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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6-04 12:18:004289 
하거서(河渠書)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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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하거서(河渠書)

[해제]

하거서(河渠書)는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임금부터 시작해서 사마천 활동시기였던 한무제 때까지 행한 고대 중국의 수리사업에 관해 서술한 책이다. 하거서에 언급된 수리사업은 통상적으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황무지나 늪지대에 인공수로를 굴착하여 새로운 농지를 대규모로 조성한 일이며

둘째는 하천을 준설하거나 운하를 파서 수운이 가능토록 만들어 대규모의 물류가 가능토록 한 일이며,

셋째는 하천에 제방을 쌓아 홍수를 방지한 일에 대한 기록이다.

중국의 하천에 대해 중국 북위(北魏 : 기원 439-534 ) 왕조의 역도원(酈道元)이 저술한 《수경주(水經注)》라는 책이 있다. 원래 3세기 무렵에 저술된 《수경(水經)》이라는 책에는 중국의 주요 하천에 대한 발원지, 경로, 하구 등이 매우 간단히 기재되어 있었다. 《수경주》는 《수경》이라는 책에 역도원이 주석을 단 책이다. 그 주석은 《수경》의 137개의 강에 더하여 1252개의 지류에 해당하는 하천을 들고 있으며 각 강들의 유역과 유로의 도읍, 고적, 산수 등에 관해서 풍부한 문헌의 인용과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기술했다. 《수경주》는 귀중한 문헌으로써의 가치뿐만 아니라 문장은 유려하고 아름다워 문학적으로도 이름이 높다. 중국의 하천과 그 수계에 따라 저술한 체계는 보통의 행정구획에 따르는 중국의 지리서 가운데 이색적인 책이다. 책 내용 중 한국의 고대사 연구에 깊은 관련이 있는 패수(浿水)에 관련된 기사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하서(夏書)①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임금이 13년 동안을 집을 떠나 홍수를 막기 위해 일하다가 어느 날 그의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으나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육로를 다닐 때는 수레를 탔으며, 수로를 다닐 때는 배를 이용하였고, 늪지를 다닐 때는 취(橇)②를 신었으며 산속을 다닐 때는 교자를 탔다. 이로써 우임금은 천하를 구주로 나누고③ 산세에 따라 큰강의 퇴적물을 준설하여 물길의 소통을 원활히 했으며, 토지에서 생산되는 물산에 따라 바쳐야하는 부세(賦稅)의 등급을 정했다. 또한 도로를 뚫어 구주가 서로 통하게 하고 구택(九澤)④의 둘레에 제방을 축조하고 구산(九山)⑤의 높이를 측량했다. 그러나 황하가 범람하여 재해를 발생시켜 중원 지방은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래서 우임금은 황하의 재해를 다스리는 일이 자기의 가장 시급한 임무라 생각하고 적석산(積石山)⑥에서 발원한 하수를 용문산을 뚫고 남쪽으로 흐르게 하여 화음(華陰)⑦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지주산(砥柱山)⑧ 및 맹진(孟津)⑨과 낙예(雒汭)⑩를 거쳐 대비(大邳)⑪에 이르게 했다. 높은 지대에서 흘러와 수세가 급하고 사나운 황하가 평지를 완만하게 흐르지 못하기 때문에 제방이 수시로 터져 수재를 입게 되었다고 생각한 우임금은 황하의 물줄기를 두 개로 나누어 수세를 누그러뜨려 흐르게 하였다. 기주(冀州)와 병주(幷州)의 경계 남쪽에서 발원한 장수(漳水)의 하류인 강수(降水)⑫와 만난 황하는 대륙택(大陸澤)을 지나고 9개의 하천으로 나뉘어 흐르게 한 다음 다시 역하(逆河)에서 하나로 합쳐 발해(勃海)로 들어가게 했다. 이로써 구주의 하천을 모두 통하게 되고, 구주의 소택지는 그 주변에 제방을 쌓아 온 중국이 평안하게 되었다. 우임금이 이룩한 공적은 하상주(夏商周) 삼대(三代)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우임금이 황하를 다스린 이후, 사람들은 홍구(鴻溝)⑬를 굴착하여 형양(滎陽)에서 황하의 물을 동남쪽으로 끌어들여 송(宋), 정(鄭), 진(陳), 채(蔡), 조(曹), 위(衛) 등의 중원 제후국들이 제수(濟水), 여수(汝水), 회수(淮水), 사수(泗水) 등의 수로를 이용하여 서로 통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남방의 초(楚)나라는 그 서쪽 지방에 인공하천을 굴착하여 운몽(雲夢)의 들판을 관통시켜 한수(漢水)에 이르게 했으며, 동쪽으로는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사이의 땅을 운하로 연결했다. 또한 오(吳)나라에서는 삼강(三江)⑭과 태호(太湖)를 구거(溝渠)를 파서 통하게 했으며, 제나라는 제수(濟水)와 치수(菑水)⑮를 연결했다. 진(秦)나라의 촉군태수(蜀郡太守) 이빙(李氷)⑯이 이퇴(離堆)⑰의 하상을 준설하여 말수(沫水)⑱의 범람을 막아 수재를 없애고 또 2개의 강을 새로 파서 민강(岷江)의 물을 성도(成都)로 보냈다.⑲ 도강언의 축조로 생긴 수많은 구거은 수심이 깊어 모두 배가 왕래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답에 관개가 가능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어 백성들은 그 땅으로부터 나오는 이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어서 그 구거들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백성들이 도처에서 물을 끌어가 전답에 관개를 하기 위해 만든 수로가 수없이 증가하여 그 수효를 셀 수가 없었다.

전국 초기에 위(魏)나라의 서문표(西門豹)는 장수(漳水)의 물을 끌어 관할인 업(鄴) 땅의 농지에 관개를 가능하게 해서 위(魏)나라 하내(河內) 땅을 부유하게 했다.

진(秦)나라가 토목공사를 일으키기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한(韓)나라는 그들을 토목공사에 국력을 소진시키게 하면 국력이 피폐해져 동방으로 진출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 수리전문가 정국(鄭國)을 간첩으로 보냈다. 진나라로 들어간 정국은 진왕을 뵙고 경수(涇水)의 강물을 뚫어 중산(中山)의 서쪽인 호구(瓠口)에서 구거을 파기 시작하여 북산(北山)의 산자락을 따라 임진(臨晉)⑳까지 300여 리(약120 키로)의 물길을 내서 그 주위에 생기는 땅에 관개를 하면 많은 농지가 확보하여 양식을 생산할 수 있다고 했다. 진나라가 정국의 말을 듣고 공사를 하던 중에 그가 한나라의 간첩이라는 사실이 탄로 났다. 진나라가 정국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자 정국이 말했다.

