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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앙조조열전(袁盎鼂錯列傳)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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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41. 袁盎鼂錯(원앙조조)


원앙은 초나라 출신으로 자는 사(絲)다. 그의 부는 과거에 도적떼였다가 안릉(安陵)에 이사와서 살았다. 고후(高后) 시절 원앙은 여록(呂祿)의 사인(舍人)으로 있다가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형인 원쾌(袁噲)의 추천으로 중랑(中郞)이 되었다.


강후(絳侯) 주발(周勃)이 승상이 되자 조회가 끝날 때는 항상 빠른 걸음으로 물러나오는데 그 태도가 의기양양했다. 황제가 예로써 그를 극히 공경하게 대하며 전송하곤 했다. 원앙이 보고 진언했다.

" 승상은 어떤 사람인데 그렇게 공경하는 태도로 대하십니까? "

황제가 대답했다.

" 사직지신(社稷之臣)이기 때문이오."

원앙이 말했다.

" 강후는 공신(功臣)이지 사직지신이 아닙니다. 사직지신이란 군주가 살고있으면 같이 살고 군주가 죽으면 같이 죽는 사람입니다. 옛날 여후의 치세시 제려(諸呂)가 정권을 장악하여 자기들 멋대로 제후왕을 칭하니 유씨들은 겨우 명맥만 이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강후 주발은 태위의 직분으로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여후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대신들과 함께 제려(諸呂)을 배반하고 태위의 직분을 되찾아 군사를 장악하여 거사에 성공했음으로 공신이 되었지 사직지신은 아니었습니다.

승상의 직위에 있는 신하의 몸으로 그 주군에게 교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으나 황제께서는 오히려 겸양하시니 그것은 신하와 군주가 서로 예를 잃는 행위로써 삼가 폐하께서 취하실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조회에서 황제는 더욱 위엄을 갖추니 승상 주발은 더욱 두려워했다. 일이 이미 그렇게 되자 강후 주발은 원앙을 원망했다.

" 나는 그대의 형과 교분이 깊은 친구 사이거늘 어찌 지금 어린 네가 조정에서 나를 비난하는가? "

그러나 원앙은 결코 강후에게 사죄하지 않았다. 이윽고 강후가 승상의 직에서 면직되어 자기의 봉국으로 낙향하자 국인들이 서장을 올려 그가 반란을 획책한다고 고변하니 그는 포승줄에 묶여 잡혀와 청실(淸室)1)에 갇혔다. 종실의 여러 공들이 아무도 감히 그를 위해 변호를 하지 못했으나 오로지 원앙만이 강후는 죄가 없다고 상주했다. 강후의 석방은 오로지 원앙이 힘써 변호한 덕분이었다. 강후는 그 즉시 원앙과 깊은 교분을 맺었다.

회남여왕(淮南厲王) 유장(劉長)2)이 조현을 올리기 위해 입조했다가 벽양후(辟陽侯)3)를 죽였는데 그 태도가 매우 거만했다. 그래서 원앙이 황제게 상주했다.

“ 회남왕은 반드시 환란을 일으킬 것이니 마땅히 그를 책하시고 봉국의 영토를 깎으십시오. ”

그러나 황제는 원앙의 말을 듣지 않았다. 회남왕이 더욱 전횡하여 극포후(棘蒲侯) 시무(柴武)4)의 아들 시기(柴奇)와 함께 반란을 모의했다. 시무를 잡아 치죄한 결과 회남왕이 연좌되었음으로 황제는 그를 촉(蜀) 땅으로 유배형에 처해 함거에 가두어 압송하도록 했다. 그때 중랑장(中郞將)이었던 원앙이 보고 황제에게 간했다.

" 폐하께서는 평소에 회남왕을 스스럼없이 대하여 그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들어 조금도 금하지 않아 지금의 이런 상황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를 꺾어버리시고 험한 길을 가게 하셨으니 만일 그가 길을 가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폐하께서는 커다란 천하를 갖고 계시면서 동생 하나를 용납하지 못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죄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를 어찌하시려고 하십니까? "

황제가 듣지 않고 마침내는 원래 명한 대로 시행하라고 했다. 회남왕은 결국 옹(雍)에서 병사했다. 소식을 들은 황제는 음식을 끊고 심히 애통해 하며 곡했다. 원왕이 입조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죄를 청하자 황제가 말했다.

“ 경의 말을 듣지 않아 일이 이렇게 되었다!”

원앙이 다시 말했다.

“ 황제께서는 스스로 마음을 넓게 하십시오. 일이 이왕 그렇게 되었으니 후회한들 어쩌겠습니까? 더욱이 황제께서는 이 번 일로 세 가지의 높은 뜻을 행하셨으니 세상에 이름을 훼손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

황제가 물었다.

“ 내가 세상에 행한 세 가지의 높은 뜻이 무엇이오? ”

“ 폐하께서 대왕(代王)으로 계실 때에 3년 동안 병상의 태후를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옷도 갈아입지 않으며 약을 끓여 폐하께서 몸소 맛을 보지 않고는 결코 바치지 않으셨습니다. 무릇 포의(布衣)의 증삼도 행하기 어려웠던 일을 오늘 황제폐하께서 존귀한 몸으로 친히 몸가짐을 바르게 하시니 그것은 증삼도 따라하기 어려운 효도였으니 그것이 하나입니다.

