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사기
본기(本紀)
서(書)
연표(年表)
세가(世家)
열전(列傳)
평설(評說)
원전(原典)
· 오늘 :  146 
· 어제 :  131 
· 최대 :  2,389 
· 전체 :  1,670,421 
 
  2009-02-22 09:31:107104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36. 장창 등
운영자
 크기변환_서한 초기의 재상 초상화.jpg  (491.3K)   download : 80
일반

열전36 丞相張蒼外(승상장창외)


승상 장창(張蒼)은 양무(陽武)1) 출신으로 평소에 독서를 좋아하고 음률과 역법에 능했다. 진나라 때 그는 이미 어사(御史)가 되어 항상 궁전의 기둥 밑에서 사방의 지방정부에서 올라온 각종 문서들을 관리했다.2) 그러다가 죄를 짓게 되자 도망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윽고 패공이 양무를 공략하고 지나갈 때 창은 객의 신분으로 종군하여 남양(南陽)을 공격했다. 이때 창은 법에 연좌되어 참수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형을 집행하기 위해 옷을 벗긴 후 참수대에 엎드리게 했는데 장대한 신체에 피부가 마치 박속 같이 희었다. 왕릉(王陵)3)이 보고 참으로 아름다운 피부를 갖고 있는 선비라고 감탄하고 패공(沛公)에게 말하여 참수형을 면하게 했다. 곧이어 패공이 진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서진할 때 종군하여 무관(武關)을 통하여 함양에 입성했다. 패공은 한왕으로 책봉된 후 한중(漢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와 삼진(三秦)4)을 평정했다. 그때 진여(陳餘)가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를 공격하자 장이는 패주하여 한나라에 귀의했다.5) 한나라는 장창을 상산의 태수로 임명하고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을 따라가 조나라를 치도록 했다. 장창은 진여의 목을 얻고 조나라를 평정했다. 한왕은 장창을 대(代)의 재상으로 임명하여 변방의 외적들의 침략에 대비하게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조나라 재상으로 옮겼다가 조왕으로 다시 책봉된 장이의 재상이 되었다. 한왕 5년 기원전 200년, 장이가 죽고 조왕의 자리를 그의 아들 장오(張敖)가 물려받자 장창은 다시 오(敖)의 재상이 되었다. 다시 얼마 후에 장창은 대왕(代王)6)의 재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왕 장도(臧荼)가 반하자 고조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진압할 때 장창은 대나라 재상의 신분으로 종군하여 장도를 치는데 공을 세웠다. 장창은 그 공으로 한고조 6년에 북평후(北平侯)에 봉해지고 식읍 1천 2백호를 받았다.


계상(計上)7)으로 자리를 옮긴지 한 달 후에 장창은 다시 열후(列侯)의 신분으로 명칭만 주계(主計)로 바뀐 자리에서 4년을 보냈다. 이윽고 상국의 자리에 소하가 앉게 되었다. 장창은 진나라 때 주하어사(柱下御史)8)의 직에 있으면서 천하의 도서와 군국의 재정 및 민적에 대해 통달했고 또한 산학(算學)과 율력(律曆)에 능통했음으로 그로 하여금 열후의 신분으로 상부(相府)에 근무하면서 군국의 재정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들을 관장하도록 했다. 경포(黥布)가 모반하여 죽자 한나라 조정은 황제의 아들 유장(劉長)을 회남왕(淮南王)10)으로 봉하고 장창을 그의 상국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4년 후에 직을 옮겨 어사대부가 되었다.


주창(周昌)은 고조와 같은 패현(沛縣) 출신이다. 그의 종형(從兄)은 주가(周苛)다. 두 사람은 모두 진나라 때 사수군(泗水郡)의 사졸이 되었다. 이윽고 고조가 패현에서 기의하여 사수군의 태수와 군감(軍監)을 공격하여 물리칠 때 주창과 주가는 사졸의 신분으로 패공을 따랐다. 패공(沛公)은 주창을 직지(職志)11)로, 주가를 객으로 삼았다. 두 사촌형제는 패공의 뒤를 따라 관중(關中)으로 들어가 진나라를 멸했다. 패공이 한왕으로 책봉되자 주가는 어사대부(御史大夫), 주창은 중위(中尉)가 되었다.


한왕 4년 기원전 203년 초패왕이 한왕을 형양(滎陽)에서 포위하여 사세가 위급하게 되었다. 한왕은 아무도 몰래 탈출하면서 주가에게 형양성을 맡겨 수비하도록 했다. 초패왕이 형양성을 함락시키고 주가를 부하 장수로 삼기 위해 회유하자 주가는 오히려 한왕에게 항복하라고 초왕을 꾸짖었다. 주가는 초왕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한왕의 포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항우가 대노하여 주가를 가마솥에 삶아 죽였다. 한왕은 죽은 주가 대신 주창을 어사대부로 삼았다. 주창은 언제나 고조의 뒤를 따라다니며 항우와의 싸움에 참전하여 결국 항우를 무찌를 수 있었다. 한왕 6년 기원전 201년 주창은 소하(蕭何), 조참(曹參) 등이 책봉될 때 분음후(汾陰侯)에 봉해졌고 주가(周苛)의 아들 주성(周成)은 주가의 공으로 고경후(高景侯)가 되었다.


주창이라는 위인은 힘이 세고 직언을 서슴치 않아 소하와 조참 같은 사람은 그를 두려워하여 멀리했다. 한 번은 주창이 고조가 연회를 열었을 때 일을 상주하려고 연회석상에 들어갔다. 그때 고조는 곁에 척희(戚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주창이 보고 돌아서서 도망쳐 나오려고 했다. 고조가 뒤따라가 주창의 목덜미를 타고 올라가 물었다.

“ 나는 누구와 같은 임금이냐?”

주창이 고조를 우러러보며 말했다.

“ 폐하께서는 걸주(桀紂)와 같은 폭군이십니다. ”

고조가 웃으며 지나갔지만 그 후로는 고조는 주창을 매우 두려워했다. 얼마 후에 고조가 태자를 폐하고 척희의 소생 여의(如意)를 세우려고 하자 대신들이 완강히 반대했으나 고조의 뜻을 결코 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고조는 유후의 계책으로 태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잠시 접었지만 주창이 조정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고조가 불러서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했다. 그러나 주창은 원래 화가 나면 말을 더듬는 병이 있는데다 주상의 명을 받자 더욱 화가 나서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 소신은 원래 말 주변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폐하께서는 그와 같은 일은 기...기...기필코 행하시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폐하께서 비록 태자를 폐하신다고 해도 소신은 기...기...기필코 폐하의 령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고조가 주창의 하는 말을 듣고 매우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 고조와의 접견이 끝나자 동쪽 쪽방에서 대화를 엿들은 여태후(呂太后)가 달려나와 주창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감사의 말을 했다.

“ 만일 장군이 있는 힘을 다하여 간하지 않았다면 하마터면 태자가 폐출될 뻔 했습니다. ”


그 후에 척희의 아들 여의는 조왕(趙王)으로 봉해졌는데 그 때의 그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고조는 자기가 죽은 후에 조왕이 여태후에게 살해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당시 조요(趙堯)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가 매우 어린 그는 부절(符節)과 옥새(玉璽)를 관장하는 어사의 직에 있었다. 조나라 사람 방여공(方與公)이라는 사람이 주창을 찾아와 말했다.

