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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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1 12:42:375158 
제85회. 食子肉羹(식자육갱) 河伯娶婦(하백취부)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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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85회食子肉羹 河伯娶婦(식자육갱 하백취부)

자기자식을 끓여 만든 인육탕을 들이킨 악양과

장수(漳水)의 하백이 부인을 취하다.

1. 삼가분진(三家分晉)

- 지백을 멸한 한위조 삼가가 당진국을 삼분하여 전국시대를 열다. -

예양(豫讓)이조양자 무휼(無恤)의 도포를 칼로 세 번 내리치자 무휼은 자기도 모르게 세 번 연달아 몸서리를 쳤다. 이윽고 예양이 죽자 자기의 도포를 가져오게 해서 살펴 본 무휼은 칼로 찔린 모든 자리에 나있는 핏자국을 보았다. 이후로 병이 생겼는데 해가 바뀌어도 낫지 않았다. 조양자는 공동씨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 자기로 인하여 그 형인 백로(伯魯)가 적자의 자리를 잇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백로의 아들 조주(趙周)를 양자로 삼아 조씨 종족의 적자로 만들어 자기의 뒤를 잇게 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주가 무휼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다시 주의 아들 완(浣)을 적자로 삼았다. 이윽고 죽음에 이르게 된 무휼은 후계로 삼은 조완(趙浣)을 불러 당부했다.

「한위조(韓魏趙) 삼가가 힘을 합하여 지가를 멸하여 넓어진 영토로 경작지가 늘어나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고 있다. 이때를 이용하여 한과 위 두 집안과 상의하여 각기 종묘사직을 따로 세우고 그 영토를 자손들에게 전해주자고 약속해야 한다. 주저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다가 만약 당진의 공실에서 영명한 군주라도 나타나 권력을 다시 찾은 후에, 정치를 쇄신하고 민심을 수습하게 되기라도 한다면, 조씨를 포함한 삼가는 그 종족의 제사도 보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조무휼이 말을 마치고 죽었다. 조완이 양자의 뒤를 이어 조씨 종족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이가 조헌후(趙獻侯)다. 장례를 치르고 난 조헌후가 한호(韓虎)를 찾아가 조양자의 유언을 전했다.

주고왕(周考王) 4년 기원전 437년에 당진의 애공(哀公)이 죽고 그의 아들 유(柳)가 즉위했다. 이가 진유공(晉幽公)이다. 한호가 위조(魏趙) 두 가문과 모의하여 단지 강주성(絳州城)과 곡옥성(曲沃城) 두 곳만을 유공의 식읍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당진의 공실 소유의 모든 땅을 셋으로 나누어 삼가의 영토로 삼았다. 이때부터 삼가를 삼진(三晋)이라 불렀다. 당진의 군주인 유공은 그 세력이 미약하여 오히려 그 신하들인 삼가를 찾아다니며 조현을 드려야만 했다. 이로써 당진의 군신 관계는 거꾸로 전도되고 말았다. 한위조 삼가가 당진의 공실 소유의 땅을 나누어 가진 사건을 사서는 삼가분진(三家分晉)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때 제나라의 상국은 전반(田盤)이었다. 그는 삼진이 모의하여 당진의 공실 땅을 모조리 빼앗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역시 전씨의 형제들과 종인들을 불러 제나라의 모든 고을에 그들을 대부로 삼았다. 전반은 다시 삼진에 각각 사자를 보내어 축하의 말을 전하면서 그들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때부터 전(田), 조(趙), 한(韓), 위(魏) 사가는 열국들과 교제하면서 스스로의 이름을 사용하며 왕래하기 시작했다. 제와 당진의 군주들은 두 팔을 들고 있는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때 주고왕은 그의 동생 게(揭)를 하남(河南)의 왕성(王城)①에 봉하고 옛날 흑견(黑肩)이 죽은 이래로 끊어진 주공(周公)의 관직을 잇도록 하고 게의 어린 동생 반(班)을 다시 왕성의 동쪽 공(鞏)② 땅에 봉했다. 공 땅은 왕성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왕자 반을 동주공(東周公)이라 부르고 다시 하남의 왕성에 봉해진 게를 서주공(西周公)이라 불렀다. 이것이 후에 주나라가 동과 서로 나누어지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기원전 426년 주고왕이 죽고 그의 아들 오(午)가 뒤를 이었다. 이가 위열왕(威烈王)이다. 주위열왕 17년 기원전 409년 조헌후(趙獻侯) 완(浣)이 죽고 그의 아들 조적(趙籍)이 뒤를 이어 조씨들의 수장이 되었다. 조적이 조열후(趙列侯)다. 같은 해에 한씨는 한경후(韓景侯) 건(虔)이, 그리고 위씨들은 위사(魏斯)가 제나라의 전씨들은 전화(田和)가 각각 그들 종족의 수장 자리에 앉아있었다. 사가의 수장들은 서로 관계가 더욱 긴밀하게 되어 피차간에 돕고 추천하여 대사를 같이 이루기로 약속했다.

위열왕 23년 기원전 403년 주나라의 구정이 벼락을 맞아 아홉 개의 정이 요동을 쳤다. 삼진의 수장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여 서로 은밀히 상의하며 말했다.

「구정은 곧 세 왕조③가 천명에 의해 나라를 세웠다는 전국의 중요한 보기라! 오늘날 벼락을 맞아 크게 흔들렸으니 이것은 주나라의 기운이 다 했다는 징조이다. 우리들이 나라를 세운지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명호가 없으니 주왕실이 쇠미해진 이때를 이용하여 우리 세 나라가 각기 사자를 보내 제후로 봉해달라고 청하면 주천자는 우리의 세가 강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허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한다면 우리의 명호는 바로 서게 되고 다시 천자의 말을 순종하게 됨으로써 실제로는 부귀와 영화를 누리면서도 찬탈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아도 되니 이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어서 삼국의 수장들이 각기 자기들의 심복을 사자로 삼아 주나라에 보냈다. 위는 전문(田文)④을, 조는 공중련(公仲連)⑤을, 한은 협루(夾累)⑥를 사자로 삼아 각기 황금 및 비단과 함께 각기 자기 땅에서 나오는 토산물을 수레에 가득 싣고 주나라에 가서 위열왕을 배알하고 바치면서 각기 자기들의 수장들을 제후로 책봉해 달라고 청했다. 위열왕이 사자들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당진의 공실 땅 모두를 삼가가 나누어 가지게 되었는가?」

위나라 사자 전문이 대답했다.

「당진의 군주들이 정치를 잘못하여 열국들과의 관계를 단절되고 나라 안에서는 반란이 일어나서 삼가가 각기 자기들의 병사로써 반란군을 토벌하여 그 땅을 나누었지 공실의 땅을 빼앗지는 않았습니다.」

위열왕이 다시 물었다.

「삼진의 수장들이 제후가 되고 싶으면 스스로 자립하면 될 일이지 어찌하여 구태여 나에게 구하는가?」

조나라 사자 공중련이 대답했다.

「삼진은 이미 여러 세대를 거쳐면서 세력을 늘려 왔기 때문에 자립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이렇게 와서 명을 받고자 천자께 품을 드리는 이유는 감히 천자의 존엄함을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자께서 만약에 우리 삼진의 수장들을 제후로 책봉해 주신다면 대를 이어 돈독한 마음과 절개로써 충성을 바쳐 주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방패막이가 될 것인데 어찌 왕실에 이로움이 없겠습니까?」

위열왕이 크게 기뻐하며 즉시 내사에게 명하여 책명(冊名)을 쓰도록 하여 조적(趙籍)은 조후(趙侯)에 위사(魏斯)는 위후(魏侯)에, 한건(韓虔)은 한후(韓侯)에 임명하고, 다시 각국의 수장들에게 불면(黻冕)과 규벽(奎璧)과 그에 따르는 일체의 기구들을 하사했다. 전문 등이 각기 자기들의 나라로 돌아가 주왕의 책명과 하사품을 전하자 조, 한, 위 삼가는 각기 자기들이 왕명을 받았다고 나라 안에 선포했다. 조나라는 그 도읍을 중모(中牟)⑦에, 한나라는 평양(平陽)⑧에, 위나라는 안읍(安邑)⑨에 정하고 그 곳에다 각각 자기들의 종묘사직을 세웠다. 다시 사자를 중원의 열국들에게 두루 보내어 자기들이 제후가 되었다고 통고하자 대부분의 열국 제후들은 치하했다. 단지 섬진만이 옛날에 이미 당진과의 관계를 끊고 초나라와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그 후로는 중원의 열국들과 통교를 하지 않았고, 중원의 제후국들도 역시 섬진을 이적(夷狄)의 나라로 여겼기 때문에, 경축의 사자를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삼가는 당진의 정공(靖公)을 폐하여 서민으로 만든 후에 순류(純留)⑩로 옮겨 살게 하고 당진국 공실의 마지막 남은 땅마저 삼가가 나누어 가졌다. 당진은 당숙우(唐叔虞)에서 정공에 이르기까지 모두 27세 만에 그 제사가 끊기게 되었다. 염옹(髥翁)이 시를 지어 한탄하였다.

