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사기
본기(本紀)
서(書)
연표(年表)
세가(世家)
열전(列傳)
평설(評說)
원전(原典)
· 오늘 :  389 
· 어제 :  437 
· 최대 :  2,389 
· 전체 :  1,685,107 
 
  2009-07-31 18:25:437076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39
운영자
 루경화친.jpg  (360.5K)   download : 204
 숙손통제정의례[1].jpg  (157.6K)   download : 95
일반

열전39. 劉敬叔孫通(유경숙손통)

유경(劉敬)은 제나라 사람이다. 한5년 기원전202년, 농서(隴西)로 군역을 나가면서 낙양을 지나가다가 그때 마침 고제도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루경(婁敬)은 몰고 가던 수레의 횡목을 풀어 놓고 양가죽으로 지은 갖옷을 입은 채 제나라 출신 우장군(虞將軍)을 찾아가 말했다.

「제가 황제를 뵙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장군이 루경에게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기를 원하자 루경이 말했다.

「제가 비단옷을 입고 있으면 비단옷을 입은 채로 폐하를 뵙고, 베옷을 입고 있으면 베옷을 입은 채로 뵙겠습니다. 결코 옷은 바꿔 입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우장군이 황제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 고했다. 황제가 루경을 불로 접견을 허락하고 음식을 하사했다. 이윽고 황제가 루경에게 무엇 때문에 만나려고 하는지 물었다. 루경이 오히려 황제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도읍을 낙양에 정하려고 하심은 주왕실과 융성함을 다투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

「폐하께서는 천하를 취하신 방법은 주왕조와는 다릅니다. 주나라의 선조는 후직(后稷)①으로 요임금이 태(邰)에 봉했습니다. 10여 대를 지나면서 선행과 덕을 쌓다가 공류(公劉)② 대에 이르러 걸왕(桀王)을 피해 빈(豳)③으로 이주했습니다. 후에 다시 태왕(太王)④ 대가 되어 적족(狄族)의 침입으로 빈을 버리고 말채찍을 휘둘러 기산 밑으로 이주하자 국인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이윽고 문왕이 서백(西伯)이 되어 우후(虞侯)와 예후(芮侯)의 송사를 해결해 줌으로써⑤ 천명을 받기 시작하자 강태공 여상(呂尙)과 백이(伯夷) 둥이 동해의 바닷가에서 달려와 귀의했습니다. 문왕의 아들 무왕이 마침내 은주(殷紂)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니 약속하지 않았음에도8백의 제후들이 맹진(孟津)의 회맹에 참석하여 결국 은나라를 멸했습니다.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자 주공과 같이 어진 사람들이 성왕의 스승이나 재상이 되어 보필하고 이어서 성주(成周)에 낙읍을 건설했습니다. 이곳은 천하의 중심이라 사방의 제후들이 공물을 바치기에 거리가 비슷하여 덕이 있는 자는 왕 노릇을 하기 쉽고 덕이 없는 사람은 망하기도 쉽습니다. 그런 낙읍에 별도의 성을 쌓아 머물렀던 이유는 주나라 왕들로 하여금 힘써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감화시키기 위해서이지 험애에 의지해서 교만하고 사치한 풍조로 백성들을 학대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나라가 흥성할 때는 천하가 화합했고 사이(四夷)들까지 교화되어 의를 숭상하고 덕을 그리워하며 일치단결하여 천자를 함께 받들었습니다. 한 명의 사졸도 주둔시키지 않았으며 한 명의 전사도 싸움을 하지 않고도 사방팔방의 이족이 세운 대국들 중 복종시키지 않은 나라는 하나도 없었고,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거나 부역을 바치지 않는 나라도 없었습니다. 이윽고 주나라가 쇠퇴하자 서주와 동주로 분열되었고 천하에서는 아무도 조공을 바치지 않았음에도 주나라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덕이 박해서가 아니라 형세가 쇠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폐하께서는 풍패(豐沛)에서 몸을 일으켜 군사3천을 수습하여 곧바로 진격하여 촉한을 석권하시고 다시 관중으로 나와 삼진을 평정했으며 항우와 형양에서 싸워 성고(成皐)의 어귀를 두고 다투면서 대전은70회 소전은40회를 치루어 천하의 백성들 간과 뇌가 쏟아져 길바닥을 흥건히 적셨습니다. 또한 들판에 딩굴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해골은 이후 헤아릴 수 없이 많아 그것을 슬퍼하는 곡성 소리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부상자들은 아직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주나라가 가장 융성해진 성강(成康)의 치세 때와 비교하려고 하십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두 나라는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진나라의 땅은 산과 하수를 두르고 있어 사방이 견고한 요새입니다. 갑자기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기면 백만의 군사를 갖출 수 있습니다. 진나라 땅의 견고한 산천에 의지하고 참으로 아름답고 기름진 땅을 자산으로 삼을 수 있으니 이야 말로 하늘이 내려준 부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삼게 되면 산동에서 비록 란이 일어날 지라도 진나라 땅만은 험한 산천에 의지하면 온전히 보전할 수 있습니다. 무릇 다른 사람과 싸울 때 상대방의 목을 조르고 등을 치지 않고서는 싸움을 온전히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 폐하께서는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정하시어 진나라 땅의 험한 산천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바로 천하의 목을 조르고 등을 칠 수 있습니다.」 고조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자 고향이 모두 산동 출신의 신하들은 낙양은 수백 년 동안의 주나라 왕들이 도읍했으며 관중에 도읍한 진나라는2세 만에 망했다고 하면서 주나라를 본받아 낙양에 도읍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결국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유후(幽侯) 장량(張良)이 관중으로 도읍을 정해야 한다는 단호한 말을 듣고 그날로 거마를 움직여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정했다. 후에 황제가 말했다.

