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
- 강 종 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머리말
1. 진출의 시점
2. 진출의 실상
3. 진출의 배경과 성격
4. 진출의 결과와 그 파장
맺음말
머 리 말
백제가 중국의 요서 지역을 점거한 적이 있다고 하는 이른바 ‘요서진출설’은 그간 학계 내외의 많은 관심을 끌어왔다. 필자도 이 문제에 흥미를 갖고서, 10여 년 전에 그때까지의 연구 성과를 글로 정리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1) 글의 목적이 연구사를 검토하는 것이었기에, 거기에서 필자의 소견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당시까지 국내외 학계에서 꾸준하게 제기되어 왔던 부정론적 시각이 논리적으로 근거가 박약한 것임을 지적하였고, 사료에 대한 신중한 접근을 전제로 긍정론적 시각에서 재검토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그 후 학계 일각에서 이 문제가 몇 차례 다시 거론되었다.2) 놀랍게도 논자들은 모두들 부정적인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이들의 논문에서는 여태껏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적절하게 지적한 것들도 많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필자가 그동안 구상하고 있던 것과 어느 정도 합치되는 면을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최근의 연구에는 사료 해석에서의 자의성과 선입견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따라서 신중한 긍정론적 입장에 서 있는 필자로서는 수긍하기 어려운 점들이 적지 않았다. 이에 필자는 이전의 글에서 드러내기를 유보했던 나름의 구상을 거칠게나마 밝히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그 동안 필자가 구상해왔던 바를 다음과 같은 순서로 서술해 보려 한다.
우선 첫 번째 장에서는 요서 진출이 이루어진 시점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를 살펴보겠다. 관련 기록의 사료적 가치를 점검해 본 후, 그 자료들의 비교 분석을 통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점을 찾아볼 것이다.
두 번째 장에서는 첫 장에서 얻은 결과를 토대로 하여 실제로 요서 진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추적해보려 한다. 여기서는 그간의 부정론적 시각의 연구에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들을 지적하고, 실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을 모색해 볼 것이다.
이어 세 번째 장에서는 요서 진출의 배경과 성격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이해를 도모해보겠다. 중국 측의 사정과 백제 측의 사정이 아울러 고려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주목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도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요서 진출이 어떻게 결말지어졌는지를 살펴보겠다. 아울러 그 결과가 백제사의 전개과정에 어떤 파장을 몰고 왔는지를 생각해 볼 작정이다.
자료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므로 어차피 본고에서의 논지 전개는 추론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자칫 과도한 추론이 발생할지도 모르겠다. 잘못된 추론에 대해서는 호된 질책을 달게 받고자 한다.
1. 진출의 시점
백제의 요서 진출은 과연 어느 시점에 벌어진 일일까? 이 문제를 푸는 데 단서가 될 수 있는 자료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A-① 백제국은 본래 高驪(고구려: 인용자주)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를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晉平郡 晉平縣이라 하였다. (宋書 卷97 列傳57 夷蠻 東夷 百濟國)
② 그 나라(백제: 인용자주)는 본래 句驪(고구려: 인용자주)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晉나라 시기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백제 또한 遼西․晉平 2郡의 땅을 점거하고 百濟郡을 설치하였다. (梁書 卷54 列傳48 諸夷 東夷 百濟)
B. 백제는 옛날 동이 마한에 속하였는데, 진나라 말기[晉末]에 駒驪(고구려: 인용자주)가 요동을 공격하여 차지하자 낙랑이 또한 요서․진평현을 차지하였다. (梁職貢圖 百濟國使)
매번 거론되어온 기사들이기에 중복의 감이 없지 않으나, 논지 전개의 필요상 간단하게 검토를 하고 넘어가기로 한다.3)
