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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1:49:23748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8.송(宋)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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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세가8. 송미자(宋微子)

812. 嗟箕子乎(차기자호)!

오호라, 기자여!

813. 嗟箕子乎(차기자호)!

오호라, 기자여!

814. 正言不用(정언불용),

올바른 말을 했으나 받아들여지기는커녕

815. 乃反爲奴(내반위노).

오히려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졌구나!

816. 武庚旣死(무경기사),

주나라는 무경이 반하자 죽이고

817. 周封微子(주봉미자).

미자계(微子啓)를 다시 봉했다.

818. 襄公傷于泓(양공상우홍),

이어서 그 후예인 양공(襄公)은 초나라와 홍수(泓水)의 싸움에서

의(義) 지키려다가 패하고 부상을 입었는데

819. 君子孰稱(군자수칭).

군자라면 그 누구가 도를 말할 수 있겠는가?

820. 景公謙德(경공겸덕),

후에 송경공은 스스로를 낮추고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었으나

821. 熒惑退行(형혹퇴행).

형혹성이 위치를 바꾸어 송나라로부터 벗어났다.

822. 剔成暴虐(척성포학),

이어서 척성이 포학무도 했음으로

823. 宋乃滅亡(송내멸망).

송나라는 이로 인하여 결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824. 嘉微子問太師(가미자문태사),

미자계(微子啓)가 송나라에 책봉되자

기자(箕子)를 태사로 삼아 자문을 구하여 정치를 행한 것을 칭송하여

825. 作<宋世家>第八(작<송세가>제팔).

<송세가>제팔을 지었다.

미자개(微子開)1)는 은(殷)나라 제을(帝乙)의 맏아들로 제주(帝紂)의 서형(庶兄)2)이다. 제위에 오른 주왕은 혼매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고 음란한 생활에 사치를 즐겼다. 미자(微子)가 여러 번 간했으나 주왕이 듣지 않았다. 덕을 쌓아 제후들로부터 신망을 얻은 서백(西伯) 창(昌)이 구국(구<阝+九>國)3)을 멸하는 것을 보고 그 화가 이르게 될 것을 두려워한 조이(祖伊)4)가 주왕에게 고했다. 주왕이 듣고 말했다.

「나는 천명을 받고 태어났는데 그가 어찌할 수 있겠소?」

그러자 미자는 간언으로 주왕을 깨우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주왕 곁을 떠난 미자는 스스로 결정을 못하고 태사(太師)와 소사(少師)에게 물었다.

「은나라는 이미 깨끗하고 밝은 정치가 이미 사라져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조상들은 세상에 많은 공업을 이룩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주왕(紂王)은 주연에 빠져 맛잇는 음식과 술에 탐닉하고 오로지 아녀자들의 말만으로 탕왕(湯王)이 이룩한 덕치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은나라 조정의 신하들은 그 직위가 높고 낮거나 크거나 작거나 모두 초야에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을 즐겨하며 란을 일으켜 그 윗사람들을 범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정대신들은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본받아 따라 하기 바쁘며 법을 어기고 기강을 어지럽혀 사람마다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없으나 잡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일반백성도 따라서 일어나 서로 원수로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 법도와 제도를 잃어버린 은나라의 모습은 마치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으나 어구를 찾지 못해 표류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은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미자가 계속 말했다.

「태사여, 소사여! 나는 장차 어디로 가야하며 누구를 따라야 합니까? 우리들의 은나라는 어떻게 해야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들이 나를 깨우쳐주지 못해 내가 불의에 빠지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

태사가 말했다.

「왕자여! 천제가 하늘에서 내려와 재앙을 내려 은나라를 멸하려고 해도 주왕은 전혀 위로는 하늘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들도 두려워하지 않아 장자나 원로들의 충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은나라 백성들조차도 천지신명의 뜻을 어기고 그 제사도 소흘히 하고 있습니다. 지금 몸을 바쳐서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면 후회가 없겠으나, 몸이 죽어도 결국은 나라는 다스려지지 않게 되니 멀리 다른 땅으로 가서 사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미자가 그 말을 듣고 나라를 떠났다.

기자(箕子)5)는 주왕의 집안사람이다. 주왕이 식사를 할 때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한탄하며 말했다.

「상아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필시 옥으로 만든 술잔을 사용하게 되고, 옥으로 만든 술잔을 사용했으니 먼 지방의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거마와 궁실의 호화스러운 사치는 장차 이것으로 시작되어 나라가 무법천지로 변하게 되어, 이는 결코 막을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이윽고 주왕이 음탕하고 무도하게 되자 기자가 간했으나 주왕은 결코 듣지 않았다. 그런 기자를 보고 어떤 사람이 나라를 떠나라고 충고했다. 기자가 대답했다.

「신하된 자가 그 군주를 위해 간언을 하다가 군주가 듣지 않는다고 그 곁을 떠나버리면 이것은 군주의 악행을 부추기게 되고 군중심리에 영합하는 행위입니다. 저는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는 기자는 머리를 풀어헤쳐 산발하고 미친 사람처럼 가장한 후에 남의 노예가 되었다. 은나라를 멸한 주무왕이 감옥에 갇힌 그를 석방하자 은거하여 거문고를 타며 자기의 슬픔을 달랬다. 그래서 그때 그가 부른 노래는 <기자조(箕子操)>라는 곡명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왕자 비간(比干)6) 역시 주왕의 집안사람이다. 주왕에게 간언한 기자가 주왕이 듣지 않자 남의 노예가 되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군주가 죄를 짓고 있는데 죽을 각오로 간하지 않는다면 장차 백성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런데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주왕에게 달려가 간언을 했다. 주왕이 대노하며 말했다.

「내가 듣기에 성인의 심장에는 7개의 구멍이 있다고 했는데 사실인지 내가 봐야 겠다.」

주왕이 비간을 죽여 그의 심장을 꺼내어 살폈다.

미자가 말했다.

「부자는 골육의 정으로, 군주와 신하는 의로써 맺어져 있다. 때문에 부친이 잘못을 범하면 그 아들이 계속해서 간해야 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마땅히 그 뒤를 따르면서 곡을 하면 되지만, 남의 신하된 자가 여러 번 권해도 그 군주가 듣지 않게 되면 의를 쫓아 그 곁을 떠나면 될 뿐이다.」

그리고는 태사(太師)와 소사(少師)가 권한 바대로 나라를 떠났다.

주무왕이 주왕을 정벌하여 은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기자 미자는 은나라 왕실의 제기들을 가지고 군문으로 나아가 웃통을 벗고 양손을 뒤로 묶게 한 후에 사람을 시켜 왼쪽에는 양을 끌게 하고 오른쪽에는 모(茅)7)를 들게 하고는 무릎으로 기어 앞으로 나아가 무왕에게 고했다. 그러자 무왕이 미자를 용서하고 예전의 작위를 돌려주었다.

무왕이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 녹보(祿父)를 은의 고지에 봉하여 은나라 선조들의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고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으로 하여금 보좌하도록 했다.

무왕이 은나라를 멸한 후에 기자를 방문하여 물었다. 무왕이 말했다.

「아! 하늘은 묵묵히 하계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서로 화합하여 살도록 했음에도 나는 하늘의 상도(常道)를 실현시키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기자가 대답했다.

「옛날 곤(鯤)8)이 홍수(鴻水)9)의 물길을 막아 하늘의 도인 오행(五行)의 법도를 어지럽혀 진노한 상제가 하늘의 대법인 홍범구조(鴻範九條)가 훼손되었습니다. 이로써 상제는 곤을 죽이고 우(禹)가 그 사업을 이어 받아 상도를 다시 일으켰습니다. 이에 상제가 홍범구조를 우에게 내리니 상도가 비로소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아홉 가지 항목은 첫째가 오행(五行)이고, 둘째가 오사(五事)이며, 셋째가 팔정(八政), 넷째가 오기(五紀), 다섯째는 황극(皇極), 여섯째는 삼덕(三德), 일곱째는 계의(稽疑), 여덟째는 서징(庶徵), 아홉째는 오복(五福)을 누리고 육극(六極)을 피하는 일니다.

