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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 13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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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13. 백기․왕전(白起王翦)

1104. 南拔鄢郢(남발언영),

남쪽으로는 초나라의 도성 영도(郢都)를 함락시키고

1105. 北摧長平(북최장평),

북쪽으로는 장평에서 조나라 군사 40만을 몰살시켰으며

1106. 遂圍邯鄲(수위한단),

이어서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할 수 있었던 일은

1107. 武安爲率(무안위솔);

모두가 무안군 백기가 지휘해서 이루어졌다.

1108. 破荊滅趙(파형멸조),

또한 초나라와 조나라를 멸하여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음은

1109. 王翦之計(왕전지계),

왕전의 계책에 따랐기 때문이었다.

1110. 作<白起王翦列傳>第十三.(작<백기왕전열전>제십삼)

이에 <백기왕전열전>제십삼을 지었다.

백기(白起)

1. 戰必勝攻必取,戰神白起

-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한 전신 백기 -

백기(白起)는 미(郿) 출신이다. 용병에 능해 진소왕(秦昭王 )을 모셨다. 진소왕 13년 기원전 294년, 진나라의 좌서장(左庶長)이 된 백기는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의 신성(新城)을 공격했다. 그 해에 양후가 진나라의 상국이 되어 임비(任鄙)1)를 천거하여 한중의 태수로 삼았다. 그 다음 해, 좌경(左更)으로 작위가 오른 백기는 이궐(伊厥)에서 한(韓)과 위(魏) 두 나라 연합군을 격파하여 그 군사 24만의 목을 베었다. 다시 위나라 장수 공손희(公孫喜)를 사로잡고 5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백기는 그 공으로 작위가 국위(國尉)로 올랐다. 계속해서 하수를 건너 한나라의 안읍(安邑) 이동의 한나라 땅으로 진출하여 건하(乾河)에 이르렀다. 다음 해, 다시 대양조(大良造)로 오른 백기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크고 작은 61개 성을 함락시켰다.2) 。다음 해 객경 사마조(司馬錯)와 함께 위나라의 원성(垣城)을 공격하여 함락했다. 다시 5년 후에 조나라를 공격하여 광랑성(光狼城)을 함락시켰다. 계속해서 7년 되는 해에 백기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그 도성 영(郢)과 등(鄧)을 함락시키고 초나라 역대왕들의 분묘가 있는 이릉(夷陵)을 불태웠다. 그 다음 해 다시 초나라의 동쪽으로 진격하여 경릉(竟陵)에 이르렀다. 초왕은 영(郢)을 버리고 도망쳐 동쪽의 진(陳)으로 도읍을 옮겼다. 진나라는 이로써 초나라의 도읍지였던 영(郢)에 남군(南郡)을 설치했다. 백기는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진나라는 그 공로로 백기를 무안군에 봉했다. 초나라의 도성 영을 점령하고 무군(巫郡)과 검중군(黔中郡)을 평정했음으로 무안군이라는 봉호를 내린 것이다.

진소왕 34년 기원전 273년 백기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화양(華陽)을 함락시키자 위장 망묘(芒卯)는 패주했다. 백기는 계속해서 세 명의 위나라 장수를 사로잡고 병졸 13만 명의 목을 벴다. 조나라 장수 가언(賈偃)과 싸워 그 군사 2만 명을 황하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소왕 43년 기원전 264년, 백기라 한나라이 형성(陘城)을 공격하여 그 주위의 성 5개를 함락시키고 한나라 군사 5만 명의 목을 벴다.

진소왕 44년 기원전 263년, 백기가 남양(南陽)으로 나아가 태항산으로 통하는 길을 끊었다.

2. 長平大戰 坑殺降卒(장평대전 갱살항졸)

- 장평대전에서 항복한 조나라의 항복한 군사 40만 면을 구덩이에 푸 묻어 죽이다. -

진소왕 45년 기원전 262년, 한나라의 야왕성(野王城)을 공격하자 야왕의 수장이 진나라에 항복했다. 이에 한나라 본국과 상당군이 통하는 길이 끊겼다. 상당의 태수 풍정(馮亭)이 그 백성들과 계책을 의논하며 말했다.