먼저 사료 A-①은 중국 南朝의 齊나라 武帝 永明 6년(488)에 沈約(441～513)이 편찬한 宋書에 실려 있는 것이다. 송서는 宋(420～479)이 망한 지 불과 9년 만에 만들어진 책으로서, 대부분 송 당대에 작성된 자료들에 근거하여 찬술되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4) 이는 곧 송서가 당시의 상황과 사정, 그리고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인식을 비교적 큰 착오 없이 온전하게 전하는 사서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백제의 요서 진출 사실을 전해주는 A-① 역시 송대 史官의 백제에 관한 지식의 일단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순리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의 사실성을 섣불리 부정하고, 단순히 사관의 착각 또는 誤傳에 입각한 것으로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
사료 A-②는 唐 太宗 貞觀 3년(629)에서 10년(636) 사이에 姚思廉이 편찬한 梁書에 보이는 것으로, 그 내용이 송서의 기록과 매우 흡사하다. 아마도 송서와 여타의 자료 등을 참고로 하여 작성된 이른바 ‘2차 사료’라고 볼 수 있겠으며, 사료로서의 가치를 따진다면 송서의 것보다는 떨어진다고 보는 것이 옳다.5)
한편 사료 B는 520년대에서 530년대의 어느 시기에 梁나라의 蕭繹이 만든 ｢梁職貢圖｣라는 화첩에 실려 있는 것인데, 사료 A-①보다는 대체로 40여 년 정도 뒤진 시기에 작성된 것이고, 사료 A-②보다는 오히려 백여 년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요서 진출의 주체를 백제가 아닌 ‘樂浪’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6) 그렇지만, 일단 이 기록 자체가 백제국에 관한 서술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니 만큼, 백제의 요서 진출과 관련된 자료로 보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동안 이 기사를 근거로 백제의 요서 진출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는 견해들이 많았는데,7) 이미 강조한 바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요서 진출 관련 자료 가운데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것이 송서의 기록이고, ｢양직공도｣의 기사는 송서보다 뒤늦게 만들어진 것으로서 송서를 참고하여 작성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상, ｢양직공도｣ 기록의 사실성 여부와 그렇게 기술되었어야 할 이유를 숙고하지 않은 채, 그것을 근거로 앞선 시기의 사료인 송서의 기록을 부정하려는 자세를 가져서는 곤란한 것이다.8)
요컨대, 5세기대에 편찬된 송서로부터 6세기대의 ｢양직공도｣, 7세기대의 양서 등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한 적이 있음을 거론하고 있다.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는 물론 송서의 기록이 가장 앞서지만, 이후의 다른 역사 기록에서도 관련 사실이 꼬박꼬박 기재되고 있음을 감안하다면, 백제가 한때 요서 지역에 진출한 사건은 중국 남조의 지배층의 머리 속에 꽤나 유명한 사건으로 각인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요서 진출의 시점과 관련하여 위의 기사들에서 우리는 어떤 단서들을 얻을 수 있을까?
일단 그 시점은 양서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晉나라 시기’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 송서의 경우 단순히 ‘그 뒤’라고만 되어 있어 애매하기는 하지만,9) 요서 진출 사실을 전하는 기사에 뒤이어 東晉 義熙 12년(416)의 백제왕 餘映에 대한 책봉 기사가 나옴을 고려할 때, 416년 이전의 어떤 시점임을 유추할 수 있다.10) 그리고 ｢양직공도｣에서 전하는 ‘晉末’도 일단 참고할 필요가 있다. 어느 시점부터를 ‘晉末’이라고 보아야 하는지는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겠으나, 아무래도 4세기 후반의 어느 시점부터라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11)
두 번째로, 고구려의 요동 진출이 있었던 시점과 거의 같은 시점,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바로 직후에 벌어진 것으로 볼 수 있겠다.12) 이것은 곧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한 시점이 언제인가를 확인한 후, 과연 그 시점에 백제도 요서 지역에 진출했을지의 여부를 검토하는 식으로 논의를 진행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진나라 시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한 것은 언제일까?