「원래 진나라 옛 땅에 도읍을 정하자고 말한 사람은 루경이다. 루(婁)는 유(劉)와 발음이 비슷하다.」

황제가 루경에게 유씨의 성을 내리며 랑중(郎中)에 임명하고 봉춘군(奉春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한7년 기원전200년, 한왕 신(信)이 모반하자 고조가 몸소 출전했다. 고조의 행렬이 진양(晉陽)에 이르렀을 때 한왕 신이 흉노와 힘을 합쳐 한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는 첩보를 받고 대노한 고제가 사자를 흉노에 보내 정탐해오도록 시켰다. 흉노가 건장한 군사들과 살찐 말들을 숨겨놓고 단지 노약자와 비루먹은 가축들만을 보여주었다. 사자들이10명이나 흉노진영에 다녀왔음에도 한결같이 흉노를 칠 수 있다고 말했다. 황제가 다시 유경을 흉노에 사자로 보냈다. 유경이 돌아와 고했다.

「두 나라가 서로 공격하는데 이는 마땅히 자신들의 장점을 부풀려 보여주는 법입니다. 오늘 신이 가보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비루먹은 가축과 노약자들 뿐이라 이는 그들의 단점을 일부러 보여주어 우리 한군을 유인하여 매복전으로 승리를 취하려는 기병계(奇兵計)가 틀림없습니다.」

이때는 이미 한나라 군사20만 명은 구주산(句注山)⑥을 넘어 흉노 땅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황제가 노하여 유경에게 욕지거리를 하며 꾸짖었다.

「제나라의 포로 놈아! 세 치 혓바닥으로 벼슬을 얻더니 오늘은 망언으로 우리 군사들의 진군을 막는구나!」

그리고는 유경을 족쇄와 수갑을 채워서 광무(廣武)에 가두었다. 고조가 계속 진군하여 평성(平城)⑦에 이르렀을 때 고제의 한군은 평성의 백등산에서 흉노의 기병(奇兵)에 의해 포위되었다가7일 만에 간신히 포위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고제가 광무로 돌아와 유경을 사면하며 말했다.

「내가 공의 말을 듣지 않아서 평성에서 곤경에 처했다. 내 이미 흉노를 쳐야 한다고 고한10명의 사자를 모두 처형했다.」

그리고는 유경을2천 호에 봉하고 관내후(關內侯)의 작위와 함께 건신후(建信侯)라는 봉호를 내렸다.

고제는 평성에서 철군하여 장안으로 돌아왔고 한왕 신은 흉노로 도망쳐 들어갔다. 그 당시 흉노의 대선우(大單于) 모돈(冒頓)⑧은 활을 당길 수 있는 강력한 군사30만을 이끌고 빈번히 중국의 북쪽 변경을 괴롭혔다. 황제가 걱정하여 유경에게 대책을 물었다. 유경이 대답했다.

「천하가 비로소 안정되었으나 군사들이 전투에 지쳐있음으로 무력으로는 흉노를 복종시킬 수 없습니다. 모돈은 그의 부친을 시해하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올라 부친이 거느린 여러 부인들을 취하고 힘으로써 위엄을 세우고 있으니 인의로써 설복시킬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의 자손들을 영원히 한나라의 신하로 만들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그렇게 하시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진실로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면 어찌 할 수 없겠는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폐하께서 만일 적실의 장공주를 목돈의 부인으로 보내면서 후한 예물을 내려준다면 한나라의 적실 공주와 후한 예물을 본 목돈은 비록 만이지만 필시 공주를 사모하여 선우의 정비인 연지(閼氏)로 삼고 후에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아 자신의 뒤를 잇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나라의 예물을 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매년 때가 되면 한나라에서는 남아도는 물건이나 흉노에서는 부족한 물품을 수시로 보내 위문을 하고 동시에 변사를 보내 그들에게 예절을 가르치게 하십시오. 모돈이 살아있을 때는 사위가 되고 그가 죽으면 외손자가 선우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저는 아직까지 외손자가 감히 외조부에게 결례를 했다는 일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군사를 내어 싸우지 않고도 점차적으로 신하로 삼을 수 있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장공주를 보낼 수 없다면 종실이나 후궁 중에서 뽑아 공주라고 말하게 된다면 언젠가는 그들도 알게 되어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곁에 두지 않게 될 것이니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좋은 계책이오!」

