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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6-25 16:07:057166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과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의 이전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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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과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의 이전투구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131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이다. 자는 왕손(王孫)이고 지금의 하북성 형수(衡水) 관진(關津) 출신이다. 한경제 모후인 두태후(竇太后)의 조카다.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란 때 경제(景帝)에 의해 대장군에 임명되어 전략상 요충지인 형양(滎陽)을 지키며 제(齊)나라가 반란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조(趙)나라를 공격했다. 7국의 란이 평정되자 그 공으로 위기후(魏其侯)에 봉해졌다. 무제 즉위 초에 승상에 임명되어 유가(儒家)를 높이고 백가학설을 배척했으며 특히 황노사상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해 두태후로부터 미움을 받았다가 후에 그 일이 발단이 되어 한무제에 의해 주살되었다.


1. 두영(竇嬰)과 전분(田蚡)

두영은 한무제가 임명한 2번 째 승상이었다. 한무제는 재위 54년 동안 모두 13명의 재상을 임명했다. 한무제가 두영을 승상으로 임명한 속사정은 매우 복잡했으나 대체적으로 다음의 네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의 책략에 의한 결과다. 두영과 전분은 당시 양대 외척세력의 대표였다. 두영은 두태후의 조카다. 그리고 전분은 경제의 정비이며 무제의 모후인 왕태후의 동모이부(同母異父) 동생이다. 전분은 한무제의 외삼촌인 것이다. 두영은 승상에 전분은 태위에 임명되었는데 서한 초에는 태위의 품계는 승상과 함께 모두 삼공에 속한 매우 중요한 관직이었다.


왕태후는 전분을 승상으로 삼아 한나라 정사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전분의 문객 한 사람이 말하기를 “ 두영의 자질과 경력은 대감보다 뛰어나고 관리로써의 명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만일 황제가 대감을 승상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대감께서는 반드시 그 자리를 두영에게 양보하고 대감은 태위(太尉)의 자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승상과 태위의 직급은 동열이라 대감은 그 일로 인해 현인에게 겸양의 미덕을 행했다는 이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전분은 문객의 권고를 받아들여 그의 누이를 통해 한무제에게 두영을 승상으로 임명하도록 했다.


두 번째는 두영은 유학을 숭상했기 때문이다. 두영은 유가학설을 받드는 유학자기도 했다. 한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두영을 중용한 것은 두 사람의 정치사상에 있어서 합치되는 일이었다.


세 번째는 당시의 실정은 재상을 시킬만한 인재의 부족이었다. 한무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때, 무제가 승상의 재목으로 생각하여 눈에 들어온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서한 개국공신으로 승상에 오른 인물들은 모두 한고조 유방의 공신들로써 소하(蕭何), 조참(曹參), 왕릉(王陵), 진평(陳平) 및 주발(周勃), 관영(灌嬰) 등이었다.


한고조부터 시작하여, 혜제(惠帝), 여후(呂后)를 거쳐 문제(文帝)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승상으로 임명된 사람은 모두 개국공신들이었다. 관영(灌嬰)이 마지막으로 승상의 직에 오름으로써 공신들의 시대가 끝이 난 것이다. 관영은 문제 4년에 죽었고, 그는 개국공신 중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이었다.


그 뒤를 이은 경제는 재위 기간 중 4명의 승상을 두었다. 첫 째는 도청(陶靑)이고 마지막 네 번째는 위관(衛綰)이었으나 그 두 사람은 진(秦)나라를 멸할 때 종군하지 않았고, 다시 항우와의 패권투쟁에서 참가하지 않아 한왕조의 창업에 대하여 아무런 공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머지 주아부(周亞夫)와 유사(劉舍)는 공신의 아들들로 주발과 유양(劉讓)의 아들이었다. 서한의 승상직을 담당한 인물들의 성분은 대공신부터 소공신을 거쳐 그들의 아들 대에 이르렀다가 결국은 공신과는 전혀 무관한 인사들로 채워진 것이다. 한무제 당시 재상의 재목이 극도로 부족했다는 증거이다.


