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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33. 한왕⋅신, 노관, 진희(秦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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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33. 한신․노관․진회(韓信盧綰秦稀)


1. 한신(韓信)


한왕(韓王) 신(信)은 원래 한양왕(韓襄王)의 서얼 후손으로 신장이 8척 5촌에 달했다.

항량(項梁)이 기의하여 초회왕(楚懷王)을 받들 때 동시에 연(燕), 제(齊), 조(趙), 위(魏) 등의 후손들을 모두 찾아내어 왕의 자리를 잇게 만들었으나 오로지 한나라만이 적손이 없었기 때문에 한나라의 여러 공자 중 횡양군(橫陽君) 한성(韓成)을 찾아내어 한왕으로 세웠다. 항량이 한나라의 옛 땅을 진무하여 평정하려고 진격했다가 진나라 장수 장한에게 정도(定陶)에서 패해 죽자 한왕 성(成)은 초회왕에게 달려가 몸을 의탁했다. 패공이 군사를 이끌고 양성(陽城)을 공격할 때 장량(張良)을 한나라 사도로 삼아 한나라 고지의 성읍들의 항복을 받아오도록 시켰다. 그때 한나라 공족 출신인 한신(韓信)은 그 병사들과 함께 패공에게 귀의하여 무관(武關)으로 들어갔다.

패공이 항우에 의해 한왕(漢王)에 봉해지자 한신은 다시 한왕을 따라 한중(漢中)으로 들어갔다. 한신이 한왕에게 유세했다.

" 항왕은 제후들을 모두 출신지와 가까운 곳의 왕으로 삼고 오로지 대왕만 홀로 먼 곳인 이곳에 봉했습니다. 이것은 좌천입니다. 우리를 따라온 사졸들은 모두 산동 출신이라 그들은 하나같이 발돋움하여 고향쪽을 바라보며 매우 간절한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동쪽 고향을 향하고 있는 마음을 이용하여 예봉으로 삼는다면 가히 천하를 다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한중에서 나간 고조가 다시 관중으로 돌아가 삼진을 평정했다. 고조는 즉시 한신을 한왕(韓王)으로 세우기로 하고 전에 먼저 한(韓)나라의 태위(太尉)의 신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한나라의 고지(故地)를 공략하라고 명했다.

항우가 제후들과 제장들을 모두 제후왕으로 봉하고 각기 자기나라로 부임하도록 했으나 한왕 성(成)만은 항우의 원정에 종군하지 않아 공을 세우지 못했음으로 한나라 땅으로 보내지 않고 왕의 신분에서 열후로 만들었다. 이윽고 한나라가 한신을 시켜 한나라 땅을 공략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항우는 옛날 자기가 오군(吳郡)에 있을 때 교유를 맺었던 오군의 수령 정창(鄭昌)을 한왕으로 임명하여 양성(陽城)을 치소로 삼아 한(漢)나라에 대항하도록 했다.

한왕 2년 기원전 205년, 한신이 한나라 땅을 공략하여 10여 개의 성을 평정했다. 고조가 하남에 이르자 한신은 맹렬하게 양성의 한왕 정창을 공격했다. 정창이 견디지 못하고 한신에게 항복했다. 고조는은 약속대로 한신을 한왕(韓王)으로 봉했다. 한신은 언제나 한나라 군사를 이끌고 한왕의 군대에 종군했다.

한왕 3년 기원전 203년, 고조가 형양(滎陽)을 탈출하자 한신과 주가(周苛) 등이 형양을 항우의 공격으로부터 지켰다. 그러나 초나라가 재차 공격하여 형양성을 함락시키자 한신은 초나라에 항복했다가 기회를 보아 도망쳐 한나라에 돌아왔다. 고조는 다시 한신을 한왕(韓王)으로 세웠다.

한왕4년 기원전 202년 고조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항적을 격파하고 찬천를 안정시켰다.