그래서 고조가 장공주를 흉노로 보내려고 했으나 여후가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첩에게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을 흉노에 내다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황제가 결국 장공주를 흉노로 보내지 못하고 종녀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장공주라고 꾸며 선우의 부인으로 보냈다. 유경이 사자로 가서 혼인으로 화친을 맺도록 했다.

  사자의 임무를 띠고 흉노를 다녀온 유경이 복명했다.

「흉노의 백양왕(白羊王)과 루번왕(樓煩王)이 살고 있는 하투(河套)⑨ 지역은 장안에서7백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경기병으로는 하루 낮과 밤이면 진중(秦中)⑩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진중은 최근에 전화를 입어 백성들은 적지만 땅은 비옥하여 백성들을 이주시켜 더 채울 수 있습니다. 무릇 제후들이 처음 일어설 때 제나라의 여러 전씨들과 초나라의 소(昭), 굴(屈), 경(景) 씨 등의 협조가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비록 관중에 도읍을 정하시고 계시지만 실제적으로는 인구가 적습니다. 북쪽으로는 흉노의 외적과 가깝고 동쪽으로는 세력이 강한6국의 종족들이 여전히 남아있어 어느 날 아침 변란이라도 일어난다면 폐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베고 침상에 누워 잠을 편히 주무실 수 없게 됩니다. 바로옵건대 폐하께서는 제나라 지역의 여러 전씨들과 초나라의 소(昭), 굴(屈), 경(景) 등의 세 종족과, 연(燕), 조(趙), 한(韓). 위(魏) 등의 후예들과 호걸 및 명가를 관중으로 이주시키십시오. 그렇게 하여 나라에 일이 없을 때는 흉노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고, 제후들이 란을 일으켰을 때는 역시 충분한 병력으로 동쪽으로 나아가 토벌할 수 있습니다. 이는 나라의 근본을 강하게 하게 말단을 약화시키는 방법입니다.」

「훌륭한 계책이오」

그리고는 즉시 유경을 책임자로 임명하여 그가 말한대로10여 만의 호구를 관중으로 이주시켰다.

숙손통(叔孫通)은 제나라의 설(薛) 출신이다. 진나라 때 문학으로 불려가서 박사로 임용되기 위해 조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년이 지나자 진승이 산동에서 일어나자 사자로 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이세 황제는 박사들과 여러 유생들을 불러 물었다.

「초나라 국경을 지키던 병사들이 기현(羈縣)⑪을 공격하고 진성(陳城)으로 들어갔다고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떻게 생각하오?」

30여 명에 이르는 박사와 유생들이 이세황제 앞에서 말했다.

「남의 신하된 자는 자의적으로 군사를 거느릴 수 없습니다. 군사를 거느렸다 함은 즉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죽을 죄에 해당하오니 폐하께서는 즉시 군사를 내어 그들을 토벌하십시오.」

이세황제가 노하여 안색이 변하자 숙손통이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여러 박사들과 유생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천하는 모두 황실 한 곳으로 합해져 군과 현의 성들은 모두 무너뜨리고 더욱이 병장기들은 모두 녹여 천하에 그것들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또한 위로는 명철한 황제가 계시고 아래로는 법령이 구비되어 있어 사람마다 본연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여 바퀴살이 바퀴를 향해 쏟아지듯이 사방에서 사람들이 물밀듯이 모여들고 있는데 어찌 감히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있겠습니까? 이는 단순한 도적으로써 쥐새끼가 곡식을 훔치고 개가 물건을 물어가는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가치 있는 이야기이겠습니까? 군수나 위(尉)에게 령을 내려 추포하면 되오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세황제가 기뻐하며 말했다.

「옳은 말이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혹자는 반란군이라고 하고 어떤 자는 도적이라고 했다. 이에 이세황제는 어사에게 명하여 박사와 유생 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한 자들을 붙잡아 형리에게 넘겨 치죄토록 했다. 그 까닭은 그들은 한 말은 옳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제생(諸生)들 중 도적이라고 말한 자들은 모두 용서하여 그대로 돌아가게 했다. 이어서 이세황제는 숙손통에게 비단20필과 의복 한 벌을 하사하고 박사에 제수했다. 궁에서 나와 숙사에 돌아온 숙손통에게 제생들이 말했다.

