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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임안서(報任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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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보임안서(報任安書)

- 임안(任安)의 편지에 보낸 답장-


《임안에게 보내는 답장[보임안서(報任安書)]》은 사마천(司馬遷)이 한무제(漢武帝)와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 사이에 벌어진 내전(內戰)에 연루되어 얻은 죄로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임안(任安)에게 보낸 서신이다.

임안은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출신에 자는 소경(少卿)으로 한무제 밑에서 익주자사(益州刺史)와 북군사자호군(北軍使者護軍)이 되었다. 임안에 대해서는 후한의 저소손(褚少孫)이 그의 행적에 대해 보찬(輔贊)해서《사기·전숙열전(田叔列傳)》의 말미에 붙였다. 평소에 사마천과 교유가 있었던 임안이 익주자사 시절 치욕스러운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된 사마천에게 황제를 곁에서 시종하면서 현인을 천거하라고 편지를 보내 조언했다. 궁형을 받아 선비들이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했던 환관의 신분으로 전락한 사마천에게는 임안의 편지는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을 찔렀다.

분만(憤懣)한 마음을 가슴에 묻어두고 《사기》의 저술에 몰두하던 중, 한무제 정화(征和) 2년 기원전 91년, 무고(巫蠱)의 란이 일어났다. 감천궁에 기거하던 무제가 병이 들자 총신 강충(江充)이 그 병은 무고(巫蠱)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신에 미혹된 무제는 강충에게 무고의 옥사를 다스리게 했다. 대대적인 옥사를 일으킨 강충은 경사와 군국의 수만 명을 연루시켜 살해했다. 강충은 한술 더 떠서 평소에 자기와 사이가 나쁜 태자를 모함하여 제거하기 위해 무당 호무(胡巫)를 시켜 궁중에 무고의 기운이 있다고 고하게 했다. 무제는 강충과 안도후(安道侯) 한열(韓說)과 함께 궁궐에 들어가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명했다. 강충은 무제에게 태자궁의 땅 밑에서 목우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고했다. 그해 7월 꼼짝없이 함정에 빠진 태자가 동궁의 위병을 동원하여 강충 일당을 살해하고 란을 일으켰다. 한무제가 승상 유굴리(劉屈釐)에게 명해 군사를 동원하여 태자를 공격하도록 했다. 황제와 태자의 군대가 5일 간을 계속해서 싸워 싸움 중에 죽은 자가 다시 수만 명에 달했다. 싸움에서 진 태자는 성을 나가 호현(胡縣) 천구리(泉鳩里)의 민가에 숨었으나 얼마 후에 관군에게 발각되어 포위당한 끝에 자살하고 말았다. 그때 북군사자호군(北軍使者護軍)이 되어 황제의 명을 받아 특파되어 북군(北軍)을 장악하고 있었던 임안은 군사를 내어 자신을 도우라는 태자의 명을 거부하고 성문을 닫고 움직이지 않았으나 한무제는 그의 행동이 성패의 결과를 보려는 두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요참형을 언도했다. 당시 임안이 장악하고 있었던 북군(北軍)은 장안성의 경비를 맡고 있었던 지금의 말하면 수도경비사령부에 해당했다.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고 있던 임안에게 사마천은 옛날 그의 편지에 대해 쓴 답장이 다음의『보임안서(報任安書)』이다. 그는 자신이 치욕적인 궁형을 받고서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는 부친의 유명을 받아 저술하고 있던 사기의 완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죽기 전의 임안에게 알려 그이 오해를 풀어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쓴 편지다.

사마천자서의 후속편에 해당한다는 뜻에서 대역 번호를 계속했다.




1456. 遷既被刑之後

사마천이 궁형을 받고 얼마 후에


1457. 爲中書令

중서령이 되어


▶ 중서령(中書令) : 중국 고대의 관직이름이다. 처음에는 궁중에 머물면서 황제에게 직접 상소하는 밀주(密奏)의 봉사(封事)를 담당했다. 봉사는 상소문을 밀봉하여 직접 군주에게 바치는 의견서이다. 서한 시기의 중서령은 궁중의 환관기구에 속해 황제 전용의 서고를 정리하는 일을 맡아 황제와 빈번하게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사마천은 중년 이후에 뛰어난 학식으로 인해 태사공의 신분으로 중서령의 직을 겸임했다.


1458. 尊寵任職(존총임직).

총애를 받들어 직책을 맡았다.


1459. 故人益州刺史任安予遷書(고인익주자사임안여천서)

옛날 익주자사(益州刺史) 임안(任安)이 사마천에게 편지를 보내


1460. 責以古賢臣之義(책이고현신지의).

옛날 어진 신하의 도리를 들어 책했음으로


1461. 遷報之曰(천보지일)

이에 사마천은 답장을 써서 보냈다.



1462. 司馬遷再拜言少卿足下(사마천재배언소경족하)

사마천이 삼가 소경 족하께 재배를 올리며 말씀드립니다.


1463. 曩者辱賜書(낭자욕사서)

지난번 보내 주신 편지에서


1464. 教以慎於接物(교이신어접물)

가르침을 주시기를 사람을 대하는데 신중하고


1465. 推賢進士爲務(추현진사위무)

유능한 인재들을 추천하는 일을 책무로 여기라고 하셨는데


1466. 意氣勤勤懇懇(의기근근간간)

말씀하시는 뜻이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1467. 若望僕不相師用(약망복불상사용)

아마도 나무라신 까닭은 제가 소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1468. 而流俗人之言(이유속인지언).

속된 사람들의 말에 따른다고 생각하신 듯 합니다만


1469. 僕非敢如是也(복비감여시야)

저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470. 雖罷駑(수파노)

제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1471. 亦嘗側聞長者遺風矣(역상측문장자유풍의)

장자의 유풍에 대해 얻어 들은 바가 있습니다.


1472. 顧自以爲身殘處穢(고자이위신처예)

그러나 돌이켜보면 제 스스로는 궁형을 당한 비천한 몸으로 홀대를 받는 처지여서


1473. 動而見尤(동이견우)

움직이기만 하면 허물을 입고


1473. 欲益反損(욕익반손)

더 나아지려하나 도리어 그르치고 맙니다.


1474. 是以抑鬱而無誰語(시이억울이무수어).

이래서 홀로 울적해 있을뿐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1475. 諺曰(언왈)

속담에 이르기를


1476. 誰爲爲之(수위위지)

“누구를 위해 연주하고


1477. 孰令聽之(수영청지)?

또 누구로 하여금 듣게 하나?”라고 했습니다.


1478. 蓋鍾子期死(개종자기사)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1479. 伯牙終身不復鼓琴(백아종신불복고금)

백아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금을 타지 않았습니다.


▶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 : 춘추시대 전설적인 금(琴)의 대가들이다. 진(晉)나라 대부 백아(伯牙)가 깊은 산에 들어가 금을 타는데 지나가던 초부(樵夫)가 듣고 “훌륭하도다, 태산같이 높고 높도다!”라고 말했다. 다시 금을 타자 “훌륭하도다, 마치 흐르는 물이 넘쳐흐르는 듯 하도다!”라고 감탄했다. 초부의 이름은 종자기(鍾子期)로 나무를 해서 먹고사는 촌부였으나 백아의 음악을 알아볼 수 있는 대가였다. 두 사람이 헤어져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백아가 종자기가 사는 곳을 찾아와 만나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죽고 없었다. 이에 금을 부셔버린 백아가 한탄하면서 말했다. “내 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죽었으니 앞으로 누구를 위해 금을 타겠는가?”하고는 그 후로는 금을 타지 않았다고 했다. 마음이 통하는 친한 벗이라는 뜻의 ‘지음(知音)’이라는 성어의 전고가 되었다.


1480. 何則(하즉)?

왜 그랬었겠습니까?


1481. 士爲知已用(사위지기용)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쓰이고


1482. 女爲說己容(여위열기용).

여자는 자기를 이뻐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합니다.


1483. 若僕大質已虧缺(약복대질익휴결)

저와같이 온 몸이 망가진 사람은


1484. 雖才懷隨和(수재회수화)

비록 제가 수주(隨珠)나 화씨벽(和氏璧)처럼 뛰어난 재주를 가슴에 품고 있다 하더라도


▶ 수주(隨珠) : 수후지주(隨侯之珠)의 약어로 춘추 때 호북성 수주시(隨州市) 일대에 있어던 제후국 수(隨)나라의 군주가 소유했던 보물이다. 《회남자(淮南子)》에 의하면 수나라의 군주가 놀이를 나가다가 길위에 한 마리의 커더란 뱀이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이를 불쌍히 여긴 수후가 사람을 시켜 상처에 약을 바르고 천으로 싸매준 다음 풀밭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상처가 아문 뱀이 한 개의 구슬을 입에 물고 수후가 사는 곳으로 찾아와 말했다. “ 나는 곧 동해 용왕의 아들인데 군주께서 저의 생명을 구해 준 은혜에 감격하여 이렇게 특별히 와서 보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후지벽은 신령스러운 뱀이 물어다 분 구슬이라는 뜻의 영사지주(靈蛇之珠)라고도 한다.