「신정(新鄭)으로 통하는 길이 끊겼으니 한나라는 틀림없이 우리를 그들의 백성들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진나라 군사가 며칠이면 이곳으로 진군해 오면 그때 한나라는 구원군을 보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 상당의 땅을 조나라에 바쳐야겠다. 조나라가 만약 이곳 상당의 땅을 받아들인다면 진노한 진나라는 틀림없이 조나라를 공격할 것이다. 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되는 조나라는 필시 한나라와 친선을 맺어 같이 대항하려고 할 것이다. 한과 조 두 나라가 한 마음이 되어 진나라에 대항한다면 진나라의 군사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풍정은 사자를 조나라에 보내 상당군의 사정을 알리고 그 땅을 들어 바치겠다고 했다. 조효성왕이 평양군(平陽君)과 평원군(平原君) 등을 불러 계책을 의논했다. 평양군이 먼저 말했다.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상당군의 땅을 받게 되면 얻는 이익보다 더 큰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평원군이 말했다.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았음에도 한 개의 군에 해당하는 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받아들이십시오.」

그래서 조나라는 한나라의 상당군 땅을 접수하고 풍정을 화양군(華陽君)에 봉하고 상당군을 계속 다스리도록 했다.

  진소왕 46년 기원전 261년, 진나라가 한나라의 구지(緱氏)와 인(藺)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진소왕 47년 기원전 260년, 진나라가 좌서장 왕흘(王齕)을 시켜 한나라를 공격하여 상당을 점령하도록 했다. 상당의 백성들이 조나라로 달아났다. 조나라가 군사를 장평(長平)으로 진군시켜 상당의 백성들을 진무했다. 4월 왕흘이 조나라 군대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염파를 대장으로 삼아 장평으로 보냈다. 조군의 공격을 받은 진군의 척후병들이 반격하여 조군의 비장 가(茄)를 참했다. 6월 진군이 조나라의 진채를 공격하여 두 곳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도위 4명을 죽였다. 7월 조군이 높은 루벽을 쌓아 굳게 지켰다. 진나라가 다시 조군의 루벽을 공격하여 도위 2명을 죽이고 그들이 지키던 루벽의 서쪽 진지를 점령했다. 염파가 여전히 루벽에 의지해서 굳게 지키자 진나라가 수차에 걸쳐 도전했으나 조군은 응전하지 않았다. 조왕이 듣고 여러 번 사자를 보내 진군과 싸움을 피한 염파를 비난했다. 그러자 진나라 상국 응후(應侯) 범수(范睢)는 사람을 조나라에 보내 천금의 돈으로 반간계를 펼쳤다. 그 사람이 말했다.

「진나라가 두려워하는 일은 오로지 마복군(馬服君) 조사(趙奢) 장군의 아들 조괄(趙括)을 조군의 대장으로 임명하는 것이다. 염파는 싸우기 쉬운 상대라 조만간에 그는 싸움에 지고 우리 진나라에 항복할 것이다.」

