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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열전(刺客列傳)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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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26 자객(刺客)

1. 조말(曹沫)

조말(曹沫)은 노나라 사람이다. 용기와 힘으로 노장공(魯莊公)1)을 모셨다. 힘이 센 장사를 좋아했던 노장공에 의해 장군으로 임명되어 제나라 군사와 3번 싸웠으나 3번 모두 패했다. 노장공이 두려워하여 수읍(遂邑)2)의 땅을 바쳐 강화를 맺고 여전히 조말을 장군으로 삼았다.

제환공은 노나라와 가(柯) 땅에서 회맹을 맺기를 허락했다. 환공과 장공이 만나 단에 올라 회맹의 의식을 이미 행했으나 수행했던 조말이 비수를 들고 제환공을 범하자 환공의 좌우 신하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제환공이 조말에게 물었다.

“ 장군은 무엇을 원하는가? ”

조말이 대답했다.

“ 제나라는 강하고 노나라는 약합니다. 강한 제나라가 노나라를 침범하기를 너무 심하게 합니다. 지금 만일에 노나라 도성의 성곽이 무너진다면 제나라 변경도 함께 무너질 것입니다. 군후께서는 이 점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

제환공이 그때까지 노나라부터 빼앗아간 땅을 모두 돌려주기로 허락했다. 이윽고 환공이 말을 마치자 조말이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땅에 던져버리고 단을 내려가 북면하고 있던 군신들 대열에 들어가 섰는데 얼굴색은 평상시와 같이 아무 변함이 없었고 말소리 또한 여전했다. 제환공이 노하여 그가 한 약속을 깨려고 했다. 관중이 말했다.

“ 불가합니다. 무릇 작은 이익을 탐하여 스스로 만족하신다면 제후들로부터 신의를 잃고 천하의 모든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약속대로 노나라에 땅을 돌려주는 편이 좋습니다. ”

그래서 환공은 마침내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모두 돌려주었다. 이로써 조말은 세 번의 싸움에서 지고 빼앗긴 땅을 모두 노나라로 돌려받았다.

  그후 167년이 지나 오나라에서 전제(專諸)의 사건이 일어났다.3)

2. 전제(專諸)

  전제는 오나라의 당읍(堂邑)4) 사람이다. 초나라에서 도망쳐 오나라로 망명한 오자서는 전제의 현능함을 알았다. 오자서가 오왕 료(僚)를 접견하고 초나라를 정벌했을 때의 이로운 점을 유세했다. 오나라의 공자 광(光)이 듣고 말했다.

“ 저 오원(伍員)이라는 자는 아버지와 형이 모두 초나라에서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초나라를 정벌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사적인 원한을 갚기 위함이지 오나라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왕이 초나라를 정벌하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이에 오자서는 공자광이 오왕 료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뜻을 알고 말했다.

“ 공자광은 오나라의 국내 문제에 뜻을 두고 있음으로 그를 나라 밖의 일로 설득하면 안 될 것이다.”

오자서는 즉시 전제를 공자광에게 천거했다.

공자광의 부친은 오왕 제번(諸樊)의 아들이다. 제번은 세 명의 동생이 있었다. 첫째가 여제(餘祭), 둘째가 이매(夷昧), 막내가 계찰(季札)이다. 제번은 막내 계찰이 형제 중 가장 현능했으나 태자의 자리를 사양했음으로 형제끼리 왕위를 전하여 셋째 동생에게 이르게 하여 결국 나라를 계찰이 이어 받게 하려고 했다. 제번이 죽자 왕위는 여제에게 전해졌고 다시 여제가 죽자 이매에게 전해졌다. 이매가 죽으니 왕위는 당연히 막내 동생 계찰에게 전해져야 했으나 계찰은 왕위에 오르지 않고 도망쳐버렸다. 오나라 국인들은 이매의 아들 요를 오왕으로 세웠다. 그것을 보고 공자광이 말했다.

“ 형제끼리 왕위를 전한다면 당연히 계찰 숙부가 이어야 되겠지만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한다면 이 광이야말로 적법한 계승자다. ”

이런 이유로 아무도 몰래 모신(謀臣)을 길러 왕위에 오르려고 했다.

전제를 얻은 공자광은 대우를 극진히 했다. 오왕 요 9년 초평왕(楚平王)이 죽었다5). 그해 봄 오왕 요가 초나라에 국상이 난 틈을 이용하여 그의 두 동생인 공자 엄여(掩餘)와 촉용(燭庸)에게 군사를 주어 초나라의 잠읍(潛邑)을 공격하도록 하고 동시에 연릉(延陵)에 머물고 있던 계찰(季札)을 시켜 진(晉)나라에 사자를 보내 중원 제후국들의 동정을 살피게 했다. 초나라가 군사를 동원하여 엄여와 촉용의 길을 끊자 오나라 군사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 이에 공자광이 전제를 보고 말했다.

“ 이때야말로 절대 노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요. 이때 구하지 않으면 어찌 내가 왕의 자리를 얻을 수 있겠소? 이 광이야말로 진정한 왕위 계승자로 왕의 자리에는 마땅히 나의 것이라 계찰 숙부가 귀국하시더라도 나를 폐하지 않으실 것이오.”

전제가 말했다.

“ 왕료를 제가 죽일 수 있으나 늙은 모친이 살아 계시고 애들은 아직 어립니다. 그러나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한 오왕의 두 동생이 이끄는 군사들은 초나라 군사들에게 의해 뒷길이 끊겨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밖으로는 초나라에 의해 곤란에 빠져있고 안으로는 믿을만한 골경지신(骨鯁之臣)6)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어쩌지는 못할 것입니다. ”

공자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 이 광의 몸은 그대의 몸이오.”

4월 병자(丙子) 일에 공자광은 갑사들을 자기 집의 지하실에 매복시켜 놓고 주연을 준비하여 왕료를 청했다. 왕료가 호위병을 이끌고 궁궐에서 나와 공자광의 저택에 이르자 문에서부터 시작해서 섬돌의 좌우 양측에 이르기까지 모두 왕료의 친척으로 지키게 했는데 그들은 모두 긴 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윽고 주흥이 무르익자 공자광이 거짓으로 넘어져 발을 다쳤다는 핑계를 대고 좌석에서 물러나 지하실로 들어가면서 전제를 시켜 비수를 뱃속에 숨긴 구운 생선을 가져다 바치도록 했다. 이윽고 왕의 면전에 이른 전제가 생선의 배를 가르고 그 속에 있던 비수를 꺼내어 왕료를 찌르자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왕료를 좌우에서 호위하고 있던 무사들 역시 전제를 죽이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소란을 피웠다. 공자광이 매복시켜 두었던 갑병들을 내보내 왕료를 따라왔던 무리들을 공격하도록 해서 모조리 죽였다. 이윽고 공자광이 스스로 오왕의 자리에 오르니 이가 오왕 합려(闔閭)다. 합려는 전제의 아들을 상경(上卿)으로 봉했다.

  그 후 70여 년 후에 진(晉)나라에서 예양(豫讓)의 사건이 일어났다.