고구려는 이미 태조왕 시기부터 요동에 대한 공략을 개시하였고, 이로 인해 중국 세력과 숱한 전쟁을 치루었다. 물산이 풍부하고, 중국 또는 북방민족들과의 교통에도 유리한 위치인 요동 지역은 고구려가 대대로 탐을 내던 지역이었다. 진나라 시기만 하더라도, 서진이 휘청거리다가 마침내 멸망한 310년대에 미천왕이 이 지역을 공략한 적이 있었고, 선비족 모용씨가 진을 대신하여 요동을 점거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군사를 보내어 진출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시도는 있었으나, 결국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고구려가 요동 장악의 숙원을 푼 것은 바로 5세기 초 광개토왕대에 이르러서였다. 당시 고구려는 서쪽의 後燕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는데, 대체로 요서 지역의 宿軍城 공격이 이루어진 402년 이전에는 요동을 완전히 점령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후 고구려가 당에 의해 멸망하는 순간까지 요동은 고구려의 영역으로 존재하였다. 광개토왕의 고구려 군대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던 그 시점은 바로 진나라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면,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도 이 시점에 일어난 것일까? 그러나 그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이 시기에 백제는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광개토왕릉 비문에 의하면, 396년에 광개토왕이 직접 이끄는 고구려 군대의 공격을 받아 58성과 700여촌을 빼앗겼고, 이후 왜의 군사적 원조를 받아 반격을 모색했지만, 그때마다 참담한 실패를 거듭하였다. 이처럼 자국의 방어에 급급하던 시기에 백제가 요서 지역에 군사를 파견하여 영역을 확보하였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아울러 이 시기에 요서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후연이 백제의 공격을 받아 영역을 상실한 것으로 볼만한 흔적은 어느 사서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진나라 말기에 해당하고 고구려의 요동 점령이 실현된 5세기 초에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느 시점에 백제의 요서 진출이 이루어진 것일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비록 요동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로 완전히 굳어진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에 의해 점거된 적이 광개토왕 이전에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시기는 바로 서기 385년 무렵으로 광개토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 재위하고 있던 때였다.
진서와 자치통감 등의 중국측 사서에 의하면, 385년 6월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하여 요동군과 현토군을 점령하였다고 한다.13) 당시 중국은 화북을 장악하고 있던 前秦이 東晉 정벌 실패의 여파로 무너져내리고, 전진에 복속하고 있던 선비족 모용씨 세력이 다시 독자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때였다. 384년 1월 慕容垂가 後燕을 세우고 화북의 동부를 차츰 장악하기 시작하였으며, 모용씨 세력의 원래 근거지였던 요서 지역도 385년 5월경 후연의 지배권 하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여전히 후연에 대항하는 前秦의 잔여 세력이 남아 있었고, 역시 화북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투르크 계통의 종족 丁零이 모용수의 후연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세력 확장을 시도하고 있었다. 모용씨 세력은 몇몇 거점 지역을 장악한 것 이외에는 과거 前燕 시기처럼 안정적인 지배를 확보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고구려는 바로 이러한 전진-후연 교체기의 불안정한 상황을 이용하여 요동 진출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 고구려의 요동 점령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화북의 동쪽을 거의 평정한 모용수의 후연이 385년 11월 요동을 공격하여 고구려를 밀어내고 그 땅을 회복한 것이다. 그래서 불과 반년 정도에 걸친 짧은 기간 동안 고구려는 요동 점령을 실현하였고, 완전한 장악은 다음 시기로 미루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385년에 일시적이나마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점거했던 것은 분명하고, 이것이 곧 송서 등에 백제의 요서 진출 직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전하는 고구려의 요동 점거를 말하는 것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리고 385년은 ｢양직공도｣에서 ‘晉末’이라고 표현한 시점과도 그다지 어긋나지 않는다.14)
그렇다면, 백제의 요서 진출이 일어난 시점 역시 385년 무렵으로 볼 수 있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고구려의 요동 점령이 실현된 385년 6월 직후의 어느 시점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요서 진출은 과연 어떤 식으로 일어났을까? 정말 그것은 가능했던 것일까? 장을 바꿔 이 문제에 대해 좀더 깊이 파고 들어가 보자.