네 번째로는 인재의 부족이다. 승상을 선임할 때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것은 재능이었다. 그것은 한고조 때부터의 유풍으로 인재를 배양하거나 선발하는 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고조는 55세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62세에 죽어 8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재위기간 중 두 가지의 중요한 과업 때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두 가지 중요한 일이란 하나는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반란사건을 진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야망을 키우고 있었던 여태후와 그의 총비 척부인 사이에 벌어진 황태자 자리에 대한 암투였다. 두 가지의 골치 아픈 사건으로 인해 한고조 입장에서는 인재를 배양하거나 선발하는 것을 제도로 정립할 수 없었다. 그 뒤를 이은 혜제는 즉위년에 벌어진 사람돼지 사건으로 인해 받은 충격으로 그 후로는 정사를 돌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사람돼지 즉 인체(人彘) 사건은 한고조가 죽자 실권을 쥔 여태후가 척부인을 잡아다 사지를 자르고 코와 귀를 벤 다음 돼지우리에 넣고 그 모습을 혜제에게 보여준 사건이다. 혜제는 이 사건의 충격으로 여태후의 행위에 실망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된 것이다. 여후도 섭정시 유씨 성을 가진 제후왕들을 제거하고 여씨들을 후왕에 봉하는 등 여러 가지 일들로 다망했기 때문에 또한 인재배양이나 인재선발 제도를 마련할 수 없었다. 또한 여후 역시 문화적 소양이 높지 않았던 여인이었기 때문에 여후가 인재의 배양이나 선발에 대한 제도를 정립한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여후의 사후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오른 문제는 부세를 경감하고 형벌을 가볍게 하는 등 다방면에서 치적을 이룬 황제이지만 인재배양과 선발에 대한 제도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문제의 아들 경제 또한 재위 중에 일어난 오초칠국의 란을 평정하고 그 혼란을 진정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했기 때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 역사는 한무제에게 인재배양과 인재선발에 대한 문제를 유산으로 넘겨주게 되었다. 그렇다고 한무제가 인재의 배양이나 선발에 대한 제도를 정립한 것은 아니었다. 무제 역시 단지 자기가 알고 있었던 인물군 중에서 인재라고 생각한 사람을 선발하여 임용했을 뿐이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계속 선발하여 쓰다가 결국은 할머니 두태후의 조카 두영(竇嬰)과 다시 그의 모친 왕태후의 동생이며 자신의 외삼촌인 전분(田蚡)을 발탁한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이 두영으로 하여금 능히 승상의 중임을 맡을 수 있게 만든 것이다.


2. 두영(竇嬰)과 두태후(竇太侯)

두영은은 과연 어떤 인품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던가? 현재 하남대학교 고전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왕립군(王立群) 교수는 두 개의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두영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첫 번째는 태후의 생가에서 열린 잔치자리에서의 사건이다. 경제가 황제의 오른 후 두태후는 처음으로 자기의 생가에서 잔치를 열었다. 그 잔치는 규모는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참여한 사람들은 두태후, 한경제, 한경제의 동생 양왕(梁王)과 두영 등과 같은 고귀한 신분의 인사들이 참석했다. 음식이 식탁에 나오자 한경제가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 천년 후에 황제의 자리는 양왕(梁王)에게 전해지도록 하겠습니다.”


