 백성들의 생각을 깊은 곳 속속들이 알게 되어 그가 돌아와 재위에 앉아 은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을 때는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며 홀아비, 과부 및 고아들을 업신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왕의 자리에 33년 동안을 앉아 있을 수가 있었다.」

다시 『다사(多士)』라는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나라는 탕임금에서 제을(帝乙)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들은 제사를 받들고 덕을 베풀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임금들이 행하는 바가 모두 하늘의 뜻에 부합되었다. 근자에 이르러 은나라의 후사가 주왕에게 전해지자 그는 황음에 빠지고 안락에만 젖게 되어 하늘의 뜻과 백성들의 마음을 전혀 살피지 않고 제 멋대로 정치를 하자 백성들은 모두 그가 죽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선왕이신 문왕께서는 매일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가 되었어도 정사를 생각하시느라 식사를 하실 틈이 없으셨다. 이로써 문왕께서는 왕의 자리에 50년을 앉아 계실 수 있었다.」

주공은 위의 두 글로써 성왕에게 경계를 주려고 하였다.

성왕이 풍읍에 도성을 짓고 머물자 천하가 안정이 되었으나 단지 주나라의 관직과 제도는 여전히 정비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주공이 『주관(周官)』이라는 책을 써서 백관의 직위와 직책을 정했다. 다시 『입정(入政)』이라는 책을 지어 백성들의 이로움을 꾀하고자 했다. 이에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주공이 풍읍에 머물러 살다가 병이 들었다. 이윽고 임종에 이르러 말했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나를 성주(成周)에 장사 지내라! 이것은 내가 결코 몸은 비록 죽더라도 왕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이다!」

주공이 죽고 난 다음 성왕도 역시 몸을 낮추어 겸양하는 마음으로 주공을 필읍(畢邑)에 장사지내 문왕의 묘와 나란히 있게 하였다. 이것은 성왕이 감히 주공을 신하로써 대할 수 없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공이 죽고 가을이 되어 추수도 거두어들이기 전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벼락이 치면서 벼들이 모두 쓰러지고 큰 나무들이 밑동까지 뽑혔다. 주나라 백성들은 크게 놀랐다. 성왕과 대부들이 조복으로 차려입고 금등궤를 열고 주공이 무왕을 대신해서 죽기를 원했다는 책서(策書)를 읽었다. 태공, 소공, 성왕이 사관과 관련된 관리들을 불러서 물었다. 사관과 관리들이 대답했다.

「그 일은 확실한 있었던 사실이었습니다. 단지 옛날에 주공께서 우리들에게 명하시어 절대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성왕이 책문을 손으로 집어들며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원래 내가 점을 쳐서 길흉을 알아보려 했으나 지금 하늘의 뜻을 알았음으로 점을 칠 필요가 없겠다! 옛날 왕실을 위해 애쓰신 주공의 진심을 내가 나이가 어려 미처 알지 못했다. 지금 하늘이 위엄으로써 주공의 어진 덕을 밝히시니 내가 그 뜻을 받들어 마땅히 제단을 쌓아 주공의 신위에 제사를 올리고 또한 천자의 예에 따라야 지내려 한다.」

그래서 선왕이 천자에게 행하는 예에 따라 교외에 제단을 쌓고 주공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러자 과연 천하에 비가 내리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넘어진 벼들이 모두 일어나 꼿꼿이 서게 되었다. 태공과 소공이 국인들에게 명하여 넘어진 큰 나무들을 안아 일으켜 세우고 밑동에 흙을 덮어 북돋게 하였다. 그 해에 천하는 대풍이 들었다. 그래서 성왕이 특별히 노나라가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는 천자만이 행할 수 있는 교천제(郊天祭)를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하고 묘제(廟祭)를 행할 때는 문왕에게 드리는 예를 따르도록 했다. 이후로 노나라는 천자가 행하는 예악에 따라 종묘에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며 이는 성왕이 주공의 덕행에 대해 포상을 행했기 때문이었다.

주공이 죽었을 때는 장자 백금이 일찍이 주공의 봉국인 노 땅에 부임하여 노공(魯公)이라 불리고 있었다. 노공 백금이 노 땅에 수봉되어 다스리다가 3년만에 돌아와 자기가 베푼 시정의 정황을 보고하자 주공이 듣고 말했다.

「어찌 그리 늦었는가?」

백금이 말했다.

「그들의 풍속을 바꾸고 그들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부모가 죽어 3년 상을 치루게 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 이렇듯 늦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태공도 역시 제(齊)에 봉해져 임지에 부임한 다음 5개 월이 지나 돌아와 주공에게 보고하였다. 주공이 듣고 말했다.

「어찌하여 이렇듯 빨리 그들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까?」

태공이 말했다.

「나는 그들의 군신 간의 예절을 간결하게 하고 또한 그들의 풍속을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후에 백금이 노나라 정사에 대한 보고를 지연시키자 곧바로 한탄하며 말했다.

「오호라! 노나라의 후손들은 시간이 지나면 북면하여 제나라를 섬기게 되리라! 무릇 정치란 간결하거나 용이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가까이 따르지 않는 법이며 쉽고 간결하면 백성들은 필시 귀의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백금이 즉위하고 얼마 있지 않아 관숙과 채숙이 반란을 일으켰다. 회이와 서융(徐戎)도 그들을 따라 반기를 들고 호응하였다. 그래서 백금이 군사를 일으켜 출정하여 힐(肹) 땅에서 그들을 물리치고 『힐서(肹誓)』를 지었다. 힐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희들은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반드시 좋은 상태로 간직하라! 외양간과 마구간을 부수지 마라. 마소와 남녀 노예가 달아나더라도 대열에서 벗어나 자기 멋대로 잡으러 가지 말고 공손한 태도로 그것들을 잡아 주인들에게 돌려주어라. 결코 약탈하거나 침범하여 소란을 피우지 말고, 또한 집안으로 들어가 훔치지 말라! 삼교삼수(三郊三隧)12)에 사는 노나라 사람들은 모두 마초와 건량 및 정간(楨幹)13)을 준비하여 조달하라! 내가 갑술(甲戌) 일에 보루를 쌓고 서융을 정벌하러 떠나는데 그 기한 안에 당도하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극형에 처하리라!」

이와 같이 『힐서(肹誓)』를 써서 공포한 다음 군사를 이끌고 나가 서융을 평정하자 노나라는 안정이 되었다.

노공 백금이 죽고 그 아들 고공(考公) 추(酋)가 뒤를 이었다. 고공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그 동생 희(熙)가 노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양공(煬公)이다. 양공이 모궐문(茅闕門)14)을 새로이 세웠다.

양공이 재위 6년 만에 죽었다. 그 아들 유공(幽公) 재(宰)가 섰다. 유공 14년에 그의 동생 비(沸)가 유공을 죽이고 스스로 노후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위공(魏公)이다. 위공이 재위 50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려공(厲公) 탁(擢)이 뒤를 이었다. 려공이 재위 37년 만에 죽자 노나라 국인들이 그 동생 구(具)를 추대하여 노후로 삼았다. 이가 헌공(獻公)이다. 헌공 재위 32년 만에 죽고 그 아들 진공(眞公) 비(濞)가 섰다.

진공 14년 기원전 841년 주려왕(周厲王)이 무도하여 국인들에게 쫓겨 체(彘) 땅으로 도망가서 주나라에서는 주공과 소공이 집정하여 왕 대신나라를 다스렸다. 이를 공화(共和)라 했다. 진공 29년 즉 기원전 827년 주선왕이 주려왕의 뒤를 이어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진공이 재위 30년 만인 기원전 826년 죽고 그의 동생 오(敖)가 뒤를 이었다. 이가 무공(武公)이다.

무공이 9년 기원전 817년 무공이 그의 장자 괄(括)과 어린 아들 희(戱)를 데리고 주나라에 들어가 주선왕에게 조현을 드렸다. 선왕이 어린 희를 총애하여 노나라의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주나라의 번중산보(樊仲山父)가 선왕에게 간했다.

「장자를 폐하고 어린 아들을 세우는 행위는 하늘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며, 도리를 따르지 않게 되면 장차 왕명을 어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필시 자기 자신은 물론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을 내리실 때는 하늘의 도리를 따라야 하고 영이 내렸으나 행해지지 않는다면 정령이 서지 않게 되는 법입니다. 또한 하늘의 도리를 어겨가며 행하게 되면 백성들이 장차 그 임금을 버리게 되는 법입니다. 무릇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모셔야 하며 나이가 어린 사람은 나이를 많은 사람을 받들어야만 하늘의 도리를 따른다는 순(順)을 행하게 됩니다. 오늘 천자께서 제후에게 명하여 장자를 제치고 어린 아들을 세우라고 내리신 명은 바로 백성들에게 반역의 정신을 가르치는 행위입니다. 만약 천자의 말을 쫓아 역(逆)을 행하는 노나라의 행위를 제후들이 모두 본받는다면 왕명은 장차 막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순종하지 않은 제후들을 정벌하여 죽여야 하는데 이것은 왕명을 따랐음에도 주살 되는 경우입니다. 왕명을 받들지 않는 제후들을 죽이게 되면 나라의 손실이 크게 되고, 그렇다고 죽이지 않는다면 손실은 더욱 크게 나라에 미치게 됩니다. 왕께서는 굽어살피소서!」

선왕이 듣지 않고 결국은 희를 노나라 태자로 삼게 하였다. 그해 여름에 무공이 죽자 희가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의공(懿公)이다.