「제가 처음에는 한나라를 위해 간첩으로 일을 했지만, 그러나 지금은 공사를 계속 진행시켜 완성시키고 싶습니다. 공사가 완공되면 진나라에 많은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진나라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결국은 정국으로 하여금 그 공사를 마치게 했다. 이윽고 그 구거에 경수(涇水)의 진흙탕물을 흐르게 하여 염분이 섞인 위수 북안의 황토 땅 4만 경(頃)에 관개를 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 땅에서 진나라는 매년 마다 1무(畝)에 1종(鍾)씩의 수확을 거두었다.㉑ 그 결과 관중지방은 비옥한 농토로 변하여 흉년이라고는 겪지 않아 진나라는 이로 인해서 부유하게 되었고 결국은 그곳에서 생산되는 양식을 기반으로 삼아 육국을 병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진나라는 정국이 완성한 구거에 정국거(鄭國渠)란 이름으로 불렀다.

한나라가 일어난 지 39년 되던 효문제(孝文帝) 때㉒ 황하가 산조(酸棗)㉓에서 터져 동쪽의 금제(金提)㉔가 붕궤 되었다. 그래서 한나라의 조정은 동군(東郡)의 장정들을 대거 징발해서 터진 곳을 막게 했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난 금상천자(今上天子)㉕ 원광(元光)㉖ 연간에 황하가 호자(瓠子)에서 터져㉗ 범람한 홍수가 동남의 거야(鉅野)로 유입되어 회수(淮水)와 사수(泗水)로 통해버렸다. 그래서 천자께서는 정당시(鄭當時)㉘와 급암(汲黯)㉙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대거 동원하여 그 터진 곳을 틀어막도록 했다. 그러나 힘들여 막았던 제방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방 터지고 말았다. 당시 승상으로 있던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㉚의 봉읍은 유(鄃)㉛였다. 유읍(鄃邑)은 황하의 북쪽에 있어 황하가 범람했지만, 수해를 입지 않고 언제나 풍년을 이루었다. 전분이 어린 황제에게 상주문을 올렸다.

「강이나 하천의 제방이 터지는 일은 모두가 하늘의 뜻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강제로 틀어막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설사 틀어막을 수 있다 하더라도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이어서 망기(望氣)㉜들을 불러 점을 치게 한 바 역시 같은 점괘를 얻었다. 그래서 천자는 오랫동안 무너진 황하의 제방을 막지 않았다.

정당시가 대농(大農)의 직에 있을 때 주상에게 상주했다.

「지금 관동(關東)에서 위수(渭水)의 물길을 따라 양식을 장안(長安)으로 운반하는데 모두 6달이 걸리고 위수의 900여 리에 달하는 수로의 많은 곳은 급류로 인해 조운(漕運)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장안에서 구거를 파서 위수의 물을 끌어들여 남산을 따라 황하와 연결한다면 그 거리는 300리로 단축되고 물길은 직선으로 뚫려 조운에 필요한 기한은 3개월이면 충분하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구거 주위의 땅에 관개를 할 수 있어 새로운 농지 만 경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조운을 담당하는 관서의 인력 손실도 막을 수 있고 더욱이 관중의 땅은 더욱 비옥하게 되어 많은 곡식을 수확할 수 있게 됩니다.」

정당시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천자는 제나라 출신 수리전문가 서백(徐伯)에게 측량을 시킨 후에 수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조운을 위한 수로를 굴착했다. 공사는 시작해서 3년 만에 완공되었다. 이윽고 장안에서 황하까지 수로가 개통되어 이를 이용하여 조운을 행하니 그 편리함과 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후 조운의 이용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구거 주위에 살던 백성들은 그 구거의 물을 끌어 관개가 가능했기 때문에 새로 얻은 농지는 점점 증대되었다.

그후 하동태수(河東太守)㉝) 파계(番系)가 상주했다.

「산동에서 서쪽의 장안(長安)으로 조운을 이용하여 운송하는 곡식의 양이 매년 백여 만 석에 달하나 지주산(砥柱山) 일대의 급류로 인해 배가 전복되어 화물이 물에 빠지고 심지어는 인명의 손실이 많이 생길 뿐만 아니라 그 비용도 많이 들고 있습니다. 하곡부의 피지(皮氏)㉞에서 분음(汾陰)㉟까지 구거를 파, 그곳에 분수의 물을 끌어 대고, 다시 분음에서 포판(蒲坂)까지 계속해서 굴착하여 황하의 물을 끌어대면 5천 경(頃)의 새로운 농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5천 경의 땅은 모두 강가의 버려진 황무지라 백성들은 모두 그곳에서 가축을 방목 외는 달리 용도가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 구거를 뚫어 관개(灌漑)가 가능한 땅에 농사를 짓는다면 대략 200만 석 이상의 곡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곡식을 위수(渭水)를 따라 장안으로 운송하면, 관중에서 산출되는 경우와 별 차이가 없게 되니 산동에서 산출되는 곡식을 위험을 감수해가며 수세가 험난한 지주산(砥柱山)을 통과하여 운송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천자가 파계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겨 수만 명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구거을 파고 농지를 개간했다. 그러나 공사가 시작된 지 몇 해가 지나자 황하의 물줄기가 변해 백성들이 굴착한 구거에 물을 댈 수가 없게 되어, 그곳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던 농부들은 정부에서 빌려준 종자마저 갚지 못하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하동의 구거와 농지는 오랫동안 버려졌다가, 얼마 후에 마침 월(越) 땅에서 내지(內地)로 이주해 온 월인들에게 그 땅을 주어 경작을 시키게 되었다. 이로써 소부(少府)는 그들로부터 얼마간의 조세 수입을 걷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어떤 사람이 서장(書狀)을 올려 포야도(褒斜道)㊱를 건설하고 포수(褒水)와 야수(斜水)를 연결하여 조운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천자는 서장을 당시 어사대부(御史大夫)였던 장탕(張湯)㊲에게 보내 처리하게 했다. 장탕이 서장을 올린 사람을 불러 사업의 내용에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장안에서 촉군(蜀郡)을 가려면 옛날 고도(故道)㊳를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도는 언덕이 많고 서쪽으로 멀리 우회해야 합니다. 오늘 포수와 야수의 계곡을 뚫어 서로 연결하면 산비탈도 적고 거리도 400리나 더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포수는 면수(沔水)㊴에 통하고 야수는 위수와 통함으로 이 두 강을 서로 연결하여 배를 띄우면 조운이 가능하게 됩니다. 남양에서 곡식을 싣고 면수를 거슬러 올라오다가 포수가 끝나는 곳까지 들어간 후에 100여 리는 구간은 수레를 이용하여 운반하고, 다시 배에 옮겨 실어 야수의 물길을 타고 내려가 위수로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하면 한중의 곡식들을 관중으로 쉽게 운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산동지구로부터 면수(沔水)까지 수운을 이용하여 화물을 실어 나를 수 있어 물살이 험난한 지주산(砥柱山) 일대를 통과하는 수운에 비해 훨씬 편리하게 됩니다. 또한 포야(褒斜) 지방에서 산출되는 재목이나 화살대는 파촉(巴蜀) 지방에 못지않게 풍부합니다.」