오행(五行)은 첫째가 수(水), 둘째가 화(火), 셋째가 목(木), 넷째가 금(金), 다섯째가 토(土)입니다. 물의 성질은 만물을 기름지게 하면서 아래로 흐르고, 불은 사물을 달구어 기운이 위로 향하고 나무는 구부러지기도 하고 곧기도 하며, 쇠는 녹여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 수 있고, 흙은 농사를 짓는데 씨앗을 뿌려 수확을 거둘 수 있도록 합니다. 따라서 물은 아래로 흘러 기름지게 함으로써 생산되는 것은 짜고, 불은 기운이 위로 솟아 생기는 것은 쓰고, 나무는 구부러지기도 하고 곧기도 해서 생기는 것은 시고, 쇠는 원하는 모양대로 변해 생기는 것은 맵고, 흙은 씨를 뿌려 수확한 것은 답니다.

오사(五事)는 첫째 외모이고, 둘째는 말투고, 셋째는 시력이고, 넷째는 청력이며, 다섯째는 생각입니다. 용모는 공손해야 하고, 말은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보는 것은 명백해야 하며, 듣는 것은 확실해야 하고, 생각은 주도면밀해야 합니다. 몸가짐이 공손하면 백성들이 엄숙해지며, 언어가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따르게 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눈으로 사물을 명백히 식별하게 되면 속임을 당하지 않게 되며, 사람의 이야기를 확실하게 듣는 것을 총기(聰氣)라고 하며 총기로써 계책을 세울 수 있게 되고, 사고가 주도면밀하게 되면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게 됩니다.

팔정(八政)은 첫째가 양식(糧食), 둘째가 재화(財貨), 셋째가 제사(祭祀), 넷째가 영건(營建), 다섯째가 교육(敎育), 여섯째가 형벌(刑罰), 일곱째가 접빈(接賓), 여덟째가 군사(軍事)의 일입니다.

오기(五紀)는 첫째가 연(年), 둘째가 월(月), 셋째가 일(日), 넷째가 성신(星辰), 다섯째가 역법(曆法)입니다.

황극(皇極)10)은 군주가 지극히 높은 원칙을 제정하여 다섯 가지 복(福)11)을 모아서 백성들에게 널리 시행하면 백성들은 거꺼이 천자의 원칙을 따르게 되고, 또한 천자 역시 그 백성들에게 명하여 그 원칙을 지키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사사로이 붕당을 맺지 못하게 만들고, 사악한 붕당을 맺지 못하면 군주가 제정한 최고의 원칙을 준수하게 됩니다. 무릇 백성들이 계획을 세워 성과를 이루어내고 절조를 지키면 천자께서는 마땅히 그들을 깊이 마음속에 새겨 기억하고 계셔야 합니다. 만일 사람들 중 지극히 높은 원칙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일단 죄를 짓지 않는다면 천자께서는 그들을 용납하셔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겸손하고 공경하는 태도로 자기는 미덕을 애호한다고 천자께 말한다면 천자께서는 그에게 봉록을 하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모두 천자께서 정하신 지극히 높은 원칙을 준수하게 됩니다. 홀아비나 과부와 같이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사람들을 모욕하지 말아야 하며 유덕하고 고명한 사람들을 어려워해야 합니다. 천자께서 유능한 사람과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사람을 임용하는데 능하다면 나라는 틀림없이 번영을 이루어 창성하게 됩니다. 무릇 관리로 임용한 자들에게 부(富)와 귀(貴)를 높여주면 스스로 청렴하는 마음을 키우게 됩니다. 천자께서 능히 신하들을 적재적소에 임용하지 않아 국가에 공헌을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바로 큰길에서 죄를 짓게 하고 도망치도록 방조하는 일과 같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천자께서 제정하신 지극히 높은 원칙을 즐겨 따르지 않는 사람을 임용하여 비록 그들에게 작위와 봉록을 내리신다 해도 그들은 결코 나라를 위해 기꺼이 공헌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자께서는 모든 일을 결코 편파적이거나 불공평하게 처리하지 않아야하며 마땅히 선왕께서 정하신 도리를 행해야만 합니다. 아울러 편애하거나 편견을 갖고 대하지 마시고 오로지 선왕의 정도만을 걸으셔야만 합니다. 불편부당(不偏不黨)하시면 왕국의 길은 평탄해지고 평안하게 됩니다. 왕도를 위반하거나 범하지 말아야 성왕의 도가 올바르게 행해지게 됩니다. 천자께서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을 모아야하고 신민된 자들은 천자의 원칙을 지켜야만 합니다. 그와 반대로 천자께서 선포한 지고무상(至高無上)한 원칙은 마땅히 준수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비로소 천자의 가르침은 하늘의 뜻과 부합됩니다. 무릇 신민들은 마땅히 천자가 선포한 원칙을 지고무상한 법칙으로 받들어야 하며, 그 법칙에 순종함으로 해서 천자의 밝고 빛나는 공덕에 더욱 친근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천자는 마땅히 백성들의 부모와 같다고 하며, 천하 백성들의 군주가 된다고 말합니다.

삼덕(三德)은 첫째가 정직(正直), 둘째가 강극(剛克), 셋째가 유극(柔克)입니다.

정직은 옳고 곧은 덕으로 취함이며, 강극은 굳세고 강한 덕으로 취함이며, 유극은 부드러운 덕으로 취하는 행위입니다. 천하를 평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옳고 곧은 덕으로 다스려야 하며, 억센 나머지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강경하고 굳센 태도로 제압해야 하고, 온순하고 잘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마땅히 유화적인 태도로 대하여 합니다. 란신적자(亂臣賊子)와 같은 침잠(沈潛)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필히 강경한 자세를 견지해야 하며 고명한 도덕군자들에 대해서는 유화적인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오로지 군주만이 사람들에게 작위와 봉록을 내릴 수 있고, 오로지 군주만이 사람들에게 형벌을 주재할 수 있으며, 오로지 군주만이 아름다운 음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신하된 자는 결코 사람들에게 작위나 봉록을 내릴 수 없으며, 형별을 주재할 수 없으며, 아름다운 음식을 즐길 수 없습니다. 신하된 자가 만일 능히 사람들에게 작위와 봉록을 내리고 형벌을 주재하며, 아름다운 음식을 즐길 수 있게 된다면 장차 왕실에 화가 닥치게 되고, 나라에는 재앙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이 왕도에 위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고, 결국은 윗사람을 범하고 란을 일으키는 단서가 됩니다.

