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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1 20:57:3377 
고구려의 평양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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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평양  천도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에 대해 알아본다. 이 평양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다. 이병도 박사는 집안에서 가까운 압록강 남쪽 강계지방으로 비정했다. 이유인즉 당시 대동강 평양에는 낙랑군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은 대동강 평양이 아니라 황성(환도성)의 동쪽에 있는 동황성일 것이며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이 동황성을 평양 동황성으로 오인해 평양으로 잘못 적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낙랑군 유물유적의 분석을 통해 알수 있듯이 당시 대동강 평양이 낙랑군이란 명확한 증거는 없다. 따라서 고구려가 낙랑군 때문에 대동강 평양으로 천도하지 못한다는 설명은 타당성이 없다. 더욱이 강계지방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면 그에 걸맞는 유물유적이 나올만도 하지만 고구려 고분만 있을 뿐 성곽의 흔적이 희미하다. 또한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사서에도 강계지방이 수도였다는 기록이 없다.

이에 따라 학계에서도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이 강계일 것이라는 이병도 박사 주장에 대해 의문을 나타내는 학자들이 많다. 그리고 장수왕이 수도를 대동강 평양으로 옮긴 것으로 보기 때문에 동천왕이 옮긴 평양은 환도성에 가까운 곳이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을 하는 이도 있다. 이에 반해 <고구려의 발견> 저자인 김용만은 이 당시 낙랑군을 단순한 무역대표부, 혹은 영사관 기능을 하는 특수 군으로 보고,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은 삼국사기 기록대로 대동강 평양이며 후대에 고국원왕이 다시 환도성으로 천도했다가 장수왕때 완전히 대동강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은 과연 어디인가? 이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을 알아야 한다. 동천왕 20년(246) 魏 유주자사 관구검이 군사 만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한다. 이에 고구려는 1차로 비류수 위에서 적을 맞아 승리를 거두지만 위군을 얕잡아보는 바람에 대패하면서 동천왕은 남옥저로 달아난다. 이 과정에서 魏 장수는 환도산에 불내성이라 새긴다(삼국사기는 괄지지를 인용해 주하기를 불내성은 국내성이라 기록하고 있다). 결국 밀우와 유유의 활약으로 적군을 물리치지만 환도성이 난리를 치러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수도를 옮긴다. 이 평양은 仙人 王儉의 택지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학계는 당시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은 대동강 평양이 아닐 것으로 보고 강계나 그 외 다른 지역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 돌려서 낙랑군이 적어도 대동강 유역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각종 사서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동천왕이 대동강 평양으로 천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심증을 갖게 된다.

동천왕은 왜 평양으로 천도했는가? 가장 큰 이유는 환도성이 魏와 가까워서 침략을 받았고 수도가 함락되는 수모를 겪었기 때문이다. 즉 압록강 북쪽 수도는 적대적인 魏와 가깝기 때문에 언제든지 魏의 침략을 받을수 있다. 그렇다면 魏와 되도록 멀리 떨어진 곳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따라서 동천왕이 천도한 수도는 환도성 근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에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은 어디일까?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 추적에 대한 실마리는 후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먼저 고구려 16대 고국원왕은 재위 12년(342) 2월 환도성을 수즙하고 8월에 환도성으로 옮겨 거처하는데 燕이 쳐들어 온다. 고구원왕은 길이 평탄한 북쪽을 강병으로 지키게 하고 자신은 약졸들을 거느리고 남쪽을 방어하다 대패해 또 환도성이 함락된다. 그러자 고국원왕은 재위 13년(343)에 평양 동황성으로 옮겨 거처하는데 삼국사기는 '이 성이 대동강 평양 동쪽의 목멱산 속에 있다' 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동황성이 평양 동쪽 목멱산중에 있다고 했으므로 황성은 평양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지금 그 유구 등이 남아 있는 둘레 23km의 평양성이거나 안학궁이며 동황성은 평양 동북쪽의 대성산성이거나 청암리성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 이병도 박사는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장수왕 15년때의 일이므로 고국원왕의 동황성 이거는 환도성 동황성을 착각해서 잘못 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을 대동강 평양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동천왕때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기록과 고국원왕때 평양 동황성으로 이거했다는 기록을 모두 부정하게 되는 것인데 이는 삼국사기의 오류라기 보다는 이병도 박사의 무지로 인한 오만일 가능성이 높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에 대해서는 차후에 세밀히 검토하기로 한다.

