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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1-03 11:01:228168 
번역등관열전(樊酈縢灌列傳) 35. 번쾌(樊噲)․역상(酈商)․하후영(夏侯嬰)․관영(灌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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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35. 번쾌(樊噲)․역상(酈商)․하후영(夏侯嬰)․관영(灌嬰)


1. 번쾌(樊噲)


무양후(武陽侯) 번쾌는 패(沛) 출신으로 개를 잡아 고기를 파는 일로 생활하다가 고조가 죄를 짓고 피해 다닐 때 함께 숨어 지냈다. 처음에 고조가 풍(豊)1)에서 기병하자 종군하여 패를 함락시켰다. 패공(沛公)이 되 고조는 번쾌를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호릉(胡陵)과 방여(方與)의 싸움에 참전했다가 돌아와 풍(豊)을 지키고 사수(泗水)의 감(監)을 풍의 성 밑에서 격파했다.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 패(霸)를 안정시키고 사수(泗水)의 수장(守將)을 설(薛)의 서쪽에서 무찔렀다. 진나라 장수 사마얼(司馬枿)과 탕(碭)의 서쪽에서 싸워 물리치고 15개의 수급을 베어 그 공으로 국대부(國大夫)2)의 작위를 받았다. 번쾌는 언제나 고조를 측근에서 수행했다. 패공이 장한의 진나라 군사를 복양(濮陽)에서 공격할 때 번쾌는 가장 먼저 성루에 올라 적군의 수급 23개를 베고 열대부(列大夫)3)의 작위를 받았다.

다시 고조를 항상 따라다니다가 성양(城陽) 공성전에 참가하여 가장 먼저 성벽에 올랐다. 호유(戶牖)로 진격하여 삼천(三川) 군수 이유(李由)의 군사를 격파했다. 적군의 수급 16개를 베어 상간작(上間爵)을 하사 받았다. 계속해서 동군의 태수와 도위가 지키는 성무(成武)를 포위한 후 공격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적의 수급 14개를 베고 포로 11명을 사로잡아 오대부에 올랐다. 계속해서 패공을 따라 진군의 주둔지로 진격하여 박남(亳南)으로 나아가 강리(杠里)에서 하간(河間)의 주둔군을 격파하고 개봉(開封) 북쪽에서 조분(趙賁)의 군사를 격파했다. 그 싸움에서 성벽에 가장 먼저 올라 후(侯) 1인, 수급 68개 포로 27인을 잡은 공을 세워 경(卿)의 작위를 받았다. 양웅(楊熊)의 군사를 곡우(穀雨)에서 격파했다. 완릉(宛陵)을 공격할 때는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8개의 수급을 얻고 44명의 포로를 잡아 후에 봉해지고 현성군(賢成君)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장사(長社)와 환원(轘轅)을 공격하고 하수로 나아가는 나루터를 끊었으며, 동쪽으로 나아가 시(屍)에서 진군을 공격하고 남쪽으로 진공하여 주(犨)의 진군을 파했다. 남양(南陽) 태수 의(齮)를 양성(陽城)에서 공격하고 동쪽으로 나아가 완성을 공격할 때는 가장 먼저 성벽에 올랐다. 서쪽의 역(酈)으로 진공하여 적을 격파하고 24개의 수급을 베고 40명의 포로를 잡아 그 공으로 다시 후에 봉해졌다. 무관(武關)을 공격하여 패상(霸上)에 이르러 도위(都尉) 1명을 참하고 수급 10개와 146명의 포로와 함께 항졸 2900명을 얻었다.

항우가 희하(戱河)에 주둔하면서 패공을 공격하려고 하자 패공은 백여 명의 호위기병만을 데리고 항백(項伯)의 주선으로 항우를 면담하고 함곡관의 관문을 닫은 일에 대해 사죄했다. 항우가 군사들을 위해 잔치를 벌려 이윽고 주흥이 도도해졌을 때 패공을 살해하려는 범증(范曾)이 계획에 따라 항장에게 주흥을 돋우게 한다는 핑계로 검무를 추도록 한 후에 기회를 보아 패공을 찔러 죽이도록 명했다. 이에 항백이 자기의 몸으로 패공을 엄호했다. 그때 패공의 곁에는 오로지 장량만이 장막 안으로 따라 들어가고 영채 밖에 머물고 있던 번쾌가 일이 급하게 되었음을 알고 쇠방패를 들고 영채로 달려갔다. 영채를 지키는 군사가 번쾌를 막아섰으나 번쾌는 위병을 제치고 들어가 장하에 섰다. 항우가 보고 번쾌를 보고 누구냐고 묻자 장량이 대답했다.

" 패공의 참승(驂乘) 번쾌입니다."

항우가 듣고 말했다.

" 참으로 장사로다!"

항우가 이어서 번쾌에게 술동이와 돼지다리를 주도록 명했다. 번쾌가 술을 단 번에 마시고 칼을 뽑아 돼지다리 고기를 잘라 모두 먹었다. 항우가 말했다.

" 술을 더 마실 수 있는가? "

번쾌가 대답했다.

" 신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데 어찌 한 동이의 술인들 더 마시지 못하겠습니까? 더욱이 패공께서 먼저 함양에 진입하여 평정한 후에 군사들을 패상에 로숙시키며 대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도하신 대왕께서는 소인들의 참언을 믿으시고 패공을 적대하고 계시니 천하가 흩어지고 대왕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

항우가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 틈을 이용하여 패공이 변소에 간다고 하면서 번쾌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거마와 기병들을 그대로 항우의 영채 안에 두고 자신은 말 한 마리를 내어 올라탄 패공은 번쾌 등의 네 사람만을 도보로 뒤따르게 하고 산속으로 난 지름길을 이용하여 패상의 군영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함양에 입성하여 모조리 파괴하여 폐허로 만든 항우는 패공을 한왕으로 봉했다. 한왕은 번쾌를 열후에 봉하고 호를 임무후(臨武侯)라고 했다. 후에 랑중(郞中)으로 자리를 옮긴 번쾌는 한왕을 따라 한중으로 들어갔다.

한중에서 나온 한왕이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 번쾌는 별도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서현(西縣)의 현승(縣丞)이 이끄는 군사를 백수(白水)의 북쪽에서 공격했다. 옹현(雍縣)의 남쪽에서 옹왕(雍王) 장한(章邯)의 경기병과 경전차 부대를 격파했다. 옹(雍)과 태(斄) 두 현성으로 진격하는 한왕의 본대와 합류한 번쾌는 싸움의 선두에 서서 가장 먼저 적의 성루에 올랐다.