한왕 5년 기원전 201년, 한신에게 부절을 내리고 왕도를 영천(潁川)에 두게 했다. 다음 해 봄, 한신이 군사의 일에 재능이 있고 항상 자기를 따라다니며 싸움에 능할 뿐만 아니라 북으로는 공현(鞏縣)과 낙읍(洛邑), 남으로는 완(宛)과 엽(葉), 동의 지역은 천하의 강병들과 정예병들이 모여 있는 곳임을 걱정한 고조는 조칙을 내려 한신의 봉국을 태원(太原) 이북으로 옮겨 치소를 진양(晉陽)으로 삼아 호(胡)의 침입을 막도록 했다.

한신이 서장을 황제에게 올려 말했다.

" 저의 봉국의 관할은 곧바로 흉노와의 변경에 접해있습니다. 그 흉노가 변경을 수시로 범하고 있으나 변색(邊塞)의 방어기지와 진양과는 너무 멀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으니 청컨대 저의 치소를 마읍(馬邑)으로 옮겨주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허락했음으로 한신은 곧바로 치소를 마음으로 옮겼다.

그해 가을 흉노의 선우(單于) 모돈(冒頓)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마읍의 한신을 포위했다. 한신은 여러 번 사자를 흉노 진영으로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한나라 조정 역시 군사를 보내 한신을 구원하려고 했다. 이윽고 한나라 조정은 한신이 자기 마음대로 사자를 흉노 진영으로 보내 강화를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가 두 마음을 품고 있지나 않은지 의심하고 사자를 보내 한신을 책망했다. 이에 주살되지나 않을까 걱정한 한신은 임의로 흉노와 결맹한 후에 공동으로 한나라를 공격함으로 해서 공개적으로 한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이와 동시에 마읍성을 흉노왕을 접견하는데 예물로 삼아 헌상하고 흉노에 투항한 후에 군사를 태원(太原)으로 진격시켰다.

고조 7년 기원전 199년 겨울, 황제가 친히 원정길에 올라 한신의 군대를 동제(銅鞮)에서 격파하고 그의 장수 왕희(王喜)의 목을 벴다. 싸움에서 패한 한신은 흉노로 도망쳤다. 그때 백토현(白土縣) 사람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 등이 조나라 왕족의 후손인 조리(趙利)를 찾아 왕으로 세우고 한신이 거느렸던 잔병을 수습하여 한신 및 모돈과 모의하여 한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흉노는 좌우 현왕(賢王)에게 기병 만여 기를 주어 왕황 등과 함께 광무(廣武) 이남에 주둔하다가 진양(晉陽)에서 한군과 회전했다. 한군이 싸움에세 크게 이기고 패주하는 적군의 뒤를 추격하여 이석(離石)에서 다시 무찔렀다.

  흉노가 패잔병을 수습했으나 뒤쫓아온 한군의 전차와 기병에 의해 누번(樓煩)의 서북에서 싸워 다시 패했다. 흉노는 계속 싸움에서 지고 후퇴만을 계속했다. 이에 승세를 탄 한군이 그 뒤를 북쪽 깊숙이 추격하여 모돈이 대곡(代谷)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양에 머물고 있던 황제가 사람을 시켜 모돈의 정황을 살펴보도록 했다. 사자가 돌아와 모돈을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보고했다. 황제가 즉시 평성(平城)으로 나아가 백등(白登)에 이르자 했다 흉노의 기병이 쇄도하여 한군을 포위했다. 황제가 사람을 보내 모돈의 비 연여씨(閼與氏) 씨에게 많은 뇌물을 바쳤다. 연여씨가 모돈에게 말했다.

"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고 해도 우리가 오랫동안 계속 머물 수가 없습니다. 또한 군주끼리는 상대방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는 법입니다."

한군을 포위한지 7일 만에 흉노군이 서서히 포위를 풀고 물러가기 시작했다. 그때 날씨가 변해 하늘에 큰 안개가 끼자 한나라 진영에서 사람을 시켜 왕래하도록 시험해본 결과 흉노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때 호군중위(護軍中尉)로 종군하고 있던 진평(陳平)이 황제에게 말했다.