3. 예양(豫讓)

  예양은 진(晉)나라 사람이다. 원래 범(范)과 중항(中行) 씨를 섬겼으나 명성을 얻지 못했다. 후에 두 가문을 떠나 지백(智伯)을 섬기자 지백은 그를 매우 존중하고 총애했다. 이윽고 지백이 조양자(趙襄子)를 공격하자 조양자는 한(韓)과 위(魏) 두 종족과 힘을 합쳐 지백을 멸하고 그 땅을 삼분해서 나누어 가졌다. 지백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조양자는 그의 두개골에서 살을 발라내고 칠을 해서 음식 그릇으로 사용했다. 산중에 도망가 있던 예양이 듣고 한탄했다.

“ 아아!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예뻐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고 했다7). 지백이 나를 알아주었으니 나는 기필코 그의 원수를 갚아주고 죽어야 되겠다. 그래야만 내가 죽어 혼백이 되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

산중에서 나온 예양은 이름과 성을 바꾸고 죄수의 신분이 되어 조양자의 궁궐로 들어가 변소를 칠하는 일을 하면서 가슴에 비수를 품고 기회를 보아 조양자를 암살하려고 했다. 이윽고 양자가 변소에 가까이 가자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변소를 칠하던 죄수를 붙잡아 심문을 한 결과 그가 예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품속에 병기를 숨기고 있던 예양이 말했다.

“ 내가 지백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고 한 것이다. ”

조양자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예양을 죽이려고 했으나 조양자가 만류하며 말했다.

“ 이 사람은 의인이다. 내가 조심하면 그뿐이다. 또한 지백은 이미 죽고 그 후손들도 끊어졌다. 이에 그 신하된 자가 그의 원수를 갚아주려고 하니 이는 천하의 보기 드문 현인이라!”

결국 예양은 석방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예양은 다시 몸에 칠을 하고 문둥병 환자처럼 꾸미고 다시 숯을 삼켜 벙어리로 형상과 모습을 꾸며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시정에 나가 걸식을 했다. 그런 예양을 그의 처도 알아보지 못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만난 친구가 그를 알아보고 말했다.

“ 자네는 예양이 아닌가?”

예양이 대답했다.

“ 바로 나일세 ”

예양의 친구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자네의 재주라면 몸을 의탁하여 조양자를 받든다면 양자는 틀림없이 자네를 곁에 두고 총애할 것이네. 그대가 조양자의 곁에서 총애를 받은 후에 자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하면 일을 쉽게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몸을 상하게 하고 고통을 받으면서까지 양자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니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

예양이 대답했다.

“ 몸을 맡겨 남의 신하가 되어 받드는 자가 그를 죽이려고 함은 두 마음을 품고 그 주인을 섬기는 일과 같다.또한 내가 행하고자 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고 말할 수 있으나 구태여 하려고 하는 이유는 장차 두 마음을 품고 그 군주를 섬기는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품도록 하기 위함이다. ”

친구와 헤어진 예양은 얼마 후에 양자가 외출하면 통과해야만 하는 다리 밑에 매복했다. 양자의 일행이 이윽고 당도하여 다리를 건너려고 하는데 말이 놀라 울었다. 양자가 말했다.

“ 이는 필시 예양이 숨어 있음이라! ”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하니 과연 예양이 다리 밑에 숨어있었다. 양자가 예양의 죄를 열거하며 말했다.

“ 그대가 옛날 받든 범씨와 중항씨 두 가문을 지백이 멸했음에도 그때는 그들을 위해 지백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지백에게 몸을 맡겨 그를 섬겼다. 지백 역시 지금 죽고 없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유독 지백만을 위해 원수를 갚는다고 이리 심하게 하는가? ”

예양이 대답했다.

“ 내가 범씨와 중항씨 두 종족을 받들었으나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으로써 나를 대했소. 그래서 나는 보통사람으로써 그들에게 보답했소. 이윽고 내가 지백에게 몸을 의탁하자 그는 나를 국사(國士)로써 나를 대했소. 그래서 나는 지백에서 국사로써 보답하려고 할뿐이오.”

조양자가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 아아, 예양이여, 그대의 지백을 위한 충절으로 명예를 이미 이루었고 나 또한 그대를 용서하여 그대에게 할 만큼 했소. 그대가 옛 주인의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은 이미 세상에 알려져 그 이름이 이루어졌소. 또한 나는 그대를 이미 용서했음으로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소. 그대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니 나는 다시 그대를 놓아주지 않겠소!”

조양자가 군사들을 시켜 예양을 포위하도록 하자 예양이 말했다.

“ 제가 듣기에 밝은 군주는 다른 사람의 훌륭한 점을 가리지 않으며 충신은 죽음으로써 의로운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군후께서는 이미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여 천하의 그 누구도 군후의 어진 마음을 칭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일은 신이 엎드려 죽음을 청하겠으나, 군후께 청컨대 군후의 옷에 제가 칼질을 한 번 해서 원수를 갚을 마음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저는 비록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제가 감히 실제로 바라는 바는 아니나, 그냥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예양의 말이 대의에 해당한다고 생각한 양자가 사람을 시켜 자기 옷을 벗어 예양에게 주도록 했다. 예양이 칼을 뽑아 세 번 옷 위에서 뛰고 이어서 칼로 찌르며 말했다.

“ 내가 지백의 원수를 갚게 되었구나! ”

그리고 즉시 칼 위에 엎어져 죽었다. 예양이 죽자 조나라의 뜻 있는 인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그리고 40여 년 후에 지(軹)8) 땅에서 섭정(聶政)의 일이 발생했다.

 

4. 섭정(聶政)

섭정은 지읍(軹邑) 심정리(深井里) 사람이다.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피해 그의 누이와 함께 제나라로 도망쳐 백정을 직업으로 삼고 살았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복양(濮陽) 사람 엄중자(嚴仲子)가 한애후(韓哀侯)9)를 받들고 있었는데 한나라 재상 협루(俠累)10)와 틈이 벌어졌다. 협루에게 살해 될 것을 두려워한 엄중자는 도망쳐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기의 원수를 갚아줄 사람을 찾았다. 이윽고 제나라에 들어간 엄중자는 제나라 사람들로부터 원수를 피해 백정으로 위장하여 숨어살고 있는 섭정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다. 엄중자는 섭정의 집을 찾아가 사귀기를 청하고 여러 번 오고간 뒤에 어느 날 술을 준비하여 섭정의 모친에게 잔을 올렸다. 이윽고 술이 거나하게 되자 엄중자는 황금 백 일(鎰)11)을 바쳐 섭정의 모친을 위해 수를 빌었다. 엄중자가 막대한 황금으로 자기를 후하게 대하자 매우 놀라고 한편 괴이하게 생각하여 황금을 한사코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엄중자가 고집함으로 섭정이 받아들이고 감사의 말을 했다. “ 제가 다행히 늙은 모친을 모시고 있으나 집이 가난하여 떠돌이가 되어 객지를 돌아다니다가 소를 잡는 백정으로 일로 아침저녁으로 맛잇고 부드러운 음식이나마 얻어 늙은 어머님을 공양하고 있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할 음식은 모두 준비가 되어 있으니 제가 감히 선생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

엄중자가 사람의 이목이 없는 곳으로 가서 섭정에게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 저에게 원수가 있어 제후의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봤습니다. 이윽고 제나라에 들어와 가만히 들어보니 귀하께서 의기가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백금을 바쳐 노모에게 변변찮은 음식이나마 봉양해드리도록 함으로 해서 귀하와 교우를 맺는 즐거움을 누리고자 함이지 어찌 감히 제가 달리 바라는 바가 있어서이겠습니까? ”

섭정이 대답했다.