이어서 고국원왕은 재위 39년(369) 군사 2만명을 이끌고 남으로 백제와 싸우다 치양전투에서 패하고 41년(371)에 백제 근초고왕과의 평양성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숨진다. 이러한 기록은 백제본기에 더욱 자세하게 나오는데 근초고왕 24년(369)에 백제는 고구려와의 치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26년(371)엔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패하(浿河) 강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공격해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겨울에 정병 3만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뒤 철수한다. 그러면 여기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성은 어디일까?

현재 패하에 대한 통설은 예성강이다. 그러나 이 패하도 대동강에 낙랑군이 있다는 전제 때문에 비정된 것이다.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백제의 북쪽 경계선인 패하는 대동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동강 남쪽의 강을 패하로 비정한 것인데 하지만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이 없다고 보면 이 패하는 대동강도 될 수 있다. 어쨋든 이 패하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동천왕이 천도한 평양, 그리고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은 백제 국경과 매우 근접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 않다면 예성강이나 한강 유역의 백제가 군사를 이끌고 전쟁다운 전쟁 한번 없이 압록강 유역까지 쳐들어가 고구려 왕을 전사케 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물론 치양(학계는 황해도 백천으로 비정)이라는 곳에서 한번 전쟁을 벌이기는 했지만 이후 고구려가 다시 백제의 국경인 패하까지 쳐들어오는 것으로 봐서는 백제 국경이 북쪽으로 크게 확장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 소수림왕 5년(375)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수곡성을 침공하는데 삼국사기를 보면 수곡성현을 매단홀(買旦忽)이라고도 불렀다고 하며 한산주에 속해 있다. 현재 학계는 이 수곡성현을 평양 남동쪽 예성강 상류인 황해도 신계로 비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수곡성은 근초고왕대에 태자(근구수왕)가 고구려와 전쟁을 벌일 때 고구려를 쫓아 수곡성까지 이르러 득의만면해 하며 "이후에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 라고 말한 곳이다. 그렇다면 이 수곡성은 백제 당초 국경에서 상당히 북쪽으로 올라간 곳일 것이다. 그런데 학계는 이 수곡성을 백제의 북쪽 국경인 예성강 상류 신계로 보고 있으니 이해하기 어렵다.

어쨋든 학계 견해대로라면 고구려와 백제 국경은 대략 예성강 정도로 추정되는데 소수림왕 7년(377), 백제가 군사 3만명을 이끌고 다시 평양성을 침범한다. 그럼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선을 대략 예성강 상류인 황해도 신계 부근이라고 본다면 백제가 군사 3만명을 이끌고 공격한 평양성은 어디인가? 이 평양이 압록강 유역에 있다면 과연 군사 3만명을 이끌고 예성강에서 압록강 유역까지 침공할 수 있는 것인가?