" 흉노 병사들은 모두 짧은 무기들을 잘 사용합니다. 그래서 청컨대 우리 한나라 군사들에게는 강한 쇠뇌를 모두 소지하게 하여 그 쇠뇌를 힘껏 강하게 잡아당겨 화살 2개 씩을 장전한 후 화살촉 방향을 밖으로 향하게 한 다음 서서히 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라고 명하시기 바랍니다. "

고조 등의 한나라 군사들은 모두 포위망을 무사히 빠져나와 평성(平城)으로 들어가자 마침 한나라 구원병 역시 당도하여 흉노의 기병들은 모두 물러갔다. 그러자 한나라 역시 군사를 파하고 철수했다. 한신은 그 후에도 흉노의 군사들을 이끌고 한나라 변경을 빈번히 공격했다.

한고조 10년 기원전 196년, 한신이 왕황 등을 진희에게 보내 모반하도록 선동했다.

한고조 11년 기원전 195년 봄, 한신이 다시 흉노의 기병을 이끌고 삼합현(參合縣)으로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한나라에 항거하자 한나라 조정이 시장군(柴將軍)을 보내 물리치도록 했다. 시장군이 한신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 관대하고 인자하신 폐하께서는 비록 모반하고 도망친 제후들이 다시 돌아오면 그 즉시 옛날 작위와 봉호를 돌려주고 죽이지 않으셨소. 그일은 장군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일이오. 오늘 한왕 당신이 싸움에 패하여 흉노로 달아난다 해도 그렇게 큰 죄는 아닐 것이니 속히 항복하여 한나라에 돌아오도록 하시오."

한왕이 답장을 보내왔다.

" 폐하께서는 이 사람을 민간의 집에서 찾아내 일으켜 남면하여 왕으로 삼으셨소. 그것은 이 사람으로서는 큰 행운이었소. 그러나 형양(滎陽)에서의 싸움에서 이 사람은 싸우다가 죽지 못하고 항우의 포로가 되어 항복하고 말았소.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죄요. 이윽고 흉노가 마읍을 공격하자 이 사람은 능히 지킬 수 없어 성을 들어 항복하고 말았소. 그것이 두 번째 죄요. 오늘 한나라를 배반한 내가 흉노를 이끌고 황제의 명을 받은 장군과 조만간에 목숨을 걸고 싸우려고 하니 그것이 세 번째 죄인 것이오. 옛날 대부 문종(文種)과 범려(范蠡)가 한 가지의 죄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도망쳐야 했었소. 그런데 이 사람은 폐하께 세 가지나 죄를 지었으면서 오히려 목숨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옛날 떠날 때를 알지 못해 참소를 받아 결국은 오나라에서 목숨을 잃은 오자서(伍子胥)의 전철을 밟게 되는 일이오. 나는 지금 황야와 산속에 숨어 다니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매일 만이들에게 구걸하면서 한나라에 돌아가려는 마음은 마치 앉은뱅이가 일어서기를 잊지 않고, 맹인이 밝은 빛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처럼 간절하오. 그러나 지금의 형세는 결코 내가 한나라로 돌아가고 싶은 내 마음을 허락하지 않고 있소. "

그리고 얼마 후에 양군이 교전에 들어갔다. 시장군은 삼합에 주둔하고 있던 흉노병을 모두 죽이고 한신은 붙잡아 참수했다.

처음에 한신이 흉노에 들어갈 때 그의 태자도 함께 동행 했었다. 그들 일행이 퇴당성(頹當城)에 이르렀을 때 아들을 낳았음으로 이름을 퇴당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난 후에 퇴당이 아들을 낳아 낳아 이름을 영(嬰)이라 했다.

