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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12 11:16:237224 
동로마-아랍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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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동로마-아랍전쟁


1단계: 동로마 vs 라시둔 조

2단계: 동로마 vs 움마이야 왕조

전쟁시기 AD 634 - AD 740

전쟁터 현재 이라크, 북아프리카, 지중해 동부, 터키, 콘스탄티노플

주요전투 야르무크, 알렉산드리아, 1차 콘스탄티노플, 2차 콘스탄티노플, 아크로이논


로마의 쇠퇴


서기 476년에,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야만족’인 오도아케르에게 밀려 황위를 포기한다. 이를 보통 로마 멸망의 해로 보고 있지만 476년은 ‘서’로마제국 멸망의 해일 뿐이다. 이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지금의 이스탄불인 비잔티움을 대대적으로 재건한 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한 후 제국의 중심은 동쪽으로 옮겨진 후였다. 이미 서로마의 수도도 사실상 라베나로 옮겨진 후였고 로마는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를 접수하기 전에 이미 쇠락한 상태여서 수도로써의 기능은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서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러 그 넓은 영토를 상실한 서로마 정부는 이탈리아 반도의 농민들을 쥐어짰고 정부의 수탈에 넌덜머리를 내던 이탈리아 농민들은 야만족의 군대가 이탈리아에 들어올 때 로마를 위하여 싸우지 않고 오히려 무거운 세금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다며 야만족 군대를 반겼다.


서로마는 멸망하였고 그 땅은 로마인들이 과거에 야만인들로 불리던 고트족, 프랑크족 등에게 넘어갔지만 동로마는 제국 동쪽의 교역망에서 나오는 부(富)를 거머쥐고 번영을 누렸다. 6세기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합작하여 ‘잃어버린’ 제국의 영토를 일부 되찾기까지 하였다. 물론 이는 의심 많은 황제 밑에서 벨리사리우스가 악전고투하면서 얻어낸 결과였고 유스티니우스와 벨리사리우스 사후에 동로마는 되찾은 영토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에 다시 ‘야만인’들에게 넘어갔다.


동로마가 예전의 영광을 되찾기에는 제국의 동쪽에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존재가 너무 컸다. 로마제국이 통일되어있던 3세기부터 로마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던 페르시아는 서로마가 무너지고 동로마가 홀로서기를 하면서 최대의 적으로 등장하였다. 7세기 초에는 사산조의 샤한-샤(왕중왕)인 호스라우와 장군 샤르바라즈와 샤힌의 침공으로 시리아와 아나톨리아(터키) 대부분을 잃고 일시적으로 조공을 바치는 등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624~627년에 걸쳐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흑해의 동쪽 끝에 상륙하여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기습공격하였다. 동로마군은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세티폰으로 가는 길목인 니네베에서 페르시아군과 격돌하였고 헤라클리우스는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장군 라자데와 일대일로 싸워 그 목을 베고 페르시아군을 격파하였다. 이어 다스타기르드에 있는 페르시아의 왕궁을 불태우고 크세티폰 바로 앞까지 진격하였다. 이로서 페르시아 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호스라우는 급히 후퇴를 하는 중 왕자인 카바드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 와중에 암살되었다. 카바드는 서둘러 동로마와 평화협정을 맺고 페르시아가 점령한 땅으로부터 물러났다. 헤라클리우스의 동로마군은 팔레스타인을 다시 점령하고 예수가 매달렸다는 십자가(True Cross)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셨다.

헤라클리우스의 재위 시에 제국의 역사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그리스어가 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한 제국이 나뉘어지기 전에도 그리스어는 로마제국 동부의 상용어(常用語)가 되어있었다. 공식언어는 라틴이었지만 헬레니즘 시절부터 그리스가 지중해 연안을 따라 퍼진지 오래여서 로마의 점령 후에도 없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일종의 동경심을 가지고 있어 그리스어 사용에 대한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더 이상 라틴어를 고집할 이유가 없어졌고 이미 제국 신민들의 대다수가 그리스어를 쓰는 상태에서 헤라클리우스는 다만 이를 공식화시킨 것뿐이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의 승리로 인하여 비롯된 일시적인 번영은 오래가지 않았다. 떠돌이 유목민족에 불과하던 아랍인들이 ‘선지자’라 불리우는 모하메드가 창시한 이슬람교의 기치아래 통일되어 무서운 기세로 아라비아 반도를 뛰쳐나온 것이다.