계속해서 옹현(雍縣)과 태현(斄縣) 두 성을 공격할 때도 종군하여 호치(好畤)에 주둔하고 있던 장평(章平)의 군사를 공격하여 가장 먼저 성루에 올라 현령과 현승 2명을 참하고 적군의 수급 11개와 포로 20명을 얻어 가 랑중의 기마(騎馬) 대장으로 직위를 옮겼다. 진나라의 전차부대와 기마부대를 양(壤)의 동쪽에서 격파하고 장군이 되었다. 다시 조나라의 조분(趙賁)), 하미(下郿), 괴리(槐里), 유중(柳中), 함양(咸陽) 등의 공략전에 종군했다.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폐구(廢丘)를 물에 잠기게 했다. 계속된 일련의 전투에서 번쾌의 공이 가장 높았다. 이윽고 한군이 삼진을 평정하고 역양(櫟陽)에 이르자 한왕은 두릉(杜陵)의 번향(樊鄕)을 번쾌에게 식읍으로 주었다. 항우(項羽)와의 싸움에 종군하여 자조(煮棗)를 파괴하고 외황(外黃)에서 왕무(王武)와 정처(程處)의 군사들을 격파했다. 계속 진군하여 노(魯), 하구(瑕丘), 설(薛) 등의 성을 공략했다. 팽성(彭城)에서 한왕을 패주시킨 항우는 번쾌가 점령했던 노(魯)와 양(梁) 땅의 성읍들을 모두 수복해갔다.


팽성의 싸움에서 패하고 다시 형양(滎陽)으로 후퇴한 한왕은 번쾌에게 평음(平陰)의 2천 호를 식읍에 더해주고 장군으로 삼아 광무(廣武)를 지키게 했다. 그리고 1년 후에 항우는 홍구(鴻溝)를 경계로 한왕과 협정을 맺고 동쪽의 팽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한왕이 팽성으로 돌아가는 항우의 뒤를 추격할 때 번쾌는 양하(陽夏)를 함락 하고, 초나라의 장수 주장군(周將軍)과 그 군사 4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항우를 진(陳)에서 포위하여 크게 무찌르고 호릉(胡陵)을 파괴하고 평지로 만들었다.

항우가 이미 죽고 한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용맹하게 싸워 공을 세웠음으로 식읍 8백 호를 더해 주었다. 연왕(燕王) 장도(臧荼)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조를 따라 종군한 번쾌는 장도를 사로잡고 연나라 땅을 평정했다. 초왕 한신(韓信)이 반란을 획책했을 때 번쾌가 따라가 진(陳)에 이르러 한신을 사로잡고 초나라를 평정했다. 황제는 다시 번쾌를 열후의 반열에 세우고 제후들에게 내리는 부절을 주어 대대손손 끊이지 않도록 했다. 무양현(舞陽縣)을 봉읍으로 주어 봉호를 무양후라고 부르게 하고 그 전의 식읍은 모두 폐했다. 장군의 신분으로 고조를 따라 종군하여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킨 한왕 신(信)을 공격했다.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함께 번쾌는 곽인(霍人)애서 운중(雲中)에 이르는 땅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1천 5백호의 식읍을 받았다. 진희(秦稀)와 만구신(曼丘臣)의 군사를 공격하여 양국(襄國)에서 싸우고 백인(柏人)에서 격파할 때 번쾌는 성벽에 가장 먼저 올랐다. 이어서 청하(淸河)에서 상산(常山)에 이르는 모두 27개 현으로부터 항복받아 평정했다. 끝까지 항거한 동원(東垣)은 파괴하여 평지로 만들었다. 그 공으로 번쾌는 좌승상으로 올랐다.

무종(無終)과 광창(廣昌)에서 기무앙(綦毋卬)과 윤반(尹潘)의 군사를 격파하고 계속 대남(代南)에서 진희(秦稀)의 별장(別將)으로 호인(胡人) 출신 왕황(王黃)의 군사를 파하고 삼합(參合)에서 한왕 신(信)의 군사를 공격했다. 번쾌의 부하 장수가 한왕 신을 참하고 진희의 호인(胡人) 기병을 횡곡(橫谷)에서 무찌르고 대(代)의 장군 조기(趙旣)의 목을 베었다. 계속해서 승상 풍량(馮梁), 수장(守將) 손분(孫奮), 대장 왕황(王黃) 등의 장군들과 태복 해복(解福) 등 1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여러 장군들과 함께 대(代) 땅의 73개 향을 평정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연왕 노관(盧綰)이 반하자 그의 승상 저(抵)를 계남(薊南)에서 격파하고 연나라의 18개 현 51개 향을 평정했다. 조정은 그 공으로 식읍 1천 3백 호를 더허여 무양(舞陽)의 식읍을 모두 5천 4백호로 정했다.

그는 살아 생전에 싸움터를 누비면서 176개의 적군의 목을 베었고, 288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와는 별도로 적군을 7번 격파하고 다섯 개의 성을 함락시켰으며, 6개의 군과 52개의 현을 평정하고, 반군의 승상 1명, 장군 12명, 2천 석 이하에서 3백 석 이상의 관리 11명을 사로잡았다.

번쾌는 여후의 여동생 여수(呂嬃)를 부인으로 삼아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항(伉)을 낳았다. 그래서 번쾌는 다른 장수들에 비해 여후(呂后)와의 사이가 가장 친밀했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고조는 병이 매우 심해 사람을 접견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 하루 종일 침상에 누워있으면서 시위(侍衛)에게 어떤 신하도 들이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신하들 중 강후 주발이나 관영 등 어떤 신하들도 감히 들어가 접견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10여 후에 번쾌가 궁문을 밀치고 궁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대신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때 황제는 환관 한 명의 시중을 받으며 침상에 누워있었다. 번쾌 등의 중신들이 일제히 침상 앞으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처음에 폐하께서 저희들을 이끌고 풍패(豊沛)에서 기병하시더 곧바로 천하를 평정할 때는 그렇게도 강건하시더니, 천하를 이미 평정한 지금은 어찌하여 그렇게 피곤해 하십니까? 더욱이 폐하께서 병을 앓으시니 우리 신하들은 가슴이 떨려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또한 우리들을 하찮은 신하들이라고 여기신 폐하께서는 접견을 허락하여 국사를 의논하지 않으시고, 단지 환관 한 사람만을 곁에 두어 우리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계십니다. 어찌하여 옛날 조고(趙高)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황제가 웃으면서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후에 다시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제는 번쾌를 상국(相國)의 신분으로 대신 보내 연왕을 정벌하도록 했다. 그때 고제는 병이 매우 깊었다. 어떤 사람이 번쾌를 모함했다. 여씨들과 결당한 번쾌는 황제가 죽으면 휘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척(戚)부인과 조왕 여의(如意) 및 그 주변 인물들을 모조리 주살할 계획이라고 고변했다. 고제가 믿고 대노하여 진평에게 명하여 강후 주발과 함께 번쾌의 군영으로 가서 강후로 하여금 그의 대장 직을 대신하도록 하고 군중에서 번쾌의 목을 베라고 했다. 여후의 보복을 두려워한 진평이 번쾌를 죽이지 않고 장안으로 압송하여 황제가 직접 처결하도록 처리했다. 번쾌를 함거에 태워 압송한 진평의 일행이 장안에 당도했을 때는 고제가 이미 죽고 난 이후였다. 여후가 번쾌를 석방하고 그의 잡위와 식읍을 돌려주게 했다.

