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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안열전(管晏列傳)2-2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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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안영(晏嬰)

열전2-2.

안영(晏嬰)의 자는 평중(平仲)으로 래(萊)①의 이유(夷維)② 사람이다. 제나라의 영공(靈公)③, 장공(莊公)④, 경공(景公)⑤을 섬기며 절약과 검소함으로 제나라의 정치를 힘써 행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제나라의 제상이 되어서는 식사를 할 때에는 고기반찬을 두 가지 이상 먹지 않았고 아내에게는 비단옷을 입히지 않았으며, 조정에 있을 때는 군주의 묻는 말에는 곧고 바른 말로 대답하고, 묻지 않으면 곧은 행동으로 일을 행했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군주의 명에 순응하고 도가 없으면 그 명이 옮고 그름을 가려 행했다. 이와 같이 함으로 해서 3세에 걸쳐 그의 이름이 제후들 사이에 빛나게 되었다.

월석보(越石父)라는 제나라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죄수 속에 있었다. 안자가 외출했다가 길거리에서 그를 우연히 보고 그의 마차를 끌고 있던 왼쪽 말을 풀어 속죄금으로 내고 월석보를 꺼내 자기의 수레에 태워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안자가 월석보에게 아무런 인사도 하지 않고 내실로 들어가더니 오랫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자 월석보가 안자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안자가 크게 놀라 의관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다음 공손한 태도로 월석보에게 말했다.

「이 안영이 비록 어질지는 못해도 그대를 곤경에서 구해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그대는 이렇게 빠르게 절교를 하겠다고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군자는 자기를 몰라주는 사람에게는 몸을 굽히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존중을 받아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조금 전에 죄수의 신분이었을 때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께서 이미 나를 위해 속죄금을 내고 풀어 준 이유는 곧 나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에게 예로써 대하지 않는다면 나는 차라리 죄수들 중에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안자가 이에 월석보를 맞아들여 상객으로 삼았다.

안자가 제나라의 상국이 되어 외출을 할 때, 그의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의 아내가 문틈으로 그의 남편을 엿보았다. 남편은 재상을 위해 수레 앞에 오르더니 햇볕가리개를 크게 펴고 사두마차를 끄는 말에게 채찍질을 하며 의기양양한 모습을 하며 스스로 매우 만족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남편이 돌아오자 그의 아내가 이혼을 청했다. 남편이 그 까닭을 묻자 아내가 말했다.

「안자(晏子)는 키가 6척도 채 안 되는 데, 그 몸은 제나라의 상국이고 이름은 제후들 사이에 높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첩이 외출하는 안자의 모습을 보니 뜻과 생각이 깊었고, 항상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8척이나 되는 키에 다른 사람의 종복이 되어 그의 수레를 모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스스로 만족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첩은 당신에게 이혼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 후로 그 남편은 스스로의 마음을 자제했다. 마부의 태도가 예전과 달리 공손해 진 모습을 본 안자가 이상하게 여겨 묻자 마부가 사실대로 고했다. 안자는 마부를 천거해서 대부로 삼았다.

태사공이 말한다.

나는 《관자(管子)》⑥의 《목민(牧民)》, 《산고(山高)》, 《승마(乘馬)》, 《경중(輕重)》, 《구부(九府)》와 《안자춘추(晏子春秋)》⑦를 읽어보았는데 그 내용이 매우 상세했다. 그와 같은 저서들을 읽고서 나는 그들의 행적을 알고 싶어 그들의 전기를 정리했다. 관자나 안자춘추에 대해서는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음으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고 그곳에서 빠져 있는 일만을 논했다.

관중은 세상에 소위 현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공자는 그를 소인으로 여겼다. 그 이유로써 주나라의 도는 이미 쇠미해진 상태에서 제환공은 어진 군주였음에도 그가 왕도를 이루도록 힘써 애쓰지 않고 단지 패자를 칭하게만 했기 때문이었다. 옛말에 군주의 장점은 북돋우고 결점은 바르게 고쳐 줌으로 해서 상하가 서로 능히 친숙해진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찌 관중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제장공(齊莊公)이 반역한 신하에게 죽음을 당했을 때 안자는 그 시체 앞에서 엎드려 곡하고 상례를 행한 후에 그 자리를 떠났으나 그것이 어찌 의를 보고 행하지 않는 용기 없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간언의 말을 올릴 때는 군주의 안색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른 바 조정에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물러나서는 자신의 허물을 고치는 태도를 말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만일 안자가 아직 살아있어 내가 그를 위해 말채찍을 잡고 그의 수레를 몰 수 있다면 나로써는 진실로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다.

