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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세가(楚世家) 10.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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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초세가(楚世家)

초(楚)나라의 선조는 오제 중의 한 사람인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다. 고양씨는 황제(黃帝)의 손자이며 창의(昌意)1)의 아들이다. 고양씨가 칭(稱)을 낳고 칭은 권장(卷章)을 낳았다. 권장의 아들 중려(重黎)는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를 위해 화정(火正)이라는 벼슬에 맡아 큰공을 세웠다. 그로 인하여 천하가 밝게 빛나게 되었다. 제곡이 명하여 중려를, 세상을 밝게 빛냈다는 뜻의 축융(祝融)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공공씨(共工氏)가 란을 일으키자 제곡이 중려에게 명하여 공공의 무리들을 잡아 죽이게 하였으나 모두 소탕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제곡이 경인(庚寅) 일에 중려를 죽이고 그 후임에 중려의 동생 오회(吳回)를 세워 화정의 벼슬을 주었다. 오회가 축융이 되었다.

오회가 육종(六終)을 낳고 육종은 부인의 옆구리를 갈라 여섯 아들을 낳게 하였다. 장남은 곤오(昆吾), 이남은 삼호(參胡), 삼남은 팽조(彭祖), 사남은 회인(會人), 오남은 조성(曹姓)이고 여섯 번째는 계련(季連)으로 미성(羋姓)이었는데 이가 초나라의 선조다2). 곤오씨(昆吾氏)는 하왕조 때 이미 후백으로 봉해졌다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桀) 때 멸망하고 팽조씨(彭祖氏)는 은나라 때 제후로 봉해졌다가 은나라 말 때 주왕(紂王)에 의해 멸망당했다. 한편 계련(季連)이 부저(附沮)를 낳고 부저는 혈웅(穴熊)을 낳았다. 그 후손들은 중도에 쇠락하게 되어 어떤 자들은 중국에 또 어떤 자들은 만이(蠻夷)의 나라에 흘러가 살게 되어 그들의 족보를 제대로 셀 수 없게 되었다.

주문왕 때 계련(季連)의 후손들 중 죽웅(鬻熊)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죽웅이 주문왕을 모시다가 일찍 죽었다. 죽웅에게는 웅려(雄麗)라는 아들이 있었고 웅려는 웅광(熊狂)을 낳았다. 웅광은 또 웅역(熊繹)을 낳았다.

웅역(熊繹)은 주성왕 때 사람이다. 성왕이 문왕과 무왕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의 증조부 죽웅이 세운 공로로 웅역을 형만(荊蠻)의 땅에 자작의 작위로 봉했으나 그 봉지는 남작에 준해서 하사하고 미(羋)라는 성을 내렸다. 웅역은 도읍을 단양(丹陽)3)에 두었다. 초자(楚子) 웅역은 노공(魯公) 백금(伯禽), 위강숙(衛康叔) 자모(子牟), 진후(晉侯) 섭(燮), 제태공(齊太公)의 아들 여급(呂伋) 등과 함께 성왕을 모셨다.

웅역이 아들 웅애(熊艾)을 낳았다. 웅애는 다시 웅담(熊黵)을 낳고 웅달은 웅승(熊勝)을 낳았다. 웅승이 초자(楚子)의 자리를 그의 동생인 웅양(熊楊)에게 물려주었다. 웅양은 웅거(熊渠)를 낳았다.

웅거는 세 아들을 두었다. 그때는 주왕실의 세력이 쇠약해져 래조하지 않는 제후들도 생겨나기 시작했고 제후들은 서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웅거가 강수(江水)와 한수(漢水) 지간의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어 이어서 군사를 일으켜 용(庸)4)과 양오(楊奧)5)에서 악(鄂)6)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정벌하여 초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웅거(熊渠)가 말했다.

「우리는 남쪽 오랑캐 만(蠻)이다. 중국의 시호를 구태여 따를 필요가 있겠는가?」

그는 즉시 그의 장자인 강(康)을 구단왕(句亶王)7)으로 둘째 아들 홍(紅)을 악왕(鄂王)으로 막내아들 집자(執疵)를 월장왕(越章王)이라고 불렀다. 이어서 주나라에는 포학한 려왕(厲王)이 즉위하여 혹시나 왕호를 참칭한다는 구실로 정벌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왕호를 버렸다. 웅거가 죽었을 때는 큰아들인 웅무강(熊毋康)은 젊은 나이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작은 아들 웅집홍(熊執紅)이 웅거의 뒤를 이었다. 집홍(執紅)이 죽고 그의 아들이 섰으나 집홍의 동생 집자(執疵)가 조카를 죽이고 스스로 초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웅연(熊延)이다. 웅연이 웅용(熊勇)을 낳았다.

웅용(熊勇) 6년 기원전 841년에 주나라에서 국인들이 란을 일으켜 려왕(厲王)을 공격하자 려왕은 체(彘) 땅으로 달아났다.

웅용이 재위 10년 만인 기원전 837년에 죽고 그의 동생 웅엄(熊嚴)이 뒤를 이었다.

웅엄이 재위 10년 만에 죽었다. 웅엄에게는 아들이 넷이 있었는데 장자는 백상(伯霜), 차자는 중설(仲雪), 삼자는 숙감(叔堪), 막내는 계순(季徇)이라고 했다. 웅엄의 뒤를 장자인 백상이 이었다. 이가 웅상(熊霜)이다.

웅상 원년 기원전 827년 주선왕이 즉위하였다. 웅상이 재위 6년 만인 기원전 822년에 죽고 세 동생이 초자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중설은 살해당하고 숙감은 도망쳐서 복(濮)8) 땅에 몸을 피했다. 초자의 자리는 결국 막내인 계순의 차지가 되었다. 이가 웅순(熊徇)이다.

웅순 16년 기원전 806년, 정환공(鄭桓公) 희우(姬友)가 정(鄭) 땅에 피봉(被封)되었다.

웅순 22년 기원전 800년 웅순이 죽고 그 아들 웅악(熊鄂)이 뒤를 이엇다.

웅악이 재위 9년 만인 기원전 791년에 죽고 그의 아들 웅의(熊儀)가 뒤를 이었다. 웅의가 약오(若敖)다.

약오 20년 기원전 771년 주유왕이 견융(犬戎)에게 살해되었다. 주나라는 동천하고 섬진의 양공(襄公)이 백작으로 피봉되어 제후의 반열에 섰다.

약오가 재위 27년 만인 기원전 764년에 죽고 그 아들 웅감(熊坎)이 뒤를 이었다. 이가 소오(霄敖)다.

소오가 재위 6년 만인 기원전 758년에 죽고 그의 아들 웅현(熊眴)이 섰다. 이가 분모(蚡冒)다.

분모 13년 기원전 745년, 당진에서 내란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당진에서 분봉된 곡옥(曲沃)의 세력이 본국보다 더 커졌기 때문이었다.

분모가 재위 17년 만인 기원전 741년에 죽었다. 분모의 동생 웅통(熊通)이 분모의 아들을 죽이고 대신 초왕의 자리에 스스로 올랐다. 이가 초무왕(楚武王)이다.

무왕 17년 기원전 724년 당진의 곡옥백(曲沃伯)인 장백(庄伯)이 그의 군주 효후(孝侯)를 살해했다.

무왕 19년 기원전 722년 정장공(鄭庄公)의 동생 단(段)이 반란을 일으켰다.

무왕 21년 기원전 720년 정장공이 상경 제중(祭仲)을 시켜 천자의 경작지를 침범하여 소란을 피우게 했다.

무왕 23년 기원전 718년 위(衛) 나라의 공자 주우(州吁)가 그의 형인 위환공(衛桓公)을 시해하고 스스로 위후(衛侯)의 자리에 올랐다.

무왕 29년 기원전 712년 노나라의 국인들이 그들의 군주인 은공(隱公)을 시해했다.

무왕 30년 기원전 711년, 송나라의 태재(太宰) 화독(華督)이 그의 군주 상공(殤公)을 시해했다.

무왕 35년 초나라가 수(隨)나라를 공격했다. 수후(隨侯)가 말했다.

「우리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쳐들어 왔는가?」

초왕이 대답했다.

「우리는 만이(蠻夷)다. 오늘날 제후들이 반목하여 서로 싸움을 벌이면서 어떤 자들은 서로 죽이기까지 하고 있다. 나에게 얼마간의 갑병과 병장기들이 있으니 한번 중원 제후국들의 정정(政情)을 떠보고 나의 칭호를 주왕에게 청하여 왕으로 높이고 싶다.」

수후가 사자를 주나라에 보내 초나라가 왕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청했다. 주나라 천자가 허락하지 않자 수나라의 사자가 돌아와 초무왕에게 고했다.

무왕 37년 기원전 704년, 초왕 웅통이 천자가 자기에게 왕호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수나라로 부터 전해 듣고 화를 내며 말했다.

「나의 선조는 죽웅인데 문왕의 스승이었다가 젊은 나이로 죽었다. 성왕이 우리 선조들의 공을 높이 사서 자작에 책봉하고 남작에 해당하땅을 봉지를 주어 만이들을 교화하여 복종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후에 우리가 만이들을 복종시켜 주왕실에 공을 많이 세웠지만 작위를 올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작위를 올리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무왕이라고 부르게 하고 수나라 사절에게는 맹세를 시키고 돌려보냈다. 무왕이 복(濮) 땅을 개간하기 시작하여 초나라 땅으로 삼았다.

무왕 51년 기원전 690년 주나라가 수후를 소환하여 왕호를 참칭한 초나라를 방조했다고 질책했다. 초왕이 노하자 수후가 초나라에 등을 돌렸다.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수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친히 출정했으나 도중에 죽어 군사들이 중도에서 돌아왔다. 아들 웅자(熊貲)가 뒤를 이었다. 이가 초문왕(楚文王)이다. 문왕이 왕위에 오르자 즉시 초나라의 도성을 단양(丹陽)에서 영도(郢都)로 옮겼다.

문왕 2년 기원전 688년 신국(申國)을 정벌하기 위해 등(鄧)나라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등나라의 국인들이 등후에게 말했다.

「길을 빌려달라는 초왕의 청을 허락한 후에 그가 우리 경내에 들어오기를 기다려 공격한다면 쉽게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등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문왕 6년 기원전 644년, 문왕이 채나라를 정벌하여 채애후(蔡哀侯)를 사로잡은 후에 개선했다. 초나라에 잡혀와 억류생활을 하던 채애후는 얼마 후에 방면되어 귀국했다. 초나라가 강성해지기 시작하여 강수와 한수 사이에 있던 작은 나라들 위에 군림하자 작은 나라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초나라에 복종하였다.

문왕 11년 기원전 639년, 제환공의 처음으로 패자를 칭했다. 이때부터 초나라 역시 강대국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문왕 12년 기원전 638년, 등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문왕이 재위 13년 만인 기원전 637년에 죽고 그의 아들 웅간(熊艱)이 뒤를 이었다. 이가 장오(庄敖)다.

장오(庄敖) 5년 기원전 672년, 장오가 그의 동생 웅운(熊惲)을 죽이려고 했다. 웅운이 수나라로 몸을 피했다가 수후의 도움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와서 장오를 습격하여 죽이고 초왕의 자리에 스스로 올랐다. 이가 초성왕(楚成王)이다.

성왕 웅운 원년 기원전 671년, 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제후들과 수교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했다. 이로써 사절을 주천자에게 보내 조공품을 바치자 천자가 제사를 지낸 고기를 하사하면서 말했다.

「초나라가 남방의 만이와 남월(南越)을 진압했기 때문에 우리 중국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초나라 영토는 사방 천리에 달했다.

성왕 16년 기원전 656년, 제환공(齊桓公)이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의 경계를 침범하여 형산(陘山)에 이르렀다. 초성왕이 굴완(屈完)을 장수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제환공을 막으라고 명했다. 굴완은 제환공과 강화를 맺고 회맹의 의식을 행했다. 제환공은 초나라가 주왕실에 조공을 드리면서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래서 굴완은 초나라는 앞으로는 거르지 않고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제환공이 군사를 물리쳐 돌아갔다.

성왕 18년 기원전 654년, 성왕이 군사를 일으켜 북쪽의 허나라를 정벌하였다. 웃통을 벗고 스스로 결박을 지은 허군(許君)이 성왕 앞으로 나와 자기의 잘못을 빌었다. 성왕이 허군을 방면했다.

성왕 22년 기원전 650년, 성왕이 황(黃)나라9)를 정벌하였다.

성왕 26년 기원전 644년, 영(英)을 멸했다.

성왕 33년 기원전 637년, 송양공(宋襄公)이 회맹을 하려고 초왕을 소집했다. 초왕이 화를 내며 말했다.

「송나라 군주가 감히 나를 소환하다니 내가 기꺼이 가서 그를 습격하여 욕을 보이겠다.」

성왕이 즉시 출발하여 회맹지인 우(盂)10)에 당도하였다. 성왕이 군사들을 회맹장에 매복시켜 놓고 있다가 송양공을 습격하여 사로잡은 후에 욕을 보이고 풀어주었다.

성왕 34년 기원전 636년, 정문공(鄭文公)이 조현을 드리기 위해 초나라의 영도(郢都)에 들렸다. 같은 해 성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송나라 정벌군을 일으켜 송나라 영토인 홍수(泓水)11)에서 싸워 송군을 크게 무찔렀다. 송양공은 팔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하고 이어서 팔의 상처가 덧나 몇 년 후에 죽었다.

성왕 35년 기원전 635년, 당진의 공자 중이(重耳)가 섬진으로 가던 길에 초나라에 들렸다. 성왕이 중이를 제후를 대하는 예로써 후하게 접대하고 군사를 내어 섬진으로 호송시켰다.

성왕 39년 기원전 631년, 노희공(魯釐公)이 초나라에 와서 제나라를 정벌해달라고 청했다. 초나라가 신후(申侯)에게 군사를 주어 보내 제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신후가 제나라의 곡(谷) 땅을 빼앗아 환공의 아들인 공자 옹(雍)을 데려다가 다스리게 했다. 당시 제환공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 중 일곱 명이 초나라에 망명하여 살고 있었다. 초나라는 그들 모두를 대부로 삼았다. 기(夔)12)를 멸했다. 기국이 축융(祝融)과 죽웅(鬻熊)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여름 송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 송나라가 당진에게 통고하여 구원을 요청하자 당진이 구원군을 보냈다. 성왕이 이를 알고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려 했으나 초나라의 장군 자옥(子玉) 성득신(成得臣)이 당진과의 회전을 주장했다. 성왕이 자옥에게 말했다.

「당진의 군주 중이는 십 수 년간을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한 끝에 마침내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하늘이 그의 앞길을 인도하고 있으니 우리는 결코 당할 수 없다.」

자옥이 고집을 꺾지 않고 계속해서 싸우기를 청했음으로 소수의 군사들만을 자옥에게 남겨놓고 자기는 대부분의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였다. 당진이 결국 성복(城濮)13)에서 자옥이 이끄는 초나라의 군사들을 대파하였다. 성왕이 노하여 자옥을 죽였다.

성왕 46년 기원전 626년, 옛날 성왕은 적장자 상신(商臣)을 태자로 세우려고 성득신의 뒤를 이어 영윤(令尹)에 임명한 자상(子上) 투발(鬪發)과 상의하였다. 자상이 말했다.

「대왕의 연세는 아직 여유가 있으며 궁중에는 사랑하는 아들이 많습니다.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 태자를 바꾼다면 변란의 원인이 됩니다. 초나라는 옛날부터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그 후사를 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신의 생김새를 살펴보니 눈은 벌처럼 동그랗고 목소리는 시랑과 같아 잔인한 성격이라 태자로 세우면 안 됩니다.」

성왕이 자상(子上)의 말을 듣지 않고 상신을 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마음이 변한 성왕은 그의 아들 중에 직(職)을 태자로 세우고 상신을 폐하려고 했다. 상신이 소문을 듣기는 했으나 확신이 서지 않아 미심쩍어 했다. 그래서 그의 태부 반숭(潘崇)과 상의했다.

「어떻게 하면 그 소문을 확인할 수 있겠소?」

반숭이 말했다.

「음식을 준비하여 부왕이 사랑하는 여동생 강미(江羋)를 초대 하십시오. 그런 다음 식사 중에 그녀에게 무례하게 대해 그녀로 하여금 노하게 하십시오.」

상신이 반숭의 말을 따랐다. 강미가 식사를 하다가 상신의 무례함에 노하여 말했다.

「네가 이렇듯 무례하니 왕께서 너를 죽이고 직을 대신 세우려고 하신다.」

상신이 강미가 한 말을 반숭에게 전하며 말했다.

「나를 폐하고 직을 세우려고 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습니다. 어찌해야 됩니까?」

반숭이 상신에게 물었다.

「직을 신하의 신분으로 모실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소.」

「그렇다면 도망쳐서 몸을 의탁할 만한 데가 있습니까?」

「없소.」

「그렇다면 대사를 치를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소.」

그해 겨울 10월 상신이 궁중의 위병들을 동원하여 성왕이 묶고 있는 궁궐을 포위했다. 성왕이 란이 일어났음을 알고 죽기 전에 곰발바닥 요리를 먹게 해 달라고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성왕이 정미(丁未) 일에 스스로 목에 줄을 감아 졸라서 죽었다. 상신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목왕(穆王)이다.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오런 목왕이 옛날 자기가 살던 태자궁을 반숭에게 하사하고 그를 태사(太師)로 삼아 초나라의 국정을 맡겼다.

목왕 3년 기원전 623년 강(江)14)을 멸했다.

목왕 4년 기원전 622년 육(六)15), 요(蓼)16)를 멸했다. 육(六)과 요(蓼)는 고도씨(皐陶氏)17)의 후예들이 세운 제후국이다.

목왕 8년 기원전 618년, 진(陳)나라를 정벌하였다.

목왕이 재위 12만인 기원전 614년에 죽고 그 아들 장왕(莊王) 려(侶)가 초왕의 자리에 즉위하였다.