무릇 제려(諸呂)가 권력을 잡고 대신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행할 때 폐하께서는 6승의 수레만을 이끌고 대(代) 땅을 떠나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못과 같이 위험한 곳에 납시었으니 그 용기는 비록 맹분(孟賁)5)과 하육(夏育)6)과 같은 용사라도 미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 두 번째입니다.

폐하께서 경사(京師)에 있는 대왕(代王)의 저택에 이르렀으나 서쪽으로 향해 앉아 두 번이나 황제를 자리를 사양했으며 남쪽을 향해 앉아 황제의 자리를 양보한 회수가 세 번이나 됩니다. 이것은 천자의 자리를 네 번 사양한 허유(許由)7)보다 많은 것입니다. 이것이 그 세 번째입니다.

폐하께서 회남왕을 촉 땅으로 옮겨 살게 한 목적은 그를 고생시켜 그의 잘못을 고치게 하려고 했음이나 관리가 태만하여 병으로 죽은 것입니다. ”

원앙의 말에 마음이 누그러진 황제가 물었다.

“ 그러면 어찌해야 하겠소? ”

“ 회남왕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으니 그들 모두는 오로지 폐하의 처분에 달려있습니다. ”

그래서 문제는 회남왕의 세 아들을 모두 제후왕에 봉했다.8) 이로써 원앙은 조정에서 이름이 더욱 중하게 되었다. 원앙은 이와 같이 대국적인 도리를 이끌어 내어 비분강개했다. 그때 조동이라는 환관이 황제에게 총애를 받아 항상 원앙을 해치려고 하여 원앙이 근심했다. 원앙의 형 아들에 원종(袁種)이라고 있었다. 그는 상시기(常侍騎)9)로 부절을 지니고 항상 황제의 곁에서 시종했다. 원종이 그의 숙부인 원앙에게 발했다.

“ 숙부께서는 조정에서 그와 싸워 욕을 보이시어 그가 비방하는 바를 황제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십시오. ”

이윽고 황제가 출타하자 조동이 어가에 참승(驂乘)으로 동승했다. 원앙이 황제가 지나가는 길 앞에서 숨어있다가 일어나 황제에게 말했다.

“ 신이 듣기에 높이가 6자 높이의 어가를 함께 타는 참승은 모두 천하의 호걸이나 영웅이었습니다. 지금 비록 한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나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유독 형벌을 받아 신체의 부위를 훼손당한 자를 태우고 다니십니까? ”

그러자 황제께서 웃으시면서 조동을 어가에서 내리게 하지 조동은 눈물을 흘리며 수레에서 내렸다.

문제가 패릉(覇陵)에 오른 후에 서쪽의 험준한 구릉을 향해 수레를 달리게 하려고 하자 원앙이 말을 타고 수레와 나란히 하여 수레를 끄는 말의 고삐를 잡고 천천히 가게 했다. 황제가 보고 말했다.

“ 장군은 겁이 많은가? ”

원앙이 대답했다.

“ 신은 듣기에 천금의 부자집 귀한 자식은 처마 밑에서 놀지 않으며 백금의 부자집 자식은 높은 누각의 란간에 매달리게 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성스러운 군주는 위험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지 않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폐하께서 6필의 말이 끄는 험준한 산길을 달리려고 하시는데 혹시 말이 놀라 수레가 전복되기라도 한다면 막중하신 폐하께서는 결국 몸을 가볍게 처신하게 되는 처사이니 무슨 면목으로 고조의 묘당을 배알할 수 있으며 태후를 뵐 수 있겠습니까? ”

황제가 즉시 달리려는 생각을 멈추었다.

황제가 상림원으로 거동할 때 두황후(竇皇后)와 신부인(愼夫人)이 따라왔다. 황후와 신부인이 궁중에 거할 때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황제의 일행이 당도하여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랑서장(郞署長)이 배치한 좌석 중에서 원앙이 걸어가 신부인의 좌석을 끌어 뒤로 물리쳤다. 신부인은 노하여 자리에 앉으려고 하지 않고, 황제 역시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궁궐로 돌아갔다. 원앙이 뒤따라가 황제를 뵙고 고했다.

“ 신은 듣기에 존귀함과 비천함은 그 서열이 분명해야 상하가 서로 화합한다고 했습니다. 금일 폐하께서 이미 황후를 세우셨으니 신부인은 즉 첩실입니다. 첩실과 정부인을 어찌 동열에 같이 앉힐 수 있습니까? 폐하께서 첩실을 사랑하신다면 후하게 상을 내리십시오. 폐하께서 신부인을 대하시는 바는 후에 신부인에게 필시 화가 미치게 됩니다. 폐하께서는 옛날 사람돼지10)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이에 황제가 기빠하여 신부인을 불러 원앙의 깊은 뜻을 전했다. 신부인이 원앙에게 황금 50근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원앙이 직간을 자주하니 조정에 오래 있지 못하고 외직으로 나가 농서도위(隴西都尉)가 되었다. 원앙은 사졸들을 인자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니 사졸들은 모두 싸움에 나가 죽음을 다투었다. 제나라의 상국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후에 다시 오나라의 상국이 되었다. 오나라에 부임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 조카 원종(袁種)이 말했다.

