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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7-10 09:19:597567 
한국경제사 신고찰
양승국
일반

출전 : 21세기경제학

작성자 : 최용식/21세기경제학연구소 소장

 

 

현대 한국경제사 신고찰


[참고사항] :

현대 한국경제사에 대한 재고찰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다음 자료를 작성했습니다. 보고서 형식으로 작성 한 것이라서, 다소 생소하게 비쳐질지 모르겠지만, 차분하게 읽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자료이므로, 다음 제 글의 관점에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분이 누군가 나서서 자신의 책으로 발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런 분이 나선다면 적극적으로 돕고자 합니다. 저에게도 욕심나는 일이긴 하지만, 다른 더 중요한 할 일이 있어서 이런 글을 남깁니다.

이미 완성된 글이지만, 한꺼번에 올리면 질리지 않을까 여겨져서, 몇몇 부분으로 나누어 매일 한 편씩 이곳에 올릴까 합니다. 부디 재미있게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서문] 한국경제사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

▣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고 미래에 대한 참고서이자 교훈. 또한 지혜의 보고. 따라서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정책실패를 줄일 수 있는 첩경. 역사를 자꾸 되돌아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음.

▣ 그러나 현대 한국경제사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찾아 볼 수 없음. 한편에서는 오랜 세월 세뇌된 신화만 존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방적이고 관념적인 비난만 퍼부어지고 있을 따름.

▣ 후자는 경제에 피해를 주지 않고 정치적 의의라도 있으나, 전자는 아무런 기능도 못하면서 경제정책에 끼친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큼. 이 점은 차츰 차츰 밝혀질 것임.

▣ 이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때. 환란과 같은 경제재앙이 다시는 발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어떤 경제정책들이 어떤 경제적 결과를 가져왔던가를 밝혀둘 필요가 있음.

▣ 인체가 질병에 걸리면 우선 체온이 오르고 혈압이 오르는 등의 증상이 나타남. 또한 맥박에도 이상이 나타남. 경제도 마찬가지. 경제위기가 닥치고 있으면, 물가가 불안해지거나 국제수지가 악화되고, 경제가 최악으로 치달릴 때는 재정수지마저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는 등의 징후가 나타남.

▣ 따라서 이 세 가지 경제지표는 경제정책의 성패를 판가름할 수 있는 척도. 이런 관점에서 현대 한국경제사를 각 시대별로 새롭게 조명해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임.


1. 미 군정 하의 경제정책


가. 미군 진주 당시의 한국경제

▣ 일제의 세계대전에 모든 자원이 총동원되어, 경제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 또한 공출 및 배급제가 시행되던 중, 해방으로 행정력이 무너지면서 경제시스템 자체가 붕괴된 상태.

▣ 일본인들이 소유했던 생산시설(자본금 기준 94%, 기술자 중 일인 비중 81%)이 가동을 멈추자, 물자부족 극심. 일본인 소유 농지도 주인을 잃은 상태. 여기에다 일제 때 해외로 이주했던 많은 동포들이 환국하면서(230만명) 물자난은 더욱 가중.

▣ 미군이 진주한 것은 9월 9일. 군정청이 설립된 것은 9월 19일. 해방 후 한 달 이상 지나는 사이 경제체제의 혼란은 더욱 가중.


나. 경제업적의 전반적 평가

▣ 업적은 내세울 것이 거의 없고 실책만 거듭. 기껏 일제의 세제를 승계하고 그 일부만 개정한 것, 양곡배급제를 재실시한 것, 물자난을 해소하기 위해 미 본국의 원조를 이끌어낸 것 등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아무런 통치 준비도 없이 점령군의 역할만 했음. 진주 당시에는 식민지를 꿈꾼 듯.

▣ 심각한 물자난으로 사회가 혼란해지고 통치도 어렵게 되자, 미국원조에 의존하는 경향이 점차 강화되고(미군정 치하 5억 달러 원조), 생산체제의 복구는 더욱 늦어져 경제의 자생력도 약화됨.

▣ 47년 2월 민정장관에 안재홍이 임명되는 등 우리나라 사람이 경제정책에 관여하기 시작하면서, 일제의 귀속재산을 적극적으로 매각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물가안정에도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


다. 주요 경제정책에 대한 평가

(1). 통화신용정책의 결정적 실패와 물가 폭등.

▣ 해방직후 퇴각하는 일인에 대해 예금인출을 무제한 허용(22억원)하고 청산금을 무조건 지급(15억원)하는 등의 영향으로 45년도에만 37억원의 화폐증발.

▣ 이것은 해방 직전 조선은행권 발행총액 48억원의 77%에 달함. 조선은행권이 북한은 물론 만주까지 통용되었던 점을 감안하면(해방 전 남조선 화폐발행액은 18.9억원), 화폐증발은 폭발적.

▣ 이를 용인한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의 참회가 있어야 할 것. 특히 대출 회수를 위한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아서 이 실책은 더욱 용납키 어려움. 일인들의 예금인출이 사태를 이루고 금융기관의 붕괴가 우려되자, 뒤늦게 45년 12월에야 일인 예금을 동결.

▣ 미군 진주 초기에는 점령군의 군비를 조선은행의 대여금으로 조달. 즉, 화폐증발을 통해 주둔경비를 조달한 것.

▣ 이것은 우리 경제를 조금만 이해했다면 또는 경제원리를 조금만 이해했다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로서 가장 악질적인 경제실책.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간주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증거.

▣ 결국 45년 12월의 도매물가는 6월보다 무려 17.2배나 폭등. 해방 이후 물자난을 고려하더라도 지나친 물가상승. 일인 예금인출의 허용과 미군 군비의 조선은행 대여금 의존 등에 따른 통화증발이 물가폭발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

(2). 재정적자의 통화발행 의존

▣ 행정조직의 붕괴와 세제의 미확립으로 세수가 절대적으로 부족. 46년도(46년 4월 1일∼47년 3월 31일) 예산안의 세출예산은 118억이고, 세입예산은 80억원.

▣ 실제 이루어진 지출은 110억원이고 세입은 30억원. 약 89억원을 통화발행으로 충당. 46년말 현재의 통화발행 잔액은 177억원으로 전년말 대비 102.1% 증가.

▣ 세입구조도 취약. 전매수익(연초, 홍삼, 소금)이 총 세입의 75%, 조세 세입 10%, 철도수입 10%, 벌금수입 5% 등.

▣ 이에 따라 지속적인 물가폭발을 예비. 46년 말의 서울 도매물가 상승률은 530.9%, 소매물가도 332.1% 급등.

▣ 47년도 예산안은 세입 154억원과 세출 177억원 등이었으나, 실제 징수된 세입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임(구체적 통계는 입수치 못함). 추곡수매자금마저 통화증발에 의존.

▣ 이에 따라 47년 연말의 통화발행 잔액은 334억원으로, 전년말 대비 88.5%가 증가. 47년 연말의 서울 도매물가는 전년말 대비 89.4% 상승. 소매물가는 104.2% 급등.

▣ 48년도 예산안도 크게 개선되지는 않음. 세입예산은 246억원이고 세출예산 351억원. 다만, 물가는 정부수립과 함께 차츰 안정을 되찾아감. 48년 말의 서울 도매물가는 전년말 대비 29.9%, 소매물가는 18.6% 상승.

(3). 금리의 억제와 대출허가제 : 자금흐름을 왜곡시킨 금융정책

▣ 물가가 폭등하여 통화가치가 계속 떨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 수신금리는 지속적으로 하락. 이에 따라 저축증대를 통한 자본축적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림. 해방 직후의 수신금리는 금전신탁이 3.6%∼4.2%, 정기예금은 3.3%∼3.6%.

▣ 일본인의 예금인출로 금융기관의 수지가 악화되자, 45년 11월 1일에는 물가폭등 속에서 예금금리를 오히려 0.1%∼0.2% 인하. 46년 6월 1일에도 0.3%∼0.4% 인하. 그래도 금융기관 수지악화가 계속되자, 46년 10월 5일에는 대출금리를 0.7%∼4.4% 인상.

▣ 그 이전인 45년 9월 25일에는 국고금 분산예치제를 시행. 예금인출사태로 맞은 금융기관의 붕괴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세출소요액을 조선은행에서 차입하여 시중은행에 무이자로 분산예치한 것.

▣ 이런 조치에 따른 통화증발에도 불구하고 금융기관의 자금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으며, 이에 따라 45년 10월 20일 '자유여신 한도제'(일종의 대출허가제)를 실시함으로써 자금분배의 왜곡을 불러오고, 관치경제 및 정경유착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함.