효문제 14년 기원전 166년, 한퇴당과 한영이 그 부중을 데리고 한나라에 귀항했다. 한나라는 퇴당을 궁고후(弓高侯)에, 한영(韓嬰)은 양성후(襄城侯)에 봉했다. 오초(吳楚)가 란을 일으켰을 때, 궁고후의 공은 여러 장수들 중 으뜸이었다. 그의 작위는 손자에게까지 전해졌으나 손자는 후손이 없어 후(侯)의 작위를 잃었다. 한영의 손자는 불경죄를 저질러 후의 작위를 잃었다. 한퇴당의 서출에 한언(韓嫣)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궁궐로 들어가 총애를 받아 귀하게 되어 당대에 이름과 부로 유명하게 되었다. 그 동생 한열(韓說)이 다시 후에 봉해져 여러 차례 장군이 되었고 마침내 안도후(安道侯)가 되었다. 그의 아들 한대(韓代)가 후의 작위를 세습한지 1년여 만에 법에 연좌되어 죽었다. 그리고 다시 1년여 후에 한열의 손자 한증(韓曾)이 용암후(龍嵒侯)에 봉해져 한열의 후사를 이었다.


2. 노관(盧綰)

노관(盧綰)은 풍현(豊縣) 출신으로 한고조와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노관의 부친과 고조의 태상황은 서로 친밀하게 지내다 노관과 고조를 같은 날 낳았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양을 잡고 술을 내와 두 집안을 축하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장상하자 같이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하며 서로 친하게 지냈다. 동네 사람들은 두 집안이 서로 친애하고 아들을 같은 날 낳고, 두 아들이 장성하면서 서로 친하게 지낸다고 하여 다시 양을 잡고 술을 내와 축하했다. 고조가 포의로 지낼 때 노관은 관리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는 고조를 곁에 따라다니며 출입을 같이 했다. 이윽고 고조가 처음 패현(沛縣)에서 기의를 하자 노관은 객의 신분으로 종군하다가 한중에 들어갈 때는 장군이 되어 항상 고조의 곁에 머물려 모셨다. 고조가 한중에서 나와 삼진을 평정하고 다시 동쪽의 항우를 공격할 때는 태위(太尉)의 직위를 갖고 종군하며 고조의 침실을 무상출입하고 음식, 의복, 침구 등을 상으로 하사받았음으로 군신들은 감히 눈을 들어 쳐다보지 못했고 비록 소하나 조참 등의 무리들도 노관을 대할 때는 특별한 예를 갖추어야 했다. 고조와의 친밀함은 조참이나 소하도 노관에게는 감히 이르지 못했다. 고조는 노관을 장안후(長安侯)에 봉했는데 장안은 당시 함양(咸陽)의 속현이었다.

한고조 4년 기원전 202년, 항우를 격파한 고조가 노관을 별장(別將)으로 임명하여 유가(劉賈)와 함께 임강왕(臨江王) 공위(共尉)를 토벌하게 했다. 노관과 유가는 공위를 격파하고 7월 귀환하여 다시 연왕 장도(臧荼) 토벌하기 위해 출전하는 고조를 종군했다. 장도는 노관에게 항복했다. 고조가 천하를 이미 안정시켰을 때는 유씨가 아닌 제후왕으로 7명이 있었다. 그래서 노관을 제후왕으로 세우려고 했으나 군신들의 견해가 어떠한지 우려했다. 그래서 연왕 장도를 사로잡자 즉시 조서를 장군, 대신 및 열후에게 내려 여러 군신들 중 공이 높은 자를 택하여 연왕으로 세우라고 했다. 군신들은 황제가 노관을 왕으로 세우려는 뜻을 짐작하고 모두 말했다.

" 태위 장안후 노관은 폐하께서 천하를 평정하는데 항상 곁에서 수행하며 그 공이 가장 큼으로 연왕으로 세우심이 마땅하다하겠습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허락했다.

