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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2-17 14:49:584119 
김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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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9대 왕 김춘추(金春秋, 604∼661, 재위 654~661)는 진지왕의 손자이며 이찬 용춘(龍春:용수, 龍樹라고도 함)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고, 부인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 곧 나중의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관직으로는 선덕여왕 때부터 두드러져, 죽음을 무릅쓰고 고구려와 당에 외교임무를 띠고 다녀왔으며, 자신의 사위가 맡고 있던 대야성이 백제군에 떨어졌을 때, 더욱이 사위와 딸이 죽임을 당하자 백제 정벌의 비원을 품는다.


진골 신분의 불리함을 딛고,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중망을 입던 상대등 알천(閼川)이 사양하는 데다, 대세가 김유신을 등에 업은 춘추에게 기울어져 51세의 나이로 등극하였다. 재위 7년째인 660년,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백제 정벌의 비원을 이룩하였으나, 고구려까지 통합하는 삼국통일의 대업은 기틀을 잡는 선에서 아들인 문무왕에게 물려주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무열왕이라는 시호에 더하여 신라 왕실에서 유일하게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역사의 주인공 아닌 주인공

















일연이 쓰는 김춘추의 일대기는 참으로 특이하다. [삼국유사] ‘기이’ 편의 ‘태종 춘추공’ 조는 그의 일생을 그린 것이지만, 뜻밖에도 이 조 전체에 춘추는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 ─ 이것이 일연이 보는 춘추의 생애이다. ‘기이’ 편에서도 꽤 긴 분량을 가지고 있는 ‘태종 춘추공’ 조는 크게 네 단락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째, 춘추가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 결혼하는 이야기. 둘째,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백제 정벌 이야기. 셋째, 기타 서적 4종에 나타난 정벌 이후의 이야기. 넷째, 사후담 몇 가지.


춘추와 문희의 결혼 이야기는 자신이 당사자이므로 당연히 주인공이라 하겠으나, 여기서 실제 주인공은 김유신과 문희 남매에 가깝다. 남매의 ‘김춘추 꼬이기’ 성공담이라고나 할까. 문희는 언니가 꾼 꿈을 비단 치마를 줘가며 사고, 김유신은 춘추와 축국을 하다가 옷깃을 밟아 찢어 놓는데, 두 남매가 벌인 연극 속의 등장인물처럼 춘추는 움직이고 있다. 물론 결과는 춘추에게 ‘좋은 일’로 맺어지지만.


왕이 된 춘추가 백제를 정벌하는 이야기에 오면 더욱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다. 일연은 이 대목에서 [삼국사기]를 인용하는데, 신라와 백제의 전쟁 대목을 춘추가 진짜 주인공인 ‘신라본기’에서가 아니라 의자왕이 주인공인 ‘백제본기’에서 따왔다. 그러다 보니 승자인 춘추보다 패자인 의자왕이 주인공처럼 등장한다. 왜 그랬을까? 번연히 ‘신라본기’가 있음을 아는 일연이 애써 외면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기타 서적 4종에서 인용한 정벌 후의 이야기는 더욱이 춘추가 주인공이 아니다. 춘추는 백제 정벌을 막 끝낸 바로 그 해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의 일에 개입할 일이 없다. 마지막의 사후담에서 다시 춘추가 등장하지만, 이것은 전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춘추가 주변인물이라는 말은 아니다. 어쨌든 춘추가 있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이나, 기묘하게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주인공일 뿐이다. 그래서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이라 말한 것이다.






족강된 진골의 아들로 태어나

















진흥왕에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가 동륜, 둘째가 금륜이다. 동륜은 왕 27년(566년)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33년(572년)에 일찍 세상을 뜬다. 이때 그의 아들 백정은 다섯 살 어린 아이였다. 금륜이 형을 이어 태자에 책봉되고, 진흥왕 사후 왕위를 잇는다. 25대 진지왕이 바로 그이다. 그런데 불과 4년 뒤, 황음(荒淫)에 빠진 그를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이때 그에게 용춘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왕위는 동륜의 아들 백정이 잇는다. 26대 진평왕이다.






















이렇듯 진흥왕이 죽은 다음 벌어지는 두 아들과 그 후손의 왕위 교차 계승은 결코 평화로운 이어달리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진평왕의 등극에서 이 달리기가 끝난 것도 아니었다. 용춘의 정체와 전후 이야기는 앞서 선덕여왕에서 썼다. 진지왕이 폐위된 까닭에 용춘의 집안은 성골에서 진골로 내려앉는 족강(族降)을 당했다. 그런데 아들을 두지 못한 진평왕이 딸을 용춘에게 시집 보낸 것은 뜻밖이었다. 왕위가 용춘에게 갈 수 있다는 전제였다. 그렇다면 이어달리기는 다시 동생 집안 진지왕 쪽으로 넘어가는 것일까.


그러나 여기서 형 집안 진평왕의 야망은 작렬한다. 성골 집단을 더욱 공고히 하여, 왕위 계승은 비록 딸이라 할지라도 이 안에서 이루리라는 각오를 한 것이었다. 용춘을 사위로 삼은 것은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동생 집안의 모반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이런 와중인 진평왕 23년(603년)에 춘추는 태어났다. 성골에 매우 가까운 진골의 아들이었다.