경제의 말을 듣게 된 두태후가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두영이 곧바로 경제의 말을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두태후의 기뻐하는 마음은 즉시 분노로 변했다. 결국 두태후를 위한 잔치는 서먹서먹한 상황에서 끝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두영의 성격을 분석해 볼 때 첫째 그의 성격은 대단히 강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단지 일을 성사시키는 데에만 전력을 다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전혀 개의치 않은 성격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두영은 신념이 투철한 사람으로써 시시비비의 판단기준을 자기만의 가치관념에 근거했다. 한경제의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한나라의 천하는 원래 부자상속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에 비록 황제라 할지라도 자기 임의로 제위를 동생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그의 시시비비에 대한 그의 판단의 기준은 한나라 사직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나 두영은 권술(權術)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이기도 했다. 사실은 경제가 양왕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말한 것은 하나의 허언에 불과했다. 그러나 두영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실수를 범했다. 한경제는 늙은 모친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말했지만 두영은 단지 자기의 짧은 생각만으로 잘못 판단하고 만 것이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한나라 정치를 이끌었던 경제의 통치술이었다. 그러나 두영은 한경제의 권술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경제의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두 번째 사건은 오초칠국의 란이다. 7국의 란 초기에 경제는 두려움에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결국은 원앙(袁盎)의 잘못된 조언을 따라 조조(晁錯)를 처형하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조조를 죽였지만 7국의 군사는 물러가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는 결국 무력을 사용하여 반란을 진압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경제는 두 사람을 등용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한 사람은 주아부(周亞夫)고 한 사람은 두영(竇嬰)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두영은 반란사건에 전혀 간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두영이 간여를 하지 않은 것은 그의 모든 일을 자기 생각대로 생각하는 성격상의 약점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태후 생가에서의 연회사건 이후 두태후는 두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기의 관직이 너무 낮다고 생각한 두영이 주저 없이 관직을 사직하자 두태후는 그가 황궁을 드나들 수 있는 두씨 가문의 인사록에서 빼버렸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 후 오초칠국의 란이 일어났다. 한경제는 두영을 대장군에 임명하여 출격을 명했지만 그는 병이 들었다는 핑계를 대고 그 반란사건에 대해 간여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사실에서 두영의 성격은 너무 자기중심적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경제가 몇 번에 걸쳐 사정을 해서야 비로소 두영은 대장군의 직을 받아들이고 출격해서 큰 공을 세워 위기후(魏其侯)에 피봉되었다.


두영이 오초칠국의 란을 평정하고 대공을 세운 것은 그의 일생 중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두영은 경제의 치세시 유씨 황실과 외척인 두씨 일족을 통틀어 대표하는 인재로 여겨진다. 두영은 특출한 인재였을 뿐만 아니라 정직하고 청렴했다. 한경제는 그 점을 높이 사서 천금의 상금을 하사했으나 그는 상금 전부를 모두 국사에 사용했다. 오초칠국의란 이후 경제는 두영을 태자의 스승 즉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임명했다. 그러나 경제를 둘러싸고 있는 5명의 여인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 태자의 위치가 흔들리고 결국은 태자에 기우렸던 두영의 노력은 모두 허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윽고 태자가 폐위될 때 두영은 완강하게 그 조치를 반대했으나 두영 혼자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두영은 또 다시 그의 독단적인 성격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병을 핑계로 휴가를 내어 장안의 교외로 나아가 남산의 한 후미진 곳을 찾아 은거하고는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후에 두영의 문객 중 한 명이 찾아와 그에게 충고했다.


“ 대감의 관직을 올리고 재산을 늘릴 수 있는 분인 황제이십니다. 또한 대감께서는 고모가 되시는 두태후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계십니다. 그런데 폐위된 태자로 인해 간쟁하다가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이곳에 칩거하여 입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대감께서 이와 같이 행동하신다면 대감과 황제의 사이는 멀어질 것이며 또한 태후와 황제께서 모두 대감에게 나쁜 감정을 갖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어렵게 될 것입니다.”


문객의 말에 크게 깨달은 두영은 즉시 산속의 은신처에서 나와 입조했다. 한경제는 두영의 행위에 대해 추궁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영의 운세는 이때부터 내리막길로 기우러지기 시작하여 결국 정치권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단초가 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황제를 상징하는 태양에 일어나는 일식현상은 하늘이 황제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황제는 하늘의 경고를 해소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검토해야 했다. 그러나 전통으로 굳어진 그런 행위가 구미에 맞지 않았던 황제는 승상이 그 과오에 대한 책임을 대신 지도록 바꿨다. 그래서 일식이 일어나면 우선 황제는 승상을 파면했다. 경제 때 한 번 일어난 일식에 대한 대처는 승상 유사(劉舍)를 파면하여 경제 대신 속죄토록 했다. 유사 후임으로 가장 적합한 사람은 두영으로써 두태후 역시 여러 번 경제에게 두영을 승상으로 임명하라고 권고했으나 경제는 두영을 승상에 임명하지 않았다.