「선생은 어찌하여 아첨하는 말을 올렸습니까?」

「여러분들은 모르십니까? 제가 하마터면 호랑이 입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음을!」

그는 즉시 도망쳐 설(薛)로 돌아갔다. 그때 설은 항복하여 초나라의 땅이 되어 있었다. 이윽고 항량이 설로 들어오자 숙손통이 찾아가 귀의했다. 얼마 후에 항량이 정도(定陶)에서 진나라 군사들과 싸워 전사하자 회왕을 따랐다. 회왕이 의제(義帝)가 되어 장사(長社)로 거처를 옮길 때 숙손통은 팽성(彭城)에 머물러 항왕(項王)을 섬겼다. 한2년 기원전205년, 한왕이 다섯 제후들과 함께 팽성에 입성하자 숙손통은 한왕에게 항복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한왕이 항왕의 반격을 받아 싸움에서 지고 서쪽으로 후퇴할 때 숙손통도 그 뒤를 쫓아 끝까지 한나라를 따랐다. 한왕은 유생의 복장을 하고 다니는 숙손통을 매우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복장을 바꿔 초나라 풍의 짧은 의복을 입고 다녔다. 한왕이 매우 기뻐했다. 숙손통이 한나라에 항복했을 때 그를 따르던 유생들과 제자들이1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숙손통은 그들 중 한 사람도 천거하지 않고 오로지 옛날 도적들 무리에 있었던 장사들만을 천거했다. 제자들이 몰래 숙손통을 비난하며 말했다.

「선생을 모신지 몇 해가 지나 다행히 한나라에 항복하여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날 선생은 우리들을 한 사람도 천거하지 않고 교활한 자들만 천거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숙손통이 전해 듣고 그들에게 말했다.

「한왕은 이제 바야흐로 시석을 무릅쓰고 싸워 천하를 다투고 있는 중이다. 너희들은 그런 싸움을 능히 수행할 수 있는가? 그래서 먼저 적장의 목을 베고 적기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들을 천거했다. 너희들은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잊지 않고 있다.」

한왕은 숙손통을 박사에 임명하고 직사군(稷嗣君)이라는 호칭을 내렸다.

한5년 기원전202년, 천하가 이미 합쳐져 제후들은 정도(定陶)에서 한왕을 황제로 추대할 때 숙손통은 그 의식을 주재했다. 고제는 가혹한 진나라 법을 폐하고 복잡한 의례를 간소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군신들이 연회석 상에서 서로 공을 다투다가 심지어는 술에 취해 망동하며 검을 뽑아들고 기둥을 내려치는 자들도 있었다. 고제가 보고 매우 근심했다. 황제가 그런 일들을 날이 갈수록 더 싫어하고 있음을 본 숙손통이 황제에게 말했다.

「무릇 유자들과는 앞으로 달려가 무엇을 빼앗아 오는 일은 못하지만 수성은 할 수 있습니다. 신에게는 노나라에서 데려온 유생들이 있습니다. 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의례를 일으켜보고 싶습니다.」

「만드는데 어렵지 않겠소?」

「오제는 각기 다른 음악을 즐겼고 삼왕의 예는 서로 달랐습니다. 예란 시대와 사람들의 정서에 따라 간략하게 하기도 하고 화려하게도 합니다. 고로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예는 빼기고 하고 더하기도 해서 서로 중복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원컨대 고대의 예법과 진나라의 의례를 취해 한나라의 의례를 만들고자 합니다.」

「시험삼아 만들어 보시오. 그러나 사람들이 쉽게 알게 하고 내가 능히 행할 수 있게 하시오.」

  그래서 고제는 숙손통을 시켜 노나라에서 유생들30여 명을 데려오게 했다. 노나라의 유생 두 사람이 같이 장안으로 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했다.

「공께서는 지금까지10명의 주인을 섬겼소. 그들 앞에서 아첨하여 친해지고 귀하게 되었소. 오늘 날 천하는 가까스로 안정되었지만 죽은 사람은 미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부상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소. 그런 와중에 예악을 다시 일으키려고 하고 있는데 예악이라는 것은100년 동안 덕을 쌓은 이후래야 일으킬 수 있소. 그래서 우리는 공이 하려는 일을 따를 수 없소. 공이 하려는 일은 옛 법에 맞지 않으니 우리는 가지 않겠소. 공은 가시고 우리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시오!」

숙손통이 웃으면서 말했다.