진평왕의 집념은 이루어졌다. 춘추가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29년 뒤 딸인 선덕이 왕위를 이었다. 다시 15년 뒤, 선덕이 죽은 다음에는 그의 사촌누이 진덕이 왕위를 잇는다. 춘추의 나이 어언 44세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왕위계승 이어달리기는 교차가 아닌 한집안의 일방적인 것으로 굳어지는 듯했다.

















춘추가 찾아낸 제3의 길

















춘추의 아버지 용춘은 튀지 않고 묵묵히 일했다. 화랑 출신으로 진평왕 51년에는 고구려로 출정하여 낭비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각간이 되었다. 7년 뒤인 선덕여왕 4년에는 왕의 명령으로 지방을 순무했다.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왠지 그에게서 권력싸움의 비정한 늪으로 빠져드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아들 춘추를 지키는 용춘의 울타리였을까.


춘추가 역사서에 전면 등장한 것은 선덕여왕 11년(642년)이다. 나이 서른아홉이 되는 해, 대야성의 도독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백제군에 죽임을 당하는 그 비극적인 사건에서이다. 춘추는 이 사위와 딸의 죽음을 보고받고,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로 하고 고구려로 군사를 청하러 간다. 이때 김유신과는 이미 절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와 결혼을 한 다음일 것이다. 그러나 춘추의 고구려 외교는 성공하지 못했다.


춘추의 데뷔는 썩 상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실패가 춘추로 하여금 자신의 앞길에 대해 보다 깊은 성찰을 하게 했을 것이다. 특히 잘 나가는 성골 앞의 진골로서 자신이 힘을 받기 위해서 제3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다. 김유신의 가야세력과의 연합은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춘추는 선덕왕 16년(647년)에 일어난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춘추로서는 매우 뜻깊은 승리였다.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었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김춘추∙김유신으로서는 차제에 왕위까지 노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 번 더 짚어가기로 한다. 그것이 진덕여왕의 즉위이다. 춘추는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등에 업고, 당나라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진덕여왕 2년(648년)에 직접 그곳을 찾아 친당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때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또 한 번의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탄력을 받은 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하였다.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의 채택(649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의 실시(651년), 품주(稟主)의 집사부(執事部)로의 개편 등이 그것이다. 다분히 중국화 정책이라 불러야 할 이 같은 제도의 시행은 신라로서는 후진적인 정치문화를 극복하고자 한 노력으로 보아주어야겠다. 더불어 언젠가 다가올 자신의 왕정시대를 대비한 것이었으리라.


할아버지인 진지왕은 폐위되었으며, 자신은 진골로 떨어진 최악의 상황을 딛고, 춘추에게는 이제 왕의 길이 다가왔다. 큰 집안 진평왕 쪽으로 이어지던 왕위가 작은 집안 진지왕 쪽으로 무려 80여 년 만에 돌아왔다.






왕이 된 춘추의 가장 큰 준비는 사람

















춘추가 왕위에 오른 51세는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그만큼 오래 준비한 왕이었다. 그러나 일할 시간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도 짐작했으리라. 설마 그렇게 빨리 올 줄 몰랐겠지만, 춘추의 통치는 8년 만에 끝났다. 춘추로서는 서둘러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에게 첫 번째 과업은 왕위계승의 합법성이나 정당성의 확보였다. 그는 표면적으로 화백 회의를 존중하면서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개정하는 등의 율령정치(律令政治)를 강화하였다. 즉위한 다음 해 바로 아들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하였다. 더불어 가까운 일족을 요직에 두루 등용하였다.


무엇보다 그를 안심시킨 것은 김유신의 상대등 임명이었다. 660년 정월의 일이었다. 이해 3월에 바로 신라가 백제에 대한 정복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당나라의 소정방이 이끄는 수륙 13만 명이 백제를 공격하자, 5월에 춘추는 태자 법민, 김유신 등과 더불어 5만 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공격을 응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5천 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으로 피난했던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마침내 전쟁의 마침표를 찍었다. 춘추의 비원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사실 춘추의 이 전쟁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특히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인 데 대해 그렇다. 그러나 냉정히 따졌을 때, 당대 세계문명의 중심인 당과의 외교에 한발 앞선 신라의 노력을 평가 절하할 수 없으며, 백제건 고구려건 신라로서는 당과 마찬가지로 외국이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 안 된다. 앞서 김춘추의 생애를 보는 일연의 관점을 소개하였다. 주인공이 아닌 주인공으로서 춘추를 그리는 일연의 필법에 대해 이제 자그마한 결론을 내려야 할 차례이다.


그는 왜 우회적인 방법으로 춘추의 생애를 써 내려갔던가. 일연의 붓 길을 따라가다 보면 춘추는 선수가 아니라 코치로 보인다. 훌륭한 선수를 많이 키우고, 적절히 경기에 투입하는 감독 같다. 왕이 되기 위해 춘추가 가장 크게 준비한 것은 사람이었고, 왕이 되어서 그가 가장 잘한 것은 사람을 쓰는 일이었다. 그것이 그를 위대한 왕으로 기억하게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춘추는 아랫사람을 거룩하게 보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 죽은 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왕이었다. 왕이라고 다 그런 것이 아니다.












글 고운기 / 연세대 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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