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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2:02:557602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5-2. 손빈(孫臏)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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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손빈(孫臏)

열전5-2.

1. 陷入刖刑(함입월형)

- 함정에 떨어져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다. -

손무(孫武)가 죽고 백여 년 후에 제나라의 아읍(阿邑)1)과 견읍(甄邑)2) 사이의 땅에서 손빈(孫臏)이라는 사람이 태어났다.3) 손빈은 손무의 후손이다. 그는 일찍이 방연(龐涓)과 함께 한 스승 밑에서 병법을 공부했다. 방연이 먼저 위(魏)나라에 들어가 혜왕(惠王) 밑에서 장군을 지내게 되었으나, 스스로 자기의 능력이 손빈에 미치지 못함을 생각하고 아무도 몰래 그를 위나라로 불렀다. 손빈이 당도하자 방연은 손빈의 재주가 자기보다 훌륭하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시기하였다. 방연은 손빈을 법에 저촉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의 양다리를 자르고 얼굴에 글씨를 새기는 묵형을 가한 다음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두었다.

손빈은 형을 받은 죄인의 신분으로 위나라의 대량성(大梁城)에 들린 제나라 사자를 몰래 찾아가 만나 자기의 처지를 호소했다. 제나라 사자는 손빈이 기인(奇人)이라고 생각하고 비밀리에 자기의 수레에 태워 제나라로 데려갔다.

2. 전기새마(田忌賽馬)

- 경마에서 이기는 법 -

제나라 장군 전기(田忌)4)는 손빈의 재주를 인정하여 빈객으로 대했다.

전기가 여러 공자들과 함께 많은 재물을 걸고 말달리기 시합을 즐겨했다. 손빈이 보니 전기의 말들이 달리는 속도는 비슷하여 크게 차이는 나지 않으나 그래도 상, 중, 하로 나눌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전기에게 말했다.

「장군은 오로지 많은 돈을 거시기만 하십시오. 제가 능히 장군으로 하여금 내기에서 이기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전기가 손빈의 말을 믿고 왕과 여러 공자들과 시합을 열어 천금의 돈을 걸었다. 이윽고 시합할 날이 되자, 손빈이 전기에게 말했다.

「 장군의 하마(下馬)를 상대방의 상마(上馬)에 대항하도록 하고, 장군의 상마를 상대방의 중마에, 장군의 중마를 상대방의 하마에 대결토록 하십시오.」

세 등급의 말이 출전하여 시합이 끝나자 한 번은 지고, 두 번은 이겨 결국은 제왕의 돈 천금을 따게 되었다. 이 일로 해서 전기는 손빈을 제왕에게 천거했다. 위왕이 손빈에게 병법에 관해 묻고 이어서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3. 위위구조(圍魏救趙)

-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의 한당성에 대한 포위를 풀다. -

그리고 얼마 있다가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는 그 위급함을 제나라에 고하며 구원을 청했다. 제위왕은 손빈을 장수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그는 사양하며 말했다.

「 저는 형벌을 받은 몸이라 장수가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위왕은 전기(田忌)를 대장으로 손빈을 군사로 삼아 휘장을 둘러 친 수레 안에서 앉아 작전을 구상하도록 했다. 전기가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로 달려가 구원하려고 하자 손빈이 말했다.

「 무릇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푼다고 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껏 잡아당기면 안 되는 법이며, 싸우는 사람을 말리기 위해서는 그 사람 사이에 들어가 마구잡이로 주먹으로 때려서는 안됩니다. 적의 강한 곳은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하면 형세가 변하여 자연히 풀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고 있으니, 위나라의 날렵하고 정예스러운 병사들은 필시 나라 밖에서 피로에 지쳐 기진맥진해 있을 것이며, 국내에는 노약자(老弱者)들 만이 남아 있습니다. 장군께서 만약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의 대량성으로 달려가 그 요로를 점령하고 허약한 곳을 공격한다면 조나라를 공격하고 있던 위나라 군사들은 필시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조나라에 대한 포위를 풀고 위나라로 달려올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일거에 조나라에 대한 위나라의 포위망을 풀어주고 위나라를 피폐하게 만드는 작전인 것입니다. 」

전기가 손빈의 계책에 따랐다. 위나라가 과연 한단성(邯鄲城)에 대한 포위망을 풀고 위나라로 달려오다가 계릉(桂陵)5)에서 제군(齊軍)과 조우하여 싸웠다. 전기가 이끌던 제군(齊軍)이 방연(龐涓)의 위군(魏軍)을 대파했다.

4. 감조지계(減竈之計)

- 아궁이 수를 줄여 위나라 군대를 대파하다. -

계릉의 싸움 13년 후 즉 기원전 341년에 위(魏)와 조(趙) 두 나라가 힘을 합하여 한나라를 공격했다. 한나라가 그 위급함을 제나라에 고하고 구원을 청했다. 제나라가 장군 전기(田忌)를 대장으로 삼아 한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이번에도 전기는 한나라로 직접 달려가지 않고 위나라의 도성 대량성(大梁城)으로 진격했다. 위나라 대장 방연(龐涓)이 듣고 한나라에 대한 포위망을 풀고 위나라로 돌아왔다. 그때는 이미 제나라 군사들은 그 국경을 넘어 서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손빈이 전기를 향해 말했다.