(4). 원화의 과대평가 : 무역불균형을 구조화시킨 환율정책

▣ 고정환율제를 채택하여, 폭등하는 물가상승으로 줄기차게 약화되던 국제경쟁력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게 함.

▣ 수출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고, 반대로 수입은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한 것. 국제수지 적자의 구조화 초래.

▣ 45년 10월 1일 미군정청은 공정환율을 달러당 15원으로 책정. 47년 7월 15일 50원으로 인상.

▣ 48년 5월 6일에는 외환예치증 제도를 도입하여, 외환 자유매매율이 최초로 성립. 대체적으로 달러당 850원에 거래. 이에 따라 이중환율제가 시행되는 계기를 마련.

(5). 물가통제정책과 자원배분의 왜곡

▣ 물가폭발의 근원인 재정수지를 개선하는 등 통화증발을 억제하는 정책을 수립하기보다는 직접적인 물가통제 정책에 의존.

▣ 구체적으로, 46년 5월이래 주요 소비물자 11종(면포, 혼합직포, 면양말, 고무신, 운동화, 전구, 타이어, 자전거튜브 등)에 대해 최고가격제 및 협정가격제를 시행.

▣ 이 제도는 자원배분의 심각한 왜곡을 불러옴. 특히, 생산이윤은 박해지고 상업이윤은 후해지는 결과를 불러와서, 자본의 생산적 투자를 기피케 함.

(6). 우리 경제의 장래를 내다본 산업정책 등 경제정책의 전무

▣ 국가경제의 재건을 위한 장기적인 안목의 정책은 전무한 상태. 그때 그때의 대증적 정책만 시행. 오히려 섣부르게 시장경제를 실험하여 혼란을 부추기기도 함.

▣ 예를 들어, 45년 10월 5일 미곡 자유시장을 개설하였으나, 가격폭등만 불러왔고, 불과 3개월 후인 46년 1월 25일에 미곡수집령에 의해서 통제체제로 전환.

▣ 미군정 하의 경제정책은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만한 것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실정. 오직 부정적인 정책들만 눈에 띌 뿐.

▣ 미군정은 일제 부역자들을 관료로 채용하면서 그들의 실무능력을 명분으로 삼았으나, 최소한 경제정책 면에서는 이들이 남긴 업적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수 있음.


145. 현대 한국경제사 신 고찰 2
작성날짜 : 2002-01-02 오전 9:24:17 조회수(1024)

2. 이승만 정권의 전쟁 전 경제정책

가. 집권 당시의 경제적 상황

▣ 물가의 폭발적 상승은 해방 직후보다 그 기세가 약간 꺾였으나,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고 물자난도 계속됨. 전력은 2/3를 북한지역에 의존하고, 섬유원료는 절반 가량을 수입.

▣ 농지가 재정비되고 비료 공급만 충분하면 식량자급은 가능했지만, 그것이 어려워서 식량난은 지속됨.

▣ 양곡생산자의 정부매도를 의무화하는 [양곡매입법]을 시행하였으나, 매입가격이 싸서 농민이 기피하였으므로 매입실적은 부진. 이에 따라 전면배급제는 불가능하게 되고, 일부 자유시장거래를 허용하는 부분배급제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림.

▣ 물가의 폭발적 상승에 따라 금융기관의 경영수지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이에 따라 많은 수의 금융기관이 정리되는 등, 금융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음.

▣ 금융기관의 경영수지 개선을 위해 48년 11월 11일에는 정부보증대출의 금리를 5.2%에서 6.2%로 인상.

▣ 환율 공정환율이 48년 10월 1일에는 달러당 50원에서 450원으로 폭등하는 등 환율불안과 무역불균형은 여전한 상태.

▣ 국제수지 불안과 물자난 그리고 재정난 등으로 미국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었음.

▣ 48년 5월 14일 북한의 송전이 중단되고, 9월 28일 남북한 교역이 전면 중단되는 등 경제여건도 악화일로. 여기에 10월 20일에는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여 사회혼란 가중.

나. 경제업적의 전반적 평가

▣ 경제업적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님. 이승만 정권이 과연 국가경제의 경영능력을 조금이라도 가졌는지를 의심해야 할 지경. 경제의 혼란상은 지속되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의 흔적도 뚜렷하게 눈에 띠지 않음.

▣ 실무경험을 명분으로 일제부역 관료를 임용했으나, 실제로는 국가경제 경영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고 해야 함. 비록 실무와 경제에 무지하더라도, 차라리 민족의식이 있고 국가관이 투철한 사람을 임용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했을 것.

다. 주요 경제정책의 배경과 평가

▣ 49년 2월 1일의 국세조사와 7월 15일의 전면적인 세제개편, 11월 23일 관세법 제정 : 재정적자 누적, 물가등귀, 산업활동 위축 등을 극복하고 건전 재정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

▣ 49년 2월 15일 수입쿼터제 실시, 5월 17일 수출입 허가품목 발표, 9월 19일 무역업자 등록제 실시, 50년 4월 20일 외환관리규정을 개정하여 외환경매 실시(달러당 1,600∼1,800원) : 가용외환의 효율성을 높이고 수입물자의 원활한 수급을 통해 물자난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

▣ 49년 6월 1일 국고금의 시중은행 분산예치제를 폐지하고 조선은행에 집중. 화폐증발을 막자는 것. 이에 따른 시중은행의 자금경색은 조선은행의 특별융자로 지원.

▣ 이상과 같은 업적마저 48년 12월 10일 한미원조협정 조인에 따른 것. 이 협정은 미국의 원조제공에 따른 수혜국의 의무를 규정한 것인데, 균형재정 도모, 화폐발행 및 신용통제, 외환거래 및 무역통제, 양곡수집 및 배급 지속 등을 규정.

▣ 미국은 단순 구호를 위한 원조보다는 경제부흥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철수를 결심한 듯. 47년 10월 4일 [Business Week]가 보도한 미국의 "조선 재건 5개년 계획"과 관련한 보도는 남한경제가 재건불능이라고 보고 있음을 내비치고 있음.

▣ 이 시절, 이승만 정권 하의 독자적인 경제업적 중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49년 6월 21일의 농지개혁. 그러나 이것마저 민족주의자들이 지배하던 국회의 업적일 뿐임. 4월 27일 국회에서 통과되자 이승만은 거부권을 행사했고, 국회는 재의결로 확정.

▣ 그러나 재정부담능력의 부족을 내세워 시행되지 못하다가, 50년 3월 10일에 개정하여 시행. 소유 상한 3정보, 보상가액 평년작의 1.5배, 보상기간 5년, 상환가액 1.5배, 상환기간 5년 등. 상환가액만 당초의 1.25배에서 1.5배로 상향조정.


3. 전쟁 후 이승만 정권의 경제정책

가. 전쟁 중의 경제정책

▣ 전쟁 직후인 50년 7월 6일 정부와 주한미군이 [원화대여에 관한 협정]을 체결. 미군의 군비지출을 한국은행 대출로 지원하자는 것. 7월 28일에는 [유엔군 경비지출에 관한 협정]으로 대체.

▣ 이것은 미 군정하의 점령군 군비를 조선은행의 화폐발행에 의존했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실책. 화폐증발에 따른 물가폭발이 이미 예정되었던 것.

▣ 물론 7월 31일에는 유엔 안보리가 전시구호원조를 결의하고, 50년 8월부터 54년 6월까지 4.6억 달러의 구호물자 제공한 것도 사실. 그러나 화폐증발의 경제적 폐해가 훨씬 더 심각.

▣ 50년 말 부산 도매물가는 전년말 대비 187.7% 상승, 51년 서울 도매물가는 212.7% 상승, 52년 서울 도매물가와 소매물가는 102.3%와 109.0% 상승. 군비조달을 한국은행의 화폐증발에 의존한 것이 전시 중의 물가폭발에 결정적으로 가세.

▣ 다만, 50년 6월 28일에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금융기관의 예금 및 자금 지급을 일시 중단한 것은 적절한 조치. 이런 조치가 없었다면 예금인출 사태로 인해 금융기관은 붕괴위기에 몰렸을 것이며, 경제적 혼란도 더욱 가중되었을 것.

▣ 전쟁발발과 함께 황급하게 후퇴하느라, 조선은행권을 전부 소개하거나 파쇄하지 못한 것은 국가경제의 경영능력을 의심케 하는 중대한 실책.

▣ 국가경제에 있어서 어느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화폐가치의 신뢰를 유지하는 것. 그리고 그 의무는 중앙은행에 있는데, 이것을 포기한 것.