「시세의 변화를 모르는 참으로 고루한 유자로다!」

숙손통은 노나라에서 뽑은30명의 유생들과 함께 장안으로 들어가 황제 곁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들 및 제자들 합쳐100여 명과 함께 야외에 새끼줄을 치고 풀로 띠를 엮어 의례를 제정하는 장소로 삼았다. 한 달여 동안 시연한 숙손통이 황제에게 가서 고했다.

「황제께서 한 번 관람해 보십시오.」

황제가 유생들이 행한 의례를 보고 말했다.

「이 정도라면 내가 능히 행할 수 있겠소」

이어서 군신들에게 의례를 익히도록 해서10월 정초에 거행하는 조회에서 시행하기로 했다.

한7년 기원전200년, 장락궁(長樂宮)이 준공되어 제후와 군신들이 모두 10월 신년조회에 참가했다. 의례는 이러했다.

『날이 밝기 전에 알자가 예를 주관하는데 조회에 참석하는 자들을 자례로 전당의 문을 통해 들어왔다. 궁정의 뜰에는 거마, 기병, 보졸 등을 시켜 궁궐을 호위하게 하고 각종 병장기와 깃발과 휘장을 세웠다. 알자가 ‘뛰어 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전당 밑에는 낭중들이 계단을 끼고 계단마다 수백 명씩 도열했다. 공신들과 제후, 장군들, 군리들이 순서에 따라 서쪽에 도열하여 동쪽을 바라보고 승상 이하 문관들은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보며 도열했다. 대행(大行)⑫은9명의 의례를 담당하는 관리를 데리고 황제의 명령을 전달했다. 이윽고 황제가 봉련(鳳輦)을 타고 임하자 백관들은 기치를 들어 정숙한 자세를 취하고 제후 이하6백석 이상의 관리들을 인도하여 순서대로 하례를 올렸다. 이렇게 하자 제후왕 이하 그 누구도 두려움에 떨며 숙연한 자세로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이윽고 의례가 끝나고 주연이 시작되었다. 전당 위의 여러 시자들이 모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가 존비의 순서에 따라 일어나 황제에게 축수했다. 이윽고 술잔이 아홉 번 오고 간 뒤에 알자가 ‘주연이 끝났다!’라고 외쳤다. 어사가 법을 집행하여 의식을 위반하는 자들은 재빨리 회장에서 데리고 나갔다. 마침내 정식의 의례를 끝내고 주연을 열어 즐겼는데 아무도 감히 시끄럽게 굴어 예를 범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에 고제가 말했다.

「내가 오늘에서야 황제가 귀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즉시 황제는 숙손통을 태상(太常)⑬에 임명하고 오백 금을 상으로 하사했다.

숙손통이 그 기회를 틈타 황제에게 진언했다.

「신을 따라다닌 지 이미 오래인 제자들이 신과 함께 의례를 제정했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그들에게 관직을 내려주십시오.」

고제가 그들 모두를 랑(郞)으로 임명했다. 궁에서 나온 숙손통은 상으로 받은 오백금을 모두 그의 제자들과 유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제생(諸生)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했다.

「숙손선생은 당대의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진실로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9년 기원전198년, 고제가 숙손통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한12년 기원전195년, 고제가 태자를 바꿔 조왕 여의(如意)를 새로 세우려고 하자 숙손통이 간했다.

「옛날 진헌공(晉獻公)이 여희(驪姬)로 인해 태자 신생(申生)를 폐하고 해제(奚齊)를 세워 그 결과 진나라는 수십 년간 혼란에 빠져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또한 진나라가 일찍 부소(扶蘇)를 태자로 정하지 않아 조고로 하여금 사술을 부려 호해를 황제로 세우게 하여 결국 제사마저 끊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 일은 폐하께서 직접 보신 일입니다. 지금 태자가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사실은 천하가 모두 들어 알고 있습니다. 또한 여후께서는 폐하를 따라다니면서 고생을 참고 견디며 보잘 것 없는 음식을 먹으며 살아왔는데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곡 적자를 폐하고 어린 아들을 세우시려고 하신다면 바라건대 신을 먼저 죽이십시오. 저의 목에서 흘리는 피로 이곳을 더럽히겠습니다.」

「공은 그만 하시오. 내가 농담 한 번 해봤을 뿐이오.」

「태자는 천하의 근본입니다. 근본이 한 번 흔들이면 천하가 진동합니다. 어찌 천하를 두고 농담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내가 공의 말대로 하리라!」

그리고 얼마 후에 황제는 연회를 열어 유후 장량이 빈객으로 초빙한 상산사호(商山四皓)가 태자를 따르고 있는 모습을 보고 태자를 바꾸려는 생각을 중지했다.

그 해에 고제가 죽고 그 뒤를 이은 효혜제가 숙손통을 불러 말했다.