장왕이 즉위했으나 3년이 지나도록 정사롤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면서 나라 안에 다음과 같은 령을 내렸다.

「감히 나에게 간하려는 자가 있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고 죽이리라!」

오거(伍擧)18)가 간하기 위해 장왕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자 장왕은 그때 왼쪽 손으로는 정희(鄭姬)를, 오른 손으로 월희(越姬)를 껴안고 있으면서 종과 북 사이에 앉아 있었다. 오거가 장왕을 보고 말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어 혹시 왕께서 아시고 계시지 않으신가 여쭈어 보려고 왔습니다. 토산 언덕 위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는데 3년이 가도록 날지도, 울지도 않고 앉아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새인지 아십니까?」

장왕이 듣고 말했다.

「3년을 날지 않다가 한 번 날게 되면 하늘 끝까지 오고 3년을 울지 않고 있다가 일단 한 번 울게 되면 천하가 그 소리에 놀라리라!. 그대는 물러가 있으라. 내가 그대의 말을 알아들었노라!」

그리고 나서도 몇 달 동안을 계속 음락에 더욱 탐닉하였다. 대부 소종(蘇從)이 다시 장왕의 처소로 들어와 음락을 그만 중지하고 정사를 돌보라고 간했다. 장왕이 소종을 향해 말했다.

「그대는 내가 내린 령을 듣지 못했는가?」

소종이 대답했다.

「제가 죽어 주군께서 깨달음을 얻으신다면 그것은 신이 바라던 바입니다.」

장왕이 듣고 즉시 음락을 파하고 정사를 돌보기 시작했다. 장왕은 부패한 관리 수백 명을 주살하고 다시 새로이 임용한 관리들도 수백 명에 달했다. 오거와 소종을 중용하여 정사를 맡기자 초나라의 국인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 해에 용(庸)19)을 멸했다.

장왕 6년 기원전 608년, 송나라를 정벌하여 그들의 병거 500승을 노획했다.

장왕 8년 기원전 606년, 육혼융(陸渾戎)20)을 정벌하고 주나라 왕성의 교외에서 열병식을 하였다. 주정왕(周定王)이 왕손만(王孫滿)을 시켜 장왕의 노고를 치하하게 하였다. 장왕이 왕손만에게 구정(九鼎)의 크기와 무게에 관해 물었다. 왕손만이 대답했다.

「천자의 자리는 정(鼎)이 아니라 덕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어찌 정에 대해 물으십니까?」

장왕이 대답했다.

「주나라는 이제 쇠미해져 구정에만 의지하여 천하를 지배할 수 없소! 우리 초나라는 도검과 갈고리에 붙어 있는 날 만을 꺾어 녹여도 구정을 주조할 수 있소!」

왕손만이 대답했다.

「오호라! 군왕께서는 옛날 일을 잊으셨습니까? 옛날에 순임금의 우(虞)나라와 우(禹)임금이 세운 하(夏)나라가 창성했을 때 멀리 있는 변방의 국가들도 모두 도래하여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천하 구주의 장관들이 쇠붙이들을 모두 모아 공물로 바쳐오자 우임금은 그것들을 녹여 구정을 만들었고 그 정들 표면에 온갖 세상의 수많은 기괴한 것들을 모두 그려 넣어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들이 세상을 해롭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했습니다. 하나라의 걸왕(桀王)이 세상의 도리를 무너뜨리자 구정은 은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은나라는 그 후로 600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은의 주왕(紂王)이 광포하고 잔학한 행위를 저질러 구정은 다시 주나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덕이 밝혀지게 되면 정은 비록 작아지나 무게는 무거워져서 옮기기가 어렵게 되고 세상이 어지러워져 세상의 도덕이 어지럽게 되면 정은 비록 커지나 가벼워져서 옮겨가기 쉽게 됩니다. 옛날 성왕께서 구정을 겹욕(郟鄏)21)에 안치하고 점을 친 결과 주왕실은 30대에 걸쳐 700 년을 간다는 하늘의 명이 있었습니다. 주나라의 덕이 비록 쇠하다고는 하나 하늘의 명이 아직 바뀌지 않았으니 정의 무겁고 가벼움에 대하여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초왕이 듣고 즉시 군사들을 거두어 물러갔다.

장왕 9년 기원전 605년, 약오씨(若敖氏)22)를 영윤으로 삼았다. 어떤 자가 약오씨를 참소하자 약오씨는 주살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장왕이 약오씨를 정벌하여 그의 종족들을 멸족시켰다.

장왕 13년 기원전 601년, 서(舒)23)나라를 멸했다.

장왕 16년 기원전 598년 진(陳)나라를 정벌하고 하징서(夏徵舒)를 잡아서 죽였다. 하징서가 그의 군주를 시해했기 때문이었다. 진나라를 무찌른 장왕은 즉시 진나라의 종사를 폐하고 초나라의 군현으로 삼았다. 군신들이 모두 그 일을 축하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제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신숙시(申叔時) 만은 경축의 말을 올리지 않았다. 장왕이 그 연고를 물었다. 숙시가 대답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가다가 타인 소유의 밭에 들어가 그 밭을 망치자 그 밭주인이 소를 빼앗아 갔습니다. 다른 사람의 밭에 소를 끌고 간 사람의 행위는 물론 잘한 일은 아니지만 그 소를 빼앗아 자기 소유로 한 행위는 그 보다 더 심한 일이 아닙니까?24)께서는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의 반란을 진압하신 일은 의(義)를 행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땅을 탐해 현으로 만들었으니 어찌 천하 사람들이 이런 일을 이해하겠습니까?」

장왕이 듣고 즉시 진나라를 복국시켜 주었다.

장왕 17년 기원전 597년, 봄 초장왕이 원정을 나가 정성을 포위하여 3개월 만에 항복을 받아냈다. 정양공(鄭襄公)은 정성의 외문인 황문(皇門)을 통해 손에는 양을 끌고 육단(肉袒)의 몸으로 나와 장왕을 맞이하며 말했다.

「제가 하늘의 명을 알지 못하여 대왕을 받들지 않아 대왕께서는 노여움을 품으시고 저희나라에 임하시게 했으니 이는 저의 죄입니다. 어찌 감히 대왕의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저를 남해로 보내시고 신의 첩들을 제후들에게 나누어주시더라도 오로지 대왕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 부디 저의 선조이신 주려왕(周厲王), 주선왕(周宣王), 환공(桓公), 무공(武公)의 공업을 생각하시어 사직에 제사나마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면 저는 뉘우치고 대왕을 받들겠습니다. 저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은 감히 바랄 수 없는 지나친 욕심이라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단지 큰마음을 먹고 대왕을 향하여 저의 생각을 한 번 말해 봤을 뿐이옵니다.」

초나라의 여러 신하들이 말했다.

「대왕께서는 절대 허락하지 마십시오!」

장왕이 말했다.

「군주 된 자가 이와 같이 겸손한 태도를 갖고 있으니 틀림없이 자기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음에 틀림없다. 내가 어찌 그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단절시킬 수 있겠는가?」

장왕이 말을 마치고 스스로 깃발을 휘둘러 좌우의 군사들을 휘몰아 정성 밖 일사(一舍)의 거리에 해당하는 30리 밖에 주둔하고 정나라의 화의 신청을 받아 들였다. 정나라 대부 반왕(潘尫)이 초나라 진영에 가서 맹약을 행하고 자가 자량(子良)인 정나라의 공자거질(公子去疾)이 초나라에 들어가 인질이 되었다. 그해 여름 6월, 당진이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출동시켜 하상(河上)에서 초나라 군사들과 조우하여 회전에 들어갔다. 초장왕의 초군은 당진군을 대파한 후에 형옹(衡雍)을 거쳐 영도(郢都)로 돌아왔다.

장왕 20년 기원전 594년, 송나라가 초나라 사자를 죽였다. 초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송도 수양성(睢陽城)을 포위하였다. 수양성은 초군에 포위되어 다섯 달이 넘도록 봉쇄되어 마침내 성 안의 식량이 떨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서로 어린 자식들을 바꾸어 잡아먹고 죽은 사람 시체의 해골을 쪼개어 불을 땔 정도로 처참하게 되었다. 송나라 우사(右師) 화원(華元)이 성 위에서 몰래 내려와 초나라 진영에 가서 송성의 실정을 토로하였다. 장왕이 듣고 말했다.

「그대야말로 진실로 군자로다!」

초장왕이 군사를 물리쳐 돌아갔다.

장왕 23년 기원전 591년, 장왕이 죽었다. 그의 아들 웅심(熊心)이 뒤를 이었다. 이가 초공왕(楚共王)이다.

공왕 16년 기원전 575년, 당진이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와 수교한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가 초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구원군을 청했다. 공왕이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두 나라 군사들이 언릉(鄢陵)에서 조우하여 교전에 들어갔다. 치열한 접전 끝에 당진이 서전에서 이기고 싸움의 와중에 공왕은 흐르던 화살에 한 눈을 잃었다. 공왕이 장군 자반(子反) 공자측(公子側)을 불러서 앞으로의 작전에 대해 의논하려고 하였다. 원래 자반은 원래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사람이었다. 수양곡(豎陽谷)이란 그의 시종이 자반에게 술을 권하자 자반은 결국은 곤드레만드레 취하도록 마셨다. 공왕이 노하여 자반을 활로 쏴 죽이고 철군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공왕 31년 기원전 560년, 공왕이 죽고 장자인 웅초(熊招)가 그 뒤를 이었다. 이가 초강왕(楚康王)이다.

강왕이 재위 15년 만인 기원전 545년에 죽고 그의 아들 웅원(熊員)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겹오(郟敖)다.

강왕에게는 동생이 넷이 있었는데 바로 밑의 공자위(公子圍)를 위시하여, 자비(子比), 자석(子晳), 거질(去疾)이었다.

겹오 3년 기원전 542년, 겹오의 숙부이며 강왕의 동생인 공자위(公子圍)를 영윤으로 삼아 초나라의 정사와 군사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겹오 4년 기원전 541년, 공자위가 사자의 임무를 띠고 정나라에 가다가 도중에 초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중도에 초나라에 돌아왔다. 그해 12월 기유(己酉) 일에 공자위가 초왕에게 병문안을 드린다고 궁궐로 들어가 겹오가 쓰고 있던 관끈을 풀어 그의 목에 감고 잡아 당겨 시해했다. 다시 겹오의 아들 막(莫)과 평하(平夏)를 죽이고 정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초왕이 병이 들어 죽었다고 알리게 하였다. 그때 오거(伍擧)가 정나라에 사자로 가는 사람을 불러 정나라 군주가 묻는 것처럼 질문해 봤다.

「초왕의 자리는 누가 물려받았습니까?」

사자가 대답했다.

「대부 공자위가 즉위하였습니다.」

오거가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바꾸어 대답하도록 하였다.

「공자위는 공왕의 장자이십니다.」

공자위가 초왕의 자리에 오르자 자비(子比)는 당진으로 달아났다. 공자위가 초영왕(楚靈王)이다.

영왕 3년 기원전 538년, 6월 초나라가 당진에 사자를 보내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하겠다고 통고했다. 중원의 제후들이 모두 초나라 영지인 신읍(申邑)에 모여 회맹의 의식을 거행했다. 오거가 회맹에 관한 전거를 들어 말했다.

「하나라의 계왕(啓王)25)은 균대(鈞臺)26)에서 제후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고, 상나라를 세운 탕왕은 경박(景亳)27)에서 제후들을 모이게 하여 명을 세웠습니다. 또한 주무왕은 맹진(孟津)28)에서 제후들을 모아 하늘에 맹세를 시켰고 무왕의 아들인 성왕은 기산(岐山)의 남쪽에서 제후들을 모이게 했습니다. 또한 성왕의 아들인 강왕은 풍(酆)29)의 별궁에서 천하의 제후들로부터 조례를 받았고, 소왕(昭王)을 이은 목왕(穆王)은 도산(涂山)30)으로 나가 제후들을 접견했습니다. 제환공은 군사들을 이끌고 소릉(召陵)까지 와서 회맹했고, 당진의 문공은 천토(踐土)에서 회맹을 열어 제후들의 맹주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여섯 왕과 두 제후가 제후들을 소집하여 행한 회맹을 행한 방식은 같지 않으니 어떤 것이든 대왕께서 택해 시행하십시오.」

영왕이 듣고 말했다.

「제환공이 행한 의식으로 하라!」

그 때는 정나라의 상국 자산(子産)은 신 땅으로 행차하여 회맹에 참석했지만 당진(唐晉), 송(宋), 노(魯), 위(衛) 등의 제후국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영왕이 제후들과 맹약의 의식을 행하면서 얼굴에 교만한 기색을 띄우며 거드름을 피우자 오거가 보고 말했다.

「하나라의 걸왕이 유잉(有仍)31)에서 회맹을 하자 유민씨(有緡氏)32)가 반란을 일으켰고 은나라의 주왕이 여산(黎山)33)에서 회맹을 하자 동이가 반하였습니다. 또한 주나라의 유왕(幽王)이 태실(太室)34)에서 회맹을 행한 후에 융적(戎狄)이 들고 일어나 나라가 망했습니다. 대왕께서는 몸가짐을 신중히 하십시오.」

그해 7월 초나라가 제후들을 이끌고 오나라를 정벌하러 가서 주방(朱方)35)을 포위했다. 8월에 주방을 함락시키고 제나라의 망명객 경봉(慶封)을 사로잡고 그곳에 살고 있던 경봉의 종족들은 모두 멸족시켰다. 영왕이 경봉에게 자기가 지은 죄를 제후들 앞에서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치게 하였다.

「여러 나라의 대부들은 들으시오! 혹시라도 자신이 모시던 군주를 시해하고 어린 임금을 능멸했을 뿐 아니라 제나라 대부들을 위협하여 군주 대신 자신에게 충성을 하도록 하늘에 맹세하게 만든 이 경봉과 같은 사람은 되지 말기 바라오!」

그러나 경봉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외쳤다.

「여러 나라의 대부들은 들으시오. 혹시라도 형의 아들 웅미(熊穈)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초공왕의 서자 위(圍)같은 사람은 되지 마시오!」

그래서 영왕이 경봉을 즉시 죽였다.

영왕 7년 기원전 534년, 장화대(章華臺)의 축조를 위해 전국의 도망자들을 색출하여 공사장에 투입시켰다.

영왕 8년 기원전 533년, 영왕이 공자기질(公子棄疾)에게 군사를 주어 진(陳)나라를 공격하여 멸했다.

영왕 10년 기원전 531년, 초왕이 채후(蔡侯)를 소환하여 잔치를 벌였다. 이윽고 채후가 술에 취하자 초왕은 갑사들을 시켜 사로잡아 죽였다. 자신의 부군을 시해하고 군주의 자리에 오른 채후를 징벌했다는 명분이었다. 기질은 영왕의 명으로 군사를 이끌고 채나라를 정벌해서 멸했다. 영왕은 기질을 채공(蔡公)으로 책봉하여 진(陳)과 채(蔡) 두 나라 땅을 다스릴 지방관을 알아서 임명하도록 했다.

영왕 11년 기원전 530년, 초왕이 서(徐)나라를 정벌하여 오나라를 위협하려고 했다. 영왕은 건계(乾谿)36)에 주둔하며 서나라를 점령했다는 첩보를 기다렸다. 영왕이 군신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제(齊), 진(晉), 노(魯), 위(衛)의 네 나라는 피봉 될 때 모두 주천자로부터 보기(寶器)를 하사 받았으나 유독 우리 초나라만 받지 못했다. 내가 금일 사자를 주나라에 보내어 우리의 선조를 이곳에 분봉할 때 주어야 했던 보기로 주나라가 가지고 있는 구정을 청하려고 하는데 그들이 과연 우리의 청을 들어주겠는가?」

석보(析父)가 대답했다.

「주왕은 우리에게 정을 내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옛날 우리들의 선왕이신 웅역(熊繹)님께서 먼 형만의 땅에 거하시면서 몸에는 다 헤진 옷을 걸치고 변변치 못한 남루한 수레를 타시면서 풀이 우거진 들판에 살고 계시다가 왕실의 부름을 받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왕도로 들어가 주천자를 모셨습니다. 동시에 웅역님께서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복숭아나무로 만든 활과 대추나무 가지로 만든 화살대를 공물로 주왕실에 바치셨습니다. 산동의 여러 나라들은 주나라 왕들의 친척들이 피봉된 제후국이며 특히 당진, 노(魯), 위(衛), 정(鄭) 등의 네 나라는 주천자(天子)의 동생들이 봉해진 나라입니다. 네 나라는 주왕실로부터 보기를 모두 하사 받아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유독 우리만이 아무 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 주왕실과 네 나라는 모두 군왕을 떠받들며 대왕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정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영왕이 다시 석보에게 물었다.

「옛날 우리의 먼 조상이신 계련(季連)님의 큰 형님 되시는 곤오(昆吾)님은 원래 허나라에 살았었는데 지금 정나라가 그 땅을 탐하여 점거하고 우리에게 주지 않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달라고 요청하면 그들이 그 땅을 내놓겠는가?」

「주왕실도 정을 아까워하지 않는데 정나라가 어찌 감히 전답을 아까워하겠습니까?」

「옛날에는 천하의 모든 제후들은 우리나라가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오로지 당진의 위세만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우리는 진(陳), 채(蔡)를 멸하여 우리의 땅으로 만들고 부갱(不羹)에는 철옹성을 쌓아 세 곳에는 모두 천승의 군사들을 각각 주둔시키고 있다. 어찌 제후들이 우리들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제후들은 모두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영왕이 석보가 하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석보야말로 옛날 고사에 정통하구나!」

영왕 12년 기원전 529년 봄에 초영왕이 건계에 머물며 사냥 등의 일로 즐기면서 영도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영왕이 벌린 대역사에 동원되어 고생이 참으로 심하였다. 옛날에 영왕이 신성(申城)에서 제후들을 불러 회맹을 할 때 월나라의 대부 상수과(常壽過)를 모욕하고 채나라의 대부 관기(觀起)를 죽였다. 관기의 아들 관종(觀從)이 도망쳐 오나라로 가서 오왕에게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유세했다. 또한 월나라 대부 상수과(常壽過)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고 자기는 오나라를 위한 첩자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공자기질의 명이라고 하고 당진에 망명하고 있던 공자비(公子比)를 불러서 채나라로 불러들이고 오와 월 두 나라 군사들과 함께 영왕이 없는 영도를 습격하려고 했다. 관종이 공자비에게 말하여 공자기질을 등(鄧) 땅으로 불러 하늘에 맹세시키고 같이 영도로 진군하도록 했다. 반군은 영왕의 태자 록(綠)를 죽이고 공자비를 왕으로 세우고 공자석(公子晳)은 영윤으로 공자기질은 사마가 되었다. 궁궐에 살던 영왕의 총신과 시종들을 모두 잡아서 죽인 관종은 군사를 이끌고 영왕이 주둔하고 있던 건계로 가서 초나라 군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게 했다.