“ 저는 마음속의 뜻을 접고 몸을 굽혀 시정에서 백정노릇을 하며 사는 사람으로 노모나마 봉양을 할 수 있는 처지를 다행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노모가 살아계시니 이 정의 몸을 감히 다른 사람에게 허락할 수 없습니다. ”

그래도 엄중자가 굳이 황금을 주려고 했으나 섭정은 결국 받지 않았다. 그래서 엄중자와는 마침내 주인과 손님으로써의 예를 행하고 서로 해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에 섭정의 노모가 죽었다. 장례를 마치고 거상 기간을 끝낸 섭정이 말했다.

“ 아아, 이 섭정은 시정에 살면서 방울달린 칼로 소를 잡는 일을 하고 있는 하찮은 사람임에도 제후의 경상(卿相) 신분에 있는 엄중자가 불원천리하고 거마를 타고와 몸을 굽혀 나와 교우를 맺었다. 그런데 내가 그를 접대한 정도는 매우 박하여 아직까지 그를 위해 큰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행하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엄중자는 황금 백일을 들고 와서 모친을 축수했다. 내가 황금을 비록 받지 않았으나 그와 같은 일은 엄중자가 이 정의 마음을 깊이 알아주는 행위이다. 무릇 현능한 사람이 분노를 느끼고 눈을 들어 홀기면서 나 같은 궁벽한 사람과 친교를 맺고 믿음을 주는 행위는 다 뜻이 있어서인데 어찌 나만이 묵연히 모른 체 할 수 있단 말인가? 전에 엄중자가 나를 필요로 했을 때는 그때는 다만 늙은 모친이 계시기 때문에 사양했다. 그런데 지금 모친께서 천수를 다하시고 임종하셨으니 나는 장차 지기를 위해 쓰임을 당하리라!”

섭정은 그 즉시 서쪽의 복양(濮陽)으로 달려가 엄중자를 만나 말했다.

“ 옛날 중자(仲子)의 청을 허락하지 않았음은 모친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불행히도 모친께서 천수를 다하시고 임종을 하셨습니다. 중자께서 원수를 갚고자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청컨대 그 일을 해주게 해주십시오.”

엄중자가 자기의 사연을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나의 원수는 한나라 재상 협루로 한나라 군주의 막내작은아버지입니다. 종족들이 매우 많아 거처하는 곳에 수많은 호위병을 세워 두어 내가 사람을 시켜 그를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결국은 일을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그대가 다행히 나의 뜻을 저버리지 않겠다면 내가 기마와 수레에 장사를 태워 보내 그대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

섭정이 듣고 말했다.

“ 한나라와 위(衛)나라는 서로 중간 위치에 있어 그리 멀지 않습니다. 지금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일국의 재상입니다. 또한 그는 한 나라의 군주에게 친족이 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많으면 이해관계가 생기지 않을 수 없고, 이해관계를 따지다보면 일이 누설되고 맙니다. 일이 누설되면 한나라의 모든 백성들은 그대를 원수로 여길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

섭정은 엄중자가 자기를 돕기 위해 고용하겠다는 거기(車騎)와 장사들을 사양하고 혼자서 길을 떠났다.

칼을 지니고 한나라에 당도한 섭정은 협루가 거처하는 상국(相國) 부중(府中)으로 들어갔다. 협루는 관부의 당상에 앉아 있었고 그를 지키기 위해 극으로 무장한 호위병과 시자들이 매우 많았다. 섭정이 다짜고짜로 부중으로 돌입하여 당상에 앉아있던 협루를 칼로 찔러 죽이자 상국부에는 혼란에 빠졌다. 섭정이 크게 소리치며 칼을 휘둘러 수 십 명을 죽인 후 스스로 자기의 얼굴을 가죽을 벗기고 눈을 뽑고 자신의 배를 갈라 창자를 쏟은 후 이내 숨을 거뒀다.

한나라 관리들이 섭정의 시체를 길거리에 내놓고 그가 누구인지 현상하여 물었으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한나라는 누구든지 협루를 죽인 자에 대해 고한다면 그에게 천금의 상금을 주겠다고 했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섭정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섭정의 누이 섭영(聶榮)은 어떤 사람이 한나라 상국 협루를 칼로 찔러 죽였으나 범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여 나라에서는 그 사람의 성과 이름을 알지 못해 천금의 상금을 걸고 그 시체를 시가에 전시하여 범인의 신상을 알아내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말했다.

“ 그 사람은 내 동생이 아니겠는가? 오호라, 엄중자가 내 동생의 능력을 알아주었구나!”

섭영은 그 즉시 길을 떠나 한나라로 들어가 시체가 전시되어 있는 거리로 가서 보니 과연 죽은 사람은 동생 섭정이었다. 섭영이 동생의 시체 위에 엎어져 통곡을 하며 말했다.

“ 이 사람은 지읍(軹邑)의 심정리(深井里) 출신의 섭정이라는 사람입니다. ”

거리를 지나가는 여러 사람들이 모두 말했다.

“ 이 사람은 우리 한나라의 상국을 잔혹하게 살해한 자로써 왕이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그 성과 이름을 찾고 있다는 것을 부인은 듣지 못했소? 어찌 감히 달려와 자신의 동생이라고 밝히는 것이오? ”

섭영이 대답했다.

“ 들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이 오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저잣거리의 상인들 사이에 몸을 던져 살았던 이유는 늙은 모친께서 다행히 건강하게 살아계시고 저 또한 출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모친께서 천명을 다하시어 돌아가시고 저도 역시 출가하여 남의 아내가 되자 비록 동생이 곤궁하고 더러운 곳에 몸을 두고 있는 처지이지만 그 현능함을 알아본 엄중자가 찾아와 교우관계를 맺고 은혜를 크게 베풀었으니 동생이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했으나 엄중자와 제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몸을 해쳐 다른 사람을 연좌시키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어떻게 주살됨을 두려워하여 현능한 동생의 이름을 없애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한나라의 시정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이윽고 섭영이 크게 하늘에 대고 세 번 크게 외쳐 슬퍼하다가 섭정의 시체 곁에서 죽었다.

 진(晉), 초(楚), 제(齊), 위(衛) 등의 나라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모두 말했다.

“ 현능한 사람은 단지 섭정뿐만이 아니라 그 누이 역시 열녀로다! 만일 섭정이 그의 누이가 참고 견디는 성격이 아닐뿐 아니라 필시 해골을 드러내는 고난도 마다하지 않으며 천리의 험하고 먼 길을 달려와 그의 이름을 들어내고 남매가 같이 한나라의 시정에서 죽게 되는 운명을 알았다면 섭정은 결코 엄중자에게 자기의 몸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중자 역시 현사를 얻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20년 후에 진나라에서 형가(荊軻)의 사건이 일어났다.  