「선제의 원릉(園陵)과 침묘(寢廟)를 참배하는 의례를 아는 자가 없습니다.」

혜제는 숙손통을 태상으로 다시 옮기도록 해서 종묘에 대한 의례를 제정하도록 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적으로 한나라의 여러 의례에 관한 규정이 정해졌음은 모두 숙손통이 태상으로 있으면서 세운 공이다.

혜제가 동쪽의 장락궁에 기거하고 있는 여태후에게 문후를 드리며 오가다가 사람들의 통행을 막아 번거롭게 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복도를 만들기 위해 무고(武庫)의 남쪽에서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숙손통이 기회를 보아 그 일에 관해 상주했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고제의 묘 위로 복도를 만드십니까? 참배할 때 입는 의관을 달마다 고제묘로 옮기게 되어 있습니다. 고묘는 한나라를 일으킨 태조의 묘인데 어찌하여 후세의 자손들로 하여금 종묘의 위를 밟고 다니게 할 수 있습니까?」

혜제가 크게 두려워하며 말했다.

「빨리 허물어버리시오.」

「다른 사람의 임금 되는 사람은 잘못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공사는 이미 시작되어 백성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건물을 부셔버리면 그것은 황제의 잘못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원래의 사당을 위수 북쪽에 따로 지어 매월 내가는 고제의 의관을 그곳에 두도록 하십시오. 종묘를 넓히고 많이 짓는 일은 큰 효도의 근본입니다.」

황제가 해당 관리에게 조명을 내려 사당을 짓도록 했다. 사당이 완성되자 복도는 그대로 남게 되었다. 혜제가 일찍이 이궁으로 놀이를 나가게 되었을 때 숙손통이 말했다. 「옛날에는 봄이 되면 햇과일을 종묘에 바쳤습니다. 지금 앵도가 잘 익어 종묘에 바칠만 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놀이를 나왔으니 앵두를 가지고 돌아가셔서 종묘에 바치십시오.」

황제가 허락했다. 이로써 여러 과일들을 제사상에 바치기 시작한 원인이 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옛말에 ‘천금이 나가는 갖옷은 한 마리의 여우 겨드랑이 털만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높은 누각의 서까래는 한 그루의 나무만으로 만들 수 없다고 했듯이 하은주(夏殷周) 삼대의 의례는 재사 한 사람의 지혜만으로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다.’라고 했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무릇 고조가 미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해내를 평정할 수 있었음은 뛰어난 지모와 계책으로 용병했음으로 가히 온 힘을 다 기우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레의 끌채를 풀고 한 번 유세하여 한나라를 만세의 안정을 누리게 했으니 지혜가 어찌 한 사람만이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숙손통은 세상의 시무를 헤아릴 수 있는 보기 드믄 인재로써 의례를 제정해 나아가고 물러나는 절차를 밝혔으니 시세의 변화에 밝아 마침내는 한나라 유가의 조종이 되었다. ‘대도는 마치 굽어보이고 원래 길은 구불구불하다.’고 했다. 이 어찌 옳은 말이 아니겠는가?」

《유경숙손통열전 끝》

주석

①후직(后稷) : 주나라를 세운 주족(周族)의 시조다. 제곡(帝嚳)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그 모친 강원(姜嫄)이 외출을 나갔다가 우연히 거인의 발자국을 밟게 된 후에 임신을 하게 되어 후직이 태어났다. 이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갓난아이를 멀리 내다 버리게 했으나 뭇 짐승들이 기를 보호했음으로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여 다시 거두어 길렀다. 그의 이름 기(棄)는 이 일에서 연유되었다. 기가 성장하면서 농사 짓는 일을 좋아하여 씨을 뿌리고 수확하는 법에 정통하게 되었다. 요임금이 후직을 농사(農師)에 임명하여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순임금이 그를 태(邰)에 봉했다. 주족은 후직으로 인해 인류최초로 기장과 보리를 기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 주족은 그의 이름에 직(稷)자를 붙여 불렀다. 후세에 이르러 농사를 관장하는 신으로 받들어 졌다.(周本紀)

②공류(公劉) :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의 후예로 선조들을 따라 융적의 땅에서 살았지만 다시 후직의 업을 일으켜 농사의 일을 돌보며 종족들을 위해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과 곡식의 종자를 찾아 나섰다.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고 다시 위수(渭水)를 건너 목재를 벌목하여 가져와 종족들이 같이 사용할 수 있도록 나누어주었으며 종족들 중 외지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여비를 주고 나가지 않고 종족들과 같이 사는 사람에게는 그들을 위해 저축을 해 주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편안하게 되었다. 다른 종족들도 모두 그의 선행에 감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에게 귀의하였다. 주나라의 기업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인들이 노래를 불러 그의 덕을 칭송했다. 공유가 죽고 그의 아들 경절(慶節)이 뒤를 잇고 빈(豳) 땅에 도읍 하여 나라를 세웠다.