▶화씨벽(華氏壁) : 춘추시대에 변화(卞和)라는 초나라 사람이 형산(荊山)에서 옥돌을 얻어 초려왕(楚厲王)에게 바쳤다. 려왕이 옥공(玉工)을 불러 감정해보게 했으나 옥공이 “ 쓸모 없는 돌에 불과할 뿐입니다.”라고 말하자 려왕이 크게 화를 내며 변화가 임금을 기만했다는 죄명으로 그의 왼쪽 발을 잘랐다. 려왕이 죽고 초무왕(楚武王)이 서자 변화가 다시 옥돌을 초왕에게 바쳤다. 옥공이 다시 옥돌을 돌덩이라고 무왕에게 고했다. 무왕도 역시 크게 노하여 변화의 오른쪽 발마저 잘랐다. 이어서 무왕이 죽고 초문왕(楚文王)이 즉위하자 다시 옥돌을 초왕에게 바치려 했지만 두 다리가 모두 잘려 걸을 수가 없어 옥돌을 가슴에 품고 형산(荊山) 밑에서 사일 밤낮을 피눈물이 나올 때까지 쉬지 않고 통곡하였다. 초나라의 어떤 사람이 변화가 당한 일을 알고 찾아가 말했다.

“그대는 두 번이나 돌맹이를 옥이라고 하면서 바쳐 두 다리를 잘렸으니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대가 혹시나 아직도 상을 바라고 옥돌을 다시 바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그렇게 구슬피 울고 있는가?”

변화가 대답했다.

“ 내가 이렇게 슬피 우는 것은 상을 받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한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본래 좋은 옥이 오히려 아무 쓸모 없는 돌맹이라고 판정되어 그것은 마치 올곧은 선비를 잘못된 선비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시비가 거꾸로 되었음에도 스스로 밝힐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이를 슬퍼하여 울고 있는 것입니다.”

초문왕이 변화가 통곡하며 울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옥돌을 가져오게 하여 옥공(玉工)을 불러 그 겉을 걷어내게 하자 과연 흠집이 하나도 없는 아름다운 옥을 얻게 되었다. 문왕이 옥공에게 명하여 벽옥(璧玉)으로 만들게 하고 이름을 화씨벽(華氏壁)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오늘도 양양부(襄陽府) 관하 남장현(南漳縣)에 있는 형산(荊山)의 산정에 연못이 있는데 그 한쪽 켠에 포옥암(抱玉岩)이라는 석실이 있다. 그 석실이 바로 변화가 머무르면서 옥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던 곳이다. 초문왕이 변화의 지성에 감동하여 그에게 대부에 준하는 봉록을 내려 여생을 편하게 살게 하였다.


1485. 行若由夷(행약유이)

또는 행실이 허유(許由)나 백이(伯夷)처럼 고결하더라도


1486.終不可以爲榮(종불가이위영)

결코 영예를 누릴 수 없고


1487. 適足以發笑(적족이발소)

오히려 사람들에게서 비웃음을 당하거나


1488. 而自點耳(이자점이)

오히려 스스를 더럽히게 될뿐입니다.


1489. 書辭宜答(서사의답)

보내주신 편지에 답장을 했어야 했지만


1490. 會東從上來(회동종상래)

마침 동쪽의 땅으로 금상폐하를 따라가야 했고


1491.又迫賤事(우박천사)

또 자질구레한 일에 바빴습니다.


1492. 相見日淺(상견일천)

당신과 만나볼 기회가 많지도 않고


1493. 卒卒無須臾之間(졸졸무수수지간)

너무나 바쁜 탓에 잠시나마도 시간을 갖고


1494. 得竭指意(득갈지의)

저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1495. 今少卿抱不測之罪(금소경포불측지죄)

지금 소경께서는 생사를 알 수 없는 죄를 지으신 지


1496. 涉旬月(섭순월)

한 달이 지났고


1497. 迫季冬(박계동)

형을 집행하는 12월이 임박하였습니다,


1498. 僕又薄從上上雍(복우박종상상옹)

저는 또한 금상폐하를 좇아 옹(雍)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1499. 恐卒然不可諱(공졸연불가휘)

그 사이에 당신께서 혹시라도 갑작스럽게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을 당하시고


1500. 是僕終已不得舒憤懣以曉左右(시복종이부득서분만이효좌우)

이로 인해 저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고민을 좌우에게 알리지 못한 채


1501. 則長逝者魂魄私恨無窮(즉장서자혼백사한무궁)。

당신의 혼백이 멀리 가버리면 저의 여한은 끝이 없을 겁니다.


1502. 請略陳固陋(청량진고루)。

저의 고루한 생각을 대략이나마 말씀드리고자 하니


1503. 闕然不報(궐연부보),

오랫동안 답장 올리지 못하였다고


1504. 幸勿過(행물과)。

나무라지는 마십시오.


1505. 僕聞之(복문지)

제가 듣기에


1506. 修身者智之府也(수신자지지부야)

자신의 몸을 수양하는 것은 지혜(智慧)의 징표이며,


1507. 愛施者仁之端也(애시자인지단야)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仁)의 실마리이며,


1508. 取予者義之符也(취여자의지부야)

주고 받는 행위에는 의(義)가 드러나며


1509. 恥辱者勇之決也(치용자용지결야)

치욕을 당하면 용기를 내어 결단할 수 있고


1510. 立名者行之極也(입명자행지극야)

명성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행동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했습니다.


1511. 士有此五者(사유차오자)

선비는 이 다섯 가지가 있어야


1512. 然後可以托於世(연후가이탁어세)

세상에 몸을 맡길 수 있고


1513. 列於君子之林矣(열어군자지림의)

군자의 무리에 낄 수 있습니다.


1514. 故禍莫憯於欲利(고화막참어욕리)

그러므로 이(利)를 탐하는 것보다 더 참혹한 화(禍)는 없으며


1515. 悲莫痛於傷心(비막통어상심)

마음을 상하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슬픔은 없고


1516. 行莫醜於辱先(행막추어욕선)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행위는 없으며


1517. 而詬莫大於宮刑(이후막대어궁형)。

궁형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습니다.


1518. 刑餘之人(형여지인)

형을 받은 사람이


1519. 無所比數(무소비수)

보통 사람과 비교될 수 없는 것은


1520. 非一也(비일야)

한 세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1521. 所從來遠矣(소종래원의)!

오래 전부터 그렇게 해 왔습니다.


1522. 昔衛靈公與雍渠載(석위영공여옹거재)

옛날 위영공(衛靈公)과 환관인 옹거(雍渠)가 수레를 함께 타자


1523. 孔子適陳(공자적진)

공자는 그곳을 떠나 진(陳) 나라로 갔습니다.


▶ 공자세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공자가 위나라에 돌아와 머문 지 한 달여가 되었을 때, 영공이 남자와 같은 수레를 타고 환관(宦官) 옹거(雍渠)를 시자(侍者)로 태워 궁문을 나섰다. 영공이 공자를 다른 수레에 타게 하고 뒤따르게 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며 시내를 지나갔다. 공자가 보고 한탄했다.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마치 색을 좋아하는 것처럼 하는 자를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공자가 위영공의 행동에 실망하여 위나라를 떠나 조(曹)나라로 갔다.』


1524. 商鞅因景監見(상앙인경감현)

상앙이 경감(境監)의 주선으로 군주를 알현하자


1525. 趙良寒心(조량한심)

조량(趙良)이 한심하게 여겼고


▶진효공(秦孝公)이 천하에 인재를 구하자 당시 위(魏)나라의 상국 공숙좌(公叔座) 밑에서 하급직인 중서자(中庶子) 벼슬을 하고 있었던 상앙(商鞅)이 알고 진나라로 들어가 효공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환관 경감(景監)을 통해 효공에게 변법을 유세하여 중용되었다. 상앙이 시행한 변법은 진나라의 국력을 획기적으로 신장시켜 중국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후에 전국 때 명사인 조량은 상앙이 환관 경감(景監)의 천거로 중용된 방법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상앙의 변법으로 해를 입게 된 귀족과 외척이 노리고 있음으로 그에게 은퇴를 하라고 종용했으나 상앙은 듣지 않았다. 진효공이 죽고 진혜공이 서자 조량의 예상대로 상앙은 반역죄로 체포되어 거열형에 처해졌다.


1526. 同子參乘(동자참승)

동자(同子) 조담(趙談)이 한문제(漢文帝)의 수레를 함께 타자


1527. 爰絲變色(원사변색)

원사(袁絲)의 안색이 변했습니다.


▶《원앙조조열전(袁盎晁錯列傳)》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한문제 때 조담(趙談)이라는 환관이 황제에게 총애를 받아 항상 원앙을 해치려고 했기 때문에 원앙이 근심했다. 원앙의 형 아들에 원종(袁種)이라는 조카가 있었다. 그는 상시기(常侍騎)로 부절을 지니고 항상 황제의 곁에서 시종했다. 원종이 숙부 원앙에게 발했다.