계의(稽疑)12)는 복서(卜筮) 즉 거북점과 산가지점에 능한 사람을 뽑아 관리로 삼아 점을 쳐서 의심나는 점을 푸는 일입니다. 복서의 징조는 그 첫째가 우(雨) 즉 비가 내리는 상이며, 둘째가 제(濟)로 비가 그쳐 쾌청할 상이며, 셋째가 체(涕)로 비가 그친 후에 구름이 연면(連綿)히 하늘에 떠 있는 상이며, 넷째가 무(霧)로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상이며, 다섯째가 극(克)으로 징조의 모습이 서로 뒤섞여 엇갈리는 상이며, 여섯째가 정(貞)으로 밝고 곧은 상이며, 일곱째가 회(悔)로 모습이 들어나지 않고 숨어있는 상입니다. 모두 일곱 가지 상으로 그 중 복(卜)은 다섯이고 서(筮)는 둘로써 복잡하고 변화가 심한 괘상(卦象)에 대하여 길흉을 규명합니다. 관리로 임용된 복서인 3인이 친 점은 의견이 같은 두 사람의 점괘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왕께서 중대한 일에 부딪쳐 의심이 나면 우선 독자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나서야 경사(卿士)13)와 상의하고, 백성들의 의견을 참작하고 최후로 복서의 징조를 받아들이기로 결단하셔야 합니다. 왕께서 동의하시면 귀복(龜卜)의 괘가 동의하는 바이고, 시초의 괘도 동의하는 바이며, 경사도 동의하는 바이고, 백성들도 동의하는 바이니, 이를 대동(大同)이라 부릅니다. 일단 대동을 이루게 되면 왕 자신은 강건하시게 되고, 자손 역시 번성하게 되며, 그 점괘는 크게 길하고 이롭습니다. 그리고 왕께서 동의하시고, 귀복의 괘가 동의하면, 비록 경사나 백성들이 동의를 하지 않게 되더라도 길합니다. 백성이 동의하고, 귀복의 괘가 동의하고, 시초의 점괘가 동의한다면 왕께서 따르지 않고 관원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길합니다. 왕께서 동의하시고 귀복의 괘가 동의하나, 시초의 점괘가 동의하지 않고 경사와 백성들이 따르지 않게 되면 나라 안의 일은 길하다 할 수 있으나, 나라 밖의 일은 매우 흉합니다. 만일 귀복이나 시초의 점괘가 백성들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않고 지키면 길하나, 움직인다면 필시 흉하고 험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서징(庶征)은 각종 점괘가 뜻하는 징조로, 비가 올 괘거나(雨), 날이 개어 쾌청한 괘이거나(晴,) 따뜻할 괘이거나(暖), 추울 괘이거나(寒), 바람이 불 괘이거나(風), 이 다섯 가지 자연현상은 모두 순서에 따라 발생합니다. 만일 다섯 가지의 자연현상이 모두 구비되면 일정한 법칙이 생겨나고 모든 초목은 무성하게 됩니다. 다섯 가지 중 어느 한 가지 현상이 과다하게 일어나면 흉년이 들고, 또한 지나치게 적게 일어나도 역시 흉년이 듭니다. 좋은 징조에 대해 말한다면, 천자가 겸손하고 공손하면 하늘은 때에 맞춰 비를 내려주고, 천자가 정무를 맑거나 밝게 보면 양광이 충족하게 내려 쬐어 작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게 됩니다. 천자가 영명하면 온난한 기온이 때에 맞춰 도래하게 됩니다. 또한 천자가 심모원려하면 춥고 서늘한 기온이 때에 맞춰 찾아들고, 천자가 사리에 통달하면 바람이 때에 맞춰 불어옵니다.

여러 가지 흉악한 징조에 관해 말씀드린다면, 천자가 거짓되고 망녕되면 비가 쏟아져 홍수를 일으키고, 천자의 행위에 도가 지나쳐 잘못을 저지르면 하늘은 필시 한해를 내리게 됩니다. 천자가 향락을 빠지면 하늘은 고온으로 작물을 말라죽이고, 천자가 포학하고 성질이 조급하면 하늘은 필시 혹한을 내리게 되고, 천자가 혼미하여 사리에 밝지 못하면 폭풍이 몰려옵니다. 천자의 결정에 과실이 있으면, 그 후유증은 1년에 미치고, 천자의 명을 받아 행하는 경사의 집행에 과실이 있으면 그 후유증은 한 달에 미치고, 경사의 명을 받아 행하는 관리의 행위에 과실이 있으면 그 후유증은 그 날 하루에 미칩니다. 연, 월, 일 모두 이상 없이 순조롭게 일이 이루어지니 각종 식물들은 무성하게 자라 풍년을 이루고, 정치는 깨끗하고 밝게 이루어지며, 어진 사람들이 발탁되어 국가는 태평하고 안정됩니다. 이와 반대로 연, 월, 일이 모두 이상이 생기면 각종 작물들은 성장이 불량하게 되고, 정치는 혼란스럽고, 어진 사람들은 모두 억압을 받아 나라에 대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백성들은 뭇 별들과 같아 어떤 별들은 바람을, 어떤 별들은 비를 좋아합니다. 또한 해와 달은 일정한 운행법칙이 있어 겨울과 여름을 만듭니다. 해와 달이 뭇 별들을 만나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게 됩니다.

오복(五福)은 첫째가 수(壽)로 오래 사는 일이고, 둘째가 부(富)이며, 셋째가 강녕(康寧) 즉 평안(平安)이며, 넷째는 호덕(好德)으로 덕을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종명(終命)으로 천수를 다하는 것입니다.

육극(六極)은 첫째가 6세 이전에 죽는 흉(凶), 20세 이전에 죽는 단(短), 30세 이전에 죽는 절(折)이며, 둘째가 병에 걸리는 질(疾)이고, 셋째가 우환(憂患)이며 넷째가 가난한 빈(貧)이며, 다섯째가 신체게 결함이 있거나 흉하게 생긴 악(惡)이며, 여섯째가 몸이 쇠약한 약(弱)입니다.

그래서 무왕은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하고 신하로 여기지 않았다.

그후 기자는 조현을 올리러 주나라로 들어갈 때 은허(殷墟)를 지나가다가 폐허가 된 궁궐터에 자라는 곡식의 이삭을 보고 가슴이 아파 비통한 마음으로 통곡을 하고 싶었으나 차마 행하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 소리 높여 곡을 하게 되면 마치 아녀자의 행위와 같이 느껴진다고 생각했음으로 <맥수(麥穗)>라는 시를 지어 노래했다. 맥수의 노래말은 다음과 같다.

麥秀漸漸兮(맥수점점혜)

보리 이삭은 무럭무럭 자라 그 끝이 뾰죽하고

禾黍油油兮(화서유유혜)

벼와 기장은 싹이 돋아 윤기가 흐르는구나

彼狡童兮(피교동해)

개구쟁이 저 철부지가

不與我好兮(불여아호혜)

나하고 사이좋게 지냈더라면!

교동(狡童)은 주왕을 말한다. 은나라 유민들이 그 시를 듣고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무왕이 죽었으나 그 아들 성왕이 나이가 어려 주공 단(旦)이 섭정에 올라 주나라의 국정을 대리했다. 관숙과 채숙이 주공 단을 의심하여 무경(武庚)과 함께 란을 일으켜 성왕과 주공을 공격했다. 주공이 성왕의 명령을 빌려 무경과 관숙을 주살하고 채숙을 나라 밖으로 추방했다. 그리고 주왕의 서형 미자개를 은나라의 구지에 봉하여 은나라의 선조들의 제사를 계속 받들도록 했다. 미자개는 『미자지명(微子之命)』14)을 지어 널리 알리고 송나라를 건립했다. 원래 인의를 갖춘 어진 사람이라 무경의 뒤를 계승하자 은나라 유민들은 모두 기뻐하며 그를 추대했다.

미자개가 죽자 그의 동생 연(衍)을 군주로 세웠다. 이가 미중(微仲)이다. 미중이 죽고 그의 아들 송공(松公) 계(稽)가 뒤를 잇고, 계가 죽자 그의 아들 정공(丁公) 신(申)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정공이 죽고 아들 민공(湣公) 공(共)이 즉위했다. 민공이 죽자 그의 동생 양공(煬公) 희(熙)가 뒤를 이었다. 양공이 즉위하자 민공의 아들 부사(鮒祀)가 양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오르면서 「이 자리는 마땅히 나의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이가 려공(厲公)이다. 려공이 죽고 그의 아들 리공(釐公) 거(擧)가 뒤를 이었다.

리공 17년 기원전 842년 주려왕이 국인들에 의해 쫓겨나 체(彘)15) 땅으로 달아났다.