의공 9년 기원전 807년 노나라 국인들이 힘을 합한 백어(伯御)가 의공을 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노후의 자리에 올랐다. 백어는 태자였다가 주선왕에 의해 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난 의공의 형 괄(括)의 아들이었다. 백어가 노후의 자리에 앉은 지 11년째 되는 해에 주선왕이 백어의 죄를 묻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를 정벌하여 백어를 붙잡아 죽이고 노나라 공자들을 불러 한 곳에 모이게 한 후에 천자의 명을 받아 여러 제후들을 교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번목중(樊穆仲)이 말했다.

「의공(懿公)의 동생 칭(稱)은 윗 사람에게 공손하며 신을 섬기는데 밝습니다. 또한 노인들을 잘 받들며 부세를 매기고 형벌을 시행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조상들이 남긴 유훈을 물어보고 역사적인 사실들을 적어 놓은 전적을 살폈기 때문에 추호도 선왕이 남긴 유훈을 범하지 않았고 또한 옛날의 전례에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선왕이 말했다.

「그와 같이 한다면 능히 백성들을 훈도하여 잘 다스릴 수 있겠다!」

그래서 선왕이 노나라의 이궁(夷宮)에서 칭을 노후로 임명했다. 이가 효공(孝公)이다. 이후로 제후들이 왕명에 반하여 빈번히 말을 듣지 않았다.

효공 25년 기원전 771년 제후들이 주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견융(犬戎)이 제후들을 도와 주나라 왕성을 공격하여 유왕(幽王)을 죽였다. 섬진(陝秦)이 군사를 동원하여 평왕이 낙읍(洛邑)으로 동천하는데 호송하여 공을 세워 제후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효공이 재위 27년 만인 기원전 769년에 죽고 그의 아들 불황(弗湟)이 뒤를 이었다. 이가 혜공(惠公)이다.

혜공 30년 기원전 739년 당진(唐晉)의 국인들이 그 군주인 소후(昭侯)를 죽였다.15)

혜공 45년 기원전 724년 당진의 국인들이 다시 그들의 군주인 효후(孝侯)를 살해하였다.16)

혜공이 재위 46년 만인 기원전 723년에 죽고 그의 서장자 식(息)이 혜공의 어린 적자를 대신하여 정무를 대리하고 국권을 행사하였다. 이가 은공(隱公)이다. 원래 혜공의 정비에게서는 자식이 없었고 천비인 성자(聲子)에게서 식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식이 장성하자 혜공이 송녀를 데려와 그의 비로 삼으려 했으나 혜공이 보고 그녀의 미색에 혹하여 빼앗아 자기의 비로 삼았다17). 송녀가 아들 윤(允)을 낳자 혜공이 그녀를 정비로 삼고 윤을 태자로 세웠다. 이윽고 혜공이 죽자 태자 윤이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노나라 국인들이 상의하여 식으로 하여금 섭정을 하게 하였으나 은공이 노후의 자리에 올랐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은공 5년 기원전 718년 당(棠)18) 땅으로 나아가 어부들이 고기를 잡는 모습을 구경했다.

은공 8년 기원전 715년 정나라 소유의 태산 근처에 있는 팽전(祊田)과 노나라 소유의 정나라 부근에 있었던 허전(許田)을 교환했다19). 군자들이 이일을 두고 두 나라를 비난했다.

은공 11년 기원전 712년 겨울, 공자휘(公子揮)가 은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며 아첨하려고 하였다.

「백성들이 옹립하였기 때문에 주군은 노나라의 군주자리에 오르실 수 있었습니다. 청컨대 제가 주군을 위해 공자윤을 죽이겠으니 저를 노국의 재상으로 임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은공이 듣고 말했다.

「선군의 명에 따라 내가 어린 윤을 위하여 대신 섭정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 윤이 이미 장성하여 능히 나라의 정사를 맡아 볼 수 있음으로 나는 그에게 정권을 물려준 다음 토구(菟裘)에 마련한 집으로 은퇴하여 노년을 그 곳에서 지내려고 하고 있다.」

공자윤이 자기가 한 말을 전해 듣고 후에 주살을 당하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공자휘가 오히려 윤을 찾아가 은공을 모함하며 말했다.

「은공이 노후의 자리를 탐내어 그대를 죽이려 하고 있다. 그대도 마땅히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청컨대 그대를 위해 내가 주군을 죽이겠다.」

공자윤이 허락했다. 그해 11월 은공이 종무(鍾巫)20)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두포(杜圃)에 나가 재계하고 저녁때가 되자 위(蔿) 씨의 집에서 묶었다. 공자휘가 사람을 시켜 은공을 위씨의 집에서 죽이고 공자윤을 노후(魯侯)로 세웠다. 이가 환공(桓公)이다.

환공 원년 기원전 711년 정나라가 벽옥을 추가로 보내와 천자가 하사한 허전을 바꾸어 준 일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환공 2년 기원전 710년 송나라가 정(鼎)을 뇌물로 보내오자21) 노후가 받아들여 태묘에 들여놨다.

군자들이 이를 비난했다.

환공 3년 기원전 709년 공자휘를 시켜 제나라에서 환공의 부인을 모셔오도록 했다.

환공 6년 기원전 706년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태어난 날이 환공과 같아 이름을 동(同)이라고 했다. 동이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환공 16년 기원전 696년 제후들과 조(曹)나라 땅에서 회맹하고 정나라를 정벌하여 정려공(鄭厲公)의 환국시켜 정백의 자리에 앉히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22)

환공 18년 기원전 694년 봄 환공이 나라 밖으로 출행을 나가 부인과 동행하여 제나라를 방문하려고 했다. 대부 신수(申繻)가 간하여 이를 중지하라고 간했으나 환공은 듣지 않고 제나라를 방문했다. 제양공(齊襄公)과 부인이 사통한 사실을 환공이 알고 노하여 질책하였다. 부인은 자기가 환공으로부터 질책 받은 일을 제양공에게 고했다. 그해 여름 사월 병자(丙子) 일에 제양공이 잔치를 열고 노환공을 초대했다. 노환공이 술에 취하자 제양공이 공자 팽생(彭生)에게 명하여 부축하게 했다. 다시 팽생에게 명하여 환공의 늑골을 부러뜨려 수레 안에서 죽이게 하였다. 노나라 국인들이 제후들에게 국서를 보내와 자기들의 뜻을 전했다.

「우리들의 군주가 제후 전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라 안에서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귀국에 가서 양국의 친목을 도모하고 수호를 맺기 위한 예를 행하려고 하셨습니다. 예는 행하였으나 그 몸은 돌아오시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팽생을 벌주어 제후들 사이에 퍼져있는 추문을 없애주기 바랍니다.」

제후(齊侯)가 팽생을 잡아서 죽였다. 태자 동을 노후로 세웠다. 이가 장공(庄公)이다. 장공의 모부인은 제나라에 계속 머물러 감히 노나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장공 5년 기원전 689년, 겨울 제후가 제후들과 연합하여 위(衛)나라를 정벌하고 위혜공(衛惠公)을 복위시켰다.23)

장공 8년 기원전 686년, 제나라의 공자규(公子糾)가 망명해 왔다.

장공 9년기원전 688년, 노나라가 자규를 귀국시켜 반란군에 의해 피살된 제양공의 뒤를 잇게 하려고 했으나 환공이 선수를 쳐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환공이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노나라가 위급함을 느껴 자규를 살해하였다. 관중과 같이 자규를 따라왔던 소홀(召忽)은 자규가 살해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후가 노나라에 관중을 산채로 잡아서 제나라에 압송하라고 통고했다. 노나라 대부 시백(施伯)이 장공에게 말했다.

「제나라가 관중을 얻기 위해 죽이지 말라고 한 것은 장차 그를 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제나라가 관중을 등용한다면 그것은 곧 노나라의 우환 거리입니다. 차라리 관중을 죽여서 그 시체를 보내십시오.」

장공이 시백의 말을 듣지 않고 관중을 함거에 실어 제나라로 보냈다. 제후가 관중을 제나라의 재상으로 삼았다.

장공 13년 기원전 681년 노장공과 조말(曺沫)이 제환공과 가(柯)24) 땅에서 만났다. 조말이 칼로 제환공을 위협하여 제나라에게 빼앗긴 옛 땅을 찾고 이어서 회맹을 하게 한 다음 환공을 풀어주었다. 제환공이 풀려나 노나라에게 돌려주기로 약속한 땅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관중이 간하여 결국은 노나라에 돌려주었다.

장공 15년 기원전 679년, 제환공이 처음으로 패자를 칭했다.

장공 23년 기원전 671년, 장공이 제나라에 들려 제사 지내는 모습을 구경했다(관사-觀社)25)

장공 32년 기원전 662년, 연초에 장공이 대(臺)를 축조하다가 당씨(棠氏)의 집에 들렸다. 그 곳에서 보게 된 당씨의 큰딸 맹임(孟任)을 매우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부인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자기의 팔을 찔러 흐르는 피로 장공으로 하여금 맹세를 시킨 맹임이 장공과 잠자리를 같이했다. 맹임이 아들을 낳아 반(般)이라고 했다. 반이 장성하여 양씨(梁氏)의 딸을 사랑하게 되어 자주 양씨의 집을 방문하여 그녀를 만났다. 그때 궁궐에서 말을 기르는 직에 종사하던 어인(圉人) 락(犖)이란 자가 담장 밖에서 집안에 있던 양녀를 보고 희롱하는 모습을 반이 보고 노하여 락을 잡아드려 채찍으로 때린 후에 쫓아냈다. 장공이 그 일을 전해 듣고 반에게 말했다.

