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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6-13 21:18:586210 
장석지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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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42. 張釋之馮唐(장석지풍당)


장정위(張廷尉)의 이름은 석지(釋之)이고 도양(堵陽)1) 사람이다. 자는 계(季)다. 그는 장중(張仲)이란 형과 같이 살았다. 그는 집이 부유했음으로 재물로써 기랑(騎郞)2)이 되어 효문제를 섬겼으나 10년이 넘도록 승진이 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실의에 찬 석지가 말했다.

「오랫동안 낭관을 지내면서 둘째 형의 재산만 축내고 뜻을 이루지 못했구나!」

그리고는 낭관을 스스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의 현능함을 알고 있었던 원앙이 그가 사직한다는 소식을 듣고 애석히 여겨 이내 주청을 드려 석지를 승진시켜 알자(謁者)3)로 옮겨주었다. 석지가 조회가 끝나 한가한 틈을 타서 앞으로 나아가 나라의 이로운 일에 대해 진언했다. 문제가 듣고 말했다.

「수준을 현실에 맞추어 말하고 지나치게 고상한 담론을 하지 말라! 오로지 지금 시행할 수 있는 일만 말하라!」

그래서 석지는 진한(秦漢) 교체기의 일에 대해 말해 진나라가 나라를 잃고 한나라가 흥기한 이유를 오랫동안 말했다. 문제가 훌륭하다고 칭찬하고 석지를 알자복야(謁者僕射)4)로 삼았다. 。

장석지가 황제의 행차를 호종하여 호랑이를 기르고 있는 호권(虎圈)에 올랐다. 황제가 상림원(上林園)5)의 책임자인 위(尉)에게 상림에서 기르는 여러 짐승들에 대해 10여 가지의 질문을 했으나 상림위(上林尉)는 좌우를 쳐다볼 뿐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곁에 있던 호권의 색부(嗇夫)6)가 상림위(上林尉)를 대신해서 황제에게 상림원에 있는 짐승들에 대한 현황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메아리가 되돌아오는 듯한 소리로 대답하여 했는데 말주변이 무궁했다. 문제가 말했다.

「관리란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상림위는 내가 믿을 수 없다.」 그 즉시 석지에게 조칙을 내려 그 색부를 상림령(上林令)에 임명하라고 명했다. 장석지가 한참만에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강후 주발(周勃)을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장자다.」

그러자 석지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동양후(東陽侯) 장상여(張相如)7)는 또한 어떤 사람이니까?」

「그 역시 장자다.」

「무릇 강후와 동양후 같은 사람을 장자라고 부릅니다. 이 두 사람은 일을 논할 때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에게 쉴 새 없이 지저귀는 말 주변이 뛰어난 색부와 같은 사람을 배우라고 하십니까? 하물며 진나라는 도필리(刀筆吏)8) 같은 자들을 관리로 임용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투어 일을 재빨리 처리하고 가혹하고 각박하게 서로의 낮고 높음을 비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폐단은 단지 형식에만 집착하고 백성들의 사정을 실제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황제는 그의 과실을 들을 수 없어 결국은 나라는 쇠약해지고 이세에 이르자 천하는 흙더미가 무너지듯 붕궤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폐하께서 색부가 구변이 좋다는 이유로 파격적으로 지위를 올리려고 하시는데 신이 걱정하는 바는 천하가 바람에 휩쓸리는 풀잎처럼 구변만을 서로 다투어 실익이 없게 되지나 않을까 입니다. 또한 아랫사람들이 윗사람들의 행동을 본받는 바는 그림자가 형제를 따라다니는 것과 같아 폐하께서 행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간에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불가합니다.」

「옳은 말이오.」

황제는 즉시 색부를 상림원의 책임자로 임명하는 명을 거두었다.

황제가 수레를 타고 출행할 때 석지를 불러 참승으로 삼았다. 수레가 가는 동안 황제는 석지에게 진나라의 폐단에 대해 물었다. 석지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사례를 들어 말했다. 황제게 궁에 돌아와 석지를 승진시켜 공거령(公車令)9)으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태자와 양왕이 어가를 같이 타고 조정으로 들어오다가 사마문(司馬門)10)에 이르렀으나 양왕이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가자 석지가 그 뒤를 쫓아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고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어서 사마문에서 내리지 않은 행위는 불경죄에 해당한다고 두 사람을 탄핵했다. 박태후(薄太后)11)가 알게 되었음으로문제가 면류관을 벗어들고 사죄했다.