“숙부께서는 조정에서 그와 싸워 욕을 보이시어 그를 황제에게 멀리 떼어나 비방하는 바를 물리치게 하십시오.”

이윽고 황제가 출타하자 조담이 어가에 참승(驂乘)으로 동승했다. 원앙이 황제가 지나가는 길 앞에서 숨어있다가 일어나 황제에게 말했다.

“신이 듣기에 높이가 6자 높이의 어가를 함께 타는 참승은 모두 천하의 호걸이나 영웅이었습니다. 지금 비록 한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나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유독 형벌을 받아 신체의 부위를 훼손당한 자를 태우고 다니십니까?”

그러자 황제가 웃으면서 조담을 어가에서 내리게 하자 조담은 눈물을 흘리며 수레에서 내렸다.』

동자(同子)는 사마천이 부친 담(談)의 이름을 휘해서 조담의 이름으로 사용했고 사(絲)는 원앙(袁盎)의 자이다.


1528. 自古而恥之(자고이치지)。

이처럼 예로부터 이런 일은 사람들이 치욕으로 여겼습니다.


1529. 夫中材之人(부중재지인)

무릇 재주가 중간 정도 되는 보통사람들도

1530. 事關於宦豎(사관어환수)

일이 환관과 관련되면


1531. 莫不傷氣(막불상기)

기가 상하지 않음이 없다고 여기는데


1532. 況忼慨之士乎(항강개지사호)!

하물며 강개한 선비야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1533. 如今朝雖乏人(여금조수핍인)

지금 조정에 아무리 인재가 모자란다고 한들


1534. 奈何令刀鋸之餘(나하영도거지여)

어찌 저같이 칼과 톱으로 형을 받은 사람이


1535. 薦天下豪雋哉(천천하호준재)!

호걸이나 영특한 인사들을 천거할 수 있겠습니까.


1536. 僕賴先人緒業(복뢰선인서업)

저는 선친의 유업으로 인해


1537. 得待罪輦轂下(득대죄연곡하)

군주의 수레바퀴 밑에서 대죄한지


1538. 二十餘年矣(이십여년의)。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1539. 所以自惟(소이자유)

그래서 스스로 생각컨대,


1540. 上之(상지)

위로는


1541. 不能納忠效信(불능납충효신)

충성과 신의를 다해


1542. 有奇策材力之譽(유기책재력지예)

훌륭한 계책을 세워 재능이 있다는 명예를 얻어도


1543. 自結明主(자결명주)

밝은 군주와 맺을 수 없습니다.


1549. 次之(차지)

다음으로 또


1550. 又不能拾遺補闕(우불능습유보궐)

정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결여된 것을 메우며


1551. 招賢進能(초현진능)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천거하거나


1552. 顯岩穴之士(현암혈지사)

초야에 숨어있는 선비를 조정에 드러나게 할 수도 없습니다.


1553. 外之(외지)

밖으로는


1554. 不能備行伍(불능비행오)

군대의 행진 대오에 참여하여


1555. 攻城野戰(공성야전)

성을 공격하며 들에서 싸워


1556. 有斬將搴旗之功(유참장건기지공)

적장의 목을 베고 기를 빼앗는 공로도 세울 수 없습니다.


1557. 下之(하지)

아래로는


1558. 不能累日積勞(불능누일적로)

오랫동안 공을 쌓아서

1559. 取尊官厚祿(취존관후록)

높은 관직이나 두터운 봉록을 얻어


1560. 以爲宗族交遊光寵(이위종족교유광총)。

친척이나 벗들에게 영광과 은총을 입게 할 수도 없습니다.


1561. 四者無一遂(사자무일수)

저는 이 네 가지 중에서 하나도 성취하지 못하고


1562. 苟合取容(구합취용)

구차하게 의견 맞추기에만 급급하고 주상의 용납만을 추구했으니


1563. 無所短長之效(무소단장지효)

크거나 작거나를 고사하고 아무런 공적을 세우지 못했음이

1564. 可見如此矣(가견여차의)

이와 같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65. 嚮者亦嘗廁下大夫之列(향자역상측하대부지열)

이전에 저는 외람되게 하대부의 대열에 끼어


1566. 陪外廷末議(배외정미의)。

외정(外廷)을 배행(陪行)하여 말단에서나마 조정회의에 참여했습니다.


1567. 不以此時引維綱(불이차시인유강)

그때 올바른 기강을 이끌어 내지도


1568. 盡思慮(진사려)

사려(思慮)를 다하지도 못하고


1569. 今已虧形爲掃除之隸(금이휴형위소제지예)

지금 이지러진 몸으로 청소나 하는 노예처럼


1570. 在闒茸之中(재탑용지중)

천한 사람에 속하게 되었는데


1571. 乃欲卬首伸眉(내욕앙수신미)

이제서야 머리를 들고 눈썹을 펴면서


1572. 論列是非(논열시비)

시비를 논하는 것은


1573. 不亦輕朝廷(불역경조정)

조정을 가벼이 여기고


1574. 羞當世之士邪(수당세지사야)!

당대의 선비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575. 嗟乎嗟乎(차호차호)

아아!


1576. 如僕(여복)

저와 같은 인간이


1577. 尚何言哉,尚何言哉(상하언재,상하언재)!

이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1578. 此事本末(차사본말)

게다가 일의 본말은


1579. 未易明也(미역명야)

쉽게 밝혀지지 않는 법입니다.


1580. 羈之才(기지재)

저도 젊었을 때에는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을만한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자부했으나


1581. 長無鄉曲之譽(장무향곡지예)

장성하고 난 후로는 고향에서조차 칭찬을 받은 일이 없었습니다.


1582. 主上幸以先人之故(주상행이선지고)

주상께서 다행하게도 태사령이셨던 선친의 연고로


1583. 使得奉薄技(사득봉박기)

저의 얕은 재주로나마 받들 수 있게 해주셔서


1584. 出入周衛之中(출입주위지중)。

궁궐을 드나들 수 있게 하셨습니다.


1585, 僕以爲戴盆何以望天(복이위대분하이망천)

저는 그릇을 머리에 인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없다고 여겨


1586. 故絕賓客之知(고절빈객지지)

손님과의 왕래도 끊고


1587. 忘室家之業(망실가지업)

집안일도 잊어버렸습니다.


1588. 日夜思竭其不肖之材力(일야사갈기불초지재력)

밤낮으로 불초한 재주이지만 힘을 다하고


1589. 務壹心營職(무일심영직)

한마음으로 직무에 힘써


1590. 以求親媚於主上(이구친미어주상)。

주상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1591. 而事乃有大謬不然者(이사내유대류불연자)。

일이 크게 잘못되어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1592. 夫僕與李陵俱居門下(부복여이릉구거문하)

저와 이릉(李陵)은 같은 부서에서 관리생활을 했지만


1593. 素非相善也(소비상선야)

평소에 친밀하지는 않았습니다.


1594. 趣舍異路(취사이로)

취향이 서로 달라


1595. 未嘗銜杯酒接殷勤之歡(미상함배주접은근지환)。

함께 술을 마신 적도 없고 친밀한 교제의 즐거움도 나눈 적도 없었습니다.


1596. 然僕觀其爲人(연복관기위인)

그러나 제가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1597. 自奇士事親孝(자기사사친효)

선비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고 부모를 효성으로 모시며


1598. 與士信(여사신)

선비들과는 신의로 사귀고


1599 臨財廉(임재렴)

재물에는 청렴하며


1600. 取予義(취여의)

주고받는 데는 의롭고


1601. 分別有讓(분별유양)

분별함과 겸양한 자세로


1602. 恭儉下人(공검하인)

공손한 자세와 근검한 신조로 남에게 몸을 낮추었습니다.


1603. 常思奮不顧身以徇國家之急(상사분불고신이순국가지급)。

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분발하여 나라의 위급함에 몸을 바칠 생각을 늘 하고 있었습니다.


1604 其素所畜積也(기소소축적야)

그가 평소 쌓아 둔 바를 보면,


1605. 僕以爲有國士之風(복이위유국사지풍)。

나라의 큰 선비로서의 기풍이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1606. 夫人臣出萬死不顧一生之計(부인신출만사불고)

무릇 신하된 자는 만 번의 죽음을 돌보지 않고 일생의 계략을 내어


1607. 赴公家之難(조공가지난)

조정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야말로


1608. 斯以奇矣(사이기의)

비로소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04. 今擧事一不當(금거사일부당)

지금 일을 하다가 하나만 부당하다고 해도


1605. 而全軀保妻子之臣(이전구봋자지신)

자신과 처자식만 보전하기에 급급할 뿐인 신하들이


1606. 隨而媒孽其短(수이매얼기단)

서로 따르며 그 잘못을 지어내어 모해하니


1607. 僕誠私心痛之(복성사심통지)!

저는 진실로 마음속에 통분했습니다.