유랑민족에서 정복민족으로

종족개념으로써의 아랍인은 이미 BC 9세기 아시리아의 기록에서부터 드러난다. 아시리아왕 샬마네세르 3세의 치적을 기념하는 석부조(石浮彫)에 낙타를 타고 아시리아 기병과 싸우는 아랍 전사들이 등장한다. 이후 지금의 요르단과 시리아 등지에서 케다르, 나바테아 등의 왕국을 세우며 무역으로 번성하지만 일부는 로마에 복속되고 그 땅은 ‘아라비아’ 속주가 되었다. 나머지는 페르시아의 백성으로 살거나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역과 유목을 하면서 살아갔다.

근근이 살아가던 아랍민족이 크나큰 전환점을 만나게 된 것은 7세기초, 선지자 모하메드가 산 위에서 수도하던 중 천사인 지브릴(가브리엘)을 만나 알라신의 계시를 받아 신에게의 ‘복종’이란 뜻의 이슬람을 창시하면서부터이다. 모하메드가 아라비아 반도에 적극적인 포교를 하면서 다신관(多神觀)에 기반한 종교를 받들던 아랍인들의 박해를 받았다. 아울러 메카나 메디나 등의 주요 무역도시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기독교나 유대교도 이슬람의 확장을 경계하고 박해자들과 손을 잡았다. 그러나 동시에 이슬람의 신관(神觀)과 교리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교리에 영향을 받았고 일부의 교리는 수용되었다. 사실 이슬람의 초기 개종자들은 거의 메디나 출신이었는데 당시 메디나에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메디나 사람들은 유대교인들을 자주 접하면서 일신교(一神敎)의 교리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모하메드가 주장하는 이슬람은 다신교를 통하여 복을 빌고 아울러 이를 통하여 상행위를 하는 세력들에게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검은 돌’인 카바가 있어 아라비아 다신교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메카의 세력들은 이슬람의 초기 개종자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해에도 이슬람을 믿고 ‘모슬렘’이 되는 자들은 나날이 늘어갔다. 새로이 모슬렘이 된 자들은 대개 주변의 강대한 부족들에게 핍박을 받던 약한 부족 출신이었다. 한 번 메카 세력의 공격으로 피신하게 되지만 모하메드는 한 발 물러나 세력을 더욱 크게 키웠다. 모하메드는 메카의 세력들을 주적으로 설정하고 이들의 대상(隊商)행렬을 공격하여 부를 축적하는 동시에 그들과의 전쟁을 유발하였다.

모하메드는 바드르와 메디나 수비전 등의 전투로 메카세력을 완전히 무찌른 뒤 아라비아 반도 부족들의 연합세력을 격파한 후 세상을 떠났다. 이슬람교도들은 모하메드의 장인을 칼리파(계승자)로 받들고 라시둔 조(朝)를 세운 후, ‘성전(지하드)을 통일하여 세상의 넓은 땅을 다르-알-이슬람(복종의 땅)으로 만들라’는 모하메드의 유시를 받들어 아라비아 반도를 뛰쳐나와 본격적인 정복전쟁에 나섰다.