다음 광개토왕때도 재위 3년(393)에 백제의 침략을 우려해 나라 남쪽에 성 7개를 쌓고 4년(394)에는 고구려가 백제와 浿水에서 전쟁을 벌여 8,000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둔다. 즉 고구려는 백제와 패하와 패수에서 잇따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학계는 삼국사기의 패수를 대동강으로 보면서도 백제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인 패하와 패수를 예성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아귀가 맞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고구려 평양성과 백제 북쪽 국경은 매우 가까운 거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볼 때 고구려와 백제가 전쟁을 벌인 패수와 패하가 예성강이라면 고구려의 평양성은 삼국사기가 기록한 대로 대동강 평양으로 봐야 하며, 만일 패수와 패하가 대동강이라면 고구려 평양성은 청천강이나 압록강 유역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가능성이 있는것은 백제 영토가 지금의 요동이나 요서지방에 있을 가능성이다. 이는 초기 백제가 낙랑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했으므로 요동이나 요서지방에서 건국했을 가능성인데, 후대에 이르러서도 그 지역이 백제 영토로 남아 있어야 가능한 얘기이다. 따라서 요동이나 요서백제가 고구려와 싸웠다면 이 때의 패수는 요동지역의 강을 일컫는 것이 된다. 특히 漢과 위만조선의 경계였다는 그 浿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장수왕의 평양


다음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에 대해 알아본다. 삼국사기를 보면 장수왕 15년 移都平壤이라 해서 427년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고 간단하게 적고 있다. 이에 대해 학계는 이 평양이 지금 대동강 평양이라고 보고 있다. 즉 통설은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쓰기 위해 대동강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학계 주장대로 장수왕은 재위 56년 신라의 실직주성을 빼앗고, 재위 63년엔 백제에 침입해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린다. 재위 77년엔 신라 북변 호산성을 함락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기록이 있다 해서 장수왕의 대동강 평양 천도를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또 학계가 근거자료로 내세우는 중원고구려비는 장수왕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우위를 입증해 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이 중원고구려비도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이 대동강 평양임을 입증하지는 못한다.

장수왕 시절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전쟁을 벌이지만 서북쪽 魏와는 매우 친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그래서 학계는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쓰기 위해 수도를 압록강변에서 대동강 평양으로 옮겼다고 보는 것인데 이는 상황증거로서도 매우 빈약한 논리이다. 오히려 남쪽으로는 전쟁을 벌이는 관계이고 서북쪽으로 魏와 친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서북쪽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 상식적이다. 따라서 장수왕이 천도한 수도 평양은 대동강 평양이 아니라 요동지역에 있는 평양일 가능성이 높다. 즉 동천왕이 천도한 대동강 평양, 고국원왕이 이거한 대동강 평양 동황성에서 더 북쪽인 압록강 북쪽이나 요동지역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현재 요녕성 요양으로 수도를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고구려가 천도한 평양이라는 곳을 추적해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다. 우선 평양으로 처음 천도한 동천왕대를 살펴보면 동천왕은 魏 관구검의 공격을 받아 환도성이 파괴되는 바람에 평양으로 천도한다. 이 평양에 대해 이병도 박사를 비롯한 학계는 기록 자체를 부정하거나 명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후대 고국원왕이 평양 동황성에서 거처하다가 백제 근초고왕에게 죽음을 당한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선은 황해도 부근이다. 그렇다면 백제가 공격한 고구려 평양은 삼국사기 기록대로 황해도와 가까운 지금 대동강 평양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다가 장수왕대에 이르러 국력을 회복하고 다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있다. 고구려가 볼 때 백제에 의해 동천왕이 전사하는 평양은 안전한 수도가 아니다. 더욱이 남하정책에 따라 백제,고구려와 숱한 전쟁을 벌여야 하는 고구려로서는 안전한 지역으로 수도를 옮길 필요가 있다. 따라서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요동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면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은 대체 어디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유감스럽게도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 사서에는 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에 대한 기록이 중국 사서에 나온다.