“ 오왕(吳王)은 날이 갈수록 교만해지고 나라 안에는 간사한 무리들로 가득합니다. 지금 그들을 탄핵하고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숙부님을 황제에게 상서하여 고발하거나 아니면 칼을 예리하게 세운 후 찔러 죽일 것입니다. 남방의 오나라 땅은 지대가 낮고 습하여 숙부님은 매일 술이나 마시며 아무 일도 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때때로 오왕에게 모반하지 말라는 말만 하십시오. 그리하면 다행히 화를 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원앙이 원종의 말대로 따르니 오왕은 원앙을 후하에 대했다.

원앙이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도중에 우연히 승상 신도가(申屠嘉)를 만나 수레에서 내려 절을 하며 배알했다. 그러나 신도가는 수레에 탄 채로 원앙게게 답례만 했다. 원앙이 자기를 수행하는 관리들 보기에 부끄러워 그 죽시 승상의 관저로 찾아가 명패를 집어 넣어 승상의 알현을 청했다. 승상이 오랜 시간 후에 나와 원앙을 접견했다. 원앙이 무릎을 꿇고 주위를 물리쳐 잠시 동안 짬을 달라고 청했다. 승상이 말했다.

“ 그대가 하려는 말이 공적인 일이면 승상부의 관청에 나아가 장사(長史)나 연(掾)에 고하면 내가 보고 황제에게 고하겠소. 그렇지 않고 하려는 말이 사적인 일이라면 나는 사사롭게 그대와 말을 나누지 않겠소. ”

원앙이 다시 무릎을 끓더니 말했다.

“ 승상의 자리에 계신 대감께서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진평과 강후에 비해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승상이 대답했다.

“ 나는 결코 그들보다 못하오.”

“ 옳으신 말씀입니다. 공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그 두 사람보다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무릇 진평과 강후는 고제를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한 공로로 장군과 재상이 되었으며 다시 제려(諸呂)들을 주멸하여 유씨들의 나라를 보전했습니다. 그런데 공께서는 궁노수 출신의 무관으로 전쟁터를 누비다가 어떻게 백인대장의 자리에 올라 공적을 쌓았습니다. 그 공적으로 회양(淮陽)의 태수가 되었으나 그것은 기묘한 계책이나 야전이나 공성전에서 쌓은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대(代) 땅에서 올라오신 황제께서는 매일 조회에서 낭관이 소장을 올리면 어가를 멈추어 그 간언을 한 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었으며 그 상소가 맞지 않으면 버리고 쓸만하면 받아들여 한 번도 그 훌륭한 점을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어째서 이겠습니까? 그것은 즉 천하의 현능한 사대부를 불러들이고자 함이니 황제께서 듣지 못한 바를 매일 듣고, 알지 못한 것을 보게 되시니 날이 갈수록 현명해지시고 지혜롭게 되셨습니다. 그런게 공께서 오늘 스스로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아 스스로 우둔해지시고 계십니다. 무릇 현명하고 지혜로운 군주가 우매한 재상을 문책할 것이니 공께서는 머지않아 몸에 화를 입게 됨은 자명한 일입니다. "

승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원앙에게 재배하며 말했다.

" 이 사람은 비천한 야인 출신으로 무지한 사람입니다. 다행히 장군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

승상이 원앙을 인도하여 상객의 자리에 모셨다,

원앙은 평소에 조조(竈錯)를 싫어했다. 그래서 조조가 자리에 앉아있으면 원앙은 그 자리를 떴고 원앙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조조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앉아서 말을 나눈 적이 없었다. 효문제가 붕어하시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효경제는 태자시절 사부였던 조조를 어사대부로 삼았다. 조조는 밑의 관리를 시켜 원앙이 옛날 오왕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는지 조사하도록 시켰다. 원앙은 죄에 저촉되었으나 황제는 조명을 내려 사면하고 서인으로 만들었다.

오초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가 어사대(御史臺)의 관리들인 승(丞)과 사(史) 등에게 말했다.

" 오왕으로부터 많은 금품을 뇌물로 받은 원앙이 자기 멋대로 오왕의 음모를 감추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과연 반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내가 황제에게 청하여 원앙의 죄를 다스리려고 한다. 오왕의 반란 계획을 원앙이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

어사대의 관리들이 말했다.