그때 진군과의 싸움에서 여러 번에 걸쳐 지고 많은 군사를 잃었을뿐만 아니라 반격을 하지 않고 루벽에만 굳게 의지한 채 싸움에 응하지 않은 염파의 작전에 분노한 조효성왕은 진나라의 반간계에 현혹되어 염파를 파면하고 조괄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진군을 공격하도록 했다. 마복군의 아들이 조군의 대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진나라는 비밀리에 무안군 백기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왕흘을 그의 부장(副將)으로 삼은 후에 만일 군중에 무안군이 대장이 된 사실을 발설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형에 처하겠다는 군령을 내렸다. 조괄이 조나라 군영에 당도하자 그 즉시 군사를 이끌고 보루를 나가 진나라 진영을 공격했다. 진나라 군사들은 거짓으로 싸움에 패하는 척하며 달아나면서 별도의 기병(奇兵) 두 부대를 매복시켜 조나라 영채를 기습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조군은 승세를 타고 진군을 추격하여 진군이 건설한 루벽에 당도했다. 그러나 진군의 루벽도 역시 견고해서 결코 돌파할 수 없었다. 그때 진나라가 매복시킨 2만 5천에 달하는 2대의 기병이 일어나 조나라 군사의 퇴로를 차단하고 다시 5천의 기마병으로 구성된 부대는 조군과 영채 사이의 통로를 봉쇄하여 양도를 끊었다. 이로써 조나라 군대는 2대로 분리되어 양도가 끊기게 되었다. 그 기회를 이용한 진군의 경기병이 조나라 진지를 공격했다. 조군은 싸움에 패하고 루벽을 쌓아 굳게 지키며 본영으로부터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조군의 양도를 끊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진왕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하내(河內)의 백성들에게 각기 일급의 작위를 올린 후에 15세 이상의 장정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장평으로 보내 조나라가 조군에게 보내는 식량의 보급을 끊었다.

9월 조나라 군사들이 식량을 보급 받지 못한지가 이미 46일이 지나자 군영 내의 병사들은 서로 죽여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윽고 진나라 루벽을 공격하여 포위망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조군을 모두 4대로 나주어 4-5 차례나 반복해서 시도했으나 결코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조군 대장 조괄이 다시 정예병을 차출하여 스스로 선두에 서서 싸움을 독려했다. 진군이 선두의 조괄을 활을 쏘아 사살하자 조군은 싸움에서 패하고 40만에 달하는 조나라 군사들은 모두 무안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조나라 항졸들의 처리에 대해 무안군은 생각했다.

「예전에 진나라가 상당군을 함락시켰지만 상당의 백성들은 진나라를 싫어하여 조나라에 투항했다. 그들을 살려 돌려보내주게 되면 다시 조나라의 군사가 될 것이니 모두 죽이지 않는다면 후에 군중에 변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백기는 조나라의 항졸들을 생환시켜준다고 속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단지 나이 어린 240명만을 살려서 조나라에 돌려보냈다. 백기는 전후로 항복한 조나라의 45만에 달하는 군사들을 모두 살해했다. 소식을 듣게 된 조나라의 상하는 모두 경악했다.

3. 范睢循私 白起積怨(범수순사 백기적원)

- 범수가 사심을 품고 조나라와 강화를 맺자 원한을 품은 백기 -

  진소왕 48년 10월 상당군을 평정한 진나라가 진군을 2대로 나누어 조나라로 진군시켰다. 왕흘의 군사는 피뢰(皮牢)를 공격하여 점령했으며 사마경(司馬梗)의 부대는 태원(太原)을 점령했다. 진나라의 공격을 두려워한 한과 조 두 나라는 소대(蘇代)에게 후한 폐물을 주어 진나라 상국 범수에게 유세하도록 시켰다. 범수를 찾아간 소대가 말했다.

