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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6-21 09:32:138504 
경제운용도 인사가 만사(萬事)다
양승국
일반

글쓴이 : 21세기경제학연구소 소장 최용식

            (www.taeri.org)

우리나라 축구가 월드컵축구대회에서 세계4강에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히딩크의 뛰어난 리더십, 연고주의와 명성을 배제한 선수선발, 선수들의 열정, 탁월한 전술전략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원동력은 기초체력의 획기적인 강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기초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도, 아무리 훌륭한 전술전략이라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경제도 마찬가지이다. 기초체력이 튼튼하지 못하면 어떤 훌륭한 정책도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경제에 있어서도 문제는 기초체력인 것이다.


기초체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나태해지려는 마음과 끊임없이 싸워야 하고, 온갖 유혹과도 싸워야 한다. 이런 일은 당연히 인내를 요구하고, 고통을 요구하며, 땀을 요구한다.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으며, 기득권자는 더욱 싫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민들이 싫어한다고 회피할 일은 결코 아니다. 조참의 업적 중에서 "문체가 질박하고 꾸밈없는 장자(長者, 대장부)를 등용하고, 칭송이나 명성을 얻는 데에만 힘쓰는 자는 물리쳤을 뿐이었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칭송이나 명성을 얻는 데에만 힘쓰는 자는 국민들이 싫어하는 일을 좀처럼 추진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인사에 있어서 이 점을 특히 유의해야 한다.

인사(人事)는 만사라고 하지 않는가. 말 다르고 행동 다른 어떤 대통령 때문에 그 뜻이 퇴색하고 말았지만, 이 말은 영구불멸의 진리이다. 옛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는 150여 개에 달하던 나라들이 생존을 건 각축을 500년이나 지속했던 시대였다. 특히, 춘추시대에는 국력의 부침이 더욱 심했다. 패권을 장악한 강국조차도 오래가지 못했다. 국력의 부침을 눈여겨 들여다보면 그 원인이 모두 인사에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춘추시대에 첫 번째로 패권을 잡은 것은 제(齊)나라 환공이다. 환공은 관중을 기용했고, 관중은 제나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 환공이 춘추5패 중 으뜸자리를 차지하게 하였다. 한 사람의 인재기용이 이런 엄청난 업적을 낳았는데, 이 인사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는, 자신의 목숨을 노린 자를 재상으로 기용한 점을 들 수 있다. 환공이 개인적인 감정을 버리지 못했으면 결코 패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는, 관중을 스승으로 모시고 일년치의 세금을 녹으로 주는 등 최고의 예우를 했을 뿐만 아니라, 국정의 전권을 맡겼다는 점이다. 이런 예우가 수많은 인재들이 여러 나라에서 제나라로 몰려오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셋째는, 환공이 제후에 오르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포숙이 관중을 자신의 윗자리에 추천하였다는 점이다. 이처럼 통큰 일은 웬만한 장자(대인)가 아니면 할 수 없다. 관중도 습붕, 영월, 성보, 빈수무, 동곽아 등 유능한 인재들을 다수 추천했다. 이로써 제 환공 때에는 인재를 시기하고 배척하는 풍토가 아니라, 인재를 서로 추천하려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넷째는, 관중이나 포숙은 모두 비천한 신분이었다는 점인데, 이에 대해서는 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춘추시대는 정치적으로 봉건제 사회였고, 사회적으로는 귀족사회였다. 공족이나 대부 가문이 아니면 행세할 수 없었던 시절이다. 그런데 제 환공은 이런 전통을 깨뜨리고 관중을 재상에 등용했다.