“ 대감의 어사대에서 어사로 있는 조요라는 위인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세상에 보기 드문 기재입니다. 필히 주의해서 상대하십시오. 그는 장차 대감의 직을 대신할 것입니다.”

주창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 그는 나이가 어리고 일개 도필리에 불과한 애숭이인데 어떻게 나의 직을 대신한단 말이오?”

그리고 얼마 후에 조요는 고조 곁에서 시립하여 모시게 되었다. 어느 날, 고조가 홀로 앉아있으면서 마음속으로 번민을 하다가 슬픈 노래를 불렀으나 여러 신하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 조요가 나아가 물었다.

“ 폐하께서 번민하고 계시는 이유는 조왕이 나이가 어리고 척부인과 여후께서는 서로 사이가 벌어져 만세 후에 혹시나 조왕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까 걱정하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

고조가 그렇다고 하면서 말했다.

“ 내가 혼자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그 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이다. ”

조요가 대답했다.

“ 조왕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강직한 사람을 조나라의 상국(相國)으로 두십시오. 그 사람은 또한 여후와 태자나 군신들이 평소에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분이어야 합니다.”

" 그대 말이 옳도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나 조당의 군신 중에 누가 그와 같은 중차대한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 어사대부 주창은 성격이 강직하고 더욱이 여후와 태자 뿐만 아니라 조당의 군신들 모두가 경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가 아니면 아무도 그와 같은 중대한 일을 감당해 낼 수 없습니다.”

“ 네 말이 맞도다! ”

그래서 고조는 주창을 불러 말했다.

“ 내가 공에게 수고를 끼칠 일이 하나 있소. 공은 따지지 말고 나를 위해 조왕의 상국이 되어 주어야 되겠소,”

주창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신은 옛날 몸을 일으켜 폐하를 따랐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중도에서 유독 소신만을 버려 제후왕에게 보내려고 하십니까?

“ 제후왕에게 공을 보내는 처사는 좌천에 해당하는 일임을 짐은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조왕에 대한 나의 말 못할 걱정은 공이 아니면 아무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요. 공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내 말을 따라주기 바라오.”

그래서 어사대부 주창은 조나라 상국이 되어 부임하기 위해 임지로 떠났다.


주창이 조나라로 떠난 한 참 후에 고조는 어사대부의 관인을 손에 들고 만지며 말했다.

“ 누구를 어사대부로 삼아야 할까? ”

그러다가 곁에서 시봉하고 있던 조요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 조요보다 나은 사람이 없구나!”

고조는 즉시 조요를 어사대부에 임명했다. 옛날에 이미 군공을 세워 식읍을 갖고 있었던 조요는 어사대부가 된 후에 고조를 따라 종군하여 진희를 토벌할 때 공을 세워 강읍후(江邑侯)에 봉해져 열후의 대열에 섰다.


이윽고 고조가 붕어하자 실권을 쥔 여후가 조왕을 소환했다. 그러나 조나라의 상국 주창은 조왕이 병이 들어 아프다고 하면서 그 명을 받들지 않았다. 여후의 사자가 3번이나 왕복했지만 주창은 결코 조왕을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근심한 여태후가 조왕 대신 주창을 장안으로 소환했다. 이윽고 장안에 당도한 주창이 여태후를 알현했다. 여태후가 주창을 보고 화를 내며 말했다.

“ 그대는 척비에 대해 맺힌 나의 원한을 잘 알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조왕을 올려 보내지 않았소?”

주창을 경성으로 불러 머물게 한 고후가 사자를 조나라에 보내 조왕을 소환했다. 조왕이 마침내 장안에 당도하자 한 달이 조금 지나서 독약을 먹여 죽였다. 주창은 이 일로 인해 병을 칭하고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3년 후에 죽었다.

그리고 5년 후에 여태후는 고조가 생존시 조왕의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계책을 꾸민 장본인은 어사대부 강읍후 조요라는 사실을 알고 그 즉시 조요의 죄를 물어 어사대부의 직에서 면직시키고 후국을 폐했다. 어사대부의 직에는 광아후(廣阿侯) 임오(任敖)를 대신시켰다.


임오는 옛날 패현의 옥리였다. 고조가 평민의 신분이었을 때 죄를 짓고 도망치자 패현의 관리가 여후를 연좌시켜 함부로 대했었다. 고조와 사이가 좋았던 임오는 노하여 그 관리를 두들겨 패서 상처를 입혔다. 고조가 기의하자 임오는 객의 신분으로 종군하여 어사가 되어 풍(豊)12)을 2년 동안 지켰다. 고조가 한왕(漢王)이 되어 항우를 공격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할 때 임오는 상당(上黨)의 태수로 옮겼다. 후에 고조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임오가 상당을 굳게 지켰음으로써 그 공으로 식읍 1천 8백호의 광아후(廣阿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여태후에 의해 어사대부가 되었다.


임오는 3년 후에 어사대부의 직에서 해임되고 후임에 평양후(平陽侯) 조줄(曹窋)이 임명되었다. 조줄은 상국 조참(朝參)의 아들이다. 고후가 죽자 조줄은 대신들과 공모하여 여록(呂祿)13) 등의 제려(諸呂)를 주멸했다. 조줄이 면직되고 당시 회남왕의 상국으로 있는 장창을 그 후임에 임명되었다. 장창과 강후 등은 대왕(代王) 유항(劉恒)을 추대했다. 이가 한문제(漢文帝)다. 한문제 4년 기원전 176년 승상 관영(灌嬰)이 죽자 장창이 뒤를 이이 승상이 되었다. 한나라 일어나서 효문제의 등극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동안 천하는 이윽고 안정되기 시작했는데 이 때의 장상(將相)과 공경(公卿)은 모두 군문 출신이었다. 오로지 장창만이 계상(計相)의 자리에 있으면서 음율과 역법을 정리하고 바로잡았다. 고조가 입관(入關)하여 패상(霸上)14)에 당도한 때가 10월이었고 또한 진나라가 일 년의 처음을 10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율력은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오행설에 따르면 한나라는 수덕(水德)에 해당한다고 했고 색깔은 옛날처럼 흑색을 숭상하기로 했다. 12율의 관을 불어서 음률을 조정하고 이것을 각각의 오음(五音)15)에 배당했다. 또한 크고 작은 것에 비례해서 율령을 제정했으며 각종 기물의 도량형(度量衡)의 표준을 마련하여 천하의 모든 공인들의 규범이 되게 했다. 그가 승상의 직에 오르자 결국은 그런 일련의 조치들을 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나라의 음률과 역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모두 장창으로부터 계승한 것이다. 장창은 독서를 좋아해서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알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며 특히 음률과 역법에 정통했다. 장창이 과거 은혜를 입은 왕릉(王陵)은 안국후(安國侯)다. 장창의 직급이 높아졌으나 장창은 항상 왕릉을 아버지 모시듯 했다. 왕릉이 죽은 후에 승상이 된 장창은 세목(洗沐)16) 때만 되면 왕릉의 부인을 찾아가 문안인사와 함께 음식을 올린 후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장창이 승상이 되고 10여 년 후에 노인(魯人) 공손신(公孫臣)이 서장을 올려 ‘한나라는 오행 중 토덕에 해당함으로 그 징조로써 황룡이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장창에게 명을 내려 조당에서 의논케 했다. 장창은 허황된 이야기라고 여겨 파기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황룡이 성기(成紀)17)에 나타나자 황제는 공손신을 불러 박사에 임명하여 토덕에 근거한 율력을 마련하도록 하고 개원하고 후원년으로 했다. 이 일로 해서 장창은 스스로 물러나 집에 있으면서 나이가 들어 병이 났다고 하면서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장창이 천거한 인사 중에 중후관(中侯官)18)이 된 자가 있었는데 너무나 심하게 사리를 탐했음으로 황제가 장창을 책망했다. 장창은 이를 근심하여 병을 얻어 면직되었다. 장창은 15년 동안 승상의 자리에 있었다. 장창은 효경제 5년인 기원전 152년에 죽었다. 시호는 문후(文侯)다. 아들 강후(康侯)가 장창의 작위를 이었다가 8년 후에 죽었고 그의 아들 장류(張類)가 이었다가 다시 8년 되는 해에 제후의 상례에 참석했다가 불경죄를 얻어 작위와 봉읍을 몰수당했다.