우선 遼史를 보면 동경요양부(현재 중국 요녕성 요양일대)에 대해 설명하기를 「東京遼陽府,..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 唐高宗平高麗,於此置安東都護府;後爲渤海大氏所有」라 적고 있다. 즉 '동경요양부는 .. 위 태무가 사신을 보내 평양성에 머물렀는데 요 동경은 본래 이곳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는데 후에 발해 대씨가 차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을 자세히 살펴보면 위 태무가 사신을 보낸 평양성이 이 요양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魏書와 北史에서 확인할 수 있다. 北史를 보면 「태무제(440-452)때 소(고국원왕)의 증손 고련(장수왕)의 사신이 와서 조공하면서 역대 황제들의 이름 글자를 피하겠다고 청하였다. 태무는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조서를 보내 그렇게 하도록 하고 원외산기시랑 이오를 파견해 고련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삼았다. 이오는 평양성에 가서 그 나라의 여러 곳을 살피고 나서 말하기를 "고구려는 요의 동남쪽의 1천여리에 있고 동쪽으로는 책성, 남쪽은 소해에, 북쪽은 옛 부여에 이르며 백성의 수는 전 위나라때보다 3배나 많다."고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이 삼국사기에도 기록돼 있다. 즉 「장수왕 23(435)년 후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국휘(國諱)의 교시를 청하니 세조는 그 정성을 갸륵히 여겨 제계(帝系)와 휘명(諱名)을 적어 주게 하고 원외산기시랑 이오(李敖)를 보내 왕을 배알하여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이라 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북사는 태무제(440-452)때로 적고 있고 삼국사기는 장수왕 23(435)년이라고 적고 있어서 햇수에서 차이가 나지만 공통적으로 이오가 평양성에 머무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오가 평양성에 머무른 해는 435년으로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427년에서 8년이 지난 때이다. 그런데 이오가 머문 평양성은 遼나라가 동경요양부라 명명한 지금의 요양이다. 따라서 장수왕이 옮긴 평양은 이 요양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른다'고 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이오가 말하는 小海는 요동의 남쪽 요동만을 이르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장수왕의 평양천도 당시 요동, 요서지역의 정세



그렇다면 이번엔 장수왕이 수도를 요동지역 요양으로 옮길 당시 주변 정세는 어떠했는지, 그리고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은 어디였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만일 고구려가 요동지역에서 전쟁을 벌여야 할 상황이라든지, 국경선이 지금의 요하였다면 장수왕이 요하 근처 요양으로 수도를 옮긴다는 것이 무모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며 요양으로의 천도 주장은 정황적 근거가 희박해지기 때문이다.

우선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천왕대에 魏 공격을 받아 환도성이 파괴되기도 하지만 고국원왕이 또 다시 환도성으로 이거(移居)해 전연 모용황과 전쟁을 벌였다가 패하고 만다. 하지만 전연은 고구려땅을 지키기 어렵다며 환도성을 헐어버리고 돌아간다. 고국양왕대에 요동과 현도를 놓고 후연 모용수와 밀고 밀리는 전쟁을 벌인다. 그리고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후연 모용성이 침입해 고구려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돌아가자 광개토왕은 재위 12년 후연을 공격해 숙군성(요서지방 조양 동북)을 빼앗는다. 그리고 광개토왕 15년 후연왕 모용희가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하다 실패한 뒤 이듬해 경병으로 고구려 목저성를 공격하다 실패한다. 이처럼 고구려는 전연,후연과 150여년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따라서 고구려와 전연,후연은 숙적임에 틀림없다.