장탕을 통해 그 말을 전해들은 천자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 공사의 시행을 허락했다. 장탕의 아들 장앙(張卬)을 한중태수(漢中太守)에 임명하고 수만 명의 백성들을 징발하여 포야도(褒斜道) 5백여 리에 길을 뚫었다. 관중(關中)과 한중(漢中)의 거리는 과연 줄었으나, 포수와 야수의 물살이 세고 바위가 많아 조운(漕運)을 행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장웅비(莊熊羆)㊵가 상주했다.

「임진(臨晉) 지방의 백성들은 낙수(洛水)를 뚫어 그 물을 중천(重泉)㊶ 동쪽의 소금기가 섞인 만여 경(頃)의 황무지에 관개(灌漑)를 하고 싶어 합니다. 만약에 그 땅에 물을 끌어다 댈 수만 있다면 한 무(畝) 당 10석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자는 만여 명의 인부를 징발하여 구거을 굴착하도록 허락했다. 인부들은 징(徵)㊷ 땅에서 락수의 물을 상안산(商顔山) 밑에까지 끌어왔으나 구거의 양쪽 제방이 자주 무너져 결국은 우물을 파게 되었는데 어떤 곳은 그 높이가 40여 장 되는 곳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우물을 파게 되자, 그 우물 밑이 통해 물이 흐르게 되었다. 물은 지하로 흘러 상안산 밑을 통과하여 동쪽의 직행하다가 그 산 고개를 넘어 10여 리나 지나 솟았다.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흐르게 한 우물형 구거는 이렇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다. 우물을 파다가 그 곳에서 용의 뼈가 출토되어 그 이름을 용수거(龍首渠)라 불렀다. 용수거가 완성된 지 10여 년이 흐르자 지하구거는 사통팔달로 통하게 되어 관개가 가능하게 되었으나, 기대한 만큼의 수확을 걷어 들이지는 못했다.

황하의 제방이 호자(瓠子)에서 터진 이래 산동 일대는 20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흉년이 들었다. 특히 양(梁)과 초(楚) 지방의 재해가 심했다. 천자가 이로 인해 봉선(封禪)을 행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를 드렸으나, 그 다음 해에 또다시 한해(旱害)가 들었다.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제단의 흙이 말라서 그리 되었다고 생각했다. 천자는 급인(汲仁)㊸과 곽창(郭昌)㊹에게 명하여 수만 명의 백성들과 함께 호자의 무너진 제방을 막도록 했다. 이어서 천자는 만리사(萬里沙)㊺의 일을 끝내고 도성(都城)으로 돌아올 때 황하의 제방이 무너진 곳에 이르자 백마(白馬)와 옥벽(玉璧)을 황하의 강물에 던져 제사를 올린 후에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장군 이하의 관리들은 모두 직접 나무를 등에 업어 날라 황하의 터진 곳을 막도록 했다. 그때 동군(東郡)에서는 큰불이 나서 초목이 모두 타버려 황하를 막는데 필요한 나무가 부족하여 기원(淇園)㊻의 대나무를 가져와 죽건(竹楗)㊼을 만들어 공사를 막는데 사용했다.

황하의 둑이 터진 곳에서 친히 왕림하여 물을 막는 공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음을 본 천자는 비통하게 생각하여 다음과 같은 시가를 지어 노래했다.

瓠子決兮將奈何(호자결혜장나하)

호자의 제방이 터졌음이여, 이를 장차 어이할까나?

晧晧旰旰兮閭殫爲河(호호간간혜여탄위하)

호호망망 물바다여, 온 고을이 강으로 변했구나!

殫爲河兮地不得寧(탄위하혜지부득녕)

온 땅이 모두 강으로 변했음이여,

땅 위의 백성들이 고생하는구나!

功無已時兮吾山平(공무이시혜오산평)

공사는 언제 끝날지 모름이여, 오산은 평평해졌구나!

吾山平兮鉅野溢(오산평혜거야일)

평평해진 오산이여, 거야택이 넘치는 구나!

魚沸郁兮柏冬日(어비욱혜백동일)

황하 물에 뛰놀던 물고기여, 하늘을 올라 해에 닿겠구나!

延道弛兮離常流(연도이혜이상류)

황하의 물길이 막힘이여, 옛날 흐름에서 벗어났구나!

蛟龍騁兮方遠游(교룡빙혜방원유)

날뛰는 교룡이여, 저 멀리 헤엄쳐 가는구나!

歸舊川兮神哉沛(귀구천혜신재패)

황하가 옛 물길로 돌아옴이여, 신께서 큰 힘을 쓰시 도다!

不封禪兮安知外(불봉선혜안지외)

봉선을 행했음이여, 내가 산동의 재해를 알게 되었 도다!

爲我謂河伯兮何不仁(위아위하백혜하불인)

나를 위해 하백에게 전해주오,

어찌하여 그리 어질지 않느냐고?

泛濫不止兮愁吾人(범람부지혜수오인)

끝없이 넘치는 황하의 물이여,

사람들을 근심에 쌓이게 하는 도다!

齧桑浮兮淮泗滿(설상부혜회사만)

물위에 떠 있는 설상정(齧桑亭)이여,

회수(淮水)와 사수(泗水)를 넘치게 하는 도다!

久不反兮水維緩(구불반혜수유완)

오래도록 옛 강으로 돌아오지 않음이여,

제방은 무너진 체 그대로구나!

또 다른 한 수는

河湯湯兮激潺湲(하상상혜격잔완)

호호탕탕하게 흐르는 황하의 물이여, 세차게도 흐르는 도다!

北渡汚兮浚流難(북도오혜준류난)

북쪽으로 가는 먼 물길이여,

준설을 행하여 흐르게 하기가 어렵도다!