이전에 장창의 부친은 체구가 5척에 불과한 단신으로 장창을 낳아 길렀는데 후에 장창은 신장이 8척이 넘는 거인으로 자라 제후에 봉해지고 또 승상의 자리까지 올랐다. 장창의 아들들도 역시 체구가 컸는데 손자 장류는 다시 6척이 조금 넘는 단신으로 법을 범하여 후의 작위를 잃었다. 승상의 자리에서 물러난 장창은 그 때 나이가 매우 많아 입에 치아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젖을 먹어야만 했기 때문에 여자를 유모로 두었다. 백 수십 명의 처첩으로 유모로 삼았는데 한 번 임신한 여자는 다시는 보지 않았다. 장창은 백세가 넘게 살고 죽었다.


신도가(慎屠嘉)는 양(梁)나라 사람이다. 재관궐장(材官蹶張)19)의 신분으로 고조를 따라 항우를 공격하는데 참가했다가 한 떼의 소부대를 인솔하는 지휘자가 되었다. 경포를 토벌하는 작전에 참가하여 도위(都尉)로 승급되었다. 혜제 때 회양의 태수가 되었다가 효문제 원년 원래 2천 석의 관리로써 고조를 따라 종군했던 공신들을 모두 관내후(關內侯)20)로 봉하고 식읍을 내린 사람들은 모두 24명이었는데 신도가는 5백 호의 식읍을 받았다. 장창이 어사대부에서 승상으로 오르자 신도가가 어사대부가 되었다. 이어서 장창이 승상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효문제는 황후의 동생 두광국(竇廣國)을 승상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생각을 바꿔 말했다.

“ 세상 사람들이 내가 사사로운 감정으로 두광국을 승상으로 삼는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두광국은 어진 성품에 품행이 방정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를 승상으로 삼고 싶어 했으나 세상 사람들의 오해가 두려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고제 때의 공신들은 무도 죽어 승상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어사대부의 직에 있었던 신도가를 승상으로 삼게 되었다. 신도가는 옛날의 봉읍을 그대로 둔 채 봉호만을 안후(安侯)로 했다. 신도가는 위인이 청렴하고 강직했다. 그는 사사로이 자기 집에서 다른 사람의 방문을 받지 않았다. 당시 태중대부(太中大夫)21)는 등통(鄧通)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등통은 하사 받은 재산이 거만금에 달했다. 문제가 연회를 등통의 집에서 열 정도로 그 총애가 극진했다. 어느 날 승상이 입조했는데 황제의 곁에서 시립하고 있던 등통이 승상에게 예를 행하지 않았다. 승상이 정사에 대한 상주를 끝내고 등통의 결례에 대해 황제에게 말했다.

“ 폐하께서 총신(寵臣)을 사랑하여 부귀하게 만드는 일이야 있을 수 있다고 하나 조정의 예절은 엄숙하게 행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황제가 등통을 변호하며 말했다.

“ 승상께서는 왈가왈부 하지 마시오. 나는 그저 개인적으로 그를 좋아할 뿐이오.”

조례를 파하고 승상부에 돌아온 신도가는 소환에 응하지 않을 경우 참수형에 처하겠다는 격문을 보내 등통을 승상부로 소환했다. 두려운 생각이 든 등통이 황제에게 고했다. 문제가 말했다.

“ 너는 일단 승상부에 출두하라! 그러면 내가 사람을 보내 너를 불러들이겠다.”

상부에 당도한 등통은 관을 벗고 맨발로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신도가가 답례도 하지 않고 앉은 자세로 그를 책했다.

“ 조정은 황공하옵게도 고황제의 조정이다. 소신인 주제에 등통은 신성한 전상을 희롱했으니 크나큰 불경죄 범하여 마땅히 참수형에 해당한다. 형리는 당장 저 자를 끌어내어 참수형에 처하라!”

등통이 머리를 땅바닥에 연신 박으며 용서를 빌자 그의 머리는 흘린 피로 낭자하게 되었으나 신도가는 그를 석방하지 않았다. 승상이 충분히 등통을 혼냈을 것으로 짐작한 문제는 사자에게 부절을 지참시켜 부르면서 승상에게 사죄의 말을 전하게 했다.

“ 이것은 내가 신하와 농을 한 부덕에서 기인한 일이니 승상께서는 이만 그를 석방해주시 바라오.”

승상부에서 간신히 풀려나온 등통은 문제 앞에서 눈물을 훌리며 하소연했다.

“ 승상이 저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

신도가가 승상이 된지 5년 후에 문제가 붕어하고 경제(景帝)가 섰다.

경제 2년 조조(晁錯)가 내사(內史)22)가 되어 경제(景帝)의 총애를 받아 정치를 전단하며 많은 법령 만들어 개변하기를 청하고 다시 조정에 공론을 일으켜 제후들의 권력을 침삭(侵削)했다. 그래서 승상 신도가는 자기의 말이 쓰이지 않아 스스로 몸을 굽혀 자세를 낮추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조조를 원망했다. 내사의 신분인 조조가 동문을 통해 출입했으나 불편하다고 해서 궁궐의 담을 허물고 다시 남쪽으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다. 신도가 듣고 조조는 종묘의 담장을 허물어 문을 만들어 법을 위반했음으로 그를 죄를 주어 주어 주살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조조의 문객이 듣고 그에게 전하자 조조는 매우 두려워하여 밤중에 몰래 궁궐로 들어와 황제에게 고하며 경제가 자기의 죄를 직접 다스려 주기를 청했다. 아침에 조회시간이 되자 승상이 앞으로 나와 내사 조조를 주멸하겠다고 청했다. 경제가 대답했다.