「나라에 왕이 새로 섰으니 먼저 돌아오는 자들은 옛날의 작록과 전답과 가옥을 돌려주겠으나 나중에 오는 자들은 모두 몰수하고 먼 변방으로 쫓아내겠다.」

영왕이 거느리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모두 영왕 곁을 떠나 영도로 귀환하였다.

영왕은 태자 록이 죽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수레에서 뛰어내려 땅에 엎드리고는 말했다.

「사람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두 이와 같은가?」

영왕의 시종이 말했다.

「부모 된 자의 마음은 이보다 훨씬 더합니다.」

「남의 수많은 아들들을 죽인 내가 어찌 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영왕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던 우윤(右尹)이 말했다.

「왕께서는 도성의 교외로 가셔서 국인들의 정세를 한번 살펴보신 후에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백성들은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도성으로 갈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큰 고을로 가시어 주위의 제후들에게 군사를 빌려 반란군을 진압하시기 바랍니다.」

「큰 고을의 관리인들 나를 용납하겠는가?」

「그것도 안 된다면 잠시 제후국으로 몸을 피하신 후에 제후들의 도움을 구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큰 복은 다시 오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제후들로부터 욕됨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영왕은 배를 타고 수로를 이용하여 언성(鄢城)37)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영왕이 자기의 권유를 듣지 않자 우윤은 영왕과 계속 같이 다니다가는 자신도 함께 피살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영왕의 곁을 떠나 도망쳤다.

영왕은 혼자 몸이 되어 산중에서 길을 잃고 배회하게 되었다. 촌민들은 모두가 새로운 왕을 무서워하여 아무도 영왕을 집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영왕이 길을 계속 가다가 우연히 연인(涓人)을 만나게 되었다. 연인은 옛날 궁중에서 청소를 하던 사람이라서 영왕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영왕이 연인을 향해 외쳤다.

「너는 나를 위해 밥 한 사발만 얻어 오너라! 나는 이미 3일 간을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연인이 말했다.

「새로운 왕이 온 나라에 추상같은 조칙을 내려 왕께 음식을 주거나 왕과 함께 도망친 자는 그 삼족을 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디 가서 음식을 얻어올 수 있겠습니까?」

영왕이 할 수 없이 연인의 무릎을 베개 삼아 잠이 들었다. 연인이 흙으로 베개를 만들어 영왕의 머리를 옮겨놓고 몸을 빼내어 달아나 버렸다. 영왕이 잠에서 깨어나 연인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달아나 보이지 않았다. 그는 허기가 져서 더 이상 앉아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신무우(申无宇)의 아들인 신해(辛亥)가 영왕을 찾아다니다가 길거리에 쓰러진 영왕을 발견하고 말했다. 신무우는 우(芋) 땅의 대부였다.

「저의 부친께서는 이미 두 번에 걸쳐 대왕이 세우신 법을 어겨 죽을 죄를 얻었으나38) 대왕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시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어 더 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부친께서 돌아가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대왕께서 앞으로 곤란에 처하시게 될 때는 그 입은 은혜를 반드시 갚으라고 유언하셨습니다.」

신해는 부친의 유언을 행하기 위해 수소문하여 영왕의 지금껏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리택(釐澤)의 부근에서 허기져 쓰러진 영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신해가 영왕을 자기의 수레에 싣고 그의 집으로 모셨다. 영왕은 그해 여름철 5월 계축(癸丑) 날에 신해의 집에서 죽었다. 신해는 자기의 두 딸을 죽여 영왕과 함께 순장시켰다.

이때 초나라는 비록 공자비를 초왕으로 세우기는 했지만 초나라의 국인들은 영왕이 다시 돌아와 자기들을 토벌하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으며 다시 영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오랫동안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관종이 새로이 초왕의 자리에 오른 공자비에게 말했다.

「공자기질을 죽이지 않는다면 비록 왕께서는 나라를 얻기는 했지만 후에 반드시 재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초왕이 말했다.

「내가 어찌 그를 죽일 수 있단 말이요?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소!」

관종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대왕을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비는 결국 관종의 말을 듣지 않았다. 관종은 공자비의 곁을 떠났다.

기질이 도성에 들어왔으나 도성 안의 백성들은 모두가 밤만 되면 공포에 떨며 외치곤 했다.

「영왕이 돌아와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기질은 을묘(乙卯) 날 밤에 사람들을 배에 태워 노를 젓게 하면서 장강의 강변을 오르내리며 다음과 같이 외치게 하였다.

「영왕이 쳐들어 온다!」

도성 안의 백성들은 모두 놀랐다. 기질이 다시 만성연(曼成然)을 시켜 신왕 자비(子比)와 영윤 자석(子晳)에게 알리게 했다.

「영왕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도성 안의 백성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왕과 영윤을 죽이려고 달려오고 있습니다. 사마 기질도 도망쳐 곧 당도할 예정입니다. 두 분께서는 욕을 당하기 전에 빨리 방도를 찾으십시오. 분노한 수많은 백성들이 마치 밀려오는 홍수처럼, 들판에서 요원하게 번지는 불길처럼 달려오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도저히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노한 백성들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자비와 자석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병진(丙辰) 일에 기질이 자비의 뒤를 이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기질이 이름을 웅거(熊居)로 바꾸었다. 이가 초평왕(楚平王)이다.

거짓 계략을 써서 두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초평왕은 초나라의 국인들과 제후들이 복종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얻으려고 했다. 진과 채 두 나라의 후손들을 찾아 옛날과 같이 복국시켜 주었으며 정나라로부터 빼앗은 땅은 다시 되돌려주었다. 나라 안의 생활이 어려운 백성들은 구휼하였으며 정치를 개혁하고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오나라가 초나라에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서 초나라의 다섯 장군39)들을 사로잡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평왕이 관종을 불러 무엇을 원하지를 묻자 그는 복윤(卜尹)을 원한다고 말했다. 평왕이 관종에게 그의 원대로 복윤에 임명했다.

원래 초공왕에게는 아들이 다섯이 있었는데 모두 서출이라 태자를 세우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대산명천에 망제(望祭)를 올리면서 여러 귀신에게 물어서 나온 점괘로 결심을 굳혀 사직을 이을 사람을 정하려고 했다. 초공왕은 아무도 몰래 사람을 시켜 태실(太室)의 땅을 파고 벽옥을 묻게 했다. 이어서 다섯 공자들을 목욕재계시키고 제당에 들게 하였다. 강왕은 들어오더니 벽옥을 뛰어 넘고 지나갔으며 영왕은 절을 할 때 벽옥이 묻힌 곳에 팔꿈치가 닿았으며 자비와 자석은 모두 벽옥이 묻힌 곳에서 멀리 떨어져 머물렀다. 그때 평왕은 나이가 어려 유모가 가슴에 품고 들어 와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절을 올리게 했는데 평왕의 옷에 달린 단추고리가 벽옥이 묻힌 곳 위에 닿아 벽옥을 누르면서 절을 올렸다. 그리고 공왕이 죽자 그 때는 평왕의 나이가 아직 어려 장자인 강왕이 그 뒤를 잇게 되었고 다시 초왕의 자리는 강왕의 아들 겹오(郟敖)에게 전해졌으나 곧바로 영왕에게 살해되었다. 초왕의 자리는 자신의 조카이며 강왕의 아들인 겹오를 죽인 영왕이 스스로 초왕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자비는 기질의 부추김을 받아 영왕이 원정 나간 틈을 이용하여 영도를 급습하고 초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 기간은 불과 십 여 일에 불과했으며 그 뒤를 자석이 잇지 못하고 두 사람이 같이 기질의 음모에 걸려 죽고 말았다. 평왕의 4명의 형제들은 모두 죽고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오로지 막내인 기질만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초왕의 자리에 올라 초나라 조상의 묘당에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옛날 태실에서 대산명천의 귀신에게 제사 지낼 때 받은 신의 계시가 이루어 졌다고 할 수 있다.

옛날에 자비가 당진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가 초나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은 한선자(韓宣子)가 숙향(叔向)40)에게 물었다.

「귀국한 자비가 성공하여 초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숙향이 대답했다.

「앉을 수 없습니다.」

「지금 영왕을 싫어하는 초나라 백성들이 새로운 왕을 세우려고 하는 마음은 마치 마음을 합쳐 이익을 취하려는 장사꾼의 행동과 같아 쉽게 성공할 수 있을 듯 합니다만 어찌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십니까?」

「자비를 쫓아다니는 사람이 누가 있으며, 또한 자비와 함께 공동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비가 초왕의 자리를 얻을 수 없는 다음의 다섯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총애하는 사람은 주위에 득실대지만 현인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으니 첫 번째 어려움이고, 비록 따르는 사람이 있다 하나 앞장서서 일을 도모할 사람이 없음이 두 번째입니다. 또한 앞장서서 도모할 사람이 있다 한들 지략을 써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세 번째이며, 설사 지략을 갖추어 계획을 짤 수 있는 사람이 있다 해도 호응하는 백성들이 없음이 네 번째이고, 백성들이 비록 호응한다 한들 덕을 갖추지 않았으니 다섯 번째입니다. 당진에 망명해 산지 13년이나 지났어도 당진이나 초나라 사람들 중 그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는 따르는 사람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가족들을 모두 잃어버린 그를 친척들마저도 배반했으니 그에게는 지지기반이 없습니다. 더욱이 때를 기다려 기회를 타지 않고 오히려 경거망동하니그에게는 심모원려의 장기적인 계획이 없습니다. 단지 혈혈단신으로 해외에 망명하여 오랫동안 타향에 머무르고 있었을 뿐 그를 지지하는 백성들은 없습니다. 또한 국외로 도망 다녔으나 국내에는 아무도그의 행적을 좋아서 기록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는 덕을 베푼 적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왕이 포학하여 기피할 이유가 없다고는 하지마는 그러나 자비의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보면 스스로 화를 불러들여 몸을 망치게 되고, 또한 그는 그 다섯 가지의 어려운 점을 모두 극복하고 그의 군주를 살해하는데 성공은 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아 결코 그는 초왕의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초나라의 왕위는 기질에게 돌아가게 되어있습니다. 기질은 진과 채의 두 나라의 땅을 다스리고 있으며 또한 방성(防城)이 그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땅은 어떤 사악한 일도 발생하지 않았고 도적들은 또한 깊숙이 숨어서 감히 망동하지 않고 있으며 또한 사사로운 욕심을 부리지 않아 백성들의 마음을 사고 있어 아무도 그를 원망하지 않고 있습니다. 옛날 망제를 드릴 때 신의 계시를 백성들은 굳게 믿고 있으니 초나라 왕족들 간에 란이 일어난다면 초왕의 자리는 공왕의 아들 중 막내인 기질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막내 상속은 또한 초나라의 왕위 계승법이기도 합니다. 자비가 감당할 수 있는 관직은 우윤이 최고이고 그의 귀함을 논하자면 서출에 불과할 뿐이며 조상신으로부터 받은 계시도 자비는 왕위와는 한 참 떨어져 있습니다. 백성들이 자비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그가 초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환공과 진문공도 자비처럼 역시 외국에 망명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여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습니까?」

「제환공은 위희(衛姬)의 소생이며 제희공(齊釐公)의 총애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의 곁에는 포숙아(鮑叔牙), 빈수무(賓須无), 습붕(隰朋)과 같은 현신들의 보좌를 받았고 거(莒)나라에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위나라의 도움을 받았고 나라 안에서는 제나라의 명문거족들인 고씨와 국씨들의 내응을 받았습니다. 제환공은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마치 흐르는 물처럼 명료하게 꿰뚫어 보고 쫓았으며 백성들에게는 결코 싫증을 내지 않고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가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음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리고 우리 당진의 선군이셨던 문공께서는 이적(夷狄)의 호(狐)나라 계희(季姬)의 소생인데 역시 진헌공(晉獻公)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문공께서는 학문을 배우는데 있어 결코 싫증을 내시지 않았으며 그의 나이 겨우 17세 때 당진의 다섯 현인41)들과 교분을 맺었으며, 자여(子余)와 자범(子犯)를 심복으로 삼고 위주(魏犨)와 고타(賈佗)는 고굉지신으로 삼았으며, 밖으로는 제(齊), 송(宋), 섬진(陝秦), 초(楚) 등의 제후국의 군주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며, 안에서는 란지(欒枝), 극곡(郤穀), 선진(先軫), 호돌(狐突)등의 내응을 받았습니다. 19년 동안 유랑생활을 하면서 문공께서는 계속 마음 속의 뜻을 새롭게 다짐하여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혜공(惠公)과 회공(懷公)이 백성들의 뜻에 반하자 백성들의 마음도 두 사람의 군주에게서 멀어지게 되어 문공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문공이 나라를 얻게 되었음은 당연한 귀결이며 이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비는 백성들에게 베푼 은혜도 없으며 밖으로는 제후들로부터 도움도 받지 못하며 당진에서 떠나 초나라에 귀국하는데 우리는 그를 환송하지 않고 그가 초나라에 돌아가자 백성들 중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는데 어찌 그가 나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자비가 과연 숙향이 말한 대로 비명에 죽고 기질이 결국 초나라의 왕이 되었다. 숙향은 진실로 앞날을 내다 볼 수 있는 혜안을 갖고 있었던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42)

평왕 2년 기원전 527년, 비무기(費无忌)를 섬진으로 보내 태자 건의 부인을 맞이하려고 했다. 진녀의 뛰어난 미색을 본 비무기가 진녀의 행렬을 앞질러 달려와서 평왕에게 말했다.

「진녀는 천하절색이라 왕께서 부인으로 삼으시고 태자의 부인은 따로 구해 주면 됩니다.」

평왕이 비무기의 말에 혹하여 진녀를 자기가 취하여 부인으로 삼아 그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진(珍)이라고 하였다. 태자에게는 여자를 따로 구해 부인으로 삼게 했다. 그 때 태자의 태부는 오사(伍奢)였고 소부는 비무기였다. 태자가 자기를 싫어하자 비무기는 틈만 있으면 태자를 평왕에게 참소하였다. 태자 건은 그 때 15세였는데 그 모친인 채녀가 평왕에게 총애를 잃었기 때문에 평왕과는 더욱 소원해졌다.

평왕 6년 기원전 527년 태자 건을 성보(城父)43)로 보내어 초나라의 변방을 지키게 했다. 무기가 다시 태자를 매일 참소하면서 말했다.

「옛날 제가 진녀를 데려올 때부터 태자는 저를 원망하고 있었으며 폐하에 대해서도 원망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왕께서는 좀더 태자에 대해 방비를 해야 합니다. 더욱이 지금 성보에 주둔하고 있는 태자는 병권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어 중원의 제후국들과 관계를 긴밀히 맺은 후에 란을 일으켜 영도에 입성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평왕이 무기의 참소를 듣고 성보에서 태부 오사를 불러 책망하였다. 오사는 무기가 태자를 참소했다는 사실을 알고 평왕에게 간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소인배의 참소하는 말을 듣고 골육을 멀리하시려 하십니까?」

무기가 오사의 간하는 말을 전해 듣고 평왕에게 말했다.

「오늘 태자와 태부 오사를 제압하지 못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평왕은 무기의 말을 듣고 오사를 감옥에 가두었다. 평왕이 오사에게 명하여 그의 두 아들들에게 편지를 써서 불러오게 하면 죽음만은 면하게 해 주겠다고 했다. 다시 사마 분양(奮陽)에게 성보로 달려가 태자를 잡아오도록 명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분양으로부터 평왕이 자기를 죽이려한다는 말을 전해들은 태자는 즉시 송나라로 도망쳤다.

무기는 태자가 도망쳤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평왕을 향해 말했다.

「오사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습니다. 같이 죽이지 않는다면 장차 그들은 초나라의 걱정거리가 됩니다. 부친의 죄를 용서하여 준다고 하면서 두 형제를 부른다면 효심이 깊은 두 형제는 반드시 출두할 것입니다.」

그래서 평왕이 사자를 감옥에 있는 오사에게 보내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너의 두 아들들을 불러 이곳에 오게 한다면 살려주고 오게 할 수 없다면 죽이겠다.」

오사가 듣고 말했다.

「큰아들 상(尙)은 내가 부르면 틀림없이 오겠지만 작은 아들 원(員)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평왕이 말을 전해 듣고 다시 사자를 보내어 물어보게 했다.

「어째서인가?」

오사가 말했다.

「상의 사람됨은 성격이 곧고 절개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며 다른 사람에게 자비롭고 효성이 지극하며 어집니다. 내가 부르면 부친의 죄를 면하게 하려고 죽음도 불사하고 반드시 옵니다. 그러나 원의 사람됨은 지혜가 뛰어나고 계략을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용기가 뛰어나고 공을 세우기를 좋아하여 그가 이곳에 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고 결코 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초나라의 큰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평왕이 사람을 시켜 두 사람을 부르며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그대들이 이곳에 온다면 그대들의 부친의 목숨을 살려 주겠노라!」

초왕의 전갈을 전해 들은 오상이 오원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가면 부친의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는데, 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불효라! 부친이 아무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는데 원수를 갚지 않는다면 지략이 없는 행위다. 서로 맡은 바 일을 헤아린다면 그것은 지혜라! 너는 너의 길을 행하고 나는 아버님에게 돌아가 죽음을 택해 나의 길을 택하겠다.」

오상은 즉시 영도로 출발하고 오원은 활에 화살을 재어 왕의 사자를 향해 겨누고는 말했다.