" 반란이 일어나기 전이었다면 원앙을 치죄하여 그 음모를 끊어버릴 수 있었겠지만 지금 반란군이 이미 서쪽으로 진군하고 있으니 원앙을 치죄한다고 해도 아무런 실익이 없습니다. 그리고 원앙은 오왕의 음모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

조조가 주저하며 결정을 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조조의 일을 원앙에게 고하자 원앙은 두려워하여 야음을 틈타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의 집을 찾아가 오나라가 반란을 일으킨 연유를 설명하고 자기가 직접 황제을 알현하여 정황을 설명할 수 있도록 주선해달라고 청했다. 두영이 입궐하여 황제에게 원앙의 말을 전하자 황제는 원앙의 접견을 허락했다. 원앙이 입궐하여 황제의 면전에 서자 그 옆에 조조가 있었다. 독대하여 드릴 말씀이 있다고 주위 사람들을 물리쳐 달라는 원앙의 청을 황제가 황제가 허락하자 조조가 물러가면서 마음속으로 매우 한스러워했다. 원앙이 황제에게 구체적인 증거를 들어가며 오나라의 반란은 순전히 조조 때문이라고 하면서 시급히 조조를 참하고 오나라에 잘못을 시인하면 오나라는 군사를 물리쳐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상세한 이야기는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에 기록했다. 황제는 원앙을 태상(太常)11)에 두영을 대장군에 임명했다. 두 사람은 평소에 매우 친하게 지낸 사이였다. 오나라가 반란을 일으키니 장안 주변의 여러 능현(陵縣)12)의 벼슬하지 않은 장자(長子)들과 장안에 거주하는 현능한 대부들이 다투어 두 사람에게 달려와 그들이 끌고 온 수레가 하루에 수백 승에 달했다.

조조를 주살한 황제는 태상 원앙을 오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오왕이 원앙을 자신의 장군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원앙이 거절하자 오왕은 장차 죽이려고 한 사람의 도위에게 사졸 오백 명을 주어 원앙을 군중에 연금하고 지키게 했다. 원앙은 옛날 오나라의 상국으로 있을 때 종사(從史) 한 사람이 자기의 시녀와 몰래 통정했으나 원앙이 알고도 발설하지 않고 예전처럼 대했다. 어떤 사람이 종사를 찾아가 그가 상국의 시녀와 통정한 사실을 알고 있다고 고했다. 종사는 곧바로 달아났다. 원앙이 알고 그 뒤를 따라가 데려온 다음 시녀를 그에게 주어 예전처럼 종사로 일하게 해주었다. 이때 오나라에 사자로 와서 오왕에 의해 연금된 원앙을 지키는 사졸들의 책임자는 바로 오왕의 교위사마(校尉司馬)인 그 종사였다. 그는 가지고 있던 옷과 물건들을 팔아 독한 술 두 섬을 샀다. 그때는 마침 날씨가 추워 사졸들은 굶주리고 목말라했다. 독한 술을 마신 사줄들은 마침내 취했는데 서남쪽을 지키던 사졸들도 역시 취하여 모두 잠들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사마가 원앙을 침상에서 일어나게 한 다음 말했다.

" 공께서는 도망치십시오. 오왕은 내일 아침 일찍 공을 죽이려고 합니다. "

원앙이 믿지 못하고 말했다.

" 그대는 도대체 누구이건대 나의 목숨을 구해주려고 하오? "

사마가 대답했다.

" 저는 옛날 공이 오나라의 상국으로 있을 때 그 밑에서 종사를 하다가 공의 시녀와 정을 통했던 사람입니다."

원앙이 놀랐으나 도망치기를 거절하며 말했다.

" 그대의 양친이 다행히 살아 계시니 결코 나로 인하여 그대에게 해를 입힐 수 없소."

" 공께서 도망치시면 저의 양친과 가족도 피신시키고 저도 역시 도망치려고 합니다. 공은 어찌하여 저의 일을 걱정하십니까?"

말을 마친 사마는 칼로 장막을 찢어 밖으로 인도하여 취해 쓰러진 사졸들 사이를 걸어 탈출한 후에 서로 헤어져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원앙이 절모(節毛)13)에서 깃을 풀어 품에 넣고 깃대를 지팡이 삼아 7-8리를 걸었을 때 쯤 날이 밝아 만난 양(梁)나라 기병을 의 말을 얻어 탈 수 있었다. 경사로 달려온 원앙은 오나라에서의 일을 보고했다.

오초(吳楚) 두 나라의 반란군을 격파한 황제는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14)의 아들 평륙후(平陸侯) 유례(劉禮)15)를 초왕으로 봉하고 원앙을 초나라의 상국으로 임명했다. 원앙이 초나라의 재상이 된 후로는 몇 번 황제에게 글을 올려 자기의 뜻을 밝혔으나 황제는 쓰지 않았다.

원앙이 병이 들어 초나라의 상국의 자리를 내놓고 집에 머무르면서 마을 사람들과는 즐거움과 슬픔을 같이 나누고 서로 동무하여 투계장이나 개경주 시합장에 드나들곤 했다. 낙양의 극맹(劇孟)이라는 사람이 일찍이 길을 가다가 원앙의 집을 들렸는데 원앙이 접대를 극진히 했다. 안릉(安陵)의 부호가 원앙에게 말했다.

“ 제가 들으니 극맹은 도박꾼인데 어찌 장군께서 스스로 그와 교유하십니까? ”

원앙이 대답했다.