“ 조조가 허문 담은 사실은 종묘의 진짜 담이 아니고 종묘와 담장 사이의 빈터를 잇는 낮은 담장이다. 그래서 다른 관리들도 그곳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고 또한 내가 그리하라고 명을 내렸음으로 조조에게는 아무 죄가 없다. ”

조회가 끝나자 신도가는 장사(長史)를 불러 말했다.

“ 내가 조조를 먼저 참하지 않고 주상에게 청해 결국 내가 조조에게 지게 되었다!”

집에 돌아온 신도가는 피를 토하고 죽었다. 시호는 절후(節侯)다. 그의 아들 공후(共侯) 신도멸(愼屠蔑)이 뒤를 이어 후가 되었으나 3년 만에 죽었다. 다시 신멸의 아들 신도거병(愼屠去病)이 물려받고 31년 만에 죽었다. 다시 신도거병의 아들 신도유(愼屠臾)가 뒤를 이었다가 6년 만에 구강태수(九江太守)가 되었으나 전임 태수로부터 뇌물을 받은 죄에 연좌되어 작위와 식읍이 몰수되었다.


신도가 사후 경제(景帝) 때는 이르러 개봉후(開封侯) 도청(陶靑)과 도후(桃侯) 유사(劉舍)가 승상이 되었고 금상폐하가 즉위하신 이래 지금까지는 백지후(柏至侯) 허창(許昌), 평극후(平棘侯) 설택(薛澤), 무강후(武疆侯) 장청책(莊靑翟), 고릉후(高陵侯) 조주(趙周) 등이 차례로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작위를 세습하여 열후에 오른 사람들인데 평범하여 이렇다 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단지 근신하고 청렴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모두 승상의 자리를 채운 남우충수(濫竽充數)에 불과하여 당대에 빛나는 공명을 떨치거나 커다란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태사공이 말한다.

장창은 문학과 율력에 능통해서 한나라의 이름 높은 승상이 되었다. 그러나 가생(賈生)23)과 공손신(公孫臣) 등이 상신한 정삭(正朔)24)과 복식(服飾)의 색깔들을 채용하지 않고 진나라가 사용해 왔던 전욱력(顓頊曆)25)을 답습했는데 그것은 어째서인가?

주창은 목석처럼 강직한 사람이었고 임오는 과거에 여후에게 베푼 은혜로 인해 등용된 인물이었다. 또한 신도가는 강직하고 의연한 절조를 지킨 인물이었으나 권술에 통하지 못했으며 학문이 부족하여 소하(蕭何), 조참(曹參), 진평(陳平) 등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상은 사마천의 저술이고 이하는 저소손(褚少孫)26)이 후에 가필한 것이다.)


효무황제 때 승상을 지낸 사람은 너무 많아 모두 기록할 수 없다. 그들의 품행, 출신지, 거처, 행장에 대한 개략적인 기록도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정화(征和)27) 이후의 승상들에게 대해서 기록한다.


우선 차승상(車丞相)이라고 있었다. 장릉(長陵)출신이다. 그가 죽자 위승상(韋丞相)이 뒤를 이었다. 위승상은 이름이 현(賢)으로 노(魯) 출신이다. 백가의 술을 독서로 배워 관리가 되어 대홍려(大鴻臚)에 이르렀다. 관상가가 보는 사람이 위현(韋賢)의 상을 보았는데 장차 승상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네 아들도 관상을 보게 했는데 차남의 이름은 현성(玄成)이었다. 관상가가 말했다.

“ 이 아들은 매우 귀하게 되어 후의 작위를 잇게 될 것입니다.”

위승상이 말했다.

“ 내가 승상이 되어 후에 봉해진다면 그 직위와 작위는 마땅히 장자가 잇게 될 텐데 어찌 둘째 아들이 잇게 된단 말인가?”

그리고 얼마 후에 위현은 승상에 임명되었으나 재임 중 병을 얻어 죽게 되었으나 마침 장자가 죄를 얻게 되어 대신들이 의논하여 차남 현성에게 그 작위를 잇게 하려고 했다. 현성이 어쩔 수 없이 위현의 작위를 잇게 되자 현성이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작위를 잇지 않으려고 했으나 결국 그 뒤를 잇게 되고 현성은 그 일로 봉국을 사양했다는 어진 이름을 얻게 되었다. 후에 말을 타고 태묘에 들어가 불경죄로 연좌되어 한 급의 작위가 깎이어 관내후(關內侯)로 강급되었다. 현성은 이로써 열후의 작위를 잃게 되었으나 옛날의 봉국은 식읍으로 갖게 되는 것은 허락되었다.

위승상이 죽고 위승상(魏丞相)이 그 뒤를 이었다. 위승상은 제음(濟陰) 사람이다. 지방의 문관으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승상까지 올랐다. 위인이 무예를 좋아했기 때문에 휘하의 관리들이 일을 상주할 때는 검을 차도록 했다. 만일 검을 차지 않고 일을 상주하는 관리가 있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서라도 검을 빌려서라도 차게 한 후에 상주하도록 했다. 그때 경조윤(京兆尹)은 조광한(趙廣漢)이었는데 조군(趙君)이라고 불렀다. 위승상이 조군이 죄를 지었음으로 그를 파면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이에 조군이 사람을 시켜 위승상을 붙잡아 놓고 죄를 면하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위승상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조군이 다시 사람을 시켜 위승상을 협박하여 그 부인이 그 시비를 살해했다는 죄명으로 비밀리에 조사하여 황제에게 그 일을 상주하려고 했다. 조군은 관리를 승상의 관저로 보내 노비들을 체포하여 태형을 치며 심문했다. 그러나 실은 위승상의 부인이 시비를 칼로 찔러 죽인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시비가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한 것이었다. 그래서 승상부의 사직(司直)32)인 번군(繁君)33)이 황제에게 상주했다.

“ 조군이 승상을 협박하여 승상의 부인이 죄 없는 시비(侍婢)를 칼로 찔러 죽였다고 무고(誣告)하고는 휘하의 관리와 포졸들을 풀어 승상의 관저를 포위하고 그 가인들을 체포하여 고문했으니 참으로 무도하다 하겠습니다.”

또한 조군은 자기 멋대로 기사(騎士)를 파면한 일이 알려져 그는 결국 요참형에 처해졌다.