「무안군이 조나라의 대장으로 임명된 마복군의 아들을 싸움에서 죽인 사실을 아시고 계십니까?」

「알고 있소.」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은 다른 왕들 위에 군림하는 천자가 될 것이고 무안군은 삼공(三公) 중의 한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무안군은 진나라를 위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70여 개의 성을 점령했으며 남쪽으로는 또한 언(鄢), 영(郢) 및 한중(漢中)의 땅을 평정했으며 북쪽으로는 조괄이 이끌던 조나라 군사 45만 명을 몰살시켰습니다. 비록 주나라를 창업하여 삼공에 임명된 주공(周公), 소공(召公) 및 여망(呂望)도 미치지 못할 공업입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은 천자가 되고 무안군은 삼공에 임명될 것인데 대감께서는 능히 그 보다 낮은 자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비록 대감께서 그의 밑으로 들어가고 싶으신 생각이 없다고 해도 그렇다고 그렇게 되겠습니까? 옛날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형구(邢丘)를 공격하여 상당을 위태롭게 했을 때 상당의 백성들은 모두 진나라에 반하여 조나라로 귀의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진나라를 싫어하게 된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조나라가 망하면 북쪽의 땅은 연나라가, 동쪽의 땅은 제나라가, 남쪽의 땅은 한과 위 두 나라의 차지하게 되니 대감께서 얻을 수 있는 백성의 수효는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따라서 지금의 기회를 이용하여 조나라로부터 그들의 땅을 할양받고 무안군이 공을 세우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응후 범수가 그 말으 듣고 진소왕을 접견하고 말했다.

「오랜 시간에 걸친 병역으로 우리 진나라 군사들이 지쳐있음으로 차라리 한과 조 두 나라에게 땅을 요청하고 강화를 맺어 군사들을 쉬게 하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소왕이 번수의 말을 쫓아 한나라에게는 원옹(垣雍)의 땅을, 조나라부터는 6개의 성을 할양받고 강화를 맺었다. 다음 해 정월, 진나라는 군사를 철수시켜 해산시켰다. 백기는 조나라를 멸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강화를 맺은 것은 범수의 계략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기는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다.

4. 僞稱重病 拒不受命(위칭중병 거불수명)

- 중병을 핑계로 왕의 명을 받들지 않다. -

그해 9월 진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오대부(五大夫) 왕릉(王陵)을 대장으로 삼아 조나라의 한단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때 무안군 백기는 몸에 병이 들었음으로 출전할 수 없었다. 진소왕 49년 기원전 258년 정월 왕릉이 한단성을 공격했으나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진나라가 지원군을 더 보내 왕릉을 돕도록 했으나 왕릉은 오히려 군사를 잃고 교위(校尉) 5명을 잃었다. 그때 무안군이 병이 완쾌되었음으로 진소왕은 그를 왕릉 대신 조나라 정벌군 대장으로 삼으려고 했다. 무안군이 진소왕에게 말했다.

「한단성은 원래 공략하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진나라에 오랫동안 원한을 품어온 제후들이 한단성을 구하기 위해 원군을 보낼 것입니다. 또한 진나라가 장평에서 조군을 격파했지만 진나라의 군사들도 절반에 이르도록 그 군사를 잃어 지금 진나라 국내도 텅텅 빈 상태입니다. 진나라는 하천과 산으로 끊긴 먼 길을 행군하여 다른 나라의 국도를 빼앗으려고 한 반면에 조나라는 안에서 내응하고 제후들은 밖에서 우리 진군을 공격하니 진나라 군사는 필시 싸움에서 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조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절대 불가합니다.」

그러나 진왕이 듣지 않고 왕명으로 백기의 출전을 명했으나 백기는 받들지 않았다. 다시 진왕은 상국의 신분인 응후 범수를 자사로 보내 출전을 종용하도록 했으나 무안군은 사양하며 결코 명을 받들지 않고 이내 칭병했다.

  진소왕은 할 수 없이 왕릉을 파면하고 왕흘(王齕)을 대장으로 삼았다. 왕흘은 8-9월에 걸쳐 한단을 포위하고 공격을 감했으나 결코 함락시킬 수 없었다.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과 위나라 공자 신릉군(信陵君) 무기(無忌)가 수십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군의 배후를 공격하자 진나라는 많은 군사를 잃었다. 무안군이 듣고 말했다.

「나의 말을 듣지 않더니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진소왕이 듣고 대노하여 강제로 무안군으로 하여금 왕명을 받들도록 했으나 무안군은 계속 자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응후 범수가 몸소 찾아가 청했지만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진소왕은 무안군의 작호를 면하여 사졸의 대오에 넣은 후에 음밀(陰密)이라는 곳으로 옮겨가 살도록 했다. 그러나 몸에 병이 난 무안군은 명령을 따르지 못했다. 그러기를 3개월이 지났을 때 제후들의 군사들이 진군을 매우 세차게 공격하자 진나라 군사들은 여러 차례 퇴각을 거듭하며 사자를 매일 보내왔다.