搴長茭兮沈美玉(건장교혜심미옥)

나무와 돌을 길게 묶은 띠풀단이여,

아름다운 옥을 황하에 던져 제사지내는 도다!

河伯許兮薪不屬(하백허혜신불속)

하백이 허락하심이여, 나무가 부족하도다!

薪不屬兮衛人罪(신불속혜위인죄)

나무가 부족함이여, 위나라 사람들의 잘못이로다!

燒蕭條兮噫呼何以御水(소소조혜희호하이어수)

백성들이 땔감으로 대쑥마저 태워버림이여,

무엇으로 황하의 물을 막을 수 있겠는가?

頹林竹兮楗石菑(퇴림죽혜건석치)

기원(淇園)에서 대나무를 베어 옴이여,

죽건(竹楗)을 만들고 돌기둥을 세우도다!

宣房塞兮萬福來(선방색혜만복래)

선방의 무너진 둑을 막음이여, 만복이 찾아오는 도다!

이윽고 호자(瓠子)의 터진 곳을 틀어막아 그 제방 위에 궁궐을 짓고 이름을 선방궁(宣房宮)이라 했다. 마침내 황하는 다시 우임금이 다스렸던 예전의 두 줄기 강물로 회복되어 양(梁)과 초(楚) 및 산동 지방은 안녕을 되찾게 되고 홍수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게 되었다.

이후로 관리들은 수시로 강물을 다스려 이득을 얻는 일에 대해 다투어 진언했다. 삭방(朔方), 서하(西河), 하서(河西), 주천(酒泉)㊽ 등의 지방에서는 강이나 계곡에서 물을 끓어다 농지에 관개를 하게 되었다. 관중(關中) 지방에는 보거(輔渠)㊾를, 영지(靈軹)㊿에서는 도수(堵水)51)를, 여남(汝南)과 구강(九江)52)에서는 회수(淮水)를, 동해(東海)에서는 거정(鉅定)53)을, 태산(泰山) 주변의 땅에는 문수(汶水)를 끌어다 구거를 판 후에 농지에 관개를 했는데 그 넓이는 각각 만여 경에 달했다. 그밖에 산속의 계곡 물을 끌어다 만든 작은 구거들은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무제 때 행했던 제일 규모가 수리공사는 선방(宣房)이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나는 남쪽으로 여산(廬山)에 올라 우(禹)임금이 소통시킨 구강(九江)54)을 보았고 또한 회계(會稽)55)의 태황(太湟)56)에 이르고 다시 고소산(姑蘇山)57)에 올라 오호(五湖)58)를 바라보았다. 남쪽으로는 낙예(洛汭)59) 대비(大邳), 역하(逆河)를 살폈고, 또 회수(淮水), 사수(泗水), 제수(濟水), 탑수(漯水)60)와 낙수(洛水)61)를 돌아다보았다. 서쪽으로는 촉(蜀) 땅의 민산(岷山)에 올랐고, 이빙(李氷)이 민강(岷江)과 말수(沫水)의 수재를 다스리기 위해 준설했던 이대(離碓)들을 살펴보았다. 북쪽으로 다시 올라가 용문(龍門)으로부터 삭방(朔方)까지 올라가 보았다. 그 여행에서 나는 물로부터 오는 이익과 재난은 실로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후에 천자를 따라 호자(瓠子)에 가서 나무를 나르며 선방(宣房)을 막으면서 천자가 부른 호자시(瓠子詩)에 감동하여 이에 하거서(河渠書)를 지었다.

《하거서(河渠書) 끝》

주석

1)하서(夏書)/ 《상서(尙書)》 중 하나라의 사적에 관해 기술한 《하서(夏書)》를 말한다. 우공(禹貢)과 감서(甘誓) 두 편이 있다.

2)취(橇)/ 진흙 위를 걸을 때 신는 밑이 넓적한 덧신을 말한다.

3)구주(九州)

1. 옹주(雍州)/《하본기(夏本紀)》「흑수서하유옹주(黑水西河惟雍州)」의 하(河)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을 가르는 황하(黃河)를 이야기한다. 즉 옹주(雍州)는 흑수(黑水)의 서쪽을 가리킨다.

2. 예주(豫州)/「형하유예주(荊河惟豫州)」예주의 남쪽 경계는 형산(荊山 : 지금의 호북성 남쪽의 장서현(漳西縣))에 이르고 북쪽 경계는 황하와 접하고 있다. 한무제가 지방 장관들을 감찰하기 위해 설치한 13자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3. 서주(徐州)/「해대급회유( 海垈及淮惟)」의 해(海)는 지금의 황해(黃海)를 말하고 대(垈)는 태산을, 회(淮)는 회수(澮水)를 말한다. 즉 서주의 경계는 북으로는 태산과 청주에 이르고 남으로는 회수와 양주 이북에 닿는다. 한무제가 설치한 13자사부 중의 하나다.

4. 양주(揚州)/「회해유양주(淮海維揚州)」의 회(淮)는 지금의 회수(淮水)를 해(海)는 지금의 동해(東海)를 말한다. 한무제 때 설치한 13자사부 중의 하나이며 치소(治所)는 역양(歷陽 : 지금의 안휘성 화현(和縣))에 두었다.

5. 청주(靑州)/「해대유청주(海垈維靑州)」의 해(海)는 발해를 말하고 대(垈)는 즉 태산(泰山)을 말한다. 구주(九州) 중 가장 동쪽에 있었던 주. 오행설에 의하면 동쪽은 청(靑)을 뜻했기 때문에 청주라 한 것이다. 관할 구역은 동쪽으로는 발해에 이르고, 하북(河北) 오교(吳橋) 이동, 마협하(馬頰河) 이남, 산동성 북부와 동부지구에 이르렀다.

6. 기주(冀州)/「기주기재호구,치량급기(冀州:冀載壺口,治梁及岐)」하북성 동남, 산동 서북부, 하남과 산서 경계 중 하수 이북, 산서와 섬서 경계 중 하수 동쪽의 땅을 관할했다.

7. 형주(荊州)/「형급형양유형주(荊及衡陽維荊州)」의 형(衡)은 형산(衡山)으로 지금의 호북성 남장현(南漳縣)을 말한다. 대체로 호북성 중부, 남부, 호남성 북부, 중부, 사천성(四川省)과 귀주성(貴州省)의 일부를 관할했다.