육경이 사경이 되고 다시 사경은 삼경으로 되었다.

남면칭후(南面稱侯)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니

이익을 탐하여 경솔하게 병권(柄權)을 주지마라!

허다한 혼주들이 간탐한 신하들을 불러 들였노라!

六卿歸四四歸三(육경귀사사귀삼)

南面稱侯自不慚(남면칭후자불참)

利器莫敎轻授柄(이기막교경수병)

許多昏主導奸貪(허다혼주도간탐)

다시 주왕이 삼진의 수장을 제후로 임명한 처사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지만 정작 비난 받아야 할 사람들은 삼진의 수장이어야 한다고 논한 시가 있다.

왕실의 힘은 미약해져서 단지 군더더기에 불과 했는데

어찌 삼진이 제후를 칭하는 참람한 일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주왕이 책명을 주지 않았다 해도 스스로 도적질했을 터이니

삼진의 제후들을 탓해야지 주왕을 탓하지 말지어다.

王室單微似贅瘤(왕실단미사췌류)

怎禁三晉不称侯(즘금삼진부칭후)

若無冊命終成竊(약무책명종성절)

只怪三侯不怪周(지괴삼후불괴주)

2. 예현하사(禮賢下士)

- 현인을 예로써 대하고 선비를 받들다. -

이때 삼진의 군주들 중에서 위문후(魏文侯) 사(斯)가 가정 어질어 군주의 몸으로 능히 하급 관리에게도 마음을 열어 성의를 다하여 대했다. 그때 자가 자하(子夏)인 복상(卜商)이라는 공자의 제자가 서하(西河)⑪에서 제자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치고 있었다. 위문후가 자하를 찾아가 경서를 배웠다. 위문후의 동생 위성(魏成)이 전자방(田子方)이 어질다고 천거하자 위문후가 그를 불러 친구로 사귀었다. 위성이 다시 말했다.

「서하에 단간목(段干木)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지금은 은거하여 조정에 나와 벼슬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

위문후가 즉시 단간목을 만나보기 위해 하수를 건너 어가를 서하로 몰게 했다. 위후의 수레가 달려오는 소리를 들은 단간목이 문후를 피해 뒷담을 넘어 도망쳐 버렸다. 문후가 알고 한탄하며 말했다.

「참으로 기개 높은 선비로다!」

문후가 도성 안읍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하에 한 달 여를 묶으며 매일 단간목의 집을 찾아가 대문 앞에서 기다렸다. 수레를 타고 단간목의 집에 가까이 이르게 되면 문후는 감히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서서 수레의 횡목(橫木)을 잡고 경의를 표하는 의식을 행했다. 단간목은 위문후의 정성에 감복하여 어쩔 수 없이 위후의 접견을 허락했다. 문후가 단간목을 자기 수레에 태우고 안읍(安邑)으로 돌아와 전자방과 같은 반열에 세워 주빈으로 모셨다. 이 소식을 듣고 천하의 사방에서 어진 선비들이 위나라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어서 이극(李克), 적황(翟璜), 전문(田文), 임좌(任座)등 기라성과 같은 재사들이 조당에 즐비하게 되었다. 당시 천하의 선비들이 일어나 뜻을 얻기 시작한 풍조는 위문후로 인해서였다. 섬진(陝秦)이 여러 번 군사를 동원하여 위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하서(河西)의 땅을 찾기 위해 공격하려고 했으나 위나라에 몰려 있던 수많은 인재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했다.

3. 期獵虞人(기렵우인)

- 산지기와 한 사냥 약속을 지키다.

한번은 위문후가 산림을 지키는 관리 우인(虞人)⑫과 날짜를 정해 오시에 만나 사냥을 하기로 약속한 적이 있었다. 이윽고 약속한 날이 되었는데 그날 아침 일찍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날씨가 매우 추웠다. 위문후는 조회에 조당의 여러 신하들에게 음식과 술을 하사해 추위를 달래게 했다. 군신들은 술을 마셔 몸이 어느덧 훈훈하게 되려고 하는 순간 문후가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시가 되려면 얼마나 남았는가?」

옆에 있던 시종이 대답했다.

「지금이 오시입니다.」

문후가 황급히 술자리를 파하게 하고 수레를 모는 어자를 재촉하여 들판으로 달리게 했다. 곁에 있던 시종들이 물었다.

「지금 비가 내리고 있어 사냥도 하실 수 없는데 하필이면 헛걸음을 하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문후가 대답했다.

「나와 약속한 우인은 틀림없이 교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비록 사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하나, 나는 달려가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야 되겠다.」

성안의 백성들이 문후가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수레를 몰아 성밖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고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이어서 우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비를 무릅쓰고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모두가 얼굴을 맞대고 찬탄했다.

「우리의 군주님께서는 하급관리와의 약속임에도 지키기를 이와 같이 하시는 도다!」

이후로는 나라의 모든 지시와 법령은 아침에 내리면 저녁에 행하게 되었으며 아무도 감히 어기지 못했다.

4. 刀斷機絲(도단기사)

- 악양의 처가 베틀의 실을 자르다.

한편 당진국의 동쪽에 이름이 중산(中山)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 군주의 성은 희(姬)이고 작위는 자작으로 백적(白狄)과 같은 종족이었다. 당진의 소공(昭公) 치세 때 수시로 당진의 지시에 불복하여 수차에 걸쳐 토벌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조간자(趙簡子)가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그 도성을 포위하자 이에 견디지 못한 중산국의 군주가 화의를 청하고 다시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 이어서 당진이 삼진으로 나라가 분리되자 중산국은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게 되었다. 당시 중산국의 군주는 희굴(姬窟)이라고 했는데 밤을 새면서 술 마시기를 즐겨했다. 그는 낮 동안에는 하루 종일 잠을 자다가 밤이 되면 깨어 술을 마셨다. 자연히 대신들과는 사이가 멀어지고 버릇없는 여러 소인배들과 어울리게 된 희굴로 인하여 중산국의 정치가 어지러워져 백성들은 생업을 잃고 국가적인 재난은 끊일 날이 없었다. 이에 위문후가 중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그의 동생 위성(魏成)과 상의했다. 위성이 말했다.

「중산국은 서쪽으로 조나라와 영토가 접해있고 남쪽의 우리나라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 만약에 공격하여 얻게 된다 해도 지키기가 쉽게 지킬 수 없습니다.」

「만약 중산국이 조나라 땅이 된다면 우리 위나라의 북쪽 변경은 강성해진 조나라로부터 압박을 더욱 심하게 받게 되지 않겠는가?」

곁에 있던 적황이 진언했다.

「신이 천거할 사람이 한 명 있는데 성은 악(樂)이고이름은 양(陽)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곡구(穀邱)⑬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라 가히 대장의 재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양을 대장으로 삼는다면 중산국을 멸하여 우리 위나라 땅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악양이 대장의 재목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악양이 옛날에 길을 가다가 황금을 주어 집으로 가져오자 그의 처가 보고 침을 뱉으며 말했습니다. ‘뜻을 품고 있는 선비는 우물물도 훔쳐먹지 않고, 청렴한 사람은 던져준 음식을 받아먹지 않는다⑭라고 했습니다. 항차 이 황금의 내력도 모르면서 어찌 주어서 집으로 가져 올 수 있단 말입니까?’ 악양이 그의 처의 말에 감복하여 황금 덩어리를 가지고 나가서 들판에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학문을 배우기 위해 바로 그의 처와 헤어져 나라 밖으로 나가 노나라와 위나라로 들어갔습니다. 악양이 공부를 하다말고 일 년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베틀에 앉아 천을 짜던 그의 처가 그녀의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학문을 다 이루셨는지요?’ 악양이 대답했습니다. ‘미처 다 이루지 못했소.’ 천을 짜던 그의 처가 악양의 대답을 듣고 베틀에 걸려 있던 실들을 칼로 잘라버렸습니다. 악양이 놀라 그 이유를 그의 처에게 물었습니다. 그의 처가 대답했습니다. ‘학문을 이룬 다음에 뜻한 바를 행하는 일은 마치 비단을 짠 다음에야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 당신이 학문을 다 이루기도 전에 중도에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으니 어찌 끊어져 버린 이 베틀 위의 비단과 같지 않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악양이 그의 처의 말에 크게 깨달아 다시 출국하여 학문을 다시 시작하고는 7년 동안 집에 들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사람이 본국에 돌아와 있으나 앞날에 대해 기대하며 스스로를 높여 작은 자리는 쳐다보지 않고 고고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불러 쓰시지 않으십니까?」

문후가 즉시 적황에게 명하여 군주가 타고 다니는 로거를 끌고 가서 악양을 데려오게 했다. 문후의 좌우에 있던 시종들이 불가하다며 말했다.