주석

1) 래(萊) : 지금의 산동성 용구(龍口) 동남에 있었던 중국 고대의 제후국 이름이다. 제태공세가에 「태공이 봉지에 당도하자 래후(萊侯)가 쳐들어와 영구(營口)를 놓고 다투었다.」고 했다. 영구는 래국의 변읍이었다. 주영왕(周靈王) 5년 기원전 567년 제영공(齊靈公)에 의해 멸망하고 그 땅은 제나라 병탄되었다.

2)이유(夷維) : 지금의 산동성 고밀현(高密縣)이다.

3)제영공(齊靈公)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54년에 죽은 춘추 때 제나라의 군주다. 이름은 환(環)이고 경공(頃公)의 아들이다. 주간왕(周簡王) 5년 기원전 581년에 제후(齊侯)의 자리에 올랐다. 공자 광(光)을 태자로 삼아 후계로 삼았다. 주영왕 17년 기원전 555년 당진국이 중행헌자(中行獻子) 순언(荀偃)을 대장으로 삼아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군은 싸움에 패하여 임치(臨淄)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당진군은 임치성 교외의 성곽을 불사르고 물러갔다. 다음 해에 죽었다.

4) 제장공(齊莊公)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48년에 죽은 춘추 때 제나라 군주다. 이름은 광(光)이고 제영공(齊靈公)의 아들이다. 주영왕 19년 기원전 553년 최저(崔杼)의 추대를 받아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즉위후 최저의 처와 간통하다가 최저에 의해 재위 6년 만에 살해당했다.

5)제경공(齊景公) : 기원전 547년에 즉위하여 490년에 죽은 춘추말기 제나라 군주다. 이름은 저구(杵臼)고 제장공(齊莊公)의 이모제(異母弟)다. 재위 기간 중 안영(晏嬰)을 등용하여 요역을 줄이고 부세와 형벌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덜어줬다. 이윽고 제나라의 정치는 안정되어 제환공 이래 국세를 만회하여 당진(唐晉), 초(楚)와 함께 중원의 강국이 되었다.

6) 관자(管子) : 관중의 저서로 되어 있으나, 그 내용으로 보아 관중의 업적을 중심으로 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저술한 책으로 저작 시기는 전국시대부터 한 대(漢代) 사이로 추정된다. 전한(前漢)의 학자 유향(劉向)의 머리말에는 86편이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 보존되어 있는 자료에는 10편과 1도(圖)가 빠져 있다. 내용은 법가적(法家的) 색채가 농후하고, 때로는 도가적(道家的)인 요소가 섞여 있기 때문에 《한서(漢書)》에서는 도가(道家)에, 《수서(隋書)》에서는 법가(法家)에 넣고 있다. 정치의 요체(要諦)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가르치며, 신명(神明)을 공경하도록 하는 세 가지 일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일이 으뜸이라고 하였다.

7)《안자춘추(晏子春秋)》 : 후세 사람들이 안영의 이름을 빌려 쓴 책으로 대체적으로 전국 중기 때 성립되어 계속해서 증보를 더했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제자략(諸子略)》에는 유가류(儒家流)로 분류되어 있다. 1972년 산동성 임기시(臨沂市) 은작산(銀雀山)의 한묘(漢墓)에서 《안자(晏子)》의 일부 죽간이 발굴되었는데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기존의 문헌과 일치했다. 책의 내용은 묵가(墨家)들의 사상에 가까운 관점에서 쓰여져《묵자(墨子)》의 내용과 비슷하다. 그래서 당조의 유종원(柳宗元)은 《안자변(晏子辯)》이라는 저서에서 「제나라 사람이 묵자의 무리가 되었다.」라고 했다. 송대의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도 모두 안자를 묵가(墨家)로 분류했으나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안영의 활동연대는 묵자보다 훨씬 앞서기 때문이다. 앞서 거론한 저서들은 모두 안자의 일화나 행적을 제외하고 편찬한 책으로 대부분은 《좌전(左傳)》의 기록을 참고했고 편찬자들은 원서의 내용과는 다른 내용의 사료를 채용했다. 따라서 안자춘추는 사서라기보다는 창작의 범주에 들어가 정치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문학의 형식을 띤 소설에 가깝다. 중국 역사상 가장 빠른 단편소설집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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