2. 진출의 실상
우선 385년에 요서 지역에서는 어떤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는지 資治通鑑과 晉書 慕容垂載記 등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기록에 의하면, 이 지역은 적어도 이 해 5월까지는 後燕이 장악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무너져가고 있었지만, 前秦의 지배권이 2월까지는 지금의 북경 지역인 薊城과 대릉하 중류 지역의 龍城에 여전히 행사되고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후연군은 2월에 계성을 함락시키고 5월에야 용성에 진주하였다. 바로 그 다음달에 고구려의 요동 공략이 실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의 전개 속에서 백제가 요서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내용의 기사는 현재 자치통감과 진서 모용수재기 등에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백제가 이 지역에 진출했다는 송서 등의 기록의 신빙성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사건 하나가 이 해 7월에 발생하였다. 후연의 建節將軍으로 있던 餘巖이라는 자가 冀州의 武邑(현재의 하북성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켜, 4천여 인을 끌고서 북쪽의 幽州(현 북경)로 치고 올라가 계성을 깨뜨린 다음, 그 민호 1천여 호를 붙잡아 다시 灤河 하류의 令支로 가서, 그곳에 자리를 잡고 후연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사료상 이 시기 요서 지역에서는 여암의 세력 이외에 어떤 다른 세력도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곧 백제의 이 지역 진출 사실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여암의 봉기와 백제 요서 진출이 상호 연관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도 일치하고, 지역적으로도 일치하기 때문에, 일단 우리는 그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타진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도 여암의 요서 점거 사건이 송서 등에 전하는 백제의 요서 진출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으나, 이것을 오히려 요서 진출을 부정하는 근거로 사용함으로써 논의에 큰 혼선을 야기하고 있다.15) 논지 전개의 필요상, 잠시 그러한 주장의 요지와 그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고 넘어가자.
먼저 그 요지부터 소개하면, 385년의 요서 지역에서는 여암의 영지 웅거 사건만 확인되는데, 남조 측의 사관들이 이것을 백제의 요서 진출로 誤認하여 송서 등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남조 시기의 사관들은 이전 시기의 사서들을 통해 주변 국가의 과거사를 인식하였을 가능성이 큰데, 예를 들어 양 무제 때에 裴子野라는 사관은 서역의 白題國과 滑國이 처음 入貢하여 아무도 그 유래를 모르고 있을 때, 사기와 한서, 후한서 등에 나오는 관련 기록을 인용하여 두 나라의 유래를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을 감복시켰다고 하는 바, 백제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5세기 당시 백제왕의 성씨가 요서 점거의 주역인 여암과 마찬가지로 ‘餘’씨로 전한다는 사실에 착안한 남조의 사관이 여암을 백제의 장군으로 착각하였을 가능성이 있고, 이로 인해 남조 측의 사서에는 백제와는 전혀 무관한 여암의 요서 점거 사실이 백제의 요서 진출로 둔갑하여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으로 몇 가지 큰 문제점들을 지니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남조의 사관들이 백제의 역사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과 백여 년 정도 앞선 시기에 벌어졌던 사건에 대해, 과연 그렇게 무지에 가까운 상태로 모르고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남조의 사관이 여암을 백제의 장군으로 착각했다고 하는 것 역시 막연한 추측일 뿐, 어떠한 적극적인 증거도 확보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와 관련되는 것으로서, 배자야가 서역의 두 나라를 설명한 방식이 과연 백제의 경우에도 통용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 두 나라는 漢代에 중국과 교섭을 가진 후, 수백 년 간 남조 측과 교류를 가진 적이 없는 나라였다. 수백 년의 시간차가 있고 교류도 거의 없었던 나라에 대해서는 당연히 이전의 사서에 의존하여 그 역사를 이해하고, 그 국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오해가 있을 수도 있고, 부회가 생길 여지도 크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주지하다시피 백제는 4세기 후반 이후 줄곧 동진 및 남조와 밀접한 교류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근초고왕을 시작으로 백제왕들이 이들 중국 왕조들로부터 책봉을 계속 받았고, 사신의 왕래를 비롯한 공식적인 교류가 ‘해마다[每歲]’라는 말로 표현될 정도로 빈번히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남조 사관들이 백제에 관하여 얻게 된 지식은 당연히 서역의 미지의 나라들에 비해 훨씬 높고 또 현실성 있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결국 배자야의 일화를 들어 백제의 요서 진출 사실이 잘못 기재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교 사례의 적절성이 담보될 수 없는 것이므로,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16)