5. 형가(荊軻)

형가(荊軻)는 위(衛)나라 사람이었으나 그 선조는 원래 제나라에 살다가 위나라로 옮겨와 살았다.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경경(慶卿)이라고 불렀다. 후에 연(燕)나라에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들은 그를 형경(荊卿)이라고 불렀다.

독서와 격검을 좋아했던 형경은 위원군(衛元君)12)에게 유세했으나 위원군은 쓰지 않았다. 그 후에 진나라는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빼앗은 땅에 동군(東郡)13)을 설치할 때 위(衛)나라 땅을 포함시키고 위원군과 그 족속들을 야왕(野王)으로 옮겨 살게 했다.

  

일찍이 형가가 유람을 할 때 유차(楡次)14)를 들렀다가 개섭(蓋聶)과 검술에 관해 논쟁했다. 개섭이 노하여 형가를 노려보자 형가는 피해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이 다시 형경을 불러오려고 하자 개섭이 말했다.

“ 얼마 전에 내가 그와 검술에 관해 논하다가 그가 승복을 하지 않기에 내가 그를 노려봤소. 시험 삼아 한 번 가보시오. 그는 틀림없이 이 곳을 이미 떠났을 것이오. 그는 감히 이곳에 머무를 수 없었을 것이오. ”

그래서 사람을 시켜 그가 머물고 있는 집의 주인을 찾아가 물어보게 한 결과 그때는 이미 형경은 수레를 몰아 유차를 떠난 뒤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 고하자 개섭이 말했다.

“ 그는 당연히 떠났을 것이오. 내가 며칠 전에 그를 노려보아 겁을 주었으니까! ”

형가가 한단을 유람할 때 노구천(魯句踐)과 박(博)15)을 두다가   실랑이가 벌어졌다. 노구천이 화를 내며 호통을 치자 형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조나라를 떠나 연나라에 도착한 형가는 연나라의 개백정들과 축(筑)의 명인 고점리(高漸離)와 사이좋게 지냈다. 술을 좋아한 형가는 매일 개백정 및 고점리 등과 저잣거리에서 술을 마셨다. 술자리의 취흥이 무르익게 되면 고점리의 축에 맞춰 노래를 불러 서로 즐거워하다가 다시 서로 눈물을 흘리기도 하며 자기들 앞에 사람이 없는 듯이 행동했다. 형가가 비록 술꾼들하고 섞여서 지냈지만 위인이 침착하고 신중했으며 독서를 즐겨했다. 그가 제후국들을 돌아다닐 때 그가 사귄 사람들은 모두 현능하거나, 호협하고 장자의 풍모를 갖춘 인사들이었다. 그가 연나라에 있을 때 알게 된 처사 전광(田光) 선생도 역시 형가를 잘 대해 주며 그가 범용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진(秦)나라에 인질로 가있던 연나라의 태자 단(丹)이 도망쳐 돌아왔다. 연나라의 태자단이라는 사람은 옛날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을 때 조나라에서 태어난 진왕 정(政)이 어렸들 때 사이좋게 지낸 적이 있었다. 이어서 정은 진왕의 자리에 오르고 태자단은 다시 진나라에 인질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진왕 정은 태자단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태자단은 진왕을 원망하며 도망쳐 연나라로 돌아왔다. 귀국한 태자단은 진왕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했으나 나라의 힘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었다. 그 후에 진나라는 매일 군사를 일으켜 산동의 제(齊), 초(楚) 및 삼진(三晋) 등을 공격하여 서서히 제후국들의 영토를 잠식하여 이윽고 연나라까지 그 전화가 이르게 되자 연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은 모두 그 화를 두려워했다. 태자단이 근심한 나머지 그의 태부인 국무(鞠武)에게 대책을 물었다. 국무가 대답했다.

“ 온 천하에 영토를 두루 갖고 있는 진나라가 한위조(韓魏趙) 삼진(三晋)을 위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감천(甘泉)과 곡구(谷口)의 험고에, 남쪽으로는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강안의 비옥한 토지에, 파(巴)와 한중(漢中)의 풍요로움에, 오른 쪽으로는 농서(隴西)와 촉(蜀)의 험준한 산악에, 왼쪽으로는 동관(潼關)과 효산(殽山)의 험고함에 의지하며 백성들은 많고 군사들은 용감하며 병기와 군비는 여유가 있습니다. 진나라가 출병을 일단 정하기라도 한다면 장성의 남쪽과 역수 북쪽 땅의 장래는 불안정하게 될 것입니다. 어찌하여 능욕을 당했다는 원한만으로 역린(逆鱗)을 행하려고 하십니까? ”

태자 단이 말했다.

“ 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 청컨대 제가 심사숙고해서 그 방도를 강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고 얼마 후에 진나라 장수 번오기(樊於期)16)가 진왕에게 죄를 짓고 연나라로 망명해 오자 태자단이 받아들여 머물게 했다. 국무가 보고 간했다.

“ 불가합니다. 무릇 포악한 진왕에게 연나라에 대한 분노를 더하게 하여 소름이 끼치는 일임에도 어찌하여 번장군을 거두십니까? 그것은 소위 허기진 호랑이가 다니는 길에 고기를 놓아두는 행위와 같아 그 화를 필시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록 관중(管仲)이나 안영(晏嬰)의 지모가 있다할지라도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원컨대 태자께서는 속히 번장군을 흉노로 보내시어 진나라에 트집을 잡히지 마십시오. 그리고 서쪽으로는 삼진과 합종을 맺고 남쪽으로는 제와 초 두 나라와 연계하고 북쪽으로는 흉노의 선우(單于)와 강화를 맺도록 하시면 그때는 아마도 진나라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태자가 대답했다.

“ 태부의 계책은 너무나 많은 시일이 소요됩니다. 지금도 마음이 너무 혼란하여 잠시라도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또한 그것 하나만이 아닙니다. 번장군이 천하에 몸 둘 곳이 없는 곤궁한 처지가 되어 이 단에게 귀의해 왔습니다. 내가 비록 강한 진나라부터 압박을 받는다 하더라도 애련지교(哀憐之交)를 버리고 번장군을 흉노로 보내는 행위는 결코 이 단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

국무가 대답했다.

“ 무릇 위태로운 일을 행하면서 안정을 구하려고 하는 행동은 화를 자초하면서 복을 구하는 일과 같습니다. 얕은 계책은 원한만 깊게 할 뿐입니다. 한 사람의 새로운 친구와 우정을 맺기 위해 장차 나라에 닥쳐올 대재앙을 고려치 않음은 마치 ‘ 원한을 쌓아 화를 자초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새털을 화로불에 태우는 일과 같아 아무런 성과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물며 흉맹한 독수리와 같은 진나라가 분노하여 원한을 풀려고 하는데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지금 이 연나라에 전광선생이라고 계시는데 위인이 지모가 깊고 용맹스럽습니다. 그라면 도모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 태부께서 말씀하셨으니 제가 전선생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시겠습니까? ”

“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

이윽고 국무가 나가서 전선생을 보고 말했다.

“ 태자께서 선생과 국가의 일을 도모코자 합니다. ”

전광이 말했다.