3. 두영의 사망원인

서한 초는 수많은 영웅들이 배출된 시대로써 한 세대가 끝나면 그 다음 세대가 계속 뒤를 이어 영웅과 인재가 출현하여 고조(高祖), 혜제(惠帝), 문제(文帝), 경제(景帝)에 이르기까지 수대에 걸쳐 천지개벽의 공업을 이룩했다. 무제는 그들이 이루어낸 성과물을 자산으로 해서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서한왕조의 창업공신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공신 중에는 결과가 순탄하게 끝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중 두영이야말로 울분에 죽은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외척인 그는 조정 안팍으로 권력을 휘둘렀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그를 포함한 일가는 전부 재산을 몰수당하고 처형되었다. 두영의 죽음은 지금까지 한무제 시대의 가장 의문스러운 일 중의 하나다. 두영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의 단초는 승상 전분(田蚡)의 아들 혼사날에 벌어진 주연석 상에서 술취한 관부가 전분에게 시비를 걸어 발단되어 결국 관부를 편들었던 두영이 선제의 유조를 위조했다는 전분의 모함을 받아 처형된 것이다. 승상 전분은 표면적으로는 관부를 표적으로 삼았지만 사람을 배후에서 조정하여 두영을 함정에서 빠뜨렸다. 외척집단의 새로운 세력의 대표로 등장한 전분은 또 다른 외척집단인 두영은 비록 몰락하기는 했지만 눈엣가시과 같았다. 두영은 주연석상에서 일어나 관부을 끌어내어 같이 나가려고 했으나 전분이 기위(騎衛)에게 령을 전하여 관부를 압송하여 경서(警署)에 감금시키고 승상부 장사(長史)를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 오늘 황실의 종실과 친척의 어른들을 모시기 위해 연회를 연 것은 왕태후의 조칙에 의한 것이오. 그런데 관부가 그 자리에서 나를 욕보였으니 그것은 크나큰 불경죄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소.”


이어서 불경죄는 대역죄에 해당한다고 정죄하고 마당히 참수하여 그 시체를 거리에 전시하라고 했다. 옥중에 갇힌 관부는 전분이 벌린 음모에 대해 아무런 해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영은 황금을 문객에게 주어 관부의 옥사를 담당하고 있는 정위에게 주어 방면을 청탁했으나 당시 관리들은 모두 전분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관부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관부의 생명을 기필코 구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두영에게 그 부인이 물었다.

“ 관장군이 승상에게 죄를 얻고 또한 태후의 노여움을 사고 있는데 어떻게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두영이 대답했다.

“ 후의 작위는 내가 이룬 공으로 얻은 것이니 내가 또한 버린다고 해도 그다지 억울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오. 내가 어떻게 관부를 혼자 죽게 내버려두고 나만 혼자 살 수 있겠소? ”

두영은 가산을 풀어 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은신해 있던 곳에서 나와 황제에게 상서를 올렸다.


무제가 두영이 올린 표장을 보고 불러 접견했다. 두영은 황제 앞에서 곡을 하며 관부가 술에 취해 실언한 것을 승상이 죄를 뒤집어 씌어 처형하려 한다고 고했다. 황제는 두영의 말을 믿고 그에게 음식을 하사하면서 말했다.

“ 승상과 장군은 모두 황실의 친척이오. 그 시비를 태후궁에서 가리겠으니 그 때 관부를 위해 변론하기 바라오.”

이윽고 태후궁에 당도한 무제는 양측의 변론을 주재했다. 두영이 먼저 관부를 변호했다. 전분의 차례가 되자 그는 관부가 평소에 법을 함부로 어긴 것은 군주를 안중에 두지 않은 행위로써 대역무도에 해당한다고 했다. 두영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승상 전분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전분과 회남왕(淮南王)이 금품을 주고받은 비밀스러운 일을 폭로했다. 그러자 전분이 무제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고했다.

“ 지금 천하는 모두 태평하여 이 분(蚡)은 폐하의 폐부지신(肺腑之臣)으로 친애함을 얻었으니 권력을 쫓지 않고 단지 좋아하는 것은 개나 말을 기르며 좋은 전답과 저택, 그리고 가인(歌人)이나 배우, 솜씨가 좋은 장인들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두영과 관부는 천하의 용사들과 지방의 유력한 호적들을 불러 모아 매일 밤마다 정국을 논하며 뱃속으로 비방하고 마음속으로는 조정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쳐다보는 대신에 땅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면서 동서 양쪽의 궁전 사이를 흘겨보며 천하에 변란을 일으켜 혹시 천하에 변란이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대공을 세워보려고 잔뜩 노리고 있습니다. 신은 두영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진실로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주위의 대신들에게 누가 옳은지 물었다. 어사대부 한안국(韓安國)이 진언했다.

