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나라를 망치는 것은 악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내 이름은 경대승이다.


나 경대승이라고 한다. 누군지 모르겠다고? 후후 그러려니..저승에 온지 천년 가까운 내 이름쯤 알아 무엇할까. 예전에 광해군이란 양반이 한 마디 하겠다고 수염을 내리쓸더니 엄청 긴 넋두리를 한 적이 있었다. (굿,,모닝 광해군이라던가?) 너희들의 전 나랏님이 동북면,서북면 지역의 반란 수괴와 밀통을 했니 안했니 한창 난리를 피울 때 말이다. 광해군이 며칠을 고민을 하더군. 자기 때와 똑같은 일 벌어진다고 말이다. 전하.. 뭘 그리 후세 일에 신경을 쓰십니까 하고 점잖게 한 마디 했는데 되레 나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시위소찬하는 천박한 무부놈아. 너는 살아서 그리도 아둔했거늘 죽어서도 이리 사리에 어두운 것이냐. 네 일생이 끝났다고 세상이 끝난 줄 아느냐.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하면서, "본받아야 할 선과 경계해야 할 악을 오로지 다루어 체례를 일관하는 서를 짓고자" 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느냐. 네 후손이 네가 행한 패악과 작태를 반복함에 어찌 심기가 편하랴......."

따지고보면 나보다 5백년쯤 뒤에 태어난 주제에 저승에서도 왕이라고 더럽게 유세부리는 꼴이라니. 한 방 쥐어박으려다 참았다. 시위소찬 (尸位素餐)이라는 말의 뜻을 몰라 문신들에게 타박 들어가며 이리 저리 물어 보았더니 "하는 일도 없이 국가의 녹을 축내는 행위"를 말한다더군. 그러니까 우리 무반들 말로 하면 에이 밥버러지같은 놈아 이런 뜻이더라는 것이지. 분통이 터져서 네가 전직 임금이면 임금이지, 나도 한때 고려 천지를 뒤흔들던 놈이다 싶어 칼을 빼들고 광해군한테 쫓아가려다가 슬그머니 다시 넣었다. "본받아야 할 선과 경계해야 할 악을 오로지 다루어... " 어쩌고 했다는 어느 대국 역사가의 말이 자꾸 그 칼을 잡았더랬다. "네 후손이 네가 행한 패악과 작태를 반복함에 어찌 심기가 편하랴?"하는 광해군의 일갈이 가슴 한복판에 점점 깊이 박히고 있기도 했고.....

다시 한 번 내 이름은 경대승이다. 지금까지도 내 이름이 누구인지 가물거리는 자는 중학교 국사 교과서를 뒤적여 보든지, 토일요일 밤 10시 15분 KBS에서 방송되는 무인시대를 시청해 보라. 무신의 난 이후 이의방, 정중부에 이은 3대 집권자이다. 나는 정중부를 죽였고, 내 뒤를 이은 것이 금강야차 이의민이지.

세상이 뒤바뀌는 피바람이 몰아쳤던 의종 24년 (너희 연호로 1170년) 무신의 난 당시 난 17세의 앳된 군인이었다. 내 아버지는 경진, 청주 경씨의 시조로 기록되는 사람이고, 무신의 난 당시 정중부와 같은 온건파에 속했다. 조위총의 난이나 여타 변란 때 아버지는 항상 사령관급의 장군이었으니 그 아들인 나의 출세길도 그다지 험난할 일이 없었다. 무반들이 득세한 세상에서 나 정도의 출신성분이었으면 편안하고 아늑하게 상장군까지 올라가고 운 좋으면 문하시중까지도 바라볼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비록 아버지가 무신 정권의 핵심에 있었지만 나는 보현원(무신란의 발생장소)의 피바람과 자기들끼리 물어뜯는 이전투구, 그리고 그 승리자들의 탐학과 포악에 치를 떨었다. "문신의 관을 쓴 자는 서리라 해도 씨를 남기지 말라"는 무시무시한 주문에 몸뚱이에 맞창이 나서, 두토막 세토막이 나서 문신들이 죽어갈 때, 무신란의 주역들끼리 치고받고 죽일 때, 그리고 정중부가 득세하여 그 아들 정균과 송유인이 하늘 아래 아무런 거리낌없이 왕실을 겁박하고, 공주를 차지하려 들고, "산천을 경계로 할만큼" 넓은 땅을 차지하고 배 두드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칼자루를 몇 번이고 놓았다가 잡았다.