「신 등이 듣기에 악양의 큰아들 악서(樂舒)는 이미 중산국 군주를 모시고 있는데 어찌 악양이 대장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겠습니까?」

적황이 악양을 위해 변명했다.

「악양은 공명을 추구하는 선비라! 그의 아들이 중산국의 군주를 섬기면서 이미 그의 부친을 불렀으나 악양은 중산국의 군주가 무도하여 부름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주공께서 만약 부월(斧鉞)을 그에게 내려 대장의 직책을 내린다면 어찌 그가 맡은 바 임무를 이루지 않을까 걱정하겠습니까?」

위문후가 적황의 말을 따랐다. 악양이 적황의 인도를 받아 조당에 들어와 문후에게 인사를 올렸다. 문후가 악양을 보고 물었다.

「과인이 중산국을 정벌하는 일을 그대에게 일임하려고 하고 있으나 그대의 아들이 중산국에 있으니 마음에 걸린다. 이를 어찌 생각하여야 하는가?」

「장부란 공을 세우고 업적을 남기기 위해 각기 그 주인 된 사람을 섬겨야 되는 법인데 어찌 사사로운 정분으로 공적인 일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신이 만약 중산국을 점령하지 못한다면 기꺼이 군령에 따라 어떤 처벌이라도 받겠습니다.」

문후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그대가 자신하니 과인이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5. 用人不疑(용인불의)

- 일단 쓰면 의심하지 말라! -

이어서 악양을 원수의 직에 제수하고 서문표(西門豹)를 선봉으로 삼아 군사 5만을 주어 중산국을 정벌하도록 했다.

중산군(中山君) 희굴(姬窟)이 대장 고수(鼓須)를 급파하여 추산(楸山)에 진지를 구축하고 위나라 군사들을 막게 했다. 악양은 문산(文山)에 진영을 세우고 주둔했다. 양쪽의 군사들이 서로 대치하기를 한 달이 넘게 되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악양이 서문표(西門豹)에게 말했다.

「내가 주공 면전에서 군령장을 쓰고 출전했는데 한 달이 넘도록 아직까지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오! 내가 추산의 지세를 살펴보니 수종이 가래나무가 대부분이었소. 담대한 장수 한 명을 뽑아서 일단의 군사들을 인솔하여 몰래 적진으로 잠입시켜 산림에 불을 지르게 한다면 적군의 진영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소. 그때를 이용하여 공격하면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소.」

서문표가 자기가 그 임무를 맡겠다고 자원했다. 그때는 8월 달로써 가을이 한참 무르익은 중추였다. 중산의 군주가 사자에게 술과 양고기를 들려 추산의 진영에 보내 고수와 그 군사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고수가 밤하늘의 달을 쳐다보며 술을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져 잠시 적군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게 되었다. 시간이 어느덧 삼경에 이르자 서문표가 함매를 입에 물린 군사들을 이끌고 적진으로 잠입하여 추산에 돌연히 나타났다. 서문표가 이끄는 위나라 군사들은 화약을 안에 넣고 마른 가지로 묶어서 만들어 횃불로 사용하기 위한 나뭇단을 휴대하고 있었다. 이윽고 서문표와 그 군사들은 나뭇단에 불을 붙인 횃불을 가래나무 밑에다 놓아 숲을 태우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숲 속에서 불이 일어나 중산국 진영으로 화기가 뻗쳐나갔다. 그때까지 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한 상태의 고수는 군사들을 지휘하여 불을 끄려고 했으나 이미 불길이 온산에 번져 나무가 타면서 튀는 소리만 하늘을 진동시켜 한 곳의 불도 끄지 못했다. 이윽고 중산의 군사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자기들 진영 앞에 위나라 군사들이 잠복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 고수는 군사들을 이끌고 급히 추산의 뒤로 우회하여 후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악양은 위나라 본대의 대군을 이끌고 추산의 후면에 잠복하고 있었다. 이윽고 중산국의 군사들이 다가오자 위군은 일제히 일어나 기습했다. 뜻밖의 상황에 중산국의 군사들을 어찌할 줄을 모르는 사이에 결국 그 한 싸움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고수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간신히 싸움터에서 탈출하고 패잔병을 수습한 후에 백양관(白羊關)⑮으로 달아났다. 악양은 파죽지세로 패주하는 중산군의 뒤를 추격했다. 중산국의 군사들은 사기가 오른 위군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패주만을 계속했다.

고수가 패잔병을 이끌고 중산국의 도성인 고성(顧城)⑯으로 들어가 희굴을 접견하고 악양은 용기와 지모를 갖춘 장수라 대적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얼마 후에 악양이 군사를 휘몰아 진격하여 중산국의 도성을 포위했다. 희굴이 보고 대노했다. 대부 공손초(公孫焦)가 앞으로 나와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위나라의 장수 악양은 바로 악서(樂舒)의 부친입니다. 악서는 지금 우리 중산국에서 벼슬을 살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그에게 영을 내려 성 위로 올라가 그 부친을 향해 군사를 물리치도록 외치게끔 하십시오. 이것이 지금 우리로서는 할 수있는 최선의 방책입니다.」

희굴이 공손초의 말을 쫓아 악서를 불러 명했다.

「너의 부친이 위나라의 장수가 되어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네가 성 위로 올라가 너의 부친을 설득하여 군사를 물리치도록 하면 내가 너를 큰 고을의 대부로 삼겠다.」

「신의 아비 되는 사람은 이미 중산국의 부름을 받았으나 기꺼이 응하지 않고 오히려 위나라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오늘 부자지간이 서로 각기 모시는 주인이 따로 있으니 신이 비록 철군을 부탁한다 해도 어찌 군사를 물리치겠습니까?」

희굴이 악서의 말을 무시하고 강제로 행하게 했다. 악서가 부득이 성 위로 올라가 큰소리로 외쳐 그 부친을 뵙기를 청했다. 악양이 군장을 갖추고 초거(轈車)에 달린 망루에 올라 악서롤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하기도 전에 꾸짖었다.

「군자란 ‘위태로운 나라에서 벼슬을 살지 않으며 어지러운 정권을 받들지 않는다’라고 했다. 너는 부귀를 탐하여 어리석은 거취를 택했다. 내가 위후의 명을 받들어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구하고 포악한 군주를 정벌하러 왔다. 너는 빨리 돌아가서 너의 군주에게 권하여 항복을 하도록 하라. 그리되면 비로소 우리 부자는 서로 상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항복하고 안하고는 우리 군주에게 달려 있습니다. 제가 권하여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단지 부친께 드리는 부탁은 잠시 공세를 늦춰주시어 저로 하여금 군신 간에 계책을 마련할 시간을 달라는 것뿐입니다.」

「내가 군사를 거두어 한 달 간의 말미를 주어 부자간의 정리를 보전하겠으니 너의 군주와 신하들은 한시라도 빨리 의견을 정하여 대사를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악양이 과연 영을 내려 포위망을 늦추고 공격을 멈추게 했다. 악양이 사랑하는 아들을 생각해서 결코 중산국을 세차게 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희굴은 단지 공세를 지연시키려고만 하고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이윽고 약속한 한 달의 기일이 지나자 악양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하는 서신을 보냈다. 희굴이 다시 악서를 보내 관대한 처분을 청하게 했다. 악양이 다시 한 달의 말미를 주었다. 이와 같이해서 세 번을 기일을 연장해 주었다. 서문표가 보고 말했다.

「원수께서는 중산국을 정벌할 생각이 없으십니까? 어찌하여 오래 동안 기다리시기만 하시고 공격을 하지 않으십니까?」

「중산국의 군주는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포악한 정치를 행하여 내가 주군의 명을 받아 토벌하러 왔소. 만약 내가 너무 급하게 공격을 한다면 많은 백성들이 다치게 되오. 내가 세 번이나 그들의 청을 허락해 준 이유는 단지 나의 부자지간의 정 때문만은 아니고 민심을 수습하려는 뜻도 함께 있었기 때문이오.」

한편 위문후의 좌우에 있던 신하들은 악양이 바로 입조 하자마자 크게 쓰이자 다 같이 마음속으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어서 악양이 중산국으로 진격하였으나 세 번이나 시일을 연기해 가며 공격을 지연시키자 위문후에게 참소했다.