「부친이 죄를 얻었는데 무슨 이유로 그 자식 되는 자들을 부른단 말인가!」

오원이 활을 쏘려고 하자 사자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오자서는 곧바로 오나라로 도망쳤다. 오사가 듣고 말했다.

「원이 도망쳤으니 참으로 초나라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겠구나!」

초왕이 즉시 오사와 오상 부자를 죽였다.

평왕 10년 기원전 519년, 태자 건의 생모가 소(巢)44) 땅에 살면서 오나라와 몰래 통했다. 오나라가 공자 광(光)을 시켜 초나라를 정벌하게 했다. 공자광이 진·채(陳蔡) 두 나라의 군사를 패주시키고 태자건의 모친을 데리고 오나라로 귀환했다. 오나라를 두려워하게 된 초나라가 성을 견고하게 지은 후에 그곳으로 도성을 옮겼다.

처음에 오나라의 변경 마을인 비량(卑梁)과 초나라의 변경 마을인 종리(鍾離)의 어린아이들이 뽕잎을 따다가 분쟁이 생겨 두 집안이 서로 노하여 공격했다. 종리 사람들이 비량으로 쳐들어가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 이에 비량대부가 노하여 비량성의 군사들을 동원하여 종리를 공격하였다. 초왕이 전해 듣고 노하여 초나라 군사들을 일으켜 비량성을 공격하였다. 오왕도 전해 듣고 역시 노하여 공자광에게 군사를 주어 종리를 공격하여 멸하고 소(巢) 땅에 주둔하도록 했다. 초나라가 두려워하여 영도를 다시 개축하였다.

평왕 13년 기원전 516년 평왕이 죽었다. 장군 자상(子常)이 말했다.

「태자 진(珍)의 나이가 너무 어릴뿐 아니라 그 모친은 곧 태자건의 부인으로 데리고 온 여인이다.」

그래서 국인들은 자서(子西)를 초왕으로 세우려고 하였다. 평왕의 서제 자서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자서가 자상에게 말했다.

「나라에는 전해 내려오는 법도가 있는데 다시 왕을 바꾼다면 내란이 일어나게 되고 그리고 그와 같은 말을 입에 담는 자는 주살해야 하오.」

그래서 태자 진을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소왕(楚昭王)이다.

소왕 원년 기원전 515년, 초나라의 백성들이 비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비무기는 태자 건을 참소하고 오사 부자와 백극완(伯郤宛)을 모함하여 죽음으로 몰았다. 그래서 오사의 아들 오자서(伍子胥)와 백극완의 아들 백비(伯嚭)가 모두 오나라로 도망쳐서 오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초나라 변경을 수시로 침입했음으로 초나라 사람들은 무기를 원망하게 되었다. 초나라 영윤 자상이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비무기를 죽였다.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소왕 4년 기원전 512년, 오나라의 세 공자45)가 초나라로 망명해 왔다. 초나라가 그들을 대부로 봉하여 오나라를 막게 하였다.

소왕 5년 기원전 511년, 오나라가 초나라의 땅인 육(六)과 잠읍(潛邑)46)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소왕 7년 기원전 509년, 초나라가 자상을 시켜 오나라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오나라가 초나라 군사들을 예장(豫章)에서 크게 물리쳤다.

소왕 10년 기원전 506년 오왕 합려(闔閭), 오자서, 백비와 당(唐)과 채(蔡) 두 나라 군주들이 초나라 정벌전에 나섰다. 초나라 군사들은 오나라 군사들과 싸워 크게 패했다. 오나라 군사들이 이윽고 영도에 입성하여 평왕의 묘를 파헤쳐 욕보였다. 오자서가 자기 부형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처음에 오나라 병사들이 공격해오자 초나라가 자상을 대장으로 삼아 막도록 했다. 자상은 오나라 군사들과 한수를 사이에 두고 진을 쳤으나 곧이어 벌어진 싸움에서 자상의 군사들이 패주하자 자상은 패전의 죄를 물을까 두려워하여 정나라로 도망쳤다. 도창치는 초군의 뒤를 오군이 승세를 타고 그 뒤를 추격하였다. 오군은 초군과 다섯 번 싸워 모두 이겼다. 기묘일에 소왕은 영도를 빠져나갔다. 경진(庚辰) 일에 오나라 군사들은 영도에 입성하였다.

영도를 빠져나온 소왕은 운몽(雲夢)으로 달아났다. 운몽 사람들이 소왕이 그들의 왕인지도 모르고 활을 쏘아 소왕의 팔을 맞추어 부상을 입혔다. 소왕은 운(鄖) 땅으로 달아났으나 운공의 동생 투회(鬪懷)가 소왕을 보고 말했다

「지금 왕의 부왕인 평왕이 나의 부친을 죽였으니 내가 그 아들을 죽여 우리 부친의 원수를 갚는다고 해서 잘못된 일은 결코 아니다.」

운공이 자기의 동생을 꾸짖어 물리쳤으나 그가 소왕을 죽이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왕과 함께 수나라로 들어갔다. 오왕은 소왕이 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수나라에 군사를 보내어 수나라 군주에게 자기의 말을 전하게 했다.

「주나라가 그들이 자손들을 강수와 한수 사이에 봉했는데 초나라가 모두 멸하고 그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러니 초나라는 희성 제후국인 수나라와는 원수의 나라가 아닌가?」

수나라 군주가 소왕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자 소왕을 따라 나섰던 자기(子綦)가 왕을 깊숙한 곳에다 숨기고 자신을 왕으로 꾸민 후에 수나라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를 잡아다가 오왕에게 바치라.」

수나라 사람들이 초왕을 잡아 오왕에게 바치는 일에 대해 점을 치자 점괘가 불길하게 나왔다. 그래서 수나라 사람들이 오왕에게 말했다.

「초왕은 도망쳐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

오나라 군사들이 수나라에 들어와서 자기들이 소왕을 수색하겠다고 청해 왔으나 수나라가 허락하지 않았다. 오나라 군사들은 감히 수나라를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소왕이 영도를 빠져나가 도망치면서 신포서(申包舒)를 시켜 섬진에 가서 구원군을 청해오게 하였다. 섬진이 병거 500승을 동원하여 초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초나라도 역시 패잔병들을 다시 규합하여 섬진의 군사들과 힘을 합하여 오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였다.

소왕 11년 기원전 505년, 6월 초·진(楚秦) 연합군은 직(稷)47) 땅에서 오나라 군사들과 회전하여 승리를 취했다. 오왕 합려의 동생 부개(夫槪)가 오군이 초군과 싸워 패배하자 몰래 도망쳐 오나라로 들어가 스스로 오왕이라고 칭했다. 합려가 듣고 초나라에서 철군하여 오나라로 돌아가 부개를 토벌하였다. 부개가 싸움에서 지고 초나라로 달아났다. 초나라가 부개를 당계(堂谿)48)에 봉하고 그의 종족들을 당계씨(堂谿氏)라고 불렀다.

초소왕이 영도로 귀환하던 길에 당나라를 멸하고 그해 9월 영도(郢都)에 입성하였다.

초소왕 12년 기원전 504년, 오나라가 다시 초나라를 공격해와 초나라의 번(番)49) 땅을 빼앗아 갔다. 초나라가 두려워하여 초나라의 도성을 영성에서 북쪽의 한수 유역의 약(鄀)50) 땅으로 옮기고 그곳의 이름을 옛날과 마찬가지로 영도라고 명명했다.

소왕 16년 기원전 500년, 공자가 노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소왕 20년 기원전 496년, 초나라가 돈(頓)51)과 호(胡)52)를 멸했다.

소왕 21년 기원전 495년, 오왕 합려가 월나라를 정벌하였다. 전투 중에 월왕 구천이 활을 쏴서 합려에게 부상을 입혔다. 합려는 그 부상이 악화되어 얼마 후에 죽었다. 오나라는 이 일로 인해 월나라와 원수가 되어 이후로는 더 이상 서쪽의 초나라를 공격하지 못하게 되었다.

소왕 27년 기원전 489년 봄, 오왕 부차가 진(陳)나라를 정벌했다. 소왕이 군사를 보내어 진나라를 구원하고 성보에 주둔하게 하였다. 그해 10월 소왕이 군중에서 병이 들어 눕게 되었는데 하늘에 붉은 구름이 나타나 해를 끼고 날아가는 새떼처럼 보였다. 소왕이 사람을 주나라에 보내 태사(太史)에게 물어보게 하였다. 태사가 듣고 말했다.

「이것은 초왕의 몸에 이롭지 않는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기도하여 재난을 초나라의 장군들이나 대신들에게 돌릴 수도 있습니다.」

초나라의 장군과 대신들이 이 말을 전해듣고 모두 청하여 자기들의 몸을 바쳐 신에게 기도를 드리려고 하였다. 소왕이 말했다.

「여러 장군들과 대신들은 나의 고굉지신이라 내가 나의 몸에 난 병을 나의 팔다리에 옮긴다 한들 병이 낫겠소?」

소왕이 장군들과 대신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왕이 점을 치게 하였다. 점괘에 하수의 신에게 제사 지내면 된다고 하였다. 대부들이 소왕에게 하수에 가서 제사를 지내게 해 달라고 청했다. 소왕이 대답했다.

「옛날 선왕들께서 이곳에 피봉된 이래로 나의 대에 이르기까지 강수와 한수에 제사를 올리지 않은 적이 없는데 어찌 하수의 신에게 죄를 지었다고 하는가?」

이어서 대부들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진(陳)나라에 머물고 있던 공자가 이 말을 전해 듣고 말했다.

「초소왕이 하늘의 큰 도리에 통했구나! 그가 초나라를 잃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왕의 병이 더욱 심해져 여러 공자들과 대부들을 불러 당부의 말을 했다.

「내가 불초하여 오나라에 두 번이나 욕됨을 입었음에도 나라를 찾고 천수를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나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소왕은 초왕의 자리를 자기의 형인 자서 공자신(公子申)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공자신이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동생인 공자결(公子結)에게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그도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셋 째 동생인 공자려(公子閭)에게 물려준다고 했으나 그도 역시 받지 않았다. 공자려는 사양하기를 5번이나 하다가 결국은 초왕의 자리를 받아 들였다. 초나라가 오나라와 회전하려는 직전인 경인(庚寅) 날 저녁에 소왕이 군중에서 죽었다. 공자려가 말했다.

「왕께서 병이 들어 자기의 아들들을 제쳐놓고 대신들에게 물려주려고 한 초왕의 자리를 내가 받아들인 이유는 왕의 마음을 안심하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이제 왕께서 돌아가셨으니 신하된 자가 어찌 감히 군왕이 되려는 뜻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이어서 자서와 자기 두 사람과 상의하여 아무도 몰래 군사를 보내어 월녀(越女) 소생인 장(章)을 모셔와 초왕으로 세웠다. 이가 초혜왕(楚惠王)이다. 두 공자는 군사를 파하여 회군한 후에 소왕(昭王)의 장례를 치렀다.

혜왕 2년 기원전 487년 자서가 태자건의 아들 미승(羋勝)을 오나라로부터 불러 소(巢) 땅의 대부에 명하고 백공(白公)이라고 불렀다. 용병을 즐겨하고 선비들을 공경했던 백공은 정나라에서 죽은 자기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

혜왕 6년 기원전 483년, 백공이 영윤 자서에게 군사를 청하여 정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옛날 정나라에 망명하여 머물렀던 백공의 부친 태자건이 정나라 사람들에게 살해당하고 백공은 오나라로 도망쳐야 했었다. 후에 자서에 의해 오나라에서 귀국할 수 있었던 백공이 그때의 원한을 갚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자서가 백공의 청은 허락은 했으나 군사는 내주지 않았다.

혜왕 8년 기원전 481년, 당진이 정나라를 정벌하였다. 정나라가 초나라에 위급함을 고하고 구원을 요청했다. 자서가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초군을 이끌고 출전하자 당진의 군사가 물러갔다. 자서가 보답으로 정나라로부터 뇌물을 받고 돌아왔다. 백공 미승이 노하여 자기가 몰래 자객으로 기르고 있던 자객 석걸(石乞) 등을 시켜 조당에서 갑자기 영윤 자서와 자기를 습격하여 살해하고 혜왕을 납치하여 고부(高府)에 감금했다가 후에 살해하려고 했다. 혜왕을 모시던 시종 굴고(屈固)가 고부에 감금된 혜왕을 등에 업고 탈출하여 소왕비(昭王妃)가 살던 궁궐로 도망쳐 숨었다. 백공이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한 달이 조금 넘어 섭공(葉公)53) 심제량(沈諸梁)이 군사들을 모아 혜왕을 구하기 위해 영성으로 진격해 오자 혜왕의 신하들이 다시 모여 백공을 공격하여 죽였다. 혜왕이 다시 초왕에 복위하였다. 이 해에 초나라가 진(陳)나라를 멸하고 현으로 삼았다.

소왕 13년 기원전 476년, 오왕 부차가 오나라의 세력을 강대하게 키워 제나라, 당진 및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소왕 16년 기원전 473년, 월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부차를 죽였다.

소왕 42년 기원전 447년, 초나라가 채나라를 멸했다.

소왕 44년 기원전 445년 초나라가 기(杞)54)나라를 멸했다. 초나라가 섬진과 수호하였다. 그때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했지만 오나라의 영토였던 북쪽의 강수와 회수 사이의 땅을 통치할 수 없었다. 초나라가 동쪽으로 진격하여 사수(泗水) 유역의 땅을 차지하여 그 영토를 넓혔다.

소왕이 재위 57년 만인 기원전 432년에 죽고 그의 아들 중(中)이 뒤를 이었다. 이가 초간왕(楚簡王)이다.

간왕 원년 기원전 431년 북쪽으로 군사를 보내어 거(莒)나라를 멸했다.

간왕 8년 기원전 424년 위문후(魏文侯) 사(斯), 한무자(韩武子) 계장(啓章), 조환자(赵桓子) 가(趙嘉) 등의 당진의 삼가가 주나라 위열왕(威烈王)의 책봉을 받아 제후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간왕이 재위 24년 만인 기원전 408년에 죽고 그의 아들 당(當)이 뒤를 이었다. 이가 초성왕(楚聲王)이다.

성왕 6년 기원전 402년, 강도들이 성왕을 공격하여 살해했다. 그의 아들 의(疑)가 즉위하였다. 이가 초도왕(楚悼王)이다.

도왕 2년 기원전 400년, 삼진(三晋)이 힘을 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고 승구(乘丘)55)에서 돌아갔다.

도왕 4년 기원전 398년, 초나라가 주나라를 정벌하였다56). 정나라가 그들의 재상(宰相) 자양(子陽)을 죽였다.

도왕 9년 기원전 393년, 한나라를 정벌하여 부서(負黍)의 땅을 취하였다.

도왕 11년 기원전 391년, 삼진(三晋)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대량(大梁)57)의 유관(楡關)58)에서 대파하였다. 이에 초나라는 많은 뇌물을 진나라에게 바쳐 강화조약을 맺었다.

도왕 21년 기원전 381년, 도왕이 죽고 그의 아들 장(藏)이 뒤를 이었다. 이가 숙왕(肅王)이다.

숙왕 4년 기원전 377년, 촉(蜀)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해와 자방(玆方)59)을 빼앗아 갔다. 초나라가 그곳에 관새를 수축하여 촉나라의 진격을 막았다.

숙왕 10년 기원전 371년, 위(魏)나라가 쳐들어와 노양(魯陽)60)의 땅을 빼앗아 갔다.

숙왕이 재위 11년 만인 기원전 370년에 죽었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그의 동생 웅량부(熊良夫)가 뒤를 이었다. 이가 초선왕(楚宣王)이다.

선왕 6년 기원전 364년, 주천자가 당시 국력이 크게 신장되기 시작한 섬진의 헌공(獻公)에게 사자를 보내 축하의 말을 전하게 했다. 삼진(三晋)의 세력도 더욱 강성해지고 그 중에 위혜왕(魏惠王)과 제위왕(齊威王)의 세력이 더욱 컸다.

선왕 30년 기원전 340년, 진나라의 효공(孝公)이 위앙(衛鞅)을 상(商)61)에 봉하고 군사를 남쪽으로 보내 초나라를 침범하였다. 그 해에 선왕이 죽고 아들 웅상(熊商)이 뒤를 이었다. 이가 초위왕(楚威王)이다.

위왕 3년 기원전 337년 주현왕(周顯王)이 주나라의 개국조인 문왕과 무왕에게 제사지낸 고기를 진혜왕(秦惠王)에게 보냈다.

위왕 7년 기원전 333년 제나라의 재상은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이었다. 전영이 초나라를 속이자62) 위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군을 서주(徐州)에서 격파하고 전영을 제나라 재상의 자리에서 쫓아내도록 위협하였다. 전영이 두려워하여 장축(張丑)을 시켜 거짓으로 초왕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게 했다.

「대왕께서 서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제나라가 전반자(田盼子)63)를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반자라는 사람은 제나라에 공이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를 위해 힘을 다하려고 합니다. 정곽군이 전반자를 싫어하여 초나라의 싸움에서 신기(申紀)를 대장으로 등용했습니다. 신기라는 위인은 제나라의 대신들과 사이가 나쁘고 백성들도 또한 그를 위해 힘을 다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왕께서는 서주에서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왕께서 정곽군을 쫓겨나게 하면 전반이 제나라 재상에 임용되어 군사들을 재정비하여 왕과 교전하게 되면 왕께는 이로운 점이 없을 것입니다.」

초왕이 이후로는 전영(田嬰)을 쫓아내겠다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위왕이 재위 11년 만인 기원전 329년에 죽고 그의 아들 웅괴(熊槐)가 뒤를 이었다. 이가 회왕(懷王)이다. 위나라가 초나라에 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쳐들어와 형산(陘山)에서 초군을 격파하였다.