「락이란 놈은 힘이 장사라 마땅히 잡아서 죽였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채찍으로 때리기만 하고 놓아주었느냐?」

반이 듣고 사람을 시켜 락을 잡아서 죽이려고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장공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장공에게는 형제가 셋이 있었는데 첫째가 경보(慶父)이고 둘째는 숙아(叔牙)이며 막내는 계우(季友)라고 했다. 장공이 부인이 된 제나라의 애강(哀姜)에게는 소생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애강의 동생 숙강(叔姜)을 제나라에서 불러와 장공과의 사이에 아들을 낳아 이름을 개(開)라고 했다. 장공은 정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맹임을 총애하여 그녀의 소생인 반을 태자로 세우려고 하였다. 장공의 병이 악화되자 그의 동생 숙아를 불러 장차 누구에게 노나라 군주의 자리를 물려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숙아가 대답했다.

「부친이 죽게 되면 그 아들이 잇게 되고 형이 죽게 되면 그 동생이 뒤를 잇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 노나라의 법도입니다. 지금 동생인 경보가 있으니 그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면 될 것입니다. 형님께서는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장공은 숙아가 자기의 후계로 경보를 세우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속셈을 알고 매우 싫어하여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계우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계우가 장공에게 말했다.

「는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반을 후계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공이 말했다.

「조금 전에 숙아가 경보를 세워야 한다고 했는데 이 일을 해결할 무슨 방법이 있는가?」

장공의 명을 받은 계우가 물러나와 장공의 명이라고 하면서 숙아를 침무씨(鍼巫氏)의 집에 대령하여 장공의 명을 받으라고 전했다. 이어서 침계(鍼季)를 시켜 숙아를 겁주어 짐독(鴆毒)을 마시라고 하면서 말했다.

「이것을 마시고 죽으면 그대의 자식들에게 그대의 재산과 작위를 모두 물려주게 하여 제사를 받게 해주겠다. 그러나 만약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대의 후사를 끊어 버리겠다.」

숙아가 할 수 없이 짐독을 마시고 죽었다. 노후가 그의 아들을 세워 숙손씨(叔孫氏)의 후사를 잇게 하였다. 그해 8월 계해(癸亥) 일에 장공이 죽었다. 계우가 장공의 명을 따라 반을 받들어 노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반이 상중에 그의 외가인 당씨의 집에 머물렀다.

그 전에 경보가 장공의 부인인 애강과 정을 통하고 애강의 동생으로 숙강의 소생인 개를 노후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공이 죽자 계우가 반을 세우자 그해 10월 기미(己未) 일에 경보가 어인 락을 시켜 당씨의 집에 묶고 있던 반을 죽였다. 계우는 란을 피해 진(陳)나라로 도망쳤다. 경보가 공자 개(開)를 노후의 자리에 앉혔다. 이가 민공이다.

민공 2년 기원전 660년 경보와 애강이 서로 정을 통하기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 애강은 경보와 상의하여 민공을 죽이고 그를 노군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경보가 복기(卜齮)를 시켜 무위(武闈)라는 곳에서 민공을 습격하여 죽였다. 계우가 듣고 진(陳)나라에서 민공의 동생 공자 신(申)과 함께 주(邾)나라로 가서 노나라의 국인들과 연락하여 공자신을 노후로 세우라고 청했다. 노나라 국인들이 들고 일어나 경보를 죽이려고 했다. 경보가 두려워하여 거(莒)나라로 도망쳤다. 그래서 계우가 공자신을 데리고 입국하여 노후로 세웠다. 이가 희공(釐公)이다. 희공 역시 장공의 어린 아들이다. 애강이 두려워하여 주(邾)나라로 빠져나갔다. 계우가 거나라에 뇌물을 주어 경보를 잡아 송환하라고 했다. 경보가 돌아오면 죽이기 위해서였다. 경보가 계우에게 사람을 보내 다른 곳으로 가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 청했으나 계우가 들어주지 않았다. 계우가 대부 해사(奚斯)를 경보에게 보내 자신의 뜻을 전하게 했다. 곡을 하며 자신을 향해 오고 있는 해사의 모습을 본 경보는 자기의 청이 거절되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애강과 경보가 작당하여 란을 일으킴으로써 노나라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생각한 제환공이 주나라에 도망쳐 살고 있던 애강을 불러서 죽이고 그 시체를 노나라에 보내어 사람들에게 보였다. 노희공이 환공에게 청하여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계우의 모친은 진녀(陳女)다. 그래서 경보가 반(般)을 죽일 때 그를 피하여 진(陳)나라로 망명했다. 진나라가 군사를 동원하여 계우와 공자신을 호송했다. 계우가 옛날에 태어날 때에 그 부친 노환공이 사람을 시켜 점을 쳐보게 하였다. 점을 친 사람이 노환공에게 말했다.

「사내아이입니다. 그 이름은 우(友)이며 양사지간(兩社之間)26)이 되어 공실을 보필할 운세입니다. 우가 죽게 되면 노나라의 국세는 쇠락할 것입니다. 」

이어서 계우가 태어났는데 점사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손바닥에 ‘우(友)’라는 글씨가 써있었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우라고 짓고 호를 성계(成季)라고 했다. 후손들은 계(季)를 성으로 삼았다. 경보의 후손들은 중손씨(仲孫氏), 숙아의 후손들은 숙손씨(叔孫氏)가 되어 노나라의 삼환(三桓)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희공(釐公) 원년 기원전 659년, 문양(汶陽)과 비읍(鄪邑)에 계우를 봉했다. 이어서 계우가 노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희공 9년 기원전 651년, 당진의 리극(里克)이 그의 군주 해제(奚齊)와 탁자(卓子)를 죽였다. 제환공)이 희공과 함께 당진의 내란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출동시켜 원정을 나갔다. 고량(高粱)27)에 이르러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회군했다. 그 사이에 당진에서는 혜공(惠公)이 즉위했다.

희공 17년 기원전 643년, 제환공이 죽었다.

희공 24년 기원전 636년, 공자 중이(重耳)가 환국하여 당진의 군주가 되었다. 이가 진문공(晉文公)이다.

희공 33년 기원전 627년, 희공이 죽고 그 아들 흥(興)이 섰다. 이가 문공(文公)이다.

문공 원년 기원전 626년, 초나라의 태자 상신(商臣)이 그 부왕인 성왕(成王)을 시해하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문공 3년 기원전 624년, 문공이 당진에 래조하여 진양공(晉襄公)에게 조현을 올렸다.

문공 11년 기원전 616년, 10월 갑오(甲午) 일에 노나라가 적(翟)의 군사들을 함(咸)28) 땅에서 크게 물리치고 차우장군 부보종생(富父終甥)은 장적(長翟)이라고 불리우고 있던 적족의 장수 교여(喬如)29)를 사로잡아 과(戈)로 그의 목을 베어 죽였다. 교여의 수급을 가져가 자구문(子駒門)30) 밖에다 묻었다. 그때 마침 노나라의 장수로 출전한 숙손득신(叔孫得臣)이 선백(宣伯)이라는 아들을 낳자 그 아이의 이름을 교여(喬如)라고 지었다.

옛날 송무공(宋武公) 때 적족(翟族)의 한 부족인 수만(瞍瞞)이 송나라를 침입하였다. 송무공이 사도(司徒) 황보(皇父)를 시켜 막게 하였다. 황보가 장구(長丘)의 땅에서 수만의 군사들을 패주시키고 그들의 장수 연사(緣斯)를 사로잡았다. 또한 당진이 로국(路國)을 멸할 때 교여의 동생 분여(棼如)를 잡아서 죽였다. 후에 제혜공(齊惠公) 2년 즉 기원전 607년, 수만의 군사들이 제나라를 침입하자 제나라의 왕자성보(王子城父)가 교여(喬如)의 또 다른 동생 영여(榮如)를 잡아서 죽이고 그 수급을 임치성 북문에 묻었다. 다시 수만이 위(衛)나라를 침입했으나 영여의 동생 간여(簡如)기 포로 잡혀 살해되었다. 수만은 이렇게 해서 멸망했다.

문공 15년 기원전 612년, 계문자(季文子)31)가 당진(唐晉)에 사절로 갔다.

문공 18년 기원전 609년, 2월 문공이 죽었다. 문공은 살아서 두 사람의 정비를 두었는데 첫 번째 비는 제녀(齊女)로 역시 애강이라고 불리웠다. 애강과의 사이에 자오(子惡)와 자시(子視)를 낳았고 두 번째 비는 경영(敬嬴)인데 문공의 총애를 받아 자퇴(子俀)를 낳았다. 퇴(俀)가 아무도 몰래 양중(襄仲)이라고 불리는 공자수(公子遂)32)와 사통했다. 양중이 퇴를 노나라의 군주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숙중(叔仲) 혜백(惠伯)33)이 반대하였다. 양중이 제나라에 사절로 가서 제혜공(齊惠公)에게 자퇴(子俀)를 노후로 앉혀주면 제나라를 받들겠다고 맹세하였다. 제후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혜공이 노나라와 친교를 맺기 위해 양중의 제의를 허락했다. 그해 겨울 10월, 양중이 자오와 자시를 죽이고 퇴를 노후의 자리에 앉혔다. 이가 선공(宣公)이다. 애강이 제나라로 돌아가 성안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곡을 하며 외쳤다.

「하늘이여! 양중이 무도하여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웠습니다.」

길거리의 지나가던 사람들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노나라 국인들이 그녀를 애강이라고 불렀다. 노나라는 이때부터 공실의 힘이 쇠약해지고 삼환씨들의 세력이 강성하게 되었다.

선공 퇴 12년 기원전 597년, 초장왕(楚庄王)의 치세로 초나라의 세력이 강대해졌다. 초나라가 군사를 동원하여 정성을 포위했다. 정백이 항복하자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선공 18년 기원전 591년, 선공이 죽고 그의 아들 흑굉(黑肱)이 뒤를 이었다. 이가 성공(成公)이다. 계문자가 말했다.