1608. 且李陵提步卒不滿五千(차이릉제보줄불만오천)

또 이릉은 5천 명도 채 되지 않는 보병을 거느리고


1609. 深踐戎馬之地(심천융마지지)

적진 깊숙이 들어가


1610. 足曆王庭(족력왕정)

흉노의 왕궁까지 밟았으니


1611. 垂餌虎口(수이호구)

이는 호랑이 입에 먹이를 늘어뜨린 것과 같아


1612. 橫挑強胡(횡도강호)

강한 흉노의 군사에게 마구 도전한 결과


1613. 卬億萬之師(앙억만지사)

그들의 수 만 군대와 맞서


1614. 與單於連戰十餘日(여단어연전십여일)

선우와 더불어 10여 일을 쉬지 않고 계속 싸워


1615. 所殺過當(소살과당)。

죽인 자는 반이 넘었고


1616. 虜救死扶傷不給(노구사부상불급).

오랑캐는 사상자를 구조하려 오지도 못했습니다.


1617. 旃裘之君長鹹震怖(전구지군장함진포)

이에 털옷을 입은 흉노의 군장(君長)들이 모두 두려워 떨며


1618. 乃悉征左右賢王(내슬정좌우)

좌우의 현왕(賢王)을 소집하고


1619. 舉引弓之民(거인궁지민)

궁수들을 모두 불러내어


1620. 一國共攻而圍之(일국공공이위지)。

온 나라가 함께 이릉의 군대를 포위하여 공격했습니다.


1621. 轉鬥千里(전투천리)

아군은 천리를 이동하면서 싸우다


1622. 矢盡道窮(시진도궁)

화살이 다 떨어져 막다른 길에 이르렀으나


1623. 救兵不至(구병부지)

구원병은 이르지 않고


1624. 士卒死傷如積(사졸사상여적)。

사졸의 사상자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1625. 然李陵一呼勞軍(연이릉일호로군)

그러나 이릉이 한 번 외쳐 군사들을 위로하자


1626. 士無不起(사무불기)

모두 하나같이 지친 몸을 떨치고 일어나


1627. 躬自流涕(궁자유체)

분기하여 저절로 감격해 눈물을 흘리지 않는 군사가 없었습니다


1628. 沫血飲泣(말혈음읍)

피로 얼굴을 씻고 눈물을 삼키며


1629. 更張空弮冒白刃(경장공환모백인)

다시 맨주먹을 불끈 쥐고 칼날을 무릅쓰며


1630. 北首爭死敵(북수사적)。

북쪽을 향해 목숨을 걸고 적과 싸웠습니다.


1631. 陵未沒時(릉미몰시)

이릉이 아직 적에게 함락되지 않았을 때에


1632. 使有來報(사유래보)

군사(軍使)가 달려와 저간의 사정을 조정에 보고하자


1633. 漢公卿王侯皆奉觴上壽(한공경왕후개봉상상수)。

나라의 공경(公卿)과 왕후(王侯)들은 모두 축배를 들며 주상을 축수했습니다.

1634. 後數日陵敗書聞(후수일릉패서문),

그후 며칠 뒤에 이릉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635. 主上爲之食不甘味,

주상은 식사를 해도 맛을 잊으시고


1636. 聽朝不怡(청조불이)。

조회에 참석해도 기뻐하지 않아


1637. 大臣憂懼(대신우구)

대신들도 걱정과 두려움에


1638. 不知所出(부지소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1639. 僕竊不自料其卑賤(복절부자료기비천)

저는 자신이 비천한 신분이라는 사실을 잊고


1640. 見主上慘淒怛悼(견주상참처달단도)

몹시 슬퍼하시는 주상을 뵙자


1641. 誠欲效其款款之愚(성욕효기관관지우)。

저의 자그마한 충성이나마 다하려고 했습니다.


1642. 以爲李陵素與士大夫絕甘分少(이위이릉소여사대부절감분소)

이릉은 평소에 장졸들과 고락을 같이하여


▶ 절감분소(絕甘分少) : 맛있는 음식은 삼가며 적은 분량의 양식은 서로 나누어 먹었다는 뜻으로 이릉은 평소에 휘하의 장졸들 사이에 섞여 고락을 같이해서 부하 장졸들이 따랐다는 뜻이다.


1643. 能得人之死力(능득인지사력)

능히 사력을 다한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했으니


1644. 雖古名將不過也(수고명장불과야)。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 할지라도 그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1645. 身雖陷敗(신수함패)

몸은 비록 패했으나


1646. 彼觀其意(피관기의)

그가 품은 뜻을 살펴보자면


1647. 且欲得其當而報漢(차욕득기당이보한)。

장차 적당한 때 기회를 보아 한나라에 보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648. 事已無可奈何(사이무가나하),

일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되었지만


1649. 其所摧敗攻

그가 적을 공격하여 무찌른 공로는


1650. 亦足以暴於天下(역족이폭어천하)。

역시 천하에 드러내기에 족합니다.


1651. 僕懷欲陳之(복회욕진진)

저는 이러한 생각을 아뢰고자 했으나


1652. 而未有路(이미유로)

저에게는 미처 언로가 없었습니다.


1653. 適會召問(적회소문)

마침 주상께서 하문(下問)하시므로


1654. 即以此指推言陵功(즉이차지추언릉공)

이릉의 공적을 말씀드려


1655. 欲以廣主上之意(욕이광주상지의)

주상의 뜻을 넓혀 드리고


1656. 塞睚眥之辭(색애자지사)。

다른 신하들의 비방을 막아보려 했습니다.


1657. 未能盡明(미능진명)

그러나 제 생각을 다 밝히기도 전에


1658. 明主不深曉(명주불심효)

천자께서 이해하지 않으시고


1659. 以爲僕沮貳師(이위복저이사)

제가 이사장군(貳師將軍)을 비방하고


▶ 이사장군(貳師將軍) : 한무제 때 흉노정벌군의 대장을 지낸 이광리(李廣利)의 별칭이다. 서한의 음악가인 이연년(李延年)이 그의 여동생 이부인(李夫人)을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고 노래로 소개하여 한무제에 의해 총애를 받자 이연년의 동생 이광리도 천거되어 장군이 되었다. 한무제 37년(태초 원년) 기원전 104년, 장건(張騫)의 원정으로 서역의 사정이 알려지자 이광리가 군사를 이끌고 대완(大宛)의 이사성(貳師城)을 공략하여 한혈마(汗血馬)를 얻어 한무제에게 바쳤음으로 이사장군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후 4년간 고전하면서도 대완의 여러 성을 공략하고 서역 제국과의 통상의 길을 열어 그 공로로 해서후(海西侯)에 봉하여졌다. 기원전 99년 한무제가 그후 이부인이 죽고 형 이연년이 실각하자 무고사건에 연루되어 흉노에 투항한 후 선우에 의해 살해당했다.


1660. 而爲李陵遊說(이위이릉유세)

이릉을 위해 유세한다고 여기셔서


1661. 遂下於理(수하어리)。

저를 옥리에게 넘기시니


▶ 리(理) : 중국 고대의 법관이나 옥리(獄吏)를 말한다. 진(秦)나라 때부터 한나라 초까지 정위(廷尉)라고 부르다고 한경제(漢景帝) 때 대리(大理)라고 개칭했다가 한무제(漢武帝) 때 다시 정위(廷尉)라고 불렀다.


1662. 拳拳之忠(권권지충)

저의 간절한 충심을

1663. 終不能自列(종불능자열)。

끝내 밝힐 수 없었습니다.


1664. 因爲誣上(인위무상)

그리하여 주상을 속였다는 죄로


1665. 卒從吏議(졸종이의)。

마침내 범관들의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1666. 家貧(가빈)

집이 가난하여


1667. 財賂不足以自贖(재뢰부족이자속)

속전(贖錢)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1668. 交遊莫救(교유막구)

뿐만 아니라 그때 친구들도 도와주지 않았고


1669. 左右親近不爲一言(좌우친근불위일언)。

주변의 친척들도 저를 위해 한 마디의 변호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1670. 身非木石(신비목석)

그러나 제 몸은 감정이 없는 돌이나 나무가 아닙니다.


1671. 獨與法吏爲伍(독여법리이오)

그런데도 홀로 법정에 끌려가


1672. 深幽囹圄之中(심유영오지중)

옥중에 깊이 갇히고 말았는데


1673. 誰可告訴者(수가고소자)!

저의 이 비통한 심정을 누구에게 호소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1674. 此正少卿所親見(차정소경소친견)

이것은 진실로 소경께서도 직접 겪어보신 바와 같은 것으로


1675. 僕行事豈不然乎(복행사기부연호)?

저의 처지가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1676. 李陵既生降(이릉기생항)

이릉이 이미 살아서 항복함으로써


1677. 頹其家聲(퇴기가성)

그 가문의 명성을 무너뜨렸고


1678. 而僕又茸以蠶室(이복우용이잘실),

저는 또 잠실(蠶室)에 던져져서


1679. 重爲天下觀笑(중위천하관소)。

거듭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1680. 悲夫,悲夫(비부비부)!

슬프고 슬플 따름입니다.