동년 8월, 노관을 연왕으로 세웠다. 제후왕들 중 연왕처럼 황제의 총애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가을, 진희가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가 한단(邯鄲)으로 친히 출전하여 진희의 군사를 격파했다. 연왕 노관 역시 진희의 군사를 동북쪽에서 공격했다. 당시 진희는 왕황(王黃) 등을 시켜 흉노에 구원을 청하고 있었다. 연왕 노관 역시 그의 부하 장승(張勝) 등을 보내 진희의 군사를 무찌르는 데 협조를 구했다. 장승이 흉노의 땅에 들어가자 그곳에 미리 도망쳐 와있던 옛날 연왕이었던 장도의 부하들이 장승을 보고 말했다.

" 연나라에 중용된 장군들은 흉노의 일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연나라는 북쪽에 변방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에 나라를 오래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후들이 여러 번 반란을 일으킨 결과 병화가 계속 이어져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연나라를 위해 진희를 급히 멸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진희 등이 없어지게 되면 그 다음 차례는 연나라가 되어 장군 등도 역시 한나라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장군은 어찌하여 연나라에 령을 내려 진희에 대한 공격을 늦추고 흉노와 화친하지 않으십니까? 일을 널리 보시면 그것이야 말로 연나라를 오래 보존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아실 수 있습니다. 즉 한나라를 위급하게 만들면 가히 연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장승이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그 즉시 스스로 말을 바꿔 흉노에게 진희를 도와 연나라를 공격하도록 청했다. 장승이 연나라를 배반하고 흉노에 붙었다고 오해한 연왕이 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장승의 가족들을 멸족시켜야한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장승이 돌아와 자기의 뜻을 자세하게 설명하자 연왕이 기뻐하며 그를 위해 다시 서장을 꾸며 장승의 가족들을 죽은 사람을 대신시켜 죽였다고 거짓으로 고하고 석방시켜 흉노와의 변경에 땅을 주어 살게 했다. 이어서 범제(范齊)를 시켜 진희의 병영으로 보내 가능하면 시간을 지연시켜 오랫동안 연나라 변경에 소요를 일으켜 병란이 끊이지 않도록 했다.

한고조 12년 기원전 195년, 황제가 동쪽의 경포를 토벌할 때 진희는 여전히 군사를 이끌고 대(代) 땅을 근거지로 삼아 항거했다. 진희의 비장(裨將)이 항복하여 연왕 노관이 범제를 시켜 진희와 꾸민 음모를 폭로했다. 고조가 사자를 보내 노관을 소환했으나 노관은 칭병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황제가 병양후(穰侯) 심이기(審食其)와 어사대부 조요(趙堯)를 연왕에게 사자로 보내 연왕의 좌우 사람들을 불러 심문했다. 노관이 더욱 두려워하여 궁문을 닫고 깊은 곳에 숨어서 그의 총신에게 말했다.

" 유씨가 아닌 자로써 왕이 된 자는 오직 장사왕(長沙王)과 나 뿐이다. 작년 봄, 희음후 한신을 멸족시키고 여름에는 팽월을 주살한 일은 모두 여후의 짓이다. 지금 황제게 병이 났으니 모든 일을 여후가 처결할 것인데, 여후라는 여인은 이성의 제후왕과 공신들을 주멸하려고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리고는 병이 들었다고 핑계를 대고 장안에 출두하기를 거부했다. 이윽고 연왕의 주변 인물들이 모두 도망치거나 숨어버렸으나, 그 동안 연왕과 진희 사이에 있었던 일들이 어느 정도 밝혀져 벽양후 심이기가 그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가 더욱 노했다. 다시 흉노가 항복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장승이 도망쳐 흉노에 머물며 연나라의 사신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제가 듣고 말했다.

" 과연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했도다!"

황제는 번쾌(樊噲)를 대장으로 삼아 연나라를 토벌하도록 했다. 연왕 노관이 그의 장수들과 궁인들 및 가솔들 등 수천 기를 이끌고 장성 밑으로 나와 황제의 안부를 묻고 다행히 황제의 병이 낫게 되면 스스로 입조하여 사죄를 청하겠다고 했다. 그해 4월 고조가 죽자 노관은 그의 무리들을 이글고 흉노로 도망쳤다. 흉노는 노관을 동호노왕(東胡盧王)애 임명했다. 동호에 머물던 노관의 무리들은 쉴 사이 없이 만이의 침략과 약탈을 받아 항상 한나라로 돌아올 생각을 갖고 있었다. 노관은 1년여 후에 호 땅에서 죽었다.