리공 28년 기원전 831년 리공이 죽고 그 아들 혜공(惠公) 간(覸)이 뒤를 이었다. 혜공 4년 기원전 827년 공화(共和)가 끝나고 주선왕(周宣王)이 즉위했다. 혜공 30년 기원전 801년 혜공이 죽고 그의 아들 애공(哀公)이 즉위했다. 애공이 그 원년인 기원전 800년에 죽고 아들 대공(戴公)이 뒤를 이어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대공 29년 기원전 771년 주유왕(周幽王)이 견융(犬戎)에게 살해되고 섬진은 이때부터 제후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대공 34년 기원전 766년 대공이 죽고 아들 무공(武公) 사공(司空)이 즉위했다. 무공의 딸이 노혜공(魯惠公)에게 시집을 가서 그의 부인이 되어 노환공(魯桓公)을 낳았다.

무공18년 기원전 748년 무공이 죽고 아들 선공(宣公) 력(力)이 뒤를 이었다.

선공은 여이(與夷)를 태자로 삼았다. 선공 19년 기원전 729년, 선공이 병이 들어 송나라 군주 자리를 그의 동생에게 물려주면서 말했다.

「부친이 돌아가시면 그 아들이 뒤를 잇고, 형이 죽으면 그 동생이 잇게 됨은 천하에 널리 시행되는 도의이다. 그 도리에 따라서 내가 너를 내 후계로 삼는다.」

선공의 동생이 몇 번을 사양하다가 결국은 선공의 뜻을 받들었다. 이윽고 선공이 죽자 그 동생이뒤를 이으니 이가 목공(穆公)이다.

목공이 재위 9년 즉 기원전 720년 병이 위중하게 되자 대사마(大司馬) 공보가(公父嘉)를 불러 말했다.

「선군께서 아들인 태자 여이를 버리고 군위를 나에게 주셨소. 나는 영원토록 가슴에 간직하고 잊지 못하겠소. 내가 죽으면 반드시 여이를 내 후계로 세우시오.」

공보가가 목공에게 말했다.

「대신들은 모두 주군의 아들 태자 풍(馮)을 세우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풍을 세우지 마시오. 나는 절대로 선군의 은혜를 갚지 않으면 안 되겠소!」

선공은 풍을 정나라에 보내 그곳에 살게 했다. 그해 8월 경진(庚辰) 일에 목공이 죽자 그 형의 아들 여이가 즉위했다. 이가 상공(殤公)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군자들은 모두 모두 말했다.

「송선공은 사람됨을 잘 판단하여 그 후임을 잘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자기의 동생에게 군주의 자리를 물려주어 도의를 보전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아들까지도 역시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상공 원년 기원전 719년 위(衛)나라의 공자 주우(州吁)가 자기의 형인 위환공(衛桓公) 완(完)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의 자리를 차지했다. 주우가 제후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사자를 보내 송나라 군주를 설득하게 했다.

「지금 정나라에 망명하고 있는 풍은 송나라의 화근입니다. 송공께서는 우리 위나라와 함께 힘을 합쳐 공동으로 그를 토벌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제안을 허락한 송나라는 위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공격했다. 송위 연합군은 정나라의 동문에 이르렀다가 싸움에 이기지 못하고 바로 회군하고 말았다. 그 다음 해인 기원전 718년 정나라가 송나라의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송나라를 공격했다. 이후로 제후들은 수차에 걸쳐 송나라를 침공했다.

상공 9년 기원전 711년 어느 날, 당시 아름다운 미모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대사마 공보가의 부인이 외출했다가 노상에서 우연히 태재(太宰) 화독(華督)를 만나게 되었다. 그 아름다운 여인이 공보가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화독은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가 눈을 떼지 못했다. 화독이 공보가의 처에 눈독을 들이고 사람을 시켜 시중에 유언을 퍼뜨리게 했다.

「상공이 즉위한 지 10년 동안 큰 전쟁을 10여 차례나 일으켜 백성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 이것은 군사의 일을 관장하고 있는 공보가의 잘못 때문이다. 나는 공보가를 죽여 나라를 안정시켜야 되겠다. 」

이 해에 노나라 공자 휘(翬)가 그의 군주 은공(隱公)을 시해했다.

상공 10년 기원전 710년 화독이 공보가를 살해하고 그의 처를 빼앗았다. 상공이 노하여 화독을 죽이려고 했으나 오히려 화독에게 죽임을 당했다. 화독은 정나라에 망명 중인 목공의 아들 풍(馮)을 모셔와 군주로 세웠다. 이가 장공(莊公)이다.

장공 원년 기원전 710년 화독을 재상으로 삼아 송나라 국정을 맡겼다. 상공 9년 기원전 702년 정나라의 상경 제족(祭足)을 억류하고 송나라에 망명 중인 정나라의 공자 돌(突)를 그 군주로 세우도록 협박했다. 제족이 허락하여 결국은 공자 돌이 정나라의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장공 19년 기원전 692년 장공이 죽고 그 아들 민공(湣公) 첩(捷)이 그 뒤를 이었다.

민공 7년 기원전 685년 제환공(齊桓公)이 제나라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민공 9년 기원전 683년 송나라에 대홍수가 나서 재해를 입었다. 노나라가 장문중(藏文仲)16)을 사자로 보내 송나라를 위문했다. 민공이 장문중을 보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말했다.

「송나라에 대홍수로 일어난 재해는 내가 천지신명들을 잘 받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를 밝게 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장문중이 민공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고 칭송했으나 후에 실제로는 자어(子魚)17)가 가르쳐 준 말임이 밝혀졌다.

민공 10년 기원전 682년 여름, 송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여 승구(乘丘)18)에서 싸웠다. 송나라 장수 남궁만(南宮萬)이 노나라에 의해 포로가 되자 송나라가 석방을 청하여 남궁만은 돌아올 수 있었다.

민공 11년 기원전 681년 가을, 민공과 남궁만이 사냥을 나갔다가 내기놀이를 해서 다투게 되었다. 민공이 노하여 남궁만을 모욕했다.

「처음에는 나는 너를 중하게 여겼으나, 오늘 하는 일을 보니 너는 단지 노나라에 붙잡혔다가 돌아온 포로에 불과한 놈이라!」

원래 무용이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던 남궁만은 민공의 말에 마음속에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남궁만은 몽택(蒙澤)19)에 장기판으로 민공을 내리쳐 살해했다. 대부 구목(仇牧)이 그 사건에 대한 전말을 듣고 무기를 들고 궁문으로 달려갔으나 남궁만의 주먹에 맞아 얼굴이 문짝에 부딪쳐 치아가 모두 부러져 죽었다. 계속해서 태재 화독(華督)마저 죽인 남궁만은 공자 유(游)를 송나라의 새로운 군주로 새웠다. 송나라의 여러 공자들이 달아나 소읍(蕭邑)20)으로 몰려들었으나 공자 어설(御說)만은 박(亳)21)으로 갔다. 남궁만의 동생 남궁우(南宮牛)가 군사를 이끌고 박을 포위했다. 그해 겨울 소읍의 대부와 송나라 도성에서 소읍으로 몸을 피한 공자들이 연합하여 남궁우를 공격하여 죽였다. 그들은 승세를 타고 도성으로 달려가 공자유도 함께 살해하고 민공의 동생 공자어설을 군주로 세웠다. 이가 환공(桓公)이다. 남궁만은 진(陳)나라로 달아났다. 송나라가 진나라에 뇌물을 사자에게 실려 보냈다. 진나라 사람들이 미인계를 이용하여 남궁만을 취하게 만든 후에 가죽끈으로 묶어서 송나라에 송환했다. 송나라 사람들이 남궁만을 죽여 육젓으로 만드는 형벌을 가했다.