하늘이 무섭지 않은 무뢰배들의 통치가 극에 달하던 1178년, 그러니까 내가 정중부를 죽이기 1년 전, 내 고향 청주에서 변란이 터졌다. 청주 토박이들과 서울(개경)에서 살다가 청주로 낙향한 사람들끼리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서울살이는 했다지만 고향은 당연히 청주였으니 결국은 피붙이들의 싸움이었다.

싸움의 이유는 땅이었다. 무신의 난 이후 서울에서 득세한 청주 출신들이 그 힘을 업고 고향의 땅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 아버지 경진도 예외일 수 없었고..... 그를 두눈뜨고 지켜보아야 했던 청주 사람들이 '서울내기'들에게 무슨 감정을 품었을지 잘 알 것이다. 서울내기들에 대한, 그리고 촌뜨기들에 대한 질시와 멸시의 감정은 끝과 끝을 달렸고 마침내 폭발했다.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나갈만큼 그 충돌의 파열음은 컸다.

그 참상이 벌어지기 전, 나는 내 스스로 생각해도 장한 일을 했다. 아버지 경진이 탐욕스럽게 거둬들였던 땅들을 아버지가 죽자마자 모조리 반환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내 스스로의 기득권을 버린 것일 뿐더러, 나와 같은 기득권자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권력에 의한 토지의 수탈이 당연시되고 수탈당하는 이가 그 수탈을 거절하면 죽음, 아니면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 틀림없던 시절, 나의 행동은 분명 비상식적인 것이었다. 용기가 있다기보다 겁이 없는 짓이었고, 과감한 결단이라는 칭송보다는 세상을 모른다는 비아냥이 더 귀에 들어왔다. 어느 놈은 대놓고 바보라고 주절거리기도 했다. 바보 경대승. 바보 경대승. 하지만 어떤 이들은 경멸은커녕, 눈물 섞인 애정을 담아 그 별명을 불렀다. 바보 경대승 바보 경대승.

당연히 나는 파직되었다. 나는 청주의 사심관이었던 것이다. (사심관제도를 모르는 자는 국사 교과서를 뒤져 보라) 변란을 막지 못한 책임도 책임도 물었겠지만, 아버지가 긁어모은 땅을 '쓸데없이' 반환함으로써 청주 토박이들을 자극한 책임을 묻는 뜻도 다분히 있었다. 나이 스물 다섯 경대승에게는 피눈물나는 문책이었다. 네놈들...... 정중부, 송유인, 정균.... 태후의 궁전을 빼앗아 자기들 놀이터로 만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림이 없이 배를 불리기에 바쁜 이 역적놈들아. 네 너희를 반드시 목없는 귀신으로 만들리라.

정의를 알고 불의에 분노하는 청년장군 경대승, 내 주위에는 그 수는 적으나 알찬 이들이 모여들었다. 간악한 문신들의 향락에 취하고 광폭하고 탐욕에 넘치는 무신들의 발길질에 밟힌 나라를 제대로 세우고자 하는 젊은 무인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나는 대궐 문을 뛰어들었다. 몇 명인지 아는가? 30명이었다.

정중부의 아들 정균을 저승으로 보낸 후 대궐에 뛰어든 우리 30명은 그 몇 배나 되는 숙위군을 무찔러 나갔다. 물론 야습의 결과였지만 나는 내가 거느린 수하들의 놀라운 힘을 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칼을 휘두르는 칼잡이가 아닌 진정한 무인들이었으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칼을 잡았는지를 알았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행수였다. 내가 악전고투 끝에 숙위군을 지휘하던 이경백의 목을 베었을 때 30명 결사대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기쁨의 외침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죽으면서도 "이렇게 적은 병력으로....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하며 놀라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이경백의 표정도.....

대궐을 장악한 우리는 정중부와 그 사위 송유인을 간단히 잡아 죽였다. 우리의 승리였다. 태산보다 높아 보이던 정중부의 권세가 나이 스물 여섯의 청년 장수에게 타도되었다. 바로 1년 전 제 아버지가 평생 긁어 모은 땅을 단번에 반환했던 꼴통 경대승이 황도 개경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한 것이다. 무신정변의 지도자였던 정중부는 허무하게 저자 거리에 목이 내걸렸다.

싸움은 끝났다. 이제 정권은 나에게 들어왔고 아직도 젊고 정의로운 나의 뜻대로 세상을 바꾸면 되는 것이다. 국왕이 나의 노고를 치하하고 백관이 하례하는 자리에서 나는 의기양양해서 이렇게 외쳤다. "국왕을 시해한 자가 살아 있는데 어찌 축하를 받겠는가?" 바로 전왕 의종의 등뼈를 꺾어 살해한 이의민, 무신의 난 당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던 살인마 이의민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그는 포악하고 부패한 무신정권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그 기세를 몰아 이의민을 죽여 뒤틀린 정치를 바로잡으며, 청주에서 내가 그랬듯 나의 전부를 내던져 쇠약해져가는 고려 왕조에 새바람을 불어넣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슬프게도 나는 그러하지 못했다.