8. 연주(兗州)/ 연주(沇州)라고도 한다. 《하본기(夏本紀)》 「 濟, 河維沇州 」연주(沇州)는 연수(沇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제(濟)는 즉 제수(濟水), 하(河)는 즉 하수(河水)를 말하며 산동성 서북부, 하남 동북과 하북 동남부를 관할했다.

9. 양주(梁州)/「화양흑수유양주(華陽黑水惟梁州)」의 흑수에 대한 설은 분명하지 않다. 란창강(瀾滄江), 노강(怒江), 금사강(金沙江), 장액하(張掖河), 대통하(大通河) 등 설이 다양하다.

4)구택(九澤)/ 고대의 유명한 소택지로 《상서(尙書).우공(禹貢)》 편에 의하면 그 이름과 위치는 다음과 같다.

1. 기주(冀州) 대륙택(大陸澤) : 하북성 형태시(邢台市) 동북

2. 연주(兗州) 뇌하택(雷夏澤) : 산동성 성양(成陽) 북

3. 서주(徐州) 대야택(大野澤) : 산동성 거야현(巨野縣) 북

4. 양주(揚州) 팽려택(彭蠡澤) : 강서성 구강시(九江市) 일대

5. 양주(揚州) 진택(震澤) : 지금의 강소성 태호(太湖)를 말한다.

6. 형주(荊州) 운몽택(雲夢澤) : 호북성 무한시(武漢市)에서 강릉시(江陵市) 일대에 걸친 장강 주변의 소택지를 말한다.

7, 예주(豫州) 형택(滎澤) : 하남성 활현(滑縣) 북

8. 예주(豫州) 맹저택(孟猪澤) : 하남성 상구시(商丘市) 북동

9. 옹주(雍州) 저야택(猪野澤) : 내몽고자치구 남단의 파단길림(巴丹吉林)사막 가운데 있었다.

5)구산(九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회남자(淮南子) 설은 회계(會稽), 태산(泰山), 왕옥(王屋), 수산(首山), 태화(太華), 기산(岐山), 태항(太行), 양장(羊腸), 맹문(孟門)이라 했으며 주례(周禮) 설은 회계(會稽), 형산(衡山), 화산(華山), 기산(沂山), 대산(垈山), 악산(岳山), 의무려(醫無閭), 곽산(霍山), 항산(恒山)이라 했다.

6)적석산(積石山)/ 지금의 감숙성과의 경계인 청해성(靑海城) 민화현(民和縣) 남쪽의 소적석산(小積石山)을 말한다. 고대에는 황하의 발원지가 이곳으로 알았다. 그러나 황하의 실제 발원지는 적석산에서 약 1600키로 서쪽의 바엔카라(巴顔喀拉) 산맥의 야하라다쩌(雅合拉達澤)산이다.

7)화음(華陰)/ 화산의 북쪽에 있는 고을을 말하며 지금의 섬서성 화음현(華陰縣)으로 위수(渭水)와 락수(洛水)가 합류하는 곳의 남쪽 강안에 있었다.

8)지주산(砥柱山)/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三門峽市) 동쪽 30리에 있었던 황하 강심에 있었던 산 이름. 강 가운데에 마치 기둥처럼 우뚝 솟아 있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9)맹진(孟津)/지금의 하남성 낙양시(洛陽市) 북 20키로 지점의 맹진현(孟津縣) 부근. 맹진(孟津)은 중국 역사상 황하를 건너는 유명한 도선장(渡船場)이다. 주무왕(周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제후들을 소집하여 맹진에서 하늘에 맹세의 의식을 치르고 황하를 건너 진군하던 중 군사들의 행군하는 모습에 아직 시기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회군하고 그 2년 후에 다시 출정하여 목야(牧野: 현 하남성 신향시(新鄕市) 북)의 들판에서 은나라 군사들을 무찌르고 주나라를 세웠다. 한무제 때 이곳에 다리를 건설함으로 해서 황하를 건너는 중요한 길목이 되었다.

10)낙예(雒汭)/ 낙수가 흘러 황하와 합류하는 곳의 옛날 이름. 지금의 하남성 공현(鞏縣)에 있었다.

11)대비(大邳)/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사수진(汜水鎭) 서북의 황하의 남안에 있었던 산 이름이다.

12)강수(降水)/ 지금의 산서성 태항산 동쪽 산록에서 발원한 청장하(淸漳河)와 탁장하(濁漳河)가 합장향(合漳鄕)에서 합류한 장수(漳水)는 한단시(邯鄲市) 비향현(肥鄕縣) 부근에서 강수(降水)로 이름을 바꿔 동북으로 흐르다가 한단시 구현(丘縣)에서 황하로 흘러 들어갔다. 황하로 유입되기 전의 장수의 하류 이름이다.

13)홍구(鴻溝)/ 전국시대 때 위혜왕(魏惠王)이 그의 재위 10년인 기원전 360년에 개통시킨 운하다. 황하의 남안에 있던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에서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동쪽의 대량성에서 남쪽으로 꺾여 송나라 수도였던 수양성에서 영수와 연결했다. 홍구가 개통됨으로 해서 제수(濟水), 복수(濮水), 변수(汴水), 수수(睢水), 영수(潁水), 와수(渦水), 여수(汝水), 사수(泗水) , 하수(荷水) 등과 모두 물길로 연결되어 황회평원(黃淮平原)의 수상교통망이 형성되었다.

14)삼강(三江)/ 태호(太湖)와 황해를 연결했던 세 개의 강을 말한다. 북강(北江), 중강(中江), 남강(南江)이라고 불렀다.

15)치수(菑水)/ 옛날 중국 고대에 지금의 산동성 래무(萊蕪)의 동북, 박산(博山)의 서쪽인 원산(原山)에서 발원하여 동북으로 흘러 제나라의 도성이었던 임치성(臨淄城)을 경유하여 소청하(小淸河)와 합류했던 강이름을 말한다.

16)이빙(李氷)/ 중국 전국시대 때 진나라 소양왕(昭襄王: 재위 기원전 307-251년)에 의해 촉군태수로 임명되어 민강(岷江)에 도강언(都江堰)의 건설을 시작했다. 도강언의 공사는 그의 아들이 이어받아 2대에 걸쳐 완성되었다. 이 수리시설의 완성으로 민강 유역은 홍수가 사라지고 전답에 관개가 가능하게 되어 농업 생산력이 획기적으로 증가되었다. 후에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데 경제적인 기반이 되었다. 2200여 년 전에 완성된 도강언은 지금도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17)이퇴(離堆)/ 원문은 이대(離碓)로 되어 있다. 두가지 설이 있다. 말수와 청의강, 민강이 합류되는 락산시(樂山市)에 있었던 지명이라는 설과, 도강언이 시작되는 지금의 사천성 성도시(成都市) 북서 관현(灌縣) 관내에 있었던 지명이라는 설이다. 하천의 준설공사를 할 때 하상의 퇴적물을 준설했다는 데서 얻은 이름이다.