“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

전광이 곧바로 태자를 찾아 인사를 올리자 태자가 정중하게 맞이하며 뒷걸음으로 인도하여 안으로 들이고 의자의 먼지를 몸소 닦은 후 앉기를 청했다. 전광이 좌정했는데 좌우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태자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전광 앞으로 와서 청하는 말을 했다.

“ 연(燕)과 진(秦) 두 나라는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원컨대 선생께서는 이 점을 생각해 주십시오. ”

전광이 대답했다.

“ 제가 듣기에 기기(騏驥)와 같은 명마도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음은 힘이 왕성할 때이지 늙고 병들면 노마도 못 쫓아간다고 했습니다. 오늘 태자께서 나에 대해 들으신 이야기는 제가 혈기가 왕성한 젊었을 때의 일이고 지금 저는 이미 늙고 병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 광은 감히 태자님과 나라의 대사를 도모할 수도 없으나 제가 잘 아는 사람 중 형경(荊卿)이라면 가할 것입니다. ”

태자가 물었다. “ 원컨대 선생께서 제가 형경과 친분을 맺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전광이 그렇겠다고 대답하고 자리에 일어나 집 밖으로 나왔다. 태자가 대문 밖에서 전송하면서 당부의 말을 했다.

“ 제가 말씀드린 것이나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나 모두 국가의 대사이니 선생께서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마십시오. ”

전광이 하늘을 쳐다보고 웃더니 알았다고 대답했다. 곱사걸음으로 형경을 찾아간 전광이 말했다.

“ 이 광과 그대가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있음을 연나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소. 오늘 태자가 이 광의 젊은 시절에 대한 소문만을 듣고 내가 이미 늙어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나에게 말하기를 ‘ 연(燕)과 진(秦) 두 나라는 양립할 수 없으니 선생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소. 이 광은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그대를 태자에게 천거했소. 원컨대 그대는 태자궁에 한 반 들르시오. ”

형가가 대답했다.

“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

그러자 전광이 다시 말했다.

“ 내가 들으니 대장부가 일을 행할 때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소. 오늘 태자가 이 광에게 헤어질 때 말하기를 ‘ 오늘 선생과 함께 나눈 이야기는 국가의 대사이니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마시오.’라고 했소. 그것은 태자가 이 광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이오. 무릇 일을 행할 때 다른 사람에게 의심을 품게 함은 협객들의 절의가 아니오.”‘

전광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형가로 하여금 마음을 격노케 할 생각에서 말했다.

“ 그대는 속히 태자를 방문하여 이 광은 이미 죽어 다른 사람에게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시오. ”

전광은 그 즉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이윽고 형가가 태자를 접견하고 전광이 이미 죽고 그가 한 말을 전했다. 태자가 재배를 한 후에 무릎을 꿇은 후에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눈물을 흘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 입을 열어 말했다.

“ 이 단이 전선생과 일을 의논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한 부탁은 대사를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오늘 전선생께서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일이 어찌 이 단의 본심이겠습니까?”

형가가 자리에 앉자 태자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 전광선생께서는 이 단이 불초하다는 사실을 모르시고 그대의 앞으로 나아가 감히 말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으니 이것은 하늘이 연나라를 가엽게 여겨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진나라는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만족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천하의 모든 땅을 영토로 하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신하로 삼기 전까지는 결코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진나라는 지금 한왕을 이미 붙잡아가고 그 땅을 모두 병탄했습니다. 또한 군사를 일으켜 남으로는 초나라를 정벌하고 북으로는 조나라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진나라의 장군 왕전(王翦)은 수십 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여 장수(漳水)와 업성(鄴城)을 사이에 두고 조군과 대치하고 있으며 장군 이신(李信)은 태원(太原)과 운중(雲中)에서 출병하여 조나라의 북쪽 방면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조나라는 결코 진나라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고 결국은 진나라의 신하가 되어 진왕을 받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화는 머지않아 연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연나라는 작고 약하며 군사의 수도 적어 온나라의 장정들을 모아도 결코 진나라의 한 부대도 당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제후들은 모두 진나라에 굴복하여 합종도 감히 행하지 못합니다. 이 단은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비밀스러운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천하의 용사를 구하여 진나라에 사자로 보내 커다란 이익으로 유인한다면 진왕은 탐욕스러운 사람이라 일의 형세는 필시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온 힘을 다하여 진왕을 위협하여 그로 하여금 진나라가 빼앗아간 땅을 제후들에게 돌려주게 한다면 옛날 조말이 제환공을 위협하여 빼앗긴 땅을 찾은 일과 같이 되어 그것은 바로 크게 좋은 일이 되고, 불행히도 그 계획이 불가하게 되어도 진왕을 칼로 찔로 죽이면 그뿐입니다. 진왕이 죽게 되면 진나라의 장군들이 밖에서 자기 멋대로 군사를 부리고 있는 와중에 안에서 란이 일어나게 된다면 진나라의 군신 간에 서로 의심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제후들이 합종을 행한다면 진나라는 필시 깨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이 단이 바라는 가장 큰 소원이나 아직 이 일에 목숨을 맡길만한 사람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형경께서는 이 점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

오랜 침묵 끝에 형가가 입을 열어 말했다.

“ 이것은 나라의 큰 대사라 신은 노둔하여 그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

태자가 형가 앞으로 다가와 머리를 조아리며 사양하지 말기를 간청하자 그때야 형가는 태자의 청을 허락했다. 그래서 태자단은 형가를 상경(上卿)으로 삼고 큰 저택을 주어 머물게 했다. 태자가 매일 집을 방문하여 태뢰(太牢)의 음식을 제공하고 세상의 진기한 물건들을 선물로 주었다. 또한 수레나 말이나 미녀를 포함해서 모든 것들을 형가가 원하면 모두 취하도록 하여 그의 마음을 만족시키려고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접대를 했지만 형가는 아직 길을 떠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진나라 장군 왕전이 조나라를 깨뜨리고 조왕을 포로로 잡아 그 땅을 모두 진나라 영토로 삼은 후에 군사를 계속 북쪽으로 진군시켜 연나라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 태자단이 매우 두려워하여 형가에게 청했다.

“ 진나라 군사들이 조석지간에 역수를 건너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단이 그대를 받들기를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어찌하면 길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

형가가 대답했다.

“ 태자께서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신이 먼저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지금 길을 떠나면 진왕이 믿을 수 있는 신물이 없어 진왕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습니다. 진왕이 번장군의 목에 천금의 황금과 만호의 식읍을 상금으로 걸어 놓고 있습니다. 원컨대 번장군의 목을 얻은 후에 진왕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독항(督亢)17)의 지적도를 가져가 진왕에게 바친다고 한다면 진왕은 틀림없이 신의 접견을 허락할 것이며 그때에는 신은 태자를 위해 원한을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

태자가 말했다.

“ 번장군은 곤공한 처지가 되어 이 단에게 귀의해 왔습니다. 단은 도저히 개인적인 일로 인해 장자의 뜻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원컨대 형경께서는 그 점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태자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형가는 즉시 몰래 번오기를 찾아가 말했다.