  혜제(惠帝) 6년 기원전 189년, 번쾌가 죽자 시호를 무후(武侯)라 했다. 아들 번항(樊伉)이 그의 작위와 식읍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여항의 모친 여수(呂嬃) 역시 피봉되어 임광후(臨光侯)가 되었다. 고후 집권 시 임광후가 권력을 행사하여 대신들이 모두 두려워했다. 번항이 번쾌의 작위를 이어 받은지 9년 되는 해에 고후가 죽었다. 대신들이 제려(諸呂) 씨들을 주살할 때 행패가 심했던 여수로 인해 번항도 같이 살해되었다. 무양후의 후계는 이로써 몇 개월 동안 끊어졌다가 문제가 즉위하자 다시 번쾌의 서자 불인(巿人)을 무양후에 봉하고 예전의 식읍을 돌려주었다. 불인은 29세의 나이에 죽었다. 시호는 황후(荒侯)다. 불인의 아들 타광(他廣)이 뒤를 이었다. 타광이 작위를 이은 지 6년 되는 해에 집안의 사인이 타광에게 죄를 짓고 쫓겨나자 원망하여 조정에 고변했다.

" 황후(荒侯) 불인은 병이 들어 생산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부인과 그의 동생이 사통하여 타광을 낳았습니다. 타광은 실제로 황후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후작의 지위를 이을 수 없습니다. "

황제가 조칙을 내려 관리에게 조사하라고 명했다. 효경제 6년 기원전 151년, 타광은 후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서인이 되어 그의 봉국은폐해졌다.  

 


2. 곡주후(曲周侯) 역상(酈商)


 곡주후(曲周侯) 역상(酈商)은 고양(高陽) 출신이다. 진승이 기병했을 때 역상은 소년들을 모아 동서로 보내 사람들을 불러 수천 명의 무리를 얻었다. 진나라 성읍을 공략하던 패공이 진류(陳留)에 들어와 머물자 6개 월이 지났을 때 역상은 휘하의 장졸 4천 명을 이끌고 기(岐)에서 패공에게 귀의했다. 고조를 종군하여 장사(長社)를 공략할 때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신성군(新城君)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다시 패공을 따라 구지(緱氏)의 공성전에 참전하고 하진(河津)을 끊었으며 진군(秦軍)을 낙양의 동쪽에서 격파했다. 다시 완(宛)과 양(穰) 지방을 공략하여 17개 현을 평정했다. 별동 부대의 장수가 되어 순관(旬關)을 공격하여 한중(漢中)을 평정했다.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패공을 한왕에 봉하자 한왕은 역상을 다시 신성군에 봉하고 장군의 대열에서 농서(隴西) 도위로 삼았다. 별동부대를 이끌고 북지(北地)와 상군(上郡)을 평정했다. 옹왕 장한(章邯)의 부장이 이끄는 군사를 언지(焉氏)에서 격파하고 주류(周類)의 군사들은 순읍현(栒邑縣)에서 무찔렀으며 이양현(泥陽縣)에서는 소저(蘇駔)의 군사들을 패주시켰다. 한왕은 그 공으로 역상에게 무양현의 6천 호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농서도위의 신분으로 항우를 공격하는 부대에 5개월을 종군하다가 거야(鉅野)로 나아가 종리매(鍾離眛)와 용맹스럽게 싸워 그 공으로 양나라 상국의 인장을 받고 4천 호의 식읍을 더 받았다. 양나라 상국의 신분으로 항우의 군대와 싸움에서 2년 3개월 동안 종군하다가 호릉(胡陵)을 공략했다.

항우가 이미 죽자 한왕은 황제가 되었다. 그해 가을 연왕 장도(臧荼)가 반했음으로 역상이 장군으로 장도 토벌전에 종군하여 용탈(龍脫)에서 싸워 가장 먼저 성벽에 올라 연군의 진영을 함락시키고 계속해서 장도의 군사를 역성 밑에서 격파했다. 연군을 물리친 공로로 우승상에 제수하고 열후의 작위를 내리고 제후의 부절을 주어 세세손손이 끊이지 않도록 하고 탁현(涿縣)의 5천 호를 식읍으로 주어 탁후(涿侯)라는 봉호를 내렸다. 우승상의 신분으로 별동부대를 이끌고 상곡(上谷)을 평정하고 대(代) 땅을 공략했음으로 조나라 상국의 인을 받았다. 우승상과 조나라 상국의 신분으로 별동부대를 이끌고 강후 주발과 함께 대(代), 안문(雁門) 등을 공략하여 대의 승상 정종(程縱)과 수상(守相) 곽동(郭同)과 장군 이하 6백 석의 관리들을 19명을 사로잡았다. 우승상의 신분으로 진희를 공격하여 동원을 함락시켜 평지로 만들었다. 다시 우승상의 신분으로 고제를 따라 경포 토벌전에 종군했다. 경포의 선봉부대와 교전하여 두 진영을 함락시키고 경포군을 격파했다. 이로써 곡주현(曲周縣)의 5천 1백 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예전의 식읍은 폐해졌다. 역상은 평생 싸움터를 전전하면서 모두 3개의 군단을 격파하고, 6개 군과 73개 현의 항복을 받아 평정했으며, 승상, 수상(守相), 대장 각 1명 씩, 소장 2명, 2천석 이사 6백 석 이상의 관리 19명의 목을 얻거나 포로로 잡았다.

역상이 효혜제와 고후를 받들다가 불치의 병을 얻었다. 그의 아들 역기(酈寄)는 자는 황(況)인데 여록(呂祿)과 친분이 깊었다. 고후가 죽자 대신들이 제려(諸呂)씨들을 죽이려고 했으나 여록이 북군의 장군이 되어 군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태위 주발이 북군의 군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역상을 겁박하여 그의 아들 역기로 하여금 여록을 속이도록 시켰다. 여록이 역기의 말을 믿고 군영 밖으로 나왔음으로 그 사이에 태위 주발이 북군의 군영으로 재빨리 들어가 군권을 장악하여 제려씨들을 모두 주살할 수 있었다. 그 해에 역상이 죽었다. 역상의 시호는 경후(景侯)다. 역기가 역상의 작위를 물러 받았다. 세상 사람들은 역기가 친구를 팔아 배신했다고 평했다.