'관포지교'라는 고사에는 관중의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지난 날 내가 곤궁하여 포숙과 같이 장사를 할 때, 그를 속여 좀 더 차지했건만, 포숙은 내 잘못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 포숙이 내 빈곤한 형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중의 신분이 비천하고 가난하였다는 사실은 이 말에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잘 알려진 이야기겠지만, 좀 더 이어가자면 이렇다. "내가 포숙을 위해 사업을 도모하다 실패하여 더 곤궁하게 되었지만, 포숙은 나를 우둔하다고 비웃지 않았다. 매사에 이로운 때와 이롭지 못한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한 세 군주를 섬겼고 매번 쫓겨났지만, 포숙은 나를 무능하다고 탓하지 않았다. 내가 이로운 때를 만나지 못한 탓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 번 싸움에 나가 모두 패해 도망쳤지만, 포숙은 나를 비겁자로 몰지 않았다. 나에게 노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시던 공자(糾)를 제후에 앉히려고 경쟁하다가 동료는 전사하고 온갖 수모를 겪었지만, 포숙은 나를 수치를 모르는 인간이라고 비웃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작은 절조에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내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지루한 이야기를 굳이 한 것은 포숙의 장부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숙은 인재를 추천만 한 것이 아니라, 간신을 열심히 배척하기도 했다. 이아(易牙, 혹은 역아라 불림), 수조(竪 ), 옹무(雍巫)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자식을 삶아 요리로 바치고, 스스로 거세하여 측근이 되는 등 못할 짓이 없는 자들이었다. 충성경쟁이나 일삼는 자를 배척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환공은 포숙의 충언을 듣지 않고 이들의 발호를 묵인하다가, 자신이 죽은 뒤에는 이 간신들이 내란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고, 그의 시신은 60여 일이나 방치되어 구더기에 파 먹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 결과 제나라의 국력은 날로 피폐하여 패권국가로서의 위상을 잃고 말았다. 인사는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역시 만사였던 것이다.


제 환공의 뒤를 이어 패자가 된 이가 진(秦, 이후 양승국 선생의 작명에 따라 섬진으로 부르기로 한다) 목공이다. 목공은 전쟁 포로에서 노예로, 노예에서 도망자로 전락한 백리해를 멀리 초나라까지 사람을 보내 불러왔다. 그리고 백리해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촌부였던 건숙을 자신의 윗자리에 추천하였다. 당시 섬진은 변방의 나라로서, 신분사회의 풍토가 더욱 짙었는데, 목공은 인재등용에 있어서 파격을 단행한 것이다. 그 덕분에 섬진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킬 수 있었고, 목공은 패자에 오를 수 있었다.


백리해가 목공에게 건숙을 추천한 말이 흥미 있어서 여기에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건숙의 현명함은 어찌 유독 군주께서만 모르신다고 하겠습니까? 비록 그가 살았던 제나라나 지금 사는 송나라조차 그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가 지혜로운 선비라는 사실은 저 혼자만 알고 있는 일입니다. 신이 옛날에 제나라로 벼슬을 구하러 갔을 때, 제나라의 공자 무지(無知)에게 출사하려던 것을 건숙(蹇叔)이 불가하다고 제지하였습니다. 그래서 건숙의 말을 따라 제나라를 떠나게 되어 공자 무지가 당한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곧이어 주 나라로 가서 왕자퇴(王子頹)를 모시려고 했으나, 역시 건숙이 제지하여 주나라에 출사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후에 왕자퇴가 반란을 일으켜 토벌 당했는데, 건숙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주나라를 떠난 신이 우(虞)나라에 가서 우공(虞公)에게 출사하려하자 건숙이 또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때 신이 너무 빈한한 처지여서, 건숙의 말을 듣지 않고 작록(爵祿)을 탐하여 출사했다가, 우나라가 당진(진晉)에게 망하게 되어 신은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신이 건숙의 말을 두 번 들어 화를 면했고, 한번 듣지 않아 몸을 망쳤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지혜가 중인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건숙은 송나라의 명록촌(鳴綠村)에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속히 사람을 보내 데려와야 할 것입니다."(출처 : 양승국 선생의 [열국연의] www.yangco.net 중 '대기만성 백리해')