페르시아의 멸망과 동로마의 위기

동로마과 사산조 페르시아는 신흥종교의 교리 아래 통일된 아랍인들의 침공에 직면하였다. 아랍군의 선두에는 아랍세계 최고의 명장으로 추앙 받는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가 있었다. 먼저 페르시아가 이슬람 아랍군의 제물이 되었다. 사산조는 동로마 황제 헤라클리우스의 역공에 크게 패한 후 비록 휴전을 하기는 하였으나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화되어 지방의 영주들이 제국의 궤도로부터 빠르게 이탈하고 있었다. 모하메드의 사후 불과 1년후인 633년에 지금의 쿠웨이트인 살라시르에서 약 2만의 군으로 두 배에 달하는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후 지금의 이라크에 있는 히라와 무자야 등지에서 연이어 페르시아군을 이겼다. 이슬람의 급격한 팽창에 놀란 동로마는 과거의 숙적이었던 페르시아와 동맹군을 결성하여 이라크 중북부의 피라즈에서 아랍군과 맞섰으나 알-왈리드의 포위작전에 연합군은 궤멸당하고 피라즈는 아랍군에 점령되었다. 비록 페르시아를 완전히 멸망시키기 전에 642년에 알-왈리드가 사망하기는 하였으나 알-왈리드가 죽은 직후 아랍군은 현재 이란의 하마단시(市)인 나하반드에서 페르시아 제국이 모은 5만군을 완파하였다. 이로서 페르시아 제국은 걷잡을 수 없이 붕괴되고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전에 사산조의 영토였던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일부가 라시둔 조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동로마라고 사정이 좋지는 않았다. 페르시아와 동로마는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에 아랍군은 페르시아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동로마도 공격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634년에 동로마의 영토였던 시리아의 타드무르(팔미라)를 점령한 후 중요 요새이던 보스라와 고도(古都)인 다마스쿠스 역시 아랍군의 손에 떨어졌다. 헤라클리우스의 활약으로 확보한 시리아를 잃을 위기에 처한 동로마는 약 10만의 대군을 모아 아랍군의 진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동로마인들은 물론 그루지아인, 아랍 기독교도, 슬라브족에다 프랑크족 용병, 그리고 아르메니아인들까지 불러모은 대군이었다. 동로마군은 약 알-왈리드가 이끄는 4만의 이슬람군과 현재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 북부를 형성하는 야르무크 강가에서 격돌하였다. 동로마군의 보병은 초전에서는 아랍군의 측방을 거세게 몰아붙였으나 그때마다 적시(適時)에 투입되는 이슬람 기병의 활약으로 초전의 기세를 잃고 진퇴를 반복하였다. 6일간 이어진 전투의 마지막 날, 아랍군 사령관인 알-왈리드는 동로마의 기병을 격파하여 주력인 보병을 고립시키려 하였고, 기병을 최대한 모은 다음 보병대의 옆을 돌아 동로마 중기병이 대형을 미처 이루기 전에 공격하였다. 동로마 중기병대는 뿔뿔이 흩어지고 고립된 보병들은 강 옆으로 이어진 협곡을 따라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미 적의 패주로를 예상한 알-왈리드의 함정이었다. 알-왈리드는 이미 일단의 기병대를 협곡에 배치하여 동로마군의 도주를 막았고 완전히 포위된 동로마군은 철저히 짓밟혔다.


야르무크 전투의 결과로 동로마군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어 637년에 알-왈리드가 이끄는 아랍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기독교도들의 관점에서는 성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동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상실하면서 소위 성지를 되찾는 것은 이후 모든 기독교 국가의 목표가 되었고 수세기후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아울러 아랍군이 북아프리카의 동로마 영토를 접수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집트방향으로 향한 아랍군은 헬리오폴리스에서 알렉산드리아를 지키려는 동로마군을 격파하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에 건립한 후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존재하였던 알렉산드리아 역시 641년에 아랍군에 넘어가게 된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하면서 동로마 정부에 막대한 세금을 바치고 있었는데 아랍-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기면서 동로마 정부는 심한 재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집트는 무역기지일 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시절부터 제국을 먹여 살리던 곡창지대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이집트를 아랍군에게 빼앗기면서 동로마는 식량보급기지도 잃어버린 셈이 되었고 동로마는 이집트 실함으로부터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645년에 동로마군은 상륙작전으로 잠시 알렉산드리아를 되찾기는 하였지만 이듬해에 아랍군에 다시 점령당하였고 647년에는 튀니지 지역마저 점령당하면서 카르타고 항구를 제외하고는 북아프리카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동로마군의 패배는 아랍군에 뛰어난 지휘관들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로마가 당시 근동의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 정교(正敎)의 교리를 강제하였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로마의 종교적 독재와 지나친 세금에 시달리던 근동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용인해줄뿐더러 세금도 동로마보다 낮은 이슬람의 통치를 선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동로마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이후 수세기 동안 반복되어 나타난다.