③빈(豳) : 현 섬서성(陝西省) 순읍현(旬邑縣) 서남쪽. 주나라를 세운 주족(周族)의 원주지(原住地)다. 이곳에 거주하던 주족을 주문왕(周文王)의 조부인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건너 지금의 기산(岐山) 밑으로 이주시켰음.

④태왕(太王) : 고공단보(古公亶父)라고도 하며 공류의9대 손으로 주문왕(周文王)의 조부다. 원래 지금의 섬서성 순읍현(旬邑縣)인 빈(豳) 땅에 살던 주족을 고공단보가 이끌고 기산(岐山) 밑의 주원(周原)으로 이주하였다. 고공단보의 증손인 주무왕이 천하를 통일하고 주왕조를 세우자 고공단보를 태왕으로 높였다. 원래 태백(太伯), 우중(虞仲). 계력(季歷) 등의 세 아들을 두었으나 막내인 계력의 아들 주문왕이 가장 현능했음으로 자기의 후사를 계력에 전해 주문왕으로 이어지게 할려고 했다. 이에 태백과 중옹은 남만으로 달아나 계력에게 양보했음으로 주문왕이 주족의 수장 자리를 이어받아 마침내는 주왕조를 창건할 수 있었다.

⑤다음은 주본기의 우후와 예후의 송사에 관한 기사다.

『우(虞)와 예(芮)나라 사이에 영토 다툼이 일어나 해결할 방도를 찾지 못하자 그에 대한 판결을 서백에게 의뢰하려고 했다. 우와 예의 군주가 송사의 판결을 서백에게 부탁하기 위해 주나라 경계에 들어와 보니 농부들은 모두 자기 밭의 경계를 상대방에게 양보하고 젊은 사람들은 모두 나이 먹은 어른들을 공경하고 있었다. 우와 예의 군주가 서백을 만나보기도 전에 부끄럽게 생각하여 서로 말했다. ‘우리가 국경 문제로 다투는 것은 주나라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라 지금 서백을 찾아가 봤자 우리 스스로가 욕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다투고 있던 땅을 서로가 양보하였다. 제후들이 이에 대한 일을 듣고서 모두 말했다. ‘서백이 장차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 천자가 되겠구나!’

⑥구주산(句注山) : 지금의 하북성 대현(代縣) 서북의 안문산(雁門山)의 옛 이름으로 안문관(雁門關)은 고대부터 흉노의 침입에 대한 방어기지로 유명했다.

⑦평성(平城) : 지금의 산서성 대동시(大同市) 부근이다.

⑧모돈(冒頓)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174년에 죽은 흉노족의 군왕으로 성은 연제(攣鞮)다. 기원전209년 그의 아버지 두만(頭曼)을 시해하고 대선우의 자리에 올라 내정과 군제을 개혁하여 흉노의 세력을 크게 신장시켜 주위의 東胡, 丁零, 月氏, 樓蘭, 烏孫, 樓煩, 白羊 등의 부족들을 공격하여 통일시켰다. 진나라 때 河套 지역을 수시로 공격하기 시작해서 서한 초 때까지 중국의 변경을 어지렵혔다.

⑨하투(河套) : 북쪽으로 흐르는 황하(黃河)는 음산(陰山)산맥의 남쪽 기슭에서 만곡하는 부분과 만리장성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로 사막 ·초원 ·염호(鹽湖)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르도스란15세기 중엽 이후 이곳이 내몽골 여러 부(部)의 하나인 오르도스부의 목축지를 이룬 데서 연유한 것으로서 현재 어얼둬쓰[鄂爾多斯]라고 표기하나, 본래 중국에서는BC 3세기 이래 하남(河南), 후에는 하투(河套) ·투중(套中) 등으로 불렀으며, 몽골 유목민과의 교섭 또는 공방(攻防)의 요지로 삼아 왔다

⑩진중(秦中) : 고대의 지명으로 지금의 섬서성 중부 평원지대를 말한다. 춘추전국 시대 진(秦)나라의 근거지였음으로 생긴 지명이다. 관중(關中)과 함께 섬서성의 위수(渭水) 유역의 평원을 칭하는 지명이다.

⑪기현(羈縣) : 전국 때 초나라 영토로써 지금의 안휘성 숙주시(宿州市) 동남으로 진승(陳勝)이 진나라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곳이다.

⑫대행(大行) :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중국 고대왕조의 관명으로 제후들과 이민족들과 사무를 관장했다. 진나라와 한나라 초기에는 전객(典客)이라는 명칭으로9경 중의 한 명이다. 한경제 때 대행령(大行令)으로 개칭했다가 무제(武帝) 때 대홍려로 다시 변경했다.