정중부의 목을 쳤으되 그 잔당들을 모조리 토멸하고 그들의 영향력을 긁어 내기엔 내 힘은 너무나 부족했다. 대놓고 경대승을 죽이겠다며 팔뚝질을 하는 무신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문신들은 내 눈치를 보았으나 그들이 원하는 무신의 난 전의 세상, 손 희고 얼굴 멀건 문신들의 무대로 돌아가는 것은 나 역시 원치 않았다. 나 역시 군인이었던 탓이다. 국왕 역시 나의 편이 아니었다. 어차피 도와줄 힘도 없는 국왕이었지만 그는 나라를 옳게 다스리는 일보다는 임금 자리에 앉은 채 '승하'하는 것이 소망인 늙은이였다. 고려사절요의 나에 대한 구절을 볼까?

"경대승은 항상 무인들의 불법에 분노하여 복고의 뜻이 있었으므로 문관들이 기대어 중히 여겼다. 또 의종을 시해한 자를 치려고 하였으나 실천하지 못했다."

하고자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권력만큼 불쌍한 것은 없다. 이의민을 죽이지 않고는 축하받을 수 없다!고 외치던 나의 기세는 바람 앞의 호롱불처럼 이그러지고, 이의민은 유유자적 고향 경주로 돌아갔다. 나는 무신정권을 부정했지만 무신이었고, 세상의 그릇됨을 증오했으나 그를 바로잡을 지혜가 없었다. 정중부 부자와 송유인 등의 지나친 탐욕과 폭정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그들을 제거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불만을 세상을 바꾸는데 이용하는데는 실패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나의 편은 없었다. 오로지 나를 믿고 대궐 담을 넘었던 30명의 결사대와 그 주변 무사들, 물론 그 중에도 방자하게 굴다가 스스로의 정치생명과 육신의 생명을 끊어버린 허승과 김광립같은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그들은 나를 헌신적으로 옹호해 주었다. 그들은 나의 과거를 알고 있었던 탓이다. 적어도 경대승은 다르리라. 경대승은 뭔가를 보여 주리라. 그들은 그렇게 믿으며 수많은 칼잡이들이 노리는 내 뒤를 목숨 걸고 지키고 있었다. 언젠가 쓸쓸히 웃으며 "그대들 보기에 내가 옳은가?"라고 물었을 때 한 무사는 힘주어 답했다. "옳은 것이 경대승이 아니라, 경대승이기 때문에 옳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슨 일을 하려 해도 기득권을 틀어쥔 중방의 무신들과 공자왈 맹자왈 읊으면서도 제 영달 지키기만큼은 무신에 한 치도 뒤지지 않는 문신들, 하는 말이라고는 알아서 하오 밖에 하지 못하는 늙은 왕..... 그리고 정중부 대감의 원수를 갚자고 연일 방을 붙이는 무리들 앞에서..... 나는 외로왔다.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어느날 술자리에서 나는 그 심정을 털어놓았다.

"정말 이거 못해먹겠다."

그때 저 말석에서 잔을 들던 무사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내 주변의 무사들이 혹시 자객인가 하여 칼을 빼들고 그를 막아서자 그는 잔을 내던지며 울부짖었다.

"대승아 대승아. 지금 네가 이 자리에 오른 것이 누구의 덕인지 알지 못하느냐. 그것은 지난 날의 너였고, 지난날의 너를 알아보았던 사람들의 의로움이었다. 이제 네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세상을 굽어보게 되었으면서 네가 이리 변함은 무슨 까닭이냐. 네 정녕 그 자리가 외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더냐. 정중부의 목만 치면 이의민이 내 목 쳐 줍쇼 하고 허리를 굽히고, 저 내시같은 문신들이 분연히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나서며,백성들은 경대승 장군 천세 부르며 네 은덕에 감읍할줄 알았더냐?"

자객이 아니라는 건 판명되었으나 일어선 무사들은 앉을 줄 몰랐다. 그의 말은 이어졌다.

