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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의 고구려 침략과 고구려의 반격
운영자




644년 6월 당은 고구려의 요동 공격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3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당군은 각종 공성용(攻城用) 기구를 총동원했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또한 돌궐군과 거란군도 동원되었다.


당 태종은 정예군 6만 명을 유주에 집결시키고, 요동을 향해 세 갈래 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총 사령관인 이세적(李世勣)이 선발대 6만 명을 이끌었고, 당 태종의 친정군 20만이 뒤를 따랐다. 또한 장량(張亮)이 수군 4만 3천 명과 500척의 함대로 등주에서 출발하였다.


영주 도독 장검이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와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였다. 또한 요동에 진입한 이세적(李世勣)의 군대는 신성(新城)공격에서는 실패했지만,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켰다. 당나라는 개모성의 인구 2만 호와 양곡 10만 석을 탈취한 후, 개모성을 개주(蓋州)로 개칭하였다. 장량(張亮)의 수군은 비사성(卑沙城)을 함락시킨 후 남녀 8천 명을 죽였다. 고구려도 당군의 공격이 예사롭지 않음을 파악하고, 곧바로 신성의 병력 4만을 요동성으로 급파하였다.


마침 신성의 구원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 당군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이세적의 주력군은 미처 도착하지 않았고, 당 태종은 요의 늪 지대에 이르렀는데, 진흙이 2백여 리나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 대장 염입덕이 흙을 퍼부어 다리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지 않고 늪 지대 동쪽으로 통과하였다. 이때 보장왕은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을 구원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의 이도종(李道宗)은 도주하다가 고구려 군에 허점이 생기자 수천 기를 거느리고 고구려 군을 기습하였다. 이때 마침 이세적군의 주력이 도착하여 고구려군은 1천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결국 신성의 지원군은 요동성에 합류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645년 5월 당군은 태종이 직접 독려하는 가운데 공격을 개시하였고, 요동성은 원군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을 막아내어야만 하였다. 요동성 내부에선 미인을 부신으로 분장시켜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반드시 보전될 것이다"라고 하며 성 안 군사들과 백성들의 동요를 막고자 하였다. 이세적이 포차를 열지어 놓고, 큰 돌을 3백 보 이상 날려 보냈다. 돌이 맞는 곳마다 모두 허물어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누대를 만들고 그물을 쳤으나 돌을 막을 수 없었다. 당나라 군사는 충거로 성 위의 집을 부수었다.


이 때 백제가 황색 칠을 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다. 남풍이 세게 불자 당 태종은 민첩한 군사로 하여금 장대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성의 서남루를 불사르게 하였다. 불이 성 안으로 타들어가자 황제는 곧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에 오르게 하였다. 고구려 군사들은 12일간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사망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 나라는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주민 4만 명을 생포하고, 양곡 50만 석을 탈취하였으며, 요동성을 요주(遼州)로 개칭하였다. 당군은 뒤이어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했다.


백암성주 손대음(孫代音)은 당군이 두려워 전투를 치르지 않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태종은 백암성을 암주(巖州)로 개칭하였다. 이때 당나라의 진영에서는 건안성(建安城) 공격을 앞두고 많은 의견이 오고갔다. 이세적은 건안성이나 오골성(烏骨城)이 중요하지만 안시성을 먼저 점령하지 않으면 배후로부터 공격을 받아 당나라의 군량미 수송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안시성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도 안시성 성주가 복종하지 않아 공격을 받았으나, 항복시키지 못한 점을 들어 우회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태종은 이세적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은 고연수(高延壽)·고혜진(高惠眞)의 지휘 아래 말갈군을 포함하여 15만 명의 군사를 내어 안시성 구원을 위해 출전시켰다. 대노인 고정의는 당 태종을 경계할 것을 고연수에게 당부하였으나, 고연수는 이를 간과하였다. 태종은 사자를 보내 고연수를 안심시킨 뒤, 이세적과 장손무기(長孫無忌)로 하여금 고연수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혼란에 빠진 고구려군은 퇴각로마저 잃었으며, 이때 용문 출신의 설인귀(薛仁貴)가 큰 공을 세웠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군사 3만 6천 8백 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당나라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태종은 욕살 이하의 관장 3천 5백 명을 선발하여 당 나라 지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 3백 명은 전부 생매장 하였다. 또한 말 5만 필·소 5만 두·명광개 1만 벌을 노획하였으며, 기타의 기자재도 이 정도 노획하였다. 태종은 전투가 일어난 산의 명칭을 주필산(駐蹕山)으로 개명하고, 고연수를 홍려경, 고혜진을 사농경에 임명하였다.