▣ 북한은 조선은행권 100원권을 남발. 50년 8월 28일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동하여, 한국은행권으로 통화교환을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함. 5차에 걸쳐 교환대상의 93%인 719억원 교환.

▣ 한편, 전비조달을 위해 증세정책을 쓴 것과 52년 5월 15일에 수출입을 연계시켜 수출을 촉진키 위한 [구상무역제도]를 도입한 것은 그나마 전쟁 중 경제정책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

▣ 52년 5월 24일에는 한미조정협정(Meyer협정)을 체결. 원조물자 판매대금을 한은 차입금 상환에 우선적으로 사용하고, 유엔군 대여금도 달러화로 조속히 상환하기로 한 것.

▣ 무엇보다 경제회생에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유엔군과 한국간의 정책조정을 위해 경제조정위원회를 설치한 일.

▣ 이런 기구에 근무하던 관료들이 국가경제의 경영에 대해 식견을 갖추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것. 이들이 국제기구와 원조기관에 근무하던 사람들과 함께 훗날 우리 경제를 살리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됨.


나. 전쟁 후의 경제정책

(1). 53년도 주요 경제정책

▣ 3년여 동안의 전쟁으로 생산시설의 대부분이 파괴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나, 국가경제의 재건에 대한 정책적 의욕을 생성시키는 계기가 마련됨. 전쟁 후부터 비로소 국가경제의 경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

▣ 종전이 임박해질 무렵인 53년 2월 15일에는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긴급통화조치 단행. 화폐단위를 원에서 환으로 변경하는 통화개혁. 전쟁 중 증발된 통화의 환수를 위해, 대부분의 예금을 국채예금과 저축예금으로 강제 전환. 금리도 4.8∼5.0%로 제한.

▣ 53년 4월 16일, 미국 대통령 특사 타스카 일행이 내한하여 재정금융구조개혁을 건의하고, 한국경제 재건을 위해 [3개년 원조계획]도 함께 건의. FOA(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 원조로 현실화.

▣ 53년 10월 1일 융자순위제 실시. 자금의 공급재원이 부족하여, 국민경제 상의 중요성과 긴급성에 따라 갑을병 등 3종으로 구분하여 자금공급. 갑종은 농림어업과 제조업 등 생산자금, 병종은 사치품 생산업이나 오락업 등의 자금, 을종은 기타.

▣ 53년 12월 14일, 경제재건과 재정안정계획에 관한 합동경제위원회 협약을 미국과 체결. 재정균형, 단일 환율 설정, 통화가치 안정, 여신관리 효율화 등을 위한 기본 방향을 설정. 대충자금(원조물자 판매대금)은 재건투자 및 전란 수습에 사용키로 함.

▣ 53년말 서울 도매물가는 전년말 대비 26.2% 상승에 그쳐 해방 후 최저수준을 기록. 통화개혁과 유엔군 대여금 상환자금에 의한 수입물자의 확대가 물가안정에 기여.

(2). 54년도 주요 경제정책

▣ 54년 2월 4일, 네이산 협회가 한국경제 재건계획서를 유엔한국재건단(UNKRA)에 제출. 5년간 원조 규모를 19억 달러로 제시하고, 재건계획 및 금융 세제 무역 등 경제부문별 정책방향 제시. 5월 31일에는 UNKRA 협약을 체결.

▣ 54년 7월, 정부는 54년도(7월1일∼익년 6월30일) 국가종합자금계획 수립. 연간 통화량 증가율을 59% 이내, 물가상승률을 25% 이내로 억제. 원조물자 판매대금 640억환으로 재정투융자 실시. 비록 미국과의 합의에 따른 것이지만, 국가경제의 본격적인 경영이 최초로 시작된 업적으로 평가할 만 함.

▣ 54년말 서울 도매물가와 소매물가는 전년말 대비 각각 51.3%와 47.9% 상승. 양곡가격 폭등(41.5%)이 물가상승의 악순환을 불러 옴.

(3). 55년도 주요 경제정책

▣ 55년 1월 20일, 수출장려보상금 교부제도 도입. 이후 수출진흥을 위해 정책적으로 심혈을 기울였으나, 성과는 미흡.

▣ 55년 8월 18일 대일 교역중단 조치. 대일 무역적자 누적과 일본과 중국의 무역협정 체결이 명분.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큰 피해를 안김. 경제의 정치적 이용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 불과 4개월 만인 12월 17일 재개.

▣ 55년 9월 5일, 공공요금 인하를 위한 대통령 긴급명령 공표. 담배 소금 철도 전화 등의 요금을 30∼90% 인하. 8월 15일의 공정환율 인상(180환에서 500환으로)으로 인한 물가불안을 막기 위한 조치. 그러나 역불급.

▣ 55년말 서울 도매물가 및 소매물가는 각각 42.8%와 27.4% 상승. 대통령 긴급명령이 발동된 9월 이후에는 연말의 도매물가가 19.2%나 하락하였지만, 그 효과도 일시적.

(4). 56년도 주요 경제정책

▣ 56년 2월 1일 증권거래소 설립. 3월 3일 증권거래 개시, 건국국채와 16개 종목의 주식 상장. 3월 29일의 재무부 귀속 조흥은행 주식 공매 실시, 이후 상업은행 흥업은행 저축은행 주식의 공매로 이어짐. 금융시스템의 구축이 본격화된 계기가 됨.

▣ 56년 12월 17일 수출장려 보조금제도 도입. 수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 실적은 아직 미흡.

▣ 56년말 서울 도매물가와 소매물가는 각각 46.2%와 46.0% 상승. 물가불안으로 경제활동도 위축되었으며, 56년 실질 GDP 성장률이 -1.3%를 기록.

(5). 57년도의 주요 경제정책

▣ 각종 경제계획이 본격적으로 수립되기 시작. 57년 4월 1일 [전원개발 5개년 계획] 수립. 6개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여 61년까지 전력난 해소를 목표로 하였으나, 자금확보가 뒤따르지 못해 계획대로 진행되지는 못함. 5월 17일에는 [탄전종합개발 10개년 계획]도 수립.

▣ 4월 20일에는 합동경제위원회가 57년도의 재정금융안정계획을 수립. 통화량 56년 수준 동결, 세출 삭감 등 재정적자 475억환 이내로 억제, 금융부문 신규대출 제한, 외환매매 등 기타 부문도 통화에 대해 중립적으로 운용 등.

▣ 이것은 최초의 연차적 경제재정 안정계획으로서, 분기별로 세부적인 계획까지 수립. 통화지표(M1)에 의한 통화관리가 최초로 이루어지게 됨.

▣ 9월 26일 문경 시멘트공장 완공. 54년 착공 3년 만에 준공. 연산 20만톤 규모로서 국내 수요량의 1/3. 9월 30일에는 인천 판유리공장 준공. 국내 수요를 거의 충족. 국가 3대 기간산업 공장의 다른 하나인 충주비료공장은 55년 착공하여 59년 10월 22일 준공, 국내 최초로 요소비료 생산시작. 완제품 생산능력 8.5만톤.

▣ 57년말 서울 도매물가와 소비자물가는 전년말 대비 각각 6.9%와 2.1%가 하락함으로써, 물가가 안정되고 생산이 활발해지는 등 경제가 정상화될 수 있는 기틀이 이제야 마련됨. 통화지표를 통해 통화량을 엄격하게 관리한 통화정책이 주효.

(6). 58년도 이후의 주요 경제정책.

▣ 58년 4월 1일 부흥부 산하에 산업개발위원회를 설치하고 중장기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키로 함.

▣ 58년말 서울 도매물가와 소비자물가는 전년말 대비 각각 8.4%와 5.3% 상승. 연간 평균 상승률로는 각각 6.5%와 3.1%가 하락, 물가안정기조가 정착됨. 합동경제위원회의 재정금융안정계획이 큰 역할을 함.

▣ 59년 1월 20일, 동양시멘트 개발차관기금 차관도입협정 체결. 무상원조에서 유상원조로 전환된 계기가 됨.


146. 현대 한국경제사 신 고찰 3
작성날짜 : 2002-01-03 오후 12:49:11 조회수(917)

▣ 59년 4월 8일, 석탄개발 8개년 계획(59년∼66년) 수립. 270만톤 생산에서 66년 1,020만톤 생산으로 확대하자는 것.

▣ 59년 6월 15일 대일 통상중단 조치. 재일동포 강제북송에 따른 조치. 다시 정치논리가 경제정책을 좌우.