“ 극맹이 비록 도박꾼이기는 하나 그의 모친이 죽어 장례를 치를 때 조문을 온 수레가 천 승이 넘었다고 했소. 이것은 그가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기 때문이오. 또한 사람에게는 급하거나 급하지 않거나 하는 일은 항상 있는 법이나, 무릇 어느 날 아침 급한 일이 생겨 그의 집을 두드려 도움을 청하면 부모 때문이라고 변명하지 않고, 혹은 일이 있다거나 집에 있으면서도 없다고 하면서 따돌리지 않는 사람으로 천하가 우러러보는 사람은 오로지 극맹과 계심(季心)16) 뿐이오. 지금 그대는 항상 수십 기의 거마를 이끌고 호기롭게 출입을 하고 있지만 어느 날 아침 나에게 위급한 일이 생긴다면 어찌 그대를 믿을 수 있겠소? ”

원앙이 그 부호를 야단치고 그와 절교를 하니 사람들이 듣고 모두 원앙을 칭송했다. 원앙이 비록 관직을 버리고 집에 머물고 있었지만 경제는 때때로 사람을 시켜 계책을 묻곤 했다. 그때 황제의 동생 양왕(梁王)이 황제의 뒤를 잇고자 하는 뜻이 있었지만 원앙이 진언을 하자 그 일은 더 이상 진전이 되지 않고 없던 일로 되었다. 그 일로 인해 양왕은 원앙을 원망하고 자객을 보내 원앙을 죽이려고 했다. 양왕의 자객이 관중에 들어아 원앙에 대해 수소문하니 사람마다 그를 칭송하는데 입이 부족할 정도였다. 그래서 자객은 원앙을 찾아가 말했다.

“ 저는 양왕으로부터 돈을 받고 공을 죽이려고 왔습니다. 그러나 공께서는 장자라 제가 차마 군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을 죽이려고 보낸 자객은 10여 명이 넘으니 대비하셔야만 합니다. ”

마음이 불안해 진 원앙은 집안에 또 기괴한 일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배생(掊生)을 찾아가 점을 치고 돌아오는데, 과연 양왕의 자객들이 뒤따라와 안릉(安陵) 현의 외곽 성문 밖에서 원앙을 죽였다.


조조(竈錯)는 영천(穎川)17) 인이다. 지읍(軹邑)의 장회(張恢) 선생으로부터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형명학(形名學)을 배웠다. 낙양(洛陽)의 송맹(宋孟)과 유례(劉禮) 등과는 동문수학한 사이다. 그는 뛰어난 학문으로 태상(太常)의 장고(掌故)18)가 되었다.

조조는 위인이 위엄을 앞세우고 강직했으며 각박하고 비정했다. 문제 때 천하에 상서(尙書)에 통하는 자가 없었으나 오로지 제남(濟南)의 복생(伏生)만이 진나라의 박사 출신으로 상서에 통달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이미 90이 넘은 노인이었음으로 장안으로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가 태상(太常)에게 조칙을 내려 사람을 보내 상서를 받아오도록 시켰다. 복생에게서 상서를 배운 후 돌아온 조조는 황제에게 상소를 올리면서 상서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 황제의 명으로 태자의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문대부(門大夫), 가령(家令)19)으로 승직했다. 변설에 능해 태자의 총애를 받아 태자부(太子府)의 사람들은 그를 지낭(智囊)이라고 불렀다. 문제 재위 시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제후들의 봉지에 대한 삭감책과 법률에 대한 정비책을 간했다. 상소장이 수 십 번에 걸쳐 황제에게 올라갔지만 문제는 듣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의 재주가 비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중대부(中大夫)에 승직시켰다. 당시 태자는 조조의 계책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했지만 원앙 등의 여러 대부들 대부분은 조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윽고 경제가 즉위하자 조조를 내사(內史)20)로 임명했다. 조조가 항상 경제에게 독대를 청하여 주청을 올리면 경제는 그때마다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조조에 대한 황제의 총애는 구경(九卿)을 능가하여 많은 법령이 바뀌게 되었다. 승상 신도가(愼屠嘉)가 마음속으로 조조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으나가 그를 해칠만한 힘이 없었다. 내사(內史)의 집무실은 태상황(太上皇)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었으나 출입문은 동쪽에 나있어 궁궐을 드나들기가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조조는 태상황 사당의 바깥 쪽 담을 허물어 두 개의 문을 내고 남쪽을 통해 궁궐을 출입했다. 승상 신도가가 알고 크게 노하여 그것은 조조의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여 상소문을 올려 조조를 처형하려고 생각했다. 조조가 풍문을 듣고 그날 밤으로 황제에게 독대를 청해 그 정황을 상세하게 고했다. 다음 날 승상이 주청을 올려 조조가 함부로 태상황 사당의 담장을 허물어 문을 만들었음으로 정위에 넘겨 죄를 물어 처형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황제가 대답했다.

" 그것은 사당의 담장이 아니고 바깥 쪽 담의 빈터이기 때문에 그가 죄를 범했다고 할 수 없소."

승상이 황제에게 사죄했다. 이윽고 조회가 파하자 분노한 승상이 장사(長史)에게 말했다.

" 조조가 사당의 담장을 허물고 문을 내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곧바로 처형을 하고 황제에게 주청을 올려야 했었는데 내가 오히려 나이어린 자에게 농락을 당했으니 진실로 내가 일을 잘못 처리 했음이다!"

그리고 승상은 얼마 후에 병이 나서 죽었다. 이로써 조조는 더욱 귀한 몸이 되었다.