고후(高后) 때 노관의 처자가 흉노에서 도망쳐와 한나라에 귀항했다. 그때 고후가 병중에 있었기 떼문에 접견을 하지 못하고 연왕을 위해 경사에 두었던 저사(邸舍)에 머물게 하고 병에 차도가 있게 되면 주연을 베풀어 접견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후가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결국 접견하지 못하고 노관의 처도 역시 병으로 죽고 말았다.

효경제 6년 기원전 144년, 노관의 손자 노타지(盧他之)가 동호왕(東胡王)의 신분으로 투항해와 한나라 조정은 그를 아곡후(亞谷侯)에 봉했다.


3. 진희(秦稀)

진희(秦稀)는 완구현(宛朐縣)출신이다. 그가 언제 고조를 따라 종군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고조 7년 겨울 한왕 신(信)이 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황제가 평성(平城)까지 진격했다고 돌아오면서 진회를 열후에 봉하고 조나라 상국의 신분으로 조와 대(代) 변경의 군사를 그에게 지휘하도록 했다. 그래서 조와 대 변경의 군사들은 모두 진희에게 속하게 되었다.

  진희가 조나라 땅을 통과할 때마다 조나라 상국 주창(周昌)은 진희를 따르는 빈객들이 천여 승의 수레를 이끌고 들어와 한단 성내의 관사를 가득 메우는 광경을 보았다. 진희는 빈객들이나, 포의(布衣) 때 사귄 친구들이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몸을 굽혀 예로써 정중하게 대했다. 진희가 다시 대 땅으로 돌아가자 주창이 경사에 올라와 황제게 접견을 청했다. 황제를 접견한 주창이 진희의 빈객들이 너무 많음을 고하고 그가 군권을 갖고 몇 년 동안 변경에 머무르다가 혹시라도 변란이라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고했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 진희의 빈객으로 대(代)에 머물고 있는 자들이 불법적으로 재물을 모았는지에 대해서 조사하라고 명했다. 그 결과 대부분은 진희와 연좌되어 있었다. 진희가 알고 두려워하여 비밀리에 사람을 왕황과 만구신 등에게 보내 내통했다. 고조 10년 기원전 197년 7월, 태상황이 붕어했음으로 사자를 보내 진희를 불렀으나 진희는 중병에 걸렸다고 하면서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해 9월, 왕황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대왕(代王)의 자리에 올라 대와 조의 땅을 공략했다. 황제가 듣고 진희에 의해 속아 땅을 빼앗긴 대와 조의 관리들의 죄를 사면했다. 친정에 나선 황제가 한단에 이르러 기뻐하며 말했다.' 진희가 남쪽으로 장수(漳水)에 의지하여 한단을 지키지 않았으니 그가 무능한 자라는 것을 알겠도다!"

조나라 상국이 상산(常山)의 수령과 위(尉)를 참수해야한다고 고하며 말했다.

" 상산의 25개 성 중에서 진희의 반군에 20개를 잃었습니다."

황제가 물었다.

" 수령과 위(尉)가 반란에 참가했는가? "

" 그렇지 않습니다."

" 그것은 바로 힘이 부족해서다. "

그리고는 수령과 위를 사면했다. 황제가 주창에게 물었다.

" 조나라에도 물론 장수로 삼을 만한 장사가 있지 않겠는가?"

" 천거할 만한 사람이 4명이 있습니다. "

이윽고 네 사람이 들어와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가 일부러 네 사람을 꾸짖었다.

" 어린 아이놈을 어찌 장수로 삼는단 말인가? "

네 사람이 부끄러운 마음으로 땅에 엎드렸다. 황제가 네 사람을 각각 천호에 봉하고 장군으로 삼았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간했다.