▣ 59년 12월말 서울 도매물가 및 소비자물가는 전년말 대비 각각 11.6%와 8.4% 상승. 물가안정 지속.

▣ 60년 1월 1일, 외자도입촉진법 제정. 원조 감소에 따른 투자재원 부족을 해소키 위해서 채택한 정책.

▣ 60년 4월 15일 [경제개발 3개년계획](60∼62년) 국무회의 의결. 최초의 종합적인 경제개발계획이었으나, 4촵19혁명으로 무산.

(7). 미국 원조에 대한 단상

▣ 해방 직후 농업기반이 취약해지고 미약한 산업시설마저 대부분 가동이 멈췄을 때, 미국의 원조가 국민들의 굶주림과 헐벗음을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한 것은 사실. 또한 6촵25로 그나마 폐허가 된 뒤에는 더 큰 역할 을 한 것도 사실.

▣ 그러나 우리 경제의 대외의존성을 높임으로써 경제의 자생력을 소진시키고, 자발적인 경제회생 노력을 무산시킨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음.

▣ 우리 경제가 본격적으로 회생의 길을 걷게 된 때가 미국의 원조가 급감하기 시작한 50년도 후반부터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점이 많음.

▣ 원조의 급감으로 국제수지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수출증대를 위한 노력도 나타나게 됨. 그리고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물가안정이 급선무라는 사실도 인식하게 됨.

▣ 이런 의미에서 미국 원조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은 재고해보아야 할 일. 또한 미군 주둔군비를 화폐발행액에 의존했던 것 등의 경제정책 실패가 가져온 경제난도 함께 고려해야 함.


4. 민주당 정권 하의 경제정책

▣ 60년 4월 27일 이승만 하야, 6월 15일 내각제 개헌, 8월 13일 윤보선 대통령 취임, 8월 18일 민주당 정부 출범 등 집권기간이 61년 5월까지 1년도 되지 못해서, 혼란만 있었을 뿐 뚜렷한 경제업적은 없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음.

▣ 그러나 정권이 교체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심각한 가운데 경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것만도 훌륭한 업적. 성장률도 당시의 경제여건이나 정치적 급변을 감안하면 비교적 양호한 편.

▣ 60년 도매물가 및 서울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각각 10.7%와 8.3% 상승. 61년은 각각 13.2%와 8.0% 상승. 성장률도 60년과 61년에 각각 1.2%와 5.9%을 기록.

▣ 또한 61년 5월 10일 [5개년 개발계획](62∼66년)을 공표한 것도 탁월한 업적. 이후 경제발전의 기틀이 되었던 불균형성장전략이 이 때 채택된 것도 평가할 만 함. 또한 이 계획은 박정희 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모태가 됨.


5. 박정희 정권의 60년대 경제정책

가. 재평가의 필요성

▣ 민주당 정부가 실현 가능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한 것이나, 50년대 말이래 우리 경제가 안정을 찾으면서 성장의 기틀을 잡았던 사실은 5촵16군사 쿠테타 세력에 의해서 완벽하게 은폐됨.

▣ 사실 경제성장은 이미 50년대 후반부터 시동을 걸었었음. 성장률이 57년에 7.6%, 58년 5.5%, 59년 3.9% 등을 기록하여 비교적 안정적인 성장세로 보이고 있었던 것. 60년에는 정치적 혼란으로 성장률이 1.2%에 그쳤으나, 경제안정을 유지하면서 성장잠재력을 키우고 있었음. 그래서 61년 성장률은 다시 5.9%를 기록.

▣ 반면에, 박정희 정권의 경제업적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면이 많음. 군사정권이 61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무려 30년 이상이나 지속된 데다, 권력의 시녀노릇을 하던 언론이 박정희 정권의 경제업적을 끊임없이 찬양하면서 국민들을 세뇌시켰기 때문.

▣ 또한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오랜 세월 영화를 누렸던 경제관료들의 영웅담이 가세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경제업적은 지나치게 미화되었음. 물론 눈부신 경제성장 실적이 뒷받침한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적 인식이 정당한 평가에 기초했다고 말할 수는 없음.

▣ 일부 비판적인 사람들은 관념적인 비난을 일삼기도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 따라서 올바른 재평가가 시급한 실정. 결론부터 먼저 밝히자면,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은 과오와 공적이 병존.

▣ 따라서 어떤 정책이 실책이고 어떤 정책이 성공이었는가를 공정하게 밝혀서, 향후 경제정책의 수립에 적극 반영하여야 하였음.

▣ 그러나 온통 찬양으로 일관하면서, 경제실책을 반복하는 결과를 빚음. 환란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정도.


나. 주요 경제업적의 평가와 비판

▣ 현존하는 대부분의 자료는 박정희 정권의 초기 경제정책까지 미화하고 있음. 그러나 초기의 경제정책은 실패의 연속으로서, 국가경제의 경영능력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

(1). 경제정책의 결정적 실패 사례 1 : 금융활동 동결

▣ 61년 5월 16일, 전 금융기관의 금융활동을 동결시킨 것은 경제시스템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던 결정적인 실책 중 하나. 8월 24일 전면 해제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기간동안 금융기관의 경영수지는 빠르게 부실화되었으며, 신용수렴 현상까지 겹치게 됨.

▣ 여기에다가 6월 20일에는 금융기관 대주주의 의결권을 10% 이내로 제한하는 임시조치법을 제정하고, 10월 29일에는 부정축재처리법에 의해 대주주의 은행주식을 환수하는 등의 충격적인 조치들이 금융시스템에 가해짐. 관치금융이 시작된 계기가 됨.

▣ 금융시장의 혼란이 극심해지면서, 7월 6일에는 한국은행이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급준비율을 낮추지 않을 수 없었음(요구불예금의 경우 20%에서 14%로 인하). 또한 예금을 촉진하기 위해 예금 최고금리도 3∼5%를 인상하였고, 7월 29일에는 모든 예적금에 대해 비밀을 보장하는 법률을 만들게 됨.

▣ 대출금리도 인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8월 17일에는 상업어음 할인 최고금리를 13.9%, 중고기업자금은 17.5%로 상향. 고금리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

▣ 그래도 신용경색이 풀리지 않아서 화폐발행을 늘려야 했음. 61년말의 화폐발행잔액은 전년말에 비해 24.0%나 증가. 참고로 59년과 60년말의 증가율은 각각 13.8%와 10.6%였었음.

▣ 11월 1일에는 통화량의 급증을 막기 위해 통화안정증권법을 제정. 11월 16일 최초로 통화안정증권이 발행되었으나, 시중은행의 자금사정이 다시 급속하게 악화되자 66년 3월까지 중단.

▣ 결국 61년말 통화량이 전년말 대비 57.7%나 증가, 이중 94.2%가 5촵16 이후에 증가. 총통화는 46.0%나 증가. 이에 따라 물가가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

그러자 61년 11월 19일에는 [물가조절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하여 물가동결 조치를 취하는 등 각종 물가통제정책을 남발.

(2).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허상과 진상

▣ 박정희 정권의 최대 치적으로 손꼽히는 것은 경제성장이고, 이것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의해 이룩되었으며, 이 계획은 전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공적인 것으로 선전되고 있음.

▣ 그러나 이것은 진실을 왜곡한 것. 이미 이승만 정권 말기에 경제개발3개년 계획을, 민주당 정권에서도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했었음. 민주당 계획서를 바탕으로 급조한 것이 박정희 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61년 7월 22일 성안, 62년 1월 발표.

▣ 이것마저도 시행 초기에는 미국 원조의 감소와 외자도입의 미흡 등 투자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차질을 빚음. 여기에다, 성장률 저하와 물가 불안 등 경제여건이 악화되자 62년 11월에는 계획 수정에 착수. 1년 반이 지난 64년 2월에 잔여연도의 수정계획을 발표.

▣ 계획 1차 연도인 62년의 성장률은 당초 계획 5.7%보다 훨씬 낮은 2.1%에 불과했고, 특히 1차산업은 6%나 오히려 감소. 더욱이 외환보유액이 한 때 1억 달러를 밑도는 등 외환위기 징후까지 나타났음. 61년말의 외환보유고는 2.07억 달러였는데, 62년말에는 1.69억 달러로, 63년말에는 1.32억 달러로 감소.

▣ 한 마디로 말해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총체적 부실을 출발점으로 했던 것. 이런 실패의 결정적 원인은 위에서 언급한 금융활동 동결조치. 이것이 금융시스템의 정상적 작동을 저해했던 것. 이외에도 후술하는 증권파동과 통화개혁도 경제정책 실패의 대표적 사례로서, 후손에 길이 교훈으로 남겨주어야 할 것들.


