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독립운동가가 일제의 체포와 압박을 피해 낮선 땅 중국 대륙을 누비며 항일투쟁을 벌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김산처럼 1930년대 후반 항일투쟁의 방편으로 중국공산당에 가담했으며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이름모를 김산’이 중국 대륙에 피를 적셨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들이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이들이 남긴 2세, 3세는 대부분 소외되고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베이징에서 만난 김신정씨(88)는 집안 전체가 항일투사로 나서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김기창(金基昌·1872~1950) 선생의 외동딸이다. 하지만 그의 아들 정삼씨는 얼마전까지 서울의 공사장에서 일하다 밀린 임금도 받지 못한 채 돌아왔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인 김기창 선생은 1908년 신민회 의주지회 반장으로 활동했고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으로 검거돼 투옥됐다. 결국 김선생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14년쯤에 중국으로 망명,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한 독립운동사의 주요 인물이다.
-北에 삼촌 생존가능성 서훈보류-
특히 그의 아들 4형제 중 3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둘째아들 영호는 중국공산당 조직 책임자로 일했다. 셋째 성호는(중국이름 주문빈·周文彬) 당지부서기, 넷째 상호도 당 학생운동 책임자로 활동했다.
특히 셋째 성호는 1938년 탄광노동자 대파업을 주도하고 그해 7월 하북성동부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이후 당위원회 상무위원, 조직부장 등의 요직을 지내다 1944년 일본군에 포위돼 치열한 전투끝에 전사했다.
그가 졸업한 중학교에는 36세로 전사한 주문빈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중공중앙당교 최용수 교수는 “조선족 중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로 흉상이 세워진 사람은 김성호가 유일하다”며 “중국공산당 창립기념 중앙TV 방송국에서 그의 일대기를 그린 프로를 방영할 정도로 중국에서 인정하는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말했다.
외손자 정삼씨는 한국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2002년 할아버지의 자료를 모아 어머니 이름으로 국가보훈처에 독립운동 유공자 상훈을 신청했고 보훈처는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김씨 가족은 보훈혜택은커녕, 외손자는 한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 그 이유는 우리 보훈처가 북한에 막내 오빠가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김씨에게 서훈을 보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보훈혜택이 아들 우선으로 승계되는 것도 문제지만 서훈을 받을 가능성도 없는 가족이 북한에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신청한 가족의 서훈을 보류하는 한국 정부도 답답하다”고 말했다.
외손자 정삼씨는 “4년 동안 서울 사당동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했지만 밀린 임금 8백여만원을 받지 못했다”며 “독립운동가 후손이 불법체류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서둘러 귀국했다”고 말했다.
김신정씨는 “1937년 일본에 유학가기 위해 일본말을 배우려고 서울 이화여전에서 손정도씨의 딸 손인실씨와 한학기 공부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화여전에서 일본어를 공부한 후 일본 오사카의전에서 7년동안 의학을 공부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신정씨는 북경아동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다 은퇴했다.
베이징에서 만난 엄명학씨(42) 역시 8년째 할아버지와 인연 찾기를 하고 있다. 엄씨의 할아버지 엄익근씨는 광복군 제5지대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하다가 해방후 한국으로 귀국, 1950년 세상을 떠났다. 우리 정부에서는 1982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엄익근 손자도 8년째 인연찾기-
엄씨는 “할아버지 엄익근씨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기 전 이미 서울에 윤을남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둔 상태였다”며 “윤씨는 1943년 큰아들 엄윤희씨의 강제 징집을 피하고 남편도 찾을 겸 중국길에 나섰다”고 말했다.
그러나 윤씨는 넓은 중국에서 남편을 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따라 중국에 왔던 엄윤희씨는 중국 하얼빈에 정착해 3형제를 남겼다. 엄명학씨가 바로 그 막내다.
그의 할아버지 엄익근씨는 해방후 서울로 돌아와 다른 여성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 낳은 자식만 호적에 친자로 돼 있다. 엄씨 형제는 중국측 서류를 공증까지 해 국가보훈처에 제출했지만 보훈처는 ‘중국 서류는 믿을 수 없다’며 거부했다.
엄씨의 큰형은 현재 서울에서 불법체류를 하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연결고리를 찾고 있다. 생계는 공사장 막노동으로 이어가고 있다. 엄씨는 “독립운동 연금을 나눠 달라는 것도 아니다”며 “독립운동가의 손자라는 것만 확인하고 할아버지 조국에 당당하게 들어올 수 있게만 해달라”고 요구했다.
-“내 모국 당당하게 드나들게”-
이밖에 베이징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성숙 선생이 중국인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이 살고 있다. 또 경성의전(서울대 의대 전신) 학생으로 탑골 공원에서 3·1선언문을 낭독했다가 중국으로 망명,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중국공산당 고위층을 지낸 한위건의 양자도 살고 있다. 한위건은 중국의 마오쩌둥이 높게 평가했던 인물 중 한사람이다.
이중 대부분은 아직까지 한국 정부로부터 서훈은커녕 이름조차 발굴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특히 이들은 중국 정부가 호적을 없앤 데다 우리 정부가 중국측 서류를 불신하기 때문에 후손 입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한국 정부가 묻혀진 이들 항일투사를 발굴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중공중앙당교 최용수 교수는 “중국에는 혁혁한 항일투쟁을 벌이다 사망했지만 발굴되지 않은 열사가 많다”며 “한국 정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1년내에 대부분 발굴할 수 있고 이들 중 1950년 한국전쟁에 관여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서훈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5-07-20 17: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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