어사대부로 자리를 옮긴 조조는 제후들이 저지른 죄가 너무 큼으로 그 봉지를 삭감하고 휘하의 군현을 조정에서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가 공경(公卿), 열후(列侯), 종친(宗親)들을 모이게 해서 의논해보도록 명했다. 아무도 감히 조조의 상소문에 반대하지 않았으나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만이 반대했다. 이 일로 인해 두영과 조조는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조조가 30개에 이르는 법령의 조항을 고치자 제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조조를 비난했다. 영천에 살고 있던 조조의 부친이 듣고 올라와 조조에게 말했다.

" 황제가 새로 즉위하자마자 네가 정사를 멋대로 주물러 제후들의 봉지를 삭감하고 골육간의 사이를 소원하게 만든다고 많은 사람들이 너를 비난하느라 의견이 분분하다. 어째서 그러느냐? " 조조가 대답했다.

" 원래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만일 그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황제는 존귀해지지 못하고 종묘가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

조조의 부친이 말했다.

" 유씨들이야 안녕하게 되겠지만 우리 조씨들들은 위태롭게 되었다. 나는 너와 이별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되겠다. "

고향으로 돌아간 조조의 부친은 약을 먹고 죽으면서 말했다.

" 나는 차마 화가 내 몸에 미치는 것을 볼 수 없다. "

조조의 부친이 죽고 10여 일 후에 과연 오초(吳楚)가 란을 일으켜 조조를 죽인다는 명분을 걸었다. 두영과 원앙은 입궐하여 황제에게 진언하자 항제는 조조에게 조의를 입게 한 후 동시(東市)에 보내 처형하도록 했다.

조조가 죽고 얼마 후에 알자복야(謁者僕邪)21) 등공(鄧公)은 교위(校尉)가 되어 오초(吳楚)의 반란군을 토벌하는 장군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와 황제를 알현하고 군사에 관한 일을 서장으로 올렸다. 황제가 등공에게 물었다.

"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대는 오초의 반군이 조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어찌하여 군사를 물리치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는가? "

등공이 대답했다.

" 수십 년 전부터 획책해 온 오왕은 자기의 봉지를 삭감한다는 조칙에 노하여 조조를 주살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지만, 실은 그의 뜻은 조조를 죽이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이에 신은 천하의 선비들이 입을 닫고 감히 황제께 진실을 말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

" 어째서인가? "

" 조조는 제후들의 세력이 강대해지면 그들을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제후들의 봉지를 삭감해서 천자의 권위를 높여 만세의 이익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정책을 시행하다가 종족이 멸족당했으니 안의 충신들은 입을 닫고 밖으로는 제후들을 위해 원수를 갚아 주었으니 신이 생각하기에 폐하께서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

황제가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 그대의 말이 옳도가! 나 역시 그것을 후회하고 있음이라!"

황제는 즉시 등공을 성양(城陽)의 중위(中尉)로 제수했다.

등공은 성고(成固)22) 출신이다. 기발한 계책을 많이 냈다. 건원(建元)23) 연간에 황제가 현량(賢良)을 천하에서 구할 때 공경(公卿)들이 등공은 천거했다. 그때 등공은 관직에 물러나 있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구경(九卿)의 일원이 되었다. 1년 후에 다시 병으로 직을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의 아들 등장(鄧章)이 황노(黃老)의 학을 배워 공경들들 사이에 이름이 높았다.


태사공이 말한다.

원앙은 비록 학문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역시 시의에 맞춰 일을 처리하는데 능했다. 마음이 어질고 질박(質朴)하며 의를 들어 비분강개했다. 문제가 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의 자질이 때를 만났다. 시의가 변하여 오초(吳楚)가 반란을 일으키니 황제에게 유세하니 그의 말이 한 번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는 다시는 성공하지 못했다. 명성을 좋아하고 현능함을 좋아했으나 결국은 그 명성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조조는 태자부의 가령(家令)이 되어 자주 시책을 내었으나 번번이 쓰임을 당하지 못하다가 후에 영달하자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법령을 많이 바꿨다.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속하게 수습하지 못하고 오로지 개인적인 원한만을 갚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몸을 망쳤다. 옛말에 ‘ 옛 것을 바꾸고, 떳떳한 도리를 어지럽히면 죽지 않으면 망한다’고 했으니 그것은 바로 조조와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열전41. 원앙조조 끝>


주석

1)청실(淸室)/ 관리나 귀족들을 조사했던 감옥을 말한다.

2)장(劉長)/ 고조의 여덟 아들 중 7남으로 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회남왕에 봉해졌다. 효문제 때 교만한 나머지 입조할 때는 항상 황제와 같은 수레를 타고 사냥을 나갔다. 봉지에 있을 때는 한나라의 법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법령을 정해 다스렸다. 문제 6년 기원전 174년 흉노 및 민월(閩越)의 수령들과 내통하여 반란을 도모하려고 기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촉군(蜀郡)으로 유배되었다. 유배를 가던 중 절식하여 굶어 죽었다. 회남려왕은 그의 시호다.