움마이야 왕조의 창건과 테마 제도의 설립

라시둔 조가 팽창을 하는 와중에 이슬람 제국 내에선 내전이 벌어지게 된다. 동로마와 사산조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를 이끈 깔리프(최고 종교지도자) 우마르가 644년에 페르시아인 포로에게 암살당하면서 움마이야 가문의 오트만이 깔리프로 등극한다. 656년에 이집트에서 라시둔조의 총독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고 이집트의 반란군은 일종의 자치권을 획득한다. 반군은 이에 멈추지 않고 메디나로 암살단을 보내어 오트만을 암살하게 된다. 오트만이 암살된 후 알리가 깔리프가 되지만 알리는 일부 세력에 의하여 오트만의 암살을 사주하였거나 사실상 묵인하였다고 의심을 받게 되고 이에 656년에 라시둔 조는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알리는 모하메드의 부인 중 한명인 아이샤가 이끄는 파벌을 무찌르지만 모하메드의 친구 중 한 명이었던 무아위야가 이끄는 다른 파벌의 도전을 받는다. 알리는 659년에 무아위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하지만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고 무아위야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를 본 시리아의 일부 파벌들이 무아위야를 새로운 깔리프로 추대하였고 일시적으로 라시둔조는 두 개의 파벌이 있게 된다. 그러다가 661년에 알리가 암살당하고 무아위야가 깔리프가 되면서 추대로 깔리프를 선출하던 라시둔 조의 계승방식을 바꾸어 친족간 계승으로 바꾸어버린다. 추대에 의한 종교지도자 대신 계승에 의한 실질적인 왕이 이슬람 제국을 다스게 된 것이다. 움마이야 왕조의 창건이었다.


이 와중에 동로마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수염왕’ 콘스탄투스 2세가 이전의 용병 위주의 군제를 고쳐 이후 동로마 제국의 근간이 되는 ‘테마’ 제도를 도입하였다. 국가가 장원을 설립하여 병사들에게 내어주고 생업을 영위하게 하는 대신 전쟁 시에는 자신들이 있는 지역을 지키게 하였다. 이후 병사들이 자신들의 지역을 떠나 원정을 하지 않으려는 부작용이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이전의 용병제도에 비하여 보다 안정적인 군사동원을 가능케 하였다.일단 병사들이 자신들이 일구고 있는 땅을 지키려고 용병들보다 용감히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가 정착이 되기 전에 움마이야 왕조의 새 깔리프인 무아위야는 해군을 발진시켜 동로마 해군을 수 차례 무찌른 후 아들 야디즈의 지휘하에 대군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동로마-아랍 전쟁의 정점을 이루게 되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시작이었다.

동로마-아랍 전쟁의 하이라이트

1․2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이슬람과 기독교는 6세기에 처음으로 전장에서 만난이래 계속 싸웠다. 십자군 원정에서도 보이듯이 이 두 종교 사이에 평화란 없었으며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대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만약 기독교가 이슬람을 멸망시키거나, 아니면 이슬람이 유럽을 정벌하여 기독교를 없애 버렸으면 어땠을까? 모르면 몰라도 그 뒤의 세계역사는 근본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많은 수의 전쟁사가들과 역사 애호가들은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군을 격퇴한 결정적인 전투로 서기 732년 카를 대제의 할아버지인 샤를 마르텔의 투어(Tours)전투를 거론한다. 프랑크군이 이슬람군을 격파하면서 현재 에스파냐에 근거지를 두고 중부 유럽으로 쳐들어오던 이슬람의 세력이 좌절되었고 그 결과로서 유럽을 구했다 한다. [로마제국 쇠망사]의 저자인 에드워드 기번, [세계사를 바꾼 15개 전투]의 저자인 에드워드 크리시, 최근 [살육과 문명]의 저자인 빅터 데이비스 핸슨 등은 투어 전투의 역사적 상징성을 강조하면서 샤를 마르텔과 그의 보병대를 극찬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투어전투가 없었더라도 이후의 움마이야 제국은 내부 분란이 발생하여 더 이상 유럽침공을 확대할 여력이 없었다. 예맨 출신의 이슬람 장군인 압둘 라만 알-가피크가 이끈 이 ‘침공’은 사실 침공이라기 보다는 보물을 얻기 위한 대규모 약탈전이었다. 비록 아퀴타니아의 오도(Odo)를 쳐부수고 프랑스 중부로 진출하기는 하였지만 이들은 아퀴타니아를 점령하기 보다는 아퀴타니아의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기에 바빴다. 이슬람 군이 투어에 온 것도 그 수도원에 막대한 보물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투어에서 샤를 마르텔군을 맞아 비등하게 싸우다가 프랑크의 별동대가 그들의 캠프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보물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후퇴를 하다가 크게 패한 것이다. 물론 이 전투는 유럽 중부의 정치사,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성립과 관련하여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는 하였지만 유럽사가들이 극찬하는 ‘세계사를 바꾼 전투’는 과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진정으로 기독교 세력이 이슬람을 막아 기독교 문명을 구한 전투가 있다면 바로 1차와 2차에 걸친 아랍군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이었다. 움마이야 왕조가 신흥제국으로서의 힘을 과시하면서 사방으로 힘을 뻗치던 7세기말과 8세기초, 그들은 동방 기독교의 중심이던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카톨릭 교회가 서유럽에 완전히 자리잡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 당시 기독교의 중심지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이슬람군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이유는 무역망의 장악이라는 목표도 있었지만 일차적으로 ‘이교도’들의 본거지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이를 발판으로 유럽 깊숙이 진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랍군은 이 두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다. 특히 두 번째 공격에서의 패배는 너무나도 철저하여 아랍군은 다시는 콘스탄티노플에 쳐들어오지 못했다. 서기 678년과 718년, 아랍의 대군은 콘스탄티노플의 높은 성벽아래서 절망하였다. 이 공방전이야말로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이슬람의 거대한 파도로부터 구한 전투인 것이다.