「제가 아들을 엄격하게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박태후가 즉시 조칙을 내려 태자와 양왕을 사면하고서야 두 사람은 궁궐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 일로 인해 문제는 석지가 비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중대부(中大夫)12)로 품계를 올렸다.

그리고 얼마 후에 중랑장(中郞長)13)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날 황제의 행차를 수행하여 패릉(覇陵)에 이르렀을 때 황제는 능묘의 북쪽 편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때 행차를 따라 나선 신부인(愼夫人)을 보고 신풍(新豊)14)으로 통하는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길은 한단으로 통하오.」

그리고는 신부인에게 거문고를 타게 하고 황제 자신은 거문고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데 그 음조가 매우 처량하고 비감했다. 황제가 군신들을 쳐다보고 말했다.

「아아! 북산의 석재로 겉널을 만들고, 모시와 솜으로 겉널의 틈새를 메운 후에 다시 옻을 칠한다면 어찌 열 수 있겠는가?」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말했다.

「그러합니다.」

그러자 석지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그 안에 사람들이 탐하는 것들을 넣게 하신다면 비록 남산을 녹여 그 틈을 메꾼들 열 수 있고, 그 안에 사람들이 탐하는 것을 넣어 두지 않는다면 비록 겉널이 없다한들 무슨 걱정이 되겠습니까?」

문제가 옳은 말이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석지를 정위(廷尉)로 승차시켰다.

그러고 어느 날, 황제가 출행을 나가 위교(渭橋)를 지나가다가 어떤 사람 한 명이 다리 밑에서 뛰어나와 어가를 모는 말을 놀라게 했다. 황제가 기사(騎士)를 시켜 체포해오도록 하여 정위에게 치죄하게 했다. 석지가 심문하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이 고을 사람입니다. 어가의 행차를 알리는 벽제 소리를 듣고 다리 밑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 황상의 행렬이 지났다고 생각해서 몸을 드러냈으나 어가와 거기(車騎)가 보였음으로 달아나게 된 것입니다.」

정위가 심문을 마치고 상주하기를 한 사람의 백성이 청도계엄(淸道戒嚴)15)을 범한 일로써 벌금형에 해당한다고 했다. 문제가 듣고 화를 내며 말했다.

「그 자는 내 어가를 끄는 말을 놀래게 했으나 내 말이 유순했으니 망정이지 다른 말 같았으면 내가 수레에서 떨어져 다칠 뻔 했소. 그런데 정위는 그를 벌금형에 처하겠다는 말이오?」

「법이란 천자나 천하 사람이 다 같이 지켜야 합니다. 오늘 황상의 말씀대로 법을 고쳐 무겁게 만든다면 백성들은 법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황상께서 사람을 시켜 그 자리에서 바로 베어 죽이지 않고 정위에게 넘겨 그 백성을 치죄토록 하셨습니다. 정위는 법을 천하 사람들을 공평하게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 공평함이 한번 한 쪽으로 기우려지면 천하의 법들은 다시 경해지거나 중해질 텐데 그때는 백성들은 그들의 손발을 어디다 두겠습니까?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십시오!」

그리고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다음 황제가 말했다.

「정위의 말이 지당하오.」

그 후에 어떤 사람이 고제의 사당에서 옥환을 훔치다가 체포되었다. 문제가 노해 정위에게 명해 치죄토록 했다. 석지가 법률에 의거 종묘에서 물건을 훔친 자는 기시형에 해당한다고 상주했다. 황제가 더욱 노해 말했다.

「그 자는 무도한 자라 선제의 사당에서 물건을 도적질했소. 그래서 나는 정위에게 그 자를 넘긴 이유는 그 자를 멸족시키를 바라서였소. 그러나 정위는 법에 따라 기시형에만 처한다고 하니 그것은 종묘를 높이 받들고자 하는 나의 뜻이 아니오.」