  효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오(吳), 초(楚), 제(齊), 조(趙) 등이 반하자 황제는 역기를 장군으로 삼아 조성을 포위하도록 했드나 10개월을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했다. 제나라를 평정하고 돌아온 유후(兪侯) 란포(欒布)의 지원을 얻은 후에 비로소 조나라 도성을 함락시키고 조나라를 멸했다. 조왕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조나라의 사직은 끊겼다. 효경제 중원(中元) 2년 기원전 148년, 역기가 평원군(平原君)을 부인으로 삼으려고 했다. 경제가 노하여 역기를 관리에게 넘겨 죄를 논하도록 했다4). 관리들은 역기에게 죄가 있다고 판결하여 역상의 작위를 폐했다. 경제가 그 즉시 역상의 다른 아들 견(堅)을 무후(繆侯)에 봉해 역씨들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역견이 죽자 아들 강후 수성(遂成)이 뒤를 이었다. 역견의 시호는 정후(靖侯)다. 수성이 죽자 그의 아들 회후(懷侯) 세종(世宗)이 뒤를 잇고 세종이 죽자 아들 종근(終根)이 작위를 이어 태상(太常)이 되다. 후에 종근은 법을 어겨 후국을 잃었다.


3. 여음후(汝陰侯) 하후영(夏侯嬰)


  여음후(汝陰侯) 하후영(夏侯嬰)은 패(沛) 출신으로 패현의 마방(馬房)의 일을 맡아하는 관리가 되었다. 매일 사자를 보내고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하면서 패현의 사상정(泗上亭)을 지나다니면서 고조와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하면 해가 날이 저물지 않은 날이 없었다. 후에 하후영은 패현의 관리가 되기 위한 시보(試補)가 되었음으로 고조와는 서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고조와 장난을 치다가 하후영이 상처를 입게 되어 어떤 사람이 고조를 고발했다. 고조는 당시 정장(亭長)의 신분이었음으로 관리를 때려 부상을 입히게 되면 중죄에 저촉되었다. 그래서 하후영은 고조에게 맞아 입은 부상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후에 다시 사건이 번복되어 하우영은 고조와의 일로 끌려가 심문을 받으면서 수백 대의 태형을 맞았으나 끝끝내 고조를 연루시키지 않았다.

고조가 처음에 무리들과 함께 패현을 공격할 때 현령의 영사(令史) 신분이었던 하우영은 고조에게로 달려가 전령이 되었다. 패현의 항복을 받아 그날 부로 패공이 된 고조는 하후영을 칠대부(七大夫)의 작위를 내리고 태복(太僕)에 임명했다. 고조를 따라가 호릉(胡陵) 공략전에 참가하여 소하(蕭何)와 함께 이름이 평(平)인 사수감(泗水監)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평이 호릉을 들어 항복했음으로 하후영은 오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다시 종군하여 탕(碭)의 동쪽에 주둔하고 있던 진나라 군사를 공격하는 싸움에서 제양(濟陽)을 공략하고 호유(戶牖)를 함락시켰으며 삼천(三川) 군수 이유(李由)의 군사를 옹구(雍丘)에서 격파할 때 하우영은 병거를 몰고 선두에서 서서 분전했음으로 집백(執帛)의 작위를 받았다. 항상 태복의 신분으로 패공의 수레를 몰았고 패공이 동아(東阿)와 복양(濮陽) 일대에서 장한을 공격할 때 병거를 질풍처럼 휘몰아 맹공을 가하여 격파했음으로 고조는 그에게 집규(執珪)의 작위를 내렸다.

다시 고조의 수레를 몰아 개봉(開封)에 주둔하고 있떤 조분(趙賁) 과 곡우(曲遇)의 양웅(楊熊)의 군대를 공격하여 포로 68명과 항복한 군사 850명을 얻고 한 상자에 이르는 인(印)을 흭득했다. 다시 패공의 수레를 몰아 낙양의 동쪽에 주군하고 있던 진나라 군사들을 병거를 질풍처럼 몰아 공격하여 세운 공으로 작봉을 받아 등공(滕公)에 봉해졌다. 다시 패공의 수레를 몰아 남양을 공격하고, 계속해서 남전과 지양(芷陽)에서 싸울 때 병거를 번개같이 몰아 패상(覇上)에 이르렀다. 뒤늦게 관중으로 들어은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패공을 한왕에 봉했다. 한왕은 하우영에게 열후의 작위를 하사하여 소평후(昭平侯)라는 봉호를 내렸다. 다시 태복이 되어 한왕을 따라 촉과 한중으로 들어갔다.


  한중에서 돌아와 삼진을 평정하고 여세를 몰아 항우를 칠 때 종군했다. 이윽고 한군이 팽성에 이르자 반격에 나선 항우는 한군을 대파했다. 싸움에 패한 한왕은 형세가 불리하여 병거를 타고 전속력을 다해 달아나다가 효혜제(孝惠帝)와 노원공주(魯元公主)가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본 한왕이 두 아이를 자기의 수레에 태웠다. 사태가 매우 위급하게 되고 더욱이 은 피로에 지친 상태에서 추격군에 의해 포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한왕은 두 아이를 몇 번이나 발로 차서 수레 밖으로 떨어뜨려 버리려고 했다. 그때 한왕이 탄 수레를 몰고 있던 하후영은 그때마다 두 아이를 거둬 다시 태우고 서서히 달리다가 두 아이가 자기 목에 매달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수레를 전속력으로 몰았다. 한왕이 대노하여 10여 차례나 하후영을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결국은 위험한 상태에서 탈출하여 호혜제와 노원공주를 안전하게 풍읍(豊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한왕이 이윽고 형양에 당도하자 패잔병을 수습하여 사기를 다시 진작시킨 후에 하후영에게 기양(祁陽)5)을 식읍으로 주었다. 하후영은 다시 한왕이 타는 수레의 어자가 되어 항우위 뒤를 추격하여 진현(陳縣)에 이르러 초나라를 평정하고 계속해서 노(魯)나라까지 진격했음으로 그 공으로 자씨(玆氏)의 땅을 받아 식읍에 더했다.

한왕이 이윽고 항우를 멸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해 가을 연왕 장도(臧荼)가 반하자 하후영은 태복(太僕)의 직위로 장도의 토벌전에 종군했다. 다음 해, 하후영은 황제를 따라 진(陳)으로 나아가 초왕 한신(韓信)을 포로로 잡았다.


  다시 식읍을 여음(汝陰)으로 받아 그 부절을 대대손손 끊이지 않고 잇도록 했다. 다시 태복의 신분으로 대(代) 땅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토벌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무천(武泉), 운중(雲中)에 이르러 천 호의 땅을 받아 그의 식읍에 더했다. 한왕 신(信)이 반란을 일으키자 종군하여 진양(晉陽) 부군에 주둔하고 있던 흉노의 기병군단을 크게 무찔렀다. 흉노의 기병을 추격하여 평성(平城)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흉노에게 포위 당해 7일 동안 외부와 통하지 못했다.