“ 관부는 옛날 군공을 세웠습니다. 만약에 큰 죄가 아니라면 기껏 술자리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이라 주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승상의 말이 관부는 간사하고 교활하여 힘없는 백성들의 재물을 침탈하여 싸아논 가산은 억만금에 이르고 영천(穎川)을 횡행하여 종실을 범하여 능멸했을 뿐만 아니라 황실의 골육을 침탈했습니다. 이는 곧 가지가 본체보다 커서 꺾지 않으면 찢어질 것이니 현명하신 주상께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

내사 정당시(鄭當時)는 마음속으로 두영을 비호하고 싶었으나 분위기에 휩쓸려 감히 자기의 의견을 견지하지 못했고 나머지 대신들도 감히 자기의 생각을 발설하지 못했다. 무제가 노하여 정당시를 책하며 말했다.

“ 공은 평소에는 누누이 두영과 전분 두 사람의 장단점을 이야기하더니 정작 오늘 조정에서 공론을 일으켜 시시비비를 가리려고 하는데 마치 생소한 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오? 공의 쭈뼛쭈뼛하는 모양이 마치 수레의 끌채에 매어 놓은 망아지와 같구려! 내가 그대들을 모두 한꺼번에 참수형에 처할 것이오.”

무제가 정론(廷論)을 파하고 동궁으로 들어가 음식을 청하며 태후에게 정론의 일을 고했다. 태후가 대노하여 음식을 물리치며 말했다.

“ 오늘 내가 살아있음에도 사람들이 감히 나의 동생되는 사람에게 이와 같이 거짓으로 대하니 내가 만일 죽기라도 한다면 내 친척들은 모두 어육이 되고 말겠구나!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황제 역시 돌이나 나무 인형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겠소. 오늘 황제가 정론을 직접 주제했음에도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았으니 만일 황제가 죽기라도 한다면 대신들을 어찌 믿을 수 있겠소? ”

무제가 사죄의 말을 올렸다.

“ 쌍방 모두가 종실의 외가라 정론을 행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옥리 한 사람으로써 족했을 것입니다. ”

무제는 랑중(郞中) 석건(石建)을 불러 쌍방 간에 벌렸던 쟁론을 정리시켰다. 랑중은 금군(禁軍)의 지휘자다. 전분이 조당에서 나와 궁문에서 한안국을 기다렸다가 그의 수레에 태우고는 힐책했다.

“ 두영은 이미 늙어빠진 영감인데 어찌 그를 두려워하는 것이오? 그대의 태도는 마치 수서양단(首鼠兩端)같다 할 것이오.”

- 수서양단(首鼠兩端) : 어느 쪽에게 가담하지 않고 양쪽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말한다. 의심이 많은 쥐가 쥐구멍에서 나올 때 우선 머리를 밖으로 내밀어 상황을 살피면서 나갈까 말까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안국이 대답했다.

“ 오늘 다른 사람이 승상의 명예를 훼손하자 승상도 또한 그 사람을 같이 훼손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장사꾼이나 어린아이 혹은 부녀자의 행위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어찌 지체 높은 승상의 체면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전분이 사과하며 말했다.

“황제가 주제하는 정론의 자리라 내 마음이 매우 급하게 되어 신중하게 처신하지 못했소.”

한안국이 어사대부가 된 것은 곧 전분의 천거에 힘입은 것이다.


4. 투옥되어 처형되는 두영

한안국이 양왕의 상(相)으로 있을 때 양왕을 위해 장공주(長公主)와 선을 대어 양왕을 위기에서 벗어나게 한 결과 두태후와 그 소생이었던 장공주로부터 중함을 받았다. 그 일로 인해 정론(廷論)의 장에서 양쪽에 대해 모두 좋게 말한 것이다. 무제가 어사에게 명하여 두영이 정론에서 행한 변론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기군망상죄로 하옥시켰다. 두영은 황제를 다시 알현하려고 했지만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경제가 임종할 때 다음과 같은 유조(遺詔)를 두영에게 내린 바가 있었다.