회왕 원년 기원전 328년 장의(張儀)가 진(秦)나라으로 들어가 재상이 되어 혜문군(惠文君)을 모셨다.

회왕 4년 기원전 325년, 섬진의 혜문군이 왕호를 칭했다.

회왕 6년 기원전 323년, 초나라가 주국(柱國)64) 소양(昭陽)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가 위나라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소양이 위나라 군사들을 양릉(襄陵)65)에서 격파하고 8개의 성읍을 빼앗았다. 다시 군사들을 동쪽으로 이동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제나라가 두려워했다. 그 때 마침 진진(陳軫)이라는 사람이 진나라의 사절로 제나라에 와 있었다. 한 해 전에 왕위에 오른 제민왕(齊湣王)이 진진을 불러 물었다.

「초나라의 군사들을 물리칠 좋은 방법이 있는가?」

진진이 대답했다.

「대왕께서는 마음을 놓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대왕의 명을 전하여 초나라의 군사들을 물러가게 하겠습니다.」

진진이 말을 마치고 즉시 초나라의 군중으로 들어가 소양을 접견하고 말했다.

「원컨대 초나라는 싸움에서 이기고 적장을 죽인 사람에게 얼마나 높은 관직을 주는지 알고 싶습니다.」

소양이 대답했다.

「그 관직은 상주국에 이르고 높은 작위에 봉해져 규(珪)66)를 들고 다닐 수 있소.」

「그 위에 더 귀한 관직은 무엇입니까?」

「영윤이오.」

「그렇다면 장군께서는 이미 이룩한 공적만으로도 영윤의 자리에 오를 수 있습니다. 장군께서 말씀하셨듯이 영윤의 자리는 초나라의 가장 높은 관직입니다. 제가 옛날 일로 이 경우를 비유하여 말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문객들에게 술 한 잔을 보내주자 그 문객들이 모여 상의하며 말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두 이 한 잔의 술을 두루 마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땅에 뱀 그림을 그려 먼저 완성한 사람이 전부 마시기로 합시다.’ 그래서 문객들이 땅에다 뱀을 그리는데 한 사람이 일어나며 외쳤습니다. ‘뱀의 그림이 이미 완성되었다.’ 말하고는 술잔을 들어 마시려고 하면서 다시 말하기를 ‘나는 능히 뱀의 발까지도 그릴 수 있다.’ 하면서 자기가 그린 뱀에다 다리를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 다음으로 뱀의 그림을 완성한 사람이 먼저 사람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으며 말했습니다. ‘뱀에 다리가 어디 있단 말이냐? 당신은 다리 달린 뱀을 그렸으니 이것은 뱀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는 술을 들이켰습니다. 오늘 장군께서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군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그들의 장수를 베었으니 그 공적 또한 막대하여 초나라의 가장 높은 영윤의 자리에 이미 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작은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군사를 동쪽으로 이동시켜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니 비록 제나라를 파하여 공을 세우신다 해도 더 이상 오를 관작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나라를 공격하여 이기지 못하고 싸움에서 패하고 돌아가신다면 몸은 죽고 관작은 빼앗기게 되어 초나라에 큰 손해를 끼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뱀의 그림에 다리를 그려 넣는 어리석은 행위와 같은 이치입니다. 만일 군사를 물리쳐 돌아가신다면 제나라에는 은혜를 베풀게 되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이미 도달한 최고의 지위를 보전하는 일입니다.」

「깨우침에 따르겠습니다.」

소양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연(燕)과 한(韓)의 두 나라 군주들이 왕호를 칭했다. 진나라가 장의를 보내 초(楚), 제(齊), 위(魏)의 군주들을 교상(嚙桑)67)에서 만나 회맹하기를 청했다.

회왕 11년 318년 소진(蘇秦)이 산동 여섯 나라를 연합하게 하여 진나라를 공격했다68). 초회왕이 맹주가 되어 6국의 군사들을 이끌고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진나라가 군사들이 함곡관의 관문을 열고 나와 육국의 연합군을 요격하였다. 6국의 병사들은 싸움에서 패하여 군사를 물리쳐 각기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제나라 군사들만이 그 후로 오래 동안 대치하다가 물러갔다.

회왕 12년 기원전 317년 제민왕(齊湣王)이 조·위 두 나라를 공격하여 이기자 진나라도 역시 한나라를 공격하여 이겨 진·제 두 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다투었다.

회왕 16년 기원전 313년, 초와 제 두 나라가 수호하였다. 진나라가 걱정하여 즉시 장의를 재상의 자리에서 면직시켰다고 공표한 후에 장의를 남쪽의 초나라로 보내 초왕을 알현하게 하였다. 장의가 초왕을 보고 말했다.

「저희 진나라 군왕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분은 대왕이시며 또한 소신 장의도 문지기가 되어 주인으로 모셔 지켜드리고 싶은 분도 또한 대왕이십니다. 그리고 저희 군왕께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제왕이며 이 장의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도 역시 제왕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제나라와 강화를 맺으셨으니 이것은 저희 군왕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대왕을 받들 수 없게 만들었으며 이 장의도 또한 역시 대왕을 주인으로 모시는 문지기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이 장의를 위해 관문을 닫아걸고 제나라와 단교를 하신다면 저는 사자를 따라 즉시 귀국하여 진나라 서쪽의 상(商) 땅 600리를 떼어 초나라에 주도록 저희 군왕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바로 제나라를 약화시키는 방법이며 동쪽의 제나라가 약화되면 우리 진나라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일입니다. 또한 초나라는 상 땅을 얻게 되어 나라의 재정이 풍부해지니 제가 드린 말씀대로 한다면 세 가지의 목적을 모두 이룰 수 있는 길입니다.」

회왕이 듣고 크게 기뻐하여 초나라 재상의 인끈을 장의에게 맡기고 술을 내와 잔치를 벌려 장의를 접대하면서 여러 군신들 앞에서 장의가 한 말을 공포하였다.

「옛날 우리의 땅이었던 상 땅을 되찾게 되었다. 」

여러 신하들이 듣고 회왕에게 경하의 말을 올렸으나 진나라에서 돌아온 진진(陳軫)만은 조의를 표하였다. 회왕이 그 연고를 묻자 진진이 대답했다.

「진나라가 우리를 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우리에게 제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 땅은 아직 얻지 못한 상태에서 먼저 제나라와 강화조약을 파기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우리 초나라만 고립시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틀림없이 고립된 우리 초나라를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진나라로부터 땅을 할양받으신 후에 제나라와 단교를 하겠다고 통고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진나라는 자신들의 계책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제나라와 먼저 단교한 후에 진나라에 상 땅의 할양을 요구하면 장의는 결코 그 땅을 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장의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대왕께서는 필시 장의를 원망하게 되고, 장의를 원망하는 초나라는 진나라의 걱정이 되고, 진나라의 걱정은 초나라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서쪽의 진나라로부터 화근을 불러일으키고 북쪽의 제나라로부터는 절교를 당하게 되니 이것은 양쪽 나라의 군사들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신은 조의를 표했습니다.」

회왕이 진진의 말을 듣지 않고 장수 한 사람을 장의에게 딸려 보내 상 땅을 받아오도록 했다.

장의가 진나라로 귀국해서 거짓으로 술에 취한척하면서 수레에 굴러 떨어져 몸을 다쳤다고 핑계를 대고 석 달 동안이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장의를 따라간 초나라의 장수는 결국은 땅을 받지 못하고 초나라에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초왕이 보고를 받고 말했다.

「장의는 제나라와 단교한 우리의 태도가 단호하지 않아 이를 미심쩍게 생각해서 우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사 송유(宋遺)에게 군사를 주어 제나라로 쳐들어가게 한 후에 제왕에게 욕지거리를 해대며 모욕을 주었다. 제왕이 듣고 분노하여 초나라의 수호조약의 징표인 부절을 꺾어 버리고 진나라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진·제(秦齊) 두 나라가 연합하게 되자 장의가 비로소 조당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초나라 장수에게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지금까지 땅을 받아가지 않았소! 상 땅의 어디에 해당하던 상관없이 사방 6리의 땅 말이오!」

초나라 장수가 말했다.

「저는 사방 600리의 땅을 받아오라는 명을 받았지 6리의 땅을 받아 오라는 명은 받지 못했소.」

초나라 장수가 돌아와 장의의 말을 전했다. 회왕이 대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진진이 나와 말했다.

「진나라를 공격하는 행위는 무모한 짓입니다. 차라리 진나라가 탐내는 대성을 뇌물로 바친 후에 그들의 힘을 빌려 제나라를 공격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우리는 비록 진나라에 땅을 잃을지라도 제나라로부터 보상받으면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영토는 손상하지 않고 보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제나라와 단교를 하시면서 제왕의 분노를 일으켰고 다시 진나라의 속임수에 넘어가 그 죄를 묻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추궁하려 하시니 이것은 진·제(秦齊)가 서로 수교를 맺고 연합하게 만들어 천하의 두 강대국의 군대로 하여금 쳐들어오게 만드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 초나라는 조만간 큰 전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회왕이 다시 진진의 말을 듣지 않고 진나라와 단교하고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의 동쪽 변경으로 쳐들어갔다. 진나라도 역시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의 군사들을 요격하였다.

회왕 17년 기원전 312년 초나라 군사들이 진나라 군사들과 단양(丹陽)에서 회전하여 크게 패했다. 진나라 군사들에게 참수된 갑사들만 8만 명에 달했으며 대장군 굴개(屈匃)와 비장군(裨將軍) 봉후추(逢侯醜)등 70여 명의 장수들이 진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진나라가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한중(漢中) 땅의 여러 군들을 빼앗아 갔다. 회왕이 대노하여 나라 안의 모든 병사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다시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여 남전(藍田)에서 진군과 회전하였으나 역시 크게 패했다. 초나라가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韓)과 위(魏) 두 나라는 즉시 군사를 남진시켜 등(鄧) 땅에 이르렀다. 회왕이 듣고 진나라에 원정 중인 군사들을 철수시켜 한위 두 나라의 군사들을 막게 했다.

회왕 18년 기원전 311년 진나라가 사자를 보내 초나라에 수호를 청해오면서 예전에 빼앗아 간 한중 땅의 절반을 돌려주겠다고 했다. 초왕이 듣고 진나라의 사자에게 말했다.

「장의란 놈만 보내주면 땅은 주지 않아도 좋다.」

장의는 사자가 돌아와 초왕이 자기를 땅 대신 청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진혜왕이 장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초왕이 경을 불러 지난날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데 어찌해야 되겠소?

장의가 대답했다.

「신은 초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근상(靳尙)이라는 사람과 친분이 있으며 근상은 또한 초왕이 총애하는 정수(鄭袖)라는 부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초왕은 정수가 하는 말이라면 거절하지 않고 모두 들어주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예전에 상 땅을 준다는 약속을 어기자 우리 진과 초 두 나라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진 결과 벌어진 싸움에서 초나라는 크게 패했습니다. 그래서 대해 앙심을 품고 있는 초나라에 신이 직접 가서 대면하여 옛날의 원한 관계를 풀지 않는다면 두 나라 사이의 수호는 이루어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왕께서 신의 뒤에 계시니 초나라가 감히 저를 어쩌겠습니까? 설사 제 몸에 이상이 있다한들 나라를 위해 죽는 일이니 이는 바로 신이 원하는 바입니다.」

장의가 초나라에 당도하였으나 회왕이 접견을 허락하지 않고 잡아서 감옥에 가둔 후에 죽이려고 하였다. 장의가 아무도 몰래 근상을 찾아가 자기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청했다. 장의의 청을 받은 근상이 회왕에게 말했다.

「장의룰 잡아 가두면 진왕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지금 여러 나라의 왕들이 만약 우리가 진나라와 사이가 벌어져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왕을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다시 근상이 정수를 찾아가 말했다.

「지금 대왕께서는 진왕이 매우 사랑하는 장의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진나라는 오히려 우리 초나라에 상용(上庸)의 6개 현을 할양하고 진나라의 미인을 우리 초왕에게 시집보내면서 진나라의 궁중의 노래에 능한 미녀들을 딸려 보낸다고 합니다. 장의를 죽이고 진나라와 수호조약이 이루어져 진나라에서 바친 여인을 초나라에 들어와 대왕의 사랑을 얻게 된다면 부인께서는 아마도 쫓겨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부인께서는 마땅히 장의를 진나라로 돌려보내 진나라와의 화친을 막고 진나라의 미인이 초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결국은 회왕은 정수의 말을 듣고 장의를 석방하였다. 회왕이 좋은 마음이 되어 접견을 허락하자 장의는 초왕에게 열국 간에 맺어진 합종의 맹약을 파기하고 진나라와 연합하여 친선관계를 수립한 후에 혼인을 맺어 두 나라 사이를 공고히 하자고 약속하였다. 장의가 말을 마치고 물러나 진나라로 돌아가자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굴원(屈原)이 들어와 초왕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장의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굴원의 말을 듣고 장의를 석방한 자신의 행위를 후회한 회왕이 사람을 시켜 장의의 뒤를 추격하라고 하였으나 미처 잡지 못했다. 그해에 진혜왕이 죽었다.

회왕 20년 기원전 309년, 합종의 맹주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던 제민왕이 초진 두 나라가 수호를 맺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음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사자에게 편지를 써서 초왕에게 전하게 했다.

「과인은 자신의 존귀한 칭호를 돌보지 않고 있는 귀국의 모습을 보고 참으로 걱정이 앞섭니다. 작금에 있어서 진나라에서는 혜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새로 서자 장의는 위나라로 도망쳤습니다. 장의가 맡고 있었던 진나라의 재상 자리는 저리질(樗里疾)과 공손연(公孫衍)에게 맡겼음에도 초나라는 변함없이 진나라를 받들고 있습니다. 저리질은 한나라와 사이가 좋고 공손연은 위나라와 사이가 좋은 사람입니다. 초나라가 변치 않고 진나라를 섬긴다면 한과 위 두 나라는 두려워하여 필시 진나라와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데 되면 연과 조 두 나라도 어쩔 수 없이 진나라를 섬기게 됩니다. 네 나라가 서로 다투어 진나라를 섬기려고 한다면 초나라는 결국 진나라의 군현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대왕은 어찌하여 과인과 함께 힘을 합하여 한(韓), 위(魏), 연(燕), 조(趙) 네 나라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합종을 완성하고 주나라를 받들어 군사들을 쉬게 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면서 천하를 향하여 호령을 발하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누가 감히 대왕의 명을 즐겨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대왕의 이름은 천하에 널리 퍼질 것입니다. 이어서 대왕께서는 무관(武關)과 촉과 한중의 땅을 차지하고 동쪽으로는 오와 월 땅을 소유하시어 두 나라의 풍부한 자원을 독차지하고 강수와 동해에서 나오는 이득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韓)과 위(魏) 두 나라는 상당(上党)의 땅들을 공격하여 나누어 갖고 초나라는 서쪽으로 나아가 함곡관에서 진나라를 압박한다면 초나라의 강대함은 지금보다 백 배나 더 커지게 됩니다. 옛날 대왕께서는 장의에게 속으시고 한중의 땅을 빼앗겼으며 계속해서 남전(藍田)에서 초나라의 군사들은 크게 꺾여 대왕의 가슴속에 품고 계시는 분노를 대신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이 세상 천지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왕은 아직도 진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부디 누구의 계책을 따라야 하는지 한 번 더 숙고하십시오.」

초왕은 이미 진나라와 수호를 하기로 결정했음에도 다시 제왕의 편지를 받자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를 미처 결정하지 못하고 군신들을 불러 의론토록 했다. 군신들 중 어떤 자는 진나라와 화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자들은 제나라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소저(昭睢)가 앞으로 나와 말했다.

「대왕께서 비록 동쪽으로 나아가 월나라를 점령했다고는 하나 우리가 진나라에게 당한 치욕을 갚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나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아와야만 우리 초나라는 옛날의 치욕을 갚고 제후들에게 면목을 세울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차라리 한과 제 두 나라와 수호하시어 진나라의 승상 저리질(樗里疾)의 권위를 높여주십시오. 그렇게 되면 대왕께서는 비로소 한·제(韓齊) 두 나라의 지지를 얻어 진나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진나라가 얼마 전에 한나라의 의양(宜陽)68)을 함락시켰지만 한나라는 여전히 진나라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나라 국경도시인 무수(武遂)70)와는 불과 70여 떨어져 있는 평양(平陽)71)에 한나라의 선조들의 무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나라를 두려워하고 있는 한나라가 진나라를 받들지 않는다면 진나라는 한나라의 삼천(三川) 지역을, 조나라는 상당(上黨)을, 초나라는 하외(河外) 지역을 공격하여 한나라는 일거에 망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초나라가 한나라를 지원한다면 한나라가 망하지 않도록 보장은 할 수 없겠지만 비록 명목상이지만 한나라의 명맥을 확실하게 잇게 할 수는 있습니다. 한나라가 진나라에 반격을 가하여 이미 무수를 탈환하고 하수와 효산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요새를 쌓아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음은 모두 우리 초나라의 후원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나라는 초나라부터 가장 큰 은혜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필시 빠른 시간 안에 한나라는 우리 초나라를 섬기게 되리라고 신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나라도 역시 한나라를 믿고 있기 때문에 한나라의 공자 매(昧)를 초빙하여 재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지금 한나라가 진나라로부터 무수를 탈환한 것은 대왕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제나라와 한나라가 저리질의 권위를 높여줌으로써 진나라는 저리질을 결코 내치지 않고 중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늘날 초나라가 다시 가세하여 제와 한 두 나라의 입장을 강화시킨다면 저리질은 틀림없이 진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을 수 있게 되며, 그렇게 되면 진나라는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땅들을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회왕은 소저의 말을 따라 진나라와 수호를 맺으려는 생각을 바꾸고 결국은 제나라와 합종하고 한나라와는 우호관계를 맺었다.