고조가 연지(閼氏)에게 후한 재물을 보내 모돈(冒頓)으로 하여금 포위망의 일각을 풀게 했다. 고조는 빨리 달려 포위망을 벗어나고자 했으나 하후영은 오히려 고집스럽게 천천히 달리면서 군사들에게 쇠뇌에 화살을 힘껏 장전하여 외부로 향하게 하여 결국은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공으로 하후영은 다시 세양(細陽)의 천 호를 받아 식읍에 더했다. 다시 태복의 자격으로 출전하여 흉노의 기병을 구주산(句注山) 북쪽에서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다. 계속해서 평성의 남쪽을 공격하여 세 번이나 적의 진영을 유린하여 그 공적이 매우 컸다. 그래서 그가 빼앗은 땅 중에서 5백 호를 주어 식읍에 더하게 했다. 다시 태복의 신분으로 진희(秦稀)와 경포(黥布)의 반란을 토벌하는 싸움에 종군하여 적진을 함락시켜 적군을 무찔렀음으로 천 호의 땅을 받아 식읍에 더했다. 마침내 여음(汝陰)의 6천 9백 호를 식읍으로 확정하고 나머지 땅은 조정에 환수되었다.

하후영은 처음에 패에서 기병할 때부터 고조가 죽을 때까지 항상 태복의 신분이었다. 다시 효혜제와 여후는 하후영으로 인해 호혜와 노원공주가 하읍(下邑) 지간에서 처한 위험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해서 하후영에게 도성의 북쪽에서 가장 좋은 저택을 하사하면서 “ 서로 친근하게 지냅시다. ”라고 말해 전례없는 존경심을 표했다.

효혜제가 죽자 하후영은 여전히 태복의 신분으로 고후를 모셨다. 고후가 죽자 대왕이 황제가 되자 역시 하후영은 태복이 되어 동모후(東牟侯) 유흥거(劉興居)와 함께 궁궐을 청소하는 일을 맡아 소제(少帝)를 폐한 후 천자의 법가를 몰고 대왕의 저택으로 가서 영접하여 대신들과 함께 효문제를 황제로 옹립했다. 하후영의 계속 태복으로 효문제를 모시다가 8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이후(夷侯) 하후조(夏侯竈)가 그의 작위를 이었다. 하후조는 7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공후(共侯) 하후사(夏侯賜)가 뒤를 이어 31년 동안 후의 자리에 있다가 죽었다. 하후사의 아들 하후파(夏侯頗)는 평양공주(平陽公主)6)와 결혼했다. 19년 후인 원정 2년(한무제 26년) 기원전115년에 하후파는 그의 부친의 비녀와 간통하는 죄를 범하여 죄에 저촉되자 자살하고 후국은 몰수되었다.

  

4.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은 수양(睢陽)의 비단장사 출신이다. 고조가 패공의 신분으로 진나라 성읍을 공략하러 원정다니다가 옹구(雍丘)에 이르렀다. 그때 진나라의 장수 장한(章邯)은 초나라의 항량을 공격하여 패사시켰음으로 패공은 이끌고 탕현(碭縣)으로 철수했다. 그때 관영은 중연(中涓)7)의 신분으로 종군하여 동군(東郡)의 군위(郡尉)8)를 성무(成武)에서 격파하고 계속해서 강리(杠里)에서 진나라 군사와 싸울 때는 용전분투하여 칠대부(七大夫)의 작위를 받았다. 진나라 군사 토벌전에 종군하여 박남(亳南), 개봉(開封), 곡우(曲遇)의 싸움에서 용맹스럽게 싸워 집백(執帛)의 작위를 받고 선릉군(宣陵郡)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패공을 따라 양무(陽武) 이서에서 낙양(洛陽)에 이르는 땅을 공략하고 시북(屍北)에서 진군을 무찔러 북쪽으로는 하진(河津)으로 향하는 길을 끊었다. 계속해서 남쪽으로 나아가 남양(南陽) 군수 기(齮)의 군사를 양성(陽城)의 동쪽에서 격파하여 마침내 남양군을 평정했다. 서쪽으로 진군하여 무관(武關)으로 들어가 남전(藍田)에서 진나라 군사와 싸울 때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싸우고 패상(霸上)에 이르렀다. 그 공으로 집규(執珪)의 작위와 문창군(文昌郡)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한고조 원년 기원전 206년, 패공이 한왕이 되자 하후영은 낭중(郎中)의 신분으로 한중(漢中)으로 들어갔다. 그해 10월 중알자(中謁者)9)가 되었다. 한중에서 나와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 종군하여 역양(櫟陽)을 함락시키고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의 항복을 받았다. 다시 옹왕(雍王) 장한(章邯)의 도읍 폐구(廢丘)를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동쪽으로 진군하는 한왕을 따라 임진관(臨晉關)에서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의 항복을 받고 그 땅을 평정했다. 항우의 장수 용저(龍且)를 공격하고 위나라 상국 항타(項他)의 군사와 정도(定陶)에서 싸울 때 선두에 서서 용맹하게 싸워 무찔렀다. 그 공으로 관영은 열후의 작위와 문창후(文昌侯)의 봉호 및 두평향(杜平鄕)을 식읍으로 받았다.

  다시 중알자의 신분으로 한왕을 따라 종군하여 탕현(碭縣)을 항복시키고 팽성(彭城)에 입성했다. 항우의 반격을 받은 한왕의 군대는 수수(睢水) 강안에서 대패했다. 한왕이 서쪽으로 패주할 때 관영도 함께 따라가 옹구(雍丘)에 주둔하며 진영를 정비했다. 왕무(王武)와 위공(魏公) 신도(申徒) 등이 반하자 한왕을 따라 종군하여 진압했다. 외황(外黃)을 함락시키고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패잔병을 수숩하여 형양에 주둔했다. 초나라의 수많은 기병이 형양을 향해 공격해오자 한왕은 군중에서 선발하여 기마부대 대장에 임명하려고 했다. 그때 모든 사람이 진나라 기마부대 출신이며 교위(校尉)의 직급에 있는 중천(重泉) 출신 이필(李必)과 낙갑(駱甲)이 기마전에 능하여 마땅히 기병대장을 삼을만하다고 천거했다. 한왕이 두 사람을 기병부대 대장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두 사람은 한왕에게 말했다.

" 신들은 원래 진나라 백성이라 군사들이 신을 믿고 따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대왕의 좌우에 있는 사람으로 기마전에 능한 사람을 대장으로 삼으시어 저희들로 하여금 보좌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

관영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여 힘껏 싸웠음을 감안한 한왕은 관영을 중대부(中大夫)에 임명하고 교위 이필과 낙갑에게 보좌하도록 명했다. 관영은 랑중(郞中) 기병(騎兵)을 이끌고 초나라의 기병부대와 형양(滎陽)의 동쪽에서 싸워 크게 격파했다.