「악양이 여러 번 싸움에서 이겨 그 위세는 마치 파죽지세와 같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의 아들 한마디 말로 삼 개월이나 공격을 멈추고 있으니 이것은 부자간의 정리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공께서 만약 불러드리지 않으신다면 우리 위나라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군비만 축내고 일을 성사시키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문후가 좌우의 말을 듣지 않고 적황에게 그 의견을 물었다. 적황이 대답했다.

「그것은 필시 악양의 계책이오니 주공께서는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이어서 여러 신하들이 서면으로 빗발치듯 상소를 올렸다. 어떤 자는 중산국이 장차 그 나라의 절반을 떼어 악양에게 주기로 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자는 악양이 중산국과 모의하여 같이 힘을 합한 후에 위나라를 공격한다고 했다. 모두 상자 안에 넣고 봉한 후에 보관해 두도록 명한 문후는 때때로 사자를 악양에게 보내 노고를 치하했다. 이어서 중산국을 점령했을 때를 대비해서 안읍(安邑)에 치소(治所)를 설치한 후에 관리를 선발하여 채워 놓고는 악양이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올 날만을 기다렸다. 악양은 문호의 처사에 마음속으로 매우 감격했다.

5. 食子肉羹(식자육갱)

- 악양이 자식을 죽여 끓인 인육탕을 들이키고 중산국을 멸하다.

마침내 악양은 세 번이나 걸쳐 석 달의 말미를 주었음에도 중산국이 항복하지 않자 장수들과 군사들로 하여금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도록 몰아쳤다. 중산국 도성의 성벽은 견고하였고 또한 양식은 충분했다. 고수와 공손초가 주야로 성벽 위를 순시하며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군사들을 독려했다. 위나라 군사들이 성벽을 타고 오르면 성안의 돌과 통나무들을 소나기처럼 던져 위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위나라는 몇 달에 걸쳐 공세를 취했지만 중산국의 도성은 함락시킬 수 없었다. 고민을 하던 악양이 이윽고 분노를 터트리며 서문표와 함께 군사들 앞에 서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덩이들을 무릅쓰고 중산성의 동서남북으로 난 성문에 대한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와중에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던 고수가 성 밑에서 쏜 화살을 머리에 맞고 전사했다. 성안의 집과 담장을 헐어 나온 돌덩이리와 나무들도 점점 줄어들어 마침내 성벽 밑으로 던질 것이 다하게 되었다. 공손초가 희굴에게 말했다.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위나라의 군사들의 공세를 멈출 계책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

「어떤 계책인가?」

「악서가 그의 부친인 악양에게 세 번에 걸쳐 말미를 청하자 모두 허락을 받아왔습니다. 그것은 악양이 그의 아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그가 공세를 취하여 우리 중산성의 운명이 경각지간에 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악서를 붙들어 밧줄로 묶어 높은 장대에 매달고, 만약 군사를 물리치지 않는다면 그의 아들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악서로 하여금 그의 부친에게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걸하게 하십시오. 악양은 틀림없이 공세를 늦추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희굴이 공손초의 계책에 따라 악서를 장대에 묶어 높이 세우고 그로 하여금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

「부친께서는 저의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악양이 보고 큰소리로 악서를 꾸짖었다.

「불초한 자식놈아! 너는 다른 나라를 섬기면서 위로는 기묘한 계책을 내어 그 주군으로 하여금 싸움에서 승리를 취하게 만들지도 못하고 밑으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군주에게 화의를 청하도록 권하지도 못하면서 아직도 젖꼭지를 물고 있는 갓난아이처럼 목숨을 살려달라고 애걸만하고 있느냐?」

악양이 말을 마치고 활에 화살을 재어 쏘아 죽이려고 했다. 악서가 보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장대에서 내려와 희굴 앞으로 나가 말했다.

「저의 부친의 뜻은 단지 나라에 있지 부자간의 정에 있지 않습니다. 주공께서는 스스로 계책으로 싸워서 성을 지키십시오. 신이 주군 앞에서 죽음을 청하여 제가 적군을 물러가지 못한 죄를 밝히고자 합니다.」

공손초가 말했다.

「그 부친이 우리 중산성을 공격하고 있으니 그 자식된 자로써 죄가 없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이 일은 악서의 죄라고 할 수 없다.」

「저에게 악서를 죽여서 적군을 물러가게 할 계책이 있습니다.」

희굴이 허리에 찬 칼을 풀어 악서에게 주자 그는 목을 찔러 죽었다. 공손초가 말했다.

「사람 사이에 부자지간보다도 더 깊은 정은 없습니다. 오늘 악서의 몸을 가마솥에 삶아 국을 만들어 악양에게 보내십시오. 자기 자식의 시신으로 끓인 국을 악양이 보게 되면 슬픔을 참지 못한 나머지 우리를 공격할 생각을 멈추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이용하여 주군께서 일단의 군사를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크게 한 번 싸운다면 다행히 싸움에서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별도의 계책을 세워 대처해나가면 나라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희굴이 다른 뾰쪽한 계책도 없고 해서 공손초의 계책을 따라 악양의 시신을 가마솥에 끓여 국을 만들어 그 머리와 함께 사자를 시켜 악양의 진영으로 보냈다. 중산국의 사자가 악양을 보고 말했다.

「우리 군주께서 장군의 아들인 소장군에게 장군의 군사를 물러가게 하지 못한 죄를 물어 죽이시고 다시 그 시신은 가마솥에 끓여 국을 만드셨습니다. 삼가 그 탕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와서 바칩니다. 소장군의 처와 자식들은 아직 성안에 살아 있는데 원수께서 우리 중산성을 공세를 늦추시지 않으시고 계속 공격하신다면 그들도 즉시 모두 주륙을 당할 것입니다.」

악양은 중산국의 사자가 가지고 온 수급이 자기 아들의 것임을 알아보고 큰소리를 쳐 꾸짖었다.

「참으로 불초한 자식이로다! 무도혼군을 모셨으니 이것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음이라!」

악양이 즉시 사자에게 국그릇을 빼앗아 그릇 안의 고기와 국물을 남김없이 먹어 버리고는 사자를 향해 말했다.

「너의 군주가 보내온 국물을 맛있게 먹었다. 내가 성을 함락시킨 후에 너의 군주를 보고 감사의 말을 전하겠다고 전하라! 우리 군중에도 큰 가마솥이 있으니 내가 그때 너의 군주를 그 가마솥으로 대접하겠다는 말도 전하라!」

사자가 돌아와 희굴에게 악양의 말을 전했다. 희굴은 악양이 그 아들에 대한 죽음을 전혀 슬퍼하지 않고 있음을 알았다. 악양은 더욱 박차를 가하여 중산성을 공격했다. 성이 함락되어 사로잡히게 되면 가마솥에 삶겨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희굴은 궁궐의 뒷방으로 가서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다. 공손초가 성문을 열고 나와 악양에게 항복했다. 악양이 공손초가 참언으로 사람을 모함하여 나라를 망하게 만든 죄를 열거하고 참수형에 처했다. 성안의 백성들을 위무하기를 마치자 5천의 군사를 남겨 서문표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성중의 부고에 있던 보물들을 모조리 꺼내어 수레에 싣고는 위나라로 개선하였다.

6. 食子之肉 其誰不食(식자지육 기수불식)

- 아들의 고기까지 먹었는데 누구의 고기인들 못 먹겠는가? -

위문후는 악양이 싸움에서 이겨 공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친히 성문 밖으로 나가 악양을 맞이하며 그 노고와 공을 치하하면서 말했다.

「장군이 나라를 위하다가 자식을 잃었음은 실은 과인의 잘못이라!」

악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신하의 본분으로써 어찌 감히 사사로운 정을 돌볼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공을 세울 수 있었음은 주군께서 미천한 저를 발탁하시어 부월을 내려주신 덕분입니다.」

악양이 위문후에 대한 조현의 의식을 마치고 중산국의 지적도 및 부고에서 가져온 금은보화와 목록을 바쳤다. 군신들이 모두 칭하(稱賀)해 마지않았다. 위후가 궁정의 누각 위에 주연을 베풀어 친히 술잔에 술을 부어 악양에게 내렸다. 악양이 술잔을 두 손으로 받아 마시더니 의기양양한 자세로 자기의 공을 과시하려는 기색이 농후했다. 주연이 파하자 문후가 좌우에게 명하여 단단히 밀봉한 길쭉한 상자를 가져오게 하여 악양에게 주도록 했다. 문후를 좌우에서 모시던 시종들이 두 개의 상자를 악양에게 전하자 악양이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상자 안에는 필시 진주와 금은보화로 가득 차 있음이라! 주공께서 이렇듯 상자의 뚜껑을 밀봉하여 나에게 하사하는 이유는 나를 시기하는 군신들을 의식하셨기 때문이리라!」

이윽고 악양이 집에 돌아와 가노들에게 명하여 상자를 집의 대청으로 가져오게 하여 밀봉된 뚜껑을 열고 보니 그 안의 내용물들은 조당의 군신들이 써서 바친 상주문들이었다. 상자 안의 상주문들은 모두가 악양이 반역을 꾀한다는 내용이었다. 악양이 문서들을 읽고 나서 크게 놀라 말했다.