「우리들로 하여금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우게 하여 제후들의 지지를 잃어버리게 한 자는 양중이다.」

양중의 도움으로 노후의 자리에 앉은 선공은 공손귀보(公孫歸父)를 총애하였다. 이어서 선공이 당진의 힘을 빌려 삼환씨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선공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계문자가 그 일에 대해 알고 원한을 품었다. 공손귀보가 두려워하여 제나라로 도망쳤다.

성공 2년 기원전 589년, 봄에 제나라가 노나라의 륭(隆)34)을 공격하여 빼앗아 갔다. 같은 해 여름 선공과 당진의 극극(郤克)이 제경공(齊頃公)의 군사를 안(鞍)에서 무찌르자 제나라가 빼앗아간 땅을 돌려주었다.

성공 4년 기원전 587년, 성공이 당진에 갔으나 진경공(晉景公)이 노후를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 성공이 돌아와 당진과의 관계를 끊고 초나라를 섬기려고 하였으나 신하 중의 한 사람이 이를 간하여 중지하였다.

성공 10년 기원전 581년 성공이 다시 당진을 방문하였다. 성공이 당진에 체재하던 중에 진경공(晉景公)이 죽어 계속 머무르면서 그의 장례에 참석하였다. 노나라의 국인들이 이를 비난했다.

성공 15년 기원전 576년 처음으로 오왕 수몽(壽夢)과 종리(鍾離)에서 회맹 하였다.

성공 16년 기원전 575년 선백(宣伯)35)이 당진에 가서 계문자(季文子)를 죽여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당진의 대신들은 계문자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성공 18년 기원전 573년, 성공이 죽고 그 아들 오(午)가 뒤를 이었다. 이가 양공(襄公)이다. 그러나 그때 양공의 나이는 불과 세 살에 불과했다.

양공 원년 기원전 572년, 당진에서는 도공(悼公)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전년도 겨울에 당진의 란서(欒西)가 그의 군주인 려공(厲公)을 시해하고 주나라 왕성에 가서 살고 있던 도공을 모셔와 군주로 세운 것이다.

양공 4년 기원전 569년, 양공이 당진에 가서 도공에게 조현을 올렸다.

양공 5년 기원전 568년, 계문자가 죽었다. 그의 집에 사는 여인들 중에는 아무도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또한 마구간의 말먹이는 곡식이 하나도 없고 오로지 건초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집안의 창고에는 금이나 옥 같은 보화도 없어 세 임금을 모시던 재상의 집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노나라의 국인들이 칭송하며 말했다.

「계문자야 말로 청렴한 충신이었다!」

양공 9년 기원전 564년 당진(唐晉)과 함께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당진의 도공(悼公)이 당시 12세가 된 양공을 위해 위(衛)나라 땅에서 성년식을 행하고 관을 씌어주었다. 계문자의 아들 계무자(季武子)36)가 수행하여 성년의식을 주관했다.

양공 11년 기원전 562년, 삼환씨가 노나라의 군사를 삼군으로 나누어 각기 일군씩 맡았다.

양공 12년 기원전 561년, 당진의 도공이 죽고 그의 아들 평공(平公)이 섰다.

양공 21년 기원전 552년, 양공이 당진으로 가서 평공에게 조현을 드렸다.

양공 22년 기원전 551년, 공자가 태어났다.

양공 25년 기원전 548년, 제나라의 대부 최저가 그의 군주인 장공을 시해하고 그의 동생을 세웠다. 이가 제경공(齊景公)이다.

양공 29년 기원전 544년 오나라의 연릉(延陵)의 계자(季子)37)가 노나라에 사절로 와서 주나라의 음악을 청해 듣고 그 음을 이해하여 노나라의 국인들은 계자를 존경하였다.

양공 31년 기원전 542년, 6월 양공이 죽고 그해 9월 태자가 뒤를 따라 죽었다. 노나라의 국인들이 제나라에 가서 살고 있던 그의 아들 주(裯)를 데려와 노후의 자리에 앉혔다. 이가 소공(昭公)이다.

당시 소공의 나이는 19세였는데 나이에 비해 치기(稚氣)가 있어 그 행동이 경박했다. 그래서 목숙(穆叔)38)이 소공을 노후로 세우려는 당시의 실권자 계무자(季武子)에게 말했다.

「태자가 죽어 동모제가 있으면 그를 세워야 하고 또한 장자를 세우지 못하면 어진 사람이라도 택하여 세워야 하는 법입니다. 또한 현능한 정도가 서로 비슷하면 점을 쳐서 택하셔야 합니다. 지금 주(裯)는 적자가 아니고 또한 상례를 치루는데 슬퍼하는 기색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얼굴에 희색만을 띄우고 있습니다. 만일 그를 세운다면 필시 계씨 문중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계무자가 목숙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은 주를 노후의 자리에 앉혔다. 소공이 장례에 임하며 상복을 가지고 장난을 쳐서 찢어지는 바람에 세 번이나 바꾸어 입어야 했다. 노나라의 국인들이 듣고 말했다.

「종말이 좋지 않겠구나!」

소공 3년 기원전 539년, 당진에 조배(朝拜)를 하러 노나라를 떠나 하수에 이르렀다가 진평공이 사의를 표하며 만류하자 중도에서 돌아왔다. 노나라의 국인들이 이일을 부끄럽게 여겼다. 소공 4년 기원전 538년 초영왕(楚靈王)이 신성(申城)에서 제후들을 불러 회맹하였으나 소공은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다.

소공 7년 기원전 535년, 계무자가 죽고 그의 아들 흘(紇)이 뒤를 이었다. 이가 계도자(季悼子)다.

소공 8년 기원전 534년, 초영왕이 장화대를 새로 축조하고 그 낙성식을 위해 소공을 초빙했다. 소공이 초나라에 가서 축하하였다. 초영왕이 소공에게 참석해 준 것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보기를 주었다가 후에 아까워하였다. 그래서 거짓으로 소공을 얼려 빼앗았다.

소공 12년 기원전 530년, 소공이 당진에 조배를 하러 길을 떠나 하수에 이르자 당진의 평공이 다시 사람을 보내와 감사의 뜻을 전하고 돌아가게 하였다.

소공 13년 기원전 529년 초나라의 공자 기질(棄疾)이 그 군주인 영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앉았다.

소공 16년 기원전 526년, 다시 당진에 조배를 드리러 입조한 소공을 당진이 붙잡아두고 그때 마침 죽은 당진의 소공(昭公)의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노나라의 국인들이 이를 수치로 여겼다.

소공 20년 기원전 522년, 제경공과 안자(晏子)가 노국의 국경 근처에서 사냥을 하다가 노나라 경내에 들어와 예를 갖추어 노후의 문안을 물었다.

소공 21년 기원전 521년, 소공이 다시 당진에 조배를 드리기 위해 길을 떠나 하수에 당도하자 역시 당진에서 사람을 보내와 감사의 말을 전하여 돌아가게 했다.

소공 25년 기원전 517년, 봄에 구욕조(鴝鵒鳥)39)가 날아와 둥지를 틀었다. 사기(師己)가 그것을 보고 말했다.

「문공과 성공때 동요가 있었습니다. ‘구욕새가 날아와 둥지를 틀면 노후는 건후(乾侯)40)에 살게 되고 구욕새가 날아와 잠자리를 마련하면 노후는 들판에서 잠을 자게 된다네!’」

계씨(季氏)와 후씨(郈氏)가 투계로 내기했다. 계씨들이 자기 닭의 몸통에 철갑을 두르자 후씨들도 닭의 다리에 쇠발톱을 달았다. 계평자(季平子)41)가 노하여 가병들을 동원하여 후씨들의 봉지로 쳐들어갔다. 후소백(郈昭伯)도 역시 노하여 계평자에게 원한을 갖게 되었다. 장소백(臧昭伯)의 동생 회(會)가 장씨 집안을 계손씨들에게 참소하고 계씨들의 집에 숨었다. 장소백이 알고 그 역시 계손씨들을 잡아다가 자기의 집에다 가두었다. 계평자가 노하여 장씨들의 장로들을 잡아와서 가두었다. 그래서 장씨와 후씨가 함께 소공에게 가서 그 일을 고했다. 소공이 그해 9월 무술(戊戌) 일에 계씨들을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나가 계씨들 부중 안으로 들어갔다. 계평자가 대에 올라 소공에게 청했다.

「주군께서 참소하는 말만으로 신의 죄를 살펴보시지도 않고 저를 죽이시려고 하니 저로 하여금 기수(沂水) 부근으로 옮겨 살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소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비(鄪) 땅으로 가서 갇혀 살겠다고 청했다.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전차 오승(五乘)만 내주시면 다른 곳으로 도망쳐 살겠다고 청했다. 소공이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자가(子家)42) 구(駒)가 말했다.

「주군께서는 평자(平子)의 청을 물리치시면 안 됩니다. 계씨들이 노나라의 집정을 맡은 지가 오래되어 그들의 무리가 매우 많습니다. 그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장차 모의를 하고 힘을 합해 공실을 공격할 것입니다..」

후씨가 곁에서 듣고 있다가 말했다.

「반드시 계씨들을 멸해야만 합니다.」

숙손씨의 가신인 려(戾)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

「계씨들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중 어느 것이 우리에게 유리한가?」

사람들이 대답했다.