환공 2년 기원전 680년 제후둘이 송나라에 쳐들어왔다가 수양성 교외에 이르러 물러갔다.

환공 3년 기원전 679년 제환공이 패자를 칭하기 시작했다.

환공 23년 기원전 659년 위(衛)나라가 제나라에 머물고 있던 공자 훼(毁)를 모셔가 군주로 삼았다. 이가 위문공(衛文公)이다. 위문공의 누이는 송환공의 부인이다. 그 해에 섬진의 목공(穆公)이 즉위했다.

환공 30년 기원전 652년 송환공이 중병에 걸리자 태자 자보(慈甫)가 송나라 군주의 자리를 그의 서형 목이(目夷)에게 양보하려고 했다. 환공은 태자의 뜻이 도의에 맞는 일이라고 동의는 했으나 결국은 허락하지 않았다.

환공 31년 기원전 651년 봄, 환공이 죽고 태자 자보가 송군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송양공(宋襄公)이다. 양공은 자기의 서형 목이를 재상으로 삼았다. 환공의 장례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제환공이 규구(葵丘)에서 회맹을 한다고 제후들을 소집했다. 양공은 장례 중에 회맹에 참석했다.

양공 7년 기원전 644년, 송나라 땅에 별똥별이 마치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별똥별 섞여 비도 같이 내렸다. 여섯 마리의 익조(鷁鳥)가 하늘을 날다가 뒤로 밀려 날게 된 것은 바람의 힘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양공 8년 기원전 643년, 제환공이 죽자 송나라가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주재하려고 했다.

양공 12년 기원전 639년, 봄에 송양공이 녹상(鹿上)22)에서 제후들을 불러 회맹을 주재하기 위해 초나라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 초나라가 허락했다. 공자 목이가 간했다.

「국력이 약한 나라가 회맹의 수장 자리를 다투는 것은 곧 재앙을 불러들이는 행위와 같습니다.」

송양공은 목이의 권고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해 가을에 여러 제후들이 우(盂)23) 땅에 모여 회명을 주재하여 맹주가 되려고 했다. 이를 보고 목이가 말했다.

「이것이 재앙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주군의 욕심이 너무 과하니 어찌 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초나라가 송양공을 포로로 잡은 후 송나라를 공격해 왔다. 그해 겨울 제후들이 박(亳) 땅에서 회맹할 때 초나라가 송양공을 석방했다. 자어(子魚)가 말했다.

「그 재앙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양공 13년 기원전 638년 여름, 송나라가 정나라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자어가 말했다.

「재앙의 끝은 여기에 있도다!」

그해 가을에 초나라가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송나라를 공격했다. 양공이 초나라 군사들과 싸우기 위해 출전하려고 할 때 자어가 말했다.

「하늘이 송나라를 포기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결코 초나라와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그해 겨울 11월, 송양공이 홍수(泓水)에서 초성왕의 초군과 싸웠다. 초군이 홍수를 미처 건너기 전에 목이가 양공에게 말했다.

「적의 군사는 수효가 많고 우리는 적습니다. 그들이 강을 건너는 틈을 기회를 이용하여 공격해야 합니다.」

양공은 목이의 말을 듣지 않고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이윽고 초군이 도하를 끝내고 전열을 정비하여 진용을 갖추기 전에 목이가 다시 건의했다.

「이때가 공격할 기회입니다.」

양공이 듣지 않고 말했다.

「그들이 전열을 갖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시오.」

이윽고 초군의 전열을 갖추고 전투태세에 들어가자 비로소 송나라 군사들이 공격을 개시했다. 숫적으로 불리한 송군은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양공은 허벅지에 큰 부상을 입었다. 송나라 사람들이 모두 양공을 크게 원망했다. 양공이 듣고 자기의 행동에 대해 변명했다.

「남의 어려운 점을 이용하면 이익을 취하면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군대가 전열을 갖추기도 전이라 공격하지 않았다.」 자어가 듣고 말했다.

「전쟁에서 싸워 얻은 승리는 나라의 공업을 쌓는 일과 같은데 그와 같이 허황된 도리를 어디다 쓴단 말인가? 진실로 주군의 말이 맞다면 마땅히 남의 노예나 시비가 되어 받들면 되지 하필이면 전쟁을 하려고 하는가?」

초성왕이 송군을 파하고 정나라를 구하는데 성공하자 정나라는 크게 잔치를 열어 초성왕을 접대했다. 성왕이 정나라를 떠날 때 정나라 군주의 두 딸을 첩으로 취해 데려갔다. 정나라의 상경 숙첨(叔詹)이 말했다.

「초왕이 무례하니 천수를 다해 침상에서 편안히 죽지 못하리라! 예를 행하다가 남녀를 분별하지 못하는 무례를 저질렀으니, 그가 종내에는 패업을 이룰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라!」

그해에 당진의 공자 중이(重耳)가 유랑하다가 송나라를 들렀다. 그때 양공은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으로 병중이었으나 당진의 도움을 얻을려는 생각으로 중이를 후하게 대접하고 병거 20승과 그에 따르는 말 80필을 주었다.

양공 14년 기원전 637년 여름, 송양공이 홍수의 싸움에서 허벅지에 입은 부상이 덧나 죽고 그 아들 왕신(王臣)이 뒤를 이었다. 이고 성공(成公)이다.

성공 원년 기원전 636년, 공자 중이가 환국하여 당진국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이가 진문공(晉文公)이다.

성공 3년 기원전 634년, 송나라가 초나라와의 맹약을 버리고 당진과 수호했다. 이는 송나라가 예전에 진문공이 공자의 신분으로 지나갈 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이었다.

성공 4년 기원전 633년, 초성왕이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에 쳐들어왔다. 송나라가 당진에 구원을 청했다.

성공 5년 기원전 632년 진문공이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하여 성복(城濮)24)에서 크게 싸워 초군을 물리쳤다.

성공 9년 기원전 628년 진문공(晉文公)이 죽었다.

성공 11년 기원전 625년 초나라의 태자 상신(商臣)이 부왕인 성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성공 16년 기원전 620년 섬진의 목공(穆公)이 죽었다.

성공 17년 기원전 619년 성공이 죽었다. 성공의 동생 어(御)가 태자 화(和)와 대사마(大司馬) 공손고(公孫固)를 죽이고 스스로 송군의 자리에 올랐다. 송나라 국인들이 어를 죽이고 성공의 작은 아들 저구(杵臼)를 송공의 자리에 올렸다. 이가 소공(昭公)이다.

소공 4년 기원전 616년 송나라가 장구(長丘)25)에서 장적(長翟)의 연사(緣斯)를 물리쳤다.

소공 7년 기원전 613년 초장왕이 즉위했다.

소공 9년 기원전 611년, 혼용무도(昏庸無道)한 소공을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다. 소공의 동생 공자포(公子鮑)가 어질고 사람들에게 덕을 베풀고, 선비들을 예를 갖추어 공손한 자세로 대했다. 옛날 양공의 부인이 공자포를 연모하여 정을 통하기를 원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재물을 내어 공자포를 도와 국인들에게 덕을 베풀었다. 이에 화원은 공자포를 우사(右師)26)로 천거했다. 소공이 사냥을 나갔을 때 양공의 부인 왕희(王姬)가 위백(衛伯)을 시켜 소공 저구를 시해하도록 시키고 공자 포(鮑)를 송군으로 세웠다. 이가 문공(文公)이다.

문공 원년 기원전 610년, 당진국이 제후들을 규합하여 시군의 죄를 송나라에 묻기 위해 쳐들어왔다가 문공이 이미 송군의 자리에 올랐음을 알고 군사를 물리쳤다.