해상세력으로서의 이슬람의 부상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를 모두 차지한 이슬람군은 명장인 알-왈리드의 지휘하에 637년과 638년에 시리아를 거쳐 지금의 터키 중부인 마라쉬까지 진출하였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이어 동로마의 ‘본토’에 해당하는 아나톨리아(터키)까지 이슬람군의 침공에 노출된 것이다. 야르무크에서 10만의 군사가 궤멸 당한 동로마는 이슬람의 침공을 막지 못하고 전전긍긍하였다. 다행히 터키 중부까지 왔던 이슬람군이 북아프리카로 방향을 돌리면서 본토는 잠시 안도할 수 있었지만 제국의 경제적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이집트가 아랍인들의 손에 들어가면서 무역기지와 식량보급지를 동시에 잃은 동로마는 중대한 타격을 입고 휘청거렸다. 제국을 유지하는데 엄청난 비용이 요구되었는데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곳을 빼앗겨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튀니지까지 잃어버리면서 중요한 해상기지도 잃게 된 반면 이슬람 세력은 해군을 크게 육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동로마는 부랴부랴 지금 터키 남부의 선공(船工)집단을 고용하여 해군력을 유지하려 하였지만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레바논 지방을 잃어버린 타격은 컸다. 우수한 조선공들과 선원들의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655년에 지금의 터키 남부인 피니케에서 격돌한 해전에서 새로이 해군을 만들기 시작한 이슬람군이 해상력과 무역에 도가 튼 동로마 해군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슬람 해군은 이후 북아프리카 서부(현재 알제리와 모로코)와 에스파냐의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육상병력에 이어 해상의 우위까지 빼앗기면 동로마로서는 일대 위기에 처하게 되었지만 다행히 이때 이슬람 제국 내에서 내전이 일어나며 라시둔 조가 움마이야 왕조로 바뀌었고 동로마는 잠시 숨돌릴 틈을 얻었다.


라시둔 조를 움마이야 왕조로 바꾼 무아위야는 다시 정복에 나서 크레타와 로도스를 차지하고 중앙아시아로 이슬람군을 진격시켰다. 아울러 지금의 튀니지 지방에서 마그레브(지금의 북아프리카 서부)로 진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아위야는 새로이 정복한 시리아 지방의 기독교인들과는 공존하면서도 조직적인 교단으로써의 기독교 세력은 철저히 무너뜨리고자 하였다. 그의 아들 야지드의 지휘하에 이슬람군은 아나톨리아를 통과하여 674년에 보스포루스에 다다랐다. 이제 좁은 해협만 건너 고도(古都) 콘스탄티노플만 무너뜨리면 기독교 세력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질 것이었다.