1681. 事未易一二爲俗人言也(사미역일이위속언야)

세상 사람들에게 사정을 일일이 말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1682。僕之先人(복지선인)

저의 선친께서는


1683. 非有剖符丹書之功(비유부부단서지공)

부부(剖符)나 단서(丹書)를 받을 만한 공로도 없었습니다.


▶ 부부(剖符) : 대나무를 쪼개서 만든 부절이다. 그 위에 신표(信標)를 새겨서 두 조각으로 나누어 한 조각은 조정에 보관하고 다른 한 조각은 해당 신하가 지참했다가 누중에 하나로 맞추어 보고 신임의 증거로 삼았다. 한(漢)나라 때 공신들에게 부절을 하사해 그들의 작위가 세습되도록 했다.

▶ 단서(丹書)

① 철권단서(鐵卷丹書)의 준말이다. 철판(鐵板) 표면에는 공신의 경력을 기록하고 뒷면에는 면죄조항과 봉록의 구체적인 내용을 붉은 글로 기록한 후에 두 조각으로 나누어 한 조각은 공신에게 하사하고 한 다른 조각은 조정에 보관했다가 나중에 후손들이 공신으로서의 특권을 확인할 때 하나로 맞추어 증거로 삼았다.

② 단서수계(丹書受戒)의 준말이다.주문왕(周文王) 희창(姬昌)이 태어날 때 붉은 새가 붉은 서책을 입에 물고 산실의 창문으로 날라 와 가져다준 책으로 하늘이 명을 받아 통치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③ 중국 고대사회에 죄를 지어 노예로 만든 사람들을 올려놓은 명부. 즉 노예명부이다.


1684. 文史星曆(문사성력)

천문ㆍ태사ㆍ율력과 같은 일을 담당했는데


1685 近乎蔔祝之間(근호복축지간)

이러한 일은 점장이나 무당에 가까워


1686. 固主上所戲弄(고주상소희롱)

본디 주상의 희롱하는 바로


1687. 倡優畜之(창우축지)

가수나 배우를 기르는 것에 불과하여


1688. 流俗之所輕也(유속지소경야)。

세속인들이 가벼이 여기는 것이기에


1689. 假令僕伏法受誅(가령복법수주)

가령 내가 법의 심판을 받아 처형된다 해도


1690. 若九牛亡一毛(약구우망일모)

세상 사람들은 아홉 마리의 소(九牛)의 터럭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린 것처럼 미미하여


1691. 與螻蟻何異(여루의하이)!

땅강아지와 개미와 같은 보잘 것 없는 미물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692. 而世又不與能死節者比(이세우불여능사절자비)

그리고 또 세상에서는 나의 죽음을 절의를 지키다가 택한 죽음과는 달리


1693. 特以爲智窮罪極(특이위지궁죄극)

지혜가 궁하고 죄가 극히 중해


1694. 不能自免(불능자면)

스스로 모면할 수 없었기 때문에


1695. 卒就死耳(졸취사이)。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을 뿐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1696. 何也(하야)?

왜일까요?


1697. 素所自樹立使然(소소자수립사연)。

평소에 이루어놓은 바가 그렇게 여기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698. 人固有一死(인고유일사)

사람은 어차피 한번은 죽게 마련인데


1699. 死有重於泰山(사유중어태산)

혹은 태산처럼 무겁고


1700. 或輕於鴻毛(혹경어홍모)

혹은 기러기 털처럼 가볍습니다.


1701. 用之所趨異也(용지소추이)。

이는 그 쓰임새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1702. 太上不辱先(태상불욕선)

가장 좋기로는 선조를 욕되지 하지 않는 것이며


1703. 其次不辱身(기차불욕신)

다음은 자신을 욕되지 않게 하는 것이고


1704. 其次不辱理色(기차불욕리색)

그 다음은 인간의 도리와 체면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고


1705. 其次不辱辭令(기차불욕사령)

또 그다음은 자신의 언사(言辭)와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고


1706. 其次詘體受辱(기차굴체수욕)

그 다음은 몸이 결박당하는 치욕을 당하는 것이며

1707. 其次易服受辱(기차역복수욕)

그 다음은 죄수복을 입는 치욕을 당하는 것이고


1708. 其次關木索被箠楚受辱(기차관목색피추초수욕)

그 다음은 손발이 묶이고 매질을 당하는 치욕을 받는 것이고


1709. 其次剔毛發嬰金鐵受辱

그 다음은 삭발당하고 쇠고랑에 채이는 치욕을 받는 것이며


1710. 其次毀肌膚斷支體受辱(기차훼기부지체수욕)

그 다음은 살갗이 찢기고 몸뚱이와 손발이 잘리는 치욕을 당하는 것이며


1711. 最下腐刑極矣(최하부형극의)。

최하가 부형(腐刑)을 당하는 것으로서 가장 극형입니다.


1712. 전왈(傳曰)

전에 말하기를


1713. 刑不上大夫(형불상대부)

「형벌은 상대부에게는 미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예기(禮記)·곡례(曲禮)》상(上)에 나오는 말로 『禮不下庶人(예불하서인),刑不上大夫(형불상대부), 刑人不在君侧(형인부재군측)이라고 했다. 즉 예는 사(士)까지만 행하고 서인까지는 미치지 않으며, 형벌은 사 이하의 사람에게만 적용하고 대부 이상에게는 미치지 않게 한다. 형을 받아 불구가 된 사람은 임금의 측근에 두지 않는다.』라고 했다.


1714. 此言士節不可不厲也(차언사절불가불려야)。

이 말은 선비의 절의를 권면하고 장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1715. 猛虎處深山(맹호처심산)

사나운 호랑이가 깊은 산중에 있을 때는


1716. 百獸震恐(백수진공)

온갖 짐승들이 두려워하지만


1717. 及其在阱檻之中(급기재정함지중)

함정에 빠지게 되면


1718. 搖尾而求食(요미이구식)

꼬리를 흔들며 먹이를 구걸하니


1719. 積威約之漸也(적위약지점)。

이는 점차 위세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1720. 故士有畫地爲牢勢不入(고사유화지위뢰세불입)

그럼으로 땅 위에 금을 긋고 감옥이라고 해도 선비는 들어갈 수 없고


1721. 削木爲吏議不對(삭목위리의부대)

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을 형리(刑吏)라고 해도 대면하면 감히 대꾸를 할 수 없을 것이니


1722. 定計於鮮也(정계어선야)。

이것은 계획을 정한 바가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1723. 今交手足(금교수족).

지금 손발이 교차되게


1723. 受木索(수목색)

나무 형구나 판대기나 포승줄에 묶여


1724. 暴肌膚(포기부)

맨살을 드러내어


1725. 受榜箠(수방추)

곤장이나 채찍으로 매질을 당하고


1726. 幽於圜牆之中(유어환장지중)

감옥의 둥근 담장 안에 갇히게 됩니다.


1727. 當此之時(당차지시)

이때만 되면


1728. 見獄吏則頭槍地(견옥리즉두창지)

옥리를 보기만 해도 곧 머리를 땅에 찧게 되고


1729. 視徒隸則心惕息(시도예즉심척식)。

징역 사는 노예를 보기만 해도 바로 두려움에 숨을 죽일 겁니다.


1730. 何者(하자)?

어째서 이겠습니까?


1731. 積威約之勢也(적위약지세야)。

그것은 장기간에 걸쳐 축적된 옥리의 위세와 금약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이다.


1732. 及已至此(급이지차)

이러한 지경에 이르고도


1733. 言不辱者(언불욕자)

치욕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1734. 所謂強顏耳(소위강언이)

소위 뻔뻔스러운 사람일 뿐입니다.


1735. 曷足貴乎(갈족귀호)!

그러니 이를 어찌 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1736. 且西伯伯也(차서백백야)

서백(西伯)은 제후의 우두머리였으나


1737. 拘羑里(구유리)

유리(羑里)에 갇혔.


1738. 李斯相也(이사상야)

이사는 재상이었으나


1739. 具五刑(구오형)

오형에 처해졌으며


▶ 오형(五刑)

①고대의 다섯 가지의 형벌. 즉 얼굴에 글을 새기는 묵형(墨刑), 코를 배는 의형(劓刑), 종지뼈를 제거하여 앉은뱅이를 만드는 빈형(臏刑),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宮刑), 그리고 사형에 처하는 대벽(大辟)을 말한다. 빈형(臏刑)을 당한 사람으로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제나라의 병법가 손빈(孫臏)이 있고 궁형을 받은 사람은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 있다.

②위의 다섯 가지 형벌을 동일한 죄수에게 동시에 시행하는 혹형의 하나다. 조고(趙高)가 이사(李斯)를 죽일 때 이 법을 적용했다.