그러던 것이 광개토왕 18년에 이르러 상황이 돌변한다. 즉 후연왕 모용수가 북위와의 전쟁에서 수도인 중산(지금 하북성 정현)이 함락되고 이후 고구려를 공격하다 참패한 뒤 모용운이 왕위를 잇자 고구려는 종족의 예를 베푼다. 모용운은 본래 고구려 왕족 고화의 손자이다. 그의 아버지 고발이 모용황의 고구려 침입때 잡혀감에 따라 고운은 후연에서 살게 되며 이후 후연의 태자 모용보가 양자로 삼으면서 모용이라는 성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 모용운이 왕위를 잇자마자 다시 고씨로 고치고 고구려와 종족의 예를 맺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즉 지금까지 고구려와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후연에서 갑자기 고구려 출신이 왕이 되고 그 왕은 자신이 고구려 출신임을 만천하에 공포하며 나아가 고구려와 같은 종족으로서 외교관계를 맺는 것은 고운이 북연의 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에 고구려가 깊숙이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추정된다. 왜냐 하면 지금까지 적국이었던 고구려 사람이 내부적인 요인만으로 갑자기 왕으로 등극하기는 어려우며, 설혹 왕이 되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기존 이념과 기득권 세력을 무시하고 지금까지의 적국을 같은 종족으로 대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고구려가 후연을 멸망시킨 뒤 북연을 속국형태로 두었음을 강하게 암시하는 대목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晉書의 기록과 광개토왕 비문, 周書와 北史, 그리고 덕흥리 유주자사진 무덤에 의해 뒷받침된다. 우선 晉書를 보면 영락 14년(404)에 「會高句驪寇燕郡,殺略百餘人」라 해서 고구려가 고구려군이 연군, 즉 지금 북경유역까지 공격한다.

그리고 영락 15년(405)에 후연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하지만 실패하며 영락 16년엔 후연이 거란을 습격하려다 만만치 않자 치중병을 버리고 경병으로 고구려를 습격했다가 대패하고 만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연군은 3000여리를 행군해 병사와 말이 피로하고 얼어죽은 자가 길에 즐비했다고 한다.

그런데 광개토왕 비문을 보면 「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合戰 斬煞蕩盡 所獲鎧鉀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環破 沙溝城 婁城 牛由城 □城 □□□□□□城」이라 해서 영락 17(407)년에 군사 5만명을 보내 적을 무리치고 적으로부터 획득한 갑옷이 1만여벌에 이르며 수많은 군수물자를 빼앗았고 사구성과 루성, 우유성 등을 파했다고 적고 있다. 이 비문의 상대방이 어느 나라였는지에 대해서는 각국 학자들간에도 백제, 후연 등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광개토왕이 백제를 초토화시킨 이후이기 때문에 영락 17년조 비문의 상대는 후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바로 삼국사기 16년(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광개토왕비문에는 1년차가 있으므로 삼국사기 광개토왕 15년은 영락 16년) 12월 후연과의 전쟁기록이 광개토왕비문 17년조 기록이 아닌가 여겨진다. 결국 후연은 거란에 패하고 3000리를 쫓겨다니다 고구려에게 대패하면서 멸망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 후연은 결국 407년 중위장군 풍발 등 22명이 결맹해 모용희를 죽이고 모용운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모용운이 고구려족임을 만천하에 공포하면서 고운으로 바꾸고 고구려와 종족의 예를 갖춘다. 이러한 일련의 내용으로 볼 때 후연은 고구려에 의해 멸망의 길을 걷고 그 과정에서 고구려가 깊숙이 개입해 고구려족 고운을 왕으로 세워 속국 형태로 만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고구려와 적대적으로 전쟁을 벌이던 후연에서 갑자기 고구려사람이 왕이 되고 그 나라의 외교전략까지 180도 달라지는 것은 내부적 요인만으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고구려의 직간접적 영향으로 정권이 바뀌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광개토왕 당시 고구려는 서쪽으로부터의 위협이 사라진다. 이후 고구려는 북연이 멸망하고 북위가 들어선 이후에도 북위와 매우 친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한다.