그리스의 불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의하면 이슬람군은 전혀 저항을 받지 않고 보스포루스를 건너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다. 동로마는 수십 년간 아랍군에 밀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예 그 도성이 포위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야지드가 이끄는 아랍군은 지금까지의 승세로 볼 때 자신들이 패할 일은 없다며 의기양양하였지만 몇 가지 중요한 변수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테오도시우스 황제(408-450)가 지은 거대한 성벽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이슬람군도 수십 년간 싸우면서 많은 성채들을 보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같은 거대한 방벽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랍군은 정면공격을 시도하여 보았지만 이중성벽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갖가지 발사물, 그리고 성벽 앞의 해자에 막혀 큰 손해만 입고 번번이 실패하였다.



아울러 동로마군에게는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무기가 생겼다. 바로 ‘그리스의 불’이라 불리는 액체 화약이었다. 전통적인 견해에 의하면 그리스의 불은 7세기 중반에 시리아 출신의 동로마 사람 칼리니코스가 여러 가지 재료를 섞어 발명한 액체 화약이다. 일설에는 칼리니코스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무기였는데 시리아가 아랍세력에게 점령당하면서 피난을 한 칼리니코스가 콘스탄티노플로 가져온 것이라 하였다. 또 다른 설은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던 학자들이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실험을 하다가 우연히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발명하였건 간에 대부분의 무기와 배가 나무로 되어있던 시절에 그리스의 불은 핵폭탄이나 다름없었다. 불이 붙기만 하면 빠르고 뜨겁게 타올랐고 물을 부어도 끌 수가 없었다.


이슬람군에게는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장벽을 파해(破解)할 방법이 없었고, 한편 콘스탄티노플은 흑해를 건너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생산되는 식량을 안전하게 바닷길로 공급받으면서 1차 콘스탄티노플 전투는 지루한 공방전이 되었다. 이슬람군은 따뜻할 때는 공격하다가 겨울이 되면 120km밖의 시지쿠스섬에 구축한 보급기질로 후퇴하여 쉬다가 다시 공격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아울러 아랍군이 다시 건너와서 공격하게 되면 동로마 해군은 그리스의 불을 활용하여 아랍군의 보급선들을 공격하였고, 이슬람군은 계속 공격은 하면서도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지리한 포위전을 끝낸 것은 677년 콘스탄티노플 앞의 마르마라해(海)에서 벌어진 대규모 해전이었다. 동로마 해군은 그리스의 불을 큰 통에다 채운 다음 긴 관에 바람을 불어넣어 마치 화염방사기와 같은 원리로 이슬람 해군을 대파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식량사정이 좋지 않던 이슬람군은 본격적으로 굶주릴 위기에 처하였고 결국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그러나 물러가는 와중에 아랍 함대는 폭풍을 만나서 더 많은 피해를 입은 다음에야 겨우 귀항할 수 있었다. 기번에 의하면 수년간의 전쟁으로 약 3만의 아랍군이 전사하였고 동로마에서 움마이야 왕조의 도성인 다마스쿠스로 사절이 파견되었으며 약 30년동안 싸우지 않기로 하는 평화협정이 맺어졌다 한다.


동로마군, 기독교 문명을 구하다

30년 후 717년, 이슬람의 깔리프가 된 술레이만은 678년의 패배를 복수하고 유럽으로 쳐들어가겠다면서 그의 동생인 무슬라마에게 8만의 대군을 주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였다. 이전에 30년간의 평화를 약속하는 협정을 맺기는 하였지만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동로마와 이슬람군은 계속하여 아나톨리아를 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서로 승패를 주고 받았다. 무슬라마는 도착하자마자 정면공격을 해보았지만 무수한 사상자만 내고 실패하였다. 이슬람의 팽창은 계속되어 698년에 북아프리카에 고립되어있던 최후의 동로마 영토인 카르타고가 함락되고 이슬람군은 711년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로 진입하였다. 서(西)고트족이며 기독교도였던 로데릭이 이끄는 군은 움마이야군을 맞아 싸우다가 이베리아 남부에서 전멸하였다. 만약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질 경우 이슬람군은 유럽대륙의 양쪽 끝에서 동시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슬라마는 이전에 이슬람군이 정면공격을 거듭하다 실패한 것을 거울삼아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주위에 참호를 파서 구원군의 출입을 막고 바다에는 함대를 배치하여 콘스탄티노플의 보급로를 끊으려 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흑해로 나가려 할 때 헬레스폰트 해협(흑해와 지중해 사이에 있는 해협)의 빠른 급류에 배가 휘말리며 서로 부딪혔다. 정유재란 때 전라도 쪽으로 쳐들어온 왜군의 함대가 울돌목의 급류에 휘말린 것과 같은 양상이었다.