석지가 관모를 벗어들고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이처럼 법대로 하면 충분합니다. 더욱이 죄질은 같아도 그 사람의 충순함과 그렇지 않은 정도에 따라 차이를 두어야 합니다. 오늘 도적이 종묘의 기물을 훔쳤다고 해서 멸족을 시킨다면 만에 하나라도 가령 어리석은 백성들이 장릉(長陵)에서 흙 한줌을 훔치기리도 한다면 폐하께서는 그때는 어떻게 법을 적용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문제가 한 참 동안 태후와 의논한 후에 정위의 판결이 정당하다고 허락했다. 그때 중위(中尉)16)의 직에 있었던 조후(條侯) 주아부(周亞夫)와 양나라의 상국 산도후(山都侯) 왕염개(王恬開)가 석지의 공평한 판결을 전해 듣고 찾아와 교분을 맺어 친구가 되었다. 장정위의 이름은 이로써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후에 문제가 붕어하고 경제가 섰음으로 석지는 옛날 사마문(司馬門)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죄를 추궁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병을 칭하고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로 은퇴하려고 했으나 혹시 멸족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석지는 황제를 배알하고 사과하려고도 했으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몰라 주저하고 있었다. 이윽고 왕생(王生)이라는 사람의 계책을 써허 마침내 황제를 배알하고 잘못을 빌자 경제는 죄를 묻지 않았다.

왕생이라는 사람은 황노(黃老)의 술에 밝은 처사였다. 일찍이   부름을 받고 조정에 들렸는데 삼공구경(三公九卿)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나이가 많은 왕생이 말했다.

「내 버선 끈이 풀어졌소.」

그리고는 다시 장정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를 위해 버선 끈을 메어주시오!」

석지가 무릎을 꿇고 왕생의 풀어진 버선끈을 매주었다. 그리고 조정에서 물러난 왕생에게 어떤 사람이 물었다.

「어찌하여 유독 장정위를 조정에서 욕보이셨습니까?」

「나는 늙고 출신이 미천하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아직까지 장정위를 위해 아무런 일도 해주지 못했다. 장정위는 바야흐로 당대의 천하 명신이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정위를 욕보여 그로 하여금 무릎을 꿇리고 나의 버선끈을 매게 하여 그이 겸손함을 더욱 중하게 만들었다.“

여러 대신들이 듣고 현능한 왕생이 장정위를 더욱 중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장정위는 경제를 측근에서 1년여를 모시다가 회남왕의 상국으로 전보되었다. 이는 옛날 장정위가 사마문에서 황상에 지은 죄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장석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장지(張摯)는 자가 장공(長公)이라고 했는데 관직은 대부(大夫)까지 올랐다가 후에 면직되었다. 그는 당세의 권세가들이나 명망가들에게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에 종신토록 관직에 다시 나가지 못했다.


풍당(馮唐)의 조부는 조나라 사람이다. 그의 부친이 대(代) 땅에서 살다가 한나라가 일어서자 안릉(安陵)으로 옮겼다. 풍당은 효렴으로 천거되어 중랑서(中郞署)의 장이 되어 문제를 모셨다. 문제가 봉련(鳳輦)을 타고 출행할 때 옆에서 호종하고 있던 풍당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늙은 나이가 되도록 랑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집은 어디에 있는가?」

풍당이 있는 사실을 자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문제가 다시 물었다.

「내가 대나라에 있을 때 나의 상식감(尚食監)17) 고거(高袪)가 여러 번 거록(鉅鹿)에서의 싸움에 참전한 조나라 장군 이제(李齊)18)의 현능함에 대해 말했소. 지금도 나는 식사를 할 때마다 거록에서의 싸움에서 싸운 이제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대의 부친도 이제라는 장군을 알았소?」

「이제는 오히려 염파(廉頗)나 이목(李牧)보다 못합니다.」

「어째서 그렇소?」

「신의 조부는 조나라에서 장수로 있었는데 이목과 매우 친했습니다. 또한 신의 부친은 대나라의 상국을 지냈음으로 조나라 장군 이제와 잘 알고 지냈음으로 신이 그 사람됨을 알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황제는 풍당으로부터 염파와 이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매우 기뻐하여 허벅지를 치며 안타까워했다.

「아아!내가 염파와 이목과 같은 장수를 얻을 수 없는가? 내가 두 사람을 장군으로 쓸 수 있다면 어찌 흉노 따위의 이족들로 인해 근심하겠는가?」

「황공하옵니다. 폐하께서는 비록 염파와 이목을 얻는다해도 능히 쓰시지 못할 것입니다.」

황제가 화를 내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궁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자 황제가 풍당을 불러 책망했다.

「공은 어찌하여 여러 사람들 앞에서 짐을 모욕했소? 아무도 없는 데에서 말해야 하지 않았소? 」

풍당이 사죄의 말을 올리며 말했다.

