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세력인 그의 가계는 매우 독특하다. 선조 호경은 백두산 산신이다. 작제건은 주몽처럼 신궁으로 서해용왕의 딸과 혼인했다. 단군신화나 해모수신화 등과 구조적으로 일치하는 고려의 건국신화는 바다와 관련이 있다. 하늘과 바다의 만남, 산신과 해신의 결합에서 탄생한 것이 왕건이다.
경기만은 한반도에서 가장 훌륭한 해륙교통의 요지이고, 중핵에 있다. 그 가운데에 위치한 강화도 일대는 해구(海口), 혈구(穴口)라고 하여 서울과 개성, 해주 등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것이다. 해상세력이 해군력을 바탕으로 물류체계를 장악하면 경제력과 정치력을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인 거점이다. 왕건의 집안은 황해 남부와 경기 서부, 강화도가 만나고, 황해와 한강 하류와 예성강이 합쳐지는 소지중해와 같은 이곳에서 성장한 해상토호이다. 송악(개성)은 후에 해양경영을 염두에 두고 계획도시로 조성되었다(한재수 설).
고려는 처음부터 해양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북방의 요나라를 견제하고, 문화를 받아 들였으며, 무역을 위해서 한족과는 자주 교섭하였다. 태조 때부터 황해를 건너 후량(後梁)과 교섭했으며, 송(宋)이 건국한 다음부터는 본격적이었다. 송은 거란을 치기 위해 고려에 파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160여년간 고려는 송나라에 57번을, 송은 고려에 30번의 사신을 보냈다. 2년에 한번 꼴로 사신단이 오고간 것이다. 이때 탁월한 외교관이었던 서희(徐熙)는 7년 동안 끊어졌던 외교를 바다를 건너 재개시키기도 하였다. 송과의 교섭은 해상로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송나라에 간 유학생들은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하기도 하였다. 반대로 고려에서 관직을 받은 송나라 사람도 있었다. 승려 의통(義通)은 947년 바다를 건너가 영파(寧波)에서 법(法)을 전파했다. 대각국사 의천은 절강성 항주에 머물기도 했는데, 근래 서호(西湖) 부근에서 고려의 절터가 발견되었다.
고려와 송나라는 엄청난 규모의 무역을 했다. 사신선들은 공무역선이었다. 송은 고려에 의복, 상아, 차, 칠, 옥, 물소뿔, 악기, 술, 새(鳥),등을 수출했고, 고려는 비단, 인삼, 부채, 종이, 먹, 등 수천 점을 보냈다. 1078년에는 송이 100종이 넘는 품목과 6,000건에 달하는 물건을 보냈고, 고려도 그에 상당한 물건을 보냈다. 그러나 당대의 문장가이며 관리였던 소동파는 고려와의 무역이 피해가 심하다고 비판적이었다.
민간의 무역은 더욱 발달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1012년부터 1278년까지 266년간 송나라의 상인이 129회에 걸쳐 연인원 5,000여명이 왔다 간 것이다. 황해는 엄청난 무역이 이루어지는 황금의 바다(golden sea)였다. 상인들은 주로 절강성(浙江省), 복건성(福建省), 광동성(廣東省) 출신이었다. 서역상인들도 많이 방문했다. 1024년에는 100여명이 한꺼번에 온 적도 있었다. 개경은 다양한 인종과 물건들이 모이는 동아(東亞)의 지중해에 해당하는 황해의 유명한 국제도시였다.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에서 여인의 손목을 잡은 회회인(回回人)은 바로 서역의 상인이었다.
반대로 고려인들도 중국의 남방의 여러 도시에 진출하여 살고 있었다. 지금도 절강성 영파(寧波)에서는 고려관(高麗館) 터를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교역은 원나라가 세워진 다음에도 지속되었다. 원의 세조인 쿠빌라이는 강남의 미곡(米穀)을 3회에 걸쳐 고려로 운송했다. 특히 일본을 원정할 때는 무려 20만 석을 보냈다. .
그러면 당시 고려의 항해술과 항로는 어떠했을까? 처음엔 주로 고려의 배로 왕래했다. 태조 왕건이 사신을 파견했을 때, 등주(登州) 근처에서 배가 파손하여 90여 명이 익사한 적도 있었다. 1019년에는 같은 곳에서 배가 파손되기도 했다. 고려와 강남을 항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음을 보여준 것이다. 고려와 중국을 통하는 항로는 크게 3개가 있었다.
첫 번째는 예성강 하구에서 출발해 옹진반도까지 나간 다음 황해를 곧바로 횡단하여 등주로 들어가는 항로다. 고려 초에 주로 이용한 항로로써 이틀이 소요되었다. 두 번째는 예성강구에서 출발하여 산동반도 하단의 밀주(密州)를 잇는 항로였다.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동중국해 사단(斜斷) 항로다. 이 항로는 북송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란 책에 그 항해 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영파를 출발한 선박은, 보타도(普陀島)에서 바람을 기다린 다음 북상하여 상해만 앞의 바다까지 와서 거의 사선으로 항해하여 흑산도로 향했다. 이어 고군산도 자연도 등을 거쳐 예성강 하구에 도착하였다. 이 항로는 늦봄에 남서풍을 타고 해류의 흐름을 이용하면 자연스럽게 고려의 개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송사(宋史)에 의하면 순풍일 경우에 흑산도까지 5일이 걸렸다고 했다. 필자도 지난 1997년 6월 하순에 동아지중해호’라고 이름 붙인 뗏목을 타고 이 항로를 답사한 바가 있다. 항로는 일치했지만, 영파에서 출발하여 흑산도까지 도착하는 17일이 걸렸다. 동중국해 사단항로는 원양항해구역이므로 고난도의 천문항법에 능숙해야 한다.
원양항해와 대규모 교역은 성능이 훌륭하고 큰배가 있어야 가능하다. 왕건의 전투선은 23m 넓이에, 위에 다락이 있었다. 동해에서는 여진의 해적선들을 격퇴하기 위하여 과선(戈船)을 만들었는데 이름대로 뱃전에는 창검을 꽂았고, 앞머리에는 적선을 들이받는 충각을 달았다. 70여명이 탈수 있었고 적재용량이 1,000석인 큰 배였다. 송의 사신선은 신주(神舟)와 보좌하는 객주(客舟) 여러 척으로 구성되었다. 객주는 길이가 30m, 배높이가 9m 폭이 7,5m이고, 돛은 높이가 30m이고, 곡식 2,000섬을 실을 수 있었다. 신주는 객주보다 3배쯤 컸다. 상인들의 배도 큰 차이가 없었다. 이 대형선박들이 황해와 동중국해를 누비며 고려와 중국을 이어주었다.
고려는 장보고의 전통을 이어받은 해상세력으로 출발해, 문화와 경제가 발전한 국제무역국가였다. 반면에 조선은 바다를 막아 해양력을 제거하면서 수동적이고 폐쇄적이 되어 주변부 국가로 전락하였다. 21세기는 바다가 열린 새로운 세기다. 세계질서는 물론이고, 특히 동아지중해의 질서는 해양력이 민족의 생존력임을 역사가 증명해왔다.
[尹明喆 동국대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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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8-13 14: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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