남조 사관에 관한 이야기를 좀더 하자면, 백제의 요서 진출에 관한 가장 오래된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송서의 기록을 남긴 심약이 자신이 명성에 오점이 될 수도 있는 엉터리 기사를 굳이 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송나라 시기를 함께 살았던 다른 사관이나 수많은 지식인들이 읽어볼 것이 분명한 상황인데, 근거 없는 이야기를 실어서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자초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무엇인가 확신이 있었던 것이고, 적어도 역사에 해박하거나 백제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지식으로 판단하였기에 백제전에 요서 진출과 관련된 기록을 남겼다고 보는 것이 순리이다.17)
그리고 백제가 宋, 齊를 거쳐 梁으로 이어진 중국의 남조와 계속 긴밀하게 교류를 행한 이상, 만약 송서의 기록에 의심이 들었다면 齊와 梁의 사관들이 언제라도 백제 사신 등을 통해 검증을 시도했을 것이며, 그 결과는 송서 이후의 다른 사서에 반영이 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양직공도｣를 비롯하여 양서 등의 후대의 사서에서도, 물론 약간의 표현상의 차이는 보이지만, 백제의 요서 진출은 사실로서 계속 기재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심약을 포함한 송의 지식인들은 백제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며,18) 송에 앞선 진나라 시기에 백제의 요서 진출이 있었음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송서 등에 관련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자치통감과 진서 모용수재기 등에 보이는 여암의 요서 점거 사건과 송서 등에서 전하는 백제의 요서 점령 사건이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자.
현재로서는 두 사건이 긴밀히 연계된 사건임을 확실하게 밝혀주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백제와 여암의 세력이 서로 연결되고 있었음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자료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도 지적된 바 있지만,19) 여암의 성씨인 ‘餘’20)가 백제 왕실의 성씨인 ‘餘’와 같다는 사실을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 된다. 중국 측 사서에 처음으로 보이는 백제의 왕인 근초고왕은 晉書의 본기에 그 이름이 ‘餘句’로 나오고 있고, 이후 백제왕의 이름은 중국 사서에 거의 대부분 ‘餘○’로 표기되어 있다. 백제 왕실이 스스로 부여 계통임을 내세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그것은 성왕대에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南扶餘’라고 바꾸었다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여암 역시 부여계 인물이다. 일찍이 346년에 부여가 前燕에 의해 멸망했을 때, 왕이었던 玄을 위시한 왕족들은 포로가 되어 전연으로 끌려갔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전연의 지배층으로 흡수되었다. 그들은 370년에 前燕이 망하고 前秦이 들어설 때 공을 세워, 다시 전진의 지배층으로 변신하기도 하였다. 전연의 散騎侍郞을 지낸 餘蔚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21)
여울은 뒤에 전진이 흔들릴 때, 모용수를 도와 후연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384년 1월에 모용수가 燕王을 칭하고 자립한 곳이 滎陽(현 하남성 형양)이었는데, 여울은 당시까지 바로 전진의 형양태수로 있었으며, 맨처음으로 모용수에게 귀부해 들어간 인물이었다. 그는 모용수에 의해 곧바로 征東將軍 統府左司馬에 제수되었고, 아울러 ‘扶餘王’으로 책봉되었다.22)
여암과 여울 이외에도 ‘餘’씨를 칭하며 후연 정권에서 활약한 부여계 인물들은 여러 명이 있다.23) 이들이 서로 혈연적으로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는 물론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백제 왕실과 마찬가지로 이미 멸망한 부여를 원류로 하는 세력이 385년 당시에 북중국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양자가 모두 부여계라는 사실은 서로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중요한 고리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4세기 후반에 백제의 해상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특히 근초고왕이 東晉의 책봉을 받은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 세력과의 교섭은 이전 시기보다 훨씬 강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공적․사적 무역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백제 왕실과 전진․후연의 부여계 인물들을 연결시켜주는 존재가 전혀 없었으리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공식적인 국가의 사절이 아니라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 가운데서도 각국의 지배층에게 접근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부류들은 동서고금을 통해 흔히 보인다. 4세기 중엽인 340년에 전연의 왕 모용황은 대립관계에 있던 우문부에 상인 王車라는 자를 通市를 명목으로 보내어 그곳에 망명 중이던 자신의 庶兄 慕容翰과 접촉하게 하였다.24) 385년을 전후한 시기에도 백제와 중국 대륙을 오가던 상인들이 여암 측에 접근하여 백제를 포함한 주변 세력들과의 연결을 매개했을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384년 이후 북중국이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을 때, 그곳의 부여계 인물들은 여울처럼 후연에 기대어 활로를 개척해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유로 후연 정권에 불만을 품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자들도 당연히 있었을 것인데, 여암은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여울이 전진과 몰래 내통하여 전연의 도성에 전진군을 끌어들이는 이적 행위를 한 것처럼, 여암도 백제 등과 비밀리에 연결을 가지면서 공동의 군사 행동을 도모했다고 상정한다면,25) 이것은 지나친 추측일까?