목공이 죽은 뒤에는 섬진의 국력이 날로 쇠퇴하는데, 순장의 악습이 이런 사태를 초래했다. 역량이 뛰어난 신료들을 170여명이나 목공과 함께 순장했던 것이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뒷날 상앙이 등용될 때까지 무려 300년 가까이 섬진은 2류 국가로 남아 있게 된다. 인재의 중요성은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세 번째로 패자에 오른 이는 진(晋, 섬진과 구분하기 위해 양승국 선생의 작명에 따라 당진이라고 부르기로 함)나라 문공이다. 오랜 망명생활 끝에 어렵사리 군주의 자리에 오른 문공은, 거듭된 왕자의 난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자신을 해치려했던 정적들을 모두 사면하고 그 능력에 따라 등용하는 등 화합의 정치를 펼쳤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어려웠던 시절,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던 두수가 이렇게 진언했다. "반대 무리들이 자기들의 죄가 중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어, 비록 사면령(赦免令)은 받았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마음 한구석에는 의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주공께서 이렇게 하시면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주공의 재물을 훔쳐 주공으로 하여금 밥을 굶게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제가 주공께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일입니다. 만약에 주공께서 밖으로 나들이하실 때 신으로 하여금 주공이 타고 다니시던 수레의 말고삐를 잡게 하신다면, 백성들이 보고 듣게 되어 주공께서는 옛날에 저지른 다른 사람들의 죄에 연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 되면 여성과 이극(문공을 적대했던 사람들)의 무리들도 의심하는 마음을 풀게 될 것입니다."


문공이 즉시 나라 안의 성을 순시한다는 명목으로 두수로 하여금 어가의 말고삐를 잡게 하였다. 여성과 극예의 무리가 보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두수란 사람은 군주의 재물을 훔쳐 달아나서 주군을 어려움에 빠뜨린 사람인데, 지금 다시 옛날의 그 자리에 쓰고 계시니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때부터 시중에는 유언비어(流言蜚語)가 없어지고 나라안이 진정되었다. 진문공(晋文公)은 이렇듯 도량을 넓게 써서 당진의 국내정세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이상의 내용도 양승국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자신을 따르고 어려운 세월을 함께 보냈던 사람들을 중용한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후 당진의 국력은 날로 부강해져 여러 제후를 호령하는 패자에 오를 수 있었다. 네 번째로 패자에 오른 이는 초나라 장왕이고, 다섯 번째는 오나라 합려이다. 이들도 인재등용에 힘써 패자에 오를 수 있었다.


이상의 사례를 보더라도, 인사가 만사라는 옛말은 만고의 진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인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두 말할 것도 없다.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이 풍토는 또 어떻게 조성해야 할까?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는 자를 가장 윗자리에 등용하면, 이 풍토가 쉽게 조성될 수 있다. 노무현 정부는 특별히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보다 먼저, 자신보다 유능한 인재를 질시하고 배척하는 자들이 주위에 없는 것은 아닌지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민과 나라 일에 헌신하기보다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데에만 혈안인 자들을 멀리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자들은 패거리를 만들어 반란에 버금가는 짓이나 꾀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분열을 부추기고 모험도 마다하지 않으며, 충성경쟁이나 벌이는 자들도 멀리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자들은 혼란만 부추길 뿐이다. 남의 아이디어나 도둑질하는 자들 역시 멀리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자들은 자신의 도둑질을 은폐하기 위해 진짜 인재를 폄하하고 쫓아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소인배 무리들은 작은 일을 부풀리고 없는 사실도 조작하며, 그래도 안되면 조직의 인화에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인재를 매도하거나 함정에 빠뜨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졌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거짓 정보를 확인하지도 않고 믿어버리면 이런 일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끝으로, 인재의 평가에 있어서, 학벌보다는 실력을, 명성보다는 실적을, 말보다는 행동을 먼저 따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히딩크도 연고주의와 명성을 배제한 선수선발로 기적 같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지 않은가. 하버드대학이나 옥스퍼드대학 또는 국내 일류대학 등도 중요하겠지만, 역사상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무명인이었다는 사실 역시 명심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학문의 세계에서조차 획기적인 업적은 무명인이 이룩한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스위스 베른의 특허국 말단직원이던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에 혁명적인 업적을 남긴 것은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경제학에 있어서도 한계혁명을 일으킨 사람 중 하나인 제본스는 학벌이 변변치 않은 무명인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학벌과 명성에만 눈이 멀어, 대사를 그르치지 않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 필자는 21세기 경제학연구소 http://www.taeri.org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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