18)말수(沫水)/ 지금의 장강의 지류인 대도하(大渡河)를 말한다. 청해성(靑海省)과 사천성 경계에 있는 마이가하(麻爾柯河)를 원류로 해서 대설산(大雪山)을 서쪽으로 끼고 계속남하여 석면현(石綿縣)에 이르러 방향을 바꾸어 동진하다가 다시 북쪽의 청의강(靑衣江) 및, 성도(成都)를 오른 쪽으로 우회하여 흐르는 민강(岷江)에 합류하여 다시 남쪽으로 흘려 의빈시(宜賓市)에서 장강으로 유입된다.

19)이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于蜀(우촉), 蜀守氷鑿離碓(촉수빙착이대), 辟沫水之害(벽말수지해), 穿二江成都之中(천이강성도지중). 직역하면 ‘촉군태수 李氷(이빙)이 離碓(이대)를 뚫어 沫水(말수)의 水災(수재)를 없애고 다시 두 강을 파서 成都(성도)를 관통하게 했다.’라는 뜻이다. 離碓(이대)라는 말은 離堆(이퇴)의 오기이며 퇴적물이 쌓인 곳이라는 뜻의 고유지명이 아닌 보통명사다. 말수와 청의수(靑衣水)는 지금의 락산(樂山)에서 민강(岷江)과 합류했다. 세 강이 실어 나른 퇴적물이 락산의 합류지점에서 쌓여 높아진 하상으로 인해 민강의 물이 범람하여 그 주변은 상습적으로 수재를 입곤 했다. 이를 이빙이 준설하여 홍수를 막았음을 뜻한다. 다음 ‘穿二江成都之中(천이강성도지중)’의 구절은 수자원 확보와 홍수조절용 시설인 다목적댐에 해당하는 도강언(都江堰)을 시공했다는 뜻이다. 감숙성과 사천성 경계의 민산(岷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러던 민강(岷江)을 지금의 성도시 북쪽의 관현(灌縣)에서 홍수 조절용 댐을 만들고 원류의 세찬 물살을 새로 굴착한 2개의 강으로 흐르게 하여 그 중 하나는 성도를 거쳐 다시 민강과 합류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성도의 북쪽을 동남으로 관통시켜 타강(沱江)에 합류시켰다. 이로써 상습적으로 범람하던 사천성의 강물은 통제되고 풍부한 수자원을 농업생산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촉(蜀) 지방은 후에 天府之地(천부지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도강언은 또 다른 세계역사상의 대역사였던 만리장성의 축조와 많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20)임진(臨晉)/ 산서성과 경계를 이루는 황하의 하곡부 서쪽 강안에 있는 고을로 춘추전국시대 때 이곳에 황하를 건너는 나룻터가 있었기 때문에 임진이라 한 것이다. 지금의 섬서성 대려현(大荔縣) 서쪽 경내에 있다.

21)정국거를 완성시킴으로 해서 증산된 식량의 양은 지금의 단위로 계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새로 생긴 농경지 4만 경은 진나라 때 1경은 5,500 평임으로 지금 평수로 2억2천만 평에 해당한다.

2. 그곳에서 산출되는 수량은 1무(畝) 당 1종(鐘)이라고 했으니 1경은 100무고 곡식 1종은 6곡4두로 약 130키로에 해당한다. 새로 생긴 농지에서 생산되는 총 곡식은 모두 52만 톤, 한 가마당 80키로 들이 650만 석에 해당한다.

22)효문제(孝文帝)/ 한고조 유방의 아들이며 효혜제(孝惠帝)의 동생으로 이름은 유항(劉恒)이다. 서한 3대 황제이며 기원전 179년에 즉위하여 157년에 죽었다. 아들 효경제(孝景帝)와 함께 한나라 초기에 문경(文景)의 치세를 이룬 황제이다.

23)산조(酸棗)/ 지금의 하남성 연진현(延津縣) 경내의 서남에 있었던 황하 남안에 있었던 고을이다.

24)금제(金提)/ 서한 때 동군(東郡), 위군, 평원군 지역의 황하 양안에는 돌로 쌓은 큰 제방이 있었다. 그 중 어떤 곳은 높이가 4-5장 되는 곳도 있었다. 돌을 이용하여 제방을 견고하게 쌓았다고 해서 금제(金提)라 불렀다. 이때 붕궤된 곳은 동군의 백마진(白馬津)으로 지금의 하남성 활현(滑縣) 일대였다.

25)금상천자(今上天子)/ 한무제 유철(劉徹)을 말한다. 당시 한무제가 재위에 있음으로 해서 시호가 없어 금상천자라 칭한 것이다. 한무제는 기원전 141년 16세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55년 동안 제위에 있다가 기원전 87년에 죽었다.

26)원광(元光) : 한무제가 사용한 10개의 연호 중 6번 째 연호로써 기원전 134년부터 129년 까지를 말한다.

27)원광 3년 기원전 132년 황하(黃河)의 지류인 호자(瓠子)의 제방이 터진 일을 말한다. 호자는 지금의 하남성 거야현에 있던 대야택(大野澤)에서 황하의 남안 도시인 복양시(濮陽市)를 거쳐 황화로 흘렀다.

28)정당시(鄭當時)/ 서한 무제 때 관리로 지금의 하남성 회양(淮陽)인 진현(陳縣) 사람이다. 양초(梁楚)지간에 임협(任俠)으로 이름이 나 효경제(孝景帝) 때 태자의 사인(舍人)이 되고 무제가 제위에 오르자 제남태수(濟南太守)가 되었다. 이어서 강도상(江都相), 우내사, 대사농 등의 관직을 거치며 시종 청렴한 처세로 임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귀천을 가리지 않았으며 어진 사람이라면 적극적으로 천거했다. 또한 황노사항에 심취하여, 천하에 이름있는 명사들과 널리 교제를 맺었다. 여남태수(汝南太守)로 재임 중 죽었다.