회왕 24년 기원전 305년 초나라가 제나라 등의 여러 나라와 맺은 합종을 배반하고 진나라와 수호를 맺었다. 진소왕(秦昭王)이 진왕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많은 재물을 초나라에 바쳤다. 또한 초나라 사신이 진나라에 가서 진녀를 초왕의 부인으로 맞이해 왔다.

회왕 25년 기원전 304년, 회왕이 진나라 땅에 들어가 진소왕과 회견하고 다시 황극(黃棘)72)으로 나와서 회맹을 하였다. 진나라가 초나라로부터 빼앗아간 상용(上庸)의 땅을 다시 돌려주었다.

회왕 26년 기원전 303년, 제(齊), 한(韓), 위(魏) 세 나라는 초나라가 그들과의 합종의 맹약을 배반하고 진나라와 수호를 맺은 행위에 분노하여 세 나라가 힘을 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해 왔다. 초나라가 진나라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진나라는 즉시 객경 통(通)에게 군사를 주어 초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삼국의 병사들이 물러갔다.

회왕 27년 기원전 302년, 진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태자가 진나라의 대부 한 사람과 사사로운 싸움을 했다가 결국은 그 대부를 죽이고 도망쳐 초나라로 귀국하였다.

회왕 28년 기원전 301년, 진나라가 제(齊), 한(韓), 위(魏) 세 나라와 힘을 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해와 초나라 장수 당매(唐昧)를 죽이고 중구(重丘)73)의 땅을 빼앗아 갔다.

회왕 29년 기원전 300년, 진나라가 다시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 군사들을 크게 무찔렀다. 진나라는 이 싸움에서 초군 2만 명을 전사시키고 그 장수 경결(景缺)을 죽였다. 회왕이 두려워하여 태자를 제나라에 인질로 잡히고 구원병을 청했다.

회왕 30년 기원전 299년, 진나라가 초나라를 침범하여 초나라의 8개의 성을 빼앗아 갔다. 진소왕이 초회왕에게 편지를 써서 자기의 뜻을 전했다.

「옛날 과인과 왕이 만나 형제의 의를 맺고 황극에서 맹약을 하였습니다. 후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어 양국 간의 관계가 매우 원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태자가 과인의 중신을 살해하고 한마디 사과의 말도 하지 않고 도망쳐 과인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한 나머지 군사를 시켜 귀국의 변경을 공격했습니다. 오늘 내가 들으니 왕께서 태자를 인질로 하여 제나라에 수호를 구한다고 하는데, 우리 진나라와 초나라는 땅으로 인접한 이웃나라라 혼인관계를 맺고 서로 친하게 지낸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진나라와 초나라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게 된 원인은 바로 제후들에게 우리들의 영이 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인은 원컨대 군왕 전하와 무관(武關)에서 만나 서로 얼굴을 맞대고 회맹을 하고 싶습니다. 원컨대 회맹을 맺은 다음에 각기 자기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감히 저의 아둔한 생각을 무릅쓰고 말씀드립니다.」

초회왕이 진왕의 편지를 보고 나서 마음속으로 근심하였다. 참석하자니 진나라의 속임수 같고 안 가자니 진나라의 분노를 사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주저하였다. 소저가 간했다.

「왕께서는 가시면 안 됩니다. 진왕이 오지 않은 죄를 물어 쳐들어온다면 군사를 내어 막으면 그뿐입니다. 진나라는 호랑이나 늑대와 같이 사납고 탐욕스러운 나라라 결코 믿으시면 안 됩니다. 진왕은 제후들을 병합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왕의 아들 자란(子蘭)이 회맹의 자리에 참석을 권했다.

「어찌하여 진나라의 환심을 끊으시려고 하십니까?」

회왕이 할 수 없이 진소왕과 회견을 위해 무관으로 출발했다. 소왕이 초회왕을 속여 장군 한 사람을 무관 주위에 매복시키고 자기의 신호를 기다리라고 했다. 초왕이 회견장에 당도하자 진왕이 매복하고 있는 군사들에게 신호를 하여 무관의 관문을 닫으라고 명하고 회왕을 함양으로 끌고가 장대(章臺)74)에서 회견하였다. 진왕은 회왕을 마치 변방을 지키는 신하 대하듯이 하고 전혀 군왕으로써의 예의를 갖고 대하지 않았다. 초회왕이 대노하며 소저의 말을 듣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 진나라가 회왕을 함양에 억류시키고 무읍(巫邑)75)과 검중(黔中)76)의 땅을 진나라에 할양하면 귀국시켜 주겠다고 위협했다. 회왕은 먼저 회맹을 하고 자기를 귀국시켜 주면 땅을 할양하겠다고 했으나 진왕은 땅을 먼저 떼어주면 회맹을 하고 초왕을 귀국시켜 주겠다고 했다. 초왕이 화를 내며 말했다.

「진나라가 나를 속이더니 다시 나로 하여금 땅을 바치도록 위협하는구나!」

회왕은 결코 진나라에 땅을 떼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진나라가 회왕을 억류하고 보내주지 않았다.

초나라 대신들이 걱정하여 조당에 모여 의론하였다.

「우리나라의 왕이 진나라에 갔으나 그 곳에 억류되어 보내주지 않고 다시 땅을 할양하라고 하나 지금 우리의 태자는 제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데 만일 진과 제나라가 서로 힘을 합하여 우리를 공격해 온다면 우리 초나라는 이제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회왕의 아들들 중에서 나라 안에 있는 왕자를 택하여 초왕의 뒤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소저가 반대하며 말했다.

「지금 우리의 왕과 태자가 모두 제후들에게 붙잡혀 곤궁한 처지에 놓여있는데 오늘 우리가 왕명에 반하여 서자를 세우려고 하는 행위는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나라 대신들이 사자를 제나라로 보내어 거짓으로 회왕이 세상을 떴다고 통고하고 태자를 귀국시켜 달라고 청했다. 제민왕이 그의 상국을 불러 의론하였다.

「우리가 태자를 보내지 않고 억류시키면서 초나라가 소유한 회수 이북의 땅을 우리에게 할양하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제나라의 상국이 말했다.

「불가합니다. 초나라가 자국 내에 있는 왕자를 추대하여 초왕으로 세운다면 우리가 데리고 있는 인질은 쓸모가 없게 되고 또한 우리는 불의를 행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초나라가 자국 내에 있는 왕자를 추대하여 초왕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초나라의 새로운 왕에게 하동국(下東國)76)을 할양해 준다면 우리는 초나라의 새로운 왕을 위해 인질로 잡혀와 있는 태자를 죽여주겠다고 하십시오. 만약 초나라가 우리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리와 진(秦), 위(魏) 3국이 연합하여 태자를 초나라에 입국시켜 초나라의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전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초나라의 하동국 땅을 틀림없이 얻을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제왕은 상국의 계책을 택하여 아무런 조건을 붙이지 않고 초나라 태자를 귀국시켰다. 태자 횡(橫)이 제나라에서 귀국하여 초왕의 자리에 앉았다. 이가 경양왕(頃襄王)이다. 초나라가 국서를 진나라에 보내어 다음과 같이 고했다.

「사직의 신령에 힘입어 우리가 새로운 왕을 세웠습니다.」

경양왕 횡(橫) 원년 기원전 298년, 진나라가 회왕을 붙잡아 두고 땅을 할양하라고 강요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초나라에서 태자를 초왕으로 옹립하여 진나라에 대응하자 진소왕은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무관으로 나아가 초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진나라 군사들이 초나라 군사들을 크게 무찔러 5만 명의 군사들의 목을 베고 석(析) 땅의 15개 성을 빼앗은 후에 물러갔다.

경양왕 2년 기원전 297년, 초회왕이 진나라 도성에서 몰래 도망쳐 초나라에 귀국하려고 했으나 진왕이 알고 초나라로 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진나라 군사들에게 다시 사로잡히지 않을까 두려워한 회왕은 산길을 이용하여 조나라로 가서 자기의 귀국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당시 조나라의 조주보(趙主父)77)는 대(代) 땅에 있었고 그 아들 혜왕(惠王)이 조왕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왕의 일에 말려들어 진나라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꺼려하여 감히 초왕을 초나라에 들여보내지 못했다. 초회왕은 다시 방향을 바꿔 위나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그 뒤를 추격한 진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본국으로 호송된 회왕은 그 후로 얼마되지 않아 병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경양왕 3년 기원전 296년 진나라에 끌려간 회왕이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진나라가 그의 시신을 초나라에 돌려보내 상을 치를 수 있도록 했다. 초나라 백성들이 회왕을 동정하여 마치 자기의 혈육이 죽은 듯이 슬퍼했다. 여러 제후국들이 이 일로 인하여 진나라를 정직하지 못한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이후로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의 국교는 단절되었다.

경양왕 6년 기원전 293년, 진나라의 백기(白起)가 진군의 대장이 되어 한나라를 공격했다. 진군은 이궐(伊闕)에서 한나라 군사들을 크게 싸워 승리를 취하고 그 군사 24만 명의 목을 베었다. 백기의 승전에 고무된 진왕이 편지를 써서 초왕을 위협했다.

「초나라가 우리 진나라를 배반했음으로 우리 진나라는 제후들의 군사들과 힘을 합쳐 초나라를 정벌하여 서로 간에 자웅을 겨루려고 합니다. 원컨대 왕께서 남은 군사들을 정돈하여 우리와 한번 통쾌하게 싸워봄이 어떻겠습니까?」

경양왕이 편지를 읽고 근심에 쌓여 다시 진나라와 화평을 청하려고 했다.

경양왕 7년 기원전 292년, 초나라가 진나라에서 부인을 맞이하고 진나라와 수교하였다.

경양왕 11년 기원전 288년, 제(齊)와 진(秦)나라가 각기 제(帝)를 칭했다. 제후들이 수긍을 하지 않자 한 달 후에 제호(帝號)를 버리고 왕호(王號)로 복귀했다.

경양왕 14년 기원전 285년, 초나라의 경양왕과 진나라의 소양왕이 완(宛)78) 땅에서 회견하고 우호조약을 맺었다.

경양왕 15년 기원전 284년, 초(楚)가 진(秦), 삼진(三晋), 연(燕)과 공동으로 제나라를 정벌하여 회북(淮北)의 땅을 빼앗았다.

경양왕 16년 기원전 283년, 초왕이 진소왕과 같이 언(鄢)에서 회견하고 그 해 가을에는 다시 진왕과 양(穰)79) 땅에서 만났다.

경양왕 18년 기원전 281년, 초나라 사람이 가벼운 활에 가느다란 실로 연결한 화살을 재어 쏘아 북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쏘아 맞추었다. 경양왕이 듣고 불러서 그의 재주에 대해 묻자 대답했다.

「소인은 작은 기러기나 들새들을 작은 활로 쏘아 맞추는 사냥꾼일 일 뿐입니다. 어찌 대왕께서 추구하시는 커다란 도에 비교 할 수 있겠습니까? 항차 강대한 초나라의 힘과 대왕의 현명함에 의지하여 활을 쏜다면 어찌 잡히는 것들이 이렇게 구구하고 조그만 기러기나 들새들뿐 만이겠습니까? 과거 삼왕(三王)80)께서는 도덕이라는 명분을 화살로, 춘추오패(春秋五覇)는 무력(武力)이라는 실제적인 힘을 화살로 삼아 천하를 향해 쏘아 맞추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진(秦), 위(魏), 연(燕), 조(趙) 등과 같은 나라들은 작은 기러기에 불과할 뿐이며, 제(齊), 노(魯), 한(韓), 위(衛) 등의 나라들은 들판 위를 날아다니는 작은 오리새끼에 해당하고, 또한 추(鄒)81), 비(邳)82), 담(郯)83), 비(費)84) 등의 나라는 한낱 작은 들새에 불과하며, 그 밖의 나라들은 화살을 낭비하여 쏠 가치조차 없는 것들입니다. 대왕께서는 저 하늘을 날아다니는 6쌍의 작은 새들을 보십시오. 어느 새를 먼저 쏘아 잡으시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성인이라는 활에 용사라는 화살을 재어 적당한 시기를 살펴 활을 잡아당겨 잡으시지 않으십니까? 이 여섯 쌍의 새들을 모조리 잡아서 부대에 넣어 가지고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마는 즐거움이 아니며, 잡아 가지고 온 것들은 단지 몇 마리의 들오리나 기러기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왕께서 아침에 일찍 활시위에 화살을 잰 다음 길게 당겨 위나라 대량(大梁)의 남쪽을 향해 쏘면 위나라의 오른쪽 팔을 맞추어 한나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중국으로 진출할 때 지나가야 하는 길이 막히게 되어 상채(上蔡) 지방의 여러 군현들이 다치게 됩니다. 다시 활의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위나라의 어(圉)85) 지방을 향해 화살을 날리면 그것은 바로 위나라의 왼쪽 어깨가 절단됩니다. 다시 방향을 더 밖으로 돌려 위나라의 정도(定陶)86) 지방을 향해 화살을 날리게 되면 그것은 바로 위나라가 자기들 동쪽의 땅을 버리게 되어 대송(大宋)87)과 방여(方輿)88) 두 고을을 공략하여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위나라의 양쪽 팔을 자르고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월나라를 멸망시키고 담국(郯國)을 정면에서 치고 올라가면 대량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란대(蘭臺)89)에 올라 활과 화살을 일단 접어두고 서하(西河)90)의 물을 말에 먹이면서 위나라의 대량을 안정시킵니다. 이것은 그 활을 쏜 첫 번째 즐거움입니다. 만일 대왕께서 화살에 주살을 꿰어 사냥하는 일에 진실로 좋아하시어 싫증을 내지 않으신다면 다시 보궁을 꺼내어 돌촉으로 만든 화살에 주살을 새롭게 바꿔 달아 동해의 갈고리 모양의 주둥이를 갖고 있는 큰 새를 쏘아 맞춘 다음 몸을 돌려 돌아와 제나라의 장성을 새롭게 수축하여 방어선을 삼으시고 다시 아침 일찍 활을 쏘아 동쪽의 거읍(莒邑)을 차지하고 오후에는 패구(浿丘)91)를 취하시고 밤을 도와 즉묵(卽墨)을 차지합니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 오도(午道)92)를 점령하면 제장성(齊長城)의 동쪽과 태산의 북쪽을 거머잡을 수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조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고 북쪽으로는 연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제(齊), 연(燕), 조(趙) 세 나라는 새가 비상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합종의 맹약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자연히 맺어지게 됩니다. 북쪽으로 길을 떠나 연나라의 요동 땅을 한번 살펴보신 연후에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월나라의 회계산(會稽山)에 오르시어 다시 활을 쏘는 즐거움을 누리실 수 있습니다. 만약에 사수(泗水) 유역의 모든 제후국 12나라들은 왼손으로 둘둘 묶어 꼼짝 못하게 붙들어 맨 후에 오른손으로 공격을 가한다면 하루아침에 모조리 잡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진나라가 한나라를 파하였으나 오히려 그것은 진나라에게는 커다란 근심거리가 되었고 비록 한나라의 여러 성들을 점령하였지만 능히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진나라는 위나라를 정벌하였지만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고, 조나라를 공격하였지만 오히려 싸움에서 져서 많은 손실을 입고 말았습니다. 결국 진(秦)과 위(魏) 두 나라는 싸움에 지쳐 국력은 탕진되어 기진맥진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초나라는 이틈을 이용하여 진나라에게 빼앗긴 한중(漢中), 석(析)93), 역(酈)94) 등의 옛날 고토를 다시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 보궁을 한 번 더 꺼내시어 주살을 화살에 다시 메시고 맹새(鄳塞)95)로 나아가 진나라가 지쳐서 쓰러지기를 기다리시면 산동과 하내(河內)96)를 얻으실 수 있으며 백성들을 위로하고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남면 하여 왕호를 칭하십시오.

진나라에 대해 말씀드리면 진나라는 마치 커다란 새의 모습으로 해내의 땅을 등에 업고 동쪽을 노려보고 있는 형상입니다. 왼쪽 날개로는 조나라의 서남쪽을 덮고 오른쪽 날개로는 초나라의 언(鄢)과 영(郢) 땅을 위협하고 있으며 정면으로는 한(韓)과 위(魏)를 공격하고 머리를 숙여 중원의 제후국들을 노려보며 병탄의 기회만을 찾고 있습니다. 자기가 처한 곳의 장점과 지세의 유리한 점을 이용하여 날개를 펴고 훨훨 하늘 높이 사방 3천 리를 날아오르니 진나라는 결코 하루아침에 혼자의 힘으로 잡을 수 있는 새는 아닙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목적은 경양왕을 격앙시키기 위해서였다. 경양왕이 다시 그 사람을 소환하여 자세히 묻자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선왕께서는 진나라에게 속아 타국에서 객사하셨습니다. 진나라에 대한 원한의 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일개 필부의 원한으로 나라를 상대로 원수를 갚은 사람은 단지 오자서(伍子胥)와 백공(白公) 뿐이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초나라는 사방 5천리의 땅에 백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는 강국입니다. 그런 국력으로 천 리에 달하는 전쟁터를 마음 놓고 뛰어다닐 수 있음에도 오히려 앉아서 다른 나라의 속박만 받고 있으니 제가 대왕께 그러시지 말라고 아무도 몰래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경양왕은 그의 말을 듣고 사절들을 제후국에 보내 다시 합종을 맺고 진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다. 진나라가 듣고 군사를 내어 초나라를 공격해 왔다.

초나라가 제나라 및 한나라와 힘을 합쳐 진나라를 공격하고 주나라를 도모하려고 했다. 주난왕(周赧王)이 무공(武公)을 시켜 초나라 상국 소자(昭雎)에게 말하게 했다.