또한 승상부의 연(掾)34) 진평(陳平)35) 등이 중상서(中尙書)36)를 탄핵했으나 오히려 자기 멋대로 당사자를 협박하고 위협을 가했다는 의심을 받아 장사 이하 여러 명의 관원을 연좌시켜 처형시키고 몇 사람은 잠실(蠶室)37)에서 궁형에 처했다. 그러나 위승상은 연좌되지 않고 승상의 직을 유지한 체 노년으로 병이 들어 죽었다. 위승의 작위는 그의 아들이 이었으나 후에 역시 말을 타고 태묘를 지나갔다가 불경죄에 저촉되어 한 급의 작위가 깎여 관내후로 강등되어 열후의 작위를 잃었다. 그러나 봉국은 계속 식읍으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


위승상이 죽고 어사대부 병길(邴吉)이 승상의 자리를 이었다. 병길은 노(魯)나라 사람이다. 법령을 독서로 즐겨 읽어 어사대부의 자리까지 올랐다. 효선제(孝宣帝)38)가 강보에 싸여 있을 때 구고(舊故)39)가 있음으로 그 공으로 열후에 봉해졌고 이어서 승상이 되었다. 사리에 밝고 지혜가 있어 후세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승상의 신분으로 병이 들어 죽자 그의 작위는 아들 현(顯)이 이었다. 병현은 후에 말을 타고 태묘를 지나갔다가 불경죄에 저촉되어 1급의 작위가 깎여 열후에서 내려와 관내후가 되었으나 봉국은 식읍으로 갖는 것을 허락받았다. 병현은 하급의 아전에서 출발하여 태복(太僕)의 관직까지 올랐으나 관리로써 자세를 올바르게 처신하지 못하고 사리에 밝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아들이 수뢰죄에 연좌되어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병길이 죽자 황승상(黃丞相)이 뒤를 이었다. 장안성 중에 관상을 잘 보는 전문(田文)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위승상(韋丞相), 위승상(魏丞相), 병승상(邴丞相) 세 사람이 모두 빈천한 신분일 때 그들은 객주에서 모두 한 자리에 모여 만난 적이 있었다. 세 사람을 향해 전문이 말했다.

“ 여기 계시는 세 분은 모두 승상의 되실 운입니다. ”

그 후에 과연 세 사람은 차례로 승상의 자리에 올랐으니 전문의 관상을 보는 능력은 훌륭하다고 하겠다.

황승상은 이름이 패(覇)로 회양(淮陽)출신이다. 책을 읽어 아전이 되어 영천(潁川)의 태수까지 올랐다. 영천을 다스릴 때 예의에 근거하여 조례(條例)와 교령(敎令)을 만들어 를 만들어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범법자가 있으면 스스로 깨달아 고치도록 했다. 황패의 교화가 크게 행해짐으로 그의 이름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한선제가 듣고 조서를 내렸다.

“ 영천태수 황패는 짐의 조령(詔令)을 선포하여 백성을 다스림으로써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고, 남녀가 유별하여 서로 다른 길로 다니며, 옥중에는 중죄인이 없으니 그에게 관내후의 작위를 내리며 황금 백근을 상으로 하사하노라!”

후에 조정의 부름을 받아 경조윤이 되었다가 병길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황패는 예와 의를 치민의 기본으로 삼았다. 황승상이 병으로 죽자 그의 아들이 관내후의 작위를 이었으나 후에 열후에 봉해졌다.


황승상이 죽자 그 뒤를 어사대부 우정국(于定國)이 이었다. 우승상의 일은 정위전(廷尉傳)에 기재되어 있고 다시 장정위(張廷尉)의 말 중에 언급되어 있다.


우승상이 죽자 어사대부 위현성(韋玄成)이 뒤를 이었다. 위현성이라는 위인은 앞서 위승상의 아들이다. 그 부친의 작위를 이었으나 후에 열후의 작위를 잃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시경(詩經)과 논어에 통했다. 관리가 되어 위위(衛尉)의 자리까지 올랐으며 후에 태자태부로 자리를 옮겼다. 설군(薛君)이 어사대부의 자리에서 면직되자 위현성이 옮겼다. 그때 우승상이 황제에게 나이가 들었음을 이유로 은퇴를 요청하자 위현성이 승상이 되어 옛날 부친의 봉국에 다시 봉해지고 부양후(扶陽侯)가 되었다. 몇 년 후에 병으로 죽자 원제가 친히 문상을 행하고 하사하는 재물이 매우 많았다. 아들이 그의 작위를 이었으나 후에 그의 정치는 지나치게 관대하여 세속의 시류에 편승하여 부침이 심해 아첨하고 간교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옛날 관상가가 그를 보고 그의 부친을 뒤를 이어 승상의 자리에 오르고 후에 그 직을 잃었다가 다시 남의 봉국에서 아전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해서 결국은 승상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예언했다. 부자가 모두 승상의 자리에 올라 세상에서 그것을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송하니 어찌 운명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관상가는 그것을 미리 알았던 것이다.


위승상이 죽자 어사대부 광형(匡衡)이 뒤를 이엇다. 승상 광형이라는 위인은 동해인(東海人)이다. 독서를 좋아하고 박사를 따라다니며 시경을 수학했다. 집안이 가난했던 광형은 남의 집 일을 해주며 먹고 살았다. 재주가 없어 여러 번 사책(射策)42)에 나갔으나 떨어지기를 9번이나 한 끝에 간신히 병과에 합격했다. 경서에 밝지 못해 여러 번 시험에 붙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 광형은 경서에 능통하게 될 때까지 열심히 숙독했다. 광형은 평원군의 문학졸사(文學卒史)에 보직되었으나 몇 년이 지나도 존경을 받지 못했다. 후에 어사(御史)의 부름을 받아 백 석의 녹봉을 받는 낭관(郎官)에 천거되었다. 박사(博士)에 임명된 광형은 태자소부(太子少傅)되어 원제(元帝)를 모시게 되었다. 시경을 좋아한 원제는 광형을 광록훈(光祿勛)43)으로 승진시켜 궁중에 머물게 하고 좌우의 측근들의 스승이 되어 경서를 가르치게 했다. 광형이 경서를 가르칠 때 황제도 곁에 앉아서 경청하면서 매우 기뻐했음으로 그의 신분은 날이 갈수록 존귀해졌다. 어사대부 정홍(鄭弘)이 죄에 연루되어 면직되자 광형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어사대부가 되었다. 십여 동안 한 번도 장안성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던 광형이 승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음은 실로 시운을 타고 태어났다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겠다!.  


태사공44)이 말한다.

깊이 생각해 보면 선비된 자가 남의 봉국에서 벼슬을 시작해서 후에 봉해진 사람은 매우 적다. 그러나 어사대부의 자리에서 관직을 떠난 자도 매우 많다고 할 수 있다. 어사대부라는 자리는 승상의 다음 자리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어사대부들은 승상에 유고가 있기를 바란다. 심지어는 몰래 음모를 꾸며 승상을 해치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어사대부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승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사대부가 된지 며칠 만에 승상의 자리에 올라 후에 봉해진 사람도 있으니 그것은 실로 하늘의 뜻이라 하겠다. 정홍은 몇 년 동안이나 어사대부의 자리에 있었으나 결국 승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으나 광형은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위승상의 죽음으로 인해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어찌 그것이 지혜나 교묘한 술수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겠는가? 성현(聖賢)이나 일반 재사들도 평생을 곤궁하게 살다가 결국은 등용되지 못하고 생을 마친 사람은 심히 많다.


<장승상열전 끝>


주석

1) 양무(陽武)/ 지금의 하남성 원양현(原陽縣) 동남의 고을로 진시향 본기에 ‘ 진시황이 동쪽으로 순행을 나가 양무(陽武) 박랑사(博狼沙)에 이르렀을 때 도적을 만나 매우 놀랐다.’라는 기사가 있다.

2) 진나라 이전의 어사들은 모두 사관으로 궁중의 기둥 사이에 시립하여 조정의 일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래서 주하어사(柱下御史)라 했다.