“ 일이 마땅하지 않은 것이 있거든 언제라도 논술하여 황제에게 올리라!”

두영은 즉시 조카 두통(竇通)에게 표장을 주어 선제의 유조에 따라 바치게 했다. 황제는 두영을 불러 접견했다. 그리고 무제는 즉시 상서대행에게 명하여 선황의 유조에 대해 조사하도록 했다. 무제는 원래 선황의 유조가 있었는지 몰랐다. 유조는 단지 두씨 집안에 보존되어 그 집사가 봉하여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분의 사주를 받은 대행은 두영이 선황의 유조를 위조했음으로 그 죄는 참수형에 처하고 그 머리는 저자거리에 효시형에 해당한다고 탄핵했다. 결국 12월 그믐 날 두영은 처형되고 위성(渭城) 즉 함양(鹹陽)에 기시되었다. 그날 정해(丁亥)에 지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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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07-02-20
[] 한고조 유방의 출생지와 그 부근도

한고조 유방의 출생지는 지금의 안휘성, 하남성, 산동성과의 접경지역인 강소성 서주시(徐州市) 경내 패현(沛縣)의 풍읍(豊邑)이다. 한나라를 창건한
운영자 07-02-20
[] 이릉(李陵)과 소무(蘇武)

이릉(李陵)과 소무(蘇武) 이릉(李陵)은 농서(隴西) 성기(成紀; 지금의 감숙성 태안현) 사람으로, 부친 이당호(李當戶)는
운영자 07-12-21
[] 진시황의 진황도행궁 복원도

(베이다이허<중국 허베이성>="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해중 암석인 강녀분을 중심에 두고 갈석궁지에서 서쪽으로 2㎞를 간
운영자 08-03-10
[] 진한의 20등작제

진한 시대의 이십등작제(二十登爵制) 진한 시대의 작제는 20등작제라 일컫어진다. 이는 작제의 등급이 20등급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운영자 09-04-04
[] 황제가 된 건달, 한고조 유방

황제가 된 건달 한고조 유방 중국의 역사상 처음으로 하층민 출신에서 제왕이 된 유방은, 훗날 큰 뜻을 품고 천하를 주유하는 대장부들에게 커
운영자 09-06-19
[] 전한시대 승상의 역할과 권세

전한시대 승상의 역할과 권세 상국(相國)이라고도 칭하는 승상(丞相)은 진(秦)나라가 설치한 관직으로 천자를 위한 승(丞), 즉 천자를 보좌하여
운영자 09-06-19
[]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과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의 이전투구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과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의 이전투구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기원전 131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이다.
운영자 09-06-25
[] 병길(邴吉) 

병길(邴吉)  1. 邴吉舊故(병길구고)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5년에 죽었다. 자는 소경(少卿)으로 서한 노국(魯國) 북해
운영자 09-07-08
[] 세기의 여행가 장건

세기의 여행가 장건(張騫) “장건은 의지가 강하며, 견실하게 일에 임하였고, 마음이 넓으며 사람을 믿었다.” (사기(史記)·대원열전(大宛列傳)
운영자 09-11-10
[] 곡괭이로 찾아 낸 세계 8대 기적

곡괭이로 찾아 낸 세계 8대 기적 // [오마이뉴스 모종혁 기자] ▲ 병마용 1호갱의 전경. 전체 면
운영자 09-11-11
[] 비참한 최후를 마친 서한 초의 개혁가들과 주보언

서한초의 개혁가들과 주보언(主父偃) 이야기 진의 천하통일은 권력구조라는 측면에서 혁명적인 의미를 지닌다. 진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까지
운영자 09-12-27
[] 정형의 싸움에서 배수의 진으로 조군을 무찌른 한신

한군의 대장군 한신(韓信)은 한왕 유방의 명을 받고 위(魏)나라로 쳐들어가 위군을 대파하고 위왕 위표(魏豹)를 사로잡았다. 승세를 탄 한신이 조(
운영자 10-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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