「계씨들이 없게 되면 숙손씨도 없게 됩니다.」

려가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계씨들을 구해야 되지 않겠는가?」

려가 즉시 가병들을 동원하여 소공이 이끄는 공실의 군사들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맹손씨 집안의 맹의자(孟懿子)43)도 숙손씨가 공실의 군사들과 싸워 승리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역시 후소백을 잡아 죽였다. 후소백은 원래 소공이 맹손씨들을 회유하기 위해 사자로 보낸 것인데 맹의자가 잡아 가두어 두었다가 죽인 것이다. 삼가가 힘을 합하여 소공이 거느린 공실의 군사들을 공격하자 소공은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그달 기해(己亥) 일에 소공은 제나라에 당도했다. 제경공이 반기며 소공을 향해 말했다.

「제가 공을 천사(千社)44)의 백성과 땅을 주어 이곳 제나라에서 살게 해 드리겠소!」

소공을 따라 나선 자가(子家)가 간했다.

「선조이신 주공께서 세우신 공업을 버리고 어찌 제나라의 신하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소공이 제나라의 백성과 땅을 받지 않았다. 자가가 다시 말했다.

「제경공은 신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일찌감치 당진으로 가느니만 못합니다.」

소공이 자가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숙손야(叔孫婼)가 소공을 접견하고 돌아와 계평자에게 가서 노후의 형편을 전했다. 평자가 듣고 머리를 조아리며 어찌할 줄 몰라 했다. 그래서 소공을 모셔오려고 했으나 나중에 맹손과 계손씨들이 후회했음으로 중지하였다.

소공 26년 기원전 516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하여 운(鄆) 땅을 빼앗아 소공에게 주어 그곳에서 살게 하였다. 그해 여름 제경공이 소공을 복위시키기 위해 노나라로부터 뇌물을 받지 말라고 명하였다. 노나라의 대부 신풍(申豊)과 여고(汝賈)가 제나라의 대신 고흘(高齕)과 자장(子將)45)에게 곡식 오천 유(庾)46)를 주기로 약속했다. 자장이 경공에게 말했다.

「노나라의 군신들이 노후를 받들지 않으니 이것은 참으로 괴이한 일입니다. 송원공(宋元公)이 노군의 복위를 청하기 위해 당진에 갔다가 돌아오던 도중에 죽고 노나라의 대부인 숙손소자(叔孫昭子)47)가 그의 군주를 받아드리려 했으나 아무런 연고도 없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아마도 하늘이 노후를 버린 것이 아니라면 하늘에 죄를 얻은 것 같사오니 주군께서는 잠시 기다려보시기 바랍니다.」

제경공이 자장(子將)의 말을 따랐다.

소공 28년 기원전 514년, 소공이 결국은 당진으로 들어가 자기의 복위를 청했다. 계평자는 평소에 당진의 육경들과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뇌물을 바쳐 노소공의 청을 들어주지 말라고 진경공(晉頃公)에게 간하게 했다. 진경공이 육경들의 간함을 듣고 소공을 복위시키려는 생각을 그만 두고 소공을 건후(乾侯)로 보내 그곳에 살게 했다.

소공 29년 기원전 513년 소공이 운(鄆)48) 땅으로 돌아왔다. 제경공이 인편에 보낸 서신에 자신을 스스로 주군이라고 칭했음으로 소공이 보고 부끄럽기도 하고 또한 화가 나기도 해서 운(鄆) 땅을 떠나 다시 건후로 갔다.

소공 31년 기원전 511년, 당진의 군주 자리에 새로 오른 진정공(晉定公)이 소공을 복위시키기 위해 노나라에 사자를 보내 계평자를 불렀다. 평자가 흰 베옷에 맨발로 당도하여 우선 육경들을 찾아와 사죄의 말을 올리며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육경들이 계평자를 위해 진정공에게 말했다.

「우리가 노군을 복위시키려 해도 노나라의 국인들이 따르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래서 진후가 다시 그의 계획을 중지하였다.

소공 32년 기원전 510년, 소공이 건후에서 죽었다. 노나라 국인들이 상의하여 소공의 동생 송(宋)을 노후로 세웠다. 이가 정공(定公)이다.

정공이 노나라의 군주가 되자 조간자(趙簡子)가 사묵(史墨)49)에게 물었다.

「노나라의 계손씨들은 망하겠는가?」

사묵이 대답했다.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우가 노나라에 큰공을 세워 비읍(鄪邑)에 봉해지고 노나라의 상경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계우의 뒤를 이은 계문자, 계무자도 역시 계우가 세운 공을 더욱 크게 하였습니다. 노문공이 죽자 동문수가 적자를 살해하고 서자를 세운 후부터 노나라의 군주들은 정권을 삼환씨들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정권이 계씨들의 수중에 넘어간 이래 벌써 네 명의 군주50)가 섰습니다. 백성들은 노나라에 군주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찌 노나라의 정권을 장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군주들은 그 거복(車服)과 이름을 신중히 하여 함부로 남에게 빌려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정공 5년 기원전 505년, 계평자(季平子)가 죽었다. 계씨들의 가신인 양호(陽虎)가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계환자를 붙잡아 자기의 집에 가두었다. 계환자가 할 수 없이 양호와 맹약을 한 후에야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정공 7년 기원전 503년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략해와 운읍(鄆邑)을 점령했다. 양호가 그곳을 자기의 봉읍으로 삼고 머물면서 정무를 처리했다.

정공 8년 기원전 502년, 양호가 삼환의 적자들을 전부 살해하고 자기와 친한 서자들로 바꾸려고 음모를 꾸몄다. 양호는 수레를 보내 우선 계환자를 모신다고 하면서 데려와 살해하려고 하였다. 계환자가 중도에 알아채고 계책을 써서 탈출했다. 삼환이 힘을 합하여 양호를 공격하였다. 양호는 양관(陽關)51)이라는 곳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농성했다.

정공 9년 기원전 501년 노나라 공실의 군사들과 삼환의 가병들이 힘을 합하여 양호를 토벌하기 위해 양관(陽關)을 공격하였다. 양호가 양관을 버리고 제나라로 도망쳤다. 후에 다시 당진으로 달아나 조간자에게 의탁했다.

정공 10년 기원전 500년 정공과 제경공이 협곡(夾谷)에서 만나 회맹할 때 공자가 정공을 수행하여 의식을 주관하였다. 제후가 노정공을 습격하여 포로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공자가 의례를 주제하기 위해 단상으로 올라가 제나라의 음탕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던 악인(樂人)들을 질책하여 물리쳤다. 공자의 단호한 태도에 제후가 두려워하여 감히 정공을 해치지 못하고 오히려 제나라가 빼앗아 간 노나라의 땅을 사죄의 뜻으로 돌려주었다.

정공 12년 기원전 498년 중유(仲由)52)를 보내어 삼환씨들 봉읍의 성곽을 허물어 그 높이를 줄이고 그들 가병들의 갑옷과 무기들을 몰수했다. 맹손씨들이 그들 봉읍의 성곽을 허물어 높이를 낮추는 일에 반대하자 정공이 군사들을 보내어 토벌하도록 했다. 그러나 공실의 군사들이 맹손씨들의 군사들을 이길 수가 없어 토벌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계환자가 제나라에서 보내 온 미녀 악공(樂工)을 받아 음락에 빠지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났다.

정공 15년 기원전 495년 정공이 죽고 그 아들 장(將)이 뒤를 이었다. 이가 애공(哀公)이다.

애공 5년 기원전 490년, 제경공이 죽었다.

애공 6년 기원전 489년, 제나라 대부 전걸(田乞)이 그 군주인 안유자(晏孺子)를 시해했다.

애공 7년 기원전 488년, 부차(夫差)가 통치하던 오나라가 강성해지자 군사를 내어 제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나와 증(繒) 땅에 진영을 세웠다. 부차가 노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100뢰(牢)53)의 짐승으로 잔치를 벌려 자기를 맞이하라고 했다. 계강자(季康子)가 자공(子貢)을 보내어 오왕 부차와 그의 총신인 태재(太宰) 백비(伯嚭)를 예로써 설득하게 했다. 오왕이 자공을 보고 말했다.

「우리는 몸에 문신을 하고 다니는 남만의 나라라 예를 알지 못한다고 책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요!」

자공이 설득하기를 그만 두었다.

애공 8년 기원전 487년, 오나라가 노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쳐들어와 곡부성 밑에까지 왔다가 노후가 나가 회맹에 응하자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다시 제나라가 경계를 침입하여 세 고을을 빼앗아 갔다.

애공 10년 기원전 485년, 제나라의 남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애공 11년 기원전 484년, 제나라가 쳐들어왔다. 계강자가 염유(冉有)54)를 임용하여 제나라의 군사들을 물리치게 하였다. 염유가 공을 세우자 계강자는 공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겨 위(衛)나라에 가 있던 공자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애공 14년 기원전 481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서주(徐州)에서 그 군주인 간공(簡公)을 시해하였다. 공자가 애공에게 청하여 제나라를 정벌하라고 간청했다. 애공이 듣지 않았다.

애공 15년 기원전 480년, 자(字)가 자복(子腹)인 경백(景伯)을 사절로 하고 자공(子貢)을 부사로 제나라에 보냈다. 제나라가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세 고을을 돌려주었다. 그것은 전상이 그 군주를 시해하고 새로운 군주를 세워 제후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애공 16년 기원전 479년, 공자가 죽었다.

애공 22년 기원전 473년,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나라를 멸하고 오왕 부차를 죽였다.

애공 27년 봄 기원전 468년 계강자가 죽었다. 여름에 애공이 삼환씨들로 인해 걱정을 하다가 제후들과 손을 잡고 그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삼환씨들도 역시 란이 일어날까 근심하였다. 그래서 노나라는 그 군주와 신하들 사이에 서로 의심하는 마음이 생겨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애공이 능판(陵阪)55)에 놀라갔다가 길거리에서 맹무백(孟武伯)56)을 만나 물었다.