안시성 전투

이세적은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안시성 사람들이 당군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니 태종이 분노하였다. 이세적은 성이 함락되는 날 안시성의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릴 것을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게 수비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오랫동안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때 고연수·고혜진 등이 태종에게 안시성 대신 오골성을 공격할 것을 주청하였다. 태종이 이를 따르려 하자 장손무기가 보급로 차단을 이유로 이에 반대하였다.


어느 날 태종은 성 안에서 들리는 닭과 돼지의 소리를 듣고 이세적에게 밤 중 안시성에서의 기습 공격에 대비할 것을 명하였다. 이날 밤, 안시성의 군사 수백 명이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다. 태종은 이 말을 듣고 직접 성 밑에 와서 군사를 소집하여 재빨리 공격하였다. 안시성 군사 중에 사망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그럼에도 안시성의 저항이 완강하자, 당군은 강하왕 이도종의 건의로 성의 동남 쪽에 토산을 쌓아 점점 성으로 접근해왔다. 성 안에서도 역시 성벽을 더욱 높게 쌓아 굳게 방어하였다. 양군은 하루에도 6, 7회씩 교전하였다. 당나라 군사의 충거와 포석이 누대와 성위의 작은 담을 허물었으나, 성 안에서는 그 때마다 목책을 세워 부서진 곳을 막았다.


당나라 군사는 밤낮을 쉬지 않고 60일 동안 토산(土山)을 쌓았다. 이 작업에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이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 높게 되어 밖에서는 성 안을 내려볼 수 있었다. 이도종이 부복애(傅伏愛)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정에 주둔하여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에 산이 폭우로 허물어지면서 성을 덮치는 바람에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이 때 부복애는 사사로운 이유로 수비하던 곳을 떠나 있었다. 토산이 무너지자 안시성의 군사 수백 명이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탈취하여 그곳에 참호를 파고 수비하였다. 태종은 토산을 빼앗기자 진노하여 부복애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이길 수 없었다. 도종이 맨발로 황제의 깃발 아래 가서 죄를 청했다. 이에 태종은 이도종에게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는 전한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이 진 목공이 맹명을 등용한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너는 개모성과 요동을 점령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한다."


라고 하였다.


전투는 그 만큼 치열했으며, 심지어 당 태종이 안시성주의 화살에 맞아 한쪽 눈을 잃었다는 전설까지 남게 되었다.

당나라의 퇴각과 평가

645년 9월 당 태종은 요동이 추워지고, 병사들과 군마를 관리하기 힘든 것과 군량이 떨어질 것을 예측하여 군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안시성주는 성에 올라가 절을 하며 작별하였다. 태종은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백 필을 주었다. 이때 안시성의 성주에 대하여 역사서에는 어떠한 자료도 없이 그냥 "안시성의 성주"(安市城主)로만 기록되고 있었다. 특히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안시성주에 대해 크게 칭송하면서 이름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한탄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이라고 밝히고 있다.


태종은 이세적과 이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후군으로 서게 하였다. 그들이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려 하였다. 그러나 그곳 습지의 진흙 때문에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태종은 장손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로 삼아 건너도록 하였다. 태종이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와 주었다.


겨울 10월, 태종은 포구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진흙길 메우는 작업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넜다. 바람과 눈이 휘몰아쳐서 군사들의 옷이 젖고 동사자가 많이 생겼다. 태종은 퇴각하는 길에서


"만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


라고 말하였다. 이때 당 태종의 퇴각에 관련하여 많은 이견이 있는데, 근대의 역사학자인 신채호는 태종이 패전의 수치를 감추고자 일부러 자신들의 전과를 부풀리고, 피해는 최소화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베이징 일대 또는 중국 내륙까지 당 태종을 추격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현토(玄菟城)·횡산(橫山城)·개모(蓋毛城)·마미(磨米城)·요동(遼東城)·백암(白巖城)·비사(卑沙城)·협곡(夾谷城)·은산(銀山城)·후황(後黃城) 등 10개 성이 함락 당하였고, 요주·개주·암주의 3개 주에서 7만 명의 주민을 중국에 빼앗겼다. 그러나 당나라군의 피해는 경미했으며 중국의 역사서인 《자치통감》에 따르면 그 수는 2천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를 두고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당나라군이 퇴각로를 함락시킨 요동성 일대로 하지않고, 진펄지대인 요택(遼澤)으로 한 점과 많은 양식을 이전에 고구려에게서 탈취하였는데, 군량미가 떨어진다는 것을 핑계로 당군이 서둘러 퇴각한 점. 그리고 황제가 직접 퇴각을 도왔다는 점과 자신들의 구체적인 피해상황은 정확히 하지 않은 점을 들어 이 전쟁을 당나라의 패배로 보고있다.


한편, 항복한 고연수는 항복한 뒤로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홧병으로 죽고,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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