「저 삼진(三晋)의 군사들은 평소에 자기들이 스스로 용기가 있다고 자부하며 우리 제나라 군사들을 얕보며 겁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싸움에 능한 사람은 그 주어진 정세를 이용하여 자기 쪽에 유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병법에 따르면 ‘ 승리를 쫓아 백리를 앞서 나간 군대는 그 상장(上將)을 잃고 50리를 앞서 나가는 군대는 그 군사들 중 반 밖에 당도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제군(齊軍)이 위나라 경내에 들어섰을 때 취사용 아궁이를 10만 개를 만들고, 다음 날은 5만 개, 또 그 다음 날은 3만 개를 만들며 후퇴하시기 바랍니다.」

방연이 제군의 뒤를 추격하기를 3일이 되는 날 제군의 숙영지를 살펴보며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 내가 평소에 제나라 군사들은 모두 겁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 위나라 땅에 들어선 이래 3일 동안 도망친 군사들이 절반이 넘는구나!」

방연은 즉시 보군을 버리고 날렵하고 정예한 병사들만을 이끌고 행군 속도를 종전에 비해 2배로 빨리 하여 제군의 뒤를 추격했다. 손빈은 위군의 행군 속도를 짐작하여 그 날 해질 무렵 마릉(馬陵)에 도착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협소한 마릉의 길은 협소하고 양쪽에는 험한 산이 솟아 있어 군사들을 매복시킬 수 있었다. 손빈은 큰 나무의 껍질을 벗긴 후에 그 곳에 ‘ 방연은 이 나무 아래에서 죽을 것이다(龐涓死于此樹之下).’라는 글을 써넣게 하였다. 이어서 그는 제나라 군사들 중 활에 능숙한 만 명의 군사를 뽑아 길 양쪽에 매복시키며 말했다.

「 저녁이 되어 이 곳에서 불빛이 보이거든 일제히 그것을 향해 활을 쏘아라!」

방연이 밤이 되자 과연 나무껍질이 벗겨진 나무 밑에 당도하였다. 나무에 써진 하얀 색의 글을 읽기 위해 불을 밝혀 나무에 써진 글을 비쳐보고 하였다. 방연이 나무에 써진 글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제나라 군사들 만 명이 일제히 불빛을 향해 활을 쏘았다. 위나라 군사들은 혼란에 빠져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방연은 자기의 지혜가 부족하여 어쩔수 없이 싸움에 진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면서 말했다.

「보잘 것 없는 촌놈의 이름을 이루게 만들어 주었구나!」

제군(齊軍)은 마릉(馬陵)의 싸움에서 이긴 기세를 몰아 위나라의 본군을 전멸시키고 위나라 태자 신(申)을 사로잡아 개선하였다. 손빈은 이 싸움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고 그의 병법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주석

1)아읍(阿邑)/ 지금의 산동성 양곡현(陽谷縣) 아성진(阿城鎭)을 말한다.

2)견읍(甄邑)/ 지금의 산동성 견성현(鄄城縣) 서북

3)손무(孫武)가 활약했던 시기는 오왕 합려(閤閭) 때이다. 오왕 합려는 기원전 513년에 즉위하여 496년에 죽은 사람이고 손빈이 활약했던 시기는 전국 때의 제위왕(齊威王) 때다. 제위왕은 기원전 356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319년에 죽었다.

4)전기(田忌)/ 전국(戰國) 시대 때 제나라 장수. 사서(史書)에는 전기(田期) 혹은 전기사(田期思)라고도 했으며 서주(徐州 : 지금의 산동성 등주시(滕州市) 남)에 봉해져 서주기자(徐州期子)라고 불리웠다. 제위왕(齊威王)26년 (기원전 353년) 손빈(孫臏)과 함께 위(魏)나라의 공격으로부터 조(趙)나라를 구원하고 계릉(桂陵: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 서북) 에서 위나라 군사들을 크게 무찔렀다. 제선왕(齊宣王) 2년 (기원전 341년) 전영(田嬰), 전반(田盼), 손빈(孫臏)과 함께 마릉(馬陵: 지금의 하남성 범현(范縣) 서남)에서 위나라 군사를 다시 대파하고 위나라의 태자 신(申)과 장수 방연(龐涓)을 포로로 하였다. 후에 제나라의 상국(相國) 추기(騶忌)의 참소로 초나라로 도망쳤다. 초나라는 전기를 강남(江南)에 봉했다.

5)계릉(桂陵)/ 일명 계양(桂陽)이라고도 하며 그 위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①죽서기년 : 양혜왕(梁惠王) 17년(기원전 354년) 조의 ‘齊田期伐我東鄙, 戰于桂陽, 我師敗蒲, 亦曰桂陵. 濮渠又東逕蒲城’ 포성(蒲城)은 지금의 하남성 장원현(長垣縣)을 말한다. ②사기정의 : 산동성 하택현(荷澤縣) 동북. 지금은 죽서기년의 설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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