3) 왕릉(王陵)/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181년에 죽은 서한의 창업공신이다. 한고조 유방과 동향인 패현(沛縣) 출신으로 원래는 패현의 협객으로 남에게 곧은 소리를 잘했다. 한고조 유방이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왕릉을 깍듯하게 모셨다. 후에 유방이 기병하여 함양(咸陽)으로 들어갈 때는 그는 수천의 무리를 모아 남양(南陽)에 머물렀지만 유방을 따르지 않았다. 얼마 후에 한중에서 나온 유방이 관중에서 나와 제후군을 규합하여 단수(丹水)에서 항우의 초군을 공격할 때 비로소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유방에 귀의했다. 이 후로는 유방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며 공을 세워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옹후(雍侯)에 봉해져 5천 호의 식읍을 받았다. 후에 안국후(安國侯)로 개봉(改封)되었다. 혜제(惠帝) 6년 기원전 189년 우승상(右丞相)이 되어 좌승상 진평과 함께 국정을 담당했다. 곧이어 혜제가 죽고 여후가 실제적으로 황제의 직에 올라 여씨들을 대거 제후왕으로 세우려고 하자 극력 반대했다. 여후가 불쾌하게 생각하여 그를 어린 황제의 태부로 옮겨 그의 승상직을 빼앗았다. 왕릉은 병을 핑계로 조당에 나오지 않다가 고후 7년인 기원전 181년에 죽었다.

4)삼진(三秦)/ 진나라를 멸한 항우는 한중으로 들어간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통일하기 전의 진나라 옛 땅을 셋으로 나눈 후에 항우의 부하를 제후왕으로 각각 임명하여 지키게 했다. 항우의 토벌군이었다가 항우에게 투항한 장한(章邯)은 옹왕(雍王)에 봉하고 그 치소를 폐구(廢丘)에 두고 섬서성 흥평현(興平縣) 동남부를, 사마흔(司馬欣)은 색왕(塞王)에 봉하여 치소를 역양(櫟陽)에 두고 섬서성 동남부의 임동(臨潼) 일대를, 동예(董翳)는 책왕(翟王)으로 봉하여 치소를 고노(高奴)에 두고 섬서성 동북지방의 연안(延安) 일대를 관할하도록 했다.

5) 장이와 진여의 이야기는 張耳陳餘列傳29에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6)당시 장창이 모셨던 대왕(代王)은 한고조 유방의 작은 아버지 유중(劉仲)이다. 그가 대왕에 책봉된 해는 한고조 7년인 기원전 200년의 일이다. 후에 흉노가 쳐들어오자 그는 나라를 버리고 낙양으로 도망쳐 왔다. 그 일로 인하여 제후왕의 신분에서 합양후(合陽侯)로 강등되었다.

7)계상(計相)/ 전한 때 승상의 별칭이다. 승상은 군국(郡國)이 올리는 회계와 지방정부 관리들의 고과를 관장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명칭이다.

8)주하사(柱下史)/ 주(周)와 진(秦) 왕조 때의 어사(御史)의 별칭이다. 직무가 언제나 궁전의 기둥 밑에서 시립하여 직무를 봤기 때문에 붙은 직명이다. 주나라 제도에는 어사는 전당의 기둥 사이에 시립하여 직무를 본다고 해서 주어사(柱御史)라고 했으며 진제에서는 시어사(侍御史)라고 칭했다.

9)유장(劉長 : 전 198-174)/ 유방의 막내아들이다. 고조 11년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졌다. 문제(文帝) 때 권세를 믿고 발호하여 입조할 때 항상 황제와 같은 수레를 타고 사냥을 나갔다. 봉국을 다스리는데 조정의 법을 따르지 않고 따로 법을 제정했다. 문제 6년 기원전 174년 흉노, 민월(閩越) 등의 이민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도모했으나 사전에 일이 발각되어 제후왕에서 쫓겨나 촉군으로 유배되는 형을 받았다. 촉군으로 가던 중 음식을 끊어 죽었다. 그의 아들 유안(劉安)이 후에 작위를 이어받아 회남왕(淮南王)이 되었다. 회남자(淮南子)는 유안의 저서이다.

10)회남왕(淮南王)/ 서한의 창업공신 경포(警砲)가 한왕 5년 기원전 202년 봉해진 후국(侯國)으로 구강(丘岡), 형산(衡山), 여강(廬江), 예장(豫章) 등의 4군을 봉지로 하고 도성을 육현(六縣)에 두었다.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이 모반죄로 모두 주살되는 것을 본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고조가 진압하고 아들 유장(油長)을 회남왕에 봉했다.

11)직지(職志)/ 깃발을 관리하는 군졸

12) 풍(豊)/ 지금의 강소성 풍현(豊縣)이다.

13) 여록(呂祿)/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80년에 죽은 서한 초기의 제후왕이다. 여태후의 큰 오빠인 건성후(建成侯) 여택(呂澤)의 아들이다. 즉 여태후의 조카다. 여태후 원년 기원전 187년 호릉후(胡陵侯)에 봉해졌으나 부르기는 무신후(武信侯)라 했다. 여태후 7년 조왕(趙王)에 봉해지고 8년 여태후가 노환으로 위독하게 되자 그는 여씨들의 안전을 위해 여산과 함께 상장군에 임명되었다. 장안의 경비를 담당하는 군대 중 북군은 여록이 남군은 여산이 지휘토톡 했다. 그 해에 여태후가 죽자 여산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주발(周勃)과 진평(陳平) 등에 의해 여씨 일족 등과 함께 멸족되었다.

14)패상(霸上)/ 파상(灞上)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동 백록원(白鹿原)이 시작되는 곳으로 패수(霸水)의 강안의 고을이라는 유래한 지명이다. 진한시대 함양(鹹陽)과 장안을 잇는 전략상의 요지로 진시황본기에 ‘ 초나라 장수 패공(沛公)이 진나라 군사를 무찌르고 무관(武關)을 통하여 입관하여 패상에 주둔하자 진왕 자영(子嬰)의 항복을 받았다.’라는 기사가 있다.

15) 오음(五音)/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의 오음을 말한다.

16)세목(洗沐)/ 한나라 때 관리들의 휴식일로 5일 마다 하루를 쉬었다.

17)성기(成紀)/ 감숙 태안(泰安) 지방에 해당하는 별자리 이름이다.

18)중후관(中侯官)/ 소부(少府)의 속관으로 성문을 지키는 둔위(屯衛)를 관할했다.

19) 재관궐장(材官蹶張)/ 재관은 용감하고 힘이 센 중급지휘관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하사관에 해당하고 궐장은 강궁을 발로 밟아 활을 재는 행위로 쇠뇌를 발사할 수 있는 일종의 특수부대에 해당한다. 즉 신도가는 중급지휘관 신분의 쇠뇌를 소지한 특수부대원 출신이라는 뜻이다.

20)관내후(關內侯)/ 원래 전국시대 때 진(秦)나라의 작위 제도로 한나라가 따랐다. 20등작 중 19등에 해당하는 작위로 20등작인 철후(徹侯, 혹은 열후(列侯))와 함께 후로 호칭되었으나 철후와는 달리 봉국이 없었기 때문에 관내(關內)의 왕성 지역에 거했음으로 붙여진 호칭이다.