1740. 淮陰王也(회음왕야)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은 초왕(楚王)이었으나


▶ 한신(韓信)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96년에 죽은 서한 초의 제후왕으로 저명한 군사가에 불패전의 무장이다. 지금의 강소성 회음현(淮陰縣)인 회음 출신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항상 남에게 기식하고 다녀 업심 여김을 당했다. 진말 농민기의 때 항량(項梁)의 부대에 들어가 항우의 부하가 되었다. 항우의 막사를 지키는 집극랑으로 있다가 인정받지 못하자 유방에게 투항했다. 유방 역시 한신을 중용하지 않고 미관말직에 임명하자 다시 도망쳤다. 소하(蕭何)가 뒤따라가 데려와서 유방에게 온 힘을 다해 천거했다. 유방은 한신을 일약 대장군에게 임명하여 한나라 군대를 맡겼다. 당시 유방이 책봉된 한나라의 영토는 파(巴), 촉(蜀), 한중(漢中)을 포함한 지역으로 중원과 멀리 떨어진 벽지였다. 한신은 한왕 유방에게 관중을 공략하여 항우에 의해 분할된 삼진(三秦)을 차지하고 그곳의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기반으로 천하를 차지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는 유방이 한중으로 들어올 때 이용하고 불태워버린 진령산맥(秦嶺山脈)을 넘어 건설되어 있던 잔도(棧道)를 다시 수리하여 관중으로 진군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진창(陳倉)의 길을 이용하여 한중을 빠져나와 일거에 관중지역을 석권했다. 역사상 이를 ‘명수잔도(明修棧道) 암도진창(暗渡陳倉)’이라고 한다. 이어서 초와 한 두 나라의 정예군사들이 형양(滎陽)과 성고(成皐) 사이에서 진퇴를 반복할 때 그는 별동대를 이끌고 위(魏)나라와 대(代)나라 공략하고 정형(井陘)으로 나아가 2만의 군대로 진여(陳餘)가 이끄는 20만의 조나라 군대를 배수(背水)의 진(陣)으로 괴멸시키고 진여의 목을 벴다. 계속 동북으로 전진하여 연(燕)나라 지역을 점령한 후에 남하하여 제나라까지 손에 넣어 황하 하류의 광활한 지역을 한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자기의 공을 과신한 한신은 유방을 압박하여 스스로 제왕(齊王)의 자리에 앉았다. 한고조 5년 기원전 202년, 한나라의 모든 군대를 통솔하여 항우를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격파하고 서한제국의 창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항우가 몰락하자 한고조는 한신의 군사권을 빼앗고 봉국을 제에서 초(楚)로 옮겼으나 얼마 후에 반란의 획책했다는 음모에 빠져 왕작을 빼앗기고 회음후(淮陰侯)로 강등되었다. 한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한신의 가노가 진희(陳豨)와 모의하여 반란을 획책했다고 고발하자 여태후에 의해 유인되어 장락궁(長樂宮)에서 참수되고 그의 가족들은 멸족되었다. 《병법(兵法)》 3편을 저술했다고 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과하지욕(跨下之辱), 암도진창(暗渡陳倉), 배수지진(背水之陣), 일반천금(一飯千金), 토사구팽(兎死狗烹), 다다익선(多多益善) 등수많은 전고의 주인공이다. 【《사기·회음후열전》 제32 참조】


1741. 受械於陳(수계어진)

진(陳) 땅에서 형틀에 매이고


1742. 彭越張敖(팽월장오)

팽월(彭越)과 장오(張敖)는


▶ 팽월(彭越)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96년에 죽은 서한의 제후왕이다. 지금의 산동성 금향현(金鄕縣)인 창읍(昌邑) 출신이다. 진말 진승(陳勝)과 항량(項梁)이 기의할 때 그는 기회를 살피면서 관망했다. 항우와 유방의 천하를 놓고 다툴 때 그는 3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유방에 투항하여 한나라의 장군이 되어 옛날 위(魏)나라 땅의 10여 개 성을 점령했다. 팽월은 그 공으로 위나라의 상국에 임명되어 지금의 하남성 동남부인 양(梁) 땅을 빙빙돌며 공략하여 평정했다. 이어서 여러번에 걸쳐 항우의 배후를 습격하여 양도를 끊어 위기에 빠진 한왕을 구원했다. 그 공으로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다. 기원전 202년 한왕 5년 제왕(齊王) 한신(韓信)과 협동작전을 펼쳐 해하(垓下)에서 항우의 초군을 복멸시키고 한왕이 천하를 차지하는데 대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양왕(梁王)에 봉해져 정도(定陶)에 도읍했다. 한왕 11년 기원전 196년 반란을 획책했다는 음모에 빠져 체포되어 낙양으로 끌려와 감금되었으나 얼마 후에 사면되어 평민으로 강등되어 사천(泗川)으로 옮겨 살라는 명을 받았다. 사천으로 가던 도중에 만난 여후에게 속아 낙양으로 다시 들어갔다가 자신은 목이 잘리고 멸족되었다.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제32 참조

▶ 장오(張敖) : 장이(張耳)의 아들이고 한고조의 딸 노원공주(魯元公主)의 남편이다. 한고조 7년 고조가 평성(平城)에서 나와 조나라를 지날 때 조왕(趙王) 장오가 극진하게 대했으나 고조는 오히려 장오를 오만무례하게 대했다. 이를 지켜본 조왕의 신하들이 분노하여 고조를 시해하려고 하자 장오가 만류하여 그만두게 했다. 다시 1년 후 고조가 재차 조나라를 지날 때 관고(貫高) 등의 조나라 신하들이 고조가 머물게 될 숙소에 자객들을 매복시켜 시해하려고 했으나 고조의 심장이 매우 뛰어 위험을 감지하고 그곳을 빠져나와 죽음을 피했다. 후에 장오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부하들이 장오의 뜻을 어기고 스스로 꾸몄다고 증언해서 방면되었으나 조왕의 자리를 잃고 선평후(宣平侯)에 봉해졌다.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제29 참조.


1743. 南鄉稱孤(남향칭고)

남면하면서 자신을 고(孤)라고 칭하는 왕의 신분이었으나


1744. 系獄具罪(계옥구죄)

감옥에 갇혀 죄를 받았으며


1745. 絳侯誅諸呂(강후주제려)

강후(絳侯) 주발(周勃)는 여씨(呂氏)들을 타도하여


▶ 주발(周勃)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한문제 11년인 기원전 169년에 죽은 서한 초의 대신이다. 한고조 유방과 같은 패현(沛縣) 출신이다. 어렸을 때 누에바구니를 엮어 판돈으로 살면서 항상 다른 사람의 혼례나 상가에 가서 악대(樂隊)가 되어 피리를 불거나 북을 쳐 주었다. 진이세(秦二世) 원년인 기원전 209년 한고조 유방이 패현에서 기의할 때 중연(中涓)의 신분으로 종군했다가 오대부(五大夫)가 되었다. 그 이듬해 호분령(虎賁令)이 되어 결사대를 이끌었다. 고조가 서진하여 진나라를 멸할 때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선봉에 서서 분전했음으로 그 공으로 위무후(威武侯)에 봉해졌다. 곧이어 한중(漢中)으로 들어가 장군(將軍)이 되어 삼진을 공략할 때 전공을 세워 식읍(食邑)을 하사받았다. 일대를 이끌고 서진하여 농서(隴西)를 평정하고 되돌아와 요관(嶢關)을 지켰다. 해하(垓下)의 회전에 참전하여 항우를 멸했다. 한나라가 창건되자 장군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 장도(臧荼), 한왕(韓王) 신(信), 진희(陳豨) 및 노관(盧綰) 등을 평정했다. 고조 6년인 기원전 201년, 강후(絳侯)로 개봉되어 식읍 8천 100호를 받았다. 고조가 매우 중하게 여겨 임종할 때 “성격이 중후한 주발은 배움이 적지만 유씨의 황실을 안정시킬 사람은 필시 그일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한혜제(漢惠帝) 6년 기원전 189년, 신설한 태위(太尉)의 직에 임명되었다. 여후(呂后)가 죽자 진평(陳平)과 모의하여 일거에 여씨들을 주멸하고 한문제(漢文帝)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 공으로 우승상(右丞相)이 되었으나 얼마 후에 스스로 자신의 재주가 진평보다 못하다고 여겨 우승상이 직을 진평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진평이 죽자 다시 우승상에 복귀했다. 후에 자신의 위세가 군주를 떨게 만들어 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봉국으로 들어가 살았다. 문제 4년 기원전 176년 어떤 사람이 모반을 꾀한다고 주발을 고발하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옥리에게 욕을 당한 주발은 “백만대군을 호령하는 장군이었지만 일개 옥리가 그렇게 귀한 신분인지는 몰랐다.“라고 한탄했다. 후에 귀척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노환으로 죽었다. 시호는 무(武)다.【《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제27 참조】


1746. 權傾五伯(권경오백)

권력이 오패(五覇)를 능가했으나


1747. 囚於請室(수어청실)

청실(請室)에 갇혔고


▶ 청실(請室) : 죄를 지은 대신들이 잡혀와 대기하는 방


1748. 魏其大將也(위기대장)