147. 현대 한국경제사 신 고찰 4
작성날짜 : 2002-01-04 오전 8:26:33 조회수(889)

(3). 증권파동 : 중요한 경제정책 실패 사례 2

▣ 62년 5월 31일에는 증권파동이 발생. 50년대 후반의 안정적 성장을 기반으로 증권시장이 호조를 보이다가, 62년 들어 과열양상을 보이기 시작. 그러자 정치자금을 조성하려는 음모까지 가세하면서 사태를 악화시킴. 이것은 국가경제는 무너져도 상관없다는 가장 악질적인 사고방식.

▣ 이미 4월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수도결제자금 부족현상이 심화되어 5월31일에는 5월분 수도결제를 불이행. 그 규모가 무려 500억환으로서 62년말 화폐발행 잔액 2,070억환의 1/4 수준.

▣ 62년 6월1일에는 증권거래 정지, 금융시장이 일대 혼란을 겪음. 만약 증권거래규모가 조금만 컸더라도 금융공황이 발생했을 것이나, 그 규모가 적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

▣ 그래도 타격은 커서 그 후유증이 지속됨. 8월 15일에는 대동증권이 영업정지를, 8월 31일에는 태양증권이 영업정지를 당했으며, 8월 31일에는 증권시장을 다시 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됨(9월 4일 재개장). 또한 9월 4일에는 삼성증권까지 영업정지를 당함.

▣ 증권파동 이후 증권시장은 기업의 직접자금을 조달하는 시장 및 건전한 투자의 장이 아닌, 투기장이자 도박장으로 인식되는 계기가 됨. 이에 따라 기업경영을 은행대출에 의존하는 차입경영 폐습도 정착되고 말았음.

▣ 증권파동은 기업의 자금조달을 더욱 어렵게 하여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차질을 빚게 한 결정적 원인으로도 작용하였고, 동시에 화폐개혁이라는 또 다른 경제실책을 불러오기도 하였음.

(4). 화폐개혁 : 또 다른 경제정책 실패 사례 3

▣ 62년 6월 9일의 긴급통화조치로 화폐개혁 단행. 구권 화폐의 유통과 구권 화폐에 의한 거래를 금지하고, 구권과 구권으로 표시된 각종 지급수단을 금융기관에 예입토록 조치.

▣ 1천만원 이상의 예금은 완전 동결하고, 동결된 예금은 특별지급준비금으로 한국은행에 예치토록 함.

▣ 화폐개혁의 명분은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고소득층의 유휴자금을 끌어내자는 것이었으나, 1천만원 이상 신고자는 6.1%로서 자금편재현상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짐. 감각적 판단의 위험성을 증명.

▣ 화폐개혁은 신용경색을 불러옴으로써 경제혼란만 가중시킴. 금융시스템의 신용창조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됨에 따라 61년에 이어 62년에도 통화증발을 유발, 화폐발행액 증가율은 전년말 대비 14.4%로서, 성장률 2.1%에 비해서는 과다.

▣ 증권파동의 여진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화폐개혁까지 가세하자, 금융기관의 부실화가 더욱 진전되고 신용경색이 극심해짐. 그래서 6월 16일에는 지급준비율을 14%에서 10%로 인하했으나, 신용경색현상은 계속됨. 결국 7월 13일에는 예금동결조치를 해제.

▣ 또한 12월 31일에는 4개 시중은행에 대규모 증자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됨. 은행별 자본금을 각각 3.5-4.3억원에서 그 세 배에 가까운 10-11억원으로 증자.

(5).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전략의 성공과 그 배경

▣ 이상과 같은 경제정책의 중대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 하의 경제성장 실적은 눈부신 바가 있었음. 집권초기인 62년 성장률만 2.1%로 낮았을 뿐, 63년은 9.1%, 64년 9.7%, 65년 5.7%, 66년 12.2%, 67년 5.9%, 68년 11.3%, 69년 13.8%, 70년 17.6% 등 높은 성장률을 기록.

▣ 계속적인 경제정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당시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이 그만큼 매우 높았던 데에 기인. 실제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미 50년대 후반부터 성장가도에 진입했었음.

▣ 다만, 50년대 후반은 물가안정을 급선무로 삼아서 성장률이 약간 낮았을 뿐임. 만약 5촵16 쿠테타가 없었더라면, 금융활동 동결과 증권파동 그리고 화폐개혁 등으로 빚어진 경제적 혼란을 거치지 않고도 안정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을 것.

▣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 63년 이후 우리 경제의 고속성장은 계속되었음. 그리고 그 고속성장에 있어서 경제관료들의 역할은 빼놓을 수 없음. 가능성을 현실화시킨 것도 공적일 수 있으므로, 이들의 역할은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 아울러 경제관료들을 분발시킨 박정희의 리더쉽 역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

▣ 박정희의 주도로 경제장관회의, 경제장관협의회, 월례 경제동향보고, 수출진흥확대회의 등 각종 회의가 활성화되면서, 경제관료들의 창의와 열성이 촉발되었으며, 우수한 인재가 발탁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경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까지 고조시킴.

(6). 경제성장의 혹독한 대가, 물가폭등

▣ 해방 후 10여년간 폭등하던 물가가 50년대 후반부터는 모처럼 안정세를 찾았으나, 경제성장이 본격화되던 63년부터 다시 폭등세로 전환됨으로써, 고속성장에 따른 혹독한 대가를 지불.

▣ 63년 2월 1일에는 [당면 물가안정대책]을 발표, 효과는 별무. 미지근한 대책이었고, 물가상승을 일시적인 현상으로 분석하는 결정적 실책을 범했기 때문.

▣ 서울 소비자물가는 63년 이래 70년까지 연도별로 각각 20.7%, 26.5%, 13.6%, 12.0%, 10.9%, 10.8%, 12.8%, 15.5% 등 매년 두 자리 수의 상승률을 기록.

▣ 이런 물가의 급등은 저축의 실질이자율을 전반적으로 마이너스로 기록하게 함으로써, 만성적인 저축부족을 심화시키고, 경제개발자금을 외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음.

▣ 또한 물가불안은 빈자로부터 부자로 소득을 이전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켜, 계층간 소득격차를 키웠으며, 물가상승에 따른 강제적인 저축이 이루어지게 됨.

▣ 물가불안은 부동산 투기가 본격화되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함. 67년 11월 29일에는 [부동산 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는 등 안간힘을 썼으나, 이후에도 부동산 투기는 간헐적으로 나타나면서 우리 경제의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력을 손상.

(7). 수출증대를 통한 성장동력의 확충

▣ 50년대 후반부터 물가가 안정되고, 이후 국제경쟁력도 자연스럽게 살아나면서, 60년부터 수출이 본격화될 채비를 갖추었음. 정변의 연속 속에서도 60년과 61년의 수출증가율은 각각 65.7%와 24.7%를 기록했던 것.

▣ 당시는 외환보유고의 주요 공급원이었던 외국원조가 급감하고 있었던 상황. 57년 약 4억 달러에 이르던 원조액이 59년 2.2억 달러, 60년 2.5억 달러, 61년 2.1억 달러 등으로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수출증대만이 경제성장에 필요한 외환확보의 유일한 길.

▣ 박정희 정권 하에서도 62년 6월 21일 대한무역진흥공사 설립, 64년 6월 27일 수출진흥종합시책 발표, 9월 14일 수출산업단지 개발조성법 제정, 64년 수출산업단지 개발조성법 제정 등 수출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

▣ 61년 이래 70년까지의 수출 증가율은 연도별로 24.7%, 34.0%, 58.4%, 37.2%, 47.0%, 42.9%, 27.9%, 42.2%, 36.7%, 34.2% 등을 기록. 금액으로도 59년 0.2억 달러에서 70년 8.4억 달러로 10여년 사이에 40여배나 증가, 고도성장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음.

▣ 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던 원천은 우리 경제의 높은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력이었으나, 정책적 뒷받침도 큰 몫을 한 것이 사실. 특히 수출진흥확대회의가 큰 몫을 함.

▣ 수출진흥확대회의는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주재 아래 매월 열렸으며, 이 자리에는 경제기획원과 상공부 고위 공무원은 물론이고, 민간업체 대표들도 참석. 수출을 독려하고 점검.


다. 기타 주목할만한 경제정책들

▣ 62년 4월 17일 자동차공업 5개년계획 발표, 5월 31일 자동차공업 보호법 제정, 62년 8월 27일 새나라 자동차공장 준공 등 자동차공업이 자생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

▣ 67년 3월 30일에는 기계공업진흥법과 조선공업진흥법을 제정. 69년 1월 28일 전자공업진흥법 제정. 70년 1월 1일 석유화학육성법과 철강공업육성법제정.

