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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안열전(管晏列傳)2-1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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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관중(管仲)

열전2-1

관중(管仲) 이오(夷吾)는 영상(潁上)①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관중과 같이 다녔던 포숙아(鮑叔牙)는 그가 슬기로운 사람이란 사실을 알았다. 관중의 집은 가난해서 항상 포숙을 속였으나 포숙은 끝까지 그를 좋게 대해주고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포숙은 공자 소백(小白)을 섬기고 관중은 공자 규(糾)를 섬기게 되었다. 이어서 소백이 제나라의 군주 자리에 올라 제환공(齊桓公)이 되니 공자규는 죽고 관중은 죄수가 되었다. 포숙이 관중을 천거하자 제환공이 관중을 재상으로 삼아 제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제환공이 패자가 되어 아홉 번에 걸쳐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주재하고 천자를 한 번 추대할 수 있었던 일은 모두 관중의 지모 때문이었다. 관중이 말했다.

「내가 처음에 가난 했을 때, 일찍이 포숙과 같이 장사를 했는데 내가 항상 그 이익금으로 재물을 더 많이 가져갔으나 포숙은 결코 나를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았다. 포숙아는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옛날 포숙아를 위해 사업을 도모했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곤궁한 처지에 빠졌으나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장사를 하다보면 이익이 날 때도 있고 손해가 날 때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또한 여러 번 관리가 되었으나 그때마다 군주에게 쫓겨났으나 포숙은 나를 불초한 자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찍이 여러 번 전장에 나가 그때 마다 달아났으나 포숙은 내가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집에 봉양해야 할 늙으신 어머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공자 규(糾)가 군위 다툼에서 패하고 죽었을 때, 소홀(召忽)은 공자 규를 위해 같이 죽었으나, 나는 죽지 못하고 옥에 갇히어 욕된 몸이 되었는데도 포숙아는 나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일은 작은 절의(節義)가 아니라 공명(功名)을 천하에 드러내지 못하게 되는 경우라는 사실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②

관중을 제환공에게 천거한 포숙은 그 몸을 관중 아래에 두었다. 대대로 제나라의 녹봉과 봉읍(封邑)을 받은 포숙의 자손은 십여 대가 넘도록 항상 이름이 높은 대부 집안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보다는 포숙의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를 더 칭찬하였다.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나라의 정치를 맡게 된 관중은 바닷가의 변변치 못한 제나라에 재화을 유통시키고 재물을 쌓아 부국강병(富國彊兵)을 이루고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과 슬픔을 같이 했다. 그래서 말하기를 백성들이란 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찾게 되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예로움과 욕됨을 알게 된다고 했다. 군주가 솔선하여 법도를 잘 지켜야 육친(六親)③이 비로소 굳게 단결하게 되나, 사유(四維) 즉 예의염치(禮義廉恥)가 널리 행해지지 않는다면 나라는 이내 망하게 된다. 령을 내리는 모습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아서, 백성들의 마음에 순응하게 되고 그 정서에 부합되어 추진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 용이하게 행해지게 되었다. 백성들이 바라는 바는 베풀어 주고, 백성들이 반대하는 일은 제거해 주었다.

그가 정사를 돌보는 방법은 화(禍)가 되는 일도 복(福)으로 만드는 일에 능했으며, 실패할 일도 잘 처리하여 성공으로 이끌고 일의 경중과 완급을 잘 분별하고 이해득실을 잘 헤아려 신중하게 처신했다. 제환공이 행한 채나라에 대해 남정(南征)을 행한 이유는 사실은 소희(少姬)의 개가(改嫁)에 노했기 때문이었으나④, 관중은 초나라를 공격하는 구실로 삼아, 초나라가 주왕실에 청모(菁茅)⑤를 공물로 바치지 않은 행위에 대한 죄를 묻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또 실제로는 환공이 산융⑥을 정벌하기 위해 북정(北征)을 행하면서, 그 기회를 이용하여 연(燕)나라로 하여금 소공(召公)⑦의 선정(善政)을 행하도록 이끌었다. 또 가(柯)에서 모인 회맹⑧에서 환공은 노나라의 장수 조말(曹沫)에게 한 약속을 어기려고 했으나, 관중이 나서서 신의를 지키도록 함으로 해서 제후들이 모두 제나라를 따르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한다.