「3국이 주나라의 교외를 분할하여 나누어 갖고 물자의 수송을 용이하게 하고, 또한 주나라의 보기를 남쪽으로 옮겨 초나라의 위세를 높이려고 하는데 나는 이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천하의 제후들이 받드는 공주(共主)를 시해하고 대대로 이어오던 천자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 대국과는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또한 군사의 수가 많음을 기화로 군사가 적은 나라를 위협하면 소국들도 따르지 않게 됩니다. 대국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고 소국들은 뒤를 따르지 않으니 세상에서 명분과 실리 중 어느 하나도 얻을 수 없습니다. 명분과 실리를 얻지 못하니 비록 무력을 동원하여 정벌전에 나서지만 결국은 백성들만 상하게 할뿐입니다. 주나라가 지니고 있는 명성을 대신 얻으려는 생각만으로는 천하에 호령을 발 할 수 없습니다.」

소저가 대답했다.

「우리는 주나라를 도모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찌하여 주나라를 점령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적군보다 5배가 넘지 못하는 병력으로는 공격하여 성공하기 어렵고 적군보다 10배가 넘지 않는 병력으로 적의 성을 포위하게 되면 성을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주나라 왕조는 20개의 진(晉)97)에 상당한다는 사실은 상국도 알고 있습니다. 한나라가 이미 20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위나라의 진성(晉城)을 포위했으나 결국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치욕만 당하고 물러갔습니다. 한나라의 정예병들은 싸움 중에 모두 죽고 일반 사병들은 부상을 입었으나 진성은 결코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초나라가 비록 한나라보다 백배나 많은 병력으로 주나라를 공격한다 할지라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천하가 다 알게 했습니다. 무릇 서주와 동주의 원성을 사게 되면 노나라와 추(鄒)나라의 마음을 잃게 되고, 계속해서 제나라와의 외교관계가 단절됩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로부터 초나라의 명성은 없어지게 되고 이어서 초나라의 운명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대왕께서 동주와 서주에 위해를 가하는 일은 삼천(三川)의 주인인 한나라의 국력을 강성하게 하여 방성 밖의 초나라 땅은 틀림없이 한나라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결과가 그렇게 된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주나라의 땅은 이러 저리 맞추어 보아도 사방 백리가 못되는 나라입니다. 주나라의 이름은 천하의 제후들이 떠받드는 주인이지만 그 땅을 차지하여 나누어 봐도 가져간 나라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주나라 백성들을 얻는다 할지라도 그 나라의 군사들을 강하게 만드는 데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초나라가 비록 주나라를 공격하지 않는다 해도 그 군주를 시해했다는 죄명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옛날에 일을 벌이기를 좋아하던 제후들이나 전쟁을 즐겨 공을 탐하던 장군들98)이 호령을 발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천하를 횡행했지만 아직까지 주나라에는 창칼을 겨누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주나라에 있는 제기를 보고 단지 그것을 옮기려고 했을 뿐 시군의 란을 일으키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 한나라가 제기를 초나라로 옮기려고 하는데 저는 그 제기로 인하여 초나라가 천하의 제후들과는 원수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제가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호랑이의 살은 비린내가 나서 먹을 수 없습니다만 호랑이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무장하여 자기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먹을 수도 없는 사나운 호랑이를 힘들여 즐겨 사냥합니다. 만약에 늪지에 사는 미록(麋鹿)에게 호랑이 가죽을 입히고 사람들로 하여금 사냥을 하게 한다면 호랑이 사냥보다는 만 배나 더 큰 즐거움을 맛보게 할 수 있습니다. 제후들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나누어 갖는다면 그 땅으로 자기들의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으며, 초나라를 정벌하는 행위는 공주(共主)를 높인다는 명분도 있게 됩니다. 오늘 상국께서 천하의 공주인 주왕을 죽이고 삼대(三代)99)에 전하여 온 제기와 구정을 가져가 홀로 독차지하여 다른 제후들 위에 오만하게 서려고 하니 이것은 제후의 신분을 벗어난 탐욕스러운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서(周書)』에 ‘일가를 세우려고 정치를 하려고 하는 자는 먼저 앞장서서 혼란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만약이 초나라가 제기와 구정을 남쪽으로 옮겨간다면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그 뒤를 바짝 따라가지 않을까 심히 걱정됩니다.」

경양왕이 무공의 말을 듣고 주나라의 제기와 구정을 초도로 옮기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경양왕 19년 기원전 280년, 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해 왔다. 초나라가 군사를 내어 막았으나 대패하고 상용(上庸)의 땅과 한수 이북의 땅을 내주었다.

경양왕 20년 기원전 279년, 진나라 대장 백기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초나라의 서릉(西陵)100)를 점령하였다.

경양왕 21년 기원전 278년, 진나라 대장 백기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 초나라의 영도를 점령했다. 백기는 영도에 있던 초나라 선조들의 무덤들이 몰려 있던 이릉(夷陵)을 불태워 훼손시켰다. 백기가 거느린 진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초나라 군대가 궤멸되어 다시 싸울 수 없게 된 경양왕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초나라의 동북지방으로 도망쳐 진성(陳城)101)으로 들어가 지키려고 했다.

경양왕 22년 기원전 277년, 진나라가 초나라의 검중군(黔中郡)과 무군(巫郡)을 공격하여 빼앗아 갔다.

경양왕 23년 기원전 276년, 동북의 땅에서 병사들을 끌어 모아 10여만이 넘게 된 초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에게 빼앗긴 장강 연안의 15개 성을 탈환하여 초나라의 군현으로 삼아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경양왕 27년 기원전 272년, 초나라가 3만의 군사를 보내 연나라를 공격하는 삼진을 도왔다. 초나라가 다시 진나라와 강화하고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 초나라가 좌도(左徒)102)로 하여금 태자를 따라가 보살피게 하였다.

경양왕 36년 기원전 263년 경양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태자가 진나라에서 도망쳐 돌아왔다. 그해 가을 경양왕이 죽었다. 태자가 웅원(熊元)으로 개명하며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나라의 고열왕(考烈王)이다. 고열왕이 좌도 황헐(黃歇)을 영윤으로 삼고 오(吳) 땅에 봉하고 춘신군(春申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고열왕 원년 기원전 262년, 진나라가 돌려주는 주(州)103) 땅을 받고 강화를 맺었다.

고열왕 6년 기원전 257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조왕이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초나라가 장군 경양(景陽)에게 군사를 주어 달려가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열왕 7년 기원전 256년, 초나라 군사들이 조나라의 신중(新中)104) 땅에 주둔하고 있던 진나라 군사들을 공격하자 진나라 군사들이 물러갔다.

고열왕 12년 기원전 251년, 진소왕이 죽자 초왕이 춘신군에게 명하여 진나라에 조문을 가게 하였다.

고열왕 16년 기원전 247년, 진나라의 장양왕(庄襄王)이 죽고 진왕의 자리에 조정(趙政)105)이 올랐다.

고열왕 22년 기원전 241년, 초나라와 여러 제후국들이 힘을 합하여 진나라를 정벌하였으나 형세가 불리하여 성공하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초나라가 동쪽의 수춘성(壽春城)으로 천도하고 그 이름을 옛날 이름을 따서 영(郢)이라고 불렀다.

고열왕 25년 기원전 238년 고열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한(悍)이 뒤를 이었다. 이가 초유왕(楚幽王)이다. 이원(李園)이 춘신군을 죽였다.106)

유왕 3년 기원전 235년, 진과 위나라가 힘을 합쳐 초나라를 공격해 왔다. 진나라의 재상 여불위(呂不韋)가 죽었다.

유왕 9년 기원전 229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진나라에 병합하였다.

유왕 10년 기원전 228년, 유왕이 죽고 그의 동복동생인 유(猶)가 즉위하였다. 이가 초애왕(楚哀王)이다. 애왕이 즉위한지 두 달여 만에 부추(負芻)를 따르던 무리들이 애왕을 습격하여 살해하고 부추를 초왕의 자리에 올렸다. 부추는 애왕의 서형이었다. 그 해에 진나라가 조왕 천(遷)을 사로잡았다.

부추 원년 기원전 227년, 연나라 태자 단(丹)이 형가(荊軻)107)를 시켜 진왕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부추 2년 기원전 226년, 진나라가 군사를 보내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군을 대파하고 초나라 10여 개 성을 빼앗아 갔다.

부추 3년 기원전 225년,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부추 4년 기원전 224년, 진나라의 대장 왕전(王翦)이 기(蘄)에서 초나라 군사들을 대파하고 초나라 장수인 항연(項燕)을 잡아서 죽였다.

부추 5년 기원전 223년, 진나라 대장 왕전과 몽무(蒙武)가 초나라 도성을 함락시키고 초왕 부추를 사로잡고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진나라는 초나라의 옛 땅에 세 개의 군을 설치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초영왕이 신성(申城)에서 제후들을 소집하여 경봉을 잡아다 죽이고 장화대를 지었다. 다시 주나라의 구정을 넘보아 그 뜻이 높아 천하를 아주 우습게 여겼으나 결국은 신해(申亥)의 집에서 굶어 죽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절조와 품행을 모두 지키지 못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어찌 사람이 권세가 있다하여 남을 대하는데 삼가하지 않았단 말인가? 또 기질(棄疾)이 변란을 일으켜 그 형들을 죽이고 초왕의 자리에 올라 며느리로 데려온 진녀를 탐했으니 너무 도가 심하지 않았는가? 초나라는 이 두 사람 때문에 망했다.

<초세가(楚世家) 끝>

주석

1)창의(昌意) : 황제(黃帝)의 둘째 아들로 황제(黃帝)의 비(妃) 누조(嫘祖)의 소생이다. 누조는 서릉씨(西陵氏)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양육(養鬻)을 가르쳤기 때문에 선육(先鬻)이라고도 하고 또 여행 다니기를 즐겨하다가 길 위에서 죽었기 때문에 도로신(道路神)이라고도 한다.

2)여섯 아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표와 같다.

次順

封地

爵位

特 記 事 項

長男

昆吾 樊

衛墟

夏伯

탕임금이 걸을 정벌할 때 같이 멸했다.

次男

參胡

韓墟

주나라 때 호국(胡國)으로 되었다가 후에 초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三男

彭祖

韓墟

商伯

상나라 말에 망했다.

四男

會人

鄭墟

회(鄶)국을 말하며 후에 정 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五男

曹姓 安

邾墟

六男

季連

荊蠻

子爵

후손들 중 죽웅(鬻熊) 이라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초나라를 세운 웅씨들의 시조(始祖)다

3)초나라 최초의 도읍지 단양은 설이 분분하나 대체로 4가지 설이 있다.

①지금의 호북성 자귀현(姊歸縣)으로 사천성과의 경계다.

②지금의 강소성 丹陽市 경내의 當塗 설이다.

③지금의 호북성 江陵市 서쪽의 枝江市 설이다.

④지금의 하남, 호북, 섬서 경계지역을 흐르는 淅川과 丹水가 합류하는 淅川市 일대 등이다.

4)용(庸) : 지금의 호북성 죽산현(竹山縣) 서남쪽에 있었던 제후국

5)양오(楊奧) : 양우(楊雩) 혹은 양월(陽越)이라고도 한다. 위치는 미상이나 호북성 강릉현(江陵縣) 일대라는 설도 있다.

6)악(鄂) :지금의 호북성 악성현(鄂城縣) 부근. 악성현은 무한시 동 약 50키로다.

7)구단(句亶) : 지명으로 지금의 호북성 강릉현 경내에 있던 고을을 말한다.

8)복(濮) :지금의 호북성을 가로 지르는 한수(漢水)의 하류 지방을 말한다.

9)황(黃) : 하남성 황천현(潢川縣) 서남쪽에 있었던 춘추 시 군소 제후국.

10)우(盂) : 송나라 영지로써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 서북

11)홍수(泓水) : 지금의 하남성 자성(柘城) 북으로 당시 송나라를 북서에서 동남으로 관통해서 흐러든 수수(睢水)의 지류였다.. 이곳에서 기원전 638년 송양공(宋襄公)이 이끄는 송군과 초장 성득신(成得臣)이 이끄는 초군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송군이 대패했다. 송양지인(宋襄之仁) 이라는 고사로 유명한 싸움이다.

12)기(夔) : 지금의 호북성 자귀시(秭歸市) 동남에 있었던 파인(巴人)의 군소 제후국으로 웅거(熊渠)의 둘째 아들 웅지(熊挚)의 봉국이다.

13)성복대전(城濮大戰) :기원전 636년 중원제후국을 대표하는 당진과 남쪽의 새로이 일어난 세력을 대표하는 초나라가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鄄城縣) 서남 임복향(臨濮鄕)에 있었던 성복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 이 싸움의 결과 진문공(晉文公)의 당진군이 초군을 대파하여 초나라의 중원진출에 쐐기를 박고 향후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14)강(江) : 영(嬴)씨 성의 제후국으로 지금의 하남성 식현(息縣) 서남에 있었다.

15)육(六) : 지금의 안휘성 육안시(六安市) 동북에 있었던 제후국

16)요(蓼) : 지금의 하남성 고시현(固始縣) 동북에 있었던 제후국

17)고도씨(皐陶氏) :언(偃) 성의 동이(東夷) 족의 부족장. 순임금 때 형벌을 관장장하는 벼슬에 임명하고 우(禹) 임금 때는 그이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그 뒤를 잇지는 못했다.

18)오거(伍擧) : 오거는 오자서(伍子胥)의 조부로써 장왕의 장자인 강왕(康王)과 차자인 영왕(靈王)을 모신 사람이다. 후에 장왕을 따라 종군하여 필(邲)에서의 싸움에서 주전론을 주장하여 큰공을 세운 사람은 오거의 부친인 오참(伍參)이다. 오거가 장왕에게 간하는 사기의 이 부분은 오참(伍參)의 잘못된 기록이다. (오자서 열전 참조)

19)용(庸) : 지금의 호북성 죽산현(竹山縣) 서남쪽에 있었던 제후국. 죽산현은 호북성의 서북의 섬서성(陝西省)과의 경계에 있다.

20)육혼융(陸渾戎) :지금의 하남성 숭현(嵩縣) 동북쪽에 있었던 이민족의 이름. 동주의 왕도였던 락양(洛陽)과 가깝다.

21)겹욕(郟鄏) : 지금의 하남성 락양시 서왕성(西王城) 공원에 있었던 고을의 이름.

22)약오씨(若敖氏) : 투(鬪)씨를 말하며 여기서는 투월초(鬪越椒)를 가리킨다.

23)서(舒) :지금의 안휘성 려강현(廬江縣) 서남쪽에 있었던 제후국 이름

24)혜전탈우(蹊田奪牛)의 어원이다. 소를 몰고 남의 전답에 들어가서 농작물을 망치게 했다고 해서 그 벌로 소를 빼앗는다는 뜻으로 죄보다 벌이 지나치게 무거운 경우를 말한다.

25)계(啓) :하나라를 세운 우(禹)임금의 아들이다. 곰으로 변하여 황하의 치수공사를 하고 있던 우를 본 그의 아내는 도망가다가 돌이 되었다. 그때 우의 아내는 계(啓)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돌로 변한 그녀의 배가 점점 자라더니 갈라져 계가 태어났다.

26)균대(鈞臺) : 현 하남성 우현(禹縣) 부근에 있었던 하나라의 별궁

27)경박(景亳) : 현 하남성 조현(曹縣) 부근. 상나라는 창건해서 멸망할 때까지도읍을 7번 천도했다. 상나라의 처음 도읍지는 경박(景亳)이고 마지막 도읍지는 현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소재 소둔촌(小屯村)이었다.

28)맹진(孟津) :하남성 낙양시(洛陽市) 북 20키로 되는 맹진현(孟津縣) 부근의 나룻터로 중국고대부터 황하를 건널 수 있던 유명한 도선장(渡船場)이었다. 주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제후들을 소집하여 맹진에서 하늘에 맹세의 의식을 치르고 황하를 건너 진군하던 중 군사들의 행군하는 모습에 아직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회군하고 그 2년 후에 다시 출정하여 목야(牧野: 현 하남성 신향시(新鄕市) 북)의 들판에서 은나라 군사들을 무찌르고 주 나라를 세웠다.

29)풍(酆) : 주나라 도읍인 호경(鎬京) 옆 서쪽에 세운 별궁이 있던 고을

39)도산(涂山) : 현 안휘성(安徽省) 방부시(蚌埠市) 부근.

31)유잉(有仍) : 지금의 산동성 제녕시(濟寧市) 부근

32) 유민씨(有緡氏) : 지금의 하남성 우성현(虞城縣) 북쪽에 있었던 하나라 때의 이민족 국가

33)여산(黎山) : 지금의 하남성 준현(浚縣) 동남에 있던 산 이름.

34)태실(太室) : 오악(五嶽) 중 중악(中嶽)에 해당하는 숭산(嵩山)의 주봉 이름이다. 태실산을 마주보고 있는 봉오리는 소실산(少室山)이다.

35)주방(朱方) : 오(吳)나라의 방어기지가 있는 성읍으로 지금의 장강 어구인 강소성 진강시(鎭江市) 경내다. 제나라의 대부 경봉(慶封)이 권력다툼에서 패하고 오나라에 망명하자 오왕은 경봉을 주방에 봉해 오나라의 북방을 지키도록 했다.

36)건계(乾谿) :현 안휘성 박주시(亳州市) 남 와양현(渦陽縣) 부근. 박주시는 안휘성 북부의 하남성과의 접경 지역에 있는 성시(城市)이다.

37)언성(鄢城) :언영(鄢郢)이라고도 하며 초 나라의 도성인 영성(郢城)과 다른 도성. 지금의 호북성 의성현(宜城縣) 남쪽에 있었다. 의성현은 한수 강안의 도시로 양번시(襄樊市) 남 40키로에 있다.

38)이 말은 영왕이 초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자기의 수레에 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기(旗)를 달고 우읍(芋邑)에 이르자 신무우가 깃발을 압수한 일과 또 한번은 자기 집의 하인이 물건을 훔쳐 달아나서 나중에는 영왕의 호위병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신무우가 왕궁에 들어가 그 병사를 잡아간 일을 말한다. 영왕은 두 번 다 신무우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었다.