「내가 수명대로 살다가 죽겠는가?」

맹무백이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애공이 월나라의 도움을 받아 삼환씨들을 정벌하려고 했다. 애공이 그해 8월에 형지(陘氏)57)에 출행하자 삼환씨가 힘을 합하여 가병들을 동원하여 애공을 공격하였다. 애공이 도망쳐 위(衛)나라로 망명했다. 다시 추(鄒) 땅으로 갔다가 월나라로 들어갔다. 노나라의 국인들이 모두 애공의 환국을 원해 돌아오던 중 형지(陘氏)에서 죽었다. 애공의 아들 영(寧)이 뒤를 이었다. 이가 도공(悼公)이다.

도공(悼公)의 재위 시에는 삼환씨들의 세력이 커져 더욱 기승을 부렸다. 노나라의 군주의 위세는 또한 더욱 세력이 쇠미해져 마치 삼환씨들보다 더 비천하게 되었다.

도공 13년 기원전 454, 당진의 한(韓), 조(趙), 위(魏) 삼가(三家)가 힘을 합하여 지백(智伯)이 이끌고 있던 지씨(智氏) 일족들을 멸하고 그 봉지를 나누어 가졌다.

도공이 재위 37년 만인 기원전 429년에 죽고 그 아들 가(嘉)가 뒤를 이었다. 이가 원공(元公)이다.

원공이 재위 21년 만인 기원전 408년에 죽고 그의 아들 현(顯)이 뒤를 이었다. 이가 목공(穆公)이다.

목공이 재위 33년 만인 기원전 376년에 죽고 그의 아들 분(奮)이 섰다. 이가 공공(共公)이다.

공공이 재위 22년 만인 기원전 353년에 죽고 그의 아들 둔(屯)이 섰다. 이가 강공(康公)이다.

강공이 재위 9년 만인 기원전 344년에 죽고 그의 아들 언(匽)이 뒤를 이었다. 이가 경공(景公)이다.

경공이 재위 29년 만인 기원전 315년에 죽고 그의 아들 숙(叔)이 섰다. 이가 평공(平公)이다. 이때부터 육국의 군주들이 왕호를 칭하기 시작했다.

평공 12년 기원전 303년 진혜왕(秦惠王)이 죽었다.

평공이 재위 20년 만인 기원전 296년에 죽고 그 아들 고(賈)가 뒤를 이었다. 이가 문공(文公)이다.

문공 원년 기원전 295년,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초회왕이 그곳에서 죽었다.

문공이 재위 23년 만인 기원전 273년에 죽고 그의 아들 수(讎)가 섰다. 이가 경공(頃公)이다.

경공 2년 기원전 271년에 진(秦)나라가 초나라의 도성인 영성(郢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초경왕(楚頃王)은 동천하여 진(陳)나라의 구지(舊地)에 나라를 다시 세웠다.

경공 19년 기원전 254년 초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서주(徐州)를 빼앗아 갔다.

경공 24년 기원전 249년 초(楚)나라의 고열왕(考烈王)이 공격해와 노나라를 멸했다. 경공이 도망쳐서 도성 밖의 조그만 성읍으로 들어가 평민으로 살았다. 이로써 노나라의 사직이 끊겼다. 경공은 가읍(柯邑)에서 죽었다. 노나라는 주공으로부터 시작하여 경공에 이르기까지 모두 34세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한다.

공자께서 옛날에 말씀하신 것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노나라의 도덕은 참으로 쇠미(衰微)해져 극에 달했으나 수사(洙泗)58)지간에 살던 사람들의 쟁변(爭辯)과 계교(計較)는 끊이지 않았도다!」

경보(慶父)와 숙아(叔牙) 그리고 민공(湣公) 시절은 어찌 그리 혼란하였던가? 은공(隱公)과 환공(桓公)의 일, 양중(襄仲)이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운 일, 삼가가 북면하는 신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힘을 합하여 소공을 공격한 일, 소공이 도망쳐서 제와 당진 사이를 배회하다가 죽은 일 등은 그들 모두가 읍양(揖讓)의 예절을 따랐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어찌 그리 도의에 어긋난 일만 행하였던가!

-노세가(魯世家) 끝-

1) 목서(牧誓)/ 주무왕이 은의 주왕(紂王)을 토벌하여 목야(牧野)에 집결하여 싸움 전에 군사들에게 내린 전투동원령. 내용에는 은주(殷紂)의 죄상을 열거하고 주나라 군사들의 사기를 고무시키며 싸움에서의 각각의 임무를 기술했다. 목서의 전문은 상서(尙書)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사마천의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도 실려 있다.

2) 소호(少昊)/ 동이(東夷) 출신으로 오제(五帝) 중의 한 사람.

3) 홀(笏)/ 원전에는 규(圭)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무진 옥으로 만든 것으로 천자가 제후나 대부로 봉할 때 내리던 신표(信表)로써 일종의 임명장이라고 할 수 있다.

4) 토포악발(吐哺握發)이라고 한다. 주공이 목욕을 하다가 어진 인재가 찾아왔다면 물기를 닦을 겨를도 없이 달려나와 맞이하기를 하루에 세번씩 했고 식사를 하다가 현인이 찾아왔다고 하면 씹고 있던 음식을 뱉어내고 곧바로 뛰어나가 맞이했다는 고사로써 주공이 어진 사람을 맞이하기를 정성을 다 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 然我一沐三捉發, 一飯三吐哺, 起以待士, 猶恐失天下之賢人)

5) 치효(鴟梟)/시경(詩經) 국풍(國風)의 빈풍(豳風)에 실려 있는 시가로써 주공이 성왕을 위해 섭정을 하자 은나라 유민을 다스리던 무경 녹보를 감시하기 위한 그의 동생 관숙이 주공이 반심을 품고 있다고 유언을 퍼뜨리고 무경 녹보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다. 주공이 직접 진압을 위해 원정을 나가 반란을 진압했으나 성왕이 여전히 의심하는 마음을 풀지 않아 주공이 이 시를 지어 자기의 심경을 노래한 것이다.

鴟梟鴟梟 올빼미야, 올빼미야!/ 旣取我子 내 아들 잡아먹었으니/ 無毁我室 내 집만은 헐지 말아다오/ 恩斯勤斯 정성으로 보살폈는데/鬻子之閔斯 어린 자식이 불쌍하구나

迨天之未陰雨 하늘이 흐려 장마비 내리기 전에/ 徹彼桑土 저 뽕나무 뿌리 벗겨다가/ 綢繆牖戶 창문과 문을 엮었으니/ 今女下民 이제 너희들 천한 백성들이/ 或敢侮予 나를 감히 넘보지 못할 테지

予手拮据 내손이 다 닳도록/ 予所捋荼 내 갈대이삭 뽑아다가 /予所蓄租 내집을 쌓느니라 /予口卒瘏 내 부리가 병이 난 것은 / 曰予未有室家 아직 내가 살 곳이 없어서라네

予羽譙譙 내 날개는 부러지고/ 予尾翛翛 내 꼬리는 찢어졌으며/ 予室翹 翹 내 둥지는 위태로워/ 風雨所漂搖 비바람에 흔들거리니/ 予維音曉曉 나는 오로지 두려워 울 뿐이로다.

6) 배의(倍依)/ 왕의 어좌(御座) 뒤에 도끼의 그림을 그린 병풍을 말하는데 주공이 종묘(宗廟)에서 제후들을 접견하지 않고 명당(明堂)에서 배의(倍依)를 치고 접견한 행위는 성왕(成王)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7) 중종(中宗)/은나라의 9대 왕 태무(太戊)를 말하며 은나라의 기운이 쇠락하여 제후들이 이반(離叛)하고 있던 중 태무(太戊)가 재위에 올라 제후들을 다시 다스리고 국운을 다시 일으켰다. 그래서 태무를 중종(中宗)이라고 불렀다.

8) 고종(高宗)/ 은나라 22대 왕인 무정(武丁)을 말한다.

9) 마융(馬融)의 사기집해(史記集該)에 의하면 무정(武丁)이 태자였을 때 그 부왕인 소을(小乙)이 그를 성 밖으로 내보내 하층의 백성들과 같이 노역을 하며 지내게 하여 하층민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알게 하였다고 했다.

10) 소을(小乙)이 늙어 무을(武乙)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소을이 곧바로 죽자 무을이 상례에 관한 예를 치르고 삼년동안 말을 하지 않고 지낸 일을 말한 것이다.

11) 조갑(祖甲)/ 은나라 무을(武乙)의 아들인데 그에게는 조경(祖庚)이라는 형이 있었으나 조갑이 어질었기 때문에 무을이 그를 자기의 후계로 삼으려고 하자 조갑은 왕이 형을 폐하고 자기를 세우는 것은 의(義)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민간이 사는 동네로 도망쳐 살았다. 후에 조경이 죽고 조갑이 뒤를 이어 은나라 정치를 일신시켰다. 『마융(馬融)의 사기집해(史記集該)』.

12) 삼교삼수(三郊三隧)/ 고대의 성밖의 가까운 곳을 교(郊)라 하고 교(郊)를 벗어난 먼 곳을 수(隧)라 했다. 동쪽을 제외한 세 방향의 성 밖의 가깝거나 먼 곳에 사는 백성들을 말한다.

13) 정간(楨幹)/ 담틀과 마구리대를 말하며 담을 쌓을 때 담을 세울 장소의 양쪽 끝에 세우는 기둥을 정(楨)이라 하고 정 사이에 끼워 흙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 판자를 간이라 한다. 성곽이나 토목공사를 벌릴 때 사용하던 공구.