“ 장군에 대한 처우를 너무 심하게 한 진나라에 대해 장군의 원한이 매우 깊다고 들었습니다. 부모와 종족들이 모두 장군으로 인하여 멸족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들으니 진나라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장군의 머리에 천금의 황금과 만호의 식읍을 현상금으로 걸었다고 합니다. 장군은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

번오기가 하늘을 쳐다보고 긴 한숨을 쉬더니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 이 번오기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그 원한이 내 골수에 사무쳐 왔으나 어떻게 해야 할 지 그 계책을 알지 못할 뿐입니다. ”

형가가 말했다.

“ 오늘 연나라의 우환을 해결하고 장군의 원수를 갚을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

번오기가 물었다.

“ 어떤 방법입니까? ”

형가가 대답했다.

“ 장군의 머리를 얻어 진왕에게 바치면 진왕은 틀림없이 기뻐하며 나의 접견을 허락할 것입니다. 그때 내가 왼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고 오른 손으로는 칼을 들어 그의 가슴을 찔러 죽인다면 장군의 원수를 갚고 진나라로부터 능욕을 받아 생긴 연나라의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습니다. 장군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

번오기가 한 쪽 어깨를 들어내고 팔을 움켜쥐더니 앞으로 나와 말했다.

“ 경의 말이야말로 내가 매일 밤낮 절치부심하며 듣고 싶었는데 오늘에서야 가르침을 받았소.”

말을 마친 번오기가 즉시 칼로 자기 목을 찔러 죽었다. 태자가 듣고 달려와 시신 위에 엎드려 통곡하며 매우 애통해 했다. 그러나 달리 어쩌는 수가 없어 즉시 번오기의 머리를 베어 상자에 넣고 봉했다.

그 전에 태자는 미리 천하에 예리하기로 이름난 비수를 구하다가 조나라 사람 서부인(徐夫人)이 가지고 있던 비수를 백금의 황금을 주고 사들였다. 공인에게 시켜 독약을 발라 사람에게 시험해 본 결과 겨우 한 오라기의 실날같은 상처를 입었음에도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에 태자단은 행장을 갖추어 형가를 진나라에 보내기로 했다. 연나라에 진무양(秦舞陽)이라는 용사가 있었는데 나이가 13살 때 벌써 살인을 저질러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래서 태자단은 진무양을 부사로 삼았다. 그때 형가는 어떤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사람과 함께 떠나려고 했다. 그 사람은 먼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길을 떠날 행장은 다 준비가 되고 말았다. 이에 출발할 시간이 다 되었음에도 길을 떠나지 않자 태자는 형가가 후회한다고 의심했다. 그래서 형가에게 다시 재촉하는 말을 했다.

“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났음에도 어찌하여 형경께서는 주저하십니까? 제가 말씀드리건대 먼저 진무양을 보내면 어떻습니까? ”

형가가 화를 내며 태자에게 소리쳤다.

“ 어찌하여 태자께서 마음대로 사람을 보낸다 하십니까?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행차인데 어찌 더벅머리 아이놈을 보낸단 말입니까? 한 자루의 비수만을 지닌 체 강포한 진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어떻게 진행될 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제가 이렇게 억지로 출발을 하지 않고 있음은 어떤 사람을 기다려 같이 가고자해서 입니다. 오늘 태자께서 출발을 재촉하시니 청컨대 작별을 고하고 길을 떠나기로 하겠습니다. ”

태자와 빈객들은 일의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흰색의 의관을 차려 입고 송별을 나와 이윽고 역수(易水) 강변에 이르렀다. 로신(路神)에게 제사를 지내 장도를 기원한 후에 길을 떠날 때 고점리(高漸離)가 축을 타자 형가가 곡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변치(變徵)18)의 곡조로 부르는 형가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다시 앞으로 걸어가며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말은 다음과 같았다.

風蕭蕭兮易水寒(풍소소혜역수한)

바람은 소슬하고 역수는 차갑구나

壯士一去兮不復還(장사일거혜불복환)

장사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또 곡조를 우(羽)로 바꿔 부르니 전송 나온 사람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관을 밀어낼 듯이 머리털을 세웠다. 이윽고 형가가 수레에 올라타고 길을 떠났는데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마침내 진나라에 당도한 형가는 천금의 돈과 귀중한 보물을 진왕의 총신인 중서자(中庶子)19) 몽가(蒙嘉)에게 바치자 몽가가 형가를 위해 진왕에게 먼저 말했다.

“ 연왕이 진실로 대왕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감히 군사를 일으켜 우리 군사들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나라를 들어 대왕의 신하가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제후의 대열에 서서 군현이 하는 듯이 조공을 바치면서 선조들의 종묘나 받들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대왕의 위세를 두려워한 연왕은 감히 스스로 자기의 뜻을 개진하지 못하고 삼가 번오기를 참해 그 머리와 독항의 지적도와 함께 상자에 넣고 연왕이 직접 궁정의 뜰에서 절을 올려 증정식을 거행한 후에 사자를 보내 대왕의 뜻을 듣고자 대왕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진왕이 듣고 매우 기뻐하며 조복 차림에 구빈(九賓)의 예20)를 갖추어 연나라 사자를 항양궁에서 접견하기로 했다. 형가가 독항의 지도가 든 함을 든 진무양과 함께 번오기의 머리를 봉한 상자를 받들고 앞뒤에 서서 진왕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계단에 이르자 진무양이 얼굴색을 바꾸며 벌벌 떨자 도열해 있던 진나라의 군신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형가가 무양을 돌아보며 웃으면서 진왕을 향해 말했다. “ 북쪽 변방의 오랑캐 땅에서 천박하게 살던 자라 아직 천자를 본 적이 없어 그 위엄에 놀라 벌벌 떨고 있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 사람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대왕 앞에서 저 사람의 임무를 마치도독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

진왕이 형가에게 말했다.

“ 진무양이 갖고 있는 지도를 받아오라! ”

형가가 지도를 바치자 진왕이 지도를 펼쳤다. 지도가 다 펼쳐지자 숨겨논 비수가 드러났다. 형가가 왼손으로 진왕의 소매를 잡고 오른 손으로 비수를 들어 찔렀으나 미처 진왕의 몸에 못 미쳤다. 진왕이 놀라 자리에 일어나 형가에게 잡힌 소매를 끊고 검을 뽑으려고 했으나 길이가 길어 칼집만 손에 잡혔다. 일이 일 순간에 일어났고 칼은 단단히 칼집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칼을 뽑을 수 없었다. 형가가 진왕의 뒤를 쫓자 진왕은 달아나 기둥 주위를 돌았다. 군신들은 모두 경악하고 일이 갑자기 일어났기 때문에 아무도 어떻게 해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진나라에 법에 따르면 전상에 도열해 있는 군신들은 그 누구도 사소한 병기를 소지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한 전하(殿下)에 무기를 들고 도열해 있던 낭중들은 왕명이 없으면 아무도 오르지 못했다. 사태가 바야흐로 위급한 처지에 있었으나 아무도 군사들을 부를 생각을 못했음으로 형가가 진왕의 뒤를 쫓을 수 있었다. 창졸지간에 상황이 급박했으나 형가를 공격할 아무런 무기가 없었음으로 군신들은 맨 손으로 형가를 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시의 하무저(夏無且)가 들고 있던 약낭(藥囊)을 형가에게 던졌다. 진왕은 기둥 주위를 돌면서 도망치기에 급급할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좌우의 군신들이 외쳤다.