29)급암(汲黯)/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22년에 죽었다. 서한의 대신으로 자는 장유(長孺)이고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濮陽市)인 복양(濮陽) 출신이다. 성격이 소탈하고 예의에 구애받지 않고 협객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해 기개가 있었다. 경제 때 태자의 말을 관리하는 관직인 태자세마(太子洗馬)에 임명되고 무제가 제위에 오르자 동해태수(東海太守)가 되었다. 청렴한 자세로 정사에 임해 큰 치적을 이루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주작도위(主爵都尉)가 되었다. 황노사상에 심취했고 항상 직간을 서슴치 않고 올렸다. 흉노를 정벌하려는 한무제의 계획에 반대하다가 조정에서 좌천되어 회양태수로 재임 중 10년 만에 죽었다.

30)전분(田蚡)/ 전문(田蚊)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북의 장릉(長陵) 인으로 한경제(漢景帝)의 부인 왕황후(王皇侯)의 동모이부(同母異父)의 동생이다. 무제가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자 무안후에 봉해지고 태위(太尉)와 승상(丞相)을 역임하면서 교만하고 사치를 일삼았다.

31)유(鄃)/ 지금의 산동성 평원현(平原縣) 서남에 있었다.

32)망기(望氣)/ 구름의 형상을 보고 길흉의 조짐을 헤아리는 점술사를 말한다.

33)하동(河東)/ 지금의 산서성 심수(沁水) 이서와 곽산(霍山) 이동이 관할 구역이다. 황하의 동쪽에 위치함으로 해서 얻은 이름이다.

34)피지(皮氏)/ 지금의 산서성 하진현(河津縣)에 있었던 고을로 분수(汾水)가 황하와 합류되는 곳에 있다.

35)분음(汾陰)/ 지금의 산서성 하곡부의 만영현(萬榮縣)을 말한다.

36)포야도(褒斜道)/ 포수(褒水)와 야수(斜水)의 계곡을 따라 낸 도로 이름이다. 포수와 야수는 모두 진령(秦嶺)의 태백산(太白山)에서 발원하는데 포수는 남쪽으로 흘러 한중시(漢中市)에서 한수(漢水)와 합류하고 야수(斜水)는 북쪽으로 흘러 섬서성 미현(眉縣)에서 위수(渭水)와 만난다.

37)장탕(張湯)/ 지금의 섬서성 서안시 부근의 두릉(杜陵) 사람으로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15년에 죽었다. 무제 밑에서 정위(廷尉)와 어사대부(御史大夫)를 지냈다. 백금(白金)과 오수전(五銖錢)의 주조를 건의하여 시행케 했으며 염철(鹽鐵)의 전매제도를 주장했으며 고민령(告緡令)을 제정토록 하여 상인들을 탄압했다. 후에 승상 청적(靑翟) 휘하의 주매신(朱買臣), 왕조(王朝), 변통(邊通) 등의 세 장사(長史)의 모함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에 장탕의 무죄가 밝혀지자 세 장사는 주살 되고 승상 청적은 자살했다. 《혹리열전(酷吏列傳) 참조》

38)고도(故道)/ 진창도(陳倉道)라고 하며, 지금의 보계시(寶鷄市)인 진창에서 산관(散關) 및 포곡(褒谷) 등을 지나 한중(漢中)까지 나 있던 도로이름이다. 거리는 서쪽으로 많이 우회하나 지세가 평탄하여 진령을 넘어 관중에서 사천으로 들어가는 비교적 안전한 통로였다.

39)면수(沔水)/ 한수(漢水)의 북쪽 부분의 다른 이름이다.

40)장웅비(莊熊羆)/ 한무제 때 사람으로 《한서(漢書)》에는 한명제(漢明帝) 유장(劉莊)의 이름을 기휘(忌諱)하여 엄웅(嚴熊)이라고 칭했다. 지금의 섬서성 포성(蒲城)에서 대려현(大荔縣)까지인 락수(洛水)에서 중천(重泉)의 동쪽까지 구거을 파서 관개를 하겠다고 상주하자 한무제가 만여 명의 인부를 징발하여 구거을 파게 했다. 지금의 섬서성 징성현(澄城縣)인 징(徵) 땅에서 락수의 물을 끌어 들여 지금의 대려현(大荔縣) 북쪽의 상안산(商顔山)까지 연결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10여 년만에 완성시키고 그 이름을 용수거(龍首渠)라 했다.

41)중천(重泉)/ 지금의 섬서성 대려현(大荔縣) 북쪽에 있었던 한나라 때 고을 이름.

42)징(徵)/ 지금의 섬서성 징성현(澄城縣)에 있었던 한나라 때의 고을 이름.

43)급인(汲仁)/ 급암(汲黯)의 동생이다. 급암 죽자 한무제의 부름을 받아 관리로 임명되어 후에 구경(九卿)의 지위에 올랐다.

44)곽창(郭昌)/ 지금의 산서성과 내몽고의 성도 호화호특(呼和浩特)의 남쪽 만리장성 부근에 있었던 운중군(雲中郡) 출신으로 처음에 교위(校尉)의 직에 있다가 한무제에 의해 태중대부(太中大夫)의 직위에 올라 발호장군(拔胡將軍)에 임명되어 삭방(朔方)에 주둔하며 흉노를 정벌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해 면직되었다.

45)만리사(萬里沙)/만리사는 지금의 산동성 동액현(東掖縣) 동쪽의 동래현(東萊縣)에 있었던 고을 이름으로 이곳에 귀신을 모시던 사당이 있었다. 《한서(漢書) 교사지(郊祀志)》에 이 일에 관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공손경(公孫卿)이 천자의 명을 받아 전국에 신선을 찾다가 동래산(東萊山)에 신선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천자로 하여금 찾아가 만나보도록 했다. 한무제가 천리 길도 마다 않고 달려갔으나 신선을 만날 수 없었다. 이에 천자가 서울을 떠난 이유가 신선을 만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워 하늘에 비를 빌기 위해 만리사(萬里沙)의 신사(神祠)를 찾은 것이라고 핑계를 댄 일을 말한 것이다.

46)기원(淇園)/ 지금의 하남성 기현(淇縣)은 옛날부터 대나무 산지로 유명하다. 기 땅의 대나무 밭을 말한다.

47)죽건(竹楗)/ 옛날 토목공사를 할 때, 대나무로 큰 바구니를 만들어 그 안에 돌을 넣은 다음 하천의 터진 곳이나 제방을 쌓을 때 사용하던 대나무 바구니를 말한다.

48)주천(酒泉)/ 지금의 감숙성에 주천시(酒泉市)에 있었던 한나라 때 군현 이름이다. 한무제 원수(元狩) 2년 기원전 121년에 설치되었다.