「비루한 사람이라 삼갈 줄 몰랐습니다.」

당시 한나라의 정세는 흉노가 새로이 대거 국경을 침범하여 북지군(北地郡)의 도위 손앙(孫卬)을 살해한 일이 발생한 시점이었다. 흉노의 침입를 걱정한 황제가 또다시 풍당에게 물었다.

「공은 어찌하여 내가 염파나 이목을 장군으로 쓸 수 없다고 생각했소?

「신이 듣기에 옛날 왕들은 장수를 출전시킬 때 무릎을 꿇고 수레바퀴를 밀며 ‘ 문 안의 일은 과인이 알아서 할테니 문 밖의 일은 장군이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군공과 상작은 모두 장군이 결정한 후에 돌아와 왕에게 고하면 되었습니다. 이 말은 빈말이 아닙니다. 신의 조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목이 조나라 장군이 되어 변경에 머무르며 군중에 설치한 시장에서 걷어 들이는 조세는 모두 휘하의 군사를 위해 사용하고 상금을 줄 때도 스스로 결정하고 조정에서는 일체 간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위임하여 성공을 책임지도록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목은 그의 지혜를 모두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병거 1,300승, 궁기병 1만 3천 기, 백금지사(百金之士) 10만 명을 선발하여 선우를 북쪽으로 쫓아내고 동호는 무찔렀으며, 담림(澹林)은 멸하고,서쪽의 강포한 진나라와 남쪽의 한과 위 등의 나라를 억누를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정세로는 조나라는 거의 패업을 이룰 수 있는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 후에 조왕 천(遷)이 섰습니다만 그의 모친은 거리에서 노래 부르고 받은 돈으로 살았던 창녀(倡女) 출신이었습니다. 조왕 천은 간신 곽개의 아첨하는 말에 빠져 이목을 주살하고 안취(安聚)를 대신 시켰습니다. 이로써 군사들은 무너지고 군사들은 모두 달아나 결국은 조왕은 진나라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신이 가만히 듣건대 운중(雲中) 군수 위상(魏尙)은 군중에 설치한 시장에서 징수한 조세를 사졸들을 위해 모두 사용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돈을 써서 5일마다 소 한 마리씩을 잡아 변경고을의 빈객과 군리(軍吏)와 사인(舍人)들을 접대했음으로 흉노가 멀리 달아나 몸을 피해 운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흉노가 쳐들어오자 위상은 거기(車騎)를 이끌고 출전하여 흉노의 많은 무리들을 격살했다고 했습니다. 무릇 사졸들은 밭을 일구다가 몸을 일으켜 종군하게 된 남의 집 아들들입니다. 어찌 척적(尺籍)19). 오부(伍符)20) 등의 군법과 군령 등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루 종일 있는 힘을 다해 싸우고 적군의 목을 참수하고 포로를 잡으나 상부에 공로를 고할 때 한 마디 말이라도 서로 같지 않으면 문리들이 법의 올가미로 얽어 넣습니다. 상은 이행되지 않지만 문리들이 법을 밝혀 죄를 주는 행위는 필히 행합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폐하께서는 법을 너무 크게 밝혀 상은 가볍게 행하고 벌을 주는 일은 지나치게 중하게 합니다. 하물며 운중군수 위상은 공적을 상부에 올릴 때 수급과 포로가 단지 6개의 차이가 났지만 폐하께서는 문리에게 하명하여 위상의 작위를 깎고 벌을 내리셨습니다. 이 일을 볼 때 폐하께서는 염파나 이목을 얻는다 할지라도 능히 쓰실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신은 진실로 어리석어 황상의 심기를 건들었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진실로 즉을 죄를 지었음입니다.」

풍당의 말에 기뻐한 문제는 그날로 풍당에게 명을 내려 지절(持節)을 가지고 가서 위상을 사면하고 다시 운중의 군수에 복직시켰다. 이어서 풍당은 거기도위(車騎都尉)에 제수하고 중위(中尉)와 군국(郡國)의 전차부대를 관장하도록 했다.


  한문제 후원년 7년 기원전 157년, 문제가 붕어하고 그 뒤를 이은 경제는 풍당을 초나라 상국으로 보냈으나 얼마 후에 면직되었다. 경제의 뒤를 이은 무제가 현량(賢良)을 구하자 풍당이 천거되었다. 풍당은 당시 90이 넘은 나이였음으로 관직에 나설 수 없었다. 그래서 풍당의 아들 풍수(馮遂)를 대신 랑으로 삼았다. 자가 왕손(王孫)인 풍수 역시 기재로써 나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


태사공이 말한다.