▣ 62년 7월 31일 장기결재 방식에 의한 자본재 도입법과 차관에 대한 정부 지불보증법을 제정. 외자유치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 드디어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됨.

▣ 65년 9월 6일 건설사업 10개년계획 발표, 9월 15일 경인선 복선 개통, 66년 10월 27일 수자원종합개발 10개년계획 발표, 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기공(70년 7월 7일 준공), 70년 4월 15일 호남고속도로 기공(73년 11월 14일 준공), 70년 12월 18일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 확정 등 사회간접자본의 적극적 확장.

▣ 68년에는 외환위기 도래. 무역수지 적자가 65년 2.88억 달러, 66년 4.66억 달러, 67년 6.76억 달러, 68년 10.08억 달러 등 지속적으로 급증. 68년 7월 9일 수입억제방안을 발표했으나, 외환사정은 계속 악화되어, 10월 14일에는 IMF의 대기성 차관 1,250만 달러를 최초로 인출.

▣ 경기과열에 따라 수입이 급증한데 따른 대가. 실제로 수입증가율은 66년 54.6%, 67년 39.1%, 68년 46.8%, 69년 24.7% 등을 기록. 70년 10월 11일에는 장기 국제수지 개선방안 발표.

▣ 이후에도 경기가 과열될 때마다 외환위기는 끊임없이 간헐적으로 나타나면서 경제의 발목을 잡곤 했음. 만약 이런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더라면 환란도 미리 예방할 수 있었을 것.

6. 박정희 정권의 70년대 경제정책

가. 경제적 상황과 전반적 평가

▣ 60년대 내내 지속된 고도성장은 70년대 들어서자 여러가지 부작용과 후유증을 불러오기 시작. 특히 물가 불안, 수출둔화, 국제수지 악화 등이 당면과제로 등장.

▣ 경제정책의 특성을 보면, 60년대까지는 각종 회의를 통해 다양한 견해가 취합되도록 하고 경제관료들을 분발시키는 역할을 박정희가 뒤에서 지원했다면, 70년대 이후에는 전면에 나서서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방식으로 전환.

▣ 자연히 경제정책의 축도 청와대로 옮겨지면서 경제기획원이 소외되기 시작. [월례 경제동향 보고]를 통해 얻어진 경제지식들이 축적되면서, 박정희가 지나치게 자신감을 나타낸 것.

▣ 그러나 경제원리를 모르는 상태의 지식은 위험. 실제로 경기변동의 폭이 확대되고 빈번해졌음. 또한 박정희의 잘못된 정책판단으로 인해 우리 경제는 여러차례 위기를 겪게 됨.

▣ 다만, 유신체제의 성립과 함께 언론의 자유가 원천봉쇄되면서 표면화되지 않았고, 아직까지 아무도 진상을 모르고 있을 뿐임. 특히,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무리한 추진은 박정희 추종자들 사이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을 정도.

▣ 70년대 경제정책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샤워꼭지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음. 찬 물이 나온다고 가장 뜨거운 쪽으로 꼭지를 틀었다가 데이고, 다시 가장 찬 쪽으로 꼭지를 트는 등의 경제정책을 거듭 폈다고 할 수 있음.

▣ 그렇다고 경제성적표가 나빴던 것은 아니고, 70년대에도 전반적으로 고도성장을 지속한 것은 사실. 그러나 단기간에 경기과열과 경기냉각이 반복되면서 경제체력이 크게 소진되는 결과를 빚음. 특히, 성장잠재력이 약화되고 국제경쟁력이 떨어지는 등 경제의 건강성이 극도로 악화된 것.

▣ 이런 가운데 80년대를 맞게 되며, 경제의 건강성을 되찾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80년대 내내 기울여져야 하게 됨.


나. 주요 경제정책과 그 평가

(1). 결정적 실책 : 경기과열과 냉각의 거듭된 반복

▣ 급격한 경기변동은 박정희가 경제정책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 60년대 후반부터 이미 시작. 63년과 64년 성장률이 각각 9.1%와 9.7%를 기록하다가 65년에는 5.7%로 뚝 떨어졌었고, 66년에 다시 12.2%로 뛰어올랐다가 67년에는 5.9%로 떨어졌었음.

▣ 그러다가 68년부터 70년까지는 경기가 비교적 장기간 호조를 보이면서 과열되는 양상을 나타냄. 성장률이 각각 11.3%, 13.8%, 17.6% 등을 기록.

▣ 이런 고도성장은 통화팽창과 재정팽창에 기인한 바가 컸음. 통화 증가율은 66년 29.7%에서 67년 44.5%, 68년 44.6%, 69년 41.7%, 70년 22.1% 등을 기록. 재정팽창도 극심하여 69년의 경우 일반회계가 41.3%나 증가.

▣ 간단하게 표현해서, 60년대 말의 '호경기'는 통화팽창과 재정팽창 그리고 과도한 차관도입까지 가세하여 인위적으로 초래되었던 것. 이것은 호경기로 부르기보다는 경기과열이라고 불러야 함.

▣ 이에 따라 후유증과 부작용이 심각하게 나타나기 시작.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67년부터는 부동산 투기가 본격적으로 극성을 부렸고, 물가불안도 심각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68년부터는 국제수지도 악화되어 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음.

▣ 이후에도 국제수지 악화는 계속되는데, 무역수지 적자가 67년에 6.7억 달러로 전년대비 45%나 늘어난 데 이어, 68년 10.1억 달러, 69년 12.0억 달러, 70년 11.5억 달러, 71년 13.3억 달러 등 더욱 급증하였음. 이런 규모는 당시의 수출총액보다 더 컸었음.

▣ 결국 경기조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음. 71년 성장률이 8.8%로 약간 떨어지고, 72년에는 다시 4.8%까지 추락하여 불경기가 심화됨.

▣ 이에 따라 해외시장 개척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했고, 72년부터는 다시 수출이 급증세를 타면서 외환사정도 호전되기 시작. 그러나 급속한 경기후퇴까지 막지는 못하여 기업의 경영수지는 극도로 악화됨.

▣ 이렇게 되자 72년 2월 14일에는 [당면경제시책]을 발표하여 대대적인 경기부양에 나서게 됨. 기업의 경영수지 부담을 재정금융 면에서 완화해주고,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도 도모. 또한 재정정책을 통해 경기를 적극적으로 부양. 화폐발행잔액 증가율도 71년의 17.4%에서 72년 31.5%, 73년 44.1% 등을 기록.

▣ 72년 10월부터는 산업합리화 자금을 재정차관 등을 통해 조성하여 운용하기 시작. 차관도입으로 설립된 부실기업들을 정리하자는 것으로 구조조정의 최초 사례가 됨. 자세한 내용은 후술.

▣ 이후 사채동결에 따른 재산권 침해와 부실기업에 대한 특혜 등 시비가 일어나자 12월 30일에는 기업공개 촉진책을 제시.

▣ 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는 [중화학공업시대]를 선언. 80년대초 100억 달러 수출을 목표로 철강, 조선, 기계, 전자, 석유화학, 비철금속, 시멘트 등 중공업부문의 생산시설 능력을 정책적으로 크게 높이겠다는 것.

▣ 어떻든, 이상과 같은 정부의 특단의 경기부양책에 힘입어 73년에는 성장률이 12.8%까지 수직 상승.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이 닥치면서 74년부터는 다시 경기가 냉각되기 시작. 이후 자원파동까지 겹치게 되자 경제사정은 더욱 어려워지게 됨.

▣ 74년 성장률은 8.1%로 떨어지고 75년에는 다시 6.6%까지 하락. 이런 가운데 물가상승률은 74년 24.8%와 75년 24.7%를 기록, 당시 발표된 여러 차례의 강압적 물가안정대책도 무위.

▣ 국제수지(경상수지)도 다시 급속도로 악화되어 73년의 3.1억 달러 적자에서 74년의 20.2억 달러와 75년의 18.9억 달러 등의 적자를 기록하게 됨. 외환위기가 심각하게 우려되는 상황으로 발전.

▣ 다행히 수출 증가율이 72년 52.1%, 73년 98.6%, 74년 38.3% 등을 기록하고 중동 건설붐까지 가세하면서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음.

▣ 뒤늦게 74년 11월 22일에는 [수출촉진을 위한 금융세제면의 종합정부지원시책]을 발표, 그러나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 만연으로 75년 수출증가율은 오히려 13.9%로 후퇴.