문공 2년 기원전 609년 소공의 아들 고(靠)가 문공의 동모제 수(須)와, 목공(穆公), 대공(戴公), 장공(莊公), 환공(桓公)의 후손들의 지지를 얻어 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문공이 그들을 주살하고 무공과 목공의 후손들은 나라 밖으로 쫓아냈다.

문공 4년 기원전 607년 봄, 초나라가 정나라를 사주하여 송나라를 치도록 했다. 송나라가 화원(華元)을 장수로 삼아 정나라 군사들을 막도록 했다. 정나라 송나라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화원을 포로로 잡아 감금했다. 처음 화원이 출전할 때 양을 잡아 군사들을 호군했는데 , 그의 마부가 양고기국을 먹지 못하게 되자 크게 원한을 품고 화원이 탄 수레를 몰고 정나라 군중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래서 송군이 싸움에 지고 화원은 정나라의 포로가 되었었다. 송나라는 백량의 전차와 4백필의 아름다운 말을 대속금으로 물고 화원을 찾아오려고 했다. 대속금이 미처 지불되기 전에 화원이 도망쳐 송나라로 돌아왔다.

문공 14년 기원전 597년 초장왕이 정나라를 포위하자 정나라가 견디지 못하고 항복했다. 초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문공 16년 기원전 595년, 옛날 송나라에 원수를 산 일이 있는 초나라의 사자가 송나라 땅에 지나가게 되었다. 송나라가 초나라 사자를 붙잡아 죽였다. 그해 9월 초장왕이 송나라가 초나라 사자를 죽인 죄를 묻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와 송나라 도성 수양성을 포위했다.

문공 17년 기원전 594년, 초나라가 송도(宋都)를 포위한지 5개 월이 되자 성안은 위급한 상태에 놓이고 양식마저 떨어지게 되었다. 화원이 어느 날 깊은 밤에 초나라 진영에 잠입하여 그 장수 자반(子反)에게 성안의 정황을 이야기하고 강화를 제안했다. 자반이 듣고 초장왕에게 고했다. 장왕이 자반에게 물었다.

「송나라 도성 안의 상황은 어떤가?」

자반이 대답했다.

「성안의 사람들은 해골을 패서 장작을 만들어 취사를 하고 있으며, 어린아이들을 바꿔서 잡아 주린 배를 채우고 있습니다.」

장왕이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참혹한 일이오! 실은 우리 군사들 양식도 이틀 치 밖에 없소!」

결국은 초나라는 신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문공 22년 기원전 589년, 문공이 죽고 그의 아들 공공(共公) 하(瑕)가 즉위했다. 송나라는 문공 때부터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기 시작했다. 식자들은 화원이 신하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공공10년 기원전 579년, 화원과 초장 자중(子重)과 친교가 있었고, 또한 당진의 장수 란서(欒書)와도 교분이 있었다. 그래서 화원은 두 사람의 교분을 이용하여 두 나라가 결맹을 맺도록 주선했다.

공공 13년 기원전 576년, 공공이 죽었을 때 우사에는 화원이, 좌사에는 어석(魚石)이 맡고 있었다. 사마 당산(唐山)이 태자 비(肥)를 살해하고 화원마저 죽이려고 했다. 화원이 달아나 당진국으로 들어가려고 황하 강안에 당도하자 어석이 따라와 만류했다. 송나라로 뒤돌아온 화원은 당산을 죽이고 공공의 작은 아들 성(成)을 군주로 세웠다. 이가 평공(平公)이다.

평공 3년 기원전 573년 초공왕(楚共王)이 송나라의 팽성(彭城)27)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에 송나라의 좌사 어석을 그 대부로 봉했다.

평공 4년 기원전 572년 제후들이 일어나 팽성을 공격하여 어석을 죽이고 그 성을 송나라에 돌려줬다.

평공 35년 기원전 541년, 초나라의 공자 위(圍)가 조카를 시해하고 스스로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영왕(楚靈王)이다.

평공 44년 기원전 532년, 평공이 죽고 그 아들 원공(元公) 좌(佐)가 뒤를 이었다.

원공 3년 기원전 529년, 초공자 기질(棄疾)이 그 군주를 시해하고 초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초평왕(楚平王)이다.

원공 8년 기원전 524년, 송나라에 큰 불이 났다.

원공 10년 기원전 522년, 원공이 신의를 지키지 않고 사술을 써서 많은 공자들을 죽였다. 이에 대부 화씨(華氏)와 상씨(向氏)가 란을 일으켰다. 초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망명해 온 초나라의 태자 건(建)이 화씨와 상씨들이 란을 일으켜 서로 죽이는 모습을 보고 송나라를 떠나 정나라로 갔다.

원공 15년 기원전 517년 계씨(季氏)들의 횡포를 피해 탈출하여 나라 밖에서 거주하던 노나라의 소공(昭公)을 본국으로 귀국시키기 위해 사방의 제후들에게 호소하러 다니다가 귀국하는 도중 죽었다. 원공의 아들 경공(景公) 두만(頭曼)이 뒤를 이어 즉위했다.

경공 16년 기원전 501년 노나라의 양호(陽虎)28)가 도망쳐 송나라에 들어왔다가 후에 다시 다른 나라로 떠났다.

경공 25년 기원전 492년,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다가 송나라에 들어왔다. 사마 환퇴(桓魋)가 자신의 행위를 비난한 공자를 매우 싫어하여 죽이려고 했다. 공자가 알고 평민 복장으로 변장하여 송나라를 탈출했다.

경공 30년 기원전 487년, 조(曹)나라가 송나라를 배반했다. 송나라를 군사를 발하여 조나라를 토벌했다. 이에 당진국이 조나라에 구원군을 보내지 않자 송나라는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했다.

경공 36년 기원전 481년 제나라의 전상(田常)이 그의 군주 간공(簡公)을 시해했다.

경공 37년 기원전 480년, 초혜왕(楚惠王)이 진(陳)나라를 멸했다. 화성(火星)이 심숙성(心宿星) 자리를 범했다. 심숙(心宿)은 하늘에서 송나라에 별자리에 해당한다. 경공이 그것을 매우 근심했다. 사성(司星)29) 자위(子韋)가 말했다.

「그 재앙을 상국에게 돌리면 주공께서는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없소. 상국은 나의 수족과 같은 사람인데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그렇다면 백성들에게 그 화를 돌릴 수 있습니다.」

「그것 역시 할 수 없소. 백성이 있고서야 나라의 군주가 있는 법이오. 」

「그렇다면 1년 치의 농사에 그 화를 돌릴 수 있습니다.」

「그것 역시 할 수 없소. 일 년의 농사를 망치면 백성들이 곤궁하게 살텐데 어찌 나라의 군주로써 참을 수 있겠소1」

「하늘이 비록 높고 멀리 있다고 하나 눙히 인간 세상의 세세한 부분의 일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주공의 이 세 마디 말은 군주로써 마땅히 지켜야할 본분입니다. 화성은 틀림없이 그 자리를 옮겨갈 것입니다.」

그리고 화성을 제세히 관찰해 본 결과, 과연 심숙의 자리에서 3도를 비켜 이동했다.

경공 64년 기원전 453년 경공이 죽자 공자특(公子特)이 태자를 죽이고 송군의 자리에 올랐다. 이가 소공(昭公)이다. 소공은 원공의 증손자다. 소공의 부친은 공손규(公孫糾)이고 공손규의 부친은 공자 단진(褍秦)이다. 단진은 원공의 작은 아들이다. 경공이 소공의 부친 공손규를 죽였었기 때문에 소공은 원한을 품고 태자를 죽이고 자립한 것이다.

소공이 재위 47년 만인 기원전 404년에 죽고 그 아들 도공(悼公) 구(購)가 송군의 자리에 올랐다.

도공이 재위 8년 만인 기원전 396년에 죽고 그 아들 휴공(休公) 전(田)이 즉위했다.