「원래 조당에서는 나를 이렇듯 비방하고 있었는데 만약 주군께서 나를 깊이 믿지 않으시고 이와 같은 참소에 현혹되셨다면 내가 어찌 공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다음날 악양이 입조하여 자기를 믿어준 은혜에 대해 감사의 말을 올렸다. 문후가 군신들과 의논하여 가장 큰상을 더 내렸다. 악양이 재배하며 사양의 말을 올렸다.

「중산국을 멸할 수 있었음은 모두가 주공께서 안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소신을 지켜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은 다만 나라 밖에 있으면서 견마지로를 했을 뿐이지 어찌 제가 무슨 힘으로 그런 큰공을 세울 수 있었겠습니까?」

「내가 아니었다면 경은 장군으로 임용되지 못했고 경이 아니었다면 역시 내가 바라던 일도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오. 어쨌든 장군의 노고가 많았으니 이제는 식읍에서 편안히 지내도록 하시오.」

문후가 즉시 악양을 영수(靈壽)⑰에 봉하고 영수군(靈壽君)이라는 칭호를 내렸으나 그의 병권(兵權)은 회수했다. 적황이 보고 말했다.

「주군께서는 악양의 재능을 이미 보고 아시고 계시는데 어찌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의 일을 맡겨 변방을 지키게 하시지 않으십니까?」

문후가 웃기만 할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적황이 조당에서 물러 나와 이극(李克)을 찾아가 그 이유를 물었다. 이극이 대답했다.

「악양은 공을 세우기에 혈안이 되어 자기 아들까지 희생했는데, 다른 사람의 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 일에 대해서는 관중이 죽을 때 제환공에게 역아(易牙)를 조심하라고 경고한 바 있었습니다.」

적황이 그 뜻을 깨달았다.

7. 貧賤驕人(빈천교인)

- 빈천자는 교만해도 잃을 것이 없지만 부귀한 자가 교만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위문후는 중산의 땅이 안읍과는 너무 멀어 필히 자기 주변의 믿을만한 친족을 보내어 지키게 해야만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자 격(擊)을 중산군(中山君)에 봉해 그곳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는 군신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어 중산국을 점령한 일을 축하하려고 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술기운이 거나해진 위문후가 신하들을 향해 물었다.

「나는 어떤 군주인가?」

그러자 모두 대답했다.

「인군(仁君)입니다.」

그러나 임좌만은 말했다.

「주공께서는 새로 얻은 중산국에 동생 대신에 아들을 봉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인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문후가 화를 내자 임좌는 곧바로 조정에서 나갔다. 이어서 문후의 질문을 받은 적황이 대답했다.

「인군이십니다.」

「어째서인가?」

「신은 듣기에 군주가 어질면 신하는 직언을 올린다고 했습니다. 임좌로 하여금 직언을 올릴 수 있도록 했음으로 주공께서는 어진 군주라는 사실을 신은 알 수 있습니다.」

문후가 기뻐하며 적황으로 하여금 임좌를 조정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시키고는 친히 당을 내려가 맞이하여 상객으로 삼았다.

위문후의 명을 받은 세자격이 조당에서 나와 중산국으로 부임하기 위해 수레를 타고 길을 가는데 우연히 낡은 수레를 타고 지나가는 전자방을 만났다. 세자격이 황망하여 수레에 내려 길옆으로 비켜서며 두 손을 위로 올려 공경하는 예를 올렸다. 전자방은 수레를 계속 몰게 하며 오만하게 앉아서 세자격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쳤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끓오오른 세자격이 자기의 수행원을 시켜 전자방의 수레를 자기 앞으로 끌고 오라고 했다. 세자격이 전자방을 향해 물었다.

「이 격이 그대에게 묻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부하고 귀한 자가 교만해야 합니까? 아니면 가난하고 비천한 자가 교만해야 합니까?」

전자방이 듣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옛날부터 가난하고 비천한 자는 교만해도 상관이 없었지만 부귀한 자가 교만해도 된다는 도리는 없었습니다. 나라의 군주가 교만하면 사직을 보전할 수 없고 대부가 교만하면 종묘를 보전할 수 없습니다. 초영왕은 교만하여 나라를 잃었고 지백요는 교만하여 자기의 종족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부귀함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망한 사람의 경우는 이 두 사람의 일만으로도 밝히는 데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천하의 가난하고 천한 선비들은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으며 거친 베로 만든 옷을 입고 다니나, 다른 사람에게는 구하는 바가 없습니다. 즉 세상에 바라는 바가 없는 가난한 선비는 자신을 좋아하는 임금만을 좋아하여 스스로 즐거워하여 찾아가 자기가 낸 계책을 그 임금이 들어주면 열심히 일하며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자기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호연(浩然)한 마음으로 달아나 버린다 해도 누가 감히 그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주무왕이 만승의 은나라를 멸하고 주왕(紂王)을 죽였음에도 단지 수양산의 두 선비만은⑱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빈천한 자들의 오만함은 두 사람의 경우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세자격이 매우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중산국을 향해 떠나갔다. 문후가 전자방이 세자에게 굴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예를 다하여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했다.

8. 河伯娶婦(하백취부)

- 매년 처녀를 취하여 장가드는 장수(漳水)의 물귀신 -

그때 위문후는 비어있는 업도(鄴都)⑲의 태수직을 맡길만한 마땅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적황이 말했다.

「업도는 상당(上黨)⑳과 한단(邯鄲) 사이에 끼어 있어 한나라와 조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땅입니다. 이곳에는 필히 강단있고 정사에 밝은 사람을 보내 지키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서문표(西門豹)라면 능히 지킬 수 있습니다.」

문후가 즉시 서문표를 불러 업도의 태수로 임명했다. 서문표가 평복 차림으로 업성에 당도하였으나 성안의 거리가 한산하며 왕래하는 백성들이 많지 않았다. 서문표가 태수부로 들어가 성안의 부로들을 불러 무엇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불려온 노인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하백이 부인을 취하는 바람에 우리가 이렇듯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서문표가 듣고 말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로다! 하백이 무슨 방법으로 부인을 맞이해 간단 말인가? 노인장들은 혹시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까?」

부로 중에 한 사람이 나서서 말했다.

「장수(漳水)는 첨령(沾嶺)에서 발원하여 사성(沙城)에 이르러 동쪽으로 그 방향을 바꾸어 업도(鄴都)를 지나면서 장하(漳河)로 이름이 바뀝니다. 하백(河伯)은 맑은 물이 흐르는 장수(漳水)의 수신(水神)입니다. 하백(河伯)이 예쁜 여자를 좋아하여 매년마다 여인을 한 명 씩 골라 부인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만약 여인을 가려 하백에게 보내주면 해마다 풍년이 들어 곡식의 낟알을 잘 여물게 할 수 있도록 비를 골고루 적당히 오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여인을 부인으로 보내지 않으면 격노한 하백께서 파도를 일으켜 인가를 덮쳐 잠기게 합니다.」

「이 일은 누가 먼저 시작하자고 했습니까?」

부로가 계속 대답했다.

「이 읍에 사는 무당이 하는 말을 따라 옛날부터 물을 두려워하고 있는 풍속이 생겼습니다. 누가 감히 무당의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매년 동네의 호족들과 관청의 하급 관리들이 무당과 같이 모의하여 백성들에게서 수백 만 전의 부세를 걷어 그 중 2-3십 만 전은 하백의 부인을 찾는 비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자기들끼리 나누어 갖고 있습니다.」

서문표가 물었다.

「백성들이 그렇게 착취를 당하고 있으면서 어찌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노인들이 말했다.