결국 백제와 여암의 세력이 모종의 사정과 연유에 의해 연결을 맺고, 공동의 군사 행동을 통하여 후연으로부터 요서 지역을 탈취한 다음, 그 지역에서 함께 일정 기간 지배권을 행사했다고 볼 여지는 충분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송서 등에 전하는 백제의 요서 진출 기사와 진서와 자치통감 등에 보이는 여암의 요서 점거 기사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해야지, 후자만 사실성이 있고 전자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사로 보는 양자택일적인 사료 취급 자세는 합리적이라고 말하기 곤란한 것이다.26)
3. 진출의 배경과 성격
지금까지 요서 진출의 시기와 그 실상에 대한 논의를 해보았는데, 그러면 백제는 과연 어떤 배경에서 요서 진출을 시도한 것일까? 또 진출의 성격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역시 자료가 거의 없다고 해야겠지만, 유추해 볼 단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단서는 곧 백제가 요서 지역을 점령한 후 설치했다고 하는 ‘晉平郡 晉平縣’의 이름에서 찾아진다.27)
이전의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진평’이라는 군현명은 중국 측에서 원래부터 사용하던 명칭이 아니며, 백제의 진출과 함께 새로이 지어 붙여진 이름이다.28) 그런데 하필이면 왜 ‘진평’이라고 하였을까?29)
이것은 바로 晉나라와의 관계를 강하게 암시하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백제의 근초고왕은 372년 6월에 東晉으로부터 ‘鎭東將軍’이라는 장군호를 받고, 아울러 ‘樂浪太守’라는 직함을 부여받았다. 여기서의 ‘樂浪太守’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와 신라를 포함한 삼국이 중국의 왕조들과 책봉을 통한 외교관계를 맺었을 때, 대부분 장군호와 더불어 형식적인 郡王․開國公 등의 작위를 받았을 뿐, ‘태수’와 같은 지방관의 직함을 받은 것은 이 사례 외에는 없다. 당시 중국인들은 ‘郡’을 중국 왕조의 영역 내에 존재하는 ‘直轄地’로 인식하였으며,30) 따라서 그 관할 책임을 맡은 태수는 자국내의 통치에 대한 자율성을 인정받는 異域의 藩臣이 아니라 중국적 지배 질서 속에서 천자의 명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는 자로 생각하였다.