“ 왕께서는 칼집을 거꾸로 돌려 매십시오. ”

진왕이 등뒤의 칼집을 거꾸로 돌려 칼을 뽑아 형가를 내리쳐 그 다리를 잘랐다. 형가가 쓰러지면서 그 비수를 진왕을 향해 던졌으나 빗나가 구리 기둥에 맞았다. 진왕이 다시 형가를 계속 칼로 내리쳐 여덟 군데의 상처를 입혔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안 형가가 기둥에 의지하여 웃으면서 두 다리를 뻗고 앉아 꾸짖어 말했다.

“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은 진왕 너를 생포하여 겁을 준 후에 약속을 얻어내 태자에게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

좌우의 군신들이 형가에게 달려들어 형가를 죽였다.

진왕은 그 후 오랫동안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이어서 논공행상을 행하여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는 상을 주고 죄를 진 자들은 벌을 내려 차등있게 처리했다. 특히 하무저에게는 황금 2백 일을 하사하면서 말했다.

“ 무저는 나를 사랑했음으로 그의 약낭으로 형가를 쳤음이라!”

이윽고 진왕이 대노하여 더 많은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에 보내고 다시 왕전에게 조서를 내려 연나라를 정벌하도로 했다. 왕전의 진나라 군사들은 10월에 계성(薊城)을 함락시켰다. 연왕 희는 태자단 등과 함께 연나라의 모든 정예병들을 이끌고 동쪽의 요동으로 들어가 지키려고 했다. 진나라 장군 이신(李信)이 연왕의 뒤를 긴급히 추격하자 대왕(代王) 가(嘉)가 서신을 보내며 말했다.

“ 진나라가 연나라의 뒤를 급하게 추격하는 이유는 태자단 때문입니다. 오늘 왕께서 진실된 마음으로 단을 죽여 진왕에게 바친다면 진왕은 마음을 풀어 다행히 사직은 보전되어 혈식을 바칠 수 있습니다. ”

이신은 계속 태자단의 뒤를 쫓았으나 단은 해상의 섬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연왕이 다시 사자를 보내 태자단의 목을 베어오게 하여 진왕에게 바쳤다. 진왕은 다시 군사를 진군시켜 연왕을 공격하게 했다. 그 후 5년 만에 진나라는 결국 연나라를 멸하고 연왕 희를 포로로 잡아갔다.

그 다음 해 진나라는 천하를 병탄하고 스스로 황제(皇帝)라고 칭했다. 그리고 진나라는 다시 태자단과 형가의 문객들을 수색하자 그들은 모두 도망쳤다. 고점리는 변성명하여 남의 집 머슴이 되어 송자(宋子)21)에서 일했다. 오랫동안 숨어 일했으나 너무 고되었음으로 주인 집 대청에서 객이 축을 타면 그 주위를 배회하며 떠나지를 못하고 매 번 말하곤 했다.

“ 저 소리는 잘치는군! 저 소리는 잘 못 치는군! ”

종자가 보고 그 주인에게 고했다.

“ 저 머슴이 아마 음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혼자말로 옳고 그른 것을 평하고 있습니다. ”

주인이 고점리를 불러오게 하여 축을 타보도록 했다. 고점리가 단상에 올라 좌정하고 한 번 축을 타자 좌중의 사람들이 그의 솜씨를 칭찬하며 술을 주었다. 그러나 고점리는 오랫동안 숨어사는 생활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비록 두려움에 떨지라도 결코 그 생활을 끝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즉시 자리에서 물러나 상자 속에 숨겨 놓은 축과 좋은 의상을 꺼내어 용모를 바꾸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자리에 일어나 서로 동등하게 예를 나누고 그를 상객으로 삼았다. 고점리가 축을 타고 노래를 부르니 손님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자리를 뜨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송자의 손님들을 그를 돌려가며 손님으로 삼았다. 그 소문이 진시황의 귀에 들어가자 진시황이 불러 접견했다. 그때 고점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곧바로 소리쳤다.

“ 저 사람은 고점리입니다. ”

고점리의 축 타는 솜씨를 아깝게 생각한 진시황은 그를 죽이지 않고 용서했으나 소경으로 만들었다. 고점리의 축 소리를 들을 때마다 진시황은 칭찬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이윽고 진시황과 사이가 가깝게 된 고점리는 어느 날 그의 축 속에 납덩어리를 넣은 뒤에 진시황의 몸에 가깝이 접근하게 되자 축을 들어 진시황을 가격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진시황은 고점리를 주살하고 종신토록 다시는 제후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아무도 곁에 두지 않았다.

형가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 노구천이 말했다.

“ 오호라, 그가 검술에 능숙하지 않았음이 진실로참으로 애석하구나! 내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참으로 심했구나! 옛날 내가 그를 비난 했을 때 그는 나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

   

태사공이 말한다.

“ 세상에 형가의 일 중 태자단의 운명에 대해 말하기를 ‘ 하늘에서 곡식비가 내리고 말 머리에 뿔이 났다.’고 했는데 그것은 너무 지나친 말이다. 또 형가가 진왕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하는 데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공손계공(公孫季公)과 동생(董生)22)이 하무저와 교유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직접 들어 소상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한 이야기를 기록했다.23) 조말로부터 형가에 이르기까지의 다섯 사람은 의기로써 오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세운 뜻은 비교적 명확하고 또한 그들이 마음을 속이지 않아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긴 일을 어찌 망령되었다고 하겠는가?”

< 자격열전 끝 >

주석1)노장공(魯莊公)/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694년부터 662년까지 재위한 노나라 군주다. 희(姬) 성에 이름은 동(同)이다. 기원전 694년 부군 환공(桓公)이 제나라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피살되자 노후의 자리를 이었다. 재위 기간 중 제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공자 규와 소백이 군위를 두고 다툴 때 규를 지원했으나 실패했다. 이어서 제나라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제환공이 된 소백에 의해 압력을 받은 노장공은 공자규를 살해하고 규의 참모였던 관중을 함거에 실어 제나라에 송환했다. 재위 13년 기원전 681년 조귀(曹劌)의 계책으로 제나라 군사를 장작(長勺)에서 대파했다. 기원전 681년 제환공과 지금의 산동성 양곡(陽谷)의 가(柯) 땅에서 회맹할 때 대동한 조말(曹沫)이 제환공을 칼로써 위협하여 제나라에 빼앗겼던 노나라 땅을 돌려받았다. 32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

2) 수읍(遂邑)/ 지금의 산동성 비성(肥城)으로 춘추 때 제후국이었으나 주희왕(周僖王) 원넌 기원년 681년 제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 노장공이 수읍을 제나라에 바쳐 강화를 맺었다는 ‘乃獻遂邑之地以和’는 제태공세가나 본 자객열전의 기사는 사마천의 착오다. <사기지의(史記志疑)에 의하면 제환공 5년은 노장공 13년으로, 제환공이 북행(北杏)에서 회맹을 소집했으나 불참한 수(遂)나라를 제환공이 멸해 수나라는 노나라와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했다.