「무당은 하백에게 축원을 드리는 일을 주관하고 삼로(三老)와 아전들은 비용을 거두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 다녀 수고로움이 적지 않으니 비용으로 나누어 쓴다 해도 그것은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은 초봄에 들에 종자를 뿌리는 시기에 무당이 사방의 민가를 찾아다니며 하백의 부인을 구한다고 하면서 제법 미색을 갖추고 있는 처녀를 발견하면 즉시 ‘이 처녀는 마땅히 하백의 부인으로 보낼 만하다.’라고 말합니다. 그 처녀의 부모가 자기 딸을 하백의 부인으로 보내지 않으려면 많은 재물과 비단을 무당에게 바쳐 면하면 무당은 다시 다른 처녀를 별도로 찾습니다. 다시 하백의 부인으로 지명된 처녀의 집이 가난하여 재물과 비단을 주지 못해 면하지 못한 백성은 할 수 없이 자기의 딸을 무당에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강물 위에다 지은 재궁의 침소 주위에 장막을 치고 그 안에 이부자리를 새롭게 장만한 무당은 처녀를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힌 후에 재궁의 안에서 묶게 합니다. 점을 쳐 잡은 길일이 되면 갈대로 엮어 만든 배에 처녀를 태우고 강물 위에 띄어 보냅니다. 처녀를 태운 배는 강물에 떠내려가 몇 십리를 흐르다가 이어 가라 앉고 맙니다. 이러한 막대한 비용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고통이 적지 않고 또한 딸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기의 딸이 하백의 부인으로 점지될까봐 두려워하여 딸을 데리고 멀리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성안이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서문표가 다시 물었다.

「그 동안 하백이 노하여 홍수의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습니까?」

노인들이 말했다.

「매년 처녀를 부인으로 바쳐오고 있는 덕분에 아직까지 하백의 노여움을 사지 않아 홍수의 피해가 없다고 합니다만, 그 것은 단지 여기 업 땅은 지세가 높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이라 강물이 덮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매년 한해를 만나 가뭄으로 곡식이 말라죽은 재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부로의 말을 듣고 업 땅의 상황을 대충 짐작한 서문표가 말했다.

「하백이 진정 있다면 처녀가 시집을 갈 때 내가 마땅히 참석하여 전송하고 백성들을 위해 축원하리라!」

이어서 처녀를 하백에게 바치는 날이 되자 그 노인네들이 서문표를 찾아와 알렸다. 서문표가 의관을 정제하고 의식이 행해지는 강가로 나갔다. 고을의 모든 관속, 삼로(三老), 호족(豪族), 이장(里長), 그리고 마을의 부로(父老) 등이 이미 참석하여 서문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성들은 이곳저곳에 모여 자리를 잡았는데 그 의식을 구경하려고 나오는 사람은 수천 명이 넘었다. 삼로와 이장 등이 대무(大巫)를 데리고 와서 서문표에게 인사를 시키는데 대무의 행동거지가 매우 거만했다. 서문표가 대무를 살펴보니 바로 늙은 노파였다. 소무로 여자 제자를 20여인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모두가 옷차림을 정결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소무들은 수건이나 빗, 그리고 향로 같은 제기들을 손에 들고 대무의 뒤서 서서 수행했다. 서문표가 대무를 향해 말했다.

「대무께서 번거롭겠지만 하백의 부인이 될 처녀를 불러와 주시오. 내가 한 번 보리라!」

대무가 제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려 하백의 부인으로 뽑힌 처녀를 불러오라고 시켰다. 서문표가 대령시킨 처녀를 보니 아름다운 옷에 허리에는 하얀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얼굴은 그런 대로 중간 정도는 되었다. 서문표는 대무와 삼로 그리고 의식에 참석한 여러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하백은 고귀한 신이라 부인으로 바친 처녀는 반드시 그 자색이 고와야만 비로소 우리의 성의를 고맙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이 처녀의 자색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니 대무는 번거롭겠지만 나를 위해 하백에게 가서 태수의 말이라고 하면서 ‘아름다운 처녀를 구해 다시 날짜를 정해 바치겠습니다.’ 라고 전하라!」

서문표가 즉시 수행 군졸들을 시켜 늙은 대무를 들어 강물에 던져버리게 하자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삽시간에 벌어진 뜻밖의 일에 대경실색했다. 서문표가 시치미를 떼고 정중한 자세로 서 있다가 시간이 얼마쯤 지나자 다시 큰 소리로 말했다.

「늙은 노파라서 우리의 급한 사정을 전혀 개의치 않는구나! 강물 속의 하백을 만나러 가서 오래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 돌아와 하백의 뜻을 전달하지 않으니 너희 제자들이 가서 나를 위해 너의 대무를 재촉하여 빨리 오라고 전하라!」

다시 군졸들을 시켜 제자 한 사람을 끌고 가서 강물에 던지게 했다. 서문표가 다시 엄중한 자세로 서서 기다리다가 시간이 다시 얼마쯤 지나자 입을 열어 말했다.

「제자가 물속으로 들어간 지 오래 되었는데도 그 역시 빨리 돌아와 고를 하지 않는구나!」

서문표가 군졸들을 시켜 제자 중 한 사람을 더 끌고 가서 강물에 빠뜨렸다.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그들이 늦게 온다고 성화를 부리며 군졸들로 하여금 다시 제자 중 한 명을 안아다 강물 속으로 던지게 했다. 모두 대무의 제자 세 명을 던져 물속에 가라앉게 하고는 다시 여러 사람들 향해 외쳤다.

「하백에게 간 사람들은 모두가 여인네들이라서 나의 말을 분명하게 전하지 못한 듯 하다. 아무래도 하백에게 가서 나의 말을 정중하게 전하기 위해서는 삼로가 수고를 좀 해 주어야 하겠소! 삼로는 하백에게 가서 나의 말을 분명하게 전해주기 바라오.」

삼로가 사양하려고 하자 서문표가 큰소리로 외쳐 꾸짖었다.

「무슨 잔말이 그리 많으냐? 빨리 가서 하백에게 나의 뜻을 전하고 즉시 돌아와 그의 뜻을 받아 오라!」

군졸들이 달려가 한 쪽에서는 밀고 다른 쪽에서는 끌고 해서 삼로가 미처 변명도 하기 전에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삼로는 강물의 파도 속으로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서문표의 뜻을 짐작하게 된 주위 사람들은 모두 속으로 혀를 깨물며 괴로워했다. 서문표가 관에 비녀를 꽂고 땅에 엎드려 강을 향해 절을 하며 공경의 뜻을 표하면서 삼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다시 대략 한 시진을 그런 상태로 있었다. 서문표가 땅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삼로가 나이가 많아 그들 역시 하백이 있는 곳까지 가지 못한 것 같다. 할 수 없이 나이가 젊은 아전이나 마을의 호족들이 가서 나의 말을 전해야 되겠다.」

아전과 호족들이 서문표의 말을 듣고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고 흐르는 땀으로 등을 적시더니 일제히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머리를 땅에 부딪쳐 나온 피로 얼굴이 피범벅이 된 아전과 호족들은 땅에 엎드린 채로 결코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서문표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잠시 더 기다려 보기로 하겠다.」

하백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전전긍긍했다. 시간이 다시 한 시진쯤 경과하자 서문표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하수의 물은 도도히 흐르건만 한 번 떠난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하백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함부로 민간의 여자를 죽게 만들었으니 너희들의 죄는 죽어 마땅하다 하겠다!

아전들과 호족들이 다시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자기들이 지은 죄의 용서를 빌었다.

「원래 이 일은 모두 죽은 대무가 꾸민 사기행각이지 우리들이 지은 죄가 아닙니다.」

「대무는 이미 죽었으니 이후에 다시 하백이 부인을 맞이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즉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중매를 서게 하여 하백에게 보내리라!」

그리고 나서 아전, 호장 및 삼로의 재산들을 몰수하여 그들에게 착취당한 백성들에게 다시 돌려 주도록 했다. 다시 마을의 부로들을 시켜 백성들 중 나이가 찼으나 장가를 들지 못한 사람과 소무들을 결혼을 시키게 하여 무속의 뿌리를 뽑아 버리게 했다. 잘못된 무속으로 인하여 고향을 등지고 도망친 백성들이 그 소문을 듣고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일을 두고 지은 시가 있다.

하백이 어떻게 그 부인을 얻게 되었는지 알 수 있었는가?

어리석은 백성들이 무식하여 무당에게 속고 있었음을

어진 사람의 한번 영으로써 의심의 그물을 걷고

근심스럽던 처녀들이 안심하고 잠을 이룰 수 있게 하였다.