중국의 영역 바깥에 있는 ‘外邦’이라 할 수 있는 백제의 왕이 또한 ‘直轄地’로 관념되어 온 낙랑군의 태수임을 공인 받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척 이례적인 일이지만,31) 여하튼 이 조치를 통해 백제왕은 동진 왕조에 대해 일정한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갖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군사 동원의 명이 동진의 천자로부터 내려질 경우, 적어도 태수라는 직함을 유지하는 한 백제의 왕은 그 명에 부응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낙랑태수의 직함은 근초고왕 당대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 뒤를 이은 근구수왕에게도 이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동진으로서도 무엇인가 생각이 있어 내린 조치였을 터이므로,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백제의 왕들이 그 직함을 이어가는 것을 불허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385년 당시 백제의 왕으로 있던 침류왕 역시 낙랑태수로서의 직함을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앞서 본 ｢양직공도｣의 사료에 백제가 아닌 ‘낙랑’이 요서 진출의 주체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32)
동진은 383년 11월 肥水의 전투에서 前秦의 대군을 격멸시킨 후 매우 고무되어 있었다. 桓溫과 桓沖 형제 등이 앞장서서 이전부터 시도해오던 북방 고토 회복의 숙원이 곧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대감과 자신감이 넘쳤을 것이다. 특히 慕容垂와 慕容沖 등 전진에 복속해 있던 선비족 출신 무장들이 자립하고, 정령 등도 들고일어나 화북이 온통 분열과 대립으로 휩싸이자, 이들의 상쟁을 부추기면서 차츰 자기 세력을 확장시킬 전략을 세웠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동진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걸리는 존재는 후연의 모용수였다. 모용수는 전연 시절부터 출중한 무장으로 명성을 날렸는데, 만약 그가 과거 전연의 영역을 모두 회복하여 淮水를 경계로 동진과 영역을 맞대는 큰 세력으로 성장한다면, 동진의 북벌 계획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질 뿐 아니라, 양자강 하류에 위치한 동진의 도성 建康마저 위협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肥水의 戰 이후 화북에서 전개되는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동진으로서는 후연의 흥성을 막기 위한 전략 수립에 착수하였을 것이 틀림없고,33) 그것은 곧 화북으로부터 모용씨 세력의 원근거지였던 대릉하 유역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한 후, 기회를 보아 남과 북에서 후연을 협공하는 것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이 과정에서 요서 지역의 요충지인 난하 하류의 영지 등을 점거하여 북방의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계획이 세워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러한 전략을 현실화함에 있어서는 동진의 자체 군대만으로는 어려웠을 것이 분명하다. 주변의 이민족 가운데 자신들을 군사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세력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된 존재가 바로 ‘낙랑태수’를 제수 받은 백제왕과 그의 군대였을 것은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는 바이다.
백제는 불과 몇 년 전 요서 지역에서 前秦의 幽州刺史 苻洛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그의 참모인 平規가 군대를 동원할 것을 건의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고, 실제로 군사 원조를 요청하는 使者가 백제에 파견되기도 하였다.34) 물론 그 당시에는 백제의 군사 원조가 실현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백제는 중국의 군사전략가들에 의해 원병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의 리스트에 이미 올라 있었던 것이며, 북벌의 호기를 잡은 동진으로서도 놓칠 수 없는 세력이었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더욱이 백제의 왕은 낙랑군의 태수를 겸하고 있어 자신들에게 충성을 바칠 의무를 가진 존재이기도 했다.
한편 백제에서는 384년 4월에 근구수왕이 죽고, 그의 아들 침류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 해 7월에 사신을 동진에 보내어 조공을 바쳤는데, 아마도 자신의 즉위 사실을 알리고 계속 동진으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동진에 건너간 백제의 사신이 중국에서의 정세 변화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백제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을 동진의 조정이 백제에서 온 사신에게 자신들의 북방 영토 수복을 위한 구상을 밝히며, 백제가 어느 정도 군사 원조를 할 수 있는지를 확인했을 가능성은 결코 작지 않아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84년 9월에 동진으로부터 승려 마라난타가 들어왔다고 한다. 이때 그 혼자서만 백제에 왔다고 볼 수는 없다. 7월에 건너갔던 사신도 돌아왔을 것이고, 아마도 침류왕에게 백제왕과 낙랑태수의 지위를 인정하는 칙서를 가진 동진의 사신도 함께 왔을 것이다. 그는 북진을 실현하려는 동진의 전략을 침류왕에게 전달하였을 것이며, 시일이 정해지면 일정한 숫자의 군대를 파견하도록 요청하였으리라 여겨진다.
당시 백제는 북쪽의 고구려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371년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적도 있었던 백제는 그 보복을 위해 결사적으로 덤벼드는 고구려에 맞서 일진일퇴의 싸움을 펼쳤는데, 아직은 그 힘이 고구려에 현저하게 밀릴 정도로 약한 것이 아니었다. 평양성 공격의 주역이기도 하고, 그에 앞서 한반도 서남부의 마한 세력의 정벌에도 성공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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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3 13: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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