14) 모궐문(茅闕門)/ 간칭하여 모문(茅門)이라고 하며 실제로는 치문(雉門)을 말한다. 치(雉)는 고문(古文)에 제(弟)라고도 쓰여 그 제(弟)의 모습이 모(茅)자와 비슷하여 잘못 쓴 것이 통용된 것이다. 제후가 사는 궁궐에는 고문(庫門), 치문(雉門), 로문(路門)등의 세 개의 문이 있었고 치문(雉門) 밖 양쪽에는 높은 대(臺)를 세웠는데 이것을 궐(闕)이라 했다. 그래서 치문을 모궐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5) 당진(唐晉)의 대신 반보(潘父)가 그의 군주인 소후(昭侯)를 살해하고 곡옥(曲玉)의 환숙(桓叔)인 성사(成師)를 불러들인 일을 말한다. 그러나 당진의 국인들이 들고일어나 반보를 잡아서 죽이고 환숙의 입성을 저지하였다. 이어서 소후의 아들 평(平)을 세웠다. 이가 당진(唐晉)의 효후(孝侯)이다.

16) 곡옥의 환숙의 뒤를 이은 사람이 장백(庄伯) 선(鮮)인데 효후(孝侯) 15년 장백이 익성(翼城)으로 쳐들어가 효후를 죽인 일을 말한다. 익성(翼城)의 국인들이 힘을 합쳐 장백을 공격하자 장백은 다시 곡옥으로 물러갔다. 당진의 국인들이 다시 효후의 아들 극(郄)을 세웠다. 이가 악후(鄂侯)이다.

17) 중자(仲子)/ 좌전(左傳)에 의하면 송무공(宋武公)이 딸을 낳았는데 손바닥에 「 장차 노나라의 부인이 될 것이다」라는 글이 써 있었다. 그래서 무공이 그의 딸을 노나라에 시집을 보냈다. 이어 아들 윤(允)을 낳았는데 이가 후에 노환공(魯桓公)이다. 환공이 즉위한 다음 송녀(宋女)의 시호를 중자(仲子)라 했다. 좌전은 중자(仲子)를 은공의 비로 데려온 것이 아니고 혜공의 정비로 데려온 것이며 혜공을 무도한 임금이라고 하지 않았다.

18) 당(棠)/ 현 산동성(山東省) 어등현(魚登縣)을 말하며 어부들이 고기를 잡는 모습을 은공이 관람하던 곳인 무당정(武棠亭)이라고 있었다.

19) 춘추좌전(春秋左傳) 은공 8년 조에 의하면 「정백(鄭伯)이 주공(周公)을 위해 태산(泰山)에 지내는 제사를 중지하고 태산의 팽전(祊田)과 허전(許田)을 바꾸기를 청해왔다. 삼월에 완(宛)을 사자로 보내어 팽전을 보내와 태산에 지내는 제사를 그만 두었다.」 정환공(鄭桓公) 우(友)는 주선왕(周宣王)의 동모제(同母弟)였기 때문에 정나라에 팽읍(祊邑)을 하사하여 천자가 태산에 제사 지낼 때 정나라로 하여금 돕게 하였다. 한편 주성왕(周成王)이 락읍에 성주(成周)를 축조하고 그곳으로 천도하려고 생각하여 락읍 부근의 허전(許田)을 주공에게 하사하여 노군(魯君)이 천자를 조현하러 올 때 그곳에 머물러 묶도록 하였다. 후에 천자가 태산에 지내는 제사를 폐하자 정국에 주었던 팽전에 소용없게 되었고 다시 팽읍(祊邑)은 정나라와 너무 멀고 (현 산동성 비현(費縣) 부근) 또한 허전은 노나라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현 하남성 허창시(許昌市) 부근) 정장공(鄭庄公)이 정나라 소유의 팽전과 노나라 소유의 허전을 바꾸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천자가 하사한 고을은 제후가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노나라는 태산에 제사를 지내고 정나라는 허전에서 주공에게 제사를 올리겠다는 겸손한 말로 핑계를 댄 것이다. 이 일은 노환공(魯桓公) 원년(元年)에 가서야 비로소 끝을 맺을 수 있었다.

20)종무(鍾巫)/신(神)의 이름. 은공(隱公)이 종무신(鍾巫神)에게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은 은공이 옛날 공자 시절에 호양(狐壤)에서 정나라와의 싸움에 참전하여 포로가 되었다. 정나라 사람들이 은공을 정나라 대부 윤씨(尹氏)의 집에 보내어 감금시켰다. 은공이 윤씨를 매수하여 그의 집안에서 모시고 있던 종무신(鍾巫神)의 신패(神牌)를 향해 기도를 드려 자기의 귀국을 빌게 하였다. 후에 은공(隱公)은 윤씨(尹氏)와 함께 도망쳐 노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은공(隱公)이 노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윤씨의 집안에서 모시고 있던 종무(鍾巫)의 신패(神牌)에게 기도를 드린 것이 효험(效驗)이 있다고 생각하여 교외(郊外)에다 종무(鍾巫)를 모시고 매년마다 빠짐없이 제사를 올렸다.

21)송지뢰정(宋之賂鼎)/고(郜) 땅의 대정(大鼎)으로써 원래는 고국(郜國)이 주조(鑄造)한 것인데 송나라가 고국을 멸하고 대정을 차지하였다. 노환공(魯桓公) 2년에 송나라의 태재(太宰) 화독(華督)이 그의 군주인 상공(殤公)을 살해하고 송장공(宋庄公)을 세웠다. 이에 화독은 제후들의 토벌을 모면하기 위해 고(郜)의 대정(大鼎)을 노(魯)나라에 뇌물로 바치고 제(齊), 진(陳), 정(鄭)나라 삼국에는 예물을 바쳤다. 노환공이 고(郜)의 대정을 받아들여 태묘에 안치하자 노나라 대부 장애백(臧哀伯)이 이를 중지하도록 간(諫)했으나 환공은 듣지 않았다.

22) 정려공(鄭厲公)은 환공 15년에 대부 제족(祭足)에 의해 쫓겨나 채(蔡)나라로 망명하였다. 다음 해인 노환공 16년 봄에 노환공(魯桓公), 송장공(宋庄公), 채후(蔡侯) 봉인(封人), 위선공(衛宣公)이 조(曹)나라 땅에 모여 회맹하고 그해 여름 4월에 정나라를 정벌하여 정려공의 복위를 꾀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23) 위혜공(衛惠公) 삭(朔)은 원래 그의 형인 급자(伋子)를 모함하여 죽이고 위선공(衛宣公)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위나라의 국인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고 란을 일으켜 혜공(惠公)은 제나라로 망명하였다.

24) 가(柯)/현 산동성 동아현 서남쪽. 동아현은 산동성 성도인 제남시 서남쪽 약 100키로 되는 곳인 하남성과의 경계에 있는 고을임.

25) 관사(觀社)/ 사직(社稷)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참관했다는 말이다. 제(齊)나라의 제사 지내는 방법은 제를 올릴 때 남녀 백성들이 몰려와 구경을 하여 주나라가 규정한 예와 많이 틀렸다. 노장공이 제나라에 가서 자기나라의 예법과 틀린 제나라의 제사 지내는 법을 참관하였으나 역시 주례(周禮)에 부합하지 않았다. 조말(曺沫)이 간하며 말하기를 「공께서는 제나라의 방법을 본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장공 23년 조 -

26) 양사지간(兩社之間)/옛날 제후들은 고문(庫門) 안에 거하였고 치문(雉門) 밖은 외조(外朝)라 했다. 그 좌우를 주사(周社)와 박사(亳社)라 하여 양사(兩社)라 했다. 여러 군신들은 외조(外朝)에 모여 정사를 처리했다. 그래서 양사지간(兩社之間)이라 함은 재상(宰相)이 된다는 의미이다.

27) 고량(高粱)/ 지금의 산서성 임분현(臨汾縣) 동북

28) 함(咸)/ 현 하남성 복양현(僕陽縣) 동남쪽

29) 교여(喬如)/춘추 때 적주(翟主) 백돈(白暾) 휘하의 장수로써 신장(身長)이 한 장 오 척에 달하는 거인(巨人)이었다. 적주 백돈이 교여(僑如)를 시켜 노나라를 침략하게 하자 노나라의 문공(文公)은 숙손득신(叔孫得臣)과 부보종생(富父終甥)을 시켜 막게 하였다. 교여(僑如)는 부보종생(富父終甥)의 유인(誘引) 작전(作戰)에 걸려 함정(陷穽)에 빠져 살해되었다.

30) 자구문(子駒門)/ 노나라 도성의 성곽에 설치한 성문 중 하나

31)계문자(季文子)/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68년에 죽었다. 춘추 때 노나라의 귀족으로 희성(姬姓), 계손씨(季孫氏)에 이름은 행보(行父)이다. 노환공(魯桓公)의 증손자로 계우(季友)의 아들이다. 노문공(魯文公) 때 대부에 임명되고 여러 번에 걸쳐 당진, 진(陳), 제(齊)나라 등에 사자로 다녔으며 또한 계손씨 휘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운(鄆), 제(諸) 등의 땅에 성을 축조했다. 후에 노나라의 정경이 되어 선공(宣公: 재위 BC608-591), 성공(成公: BC590- 573), 양공(襄公: BC572-542) 등 3대의 군주 밑에서 국정을 전담했다. 대부 공손귀보(公孫歸父)가 당진의 힘을 빌려 당시 노나라의 권력을 삼분하고 있던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 등의 소위 삼환씨(三桓氏)를 몰아 내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계손행보에 의해 나라밖으로 쫓겨났다. 일찍이 군사를 직접 인솔하여 기원전 589년 당진과 제나라 사이에 벌어진 안(鞍) 땅에서의 싸움에 참전하여 당진이 제나라를 패배시키자 그 전에 제나라에 빼앗긴 문양(汶陽)의 땅을 회복했다. 노성공 16년 기원전 575년 노나라 대부 숙손교(叔孫僑)가 계손씨와 맹손씨를 축출하기 위해 당진에 가서 계손행보가 초나라와 친하려 한다고 무고하자 당진은 그 말을 믿고 행보를 붙잡아 두고 육경(六卿)이었던 사섭(士燮)을 노나라에 보내 그 국정을 오래 동안 맡아보게 했다. 사섭이 노나라에 있는 동안 행보의 첩이 비단 옷을 입지 않고, 그 말들에게 양식으로 먹이를 주지 않자 행보가 충량(忠良)이라고 칭하면서 그를 석방했다. 노양공 5년 기원전 568년에 죽었다. 시호는 문자(文子)다.