3)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의 봉호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77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으로 패현(沛縣) 출신이다. 진말 유방이 패현에서 기의할 때 사인(舍人)의 신분으로 종군했다. 유방이 정벌을 위해 밖으로 출전할 때 그는 패현에 남아서 여태후와 아들 유영(劉盈)을 받들었다. 이윽고 초한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여태후와 유영이 항우에게 사로잡히게 되자 그는 곁에서 극진히 모셨다. 후에 초한이 홍구를 경계로 강화를 맺을 때 태공 등의 유방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어 한나라에 돌아왔다. 고조 6년 기원전 201년 벽양후(辟陽侯)에 봉해졌다. 섭정이 된 여후는 심이기를 좌승상에 임명하고 매우 신임하고 총애했다. 문제 3년 기원전 177년 회남왕 유장(劉長)애 의해 살해되었다. 유장의 모친 조희(趙姬)는 원래 조왕 장오(張敖)의 미인으로 조나라를 지나가던 고조에게 바쳐졌다. 조희는 져 그 날로 임신하여 유장을 낳았다. 후에 관고 등이 고조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가 발각되자 그들과 함께 장안으로 압송된 조희는 옥리에게 고조의 총애를 받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옥리가 고조에게 그 사실을 품했으나 그때는 자기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장오에게 매우 노해있었기 때문에 유장의 모친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자 조희의 동생 조겸(趙兼)이 그 사실을 벽양후 심이기를 통해 여태후에게 알렸으나 질투심으로 인해 여후는 고조에게 말하지 않고 벽양후 역시 여후에게 힘써 간하지 않았다. 조희는 유장을 낳은 후 분함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고 말았다.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고조는 후회하여 회남왕 경포의 반란을 평정하고 유장을 대신 봉했다. 회남여왕 유장은 자기의 모친이 죽은 것은 당시 여후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던 심이기가 힘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벽양후를 죽인 것이다.( 열전 58. 회남형산)

4)시무(柴武)/ 진무(陳武)라고도 한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63년에 죽은 서한의 창업공신이다. 진2세 원년 기원전 209년, 설(薛) 땅의 대중들을 이끌고 유방의 기의에 합류하여 장군이 되어 관중으로 들어가 진나라를 멸했다. 이어서 항우가 마련한 홍문(鴻門)의 연(燕)에 참석한 유방을 수행했다. 초한 전쟁 중 역하(曆下)에서 제군(齊軍)을 대파한 한신의 군대에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해하(垓河)의 싸움에서는 주발(周勃)과 함께 한나라의 후로(後路) 대군을 지휘했다. 한고조 6년 기원전 201년, 극포후(棘蒲侯)에 봉해졌다. 한고조 11년 기원전 196년, 한왕 신(信)이 흉노와 내통하여 한나라의 변경을 침범하자 시무는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삼합(參合)에서 한왕과 흉노의 연합군을 대파하고 한왕 신의 목을 벴다. 고후(高后)의 치세시 대장군의 신분으로 대신들과 함께 문제를 영립했다. 문제3년 기원전 177년, 대장군이 되어 제북왕 유흥거(劉興居)의 반란군을 진압했다. 문제6년, 회남왕 유장(劉長)이 일으킨 반란에 참여한 그의 아들 시기(柴奇)가 주살되었으나 그가 세운 높은 공적으로 연좌되지 않아 죄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위와 후국은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못하고 당대에 끝났다.

5)맹분(孟賁)/ ① 춘추때 위(衛)나라 사람으로 <사기정의>에 의하면 그가 일단 노하여 고함을 치면 그 소리에 하늘이 움직였다고 했다. <시자(尸子)>에 “ 맹분은 물속에서는 교룡(蛟龍)도 피하지 않고, 산속을 다닐 때는 흉포한 호랑이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②전국 때 진무왕의 호위 무사였던 맹열(孟說)이다. 태어날 때부터 용력이 있어 평소에 산 소의 뿔을 뽑았다고 했다. 그는 오획(烏獲)과 함께 용력으로 제후들 사이에 이름이 있었다. 진나라 왕으로 즉위한 진무왕이 용사들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각지의 용사들을 이끌고 진나라로 들어가 높은 벼슬을 받았다. 무왕 4년 기원전 307년 무왕이 주나라에 들어가 구정 들기 시합을 맹열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죽었다. 이에 그 죄를 추궁 받아 살해되고 그 종족은 멸족되었다.

6)하육(夏育)/ 춘추 때 위(衛)나라 출신의 전설상의 용사다. 천균(千鈞), 즉 10톤의 무게를 들 수 있다고 했다. 후에 노나라 대부 신수(申繻)에게 살해되었다고 했다. 전박(田搏)에게 살해 되었다는 설도 있다.

7)허유(許由)/ 요임금 때의 은사(隱士). 요임금이 군주의 자리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그는 기산(箕山)으로 도망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다시 요임금이 구주(九州)의 지방관을 다스리는 장관에 임명하자 그는 영수(穎水)에 가서 귀를 씻고 듣지 않은 것으로 하였다.