21)태중대부(太中大夫)/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 따른 관직으로써 조정의 공론과 대응하는 황제의 고문이다. 평시에는 일정한 직무가 없다가 황제의 조명이 있으면 활동했다. 궁중에 기거하면서 직무를 수행했으며 명목상으로는 낭중령(郎中令: 후게 광록훈(光祿勛))에 속했으나 실제로는 통제를 받지 않은 황제의 직접 지시를 받는 고급참모였다. 황제의 곁에서 명을 받드는 중요한 직책으로써 급사중(給事中), 시중(侍中) 등의 관호로 불렸다.

22)내사(內史)/ 서주(西周) 때 시작된 관직의 이름으로 궁중내의 간책(簡冊)을 관리하고 제후와 경대부들의 임면에 관한 왕명의 출납을 관장했다.

23)가생(賈生)/ 가의(賈誼)를 말한다. 기원전 200년에 태어나서 168년 33세의 나이로 요절한 하남성 낙양(洛陽) 출신의 서한 초기 문인에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의 설에 정통하여 한문제(漢文帝)의 총애를 받아 약관의 나이로 최연소 박사가 되었다. 1년 만에 다시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진(秦)나라 때부터 내려온 율령 ·관제 ·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고 전한의 관제를 정비하기 위한 많은 의견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주발(周勃) 등 당시 창업공신 출신의 고관들로부터 견제를 받아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굴원(屈原)에 비유하여 <복조부(鵩鳥賦)>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으며, 《초사(楚辭)》에 수록된 <석서(惜誓)>는 그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4년 뒤 복귀하여 문제의 막내아들 양왕(梁王)의 태부가 되었으나 왕이 낙마하여 급서하자 상심한 나머지 1년 후인 기원전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저서에 《신서(新書)》 10권이 있으며, 진(秦)의 흥망성쇄를 논한 <과진론(過秦論)>은 유명하다. 굴원가생열전24는 굴원과 가의의 전기다.

24)정삭(正朔)/ 역법을 고치는 일. 옛날 중국에 왕조가 교체되면 일 년의 첫 달을 고친 신력을 새로 반포했다. 이를 정삭이라 했다.

25)전욱력(顓頊曆)/ 오제(五帝) 중의 한 사람인 고양씨(高陽氏)가 제작했다는 달력을 말하나 실제로는 전국시대 진(秦)나라 말에 제정하여 사용하다가 통일 후 전국에 반포하여 사용했다. 매년 10월을 그 해의 시작으로 했다.

26)저소손(褚少孫)/ 서한의 문학가이며 사학가이다.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인 영천(潁川) 출신으로 어렸을 때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인 패(沛)로 이주하여 살았다. 일찍이 당시의 저명한 유학자 왕식(王式)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원제(元帝 : 전49-33년)와 성제(成帝 : 전33-7년) 연간에 박사(博士)로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누락된 부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보찬(補撰)했다. 효무본기(孝武本紀), 삼왕세가(三王世家), 외척세가(外戚世家), 귀책열전(龜策列傳), 일자열전(日者列傳) 및 골계열전(滑稽列傳)을 보찬하거나 부록으로 달았다.

27)정화(征和)/ 한무제가 사용한 연호로 서기전 92년부터 89년 사이다. 한무제는 재위시 연호를 모두 10번을 바꿔 사용했다.

28)차승상(車丞相)/ 전천추(田千秋)로 별호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77년인 원봉(元鳳) 4년인 소제(昭帝) 11년에 죽었다. 처음에 고침랑(高寝郞)의 직에 있었는데 재임 중 일어난 무고지화(巫蠱之禍)에서 여태자(戾太子)가 강충(江充)에 의해 모함을 받았을 때 그는 표장을 올려 태자의 무고함을 신원했다. 무제가 감동하여 깨닫고 그를 대홍려(大鴻臚)에 임명했다. 정화(征和) 4년 서기전 89년 승상의 자리에 올라 부민후(富民侯)에 봉해졌다. 조심하고 신중했으며 덕이 깊고 지혜가 있었다. 무제가 죽을 때 소제를 보좌하라는 고명을 받았다. 만년에 건강이 나빠져 황제가 특명을 내려 수레를 타고 궁궐을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그를 차승상이라고 불렀다.

29)장릉(長陵)/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쪽

30)대홍려(大鴻臚)/ 중국 고대왕조의 관명으로 제후들과 이민족들과 사무를 관장했다. 진나라와 한나라 초기에는 전객(典客)이라는 명칭으로 9경에 들었다. 한경제 때 대행령(大行令)으로 개칭했다가 무제(武帝) 때 대홍려로 다시 변경했다.

31)사직(司直)/ 승상부에 속한 관리로 승상이 여러 관리들의 불법행위를 조사 감찰하는 일을 맡았다.

32)번군(繁君)/ 이름은 연수(延壽)다. 한서에 의하면 조광한을 탄핵한 인물은 당시 승상부의 사직(司直)이었던 소망지(蕭望之)였다. 번연수는 소망지보다 20여 년 후의 사람이다.

33)연(掾)/ 연속(掾屬)의 통칭으로 한나라 이래 중앙과 지방 정부의 관직 중 비교적 중요한 부서의 속관으로 장관이 직접 임명한 비서에 해당하는 속관으로 업무를 분담하여 처리했다. 녹봉은 100석이다.

35) 진평(陳平)/ 서한의 개국공신으로 문제 때 승상을 지낸 진평과는 동명이인다.

36)중상서(中尙書)/ 한무제가 설치한 환관을 위한 관직명으로 상서의 우두머리다. 진한 때 대부분의 환관은 관직을 겸임했기 때문에 환관 출신의 관리에 중(中) 자를 더하여 중관이라 칭하고 상서(尙書)의 직을 맡도록 했다. 원래 상서는 전국시대 때부터 봉건제후들의 문서수납을 맡아 하던 직책이었다가 진나라가 소부에 속하게 하고 그 우두머리에 상서령을 두어 상주문들을 수발하고 관리토록 했다. 한나라도 진나라의 제도를 답습하다가 한무제 때에 이르러 승상의 업무에서 떼어내 환관을 중상서에 임명하고 황제의 측근에서 도서, 비밀스러운 문서, 상주문이나 황명을 내외에 선포하는 일을 관장했다.

37)잠실(蠶室)/ 궁형을 집행하는 밀실을 말한다. 궁형의 집행을 위한 밀실은 불을 피워 따뜻하게 만들었는데 마치 누에를 기르는 잠실과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38)효선제(孝宣帝)/ 소제(昭帝)의 아들로 이름은 순(詢)이다. 기원전 73년에 제위에 올라 기원전 49년에 죽었다.