장석지가 주발과 장상여를 장자라고 논한 일은 법을 지키고 윗사람의 뜻에 아부하지 않은 행위였다. 풍당이 장군에 대해 논한 일은 참으로 깊은 뜻이 있었다! 참으로 깊은 뜻이 있었도다! 옛말에「그 사람을 알 수 없거든 그의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다. 두 사람을 칭송했던 글은 사적에 기록해 둘만하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불편부당하니 왕도는 평안하고 창달한다[不偏不党,王道蕩蕩], 부당불편하니 왕도는 끝없이 넓고 크도다[不党不偏,王道便便)!]」라고 했으니 장석지와 풍당은 모두 이런 말에 부합되는 사람이다.


<장석지풍당열전 끝>

주석

1) 도양(堵陽)/ 지금의 하남성 방성현(方城縣)이다.

2) 기랑(騎郞)/ 황제를 호위하는 기마병

3) 알자(謁者)/ 춘추전국시대에 시작하여 진한이 답습한 관제로써 왕의 명을 출납하는 임무를 맡았다.

4) 알자복야/ 알자들의 장관이다.

5) 상림원(上林園)/ 진나라 때 조성된 함양성 남쪽의 황제 전용 사냥터를 말한다. 한나라 초 관리가 안 되어 황폐해 졌다가 고조 12년 백성들에게 개방되어 개간을 허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무제 때에 그 이름을 궁원(宮苑)으로 바꿔 불렀다. 그 크기가 사방 200여 리에 달했고, 원내에는 짐승을 방목하여 황제가 사냥을 즐기게 했으며 원내 곳곳에 이궁, 관람을 위한 누각, 그리고 숙식을 할 수 있는 관사들과 같은 시설물을 축조했다.

6) 색부(嗇夫)/ 진나라 때 시작된 제도로 지방 관청의 관리의 일손을 돕기 위해 농부 중에서 뽑아 임명했다.

7) 장상여(張相如)/ 서한의 창업공신으로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중대부가 되었다가 하간(河間)태수로 있을 때 모반한 진희(秦稀)의 토벌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워 동양후에 봉해졌다. 문제 때에는 대장군과 태자태부를 지냈다.

8) 도필리(刀筆吏)/ 종이가 출현하기 전의 고대 중국에서는 글씨를 목간이나 죽간에 썼다. 이때 틀리는 글자가 있을 경우 칼로 긁어내고 다시 썼다. 죽간의 틀린 글씨를 칼로 긁어내고 붓으로 다시 쓰는 지방관아의 하급관리를 도필리라 불렀다.

9) 공거령(公車令)/ 公車司馬令의 준말이다. 진한 때 衛尉의 속관으로 궁전의 司馬門과 야간에 행하는 순라를 책임졌고 또한 백성들이 올리는 상소문을 관리하고 관리들을 조정으로 소집하는 일을 관장했다. 녹봉은 6백 석이다.

10) 사마문(司馬門)/ 황긍의 외문으로 궁궐내의 사대문에는 위병을 두어 지키게 하고 사마로 하여금 관장하게 했다. 궁궐로 들어갈 때 이 곳에서 부터는 누구든지 거마나 탈 것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11) 박태후(薄太后)/ 고조의 후궁으로 문제 유항(劉恒)의 생모다. 문제가 8살의 나이에 대왕에 봉해지자 박태후는 아들을 따라가 대국(代國)에서 살았다. 문제가 즉위함으로 황태후가 되었고 경제가 즉위하자 태황태후가 되었다.

12) 중대부(中大夫)/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제로 광록훈(光祿勳)의 속관으로 조정의 의론을 조정했다. 한무제 시 광록대부로 개칭했다. 녹봉은 2천 석이다.

13) 중랑장(中郞長)/ 진나라가 설치한 랑중령(郞中令)의 속관으로 삼서랑(三署郞)을 관장하고 숙위(宿衛)와 궁궐의 문을 지키는 군사들의 장령이다. 삼서랑이란 五官, 左, 右 등에 속하는 랑관의 통칭이다. 秩은 比 2천 석이다.

14) 신풍(新豊)/ 지금의 섬서성 臨東縣 陰盤城이다. 원래 진나라 때는 驪邑이었다. 한고조 7년 기원전 200년, 태공이 간절히 고향 豊邑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자 고조가 여읍을 풍읍의 거리와 골목길을 본따 새로이 축성하고 풍읍의 주민을 데려와 거주하게 하고 이름을 신풍이라고 지었다.