8)회남여왕 유장(劉長)의 네 아들이 후(侯)에 봉해진 해는 문제 8년 기원전 172년이고 회남왕에는 성양왕 유희를 옮겼다. 유희는 성양왕 유장(劉章)의 아들이다 . 회남왕의 세 아들이 제후왕에게 봉해진 해는 그로부터 8년 후인 문제8년 기원전 164년이다. 문제는 원래의 회남왕의 봉지를 회남(淮南), 형산(衡山), 려강(廬江) 셋으로 나누어 유안(劉安), 유발(劉勃), 유석(劉錫)을 각각 봉했다(회남형산열전).

9)상시기(常侍騎)/ 말을 타고 천자를 좌우에서 수행하는 낭관이로 진나라가 설치하여 한나라가 그대로 답습했다. 질록(秩祿)은 8백 석이다.

10)사람돼지/ 원문은 인체(人彘)다. 고조가 황제의 나리에 오른 후에 척부인(戚夫人)을 사랑한 나머지 그녀의 소생 여의(如意)를 조왕(趙王)에 봉하고 태자로 세워 후계로 삼으려고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고조가 죽자 척부인에게 앙심을 품은 고후는 여의를 독살하고 척부인을 잡아 코, 귀, 팔, 다리 등을 자른 후에 돼지우리에 가두어 인체라고 부르고 굶겨 죽였다. 원앙은 적실과 첩실의 사이를 분명하게 해두지 않으면 사후에 인체와 같은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고 간언한 것이다.

11) 태상(太常)/ 구경(九卿)의 하나로 종묘의 의례를 관장했다.

12) 원문은 제릉(諸陵)으로 장안 근처의 장릉(長陵), 안릉(安陵), 패릉(霸陵), 고릉(高陵), 창릉(昌陵), 두릉(杜陵) 등의 황제릉을 가리킨다. 장안 주변에는 황제능을 중심으로 주변에 형성된 마을에 현을 설치했다.

13) 절모(節毛)/ 황제가 사자를 보낼 때 주어 징표로 삼은 깃발이다. 모(旄)라고 한다. 깃대는 대나무로 길이가 8척이고 깃은 쇠꼬리다.

14) 유교(劉交)/ 고조의 막내 동생으로 사기 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에는 동모유제(同母幼弟)라 했으나 한서(漢書)에는 동부소제(同父少弟) 즉 어머니가 다른 이복동생으로 되어있다. 독서를 좋아하고 예술방면에 재주가 있었다. 어렸을 때 진나라의 유자(儒者) 부구백(浮丘伯)으로부터 시경(詩經)을 배웠다. 진말에 고조의 거병에 참여했으며 관중에 들어가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졌다. 다시 고조가 항우를 공격할 때 종군하면서 고조의 측근에 있으면서 시중을 들었다. 고조 6년에 초왕이 되고 26년 동안 재위에 있었다. 시호는 원(元)이다.

15) 원래 초왕(楚王)은 회음후 한신이었다. 한신을 모함하여 초왕의 자리에서 내 쫓은 한고조 유방은 그 자리에 그의 동모제 유교(劉交)를 봉했다. 유교는 재위 23년 만에 죽고 그의 아들 유영(劉郢)이 이었다가 유영이 4년 만에 죽고 다시 유영의 아들 유무(劉戊)가 계승했다. 유무는 오나라와 모의하여 오초칠국의 란을 주도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자신은 자살했다. 유무는 유교의 손자이고 유례는 아들이다.

16) 계심(季心)/ 서한 때의 관리로 팽성(彭城) 출신이며 명장 계포(季布)의 동생이다. 젊었을 때 협객(俠客)으로 자처하여 의기(義氣)를 논하며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도왔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공손했다. 사방 수천 리의 땅에서 다투어 그를 찾아와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문제 때 살인을 하고 도망쳐 오나라로 들어가 오나라 상국으로 있던 원앙의 집에 숨어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아 랑(郞)에 천거되었다. 경제 7년 기원전 150년, 중위사마(中尉司馬)로 승진했다. 그때 중위(中尉)는 혹리로 유명한 질도(郅都)였으나 질도 역시 계심을 대할 때 예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계심은 진정한 용기를 갖춘 인사로 이름이 높았다.

17) 영천(穎川)/ 지금의 하남성 허창시(許昌市) 우현(禹縣)이다. 전국 때는 양책(陽翟)이라 했다.

18) 장고(掌故)/ 태상의 속관으로 고사(故事)의 일을 관장했다.

19) 사인(舍人), 문대부(門大夫)는 태자태부(太子太傅)의 속관으로 봉록은 공히 6백석이고 가령(家令)은 태자의 속관으로 봉록은 1천석이다. .

20) 내사(內史)/ 진나라가 설치하고 한나라가 답습한 관직명으로 경사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다. 봉록은 2천석이다. 후에 좌우로 나뉘었다가 무제 때 다시 경조윤(京兆尹), 좌풍익(左馮翊), 우부풍(右扶風) 등으로 분구하여 삼보(三輔)라 칭했다.

21) 알자복야(謁者僕邪)/ 알자는 낭중령(郎中令)의 소관으로 황제에게 온 손님의 안내를 맡았다. 복야는 그 장관이다.

22) 지금의 성서성 성고현(成固縣)이다.

23) 건원(建元)/ 한무제가 사용한 11개 중 최초로 사용한 기원전 140년부터 135년까지의 연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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