39)구고(舊故)/ 한선제는 그의 아버지이며 황태손이었던 유진(劉進)과 함께 한무제의 황태자였다가 무고(巫蠱) 사건으로 피살된 유거의 손자 유병기(劉病己)다. 유병기는 당시 갓난아이로 무고의 사건으로 인해 강보에 싸인 채로 옥에 갇혔다. 한무제가 사람을 보내 당시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하자 당시 사건의 심리를 담당하던 정위감이었던 병길은 황증손을 죽일 수 없다고 항명하여 유병기는 천운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태자가 간신 강충의 모함에 빠져 피살된 것을 알게 된 한무제는 무고의 사건으로 연루된 사람에게 사면령을 발하자 병길은 계속해서 어린 병길을 맡아 양육하다가 외조모에게 넘겨 기르게 했다. 후에 유병기는 소제(昭帝)에게 후사가 없자 황태자로 책봉되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40)회양(淮陽)/ 지금의 하남성 회양현(淮陽縣)이다. 회양현은 안휘성과 가까운 하남성의 동쪽지역이다.

41)우정국(于定國)/ 기원전 111년에 태어나서 40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으로 동해 담현(郯縣) 출신다, 그의 부친 우공(于公)이 죽자 우정국은 그의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 받아 현의 옥리(獄吏)가 되어 군에 불려가 송사를 담당했다. 법률에 능통하여 옥사를 엄격하겨 처리하여 명성이 높아져 정위(廷尉)에 보임되었다. 일을 처리하는 데 재능을 발휘하여 한소제의 눈에 띄어 경성에 불려가 시어사(侍御史)로 관직이 오르고 다시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한선제 때 승상의 자리에 올라 평서후(平西侯) 봉해졌다.

42)사책(射策)/ 한나라가 시행한 관리 고과제도로써 시험관이 목간이나 죽간에 문제를 제시하는 것을 ‘사(射)’라하고 수험생이 답을 써 내는 것을 ‘책(策)’이 했다. 시험의 목적은 관리들의 보직을 적재에 배치하기 위해서 였으며 서한 때는 갑을병 삼과로 나누어 시행하다가 동한 때는 갑을 양과로 축소되었다. 갑과의 합격자는 낭중(郎中), 을과 합격자는 태자궁의 사인(舍人). 병과 합격자는 문학의 서류를 관장하는 일을 보좌하는 직책에 임명되었다. 광형은 병과에 합격하여 문학졸사가 된 것이다.

43)광록훈(光祿勛)/ 궁정의 숙위 및 성문의 출입 감시, 궁내의 제반사에 대한 관리 및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관리들의 우두머리로 진한 때는 구경(九卿)의 일원이다. 휘하에 대부, 랑(郞), 알자(謁者), 기문(期門), 우림(羽林), 광록연(光祿掾), 광록주사, 광록주부 등의 속관이 있었다. 후에 궁궐의 대문을 지키는 위병들을 관장하는 장관으의 명칭으로 사용되어 지금의 수도방위사령관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바뀌었다. 원래 진나라의 제도를 따라 낭중령이라고 부르다가 한무제에 의해 광록훈으로 바꾸었다.

44)사마천이 아니라 이 장을 보찬한 저소손(褚少孫)을 말한다.


목록
8816
[일반] 굴원가의열전(屈原賈誼列傳) 24-2.가의(賈誼)

열전24-2 . 가의(賈誼) 가생(賈生)의 이름은 의(誼)고 낙양(駱陽) 사람이다. 나이 18세에 능히 시경을 낭송하고 서경에 익숙하여 그 명성이 군
운영자 07-02-24
[일반] 굴원가의열전(屈原賈誼列傳) 24-1.굴원

열전24-1. 굴원(屈原) 굴원은 이름이 평(平)이고 초나라 왕족 출신이다.1) 초회왕(楚懷王)2) 때 좌도(佐徒)3)였다. 위인이 견문이 넓고 의지가
운영자 06-11-21
[일반] 전담열전(田儋列傳) 34

열전34. 전담(田儋)  전담(田儋)은 적현(狄縣) 출신이다. 옛날 제나라 왕족 전씨의 후예다. 전담과 종제 전영(田榮), 전영의 동생
운영자 08-10-27
[일반] 번역등관열전(樊酈縢灌列傳) 35. 번쾌(樊噲)․역상(酈…

열전35. 번쾌(樊噲)․역상(酈商)․하후영(夏侯嬰)․관영(灌嬰) 1. 번쾌(樊噲) 무양후(武陽侯)
운영자 08-11-03
[일반]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36. 장창 등

열전36 丞相張蒼外(승상장창외) 승상 장창(張蒼)은 양무(陽武)1) 출신으로 평소에 독서를 좋아하고 음률과 역법에 능했다. 진나라 때 그는 이미
운영자 09-02-22
[일반] 부근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 38. 傅寬(부관)‧靳歙(근…

열전38. 傅寬(부관)‧靳歙(근흡)‧周緤(주설) 1. 부관(傅寬) 양릉후(陽陵侯) 부관(傅寬)은 위(魏)나라 오대부(五大
운영자 09-07-09
[일반]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 37

열전37. 역생육가(酈生陸賈) 역생(酈生) 이기(食其)라는 사람은 진류(陳留) 고양(高陽)① 출신이다. 독서를 좋아했으나 가난한 집안 사
운영자 09-03-19
[일반]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39

열전39. 劉敬叔孫通(유경숙손통) 유경(劉敬)은 제나라 사람이다. 한5년 기원전202년, 농서(隴西)로 군역을 나가면서 낙양을 지나가다가 그때
운영자 09-07-31
[일반]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47. 두영과(竇嬰) 전분(田蚡)

열전47. 두영전분(竇嬰田蚡) 1269. 吳楚爲亂(오초위란), 오초가 연합하여 란을 일으켰을 때 1270. 宗屬唯嬰賢而喜士(종속유
운영자 10-06-15
[일반]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25

열전25. 여불위(呂不韋) 1. 奇貨可居(기화가거) - 참으로 진기한 재화라 사둘만하구나! - 여불위(呂不韋)는 한나라 양책(陽翟)의 대상(大商
운영자 07-03-11
[일반] 자객열전(刺客列傳) 26

열전26 자객(刺客) 1. 조말(曹沫) 조말(曹沫)은 노나라 사람이다. 용기와 힘으로 노장공(魯莊公)1)을 모셨다. 힘이 센 장사를 좋아했던 노장공에
운영자 07-03-11
[일반] 몽염열전(蒙恬列傳) 26

열전28. 몽염(蒙恬)   몽영의 선조는 제나라 사람이다. 몽염의 조부 몽오(蒙驁)가 제나라로부터 진나라에 들어와 소양왕(昭襄王)을 모
운영자 07-07-03
[일반]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 29

열전29 장이진여(張耳陳餘) 장이(張耳)는 대량(大梁) 인이다. 그가 어렸을 때 신릉군(信陵君) 위무기(魏無忌)의 문객을 지냈다. 장이가 일찍이 위
운영자 07-07-13
[일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32. 한신(韓信)

열전32. 淮陰侯韓信(회음후한신) 楚人迫我京索(초인박아경색), 초나라가 한나라를 경성(京城)과 색성(索城)에서 압박할 때 而信拔魏趙(이신
운영자 08-06-10
[일반]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30

열전30. 魏豹彭越(위표팽월) 위표(魏豹)는 옛날 위나라 왕실의 공자출신이다. 그의 형 위구(魏咎)는 옛날 위나라가 망하기 전 영릉군(寧陵君)에
운영자 07-12-25
1 [2][3][4][5][6][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