"대승아. 네가 권좌에 올랐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며 치하하였다. "세상이 그를 버려도 우리만큼은 그를 지키자. 우리 고려에서 경대승 장군 같은 이가 세상을 틀어쥔 것이야말로 역사다" 대승아 대승아. 네 그 기대를 저버리려느냐. 그 간절한 바램의 손들을 잊어버리려느냐. 우리 글 모르는 무인들이나 옛 이야기를 대충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가, 어떤 임금이,도와주는 이 없어 실패하였다는 변명을 그리 쉽게 할 수 있었더냐. 도와 주는 이들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고, 심지어 돕고 싶지 않아 팔짱낀 놈들의 팔짱을 풀게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다. 네가 이경백을 베고, 정중부의 목을 내건 후 의기도 양양하게 입궐하여 백관의 치하를 받은 후, 네가 한 일이 무엇이었느냐. 사방에 적이니 어찌하겠느냐고.... 그래서 못해 먹겠다고? 어쨌건 세상을 틀어쥔 것은 네 손이다. 네 맘대로 할 수 없을지언정 너는 고려라는 배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이다. 그 키마저 남의 탓으로 돌리려느냐."

그의 말은 절절했고 태연한척 앉아 있던 내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평소 같으면 벼락같은 호통이라도 내질렀으련만 내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나를 구원한 것은 측근에 있던 무사였다.

"지금 경공께서 이 자리에 오르신 것이 얼마나 되었소? 아직 경공은 젊고, 앞길은 구만리 창창하신 분..... 연작이 어찌 홍곡의 뜻을 알리요? 세상 일을 손바닥 뒤집는 것으로 알지 않는 다음에야 어찌 이리도 성급하고 어리석을 수 있소.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불상사가 있는 것조차 누구를 이롭게 할 수 있음을 어찌 모른단 말이오?"

잔치는 그것으로 파했다. 주위 무사들에게 끌려나가면서 처음 나에게 잔을 내던진 무사는 이렇게 외쳤다. "언제까지인가?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 정중부의 원수 갚자고 밤에 방을 붙이는..... 그 덜떨어진 무사놈들 잡자고 도방 병력들 풀 생각만 하지 말고, 그대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그대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라. "

나는 결국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혼탁한 세상과는 동떨어진 듯한 별종이기는 했으나 나는 그 세상을 맑게 할 청정수가 되기엔 너무나 부족한 그릇이었으므로. 나는 준비된 집권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세상에 필요한 집권자도 아니었다. 청주성에서 내 토지문서를 들고 관청에 찾아가 모조리 반환할 뜻임을 밝히던 시절의 당당함과 단 30명의 병력으로 구중궁궐을 뛰어넘던 의기는 내 가슴 속에 살아 있었지만, 그를 역사의 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지혜와 뚝심이 정확하게 2푼이 부족했다.

그 후 나는 어정쩡하게 정권만 잡고 있다가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정중부가 칼을 들고 쫓아오는 꿈을 꾸다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으니 세상이 나를 보는 눈이 어떠했을까는 너희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정당한 집권자였는지는 모르나 적당한 집권자는 아니었다. 결국 나의 꿈은 무위로 돌아갔고 내 뒤는 내가 죽이려던 살생부 1번 이의민이 차지했다. 그리고 그의 치세에서 고려의 병은 깊어갔고, 결국 공고해진 무인정권인 60년 최씨 정권이 등장했다.

무식한 무부의 넋두리가 너무 길었다. 그러나 한귀라도 기울여 주기 바란다. 역사는 반복되나 재연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나의 위치는 너희들 대의 아무개에도 비슷하게 부과되는 자리일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옹호하는 사람도, 그의 한계를 비판하는 사람도, 그를 송두리째 뒤엎으려 하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권력자로서 그가 어떤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앞날을 준비하고 있는지이다. 권력자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앞날 뿐이 아니다. 자신이 물러난 뒤, 어떤 세력이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이며 그들이 얼마나 억조창생에 유익한 이들이 될지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그날 그 뼈아픈 술자리에서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식은땀 흘리고 있었던 나만큼 무력하고 무능한 권력자가 있었을까. 적어도 나는 그 꼬락서니를 다시 목격하고 싶지 않도다. 30명으로 대궐에 뛰어들던 용기가, 유령에게 쫓겨 심장마비로 죽는 심약함으로 변하는데는 4년도 걸리지 않았다. 나의 짧았던 인생이 누군가의 전철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물며 그 누군가는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험난한 길을 거쳐, 더더욱 비길 수조차 없이 많은 이들의 별같은 소망과 손길로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던가.

광해군이 나를 질책하며 했던 말처럼 제발 "본받아야 할 선과 경계해야 할 악"을 구분하라. 그리하여 먼 훗날, 지금의 나처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갔던, 경계해야 마땅한 악의 인물로 세상에 그려지지 말도록 하라. 물론 나는 악한 이는 아니었지만 어리석은 이였다. 하지만 그것을 알라. 명심하라. 무릇 나라를 망치는 것은 악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이상 경대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