다시 한왕의 명을 받아 기병부대로 이루어진 별동대를 이끌고 초군의 후위를 돌아 양무(陽武)에서 양읍(襄邑)에 이르는 초나라의 양도를 끊었다. 노현(魯縣)에서 항우의 장수 항관(項冠)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관영의 부하 장수는 우사마(右司馬)와 기병대장 각각 1명씩을 참수했다. 연(燕)의 서쪽에서 자공(柘公) 왕무(王武)의 반란군을 공격하여 휘하의 장수가 루번의 장수 5명과 연윤 1명을 참수했다. 왕무의 별장 환영(桓嬰)을 백마(白馬)에서 무찌르고 부하 장수는 왕무군의 도위(都尉) 한 명을 목베었다. 기병대를 이끌고 하수의 남쪽으로 도하하여 한왕을 낙양(洛陽)으로 안전하게 호송한 후에 한왕의 사신이 되어 북쪽의 한단으로 가서 상국 한신의 군대를 영접했다. 다시 오창(敖倉)에 이르자 한왕은 관영을 어사대부로 자리를 옮겼다.

한왕 3년 기원전 203년, 열후의 대열에 올라 두평향(杜平鄕)을 식읍으로 받았다. 어사대부의 신분으로 왕명을 받아 낭중기병의 장수로 상국 한신의 군대에 예속되어 참가한 동정(東征)에 제군(齊軍)을 역하(曆下)에서 격파했으며 부하 장수는 거기장군(車騎將軍) 화무상(華과 장수 및 군리 46명의 목을 베었다.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여 임치성 전투에서 제나라 수상(守相) 전광(田光)을 포로로 잡았으며 제나라 상국 전횡(田橫)을 영(嬴)과 박(博)까지 추격하여 그의 기병대를 무찔르고 그의 부하 장수는 제나라의 기병대 장수 한 명을 참수하고 4명을 생포했다. 영(嬴)과 박(博)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제나라 장군 전흡(田吸)의 군대를 천승현(千乘縣)에서 격파하고 부하장수가 전흡의 목을 벴다. 한신의 군대가 동쪽으로 진격하여 초나라 장수 용저(龍且)와 유공(留公) 선(旋)을 고밀(高密)에서 공격할 때 관영은 기병대장으로 종군하여 초군의 우사마와 연윤(連尹) 각 한 명과 루번장수 10명을 포로로 잡고 아장 주란(周蘭)은 자신이 직접 사로잡았다.

제나라 땅은 이미 평정되어 한신이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오르자 하후영은 별장(別將)이 되어 초나라 장수 공고(公杲)의 군대를 노(魯)의 북쪽에서 대파하고 계속해서 남하하여 설군(薛郡)의 군수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여 친히 기병대장 한 사람을 포로로 잡았다. 계속해서 진군하여 부양(傅陽)을 공격하고 하상(下相)에 이르러 그 이동의 남동(南僮), 취려(取慮), 서(徐) 등의 땅을 공략했다.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회수를 건너서 그 남안의 성읍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광릉(光陵)에 이르렀다. 항우가 항성(項聲), 설공(薛公), 담공(郯公) 등을 시켜 회수 이북의 땅을 다시 수복했다. 이에 관영은 다시 회수를 건너 북상하여 하비(下邳)에서 항성과 담공의 군대를 무찌르고 설공의 목을 벴다. 이어서 하비성을 함락시킨 후에 초나라의 기병대를 평양(平陽)10)에서 격파하고 팽성(彭城)에 입성하여 초나라의 주국(柱國) 항타(項陀)를 사로잡았으며 유(留), 설(薛), 패(沛), 찬(酇), 소(蕭), 상(相) 등의 땅을 평정했다. 고현(苦縣)과 초현(譙縣) 등을 공격하고 초나라의 아장(亞將) 주란(周蘭)을 재차 사로잡아 이향(頤鄕)11)에서 한왕의 군대에 합류하여 항우를 공격하여 진성(陳城)에서 격파하고 휘하의 장수와 군사들이 초나라의 누번장군 2명의 목을 베고 기병대장 8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공으로 2천 5백 호를 받아 식읍에 더했다.

항우가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패하고 달아나자 한왕의 명을 받은 관영은 어사대부의 신분으로 별동대를 이끌고 그 뒤를 추격하여 동성(東城)12)에서 따라잡아 소속의 장수 5명이 함께 항우의 몸을 베어 그들 모두는 열후의 작위를 받았다. 초나라 군대의 좌우 사마 각 한 명 씩과 1만 2천 명에 달하는 군사들과 그 장수들 및 군리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동성과 역양(曆陽)을 함락시키고 강수(江水)를 도하하여 오군(吳郡)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태수는 포로로 잡아 오군(吳郡), 예장군(豫章郡), 회계군(會稽郡) 등의 땅을 평정했다. 회북으로 다시 돌아와 모두 52개 현을 평정했다.

이윽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한왕은 관영에게 3천 호의 식읍을 더 하사했다. 그해 가을, 거기장군(車騎將軍)의 신분으로 연왕 장도(臧荼)의 군사를 공격하여 무찔렀다. 다음 해, 한왕을 수행하여 진(陳) 땅으로 출행했다가 초왕 한신(韓信)을 포로로 잡았다. 장안으로 돌아오자 황제는 관영에게 부절을 주어 대대손손 끊이지 않고 물려주도록 했다. 영음(潁陰)의 2천 5백 호를 식읍으로 주고 영음후(潁陰侯)라고 부르게 했다.

   거기장군의 신분으로 대(代) 땅에서 반란을 일으킨 한왕 신(信)의 군대를 공격하여 마읍(馬邑)에 이르러 조명을 받아 루번(樓煩) 이북 6개 현의 항복을 받았다. 대나라의 좌상(左相)의 목을 베고 무천(武泉)의 북쪽에서 흉노의 기병을 격파했다. 다시 한왕 신이 거느린 흉노의 기병을 진양(晉陽)에서 공격하여 무찌르고 휘하의 장졸이 흉노족의 일파인 백제(白題)의 장군 1명을 참살했다. 황제의 명을 받들어 연(燕), 조(趙), 제(齊), 양(梁) 및 초(楚)의 전거와 기마를 이끌고 출격하여 사석(硰石)에서 무찔렀다. 계속 진군하여 평성(平城)에 이르러 흉노의 기병에게 포위당했다가 고조를 따라 탈출하여 동원(東垣)으로 돌아왔다.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의 명을 받들어 별동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진희의 승상 후창의 군대를 곡역(曲逆)에서 격파하고 후창과 그의 장수 5명을 참살한 후에 계속 진군하여 곡역, 노노(盧奴), 상곡양(上曲陽), 안국(安國), 안평(安平) 등의 항복을 받았다. 동원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어 먼저 출정하여 경포의 별장을 상(相)13)에서 격파하고 아장(亞將)과 루번(樓煩)14)의 장수 3인을 참했다. 계속 진격하여 경포의 상주국(上柱國)15)과 대사마(大司馬) 군을 무찌르고 경포의 별장 비(肥)를 주살했다. 또한 관영은 친히 경포의 좌사마 한 명을 사로잡고 휘하의 장수와 병사들은 경포의 소장 10명을 참한 후에 계속 그의 뒤를 추격하여 북쪽의 회수 강안에 이르렀다. 그 공로로 관영은 식읍 2천 5백 호를 받았다.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귀경한 고제는 관영에게 조칙을 태려 영음(潁陰)의 5천 호를 식읍으로 하사하고 그 전의 식읍은 모두 폐했다. 그는 종군 중에 2천 석의 고위관리 2명을 사로잡았으며 별동대를 이끌고 16개의 부대를 격파했으며 46개 성을 항복시키고, 1개의 제후국, 2개의 군, 52개의 현을 평정했다. 장군 2사람과 상주국과 재상 각 1 사람씩과 2천석 관리 10명을 사로잡았다.