휴공이 재위 32년 만인 기원전 373년에 죽고 그의 아들 벽공(辟公) 벽병(辟兵) 즉위했다.

벽공이 재위 3년 만인 기원전 370년 죽고 그의 아들 척성(剔成)이 즉위했다.

척성이 재위 41년 기원전 329년에 그의 동생 언(偃)이 척성을 습격했다. 척성이 싸움에서 지고 제나라로 달아나자 언이 스스로 송군의 자리를 차지했다.

송군 언(偃) 11년 기원전 318년, 송군이 왕호를 칭했다. 동쪽으로는 제나라를 공격하여 5개의 성읍을 점령하고 남쪽으로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300리의 땅을 송나라 영토로 했다. 다시 서쪽의 위(魏)나라와 싸워 이김으로써 제와 위 두 나라의 원한을 샀다. 송군 언(偃)이 소가죽 부대에 피를 채워 공중에 메달아 화살을 쏘아 밎추니 피가 쏟아지자 말하기를 ‘하늘을 쏘았다.’고 했다. 또한 그는 술과 여자에게 빠졌다. 그의 포악한 행동에 대해 간하는 대신은 모조리 활로 쏘아 죽였다. 그 결과 제후들이 모두 그를 걸송(桀宋)이라고 부르며 ‘송왕은 그의 선조인 주왕(紂王)의 뒤를 따르고 있으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드디어 제후들이 제나라에 송나라를 토벌하도록 요청했다. 송왕 언 47년 기원전 282년 위(魏)와 초(楚) 두 나라의 지원을 받은 제민왕(齊湣王)이 송왕 언을 죽이고 송나라를 멸했다. 제위초(齊魏楚) 세 나라가 송나라의 땅을 삼분해서 그 영토로 삼았다.

태사공이 말한다.

「공자가 『미자(微子)는 은나라 주왕(紂王)의 곁에서 달아났고, 기자(箕子)는 노예가 되었으며, 비간(比干)은 간하다가 살해되었으니 이 세 사람은 은나라의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춘추(春秋)>에 송나라에 란이 일어난 원인은 선공(宣公)이 태자를 폐하고 자기의 동생에게 그 군주의 자리를 물려줌으로 해서 10대에 걸쳐 나라가 안정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양공(襄公)의 대에 이르러 인의(仁義)를 행하여 맹주가 되려고 했다. 그때 대부 정고보(正考父)30)가 상나라의 시조 설(薛)과 탕(湯)임금과 중흥조 고종(高宗)과 함께 송양공을 높여 상송(商頌)을 지어 칭송했다. 양공이 홍수(泓水)의 싸움에서 패했으나 어떤 식자는 그를 찬양했다. 그는 당시 중원의 여러 나라들에는 예의가 없었음을 한탄하면서 그를 높인 것은 송양공이 예의와 겸양의 정신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송미자세가 끝-

1)개(開)/ <상서(尙書) 미자지명(微子之命)>에는 계(啓)다. 한경제(漢景帝) 유계(劉啓)의 이름을 피휘(避諱)했다.

2)서형(庶兄)/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미자의 모가 미자를 낳았을 때는 후궁의 신분이었으나 주왕(紂王)을 낳았을 때는 정비였기 때문에 주왕이 적자의 신분으로 제위를 승계했다고 했다고 했다. 즉 미자개는 주왕의 동모형이다.

3)구(<阝+九>國)/ 지금의 산서성 장치시(長治市) 서남에 있었던 고대의 제후국으로 은나라의 방백국이었다. 은본기에는 기(饑), 주본기에는 기(耆)로 또 일설에는 여(黎)라고도 한다. 춘추 때 지금의 산서성 여성시(黎城市)로 나라를 옮겼다.

4)조이(祖伊)/ 은나라 말 현신(賢臣)으로 주왕이 음색에 빠져 폭정을 행할 때 주나라의 서백(西伯)이 덕을 쌓고 은나라의 속국인 구국 즉 여(黎)나라를 정벌하여 멸하자 은나라에 그 위험이 닥칠 것을 예상하고 주왕에게 경계하도록 간했으나 주왕이 듣지 않았다. (상서(尙書) 서백감려(西伯戡黎) 편에 상세한 기사가 있다.)

5)기자(箕子)/ 기자는 주왕의 숙부다. 태사(太師)의 직에 임명되어 기(箕)에 봉해졌다. 기(箕)는 지금의 산동성 태곡(台谷) 동북이다. 높은 정치적 재능과 문화적 지식을 갖춘 인물이다. 주왕이 충간하던 비간을 살해하자 화를 피해 미치광이를 가장하여 남의 노예가 되었으나 주왕이 알고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은나라를 멸한 주무왕에 의해 석방되어 주나라 국정의 자문에 응했다. 그의 말은 상서(尙書) 홍범(洪範) 편에 전해진다.

6)비간(比干)/ 상나라 왕 태정(太丁)의 아들이며 주왕(紂王)의 숙부이다. 주왕이 음락을 밝히고 정치를 포학하게 하여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죽음을 무릅쓰고 선행을 행하고 덕을 닦으라고 3일 밤낮을 간하며 물러나지 않았다. 주왕이 고민하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결국은 분노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말했다. 「 비간은 스스로를 성인이라고 하니, 내가 듣기에 성인의 심장에는 7개의 구멍이 나 있다고 들었다. 내가 직접 그것을 확인해 봐야겠다.」주왕이 비간을 죽여 그 배를 갈라 비간의 심장을 살폈다.

7)모(茅)/ 사당(祠堂)이나 산소(山所)에서 조상(祖上)에게 제사(祭祀) 지낼 때에 사용하는 그릇을 모사(茅沙)라고 하는데 그 모사에 모래를 담고 그 모래에 묶음으로 꽂는 풀이 모(茅)다. 강신(降神) 의식을 행할 때에 띠묶음 위에 술을 따른다.

8)곤(鯤)/ 원래 황하는 산맥에 가로막혀 평야지역으로 흐르지 않았다고 했다. 요 임금이 먼저 곤(鯤)이라는 사람을 시켜 황하의 치수 사업을 맡아보도록 했는데 그는 거북과 매의 도움으로 강 주위에 제방을 쌓았다. 그러나 황하의 물이 계속 불어나자 그는 상제(上帝)로부터 저절로 자라나는 식양(息壤)이라는 흙을 훔쳐서 제방을 다시 쌓았다. 이를 알게 된 상제는 곤을 죽이고 그 시체를 우산(羽山)에 방기하여 삼 년간을 썪지 않게 하였다. 칼로 곤의 배를 가르니 그 안에서 우(禹)가 나오더니 곤의 시체는 황룡으로 변하여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아버지의 치수사업을 물려받은 우는 용문산(龍門山)을 뚫어 물길을 트는데 성공하였고 천하의 백성들은 마침내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9)홍수(鴻水)/ 홍(鴻)은 홍(洪)이다. 홍수(洪水)는 대수(大水)로 황하(黃河)를 말한다.

10)황극(皇極)/ 황(皇)은 군주이고 극(極)은 최고의 준칙(準則)으로 덕행(德行)을 의미한다.

11)오복(五福)/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의 다섯 가지 복

12)계의(稽疑)/ 점치는 방법으로 의심나는 점을 푼다는 뜻이다.

13)경사(卿士)/ 서주시대 때 왕족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상대적으로 관료들의 수장이었던 무사(巫史)의 위치가 격하되었다. 당시 무사는 군사, 행정, 사법, 외교 등의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왕족들의 견제를 받고 그 권력이 분산되었다. 이에 태사(太史) 요(寥)가 경사(卿士)가 되어 무사와 함께 같은 반열에 서게 되고 이로써 서주 시 관직에 중요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후에 다시 무사가 갖고 있던 직무를 모두 장악하게 된 경사는 서주 말기 관직의 최고 수장이 되어 군사, 행정, 사법, 외교 등의 모든 직무를 관장했다.