이 당시 동로마의 황제는 레오 3세였다. 아나톨리아에 있던 테마의 사령관이었던 레오는 717년에 궁정쿠데타를 주도하여 이전의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3세를 밀어내고 황위를 차지하였다. 레오 3세는 이후 730년에 기독교 사회에 일대 논란을 불러온 성상파괴운동(에이코노마키아)을 벌인 황제로 유명하다. 그러나 717년, 새로운 황제로 등극한 레오 3세는 이슬람군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지켜야 했다. 기독교회의 수장이자 동로마 황제로서 군을 지휘하고 있던 레오 3세는 이슬람 함대가 급류에 휘말리는 광경을 지켜보며 즉시 콘스탄티노플의 항구(황금 곶)를 막고 있던 거대한 쇠사슬을 풀고 함대를 몰아 달려 나갔다. 동로마 해군은 화염방사기를 통해 ‘그리스의 불’을 쏘아댔고 급류에 휘말려 있던 아랍 해군은 손쓸 틈도 없이 당하고 말았다. 어찌나 호되게 당했던지 사령관 무슬라마 해군의 증원이 있기 까지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배로 포위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655년 동로마-이슬람 함대간의 해전은 화살을 쏘고 상대의 배에 올라타 싸우는 전통적인 해전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아랍의 기록에 의하면 200척의 아랍함대가 500척의 동로마 함대를 꺾었다. 동로마는 신생 이슬람 함대의 강세에 고전하다가 ‘그리스의 불’이 동로마에 전해진 이후 바다에서 연전연승하였다. 이것만 보아도 그리스의 불이 동로마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무기였는지 알 수 있다.

이슬람의 함대가 크게 패하는 바람에 2차의 공방전도 역시 지리한 포위전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의 견고함은 여전하였고 이슬람군에게는 참호를 파서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마저 이슬람군을 돕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717년의 겨울에 유례없이 혹독한 추위가 찾아왔고 좀처럼 눈이 오지 않는 콘스탄티노플 근처에도 폭설이 내렸다. 더운 아라비아와 따뜻한 이집트 출신의 아랍병사들에게 추운 날씨는 치명적이었다. 더군다나 동로마 해군의 활동으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결국 그 해 겨울 수천 명의 아랍군이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고 이슬람군은 많은 시신을 처리할 방법이 없어 그대로 바다에 내던졌다. 이때 무슬라마의 형인 깔리프 술레이만은 지리한 전황을 타개하고자 수도인 다마스쿠스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포위군의 증원에 나섰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기 전 지금의 터키 어딘가에서 동로마군에게 패하여 전사하였고 깔리프의 전사소식은 그렇지 않아도 높지 않았던 이슬람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술래이만이 죽자 우마르 2세가 새로운 깔리프로 등극하였고 움마이야 왕조는 이듬해 (718년)봄에 이집트로부터 증원군 5만명을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플의 포위군을 지원하였다. 무슬라마는 증원군과 함께온 함대 760척중 400척을 콘스탄티노플을 지나 몰래 흑해 쪽으로 진출시키려 하였다. 만약 이슬람 해군이 흑해 쪽에서 콘스탄티노플을 봉쇄한다면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식량을 받지 못해 위기에 처할 수가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생명줄을 죌 수 있는 좋은 계획이었지만 이마저도 무슬라마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집트에서 온 아랍 함선에서 노를 젓고 있던 노꾼들은 모두 콥트 기독교(이집트에서 2세기경 생겨난 기독교회) 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집트를 정복한 무슬림들에 의하여 강제로 끌려 나와 배를 젓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지나다가 기회를 틈타 몇 척이 콘스탄티노플로 도망하였다. 도망자들로부터 노꾼들의 대부분이 기독교도이며 동로마 쪽으로 오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된 레오 3세는 지나가던 아랍함대를 즉시 공격하였다. 동로마 해군은 그리스의 불을 사용하여 공포스런 화염을 내뿜으며 발휘하면서 아랍 함선들을 불태웠고 강제로 동원되었던 기독교도 선원들은 아랍함대가 패하는 듯이 보이자 지체 없이 동로마 쪽에 항복하였다. 아랍의 봉쇄함대는 이로써 전멸하였고 레오 3세는 여세를 몰아 기습부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의 반대편에 상륙하여 그곳에 진을 치고 있던 아랍군을 급습하였다. 예상치 못한 동로마군의 기습에 아랍군은 떼죽음을 당한다.