49)보거(輔渠)/ 육보거(六輔渠), 또는 육거(六渠)라고도 한다. 앞서의 정국거(鄭國渠) 상류의 남안(南岸)에 물이 닿지 않는 높은 지대의 농지에 관개를 하기 위해 파서 만든 6개의 작은 구거을 말한다. 한무제 원정(元鼎) 6년 기원전 111년에 좌내사 예관(倪寬)이 맡아 완공했다.

50)영지거(靈軹渠)/ 한무제 때 만든 수로 이름으로 섬서성 주지현(周至縣) 동쪽 위수(渭水)의 북안(北岸)에서 위수의 물을 끌어 성국거(成國渠)에 연결시켰다. 성국거는 미현(眉縣) 동북 쪽 위수 북안에서 물을 끌어다 북쪽의 부풍(扶風), 동쪽으로 무공(武功), 흥평(興平), 함양(咸陽)을 지나 파수(灞水)가 합쳐지는 강구에서 위수와 만난 연결된다.

51)원문은 而關中輔渠,靈軹引堵水(이관중보거,영지인도수)아너 漢書 구혁지(溝洫志)에 따르면 而關中輔渠,靈軹引堵水의 도수(堵水)는 제수(諸水)의 오기라고 했다. 즉 「관중에서는 여러 강물을 끌어들여 만든 보거와 영지거가 있었고....」라는 뜻이다.

52)구강(九江)/ 지금의 안휘성 수춘(壽春)으로 회수(淮水)의 중류에 있었던 한초 쟁패시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彭城)의 한나라 때 이름이다. 였다.

53)거정(鉅定)/거정택(鉅定澤)을 말하며 지금의 산동성 광요현(廣饒縣) 동북쪽에 있었던 한나라 때의 소택지다.

54)구강(九江)/ 세 가지 설이 있다.

① 장강이 형주(荊州) 경내로 흘러 들어와 9개의 지류로 나누어 흐르다가 그 경계를 벗어나서 하나로 합쳐져 큰 강을 이루었다는 설로 한나라 때 공안국(孔安國)이 주장했다.

② 지금의 강서성 구강시 남쪽에서 장강으로 유입되는 9개의 강이라는 설로 당나라 때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지은 공영달(孔潁達)이 주장했으나 그 정확한 위치는 확인 할 수 없다고 했다.

③ 구강은 팽려택(彭蠡澤) 즉 지금의 동정호(洞庭湖)를 의미한다는 설로 송나라 때 유학자인 호단(胡旦)과 주희(朱憙)가 주장했다.

55)회계(會稽)/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紹興市) 동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우임금이 땅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으며, 와신상담에 나오는 월왕 구천이 부차에게 쫓겨들어 가 견디지 못하고 항복한 곳이다. 월왕 구천은 회계산에서 당한 치욕을 20년만에 갚아 와신상담의 어원이 되었다.

56)태황(太湟)/ 어느 곳을 가리키는 지 미상이다.

57)고소산(姑蘇山)/ 지금의 강소성 소주시(蘇州市) 서남쪽의 산으로 오왕 부차(夫差)가 이곳에 고소대(姑蘇臺)라는 궁궐을 짓고 서시(西施)와 놀던 곳이다.

58)오호(五湖)/ 소주시 서쪽의 지금의 태호(太湖)를 말한다.

59)낙예(洛汭)/ 주석 11번 참조

60)탑수(漯水)/ 산동성 임평현(荏平縣)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흘로 도해하(徒駭河)로 흘러 들어가는 한나라 때 강 이름이다.

61)낙수(洛水)/ 상서 우공 편 「導洛自熊耳(도락자웅이)」에서의 락은 지금의 섬서성과 경계를 짓는 웅이산(熊耳山)에서 발원하여 락양시를 경유해 흐르던 락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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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서(書)1. 예서(禮書)

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말한다. 「洋洋美德乎(양양미덕호) 「양양하고 아름다운 덕이여! 宰製萬物(재제만물) 만물을 주재하고 役使
144.0K 운영자 21-05-23
[일반] 서(書)6. 봉선서(封禪書)

【해제】 봉선은 천자가 하늘과 땅에 올리는 제사로 성군(聖君)만이 행할 수 있는 의식이다. 그래서 역대 왕조는 봉선을 국가의 중요한 행사로 삼
운영자 20-04-20
[일반] 악서대역본 3. 악론(樂論)

3. 악론(樂論) 樂者為同(악자위동) 음악의 특성은 사람들을 동화시키고 禮者為異(예자위이) 예의 특성은 사람들을 본분에 따라
운영자 12-07-27
[일반] 악서 대역본 2. 악본(樂本)

2. 악본(樂本) 又嘗得神馬渥洼水中(우상득신마악규수중) 또 옛날 악와수(渥洼水)1)에서 신마를 얻었음으로 復次以為
운영자 12-07-27
[일반] 악서(樂書) 대역본 1. 서(序)

악서(樂書)24 1. 서(序) 太史公曰(태사공왈) 태사공이 말한다. 余每讀虞書(여매독우서) 나는 상서(尙書)의 우서(虞書)① 편을
운영자 12-07-27
[일반] 악서(樂書)

350.<樂>樂所以立(<악>악소이립), 악경은 음악을 논술함으로서 사람이 서야 할 곳을 가리키는 경전인 관계로 351.故長于和(고장
357.5K 운영자 08-08-24
[일반] 하거서(河渠書)

하거서(河渠書) [해제] 하거서(河渠書)는 하(夏)나라를 세운 우(禹)임금부터 시작해서 사마천 활동시기였던 한무제 때까지 행한 고대 중국의 수리사
양승국 04-06-04
[일반] 하거서 참고지도2

그림9. 기원전 132년 황하의 제방이 호자에서 터져 사수와 회수가 통했다. 그림10. 관중지방의 인공하천 분포도 내용 :
양승국 04-06-04
[일반] 하거서 참고지도1

그림1. 우임금이 나눈 9주 비정도와 그림2. 구산과 구택 위치 비정도 1. 구산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회남자(淮南子) 설은 회계(
양승국 04-06-04
[일반] 평준서 서평

<평준서(平準書)>는 한나라시대의 평준정책의 종류와 시행과정을 서술했다. 사실상 한무제 이전의 부국정책을 체계적으로 소개한것이다
양승국 04-06-04
[일반] 평준서(平準書)-세계 최초의 재정 및 경제정책 지침서

한나라가 세워지고 나서부터 무제에 이르기까지의 100여 년 기간 동안 국가의 재정정책과 경제발전 과정을 서술한 책이다. 평준서는 세계 최초
662.0K 양승국 04-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