5. 杜郵爲戮(두우위륙)

- 두우(杜郵)에서 사사(賜死)되다. -

진왕이 다시 사람을 보내 백기를 음밀로 떠나라고 재촉하자 벽기는 결국 함양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무안군이 아픈 몸임에도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함양의 서문을 나와 10리 되는 두우(杜郵)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진소왕은 응후 범수와 신하들이 의논하는 것을 들었다.

「유배지로 가는 백기가 앙앙불락하면서 많은 말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진소왕이 듣고 사자에게 검을 주어 보내 백기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고 명했다. 무안군이 그 검을 받아들고 한탄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어 이렇게 죽어야한단 말인가?」

그러다가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말했다.

「나는 마땅히 죽어야 하는 몸이다. 장평에서의 싸움에서 조나라의 항졸 40여 만 명을 속여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으니 그 죄값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말을 마친 무안군을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죽었다. 그때가 진소왕 50년 기원전 257년 11월의 일이었다. 백기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불쌍하게 여긴 진나라 사람들이 그의 고향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왕전(王翦)

1. 滅趙逐燕(멸조평연)

- 조나라를 멸하고 연나라를 요동으로 쫓아내다. -

왕전은 빈양(頻陽) 동향(東鄕)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병사의 일을 좋아한 왕전은 진시황을 모셨다. 시황 11년 기원전 236년 왕전은 진군의 장수가 되어 조나라의 연여(閼與)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주위의 성 9개를 점령했다. 진시황 18년 기원전 229년 왕전이 조나라를 공격하여 1년여 만에 조나라 수도 한단을 함락시키고 조왕의 항복을 받았다. 조나라의 전 영토를 평정한 왕전은 그 땅을 진나라의 군현으로 만들었다. 다음 해인 기원전 228년, 연나라가 형가(荊軻)를 시켜 진왕을 암살하려고 했다. 이에 진시황이 왕전을 시켜 연나라를 공격하여 그 원수를 갚고자 했다. 연왕 희(喜)는 견디지 못하고 요동으로 달아나고 왕전은 연나라의 도성 계성(薊城)을 평정하고 귀환했다. 진시황은 왕전의 아들 왕분을 장군으로 삼아 형(荊)을 정벌하게 했다. 왕분은 형의 군사를 격파하고 귀환 중에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왕의 항복을 받고 위나라의 전 영토를 평정했다.

2. 왕전논병(王翦論兵)

- 왕전이 병사의 일을 논하다. -

  진시황은 삼진을 멸하고 연왕을 요동으로 몰아냈으며 또한 수차에 걸쳐 초나라의 군사를 격파했다. 진나라 장수 이신(李信)은 젊고 용기가 있었다. 일찍기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의 태자 단(丹)을 연수(衍水)의 강안까지 추격하여 연군을 격파하고 단의 목을 취한 바가 있었다. 이에 진시황은 이신을 용감하고 현능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진시황이 이신에게 물었다.

「내가 초나라를 공략하여 취하고자 하는데 장군의 생각에 얼마의 병력이면 가능하겠는가?」

이신이 대답했다.

「20만의 병력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시황이 다시 왕전에게 묻자 왕전이 대답했다.

「60만의 병력이 아니면 불가합니다.」

시황이 왕전을 보고 말했다.

「왕장군은 이제 늙었구려! 어찌 이리 겁이 많아졌소?」

진시황은 이신을 대장으로 삼아 20만의 군사를 주어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했다. 왕전은 자기의 말이 쓰이지 않게 되자 병이 들었다는 핑계를 대고 현직에서 물러나 고향 빈양으로 들어가 노년을 보냈다.