레오 3세는 동로마군만으로는 결정적인 승리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외교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불가르족의 왕 투르벨에게 사자를 보내 동맹을 제안한다. 콘스탄티노플이 무너지면 그 다음은 불가르족들이 아랍의 침략을 받게 된다고 한 것이다. 북가르족은 사실 동로마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랍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는 것을 막고 나중에 자신들이 공격하여 차지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불가르족은 지체 없이 아랍군의 후방을 공격하였고 아랍군은 결국 뒤쪽에도 참호를 파야만 했다. 불가르족이 참전하면서 아랍군의 피해는 급증하였고 불가르족에게 죽은 아랍군의 수는 22,0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동로마군도 성문을 열고 앞에서 공격하다가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였다. 결국 이 양면 공격에 아랍군의 피해는 늘어만 갔고 깔리프 우마르 2세는 후퇴를 명하였다. 이 후퇴 와중에 아랍군은 재차 불가르족의 공격을 받았고 엄청난 수의 병사를 잃었다. 일부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하여 육지로 후퇴하였지만 대부분은 바다로 후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중간에 폭풍을 만나 거의 모든 배가 수장(水葬)되었다.


2차 콘스탄티노플 전투는 아랍군이 아라비아를 뛰쳐나온 이후 당한 최악의 참패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1년간의 전투에 동원된 21만의 아랍군 중 3만명만이 고향땅을 밟았고 2천척의 배중 겨우 5척만이 항구로 돌아갔다 한다. 살수대첩의 패배 때문에 수나라가 흔들렸듯이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참패로 인하여 이슬람권을 다스리던 옴마야드 왕조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이슬람군이 동유럽진출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만약 아랍군이 콘스탄티노플을 무너뜨렸다면 지금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는 이슬람군을 막을 만한 나라가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이 사라짐으로 인하여 동방정교도 사라졌을 것이고 동유럽은 이슬람화되었을 것이다. 러시아도 기독교국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슬람이 이때 동유럽을 지배하였으면 유럽인의 상당수가 무슬림이 되었을 것이고, 이슬람은 세계종교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에서 패배함으로 인하여 이슬람은 중동인들의 종교로 남아있게 되었다. 물론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튀르크에게 무너지기는 하지만 그때는 유럽이 이슬람을 막을 만한 힘이 생긴 후였다. 717-718년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진정으로 유럽문명을 살린 전투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2차 콘스탄티노플 이후

이후 움마이야 왕조는 도처에서 반란을 진압하려 애썼다. 그러나 동로마 정벌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726년에 터키의 마르마라해 연안에 있는 니카이아를 공격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730년대 전장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지금의 터키 중부로 다시 옮겨졌으며 이때 움마이야군은 동로마뿐만 아니라 지금의 코카서스 산맥 쪽에서 침공을 시도하는 카자르족과도 싸워야 했다. 737년에 카자르족에게 대승을 거둔 움마이야군은 다시 동로마와의 전면전을 재개하였다. 여전히 동로마 황제인 레오 3세는 공세로 돌아서서 군을 이끌고 아랍군과의 대규모 결전을 준비하였고 지금의 터키 동부 아피온카라히사르(아크로이논)에서 2만의 아랍군과 마주쳤다. 이 싸움에서 동로마군은 대승을 거두고 움마이야 왕조의 급격한 약화를 틈 타 터키 동부까지 영토를 늘렸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움마이야 왕조는 이미 지는 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교분쟁이 일어났고 움마이야 왕조는 750년에 망하고 그 자리에 아바시드 왕조가 들어섰다.

글 김성남 / 안보·전쟁사 전문가

글쓴이 김성남은 전쟁이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 UC 버클리 동양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 국제대학원에서 국제학 석사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에 진학하여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저서로는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전쟁으로 보는 삼국지], [전쟁세계사]등이 있으며 공저로 [4세대 전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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