위기후(魏其侯)는 대장(大將)이었으나


▶ 위기후(魏其侯) : 두영(竇嬰)의 봉호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한무제 원광(元光) 원년인 기원전 131년에 죽은 서한왕조의 대신이다. 지금의 하북성 무읍현(武邑縣)인 청하(淸河) 관진(觀津) 출신이다. 한경제(漢景帝)의 모후 두태후(竇太后)의 당질이다. 문제 때 오나라 상국에 임명되었다가 병으로 면직되었다. 경제가 서자 첨사(詹事)에 임명되었으나 경제의 동생 양효왕(梁孝王) 유무(劉武)를 황태제(皇太弟)로 세우는 일에 완강하게 반대하다가 두태후의 눈밖에 나서 병을 칭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경제 3년 기원전 154년,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란이 일어나 대장군에 임명되어 란포(欒布) 등의 명장(名將)과 현사(賢士)들을 찾아 장수와 참모로 삼아 휘하에 두었다. 경제가 하사한 천금(千金)을 모두 군자로 사용하고 형양에 주둔하면서 조(趙) 제(齊) 두 나라의 군사행동을 막았다. 칠국의 반란이 평정되자 위기후(魏其侯)에 봉해지고 태자의 태부가 되었다. 한무제 건원(建元) 원년 기원전 140년, 왕태후의 이부동복 동생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을 제치고 승상의 자리에 올랐으나 유학을 추존한다는 이유로 황로사상에 심취해있던 두태후의 미움을 사서 승상에서 면직되었다. 그 사이 두영의 막역한 친구인 관부(灌夫)가 전분의 미움을 사서 체포되어 옥에 갇히자 그는 상서를 올려 관부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관부의 일로 두영과 전분은 상대방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서로 공격했다. 그러나 왕태후의 사주를 받은 무제가 전분의 편을 들어 관리에게 명을 내려 두영을 체포해 처형했다.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제47 참조


1749. 衣赭關三木(의혁관삼목)

죄수복을 입고 목과 수족에 고랑이 채워졌습니다.


1750. 季布爲朱家鉗奴(계포위주가겸노)

계포는 목에 칼을 차고 주가(朱家)의 가노가 되었고


▶ 계포(季布) : 서한 초의 저명한 장령으로 지금의 강소성 서주시(徐州市)인 팽성(彭城) 출신이다. 젊었을 때 협객을 자처하며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돕는다면서 법도를 지키지 않았다. 팽성에서 자립한 서초패왕 항우가 팽성으로 자신을 찾아온 계포가 용감한 협객임을 알고 장수로 삼았다. 초한전쟁 중 그는 일대의 군사를 이끌고 몇 번이나 한고조 유방을 곤경에 빠지게 했다. 계포 때문에 여러 번 사지에 몰렸던 유방은 그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윽고 한고조가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창건하자 그는 도망쳐 복양(濮陽)으로 들어가 주씨(周氏)의 집에 숨었다. 그때 한나라 조정은 계포의 목에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그를 숨겨준 자도 삼족을 멸한다는 포고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주씨의 계책대로 이름을 바꿔 노예가 되어 대협(大俠) 주가(朱家)에게 팔려 노예가 되었다. 주가가 한나라의 창업공신 여음후(汝陰侯) 하후영(夏侯嬰)에게 유세하자 하후영이 고조에게 청해 계포가 사면을 받게 했다. 고조는 계포를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낭중(郎中)에 임명했다. 한혜제(漢惠帝) 때 중랑장(中郎將)으로 옮겼는데 흉노가 매번 국경을 침범하여 어지럽히자 번쾌(樊噲)는 대군을 일으켜 흉노를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계포는 한나라의 국력이 아직 약하고 백성들은 초한이 벌인 전쟁의 후유증에 미처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해 번쾌의 주장을 강력하게 반대해서 흉노 정벌군을 일으키지 못하게 했다. 한문제가 서자 계포는 하동태수(河東太守)가 되어 천하에 명장이라는 이름을 떨쳤다. 문제가 그를 어사대부로 삼으려고 했으나 어떤 사람이 술버릇이 나쁘다고 했음으로 그만두었다. 하동태수로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신의를 지키는 사람으로 이름이 나서 “황금 천근을 얻는 것보다는 계포의 한 번 승낙을 얻는 것이 낫다.”는 말이 생겼다.




1751. 灌夫受辱居室(관부수욕거실)

관부는 거실(居室)로 끌려가 치욕을 당했습니다.


▶ 관부(灌夫)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한무제 원광(元光) 4년인 기원전 131년에 죽은 서한왕조의 장령이다. 원래 성은 장(張)씨 였으나 영음후(潁陰厚) 관영(灌嬰)의 가신이었던 그의 부친 장맹(張孟)이 관(灌)씨를 사성(賜姓) 받아 관씨가 되었다. 오초칠국의 란 때 천 명의 군사를 이끄는 장군이 되어 부친을 따라 참전하여 용명을 떨쳤다. 란이 평정되나 관부는 중랑장(中郎將)이 되었으나 법을 위반하여 면직되었다. 후에 다시 기용되어 대(代)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한무제 초 회양태수에 임명되어 군사적인 요충지인 회양(淮陽)을 지키라는 특명을 받았다. 후에 입조하여 태복(太僕)이 되었다가 술에 취해 외척 두보(竇甫)를 구타한 죄로 외직인 연(燕)나라 상국으로 좌천되었다. 기 위해 회양태수에 임명되었다. 또다시 법을 범하여 면직되어 장안으로 돌아와 집에 머물자 매일 수십 수백 명의 거부나 식객이 방문해서 그와 사귀고 그의 집안은 영천(穎川)에서 횡포를 부려 백성들을 괴롭혔다.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과 마치 부자지간처럼 깊이 사귀었으나 성격이 직선적이고 괴팍(乖愎)했다. 당시 승상 전분(田蚡)의 미움을 사서 무고를 당해 처형되고 종족은 멸족되었다.


1752. 此人皆身至王侯將相(차인개신지왕후장상)

이 사람들은 모두 왕후장상 출신으로


1753. 聲聞鄰國(성문인국)

명성을 이웃나라에까지 떨쳤으나


1754. 及罪至罔加(급죄지망가)

죄의 그물에 옥죄어 오는데도


1755. 不能引決自裁(불능인결자재)。

스스로 자결을 결단하지 못하고


1756. 在塵埃之中(재진애지중)

먼지 가득한 감옥에 남아 있었습니다.


1757. 古今一體(고금일체)

치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1758. 安在其不辱也(안재기하욕야)!

그것이 어찌 욕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1759. 由此言之(유차언지)

이로 말하건대


1760. 勇怯勢也(용겁세야)

용기와 비겁함은 세에,


1761. 強弱形也(강약형야)。

강함과 약함은 형에 의함이니


1762. 審矣曷足怪乎(심의갈족괴호)!

이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1760. 且人不能早自裁繩墨之外(차인불능조자재승묵지외)

대저 사람이 포박되어 단죄받기 전에 일찌감치 자결할 수 없어서


1761. 已稍陵夷至於鞭箠之間(이초릉이지어편추지간)

매질을 당하는 형벌을 받고사야 비로소


1762. 欲引節(욕인절)

절개를 지키려고 한다 해도


1763. 斯不亦遠乎(사불역원호)!

이는 역시 때늦은 일이 아니겠습까?


1764. 古人所以重施刑於大夫者(고인소이중시형어대부자)

옛 사람들이 대부(大夫)에게 형벌을 신중하게 시행하고자 하는 까닭은


1765. 殆爲此也(태위차야)。

아마도 이 때문인 듯합니다.


1766. 夫人情莫不貪生惡死(부인정막불탐생오사)

대저 사람의 본성은 살기를 탐하거나 죽기를 싫어하고


1787. 念父母(염친척)

부모를 생각하며


1788. 顧妻子(고처자)

처자를 돌보는 것입니다.


1789. 至激於義理者不然(지격어의리자불연)

의리에 자극을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으니


1790. 乃有不得已也(내유부득이야)

이는 부득이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1791. 今僕不幸(금복불행)

지금 저는 불행하게도


1792. 早失二親(조실이친)

조실부모하고


1793. 無兄弟之親(무형제지친)

가까운 친척이나 형제도 없이


1794. 獨身孤立(독신고립)

혼자서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1795. 少卿視僕於妻子何如哉(소경시복어처자하여재)?

소경께서 보시기에 제가 처자에 대해서는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1796. 且勇者不必死節(차용자불필사절)

또 용기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절개를 지켜 죽는 것도 아니며


1797. 怯夫慕義(겁부모의)

비겁한 사내라도 능히 의(義)를 사모하면


1798. 何處不勉焉(하처불면언)!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799. 僕雖怯耎欲苟活(복수겁연욕구활)

제가 비록 비겁하고 나약하여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만


1800. 亦頗識去就之分矣(역파식거취지분의)

거취의 분별에 대해서는 제법 많이 알고 있습니다.


1801. 何至自湛溺累絏之辱哉(하지자담익루설지욕재)!

어찌 몸이 묶여 감옥 안에 갇힌 채 치욕 속으로 스스로 빠지는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1802. 且夫臧獲婢妾猶能引決(차부장획비첩유능인결)

또한 저 천한 노복이나 하녀조차도 능히 자결할 수 있는데


1803. 況若僕之不得已乎(항약복지부득이호)!