진나라의 대장군이 된 이신은 평여(平與)3)를, 부장(副將) 몽염(蒙恬)은 침(寢)4)를 각각 공격하여 초군을 크게 이겼다. 이신이 남진하여 언(鄢)과 영(郢)을 함락시키고 계속해서 진로를 서쪽으로 돌려 초나라의 수도를 향해 진군하여 몽염의 군사들과 성보(城父)에서 집결하기로 했다. 초군이 이신의 뒤를 추격하여 3일 밤낮을 싸워 진군을 깨뜨리고 진군의 양쪽 성루를 점령하고 도위 7명을 살해했다. 진군은 결국 패주했다.

진군의 패전 소식을 들은 진시황이 대노하여 그 즉시 수레를 몰아 빈양으로 달려가 왕전에게 사죄했다.

「과인이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아 이신이 과연 우리 진군을 욕보였소. 오늘 들으니 초나라 군사들이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서진하고 있다고 하니 장군께서 비록 병중이기는 하지만 어려움을 당한 과인을 외면하지 말기 바라오.」

왕전이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이미 몸이 늙고 병들어 정신이 혼미합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현능한 장군을 택하여 중임을 맡기기 바랍니다.」

진시황이 사죄하며 말했다.

「내가 이미 마음을 굳혔으니 장군은 더 이상 사양하는 말을 하지 마시오.」  

그러자 왕전이 진시황을 향해 말했다.

「대왕께서 반드시 신을 쓰려고 하신다면 60만 명의 군사를 주시기 바랍니다.」

진시황이 말했다.

「장군의 말대로 따를 뿐이오.」5)

3. 구전문사(求田問舍)

- 전답을 구하여 진왕을 안심시키고 60만 대군을 휘몰아 초나라를 정벌하다.

그래서 왕전은 60만 명의 군사를 얻어 초나라 원정길에 올랐다. 진시황이 왕전을 파상(灞上)까지 나와 왕전을 전송했다. 왕전이 출전하면서 진시황에게 좋은 전답과 저택, 저수지가 딸린 윈림을 매우 심할 정도로 크게 청했다. 시황이 듣고 약속했다.

「장군이 원정을 나가면서 어찌 가난을 걱정하시는 것이오?」

「대왕을 위해 장수가 되어 전장에서 공을 이루었음에도 후로 봉함을 받지 못하게 되면 신은 단지 시골에서 사는 이름 없는 신하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신은 지금 대왕의 신임을 받은 기회를 이용하여 호수가 딸린 원림을 청하여 자손들에게 물려주려고 해서입니다.」

진시황이 듣고 크게 웃었다. 왕전이 행군을 시작하여 무관(武關)에 이르렀을 때 다시 사자를 진시황에게 보내 약속을 지킬 것을 청하기를 다섯 번이나 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장군께서 청하는 정도가 너무 심하시지 않으십니까?」

왕전이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 무릇 진왕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남을 믿지 않는다. 지금 진나라의 무장한 모든 군사들을 털어 모두 나에게 맡겼다. 내가 많은 전답과 저택을 스스로 청해 자손들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지 않는다면 진왕이 어찌 나를 의심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겠는가?」

4. 이일대로(以逸待勞)

- 초나라 군사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일시에 공격하여 무너뜨리다. -

  이신을 대신한 왕전이 과연 초나라 영내로 진군했다. 왕전이 더 많은 군사로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초나라는 국내의 모든 군사들을 동원하여 진나라 군사를 막으려고 했다. 이윽고 왕전이 초나라 진영에 이르렀으나 보루를 높이 쌓게 하고 굳게 지키기만 할 뿐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초나라 군사들이 출병하여 계속해서 도전했으나 왕전은 결코 군사를 내보내 응전하지 않았다. 왕전은 매일 군사들을 휴식과 목욕을 시키며 좋은 음식을 선무하고 사졸들과 더불어 숙식을 같이하며 친해졌다. 이윽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 왕전이 사람을 시켜 군중에서 사졸들이 무엇으로 소일하고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그 사람이 와서 고했다.