다음으로 周書와 北史를 보면 「고구려 땅은 서쪽으로 요수를 넘어 2천리」라고 적고 있다. 요수를 지금의 요하로 본다면 그 요하의 서쪽 2천리라 했으므로 적어도 지금의 북경유역까지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역대 왕조의 사관들은 중국이 한번이라도 땅을 차지하면 그 땅을 마치 자신들이 차지한 것처럼 기록하곤 하는데 이러한 중국측 사관들이 사서를 통해 '고구려 땅이 요수 서쪽으로 2천리'라고 시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만일 삼국사기 등 국내 사서가 그러한 기록을 남겼다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두찬을 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중국측 사관들이 그러한 기록을 남겼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그렇게 기록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 영토가 실질적으로 요하 서쪽으로 2천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가능성과 광개토왕대 고구려가 북연을 속국으로 두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특히 고구려는 북연 이후 隋나라에 이르기까지는 후주와 고구려의 충돌외에는 서쪽 나라와 커다란 군사적 충돌이 없었으며 영양왕 9년(598)에 이르러서야 隋의 요서지방을 침략하는 것으로 볼 때 周書와 北史의 기록은 고구려가 요서지방의 북연을 사실상의 속국으로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에서 발견된 유주자사진 무덤을 살펴본다. 이 유주자사진 무덤에는 앞방 북벽에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를 지내다 77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 해가 영락 18년(408)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관직 순서는 유주자사진이 차례로 임명된 관직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관직명중에 국소대형이 있는데 이 관직은 전형적인 고구려 관직이다. 그렇다면 이 국소대형 이후엔 고구려로부터 관직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국소대형 이후에 나오는 요동태수와 유주자사는 전형적인 중국 왕조의 관직명인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는 고구려가 당시 유주지역을 통치하면서 중국 왕조의 관직을 그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유주자사진 무덤 앞방 남벽에 유주자사진이 '막부를 설치하고 장사.사마.참군.전군녹사 등의 관직을 두었다'고 적고 있는데 梁書에 이르기를 「고구려왕 안(광개토왕)이 장사와 사마, 참군관을 설치했다」고 적고 있으므로 광개토왕 당시 고구려는 중국 왕조에서 사용하던 관직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유주자사진 무덤에는 유주자사진이 연군과 범양, 어양(북경부근), 상곡(북경부근), 광령, 대군, 북평(북경유역), 요서, 창려, 요동, 현도, 낙랑, 대방 등 13개군 태수로부터 보고를 받는 벽화가 있고 유주에 13개 군을 두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이러한 13개 군 지역을 다스린 나라를 찾아보면 후연밖에 없는데 이 후연은 13개군을 두지 않았다. 동진이나 전진, 후조 등 다른 나라의 유주도 이와 다르다. 따라서 유주자사진은 첫째, 허위이거나 둘째, 고구려로부터 관직을 받았을 가능성이 남는데 무덤에서 벽화와 함께 13개 군을 두었다는 기록과 함께 막부를 설치하고 장사.사마.참군.전군녹사 등을 두었다는 기록을 남긴 점으로 미뤄 유주자사진이 13개군을 다스린 것을 허위로 몰아부치기엔 무리가 따른다. 결국 유주자사진은 고구려로부터 관직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나아가 벽화에 그린 유주자사진의 모습이 철저히 고구려 귀족의 모습이고 영락이란 고구려 연호까지 사용한 점을 보면 유주자사란 직책은 고구려로부터 받았다고 봐야 하며 따라서 사실상 유주지역을 고구려가 점령한 적이 있거나 적어도 간접적인 지배형태인 속국형태로 영향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비춰볼 때 장수왕 당시 고구려가 요동지역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 무리가 아님을 보여준다. 백보 양보해서 앞서 제시한 근거들이 사실과 다르다 하더라도 광개토왕과 장수왕 당시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이 요동은 漢나라때 요수(요하) 서쪽 의무려산까지 포함된다. 광개토왕과 장수왕 당시 이 요동이 漢나라때와 같은 지역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고구려가 요하 서쪽까지 차지했을 수 있으며 따라서 당시 고구려와 북연과의 국경선은 지금 요서지방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학계는 요즘의 지리인식에 비춰 요동은 요하 동쪽으로만 파악하고 있으나 고대 요동은 요하 서쪽 의무려산까지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요동에 관한 한 전반적인 인식변화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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