14)미자지명(微子之命)/ 미자(微子)가 태사(太師) 기자(箕子)와 소사(少師) 비간(比干)에게 자신의 거취에 대하여 상의한 내용을 후세의 사관이 기록하여 서경(書經) 상서(商書)의 한편으로 편집한 글이다.

15)체(彘)/ 현 산서성(山西省) 북쪽의 곽현(霍縣) 부근. 분수(汾水) 강안(江岸)의 고을이다.

16)장문중(藏="臧文仲)/" 노나라의 대부로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다음 구절이 나온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장문중은 큰 거북을 감추고, 기둥머리의 모진 곳에다 산의 형상을 조각하고, 대들보 위의 짧은 기둥에는 마름을 그려서 길흉화복을 빌고자 하니 어찌 그를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리요!(子曰 臧文仲 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17)자어(子魚)/ 춘추 때 위나라의 사관으로 이름은 사추(史鰌), 혹은 사어(史魚)다. 곧은 성격으로 이름이 높았다. 공자가어(孔子家語)란 책에 시간(屍諫)이란 고사가 전해진다. 사어가 병이 깊어 죽게 되었다. 그는 일찍이 위영공에게 거백옥의 현명함을 알고 자주 천거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고 오히려 불초한 미자하(彌子瑕)를 중용했다. 이에 자어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예를 이룰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죽거든 시신을 창문 밑에 놓아두라고 유언했다. 영공이 조문을 와서 보고 괴이하게 여겼다. 그 자식으로부터 전말을 알게 된 영공은 마침내 미자하를 추방하고 거백옥을 등용했다. 즉 사어는 죽어서도 자신의 시신으로 임금의 잘못을 간했다고 하는 말이 시간(屍諫)이다. 논어 위영공편에 공자가 칭송한 말이 있다. 子曰 直哉 史魚. 邦有道 如矢. 邦無道 如矢. (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 곧은 사람이여, 사어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도 화살과 같이 곧았고, 도가 없을 때도 화살같이 곧았도다!’).

18)승구(乘丘)/ 지금의 산동성 거야현(巨野縣) 서남으로 춘추 때 노나라 성읍이다.

19)몽택(蒙澤)/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시 동북에 있던 연못 이름으로 춘추 때 송나라 령이었다. 사기지명고에 따르면 맹제택이 이곳일 것이라고 했다.

20) 소(蕭)/ 지금의 안휘성 소현(蕭縣) 서북에 있는 춘추 때 소숙대심(蕭叔大心)이 봉해진 송나라와 동성의 자성 부용국이었다.

21)박(亳)/ 현 산동성 조현(曹縣) 남쪽 20KM 지점. 옛날 하왕조의 도읍지였다.

22)녹상(鹿上)/ 춘추 때 송나라 땅으로 그 위치는 첫째는 지금의 안휘성 부양시(阜陽市) 남의 여음(汝陰) 원록(原鹿)이라는 설과 제음(濟陰) 승지현(乘氏縣) 녹성향(鹿城鄕)으로 승지(乘氏)는 산동성 거야(鉅野) 서남이라는 설이 있으나 지금은 부양시 설이 유력하다. 제환공이 죽자 송양공이 제효공(齊孝公)과 초성왕(楚成王)을 불러 회합을 하고 회맹을 열었다. 녹상의 회맹의 결과 다음 해에 송나라 영내의 우(盂) 땅에서 회맹을 주재하였으나 송양공은 초나라의 포로가 되었다가 방면되고 그 결과 홍수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초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된 회맹이 벌어진 곳이다.

23)우(盂)/ 춘추 때 송나라 영지로써 지금의 하남성 수현(睢縣) 서 50키로. 이곳에서 송양공이 무장 병력 없이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주재했으나 초성왕과 그 장수인 성득신이 변장시켜 데리고 온 초나라 군사들에게 습격 당해 포로가 되었다.

24) 성복대전(城濮大戰)을 말한다. 기원전 632년에 진문공(晉文公)이 거느리는 당진(唐晉)의 전차 700승 과 제(齊)와 섬진(陝秦) 등의 보군 37,000명에 달하는 3국 연합군이 초나라 영윤 성득신(成得臣)이 지휘하는 초나라 군사를 위주로 결성된 진(陳), 채(蔡), 정(鄭), 허(許) 등의 11만 명의 보군으로 결성된 5국 연합군을 성복(城濮)에서 대파하여 초나라의 중원 진출을 저지시킨 싸움을 말한다. 이 싸음으로 패권국의 자리에 오른 당진(唐晉)은 기원전 597년 필(邲)에서 초장왕(楚莊王)과의 싸움에서 패할 때까지 중원을 호령했다.

25) 위치 미상(未詳)

26)우사(右師)/ 춘추 때 송나라의 집정관의 직명. 좌사(左師)와 함께 국정 전체를 담당하고 6경의 수장에 해당했다. 송나라의 법에 의하면 전국을 4향(鄕)으로 나누고 좌우의 각 사(師)가 2향 씩을 맡았다. 송나라의 지방 조직은 오가(五家)을 비(比), 오비(五比)를 려(閭), 오려(五閭)를 당(黨), 오당(五黨)을 주(州), 오주(五州)를 향(鄕)이라 했다.

27)팽성(彭城)/ 지금의 강소성 서주시(徐州市)다. 초한 쟁패시 항우가 도읍으로 삼았다.

28)양호(陽虎)/ 춘추 때 노나라 사람으로 양화(陽貨)라고도 한다. 계손씨(季孫氏)의 가신으로 계평자(季平子) 즉 계손의여(季孫意如)를 받들었다. 평자(平子)가 죽자 그를 대신하여 노나라의 국정을 전단했다. 노정공(魯定公) 5년 기원전 505년 계손씨들의 적자인 계환자(季桓子) 사(斯)를 붙잡아 감금하고 자기에게 복종을 강요했다. 노정공 8년 기원전 502년 삼환씨(三桓氏)들의 적자들을 모두 살해하고 그와 사이가 좋은 그들의 서자들을 대신 세우려고 란을 일으켰으나 삼환씨들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지고 공실의 보물들과 대궁을 가지고 지금의 산동성 태안시(泰安市) 동남쪽에 있던 양관(陽關)으로 도주했다. 노정공 9년 기원전 501년 다시 삼환씨들의 공격을 받아 제나라로 도망갔다가 제나라에 의해 체포되어 노나라로 호송되던 도중에 탈출하여 당진으로 도망가 조앙(趙鞅)의 가신이 되었다.

29)사성(司星)/ 춘추 때 송나라가 설치한 관직명으로 천문과 기상의 변화를 관찰했던 부서의 장이다.

30) 정고보(正考父)/ 공자의 7대조로 정고보(正考甫)라고도 한다. 공보가의 부친이며 송나라의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 삼세 70년을 거쳐 보좌했다. 참고로 대공의 재위연도는 기원전 799년- 766년, 무공 765년-748년, 선공 747-729년이다. 사기 공자세가에 다음의 기사가 있다. 「정고보(正考父)는 대공(戴公), 무공(武公), 선공(宣公)으로부터 세 번 명을 받았는데 받을 때마다 더욱 공손했으며 그래서 정(鼎)에 세겨 넣기를 ‘ 첫 번째 명에 몸을 숙이고, 두 번째 명에 허리를 굽혀 절하고, 세 번째 명에는 큰절을 한 뒤에 받았다. 길을 걸을 때는 가운데를 걷지 않고 담장 곁에 붙어 다녔으나 아무도 감히 나를 경멸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솥에 ’풀과 죽을 쑤어 먹고살아 청렴하게 살았다’라고 기록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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