「투석놀이와 높이뛰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왕전이 듣고 말했다.

「이제 사졸들을 부릴 수 있겠다.」

초나라 군사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도전을 했으나 진나라 군사들이 응전을 하지 않았음으로 이내 군사를 물리쳐 동쪽으로 돌아갔다. 이에 왕전이 군사를 일제히 일으켜 그 뒤를 추격하여 장사들로 편성된 별동대를 시켜 공격했다.

초나라 군사들을 대파한 왕전의 진나라 군사들은 기남(蘄南)에 이르러 대장 항연을 살해하고 형군을 패주시켰다. 승세를 탄 진군은 초나라의 성읍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일 년여 만에 초왕 부추(負芻)를 사로잡고 마침내 초나라의 모든 땅을 진나라의 군현으로 삼았다. 왕전은 계속 남쪽으로 진격하여 백월(百越) 지방의 군장들이 지배하고 있던 땅을 점령했다. 한편 왕전의 아들 왕분(王賁)은 장군 이신과 함께 연과 제를 파하고 그 땅을 평정했다. 마침내 진시황 26년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천하를 모두 겸병했다. 겸병 전쟁을 수행 중 왕씨와 몽씨가 많은 공을 세워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진시황이 죽고 이세황제 때는 왕전과 그 아들 왕분은 죽고 없었으고 몽씨 또한 멸족되었으나 진승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진나라는 왕전의 손자 왕리(王離)를 장수로 삼아 조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왕리는 거록성의 조왕과 장이를 포위하고 세차게 공격했다. 어떤 사람이 보고 말했다.

「왕리는 진나라의 명장 집안 출신이다. 지금 강한 진나라 군사들의 장수가 되어 새로 생긴 조나라를 공격하고 있으니 필시 왕리는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사람의 객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아무리 명장 집안이라 할지라도 삼대에 이르게 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싸움을 하면서 많은 상대방 군사들을 죽여 그 후대들은 상서롭지 못한 업을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리는 왕전으로부터 3대에 이르는 장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항우가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진군을 공격할 때 왕리는 싸움에서 패하여 포로가 되고 왕리가 이끌던 진군도 따라서 제후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6. 偸合取容 以至圽身(투합취용 이지몰신)

- 기회에 투합하여 몸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다 헛되이 죽다. -

태사공이 말한다.

옛말에 한 척의 긴 것도 짧을 때가 있고, 한 촌의 짧은 것도 길 때가 있는 법이라고 했다. 백기는 적군을 대할 때는 마치 귀신과 같아 그 변화는 능수능란하고 기묘한 전략은 무궁무진해서 그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지혜도 응후의 화로부터 자신을 구할 수 없었다.

왕전은 진나라의 장군이 되어 육국을 멸해 숙장으로써 진시황에 의해 스승으로 존대받았다. 그러나 진시황을 보좌하여 덕을 쌓아 나라의 근본을 공고하게 하지 못하고 그저 기회에 투합하여 몸을 지키는 데만 급급하다가 결국 몸은 헛되이 죽고 말았다. 이에 그의 손자 왕리는 항우의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사리가 마땅하지 않겠다고 하겠는가? 그 두 사람은 각기 부족한 점이 있었다.

<백기왕전열전 끝>

주석

1) 임비(任鄙)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88년에 죽은 전국시대 진나라의 대력사 출신의 무장이다. 장사였던 진무왕(秦武王)이 힘겨루기를 좋아했음으로 자신을 스스로 천거하여 진무왕의 총애를 받았다. 진소양왕 때 상국 양후(穰侯)가 그를 한중태수로 천거했다. 진나라 사람들은 저리질(樗里疾) 같이 ' 힘에는 임비이고 지혜는 저리'라고 칭했다.