32)양중(襄仲)/ 중손수(仲孫遂) 혹은 그의 별칭인 동문수(東門遂)를 말한다..

33)숙중(叔仲)/ 숙손씨로써 숙중팽생(叔仲彭生)을 말하며 태자(太子) 오(惡)의 태부이며 숙손득신(叔孫得臣)의 형이다. 참고로 삼환씨(三桓氏)의 계보도는 다음과 같다.

桓公 x 宮女 - ①孟孫氏

公子慶父⇒公孫敖⇒公孫穀/公孫難⇒仲孫蔑

②叔孫氏

公子牙(叔牙)⇒ 公孫玆⇒叔仲彭生/叔孫得臣⇒叔孫僑如

x 文姜 - ①仲孫氏

▶庄公(公子同)⇒東門遂(장공의 서자/仲遂 혹은 양중)

②季孫氏

公子友(季友)⇒季无佚⇒季孫行父(季文子)

34) 륭(隆)/ 지금의 산동성 태산(泰山) 부근의 박현(博縣) 서북

35) 선백(宣伯)/숙손득신(叔孫得臣)의 아들 숙손교여(叔孫喬如)를 가르킨다.

36)계무자(季武子)/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35년에 죽었다. 춘추 때 노나라의 정경(正卿)이다. 계손씨(季孫氏)에 이름은 숙(宿)이다. <국어(國語)>에는 숙(夙)으로 되어있다. 노환공의 증손인 계문자(季文子) 행보(行父)의 아들이다. 노양공 5년 기원전 568년 문자가 죽자 그 뒤를 이어 노나라의 정경이 되었다. 그 2년 후인 기원전 566년 노나라의 정권을 장악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당진이나 위(衛)나라에서 열렸던 제후들의 회맹에 참석하여 각국의 사절들을 대하는 예를 주재했다. 이 일로 당시 사람들은 계무자를 ‘지례(知禮)’라고 호칭했다. 양공 11년 기원전 562년 원래 이군(二軍)이었던 노나라 병력을 삼군(三軍)으로 만들어 삼환씨들이 각기 일군씩 갖도록 했다. 계손씨들에 속한 식읍의 노예들을 해방시켜 자유민으로 만들었으며 병역에 응하는 자에 대해서는 부세를 면제해 주고 병역에 응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그 세금을 배가시켰다. 양공 19년 기원전 554년 당진의 평공(平公)이 제나라를 공격하자 같이 종군하여 노획한 병기와 종(鐘)에 노나라가 세운 공로를 새기게 했다. 후에 노양공이 국내를 떠나 있는 틈을 타서 변대부(卞大夫)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구실을 삼아 변읍을 습격하여 계손씨들의 사읍으로 만들었다. 양공이 알고 계무자를 매우 원망하였다. 양공이 죽자 그는 소공(昭公)을 노후의 자리에 앉혔다. 노소공 5년 기원전 537년 그는 노나라 공실이 갖고 있던 중군(中軍)을 폐하고 공실을 4분하여 계손씨가 2분을 갖고 나머지 2분을 맹손씨와 숙손씨에게 각 1분씩 나누어 주었다. 이후로 노나라의 공실을 더욱 쇠약해 지고 계손씨가 전권을 휘둘렀다. 노소공 7년 기원전 535년 병으로 죽었다.

37) 연릉계자(延陵季子)/ 오왕 수몽(壽夢)의 막내아들 계찰을 말한다. 수몽은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다. 장자는 제번(諸樊), 차자는 여제(餘祭), 삼자는 이매(夷昧) 막내는 계찰(季札)이라고 했다. 수몽이 죽을 때 오나라의 왕위를 계찰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그 아들들에게 형제끼리 상속을 하라고 유언하였다. 제번이 죽고 여제가, 여제가 죽고 이매(夷昧)가 뒤를 이었고 다시 이매가 죽었으나 계찰은 오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 계찰이 왕위에 오르지 않자 이매의 아들 왕료가 올랐다. 그러자 제번의 아들인 합려가 오자서의 도움으로 왕료를 죽이고 오왕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연릉은 계찰의 봉지이다.

38)목숙(穆叔)/혹은 목자(穆子)로 노국(魯國) 대부 숙손표(叔孫豹)를 말하며 숙손교여(叔孫喬如)의 동생이다. 계문자는 계우의 손자이고 목숙은 숙아의 증손자다. .

39) 구욕조(鴝鵒鳥)/ 구관조(九官鳥)를 말하며 때까치 비슷하며 몸은 검고 날개 밑에 흰 점이 있다. 주로 북방의 추운 지방에 서식하며 굴을 파고 사는 새라 비교적 남쪽에 위치한 노나라에는 살지 않는 새이며 둥지를 틀 수도 없는 새이다.

40) 건후(乾侯)/ 지금의 하북성 성안현(成安縣) 동남

41) 계평자(季平子)/ 계손의여(季孫意如)를 말하며 계무자(季武子)의 손자이다.

42) 자가(子家)/ 삼환인 중손씨의 중손구(仲孫駒)를 말한다.

43) 맹의자(孟懿子)/ 노국 삼환씨 중 맹손씨의 8대 종조로 이름은 맹손하기(孟孫何忌)다. 아버지는 맹희자(孟僖子) 맹손확(孟孫攫)이고 아들은 맹무백(孟武伯) 중손체(仲孫彘)다.

44) 천사(千社)/ 일사(一社)는 25가호(家戶)를 말함.

45) 자장(子將)과 고흘(高齕)/ 자장(子將)은 제경공(齊景公)의 총신(寵臣) 양구거(梁邱据)를 말하며 고흘은 자장의 가신(家臣)이다.

46) 유(庾)/ 일유(一庾)는 16말임. 즉 오천유는 팔만 두(斗)임.

47) 숙손소자(叔孫昭子)/ 목숙(穆叔) 숙손표(叔孫豹)의 아들로써 숙손야(叔孫婼)를 말한다.

48)운(鄆)/ 지금의 산동성 운성현(鄆城縣) 경내에 있었던 노나라 영토였으나 제경공이 빼앗아 제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노소공(魯昭公)에게 주어 살게 했다. 노소공은 제경공이 자기를 신하로 취급하자 운 땅에서 당진의 건후(乾侯) 땅으로 옮겨 살았다. 이후로 운성(鄆城)은 제나라 땅이 되었다.

49) 사묵(史墨)/ 당진의 사관 채묵(蔡墨)을 말한다.

50) 사군(四君)/ 노(魯)나라의 선공(宣公), 성공(成公), 양공(襄公), 소공(昭公)을 말한다.

51)양관(陽關)/ 지금의 태안시 남쪽 있었던 환양관(讙陽關)을 말함.

52) 중유(仲由)/ 계손씨(季孫氏)의 가신(家臣)으로 있었던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를 말한다.

53) 뢰(牢)/ 소, 양, 돼지 각 한 마리씩을 일뢰(牢)라고 한다.

54) 염유(冉有)/공자의 제자로 자유(子有)를 말한다. 염구(冉求)라고도 한다. 계손씨(季孫氏)의 가신이 되어 노나라의 좌군을 이끌고 노나라를 쳐들어온 제나라 군사들을 막게 하였다. 제나라 군사들을 패주 시키고 그들의 갑옷 80여 개를 노획하여 공을 세웠다.

55) 능판(陵阪)/지금의 산동성 곡부시(曲阜市) 동북

56) 맹무백(孟武伯)/ 맹손체(孟孫彘)의 시호로 맹의자의 아들이다.

57) 형지(陘氏)/ 유산지(有山氏)를 말하며 노나라의 영지이다.

58) 수사(洙泗)/ 수수(洙水)와 사수(泗水)는 노나라 도성이었던 곡부(曲阜)를 지나는 강이었다. 공자께서는 수수와 사수 사이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강론을 하던 곳이다.

미주

춘추노국삼환씨계보표

노환공(魯桓公)

문강(文姜)

궁녀(宮女)

東門氏(仲孫氏)

季孫氏

孟孫氏

叔孫氏

1

노장공(魯莊公)

계우(季友)

경보(慶父)

숙아(叔牙)

2

襄仲 東門遂(莊公之子)

無佚

穆伯 公孫敖

戴伯 玆

3

公孫歸父

文子 行父

文伯 孟孫穀/惠叔 難

莊叔 得臣, 惠伯 叔仲彭生

4

武子 宿

獻子 蔑(穀之子)

宣伯 僑如, 穆子 豹

5

悼子 紇

莊子 速

昭子 婼(豹之子)

6

平子 意如

孝伯 羯

成子 不敢

7

桓子 斯

釐子 攫

武叔 州仇

8

康子 肥

懿子 何忌

文子 舒

9

昭子 强

武伯 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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