  경포를 무찌른 관영이 돌아왔을 때는 고제가 죽었기 때문에 열후의 신분으로 혜제(惠帝)와 여후(呂后)를 모셨다. 태후가 죽자 조왕(趙王) 여록(呂祿) 등이 스스로 장군이 되어 장안의 군사를 장악하여 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제애왕(齊哀王)이 듣고 군사를 일으켜 서진하여 부당하게 제후왕이 된 자들을 주살하려고 했다. 상장군 여록 등이 알고 관영을 대장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막도록 했다. 관영의 군대가 형양(滎陽)에 이르자 강후 주발 등과 모의하여 진격을 멈춰 주둔하며 제왕에게 제려(諸呂) 씨들을 주살할 계획임을 알렸다. 제나라 군사들이 진격을 멈추고 사태를 관망했다. 얼마 후에 주발 등이 제려씨들을 주살했음으로 제군은 자기나라로 돌아가고 관영은 형양의 군사를 파하고 장안으로 철수해서 주발, 진평 등과 상의하여 대왕(代王)을 효문제로 옹립했다. 효문제는 관영에게 3천 호의 식읍을 더하고 황금 천근을 하사했으며 태위(太尉)에 제수했다.

3년, 강후 주발이 상국의 자리에서 면직되자 관영이 대신 승상이 되고 태위의 관직을 내놓았다. 그 해에 흉노가 북지군(北地郡)과 상군(上郡)에 대거 침입해왔다. 황제가 승상에게 명을 내려 8만 5천의 기병을 이끌고 출전하여 흉노를 막도록 했다. 관영이 출동하자 흉노는 물러갔다. 제북왕 유흥거(劉興居)16)가 반하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군사를 이끌고 장안으로 철수토록 했다. 그리고 1년 후에 승상에 재직 중에 죽었다. 시호는 의후(懿侯)다. 그의 후의 작위를 이은 아들 평후(平侯) 관아(灌阿)는 28년 후에 죽었다. 관아의 아들 관강(灌彊) 후의 작위를 잇고 13년 만에 관강이 죄를 지어 2세 만에 관영의 대가 끊기게 되었다. 원광 3년 (한무제 9년), 기원전 132년, 천자가 관영의 손자 관현(灌賢)을 임여후(臨汝侯)에 봉햐여 관씨들의 후사를 잇도록 했다. 그리고 8년 후에 관현은 뇌물사건에 연루되어 죄를 받아 후국이 몰수당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옛날 풍패(豊沛)를 들렸을 때 나는 그곳의 부로들에게 물어 소하(蕭何), 조참(曹參), 번쾌(樊噲), 등공(滕公) 등의 집을 찾아가 봤다. 과연 그들이 평소에 행했던 행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고기를 자르는 칼을 들고 개고기를 팔고 비단 장사를 할 때 어찌 그들이 천리마의 꼬리를 잡아 그 이름을 한왕조에 올리고 그 덕을 자손들에게 전할 줄 알았겠는가? 나와 교유관계가 있었던 번타광(樊他廣)은 고조의 공신들이 흥기했을 때의 모습은 이와 같았다고 말했다.


< 열전35 끝 >


주석

1)풍(豊)/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풍현(豊縣)으로 진나라 때는 패현(沛縣)에 속한 조그만 고을이었다.

2)국대부(國大夫)/ 진나라가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하기 위해 제정했던 20등작 중 6번 째 등급으로 관대부(官大夫)라고도 한다.

3)열대부(列大夫)/ 진한의 20등작 중 7번 째에 해당하는 작위다. 칠대부(七大夫) 혹은 공대부(公大夫)라고도 한다.

4) 평원군은 경제의 황후 왕태후의 모친 장아의 봉호다. 즉 경제의 장모다. 신하의 신분으로 황제의 장모를 부인으로 삼으려고 한 행위는 불경죄에 해당한다.

5)기양(祁阳)/ 소재 미상이다.

6)평양공주(平陽公主)

①한경제의 장녀이고 한무제의 누이다. 원래는 양신장공주(陽信長公主)라고 불렀으나 조참(曹參)의 증손 평양이후(平陽夷侯) 조시(曹時)에게 출가하여 평양공주라고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일찍이 무제에게 이연년(李延年)을 천거하고 다시 무제에게 원래 자기 집에서 노래부르는 가희였던 위자부(衛子夫)를 무제에게 보여 후에 황후가 되게 하였다. 조시가 일찍 죽어 과부가 되었다가 무제의 조칙으로 대장군 위청(衛靑)에게 개가했다.

②하후영의 증손 하후파(夏侯頗)에게 출가한 서한 황실의 공주다. 한서에는 그 외가의 성이 손씨 였음으로 손공주(孫公主)라 했다. 일설에는 평양(平陽) 두 글자는 오자로 하후파에게 시집간 황녀는 평양공주가 아니라고 했다.

7)중연(中涓)/ 황제의 곁에서 수발을 드는 근신을 말한다.

8)군위(郡尉)/ 진나라가 설치한 지방관으로써 태수를 보좌하여 군사의 일을 책임졌다. 한경제 때 도위(都尉)로 명칭이 바뀌었다. 봉록은 2천 석이다.

9)중알자(中謁者)/ 황제 신변에 머물면서 군신들의 접견을 주선하거나 황제의 명을 전달하는 근신의 장이다.

10)평양(平陽)/ 지금의 산동성 추현(鄒縣) 부근이다.

11)이향(頤鄕)/ 지금의 하남성 녹현(鹿縣) 동남이다.

12)동성(東城)/ 지금의 안휘성 정원현(定遠縣) 동남이다.