2) 백기가 받든 작위 등급/ 10등급 좌서장(左庶長), 12등급 좌경(左更), 13등급 중경(中更), 14등급 우경(右更),16등급 대양조(大良造), 20위 해당하는 최고의 작위는 철후(徹侯)다.

3)평여(平與)/ 지금의 하남성 평여(平與) 북이다. 평여(平輿)라는 설도 있다.

4)침(寢)/ 지금의 안휘성 임천현(臨泉縣)이다.

5)열국지 107회에 진시황과 왕전의 60만 대군이 필요한지에 대해 이어지는 대화다.

진왕이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옛날 대국은 삼군을 두었고 그 다음에 큰 나라는 이군, 그리고 소국은 일군을 두었으나 싸움이 일어나면 전군을 동원하지 않았음에도 그 수가 부족하지 않았다고 했소. 후에 오패가 일어나 제후들을 위협했을 때도 그 군세는 불과 천승을 넘지 않았으니, 일승을 75인으로 계산해도 그 군사들의 수효는 결코 10만을 넘지 못했소. 그러나 오늘 장군께서 60만의 군사를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니 그렇게 많은 군사들을 동원했다는 전례를 들어보지 못했소.」

왕전이 대답했다.

「옛날에는 싸움을 할 때, 서로 시간을 약속하고 진(陣)을 세우고, 진이 모두 세워지면 싸움으로 돌입했습니다. 또한 행군을 하거나 싸움을 할 때도 모두 일정한 규칙에 따라 행했으며, 중상을 당한 군사들에게는 다시 공격하지도 않았습니다. 상대방의 죄를 성토만 했지 그 영토를 빼앗지 않았으며, 비록 접전을 하던 중이라도 예절을 지키며 양보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제왕(帝王)이 군사를 일으킬 때도 그렇게 많은 군사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제환공이 내정을 일으켜 모은 군사들은 불과 3만 명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번을 바꾸어 가며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열국들이 군사들을 동원하여 서로 다투는 방법은 강대국들은 약소국들을 업신여기며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쳐들어가 싸움을 했다하면 적군을 죽이고 땅이 있으면 점령합니다. 한 번 싸움에 몇 만 명의 수급을 베고 큰 성의 포위에는 몇 년이 걸리게 되는 때도 있어 그때가 되면 농민들도 모두 무기를 들고 나오게 되고, 어린아이들까지도 군적에 올려 싸움에 임하게 되어, 적은 수의 군사들을 동원하게 된다면 결코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게 됩니다. 더욱이 초나라는 그 영토가 동남으로 광활하게 펼쳐져 있어 일단 한번 동원령을 내리기만 하면 백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습니다. 신은 60만의 군사로도 혹시 당해내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는데 어찌 다시 거기에서 줄일 수 있겠습니까?」

【秦王曰:“寡人聞古者大國三軍,次國二軍,小國一軍,軍不盡行,未嘗缺乏。五霸威加諸侯,其制國不過千乘,以一乘七十五人計之,從未及十萬之額。今將軍必用六十萬,古所未有也。”王翦對曰:“古者約日而陣,旨陣而戰,步伐俱有常法。致武而不重傷,聲罪而不兼地。雖幹戈之中,寓禮讓之意。故帝王用兵,從不用眾。齊恒公作內政,勝兵不過三萬人,猶且更番而川。今列國兵爭,以犟凌弱,以众暴寡,逢人则杀,遇地则攻。報級①動曰數萬,圍城動經數年。是以農夫皆操戈刃,童稚亦登冊籍,勢所必至,雖欲用少而不可得。況楚國地盡東南,號令一出,百萬之眾可具。臣謂六十萬,尚恐不相當,豈複能減於此哉?”秦王歎曰:非將軍老於兵,不能透徹至此,寡人聽將軍矣!”遂以後車載王翦入朝,即日拜爲大將,以六十萬授之,仍用蒙武爲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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