" 그들은 폐하께서 촉과 한으로 들어갈 때나, 초나라를 정벌할 때도 종군하지 않아 그들의 행적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는데 오늘 무슨 공으로 그들을 봉하십니까? "

황제가 대답했다.

" 그대들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진희가 한 번 반기를 들자 한단 이북의 땅은 모두 그의 소유가 되었다. 그래서 내가 급보를 띄어 천하에 군사를 징집했지만 아무도 달려오지 않고 지금은 오로지 한단 성안의 군사들만을 내가 부릴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어찌 네 사람에게 4천 호의 식읍을 아껴 조나라 자제들 사기를 올려주지 못한단 말인가?"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다. 이어서 황제가 물었다.

" 진희의 장수들은 누구누구인가? "

" 왕황과 만구신으로 모두 장사꾼 출신입니다."

" 내가 그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겠다. "

황제는 왕황과 만구신 등에게 각각 천금의 현상금을 걸었다.

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겨울, 한군이 진희의 장수 후창(侯敞)을 곡역(曲逆)에서 참수하고, 다시 요성(聊城)에서 진희의 장수 장춘(張春)과 그 군사 1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 한편 태위 주발(周勃)은 태원과 대 땅을 평정했다. 12월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여 동원(東垣)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때 동원성의 군졸들이 황제게 욕설을 퍼부었다. 얼마 후에 동원성이 항복하자 황제에게 욕을 했던 군졸들은 모두 참수하고 욕을 하지 않지 않은 군졸들은 경형(黥刑)에 처하고 현의 이름을 진정(眞定)으로 바꾸게 했다. 왕황과 만구신 두 사람은 황제가 내걸은 상금을 탐낸 두 사람의 부하들에게 의해 사로잡혔다. 그래서 진희의 군대는 싸움에서 지고 패주했다. 낙양으로 돌아온 황제가 말했다.

" 대 땅은 상산(常山)의 북쪽에 있고 조나라는 곧 태항산의 남쪽에 있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황제는 그의 아들 유항(劉恒)을 대왕(代王)에 봉하여 중도(中都)에 치소를 두게 하고 대 땅과 안문(雁門) 등의 땅을 속하게 했다.

고조 12년 기원전 195년 겨울 번쾌가 군사를 이끌고 진희를 추격하여 영구(靈丘)에서 그의 목을 벴다.

태사공이 말한다.

" 한신과 노관은 원래 덕을 쌓거나 선행을 쌓지 않고 단지 요행히 일시적인 권모술수와 사술을 이용하여 성공했다. 한나라 초기에 천하가 안정되자 봉지를 받아 남면하여 왕을 칭했으나 안으로는 강대한 모습을 보여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밖으로는 만맥(蠻貊)의 무리들에게 원조를 청해 날이 갈수록 황실과 소원해져 스스로 화를 불러들였다. 일이 곤궁한 처지에 빠지자 지혜가 못 미쳐 결국 흉노로 도망쳤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진희(秦稀)는 양(梁)나라 사람이다. 어렸을 때 위공자 무기(無忌)를 추앙하여 그를 본받으려고 했다. 이윽고 그가 변경을 지키는 장수가 되자 평소에 알고 지내던 빈객들을 불러 존대하니 그 명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졌다. 주창(周昌)의 의심을 받아 사단이 일어나 그 화가 자기 몸에 미치게 되었음을 두려워하자 간사한 무리가 접근하여 유혹하니 결국 무도한 길에 빠지게 된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이다. 무릇 생사가 달린 계책의 성패여부는 모두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어찌 그 도리가 심오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한신노관열전 끝>


주석

1) 완구현(宛朐縣)/ 지금의 산동성 하택(荷澤) 서남이다.

2) 곡역(曲逆)/ 지금의 하북성 완현(宛縣) 동남으로 진나라가 설치한 현이다. 후에 진평의 후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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