⑬태상(太常) : 종묘(宗廟)의 의례(儀禮)를 관장했던 한나라의 구경(九卿) 중의 하나로 진나라 때 봉상(封常)으로 불리다가 한경제 때 태상으로 바꿨다. 봉록은2천석으로 일반적으로 충효(忠孝)스럽고 몸가짐이 조신하고 덕이 높은 사람을 임명했다.

목록
8846
[일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6

오자서(伍子胥) 열전5. 1073. 維建遇讒(유건우참), 태자건(太子建)이 비무극으로부터 참소를 당해 1074. 爰及子奢(원급자서), 그 화가 오
양승국 04-05-12
[일반] 외전. 도주공(陶朱公) 범려(范蠡)

외전 범려(范蠡) 범려외전(范蠡外傳)은 사마천의 사기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편과 화식열전(貨殖列傳)의 범려 부분을 발췌
양승국 04-05-12
[일반] 외전1. 순우곤(荀于髡)

순우곤(荀于髡)  순우곤은 제나라 사람이다.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아 어떤 특정한 주제를 가리지 않고 모두 배웠다. 그가 유세하거나 간
운영자 12-12-05
[일반] 외전2. 보임안서(報任安書)

보임안서(報任安書) 【보임안서(報任安書)】 【보임안서(報任安書)】 《임안에게 보내는 답장[보임안서(報任安書)]》은 사마천(司馬遷)이 한
운영자 12-12-16
[일반] 외전4. 자산(子産) 공손교(公孫僑)

외전 4. 자산(子産) 정간공(鄭簡公) 원년 기원전 565년 여러 공자들이 모의하여 자사(子駟)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자사가 미리 알고 무리를 모아
운영자 12-12-17
[일반] 외전5. 섭정(聶政)

學琴報仇(학금보구) 전국 때 섭정(聶政)의 부친은 한나라 왕을 위해 칼을 만들다가 기한을 넘기도록 만들지 못해 한왕의 명령에 의해 살해 되
운영자 13-01-13
[일반] 원앙조조열전(袁盎鼂錯列傳) 41

열전41. 袁盎鼂錯(원앙조조) 원앙은 초나라 출신으로 자는 사(絲)다. 그의 부는 과거에 도적떼였다가 안릉(安陵)에 이사와서 살았다.
운영자 10-06-13
[일반]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47. 두영과(竇嬰) 전분(田蚡)

열전47. 두영전분(竇嬰田蚡) 1269. 吳楚爲亂(오초위란), 오초가 연합하여 란을 일으켰을 때 1270. 宗屬唯嬰賢而喜士(종속유
운영자 10-06-15
[일반] 위장군표기(衛將軍驃騎列傳) 51. 衛靑·霍去病(위청곽거병)

열전51. 衛靑·霍去病(위청곽거병) 1287. 直曲塞(직곡색), 구불구불한 변새의 길을 똑바르게 했으며 1288. 廣河南(광하남), 하남의
운영자 10-08-23
[일반]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30

열전30. 魏豹彭越(위표팽월) 위표(魏豹)는 옛날 위나라 왕실의 공자출신이다. 그의 형 위구(魏咎)는 옛날 위나라가 망하기 전 영릉군(寧陵君)에
운영자 07-12-25
[일반]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39

열전39. 劉敬叔孫通(유경숙손통) 유경(劉敬)은 제나라 사람이다. 한5년 기원전202년, 농서(隴西)로 군역을 나가면서 낙양을 지나가다가 그때
운영자 09-07-31
[일반] 유림열전(儒林列傳)61

1336. 自孔子卒(자공자졸), 공자가 죽은 이래 1337. 京師莫崇庠序(경사막숭상서), 도성의 사람들은 아무도 교육의 필요성을 중시하지 않았다.
운영자 10-10-05
[일반] 유협열전(游俠列傳)64

열전64. 游俠(유협) 한비자가 말했다. 「유자(儒者)는 글로써 법을 어지럽게 하고 협객은 무로써 법을 범한다.」 그래서 두 부류를 모두 비판
운영자 12-08-27
[일반] 이사열전(李斯列傳) 27

열전27 이사(李斯) 1. 鼠在所居 人固择地(서재소거 인고택지) - 쥐도 거처하는 곳에 따라 다르니 사람이야 말로 머무를 데를 택해야 한다.-
양승국 07-05-27
[일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49. 이광(李廣)

열전49. 李廣(이광) 1277. 勇于當敵(용우당적), 적을 만나면 용감했고 1278. 仁愛士卒(인애사졸), 휘하의 군졸들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랑
운영자 10-06-16
[처음][이전][1][2][3] 4 [5][6][다음][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