▣ 결국 75년에는 수출부진에 따른 수요감퇴, 재고과다, 생산활동 저조, 고용감소, 국제수지 압박 등이 나타나면서 경기가 다시 급속도로 냉각됨.

▣ 이에 따라 75년 6월에는 주택장기건설계획을 발표하는 등 다시 내수진작을 통한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을 실시. 화폐발행잔액 증가율은 물가안정을 위해 75년 23.3%까지 떨어뜨렸었는데, 76년에는 31.3%, 77년 40.4%, 78년 44.3% 등을 기록.

▣ 마침 때를 맞춰 중동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국내경기도 본격적으로 회복세를 보임. 정부도 75년 12월 31일 해외건설촉진법 및 지원제도를 발표하여 뒷받침을 해주었으나, 이때는 이미 민간기업의 중동진출이 활기를 띠고 해외건설수주도 급증하고 있었음. 결과적으로 해외건설 진출이 과열되었으며 과당경쟁까지 낳게 됨.

▣ 어떻든 60년대 말과 같은 비교적 장기간의 호경기가 다시 닥쳐오지만 제동이 걸리지 않은 체 경기과열로 치닫게 됨. 76년 성장률은 11.8%, 77년 10.3%, 79년 9.4%를 기록했던 것.

▣ 이런 경기과열은 다시 심각한 부작용과 후유증을 초래. 과거의 경기과열과 마찬가지로 물가가 불안해지고, 국제수지가 악화되었으며, 부동산투기와 주식투기까지 가세하게 됨.

▣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77년 10.0%에서 78년 14.7%, 79년 18.5%, 80년 28.7% 등을 기록. 국제수지도 77년 최초로 1,200만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가 급전직하하여 78년 10.9억 달러 적자, 79년 41.5억 달러 적자, 80년 53.1억 달러 적자를 기록함.

▣ 이처럼 후유증과 부작용이 심각해지면서 경기하강을 예비하고 있었으며, 제2차 석유파동까지 겹치게 되자 중대한 경제위기에 처하게 됨. 80년 성장률은 -2.7%를 기록했는데, 석유파동의 영향도 있었지만, 이미 78년부터 국제수지와 물가 등 각종 경제지표가 악화되고 있었고, 국내경기 역시 79년부터 후퇴하고 있었음.

▣ 결론적으로, 60년대 후반부터 불과 10여년 사이에 경기과열과 경기냉각이 세 차례나 반복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결정적인 경제정책의 실패. 경기과열과 경기냉각의 반복이 성장잠재력과 국제경쟁력을 떨어뜨리면서 80년대초의 경제난을 불러왔기 때문.

(2). [8촵3조치]의 공과

▣ 60년대 말 차관도입이 러시를 이루면서 71년까지 147개의 기업이 탄생하였으나, 과도한 정치자금의 조성과 70년대 초반의 경기침체 등으로 많은 기업의 경영이 부실화됨.

▣ 특히 한국비료, 인천제철, 한영공업, 조선공사, 한국전기야금, 대림수산 등 대기업까지 부실화되어 경제에 큰 충격을 줌. 차관기업 중 21%가 70년대 초에 이미 부실화되었으며, 86개의 대기업을 정리대상으로 선정해야 했음.

▣ 결국 72년 8월 3일, 기업과 사채권자와의 계약을 무효화하는 초법적인 [8촵3조치]라는 사채동결 조치를 단행. 이것은 청와대가 전격적으로 단행한 것으로서, 이 때를 계기로 경제기획원은 경제정책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

▣ 사채동결 조치 이외에도, 기업들의 경영수지 개선을 위하여 금리를 일반대출의 경우 19%에서 15.5%로 대폭 인하. 또한 산업합리화 자금을 조성하여 기업의 합병을 촉진하고 생산의 전문화와 계열화를 도모. 9월 1일에는 사금융 양성화 조치를 취하여, 단자회사, 상호신용금고, 신용협동조합 등이 탄생.

▣ [8촵3조치]는 60년대 초반의 예금동결과 통화개혁과 마찬가지로 중대한 경제실책. 신용수축을 불러옴으로써 경기침체를 오히려 가속화시켰고, 결국 상기한 바와 같은 72년도의 대대적인 경기부양조치를 불러오는 결과를 빚었음.

(3).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무리한 추진

▣ 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육성정책 성명을 발표한 이래, 2월 3일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설치, 6월 중화학공업 추진을 위한 연구학원도시 건설예정지 충남 대덕 결정, 중화학공업육성계획 수립, 7월 국무총리 산하 장단기 자원대책위원회 설치, 경제장기전망 발표(72년∼81년), 8월 중화학공업 추진을 위한 기업경영시책에 관한 대통령 지시 발표,

▣ 9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산하 기획단 설치, 중화학공업발전을 위한 공업기술계 인력공급 및 공업교육 개선방안 발표, 10월 74년도 대통령 시정방침 발표, 11월 일반광 장기개발계획 수립, 12월 국민투자기금법 국회 통과 등등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몰아부침.

▣ 철강공업의 경우, 73년 6월 포항신항 확장계획, 7월 포항제철 완공, 조강능력을 76년까지 260만톤으로 그리고 79년까지는 700만톤으로 늘리는 확장계획 발표, 11월에는 제2종합제철 발족.

▣ 조선공업의 경우, 73년 3월 제2 대단위 조선소 건설계획 확정. 5월에는 조선공업육성기본계획 확정하여, 85년 수출 20억달러, 14개 조선소 건설, 조선능력 9.2백만 C/T 확보 등 목표. 7월 조선공사 옥포조선소 건설비 차관협정 체결. 9월 현대조선소 시설확장공사 착공, 10월 중형조선소 실수요자 선정 등.

▣ 기계공업의 경우, 73년 9월 장기기계공업육성계획 확정, 81년 기계류 생산목표 82억 달러, 수출목표 16억 달러, 43개 업종 123개 품목 지정업체 집중 육성. 같은 달 창원기계공업기지 건설계획 확정, 10월 상공부에 기계공업기획실 설치.

▣ 전자공업의 경우, 73년 1월 수출실적 2백만 달러 이상 목표. 전자기기 및 부품 생산업체를 위해 30억원의 산업합리화자금 우선 지원, 구미전자공업단지 15.9천평을 200만 평으로 확장하는 계획 수립. 9월 장기전자공업건설계획(73-81년) 수립.

▣ 화학공업의 경우, 73년 4월 제7비 건설계획 확정. 7월 석유화학공업육성 기본계획 확정, 80년까지 에틸렌 생산능력 60만톤 이상, 86년까지는 150만톤. 8월 제4 및 제5 정유공장 실수요자 선정.

▣ 이상과 같은 관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다음과 같은 많은 문제를 남김. 첫째, 가격과 시장이 아니라 정부가 일방적으로 투자분야와 기업가를 선정.

▣ 둘째, 중화학공업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로 다른 산업의 투자가 소외되었음. 이에 따라 수출경쟁력이 크게 약화.

▣ 수출증가율은 71년부터 77년까지 각각 27.8%, 52.1%, 98.6%, 38.3%, 13.9%, 51.8%, 30.2%, 26.5% 등을 기록했으나, 투자가 중화학공업에 집중된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78년부터는 각각 18.4%, 16.3%, 21.4%, 2.8%, 11.9% 등의 실적을 기록.

▣ 셋째, 환율과 금리 등의 가격변수가 크게 왜곡됨. 예를 들어, 75년의 경우 중화학공업의 대출금리는 평균 12%인 반면, 연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5.3%였고, 예금금리는 14∼15%였음. 그 결과로 저축률이 하락하고 수출경쟁력도 크게 손상되는 결과를 빚음.

▣ 넷째, 중화학공업의 특성상 단위사업 당 대규모 투자를 필요로 했으므로 대기업이 나설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따라 경제력의 집중을 더욱 심화시켰음.

▣ 다섯째, 무리한 사업추진으로 많은 기업들이 부실화되면서 경제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지불케 함. 그 폐해가 얼마나 컸던가는 전두환 정권의 산업합리화조치라는 부실기업 정리에서 자세하게 다루어 질 것.


다. 기타 주목할만한 경제정책들

▣ 71년 1월 19일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제도 도입으로 무분별한 도시팽창을 억제하고, 도시 주변의 녹지를 그나마 유지할 수 있게 함. 업적으로 평가할만 함.

▣ 71년 10월 27일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 발표. 산업기반 구축, 교통촵통신망 구축, 도시 개발, 주택건설, 생활환경개선, 공해방지, 수자원 개발, 국토보전 등을 담은 국토개발 기본계획.