河伯何曾見娶妻(하백하증견취처)

愚民無識被巫斯(우민무식피무사)

一從賢令除疑网(일종현령제의망)

女子安眠不授亏(여자안면부수우)

업도의 민심을 안정시킨 서문표는 업도의 지형을 상세하게 살펴 장수가 흐를 수 있는 곳을 정하여 백성들을 동원하여 큰 물길을 파도록 하였는데 모두 12 군데가 되었다. 이어서 장수의 물을 새로 판 물길로 끌어들이자 장수의 물살이 완만하게 되었다. 다시 물길의 앞쪽에다 전답을 일구게 한 후에 그 물을 끌어들여 잠기게 하니 그 후로는 가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윽고 벼농사가 잘되어 그 수확이 두 배나 늘어나게 되었다. 백성들은 모두 즐거운 마음이 되어 생업을 열심히 했다. 오늘날도 임장현(臨漳縣)에 가면 서문거(西門渠)라는 관개시설이 있는데 바로 서문표가 미신을 타파한 후에 백성들을 위해 굴착한 구거(溝渠)다.

10. 專取其才 不考其行(전취기재 불고기행)

- 행실을 따지지 않고 재능을 취해 오기를 임용하다. -

문후가 서문표의 소식을 듣고 적황을 향해 말했다.

「과인이 경의 말을 듣고 악양을 채용하여 중산국을 정벌할 수 있었고 다시 서문표를 업 땅의 태수로 보냈더니 업 땅이 잘 다스려지게 되었소. 두 사람이 모두 자기의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여 과인이 두 사람으로부터 크게 힘을 얻었소. 요즈음 우리 위나라의 서쪽 변경의 땅인 서하가 섬진(陝秦)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목에 있어 내가 심히 우려하고 있는데 이곳을 방어할 만한 마땅한 사람이 있겠소?」

적황이 잠시 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어 말했다.

「신이 천거할 사람이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은 오(吳)이고 이름은 기(起)라고 하는 사람인데 가히 장군의 재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노나라에서 도망쳐와 우리 위나라에 머물고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속히 불러 장군으로 쓰시기 바랍니다. 만약 지체했다가는 다른 나라로 가서 장군이 되면 우리 위나라의 큰 화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기라는 사람은 자기의 부인을 죽여 노나라의 장수가 된 자가 아닌가? 내가 알기로는 그는 재물을 탐하고 여자를 밝히며 성격은 반복무상하고 잔인하다고 하는데 내가 어찌 이런 자를 불러 장수로 삼을 수 있겠는가?」

「신이 오기라는 사람을 천거하는 l이유는 그의 재능을 취하여 주군께서 공업을 이루시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평소의 소행으로 재능 있는 사람을 쓰지 않으시겠다고 하시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번 불러 그를 시험해 보겠소.」

<제 86회로 계속>

주석

①왕성(王城)/ 동주의 도성이었던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 서쪽 약 10키로 되는 지금의 자간향(磁澗鄕) 부근을 말한다.

②공(鞏)/ 지금의 하남성 공의시(鞏義市) 부근

③세 왕조란 하은주(夏殷周) 삼대를 말하며 구정(九鼎)은 하나라를 세운 우임금이 만들어 전국(傳國)의 보기로 삼았다.

④전문/ 전국 때 전문(田文)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이 셋이 있다. ①전국 사군자 중의 한 사람인 설공(薛公) 맹상군(孟嘗君)의 이름이다. ②위문후가 제후로 승인 받기 위해 주왕에게 사자로 보낸 사람으로 위무후(魏武侯: 재위 기원전 396-370년) 때 오기(吳起)와 재상의 자리를 놓고 언쟁을 벌려 설복시킨 위나라 재상이다. ③세 번째 사람은 위무후의 손자 위양왕(魏襄王: 재위 기원전 334-319년) 때 재상을 지낸 위문자(魏文子) 전문(田文)을 말한다. 여기서는 위무후 때의 전문을 말한다.

⑤공중련(公仲連)/ 전국 때 조나라의 대신. 조열후(趙列侯 : 재위 기원전 408년-387년) 때 재상이 되었다. 열후가 음악을 좋아하여 가인(歌人)에게 전답 만무(萬畝)를 하사하라고 공중련에게 명했다. 그는 우축(牛畜), 순흔(荀欣), 서월(徐越) 등 세 사람의 현인을 천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설득하게 하여 열후의 명을 취소하도록 했다. 그는 조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현인을 임용하고 근검절약하여 재정을 충실하게 함으로써 내정의 개혁을 이루어냈다. 사기(史記) 조세가(趙世家) 참조.

⑥협루(俠累)/ 위(衛)나라 복양(濮陽) 사람으로 한(韓) 씨에 이름은 괴(傀)다. 일찍이 친구이며 부자인 엄중자(嚴仲子)의 도움으로 한나라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후에 자신을 박대한 협루의 태도에 격분한 엄중자 협객 섭정(聶政)을 시켜 살해했다. 자세한 내용은 사기(史記) 자객열전(刺客列傳)과 본서 86회 참조

⑦중모(中牟)/ 지금의 하남성 학벽시(鶴壁市) 서

⑧평양(平陽)/지금의 산서성 임분시(臨汾市) 서쪽에 있던 고을. 분수(汾水)의 중류(中流) 강안(江岸)에 있었다.

⑨9)안읍(安邑)/ 전국 때 위나라가 처음으로 정한 도읍으로 지금의 산서성 하현(厦縣)일대.

⑩순류(純留)/ 삼가(三家)의 수장들이 당진의 정공(定公)을 강도(絳都)에서 옮겨 가 살게 한 곳은 지금의 산서성 장치시(長治市) 북쪽의 둔류(屯留)다. 즉 순류(純留)는 둔류를 말한다.

⑪서하(西河)/ 지금의 섬서성 지역으로써 황하의 서안을 가리킴. 춘추시대 때 당진의 영토였다가 전국시대로 바뀌면서 위(魏)나라의 땅이 되었다가 진효공(秦孝公) 때 상앙의 활약으로 섬진(陝秦)의 영토가 되었다.

⑫우인(虞人)/ 산림과 정원의 관리를 책임지던 하급 관리

⑬곡구(穀邱)/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洛陽市) 경내의 서쪽에 있던 곡성(穀城) 부근의 땅을 가리킴.

⑭志士不飮盜泉之水, 廉子不授嗟來之食

⑮백양관(白羊关) : ‘천하제이관“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관으로 춘추 때인 기원전 770년에 晉나라가 설치했다. 지금의 산서성 오대현(五台县) 백양촌(白羊村)에 설치한 관으로 태항산을 넘어 진나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요새지다. 백양관과 하북성의 석가장과는 약 80키로 거리다.

⑯고성(顧城)/ 지금의 하북성 성도인 석가장시(石家莊市)와 동북쪽의 보정시(保定市) 사이의 중간인 정현(定縣)에 있었던 중산국의 도성(都城).

⑰영수(靈壽)/ 지금의 하북성 평산현(平山縣) 경내로써 하북성의 성도인 석가장시(石家庄市) 서북 약 20키로에 있음. 악양(樂陽)이 중산국(中山國)을 정벌하여 멸망시킨 해는 위문후(魏文侯) 재위 19년 기원전 406년의 일이며 중산국은 후에 기원전 378년에 다시 복국하여 그 도읍을 영수(靈壽)로 옮겼다.

⑱수양산의 두 선비/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말한다. 주무왕(周武王)에게 은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만류했으나 무왕이 듣지 않고 은나라를 공격하여 멸하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무왕의 곁을 떠나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

⑲업(鄴)/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북쪽의 고을로 조나라와의 접경지역이다.

⑳상당(上党)/ 원래 춘추 후기 당진국(唐晉國)이 설치한 군으로 태항산을 중심으로 동서의 땅과 하남성 북쪽 지방을 관할했다. 후에 한위조(韓魏趙) 삼가가 당진국을 삼분하여 독립할 때 상당군도 세 나라에 각각 분할되어 각기 상당군이 설치되었다. 후에 진나라의 압박을 받아 본국과 연락이 끊어진 한나라의 상당군 태수가 관하의 성읍을 들어 조나라에 항복하자 상당군을 사이에 두고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전국시대 가장 큰 전쟁인 장평전투가 벌어졌다. 장평전투에서 진나라는 조나라의 항복한 군사 40만 명을 갱살했다.

[평설]

전편 84회의 내용은 한위조 삼가가 지백과 그 종족들을 진양성 싸움에서 멸하고 그 땅을 삼분하여 당진의 국권을 차지하게 된 계기가 된 기원전 453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진양성 싸움에서 멸족한 지백의 모사였던 예양이 조양자를 암살하ㅇ 지백의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하고 그 뒤를 이어 조양자가 죽은 해는 진양성 싸움 이래 23년 만인 기원전 425년이다. 본회의 주인공인 위문후 사(斯)는 기원전 424년에 위후의 자리에 올랐으나 이 때에도 당진의 한위조 삼가는 주천자로부터 제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전국초기 위(魏)나라의 군주 위문후(魏文侯)는 원대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군주였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의 작자 풍몽룡은 그 기간 동안 그를 가장 위대하고 유능한 군주였다고 평가한 이유로써 당시의 역사적 사조에 순응하여 선비를 공경했다는 점이다. 기원전 445년 군주에 자리에 오른 이래 일단의 정치와 군사 양쪽에 방면에 유능한 인사들을 대거 초빙했다. 그 인사들이란 복자하(卜子夏),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 이극(李克), 서문표(西門豹), 오기(五紀), 악양(樂陽) 및 임좌(任座) 등이었다. 그 일단의 인재들은 위나라의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풍조를 일으켜 부국강병을 이룩했다. 또한 위문후는 한(韓)과 조(趙) 두 나라와의 친선을 유지하면서 연합하여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여 전국시대 초기 혁혁한 업적을 이룩했다.