15) 청도계엄(淸道誡嚴)/ 황제나 왕이 출행할 때 길을 내고 거리를 청소하며 통행을 금하는 행위로 원문은 필(蹕)이다.

16) 중위(中尉)/ 전국 때 조나라가 설치한 무관직으로 진나라가 따라 수도의 치안을 맡겼다. 한나라가 답습했으나 치안 이에 북군의 사령관으로 무제 때 집금오(執金吾)로 개명했다. 9경 중 한 명이다.

17) 상식감(尙食監)/ 왕실의 주방을 감독하는 관리로 태감(太監)이라고도 한다.

18) 이제(李齊)/ 원래 진말 진나라의 장군이었으나 진승의 기의군에 참여하여 조왕 무신(武臣)의 부하 장수가 되었다. 후에 무신의 여동생이 무례했음으로 죽이고 한단을 기습하여 무신을 살해하고 진군에게 항복했다. (장이진여열전 참조)

19) 척적(尺籍)/ 군법에 사졸이 적군의 목을 베어 수급을 하나 얻게 되면 그 군공을 목판 위에 기록하게 되어있었다. 그 목판의 길이가 한 척이었음으로 척적이라고 했다.

20) 오부(伍符)/ 다섯 사람으로 이루어진 한 조를 오(伍)라 한다. 그 오끼리 상호간에 약속을 하고 적군의 세작 등을 방지하기 위해 발행한 신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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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10-06-13
[일반] 원앙조조열전(袁盎鼂錯列傳) 41

열전41. 袁盎鼂錯(원앙조조) 원앙은 초나라 출신으로 자는 사(絲)다. 그의 부는 과거에 도적떼였다가 안릉(安陵)에 이사와서 살았다.
운영자 10-06-13
[일반] 계포란포열전(季布欒布列傳) 40

열전40. 季布欒布(계포란포) 계포(季布)는 초(楚)나라 출신이다. 의기와 협객으로 초나라에서 이름이 높았다. 항우에 의해 장수가 된 그는 한왕을
운영자 09-08-20
[일반]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39

열전39. 劉敬叔孫通(유경숙손통) 유경(劉敬)은 제나라 사람이다. 한5년 기원전202년, 농서(隴西)로 군역을 나가면서 낙양을 지나가다가 그때
운영자 09-07-31
[일반] 부근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 38. 傅寬(부관)‧靳歙(근…

열전38. 傅寬(부관)‧靳歙(근흡)‧周緤(주설) 1. 부관(傅寬) 양릉후(陽陵侯) 부관(傅寬)은 위(魏)나라 오대부(五大
운영자 09-07-09
[일반]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 37

열전37. 역생육가(酈生陸賈) 역생(酈生) 이기(食其)라는 사람은 진류(陳留) 고양(高陽)① 출신이다. 독서를 좋아했으나 가난한 집안 사
운영자 09-03-19
[일반]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36. 장창 등

열전36 丞相張蒼外(승상장창외) 승상 장창(張蒼)은 양무(陽武)1) 출신으로 평소에 독서를 좋아하고 음률과 역법에 능했다. 진나라 때 그는 이미
운영자 09-02-22
[일반] 번역등관열전(樊酈縢灌列傳) 35. 번쾌(樊噲)․역상(酈…

열전35. 번쾌(樊噲)․역상(酈商)․하후영(夏侯嬰)․관영(灌嬰) 1. 번쾌(樊噲) 무양후(武陽侯)
운영자 08-11-03
[일반] 전담열전(田儋列傳) 34

열전34. 전담(田儋)  전담(田儋)은 적현(狄縣) 출신이다. 옛날 제나라 왕족 전씨의 후예다. 전담과 종제 전영(田榮), 전영의 동생
운영자 08-10-27
[일반]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33. 한왕⋅신, 노관, 진희(秦稀)

열전33. 한신․노관․진회(韓信盧綰秦稀) 1. 한신(韓信) 한왕(韓王) 신(信)은 원래 한양왕(韓襄王)의 서얼 후손으로 신장이
운영자 08-06-11
[일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32. 한신(韓信)

열전32. 淮陰侯韓信(회음후한신) 楚人迫我京索(초인박아경색), 초나라가 한나라를 경성(京城)과 색성(索城)에서 압박할 때 而信拔魏趙(이신
운영자 08-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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