13)상(相)/ 지금의 안휘성 회북시(淮北市) 서쪽에 있었던 고을로 서한 때 상현(相縣)을 말한다.

14)루번(樓煩)

① 한초쟁패 시, 한왕 유방의 부장(部將)으로 활의 명수였다. 한초가 형양(滎陽)과 성고(成皐)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항우가 유방을 향해 진영에서 나와 싸우자고 도전하기 위해 세 차례라나 한나라 진영으로 보낸 장사를 모두 활로 쏘아 죽였다. 항우가 노하여 친히 갑옷으로 무장한 후에 진영을 나와 한군 진영을 향해 소리쳐 도전했다. 항우의 위용을 본 누번은 감히 활을 쏘지 못하고 한나라 진영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➁춘추전국 시대 때, 지금의 하북성 북서, 산서상 북부, 내몽고자치구 등에 거주하며 진(晉)과 연(燕), 조(趙) 등의 국가와 국경을 접했던 이민족 국가다. 조무령왕(王) 때, 임호(林胡)와 함께 루번을 점령하여 조나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진나라 말, 진나라가 몽염을 시켜 흉노를 대대적으로 정벌하자 거주지를 하남(河南 : 하투(河套) 즉 지금의 내몽고 오로도스 지역)으로 옮겼다. 한무제 원삭(元朔) 2년, 기원전 127년 대장군 위청(衛靑)에 의해 하투지역에서 쫓겨났다.

③항우본기에 ' 한나라 진영에 활을 잘 쏘는 루번이라는 궁수들이 있다.'라는 기사가 있다. 고염무에 의하면 한초전쟁 때 루번인으로 조직된 별도의 부대를 한(漢), 초(楚), 경포(黥布) 등의 진영에서 운영했다고 했다. 그들은 기사(騎射)에 능했음으로 기사에 능한 군가를 루번이라는 일반명칭으로 사용했다. 루번이라고 해서 모두 루번인 출신의 군사라는 뜻은 아니었다. .

15)상주국(上柱國)/ 전국시대 때 초나라의 관직명. 줄여서 주국(柱國)이라고 하며 국가를 버티고 있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원래 초나라의 도성을 방어하는 임무를 관장하는 벼슬이었으나 후에 초나라 무관의 최고관직이 되어 그 지위는 영윤(令尹) 다음이었다. 경포가 지배하고 있던 지역이 초나라 지역이었음으로 초나라의 옛날 관제를 채용한 것이다.

16)유흥거(劉興居)/ 한고조의 서장자 유비(劉肥)의 아들이다. 고후 6년 기원전 182년, 동모후(東牟侯)에 봉해졌다. 고후가 죽자 여려 대신들과 함께 대왕 유항(劉恒)을 황제로 옹립했다. 문제 2년 기원전 178년, 제북왕(齊北王)에 봉해졌다. 문제 3년 문제가 북쪽의 흉노를 치기 위해 군사를 보낸 틈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장군 시무(柴武)와의 싸움에서 패해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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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23-2.추양

梁苑(양원) 王昌齡(唐) 양원(梁園) 가을 대나무엔 옛적의 안개이건만 梁園秋竹古時煙(양원추죽고시연), 성밖 바람은 슬피 울고
양승국 06-05-16
[일반] 대원열전(大宛列傳)63

열전63. 대원(大宛)1) 대원의 사적은 장건(張騫)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장건은 한중(漢中) 출신이다. 건원(建元) 연간에 랑(郞)이 되었다. 그때 천
운영자 12-08-27
[일반] 동월열전(東越列傳) 54

열전54. 동월(東越) 1300. 吳之叛逆(오지반역), 오나라가 반역을 일으키자 1301. 甌人斬濞(와인참비), 구인들은 오왕 비의
운영자 10-08-25
[일반]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43

열전43. 萬石張叔(만석장숙)   만석군(萬石君)의 이름은 분(奮)으로 그의 부친은 조나라 사람이다. 석은 석(石)씨다. 조나라가 망하자 온(溫)1)
운영자 10-06-15
[일반]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15.전문(田文)

열전15. 맹상군(孟嘗君) 1116. 好客喜士(호객희사),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은 문객과 선비를 좋아하여 1117. 士歸于薛(사귀우설), 천
양승국 04-05-12
[일반]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14

열전14. 孟子․荀卿(맹자순경) 태사공이 말한다. " 내가 일찍이 맹자(孟子)를 읽을 때마다 양혜왕(梁惠王)이 '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이
양승국 05-01-14
[일반] 몽염열전(蒙恬列傳) 26

열전28. 몽염(蒙恬)   몽영의 선조는 제나라 사람이다. 몽염의 조부 몽오(蒙驁)가 제나라로부터 진나라에 들어와 소양왕(昭襄王)을 모
운영자 07-07-03
[일반]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13

열전13. 백기․왕전(白起王翦) 1104. 南拔鄢郢(남발언영),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도성 영도(郢都)를 함락시키고
양승국 04-12-15
[일반] 백이열전(伯夷列傳) 1

伯夷列傳(백이열전) 열전1 무릇 학자들이 공부하는 서책은 비록 광범위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믿을 수 있는 기록은 단지 『육경(六經)』①일
양승국 04-05-12
[일반] 번역등관열전(樊酈縢灌列傳) 35. 번쾌(樊噲)․역상(酈…

열전35. 번쾌(樊噲)․역상(酈商)․하후영(夏侯嬰)․관영(灌嬰) 1. 번쾌(樊噲) 무양후(武陽侯)
운영자 08-11-03
[일반] 범수열전(范睢列傳) 19-1 범수

열전19-1. 범수(范睢)   범수는 위(魏)나라 사람으로 자는 숙(叔)이다. 제후들에게 유세하여 위왕(魏王)을 받들려고 했으나 집안이 가난하
양승국 05-11-29
[일반] 범수열전(范睢列傳) 19-2.채택(蔡澤)

채택(蔡澤)   채택(蔡澤)은 연나라 사람이다. 유세술을 배워 크고 작은 제후들을 수 없이 찾아다니며 벼슬을 구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양승국 05-12-09
[일반] 부근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 38. 傅寬(부관)‧靳歙(근…

열전38. 傅寬(부관)‧靳歙(근흡)‧周緤(주설) 1. 부관(傅寬) 양릉후(陽陵侯) 부관(傅寬)은 위(魏)나라 오대부(五大
운영자 09-07-09
[일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57

열전57. 사마상여(司馬相如) 1313. <子虛>之事(<자허>지사) <자허부(子虛賦)>에 실린 일과 1314. <大人>賦說(<
운영자 10-08-27
[일반] 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4

사마양저(司馬穰苴) 열전4. 사마양저(司馬穰苴)는 전완(田完)①의 후예다. 제경공(齊景公)② 때에 진(晉)나라가 아(阿)③와 견(甄)④
양승국 04-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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