위나라 영토는 중원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의 섬서성 황하 서안, 그리고 위수(渭水)의 남안, 산서성 서남과 동남, 하남성의 황하 북부와 남안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진(秦), 조(趙), 한(韓), 정(鄭), 초(楚), 제(齊), 위(魏), 송(宋) 등의 나라와 국경을 접했다.

위문후는 여러 제후국들 중 가장 먼저 변법을 시행하여 국가의 모든 면에서 혁신을 이루어냈다. 그는 이극(李克)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정치를 개혁시켰고, 서문표를 업(鄴)의 태수로 보내 미신을 타파하고 장수(漳水)의 물을 끌어들이는 수리시설을 건설하여 농산물의 생산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

『서문표가 교묘한 방법으로 하백에게 여자를 보낼지를 물어보게 했다.』의 편은 개혁가 서문표의 지혜와 함께 당시 위나라가 시행한 사회개혁의 한 단면을 보여준 역사적인 사례다.

한편 위나라의 군사제도는 오기의 책임 하에 개혁되었다. 오기는《무졸제(武卒制)》란 제도를 도입했다. 군사들의 선발, 훈련과 고과를 엄격하게 행하고, 평시에 군사들의 특기를 살폈다가 서로 다른 특기를 소유하고 있는 군사들을 한 조로 편성하여 훈련시켰다. 후에 전쟁이 일단 벌어지면 각각의 특기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여 군대의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변법을 행하여 사회를 혁신시킨 결과 국력이 강성해진 위나라는 기원전 413년부터 408년까지 6년에 걸쳐 진나라의 동쪽지역의 5개 성을 차례로 점령하고 서하군(西河郡)을 세웠다. 《사기(史記)ㆍ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오기가 서하군 태수가 되자 진나라는 감히 동쪽을 향해 나오려고 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다.』라고 했다. 그리고 위나라는 북쪽으로는 조나라를 건너 원정군을 보내 기원전 408년부터 406년까지 2년에 걸쳐 중산국을 공격하여 멸하고 병탄했다.

『중산국에서 보내온 인육탕을 들이킨 악양자』 편은 위나라의 중산국 정벌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이야기다. 본편은 또한 위문후의 인재를 발굴하고 임용하는 고귀한 품성을 반영했다.

중산국을 정벌하는 과정 중, 시기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일단의 인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문후에게 악양을 참소했다. 그 와중에 결국 악양(樂陽)이 개선하고 돌아오자 위문후는 상자 한 개를 몰래 그에게 보냈다. 상자 안에 있던 문서를 읽어 본 악양은 위문후의 절대적인 신임에 감동했다. 만약 위문후가 중신들의 참소를 믿었다면, 충성스러웠던 악양은 아마도 원정군의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살해 되었고, 그 결과 중산국도 점령하지 못해 공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인재를 등용하는 나라는 강해지고, 인재를 무시하는 나라는 쇠퇴한다.』《순자(荀子)ㆍ의병편(議兵篇)》에 위문후야 말로 이 도리를 깊이 깨닫고 있었던 명군이라고 했다. 인재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인재가 처한 상황을 반드시 이해하고 일단 일을 맡기면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결코 의심하면 안 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 인재는 내부 투쟁에서 상처를 입고 사라질 것이고, 그 결과 위나라가 칭패(稱覇)를 위해 수행했던 대외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지백의 모사였던 예양이 조양자를 암살하려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살하고 조양자도 그 뒤를 이어 죽은 해는 진양성 싸움 이래 23년 만인 기원전 425년이다. 본회의 주인공인 위문후 사(斯)는 기원전 424년에 위후의 자리에 올랐으나 이 때에도 당진의 한위조 삼가는 주천자로부터 제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전국초기 위(魏)나라의 군주 위문후(魏文侯)는 원대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군주였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의 작자 풍몽룡은 그 기간 동안 그를 가장 위대하고 유능한 군주였다고 평가한 이유로써 당시의 역사적 사조에 순응하여 선비를 공경했다는 점이다. 기원전 445년 군주에 자리에 오른 이래 일단의 정치와 군사 양쪽에 방면에 유능한 인사들을 대거 초빙했다. 그 인사들이란 복자하(卜子夏),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 이극(李克), 서문표(西門豹), 오기(五紀), 악양(樂陽) 및 임좌(任座) 등이었다. 그 일단의 인재들은 위나라의 구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풍조를 일으켜 부국강병을 이룩했다. 또한 위문후는 한(韓)과 조(趙) 두 나라와의 친선을 유지하면서 연합하여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여 전국시대 초기 혁혁한 업적을 이룩했다.

위나라 영토는 중원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의 섬서성 황하 서안, 그리고 위수(渭水)의 남안, 산서성 서남과 동남, 하남성의 황하 북부와 남안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진(秦), 조(趙), 한(韓), 정(鄭), 초(楚), 제(齊), 위(魏), 송(宋) 등의 나라와 국경을 접했다.

위문후는 여러 제후국들 중 가장 먼저 변법을 시행하여 국가의 모든 면에서 혁신을 이루어냈다. 그는 이극(李克)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정치를 개혁시켰고, 서문표를 업(鄴)의 태수로 보내 미신을 타파하고 장수(漳水)의 물을 끌어들이는 수리시설을 건설하여 농산물의 생산을 획기적으로 증대시켰다.

『서문표가 교묘한 방법으로 하백에게 여자를 보낼지를 물어보게 했다.』의 편은 개혁가 서문표의 지혜와 함께 당시 위나라가 시행한 사회개혁의 한 단면을 보여준 역사적인 사례다.

한편 위나라의 군사제도는 오기의 책임 하에 개혁되었다. 오기는《무졸제(武卒制)》란 제도를 도입했다. 군사들의 선발, 훈련과 고과를 엄격하게 행하고, 평시에 군사들의 특기를 살폈다가 서로 다른 특기를 소유하고 있는 군사들을 한 조로 편성하여 훈련시켰다. 후에 전쟁이 일단 벌어지면 각각의 특기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여 군대의 전투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변법을 행하여 사회를 혁신시킨 결과 국력이 강성해진 위나라는 기원전 413년부터 408년까지 6년에 걸쳐 진나라의 동쪽지역의 5개 성을 차례로 점령하고 서하군(西河郡)을 세웠다. 《사기(史記)ㆍ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에 『오기가 서하군 태수가 되자 진나라는 감히 동쪽을 향해 나오려고 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다.』라고 했다. 그리고 위나라는 북쪽으로는 조나라를 건너 원정군을 보내 기원전 408년부터 406년까지 2년에 걸쳐 중산국을 공격하여 멸하고 병탄했다.

『중산국에서 보내온 인육탕을 들이킨 악양자』 편은 위나라의 중산국 정벌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이야기다. 본편은 또한 위문후의 인재를 발굴하고 임용하는 고귀한 품성을 반영했다.

중산국을 정벌하는 과정 중, 시기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일단의 인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문후에게 악양을 참소했다. 그 와중에 결국 악양(樂陽)이 개선하고 돌아오자 위문후는 상자 한 개를 몰래 그에게 보냈다. 상자 안에 있던 문서를 읽어 본 악양은 위문후의 절대적인 신임에 감동했다. 만약 위문후가 중신들의 참소를 믿었다면, 충성스러웠던 악양은 아마도 원정군의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살해 되었고, 그 결과 중산국도 점령하지 못해 공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인재를 등용하는 나라는 강해지고, 인재를 무시하는 나라는 쇠퇴한다.』《순자(荀子)ㆍ의병편(議兵篇)》에 위문후야 말로 이 도리를 깊이 깨닫고 있었던 명군이라고 했다. 인재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인재가 처한 상황을 반드시 이해하고 일단 일을 맡기면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결코 의심하면 안 되는 행위를 의미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 인재는 내부 투쟁에서 상처를 입고 사라질 것이고, 그 결과 위나라가 칭패(稱覇)를 위해 수행했던 대외 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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