3)제환공과 노장공이 가(柯) 땅에서 회맹에서 조말이 제환공을 위협하여 빼앗긴 땅을 찾은 해는 기원전 681년의 일이고 오나라의 자객 전제가 오왕 료(僚)를 암살한 해는 기원전 541년이다.

4)당읍(堂邑)/ 지금의 강소성 육합(六合) 경내로 남경의 장강 북안이다.

5)초평왕이 죽은 해는 오왕 요 11년으로 기원전 516년이고 합려가 오왕 요를 전제를 시켜 살해한 해는 그 다음 해인 기원전 515년의 일이다. 오왕 9년은 사마천의 착오다.

6)골경지신(骨鯁之臣)/ 강직하여 임금의 허물을 직간하는 충직한 신하를 말한다. 경(鯁)은 생선뼈를 말한다.

7) 士爲知己者死,女爲說己者容

8)지(軹)/ 전국 때 한나라와 국경을 접한 위(魏)나라의 성읍으로 지금의 하남성 제원현(濟源縣)이다.

9) 한애후(韓哀侯)/ 기원전 376년에 즉위하여 371년에 죽은 전국 때 한나라 군주다. 즉위년에 조(趙)와 위(魏) 등과 함께 진(晉)나라를 멸하고 삼분했다. 다음 해인 기원전 375년 정나라를 멸하고 그 수도를 신정(新鄭)으로 옮겼다. 재위 6년 만에 한나라 귀족 출신의 한엄(韓嚴)에게 살해되고 그의 아들 의후(懿侯)가 뒤를 이었다.

10)협루(俠累)/ 위(衛)나라 복양(濮陽) 사람으로 한(韓) 씨에 이름은 괴(傀)다. 일찍이 친구이며 부자인 엄수(嚴遂)의 도움으로 한나라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후에 협루가 엄수를 박대했다. 이에 한열후(韓烈侯) 3년 기원전 376년 분노한 엄수에 의해 고용된 자객 섭정(聶政)에 의해 살해되었다.

11)일(鎰)/ 춘추전국시대 때 한 일은 20량 혹은 24량이고 한 량은 16그람임으로 320그람 혹은 384그람임. 즉 황금 백 일은 32키로 혹은 38키로에 해당하는 중량임.

12) 위원군(衛元君)/ 전국 말 위(衛)나라 군주로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52년 즉위하여 기원전 230년 죽었다. 위회군(衛懷君)의 동생으로 위나라가 조현을 드리러 방문한 회군을 억류시키고 그를 위나라 군주로 앉혔다. 재위 기간 중 국세는 더욱 쇠약해져 진(秦)나라의 도움으로 간신히 나라를 유지했다. 기원전 241년 제구(帝丘)에서 야왕으로 나라를 옮겨 진나라의 부용(附庸)이 되었다.

13) 동군(東郡)/ 기원전 242년 진나라가 위나라 동쪽에 있던 땅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그 땅에 설치한 군으로 후에 위(衛)나라의 령이었던 복양(濮陽) 일대를 포함시켰다. 이로써 진나라는 중원의 중앙부를 장악하여 산동 6국의 합종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었다. 관할은 산동 동아(東阿), 양산(梁山) 이서, 정도(定陶), 성무(成武) 이북, 하남성 연진(延津), 청풍(淸風) 이남, 장원(長垣) 이북이다.

14) 유차(楡次)/ 전국 때 조나라 땅으로 지금의 산서성 유차현(楡次縣)이다.

15) 박(博)/ 올빼미(梟 : 효), 사냥개(盧 : 노), 꿩(雉 : 치), 송아지(犢 : 두), 주사위(塞 : 색) 등의 다섯 가지 모양을 나무로 깎아 장기와 흡사하게 행마를 하며 노는 놀이이나 자세한 행마법과 은 실전되어 알 수 없다.

16) 번오기(樊於期)/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27년에 죽은 전국 말 진나라 장수다. 진시황에게 반기를 들어 란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연나라로 도망쳐 태자단(太子丹)에게 몸을 의탁했다. 진시황이 진나라에 남아있던 그의 부모와 처 및 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목에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잡으려고 했으며 그가 연나라로 도망갔다는 것을 알자 대군을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했다. 형가(荊軻)가 태자단에게 진왕을 암살하기 위해서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려면 번오기의 목과 독항의 지적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자단이 번오기를 차마 죽일 수 없다고 말하자 형가가 은밀히 번오기를 만나 진왕을 죽이기 위해서는 그의 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번오기는 형가의 말을 듣고 스스로 자기의 목을 베어 죽었다. 형가가 번오기의 목과 비수가 감쳐진 독항의 지적도를 가지고 진왕을 배알하다가 찔러 죽이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17)독항(督亢)/ 지금의 하북성 탁현(𣵠縣)과 고안현(固安縣) 일대의 땅이다.

18) 변치(變徵)/ 중국 고대 음조는 궁(宮), 상(商), 각(角), 변치(變徵) 치(徵), 우(羽), 변궁(變宮)의 7조로 서양의 C, D, E, F, G, A, B 등의 음조에 해당한다. 변치(變徵)는 F조에 해당한다.

19) 중서자(中庶子)/ 주나라 때 서자(庶子)라는 관제로 주로 제후와 경대부(卿大夫)들의 서자들의 계율과 교리(敎理)를 관장했다. 나라에 일이 있을 때 그들은 모두 태자에게 귀속되어 그 지시를 받았다. 전국 때 각 제후국들은 이를 본 땨 중서자라는 관제를 만들어 운용했다.

20)구빈지례(九賓之禮)/ ① 천자가 외국이나 제후의 나라에서 보내온 사자를 맞이할 때 구빈에 해당하는 모든 관원들이 참석하여 행하는 가장 성대한 의례식. 구빈(九賓)이란 공(公), 후(侯), 백(伯),자(子), 남(男), 고(孤), 대부(大夫), 사(士)를 말한다. ② 구헌례(九獻禮)라고도 하며 고대에 있어서 국가간의 외교상 가장 성대한 의식이다. 9명의 영접관이 구주의 이름 순서에 의해 도열했다가 호명하면 차례대로 나와 사자를 전당으로 인도했다.

21) 송자(宋子)/ 지금의 하북성 조현(趙縣) 동북으로 전국 때 조나라 땅이다.

22)동중서(董仲舒)/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9년에 태어나서 104년에 죽은 중국 전한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로 하북성 신도국(信都國) 광천현(廣川縣) 출신이다. 한나라 초기의 사상계가 제자백가의 설로 혼란하고 유교가 쇠퇴하였을 때 도가의 설을 물리치고 유교를 서한의 통치철학으로 삼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무제를 섬겨 총애를 받아 유교를 채용하고 교육 행정으로 공헌하였다.

23)형가에 의한 진시황 암살사건은 기원전 227년에 일어났다. 그리고 동중서는 기원전 179년에 태어났고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생이다. 형가사건과 사마천이 사기를 지은 해수는 100여 년 시차가 있지만 동중서와 공손계공이 사건의 직접 목격자인 하무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사마천에게 전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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