▣ 71년 4월 12일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공사 착공(74년 8월 15일 완공), 71년 6월 16일 도시가스건설 8개년계획 수립.

▣ 유신체제가 기승을 부리던 1973년부터는 각종 노동관계법을 개악하여 노동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 등을 개정. 이런 채찍과 함께 산업재해보호보상법과 직업훈련법이라는 당근도 준비.

▣ 74년 5월 30일, 금융여신과 기업집중에 대한 대책을 발표. 경제력 집중에 따른 재벌규제정책의 효시를 이룸.

▣ 77년 10월 22일 수출 1백억 달러 달성. 77년 12월 31일 경상수지 흑자 1,200만 달러 실현. 1인당 국민소득 1,009 달러로 드디어 1천 달러 돌파.

▣ 75년 6월 주택장기건설계획 발표, 76년 8월 24일 서울 반포 등 11개 지구를 아파트지구 지정. 76년 9월 4일 주택건설 촉진법 개정, 20% 이상 공사 진척 후 분양 허용. 76년 10월 2일 반월 신공업도시 건설 확정. 76년 12월 31일 도시재개발법 제정. 77년 3월 7일 수도권인구 재배치계획 발표. 77년 4월 25일 국민주택 청약부금제 실시. 끊임없이 부동산 투기를 부채질한 꼴.

▣ 뒤늦게 78년 8월 8일에는 부동산투기억제 및 지가안정을 위한 종합대책 발표. 토지거래에 대한 허가 및 신고제 도입, 투기규제지역의 지정, 기준지가 고시지역 확대, 부동산소개업 허가제로 전환, 양도소득세 인상 및 미등기 전매 가산세 도입, 공한지세 도입, 토지개발공사 설립.

▣ 79년 4월 17일에는 대대적인 경제안정화 종합시책 발표, 생필품 수급원활화와 가격안정, 재정긴축과 통화긴축, 중화학투자의 조정, 부동산 투기의 근절 등. 중화학공업의 무리한 추진 등에 따라 나타난 경기과열의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한 것.

▣ 물가불안이 부동산 투기와 함께 기승을 부리게 됨에 따른 조치였으나 이미 역불급. 또한 긴축과 지원축소에 대한 업계의 반발로 당초의 정책의지가 퇴색함.


149. 현대 한국경제사 신 고찰 6
작성날짜 : 2002-01-06 오전 9:57:59 조회수(907)

7.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

가. 주요 경제각료 명단

▣ 경제수석 : 80년 9월 김재익, 83년 10월 사공일, 87년 5월 박영철.

▣ 경제기획원 : 80년 9월 신승현, 82년 1월 김준성, 83년 7월 서석준, 83년 10월 신병현, 86년 1월 김만제, 87년 5월 김만제

▣ 재무부 : 80년 5월 이승윤, 82년 1월 나웅배, 82년 6월 강경식, 83년 10월 김만제, 86년 1월 정인용, 87년 5월 사공일,


나. 집권 당시의 경제적 상황

▣ 박정희 정권시절, 경기과열과 경기침체가 너무 자주 반복한 결과로 그 부작용과 후유증이 우리 경제에 축적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경제체력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었음.

▣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산업시설을 건설하면 판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으나, 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품질과 가격이 우수하지 않으면 도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급변. 우리 경제가 양적인 성장의 단계를 지나 질적 성장의 단계로 진입하게 된 것.

▣ 특히 70년대 중반부터 무리하게 추진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과 70년대 후반의 경기과열이 맞물리면서, 부동산투기가 나타나고 물가불안도 심각해졌으며, 이에 따라 국제경쟁력이 약화되고 성장잠재력도 잠식되었음.

▣ 여기에다, 70년대 후반의 주식시장 과열이 갑자기 냉각되면서 경기침체를 촉진하게 있었음. 주가지수(80년초 기준)가 75년 79.8에서 76년 97.9, 77년 113.4, 78년 143.7까지 상승했다가, 이후 하향세로 바뀌면서 79년 120.6, 80년 108.8 등으로 떨어짐.

▣ 주식거래액도 76년 0.3조원, 77년 0.6조원, 78년 1.7조원까지 증가했다가, 79년에는 1.3조원, 80년 1.1조원으로 감소. 이에 따라 기업의 자금난이 가중되고 신용도 수축되면서 금융위기의 징후까지 나타나게 됨.

▣ 또한 국제수지 적자가 누적되고 외채가 급증하면서 외환위기의 징후조차 나타나고 있었음.

▣ 76년에 최초로 105억 달러를 기록한 외채는 77년 126억 달러, 78년 148억 달러, 79년 203억 달러, 80년 272억 달러, 81년 324억 달러 등,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음. 이런 상태에서 79년 국제수지 적자는 41.5억 달러, 80년 53.1억 달러 등 급증하고 있었음.

▣ 뿐만 아니라, 80년도의 극심한 경기침체로 재정수지마저 급속히 악화되어, 80년 0.6조원(세출의 7.3%)과 81년 1.1조원(세출의 10.1%) 등의 적자를 기록. 재정위기까지 가세한 것.

▣ 한 마디로, 80년 경제성장률이 -2.7%로 떨어진 극심한 경기침체, 78년∼81년의 4년 동안 국제수지 적자 누적액이 152억 달러(평균 외환보유고의 2.5배)에 달함으로써 빚어진 외환위기, 재정수지 적자의 급증에 따른 재정위기, 주식시장 급냉에 따라 진행되던 금융위기,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해외시장 침체와 수출 부진에 따른 경제위기 등 우리 경제가 총체적인 위기국면에 처해 있었음.

▣ 만약 박정희 치세가 8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더라면, 그리고 그의 정책기조가 유지되었더라면, 우리 경제는 중남미처럼 파탄을 면치 못했을 것.

▣ 실제로, 경제관료들에 의해 성안된 79년 4월 17일의 대대적인 경제안정화 종합시책을 박정희가 물타기 해버렸고, 5월 25일 발표된 중화학 설비투자조정계획의 추진도 무력화시켰는데, 이는 그의 위기의식이 얼마나 안이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줌.

▣ 만약 박정희 치세가 계속되고 경제위기가 본격화되었더라면, 그는 경제역적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 이런 의미에서 박정희는 지독히 운에 좋은 사람, 비록 비운에 갔지만 경제업적이 과대포장되어도 아직까지 설득력 있는 반론이 일어나지 않음.


다. 경제업적의 전반적 평가

▣ 박정희가 모든 조건이 성숙된 경제를 이끌면서 공적과 과오를 함께 남겼다면, 전두환은 최악의 경제를 물려받아서 80년대 말의 사상 최고라는 평가를 듣는 장기간의 호황을 이끌어냄.

▣ 이런 의미에서 경제정책적으로만 따지자면, 전두환의 업적이 박정희의 업적에 비해서 훨씬 월등하다고 평가할 수 있음.

(1). 전두환 정권의 최대 업적, 경제안정화가 성공하게 된 과정

▣ 전두환 정권은 제2차 석유파동(79년 12월)의 여파를 신속하게 반영. 80년 1월 29일 석유류 가격 59.4% 및 전기요금 35.9% 인상. 2월 2일 독과점품목 가격인상 허용, 31.1%∼37.2% 인상. 5월 4일 석탄가격 41.9% 및 연탄가격 35.3% 인상. 충격의 만성화를 예방.

▣ 전두환 정권 하의 경제정책은 전반적으로 경제안정화 최우선 정책으로 특징지어짐. 그러나 처음부터 경제안정화 정책을 취했던 것은 아님.

▣ 석유파동 직후 경기침체가 심화되자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실시. 80년도 세출증가율은 전년대비 무려 37.4%를, 81년에도 29.3% 등을 기록.

▣ 그러나 국제수지 적자가 81년에도 46.5억 달러에 이르고, 총외채는 80년의 272억 달러에서 81년 293억 달러 등으로 계속 증가하면서 외환위기의 징후가 더해 가자, 안정화정책으로 급선회.

▣ 실제로 외환보유고는 80년 66억 달러, 81년 69억 달러, 82년 70억 달러, 83년 69억 달러 등 70억 달러 미만에서 맴돌고 있었고, 이런 사정이 안정화정책으로 급선회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

▣ 그 결과 70년대 이후 30∼40%에 이르던 세출증가율이 82년에는 4.4%로 뚝 떨어짐.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82년 성장률을 7.6%로 높이는 결과를 빚음. 83년에도 세출증가율이 6.1%에 불과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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