「주는 것이 취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금과옥조다.」

관중의 누린 부(富)는 공실의 것과 비슷하여 삼귀(三歸)⑨ 반점(反坫)⑩이 다 갖춰있었으나 제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사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관중이 죽은 후에도 제나라는 관중의 정책을 준수하여 항상 다른 제후국들보다 강한 국력을 갖출 수 있었다. 관중이 죽고 100여 년 후에 안자(晏子)가 태어났다.

- 끝 -

주석

1)영상(潁上) : 영수(潁水)의 강변이라는 뜻이다. 영수는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에서 발원하여 하남성을 동남으로 흐른 뒤 안휘성 수현(壽縣)의 정양관(正陽關)에서 회수(淮水)와 합류한다.

2) 生我者父母(생아자부모), 知我者鮑子也(지아자포자야) :

3) 육친(六親) :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왕필(王弼)의 부(父), 모(母). 형(兄), 제(弟). 처(妻), 자(子) 설을 따른다.

4) 소희(少姬)의 개가(改嫁) : 제환공의 후부인 소희는 채나라의 군주의 여동생으로 환공과 물놀이를 나갔다가 장난으로 배를 흔들자 제환공이 제지했으나 듣지 않고 계속했다. 제환공이 노하여 소희를 채나라에 돌려보내자 채후(蔡侯)도 역시 노하여 소희를 초나라로 개가시켰다. 이에 제환공이 채후에게 앙심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채나라를 정벌하자 채후가 다시 초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이에 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한 초군과 제환공이 이끌던 중원의 제후연합군과 소릉에서 대치하다가 평화협졍을 맺은 사건을 말한다.

5)포모(包茅) : 띠풀의 일종으로 청모(菁茅) 혹은 삼척모(三脊茅)라고도 한다. 고대에서 청모초(菁茅草)를 볏단으로 만들어 그 위에 부어 거른 술로 제사를 지냈다. 청모는 초나라의 특산물로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가 서자 주왕은 주왕실의 제사를 받들 때 사용하는 술을 거르기 위해 사용하기 위해 매년 마다 청모초를 공물로 바치게 했다. 후에 주왕실의 힘이 쇠약해지자 초나라는 청모를 바치지 않고 있었다.

6) 산융(山戎) : 고대 중국의 북방에 거주했던 이민족 이름으로 제환공이 정벌했던 산융은 지금의 하북성 창려시(昌黎市) 일대이다.

7) 소공(召公) : 연나라의 시조인 소공 석(奭)을 말한다. 주나라의 창업공신으로 주공(周公) 단(旦), 태공(太公) 여상(呂尙) 과 함께 삼공(三公)으로 불린다.

8) 가(柯)에서의 회맹(會盟) : 제환공 5년, 기원전 681년에 환공이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가 조말(曹沫)을 장수로 세웠으나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패했다. 노장공이 노나라의 성읍을 바치며 강화를 청하자 환공이 허락하여 가(柯) 땅에서 회맹을 행했다. 가(柯)는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東阿縣) 서남이다. 이윽고 회맹의 날이 되자 비수를 가슴에 품은 조말이 단상에 올라 제환공을 위협하여 제나라가 탈취해 간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조말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약속한 제환공은 약속을 파기하고 조말을 살해하려고 했다. 그때 관중이 나서서 약속을 파기하고 조말을 죽이는 일은 일시적으로 통쾌한 일이지만 제후들로부터 신의를 잃어 천하를 잃는 큰일이라고 설득해서 조말에게 한 약속을 모두 지키도록 했다. 제후들이 듣고 제나라를 믿고 따랐다. (제태공세가와 자객열전)

9) 삼귀(三歸) : 화려하게 장식한 건축물 대(臺), 세 명의 정실부인, 세 개의 가정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0)반점(反坫) : 제후들이 회맹(會盟)할 때 헌수(獻酬)의 예를 행하고 나서 빈 잔을 엎어두는 받침대. 당시 봉건사회에서는 제후 이외의 일반인들은 가질 수 없는 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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