39)다섯장군(五率) : 초영왕(楚靈王)이 서국(徐國)을 정벌할 때 파견했던 다섯 명의 장군. 즉, 탕후(蕩侯), 반자(潘子), 사마독(司馬督), 두윤오(蠹尹午), 능윤희(陵允喜) 등을 말한다.

40)한선자(韓宣子)는 한기(韓起)의 시호(諡號)를 말하며 숙향(叔向)은 양설힐(羊舌肹)의 자(字)이다.

41)오현(五賢) : 진문공이 유랑할 때 수종한 다섯 현인으로 조쇠(趙衰), 호언(狐偃), 고타(賈佗), 위주(魏犨), 선진(先軫)을 말한다.

42)초공왕(楚共王)과 초평왕(楚平王) 사이의 초나라 왕위 계승 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공왕(共王) 심(審) 재위 기원전 592-560년

당진(唐晉)과 언릉(鄢陵)에서 싸우다가 한쪽 눈을 잃고 패전하여 부왕인 초장왕이 이룩한 중원의 패권을 잃었다. 슬하에 아들을 다섯 두었다. 장남은 강왕(康王) 초(招), 차남은 영왕(靈王) 위(圍), 3남은 자비(子比), 4남은 자석(子晳), 5남 막내는 평왕(平王) 기질(棄疾)이다.

②강왕(康王) 기원전561- 545년

공왕(共王)의 뒤를 이어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강왕의 뒤는 그의 아들 겹오(郟敖)가 뒤를 이었다.

③겹오(郟敖) 원(員) 기원전 544-541년

자기의 숙부인 영왕에게 재위 4년만에 시해당했다.

④영왕(靈王) 위(圍) 기원전 540- 529년

조카인 겹오를 죽이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라 장화궁을 짓고 대외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진채(陳蔡) 두 나라를 멸하고 그 땅을 초나라의 군현으로 삼았으며 동생 기질을 채공으로 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후에 서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을 나간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킨 기질에 의해 쫓겨났다. 영왕은 여기저기 배회하다가 신해의 집에서 목을 메어 죽었다.

⑤자비(子比) 기원전 529년

영왕을 몰아낸 채공 기질에 의해 초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이어서 기질이 꾸민 음모에 빠져 그의 동생 자석과 함께 자살했다.

⑥평왕(平王) 기질(棄疾) 기원전 528 - 514년

공왕의 막내아들로써 영왕이 원정 나간 틈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켜 영왕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또 다른 형인 자비를 앉혔다가 다시 자비를 음모에 빠뜨려 자석과 함께 자살하게 만들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앉았다. 자기의 후계로 채녀(蔡女) 소생인 건(建)을 태자로 삼았다. 태자가 장성하자 태자의 부인으로 섬진 애공(哀公)의 동생인 백영(伯嬴)을 데리고 오게 하였다. 그러나 백영의 미모에 반한 평왕이 며느리로 데려온 백영을 자기의 부인으로 삼고 태자건을 북방의 성보(城父)라는 곳으로 보냈다. 후에 다시 태자건을 세력을 줄이기 위해 세자의 태부인 오사를 소환하여 그 두 아들과 함께 죽이려고 하였다. 오사의 장남인 당공(棠公) 오상(伍尙)은 오사의 부름에 응하여 달려와 오사와 함께 죽었으나 자서(子胥)인 오원(伍員)은 이미 망명한 태자건의 뒤를 따라 정나라로 도망쳤다. 후에 태자건이 정나라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살해되자 오자서는 태자건의 어린 아들 승(勝)을 데리고 소관(昭關)을 넘고 장강을 건너 오나라로 들어가 합려(闔閭)를 모시게 되었다. 후에 오자서는 자기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에 쳐들어와 영도를 점령하자 평왕의 아들 소왕(昭王)은 란을 피해 수(隨)나라로 몸을 피했다. 신포서(申包舒)의 활약으로 섬진의 애공으로부터 구원군을 얻어 오나라 군사들을 영도에서 몰아내고 초나라는 다시 복국 시켰다.

43)성보(城父) : 지금의 하남성 평정산시(平頂山市) 부근 춘추 때 초나라의 중원공략의 거점이다.

44)소(巢) :지금의 안휘성 소현(巢縣) 동북

45)왕료(王僚)의 동생 엄여(掩餘)와 촉용(觸庸)을 말한다. 왕료가 합려가 보낸 전제(專諸)에 의해 암살당하자 엄여는 서국(徐國)으로 촉용은 종리(鍾離)로 달아나 초나라에 망명했다. 이것은 ‘두 공자’의 오기(誤記)이다. (史記索隱)

46)잠읍(潛邑) :지금의 안휘성 곽산현(霍山縣) 동북

47)직(稷) :지금의 하남성 동백현(桐柏縣) 동남

48)당계(堂谿) :현 하남성 서평현(西平縣) 서남

49)번(番) :현 강서성 파양현(波陽縣)이라는 설과 안휘성(安徽城) 봉대현(鳳臺縣)이라는 설이 있다.

50)약(鄀) : 지금의 호북성 의성현(宜城縣)남 약 20키로에 있던 고들로 언영(鄢郢)이라고도 한다.

51)돈(頓) :현 하남성 항성현(項城縣)에 있었던 제후국. 하남성을 가로질러 흘렀던 영수(穎水) 강안에 있었음.

52)호(胡) :현 안휘성 부양시(阜陽市)에 있었던 제후국. 안휘성에서 회수(淮水)와 만나는 영수(穎水)의 하류 강안에 있었던 군소제후국

53)섭(葉) : 지금의 하남성 섭현(葉縣) 남

54)기(杞) : 진기(陳杞)세가 참조. 주무왕이 은주(殷紂)를 멸하고 하우(夏禹)의 자손인 동루공(東樓公)을 찾아내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인 옹구(雍丘)에 봉했다. 춘추 때는 지금의 산동성 안구현(安丘縣)인 순우(淳于)로 옮겼다가 기원전 445년 초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55)승구(乘丘) : 현 산동성 연주현(兗州縣) 서

56)원전(原典)은 도왕(悼王) 2년 楚伐周로 되어있으나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史記志疑)라는 책에 주(周)는 정(鄭)의 오기(誤記)라고 하였다. 사기연표(史記年表) 주안왕(周安王) 4년 기원전 398년 초나라 항목에도‘ 敗鄭師,圍鄭.鄭人殺子陽’라고 나와있다.

57)대량(大梁) :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開封市)를 말하며 전국 때 위나라의 수도였다.

58)유관(楡關) : 대량성(大梁城) 서쪽 관문

59)자방(玆方) : 지금의 호북성 송자현(松滋縣) 서쪽의 고을로써 양자강 남안에 있었다.

60)노양(魯陽) : 지금의 하남성 평정산시(平頂山市) 경내의 노산현(魯山縣)을 말함.

61)상(商) : 지금의 섬서성 상주시(商州市) 단봉현(丹鳳縣)을 말하며 하남성과의 접경지역에 있음.

62)전영(田嬰)은 맹상군(孟嘗君)의 부친으로써 제위왕(齊威王)의 막내 서자(庶子)이며 제선왕(齊宣王) 서제(庶弟)이다. 전영이 거짓으로 초나라와 강화조약을 맺은 것처럼 꾸민 다음 몰래 월나라 왕을 부추겨 초나라를 공격하게 한 일을 말한다..

63)전반자(田盼子) : 전국 때 위혜왕을 만난 제위왕이 제나라의 국보를 논했을 때 언급된 사람으로 “우리 제나라의 신하 중에는 반자(盼子)라고 있는데 고당(高唐)을 지키게 하자 조나라 사람들은 감히 하수 동쪽 지역에서는 고기잡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기원전 333년 제위(齊魏)간의 마릉(馬陵)의 싸움에서 대장 전기(田忌) 휘하에서 전영(田嬰)과 함께 부장(副將)으로 출정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숙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마릉의 싸움 이후 손빈은 은퇴하고 전기는 추기와의 정쟁으로 타국으로 도망치자 전반자는 제나라의 군정을 혼자 담당했다.

64)주국(柱國) : 초나라 무관(武官)의 최고 관직으로써 상주국(上柱國)이라고도 하며 직위는 영윤(令尹) 다음이다.

65)양릉(襄陵) :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이다.

66)규(珪) : 고대에 군주가 공신들에게 작위를 내릴 때 주는 신표. 일설에는 전국 때 신설된 최고의 관직명이라고도 한다.

67)교상(嚙桑) :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패현(沛縣) 경내의 고을이다. 패현은 산동성과의 접경지역인 미산호(微山湖) 좌안(左岸)의 성시(城市)다.

68)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史記志疑)에 이때는 소진(蘇秦)이 제나라에서 죽은 지 4년 후라 육국을 연합하게 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게 했다는 기사는 사마천의 착오라 했다.

69)의양(宜陽) : 지금의 하남성 의양현(宜陽縣) 경내다. 중원으로 진출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진무왕이 좌승상 감무에게 명해 기원전 308년 한나라의 의양성을 공격하여 삼천으로 가는 길을 뚫으라고 했다. 한나라의 완강한 저항과 진나라 내부의 반대를 극복하고 감무는 의양성을 공격한지 1년여 만에 함락시키고 진무왕을 주나라에 들여보낼 수 있었다. 감무는 이 전투에서 한나라의 군사 6만의 목을 베고 황하를 건너 무수(武遂)까지 점령했으나 주나라에 들어간 진무왕이 구정을 보고 힘내기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죽었기 때문에 그 책임을 지고 진나라에서 추방되었다.

70)무수(武遂) : 전국 때 한나라 영토였다가 섬진에게 빼앗긴 고을로서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 서남

71)평양(平陽) : 전국 초기 한나라가 수도로 삼았던 고을로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 경내

72)황극(黃棘) : 전국 때 초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신야현(新野縣) 부근

73)중구(重丘) : 전국 때 초나라 땅으로 하남성 필양현(泌陽縣) 동북

74)장대(章臺) : 진(秦)나라 왕의 이궁(離宮)의 별칭이며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경내의 장안현(長安縣)에 있었음.

74)무읍(巫邑) : 전국 때 초나라 땅으로 지금의 사천성 무산현(巫山縣) 일대

75)검중(黔中) : 전국 때 초나라의 땅으로 지금의 호북성, 호남성, 사천성, 귀주성과의 경계지역 일대를 말함. 삼국시대 때 촉나라가 검중군(黔中郡)을 두었음.

76)하동국(下東國) : 장강의 하류 유역인 초나라의 동쪽 땅과 회수(淮水)의 북쪽지방인 즉 앞서의 회북(淮北)을 말함.

77)조주보(趙主父) :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을 말하며 기원전 325년에서 295년까지 재위했다. 그의 적자인 장(章)을 폐하고 서자인 하(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기는 주보(主父)라고 하며 상왕(上王)의 역할을 하려고 하였으나 후에 두 형제 사이에 벌어진 왕권다툼에 휘말려 자기가 머물렀던 사구궁(沙丘宮)에 갇혀 굶어 죽었다. 무령왕는 조나라 군사들을 호족의 풍속에 따라 복식과 궁술 및 기마술 등을 도입하여 전국시대 당시 전투방식을 보병전 위주에서 기마전 위주로 바꾸었다. 무령왕이 유목민족의 전통인 기마병을 양성하기 위해 시행한 개혁을 호복기사(胡服騎士)라고 한다.

78)완(宛) :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부근

79)양(穰) :전국 때 초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등현(登縣)

80)삼왕(三王) :하우(夏禹), 상탕(商湯), 주문왕(周文王)을 말함.

81)추(鄒) : 주(邾)라고도 하며 지금의 산동성 추현(鄒縣), 비현(費縣), 등현(滕縣) 일대를 근거지로 한 춘추 때 소 제후국.

82)비(邳) : 지금의 강소성 비현(邳縣)에 있었던 소 제후국

83)담(郯) : 지금의 산동성 담성현(郯城縣) 동북에 있었던 소 제후국

84)비(費) : 지금의 산동성 비현(費縣)을 말하며 계손씨의 봉읍으로 전국시대 때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85)어(圉) :전국 때 위(魏)나라 땅으로써 지금의 하남성 기현(杞縣) 남

86) 정도(定陶) : 전국 때 위나라 영토로서 지금의 하남성 정도현(定陶縣)

87)대송(大宋) : 전국 때 위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상구시(商邱市). 즉 춘추 때 송나라의 땅을 말한다.

88)방여(方輿) : 전국 때 위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어대현(魚臺縣) 서북

89)란대(蘭臺) : 환산(桓山)의 별칭. 현 강소성 동산현(銅山縣) 서북

90)서하(西河) : 위나라 경내에 있던 황하를 가리킨다.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동쪽 일대

91)패구(浿丘) :전국 때 제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동성 박흥현(博興縣) 동남

92)오도(午道) : 오도(午道)라는 말은 종횡으로 통하는 네거리를 말하나 여기서는 제나라와 초나라와의 국경지대를 뜻한다.

93)석(析) : 지금의 섬서성과의 경계지역에 있는 하남성 서협향(西峽鄕)을 말하며 진나라의 무관(武關)에서 약 30키로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초나라의 전략적 요충지 임. 즉 진나라의 초나라 공격로는 육로의 경우는 진령(秦嶺)을 넘어 무관으로 나오는 길과 수로의 경우는 서쪽의 대산관(大散關)으로 나와 촉(蜀)에서 배를 이용하여 장강의 물살을 타고 초나라로 진격한 두 가지 공격로가 있었음.

94)력(酈) : 전국 때 초나라 땅이었다가 진나라에게 빼앗긴 지역으로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서북. 남양시는 춘추 때 초나라의 중원 진출의 전초기지 였던 신성(申城)으로써 전국 때는 그 명칭이 완성(宛城)으로 바뀌었다. 력읍(酈邑)은 완성(宛城)의 방어를 위해 세운 위성도시임.

95)맹새(鄳塞) : 전국 때 초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신양시(信陽市) 서남쪽의 평정관(平靖關).

96)산동(山東), 하내(河內) : 산동(山東)은 산서성과 하북성을 가르는 태항산맥(太行山脈) 동쪽의 지방을, 하내(河內)는 황하유역을 말한다. 중국의 지역은 대체적으로 북쪽은 태항산맥을 기준으로 그 서쪽은 산서(山西), 그 동쪽은 산동(山東)이라 칭했고 황하의 북쪽은 하북, 황하의 남쪽은 하남이라 했고 장강 이북은 강북, 이남은 강남이라 했다.

97)진(晉) : 경영왕 18년 기원전 281년 당시는 진(晉) 즉 당진이라는 나라는 기원전 374년에 한위조 삼가에 의해 해체된지 백년 가까이 지난 후다. 여기서 진(晉)이라는 말은 원래 당진이 일어났던 산서성 하곡부(河曲部)를 지칭하는 지명으로 사용했다. 안읍은 전국 초기 위나라가 도읍으로 삼은 곳이다.

98)원전은 ‘호사지군(好事之君), 희공지신(喜功之臣)’이며 호사지군은 정(鼎)의 무게를 물은 초장왕(楚庄王), 주나라에 정(鼎)을 달라고 요구한 초영왕(楚靈王), 그리고 주정(周鼎)을 초나라에 옮겨야겠다고 한 경양왕(頃襄王)을 말하고, 희공지신(喜功之臣)은 성복대전(城濮大戰)의 패장 자옥(子玉) 성득신(成得臣)과 경양왕(頃襄王) 때의 초나라 대부 소저(昭雎)를 말한다.

99)삼대(三代) :하(夏), 은(殷), 주(周) 삼대의 왕조

100)서릉(西陵) : 지금의 호북성 의창시(宜昌市) 서북. 이것은 백기(白起)가 수군을 이끌고 사천성을 경유하여 쳐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며 의창시는 사천성(四川省)과 인접한 호북성 서쪽의 장강(長江) 연안도시이다.

101)진성(陳城) : 원래는 진(陳)나라가 도읍하였던 완구(宛具)를 말하며 초나라가 멸하고 군현으로 삼아 진성(陳城)이라고 불렀다.

102)좌도(左徒) : 초나라의 관직명. 국가의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고 외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여기서는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을 가리킨다.

103)주(州) : 초나라 땅 이름. 지금의 호북성 강릉시(江陵市) 경내.

104)신중(新中) : 전국 때 조나라 땅으로 지금의 하북성 거록현(巨鹿縣) 경내

105)조정(趙政) : 진시황(秦始皇) 영정(嬴政)을 가리킨다. 영(嬴)씨와 조(趙)씨는 같은 조상의 후손이며 진시황이 조나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조정이라 한 것이다.

106) 李園殺春申君 : 초나라의 고열왕(考烈王 : 재위 전 263 - 238년 )이 자식이 없자 춘신군이 이것을 걱정하였다. 조나라 사람 이원(李園)이 그의 여동생을 춘신군에 바쳤다. 후에 그의 여동생이 춘신군의 아이를 배자 이원은 그의 여동생과 모의하여 그녀를 고열왕에게 바쳤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가자 과연 아들을 낳게 되었다. 이가 후에 유왕(幽王)이다. 이원은 춘신군이 그 사실을 발설하고 자기가 유왕의 부친이라는 것을 기화로 전횡(專橫)할까 두려워하여 죽였다. 춘신군 열전 참조

107)형가(荊軻) : 위(衛)나라 사람으로 태자 단(丹)의 부탁을 받고 비수를 집어넣어 두루마기로 만든 연나라 전국지도와 진왕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에 망명해 왔던 번어기(樊於其)의 수급을 준비하여 진나라에 가서 진왕에게 예물로 바치려고 하였다. 형가가 진왕에게 바치려고 지도를 펴면서 그 안에 들어있는 비수를 집어들고 진왕을 찔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형가는 그 자리에서 피살되었다. 다음 해에 진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자 태자 단은 그의 부왕에게 피살되어 진왕에게 바쳐졌다. 자객열전 참조.

108)기(蘄) : 지금의 안휘성 숙주시(宿州市) 경내의 동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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