하물며 저와 같은 부득이한 사람의 경우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1804. 所以隱忍苟活(소이은인구활)

고통을 감내하고 더러운 치욕 속에서 구차하게 살면서도


1805. 幽糞土之中而不辭者(유분토지중이불사자)

더러운 감옥에 갇히는 것을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1806. 恨私心有所不盡(한사심유소부진)

제 마음속에 있는 것을 다 드러내지 못한 채


1807. 鄙沒世而文采不表於後也(비몰세이문채불표어후야)。

비루(鄙陋)하게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면 후세에 문채(文彩)가 드러나지 않을까 한스럽게 여겨서입니다.


1809. 古者富貴而名摩滅(고자부귀이명마멸)

예전에 부귀하면서도 이름이 마멸된 인물은

1810. 不可勝記(불가승기)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이 많았지만


1811. 唯倜儻非常之人稱焉(유척비상인칭언)

오로지 기개가 높고 비상한 사람들만이 칭송을 받았습니다.


1812. 蓋西伯拘而演《周易》(개서백구인연주역)

주문왕(周文王)은 구금된 뒤에《주역(周易)》을 연역(演繹)했고


1813. 仲尼厄而作《春秋》(중니위이작춘추)

공자(孔子)는 곤경에 빠지셨을 때 《춘추(春秋)》를 지었습니다.


1814. 屈原放逐(굴원방축)

굴원(屈原)은 추방되어


1815. 乃賦《離騷》(내부이소)

《이소(離騷)》를 지었으며

1816. 左丘失明(좌구실명)

좌구명은 눈이 먼 후에


1817. 厥有《國語》(궐유국어)

《국어(國語)》를 편찬했으며


1818. 孫子臏腳(손자빈각)

손빈은 다리가 잘린 뒤에


1819.《兵法》修列(병법수열)

병법을 논했고


1820. 不韋遷蜀(불위천촉)

여불위가 촉으로 쫓겨난 뒤에


1821. 世傳《呂覽》(세전여람)

《여람(呂覽)》이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1822. 韓非囚秦(한비수진)

한비자(韓非子)는 진(秦)나라에 잡히고서


1823.《說難·孤憤》(세난고분)。

《세난(說難)》, 《고분(孤憤)》을


1824.《詩》三百篇(시삼백편)

《시경(詩經)》의 300편 시는


1825.大氐賢聖發憤之所爲作也(대저현성발분지소위작야)。

대개 성현의 발분(發憤)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1826. 此人皆意有所鬱結(차인개의유소울결)

이들은 모두 가슴에 맺힌 바가 있었으나


1827. 不得通其道(부득통기도)

그 뜻을 통하게 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1828. 故述往事(고술왕사)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1829. 思來者(사래자)。

후세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1830. 及如左丘無目(급여좌구무목)

좌구명과 같이 눈이 멀고


1831. 孫子斷足(손자단족)

손빈과 같이 발이 잘린 사람은


1832. 終不可用(종불가용)

끝끝내 세상에서 쓰이지 않자


1833. 退論書策以舒其憤(퇴론서책이소기분)

물러나 책으로써 꾀하는 바를 논하여 울분을 펴면서


1834. 思垂空文以自見(사수공문이자현)。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습니다.


1835. 僕竊不遜(복절불손)

저는 불손하게도


1836. 近自托於無能之辭(근자탁어무능지사)

감히 무능한 문장에 스스로를 기탁하려고


1837. 網羅天下放失舊聞(망라천하방실구문)

천하의 산실(散失)된 구문(舊聞)을 망라하여


1838. 略考之行事(략고지행사)

행해진 일을 대략 상고하고


1839. 綜其終始(종기종시)

시작과 결말을 종합하여


1840. 稽其成敗興壞之紀(계기성패흥괴지기)

성공과 실패, 흥함과 망함의 이치를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1841. 上計軒轅(상계헌원)

그리하여 위로는 헌원(軒轅)에서


1842. 下至于玆(하지우자)

아래로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1843. 爲十《表》(위십표)

《표(表)》10편


1844. 《本紀》十二(본기십이)

《본기(本紀)》12편


1845. 書八章(서팔장)

《서(書)》8장


1846. 《世家》三十(세가삼십)

《세가(世家)》30편


1847. 《列傳》七十(열전칠십)

《열전(列傳)》70편

1848. 凡百三十篇(범백삼십편)

모두 130편을 지어


1849. 亦欲以究天人(之際역욕이구천인지제)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1850. 通古今之變(통고금지변)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1851. 成一家之言(성일가지언)。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1852. 草創未就(초창미취)

그러나 초고가 아직 이루어지기도 전에


1853. 適會此禍(적회차화)

이런 화난을 당했는데


1854. 惜其不成(석기불성)

애석하게도 이 일을 다 완성하지 못했으므로


1854. 是以就極刑(시이취극형)

비록 극형을 당했으나


1856. 而無慍色(이무온색)。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1857. 僕誠已著此書(복성이저차서)

저는 성심을 다해 이 책을 저술하여


1858. 藏之名山(장지명산)

여러 명산(名山)에 보관했다가


1859. 傳之其人(전지기인)

내 뜻을 이해할 사람들에게 전해


1860. 通邑大都(통읍대도)

고을과 큰 도회지에 알려지게 하려는 때문입니다.


1861. 則僕償前辱之責(즉복상전욕지책)

그렇게 되면 제가 이전에 치욕을 참은 점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니


1862. 雖萬被戮(수만피륙)

비록 몇 만 번 주륙(誅戮)을 당한다 해도


1863. 豈有悔哉(기유회재)!

어찌 후회함이 있겠습니까?


1864. 此可爲智者道(차가위지자도)

그러나 이는 지혜로운 사람에겐 말할 수 있지만


1865. 難爲俗人言也(난위속인언야)。

속인에게 말하긴 어려운 일입니다.


1866.  且負下未易居(차부부미이거)

또한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 자는 처신하기가 쉽지 않으니


1867. 下流多謗議(하류다방의)

하류의 사람들은 비방의 말을 많이 할 겁니다.

1868. 僕以口語遇遭此禍(복이구어우조차화)

제가 치욕스러운 궁형을 당하고도 말을 삼가지 못하여


1869. 重爲鄉黨戮笑(중뤼향당륙소)

거듭 마을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어


1870. 汙辱先人한욕선인)

선조를 욕되게 했으니


1871. 역하면목복상부모지구묘호(亦何面目復上父母之丘墓乎)?

또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의 산소 앞을 다시 찾을 수 있겠습니까?


1872. 雖累百世(수루백세)

비록 백세(百世)의 세월이 흘러도


1873. 垢彌甚耳(구미심이)!

저의 수치로움만 심해질 뿐입니다.


1874. 是以腸一日而九回(시이장일이이구)

이로 인해 하루에도 수없이 애간장이 타고


1875. 居則忽忽若有所亡(거즉홀홀약유소망)

집에 있으면 망연자실하여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하며


1876. 出則不知所如往(출즉부지소여왕)。

문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1877. 每念斯恥(매념사치)

매번 이러한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1878. 汗未嘗不發背沾衣也(한미상불발배첨의야)。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려내려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1879. 身直爲閨閣之臣(신직위규각지신)

몸이 내전을 지키는 신하가 되었으니


1880. 寧得自引深臧於岩穴邪(영득자인심장어약혈야)!

어찌 스스로 깊은 바위굴 속에 숨어 은거할 수 있겠습니까?


1881. 故且從俗浮湛(고차종속부담)

그래서 잠시 세속의 부침에 따르고


1882. 與時俯仰(여시부앙)

시대와 더불어 행동함으로써


1883. 以通其狂惑(이통기광혹)。

저 미치고 어리석은 자들과 교제하며 살고 있습니다.


1884. 今少卿乃教以推賢進士(금소경내교이현진사)

지금 소경께서 저에게 현인을 추천해 달라는 가르침을 주셨는데


1885. 無乃與僕之私指謬乎(무내여복지사지류호)?

이는 저의 개인적인 속뜻과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1886. 今雖欲自雕琢(금수욕자조탁)

지금 비록 제가 스스로를 가다듬어


1886. 曼辭以自飾(만사이자식)

미사여구로 제 자신을 꾸미려고 해도


1887. 無益於俗不信(무익어속불신)

아무런 유익함이 없고 사람들도 믿지 않을 것이니


1888. 只取辱耳(지취욕이)。

치욕이나 얻기에 알맞을 뿐일 것입니다.


1889. 要之死日(요지사일)

요컨대 죽을 날을 기다린


1890. 然後是非乃定(연후시비내정)。

연후에야 옳고 그름이 판명될 것입니다


1891. 書不能盡意(서불능진의)

글로써는 능히 진심을 다 쓸 수 없는


1892. 故略陳固陋(고략진고루)。

저의 고루한 생각을 대략 늘어놓았습니다.


1893. 謹再拜(근재배)

삼가 재배드립니다.


【보임안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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