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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1-29 15:38:596917 
범수열전(范睢列傳) 19-1 범수
양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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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19-1. 범수(范睢)

  범수는 위(魏)나라 사람으로 자는 숙(叔)이다. 제후들에게 유세하여 위왕(魏王)을 받들려고 했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경비를 스스로 마련할 수 없었음으로 먼저 위나라 중대부 수가(須賈)를 모셨다.

  수가가 위소왕(魏昭王)의 명을 받아 제나라에 사자로 가게 되자 범수가 수종했다. 수가의 일행이 몇 개월을 머물렀으나 제왕으로부터 아무런 회답을 받지 못했다. 그때 범수(范睢)가 언변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양왕(齊襄王)이 사람을 시켜 황금 10근과 소고기와 술을 보냈으나 범수는 감히 받지 못했다. 수가가 알고 크게 노했는데 그것은 범수가 제나라와 몰래 내통해서 그와 같은 음식과 하사품을 보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가는 범수에게 명하여 술과 고기는 받아들이고 황금은 돌려주라고 했다. 사자의 임무를 마치고 위나라로 돌아온 수가는 범수의 행위에 대해 매우 분노하여 그 사실을 상국 위제(魏齊)에게 고했다. 위나라의 공자 출신에 상국의 자리에 있었던 위제는 대노하여 사인(舍人)을 시켜 범수를 붙잡아 오게 하여 태형을 가했다. 범수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이빨이 뽑혔다. 범수가 고통에 못 이겨 죽은 체하자 대자리로 범수의 몸을 말아 변소 옆에 버리게 하고 술에 취한 빈객들이 범수의 몸에 오줌을 누도록 했다. 그것은 치욕을 가하여 훗날 범수와 같이 망언한 자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대자리에 쌓인 체 누워있던 범수가 자기를 지키던 사람에게 말했다.

「그대가 능히 나를 나가게 해 주면 내가 틀림없이 후하게 사례하겠소.」

범수를 지키던 사람이 위제에게 대자리에 있는 사람이 죽어 내다 버리겠다고 청했다. 술에 취한 위제가 버려도 좋다고 허락했다. 이로써 범수는 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후에 위제가 후회하고 범수를 다시 찾았다. 위나라 사람 정안평(鄭安平)이 그 소식을 듣고 범수를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 숨기고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바꾸게 했다.

이때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알자(謁者)1) 왕계(王稽)를 위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정안평이 사졸로 변장하여 왕계를 옆에서 모셨다. 왕계가 정안평에게 물었다.

「나와 함께 서쪽으로 떠나 진왕에게 유세를 행할만만 현인이 위나라에 혹시 있는가?」

정안평이 대답했다.

「소인의 집에 장록이라는 선생이 계시는데 대감을 뵙고 천하의 일을 말씀드리고 싶어 합니다. 그 사람은 이곳에 원수가 살고 있어 낮에는 감히 돌아다닐 수 없는 처지입니다. 」

「그렇다면 밤에 데려와 보라!」

이윽고 밤이 되자 정안평이 장록을 데리고 왕계를 만나러 왔다. 장록이 말을 미처 다 끝내기도 전에 왕계는 범수가 현인임을 알고 말했다.

「선생은 삼정(三亭)2) 남쪽 언덕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오.」

장록이 왕계와 비밀리에 약속을 하고 물러갔다. 이윽고 왕계가 위나라에 작별을 고하고 돌아갈 때 약속한 장소를 지나가다가 범수를 수레에 태워 진나라로 들어갔다. 이윽고 왕계의 일행이 함곡관을 통과하여 호(湖)3)에 이르자 서쪽 편 저 멀리서 호위 기병들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던 수레를 보았다. 범수가 보고 물었다.

「수레를 타고 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왕계가 대답했다.

「진나라의 승상 양후(穰侯)4)의 행렬로써 동쪽의 현청(縣廳)을 돌아보기 위한 행차입니다. 」

「내가 듣기에 진나라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양후는 마음속으로 제후국에서 오는 유세객들을 매우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에게 욕을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되니 그의 눈을 피해 잠시 수레 안에 숨어있겠습니다.」

이윽고 양후가 다가와 수레를 멈추게 하고 왕계의 노고를 치하한 후에 물었다.

「관동(關東)에는 무슨 변화가 있었소?」

「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양후가 다시 물었다.

「알자께서는 혹시 제후국에서 오는 유세객을 같이 대동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자들은 나라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헛되이 백성들과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들이오. 」

「제가 어찌 감히 그 자들을 데려올 수 있겠습니까?」

이윽고 양후가 떠나가자 범수가 왕계에게 말했다.

「제가 들으니 양후는 지혜를 갖추고 있기는 하나 의심이 많아 일의 전말을 살피는데 늦다고 했습니다. 제가 보니 수레 안에 사람이 있을 것으로 의심했지만 수색하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범수는 수레에서 내려 도망치면서 말했다.

「지금은 틀림없이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범수가 수레에서 내려 10여 리 쯤 달려갔을 때 과연 양후는 수레 안을 수색하기 위해 기병들을 보냈다. 수레 안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기병들은 돌아갔다. 왕계는 범수를 수레에 다시 태워 함양으로 들어갔다.

위나라에 사자로 다녀온 일을 소왕에게 복명한 왕계는 범수의 일을 고했다.

「위나라에 장록이라는 선생이 있었는데 천하에 견줄 바 없는 유세가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진왕의 나라는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음으로 나를 신하로 기용하면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글로써 모두 밝힐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신이 그를 수레에 태워 진나라로 데리고 왔습니다.」

진왕이 믿지 않고 숙사로 보내 하찮은 식사만을 대접했을 뿐이었다. 범수가 그렇게 1년이 넘게 진왕의 명을 기다렸다.

그때는 진소양왕이 왕위에 오른 지 벌써 36년이 지난 후로 남쪽으로 초나라의 언(鄢)과 영(郢)을 함락시키고, 초회왕(楚懷王)을 유인하여 진나라에 억류시켜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다시 동쪽으로는 제나라를 격파했다. 제민왕(齊湣王)은 얼마 전에 진소왕(秦昭王)과 같이 제왕(帝王)를 칭하다가 후에 제호(帝號)를 버렸다.5) 여러 번에 걸쳐 삼진을 곤경에 빠뜨렸으며 천하의 변사들을 싫어하여 아무도 믿지 않았다.

양후와 화양군(華陽君)은 소왕의 모친 선태후(宣太后)의 동생들이었다. 또한 경양군(涇陽君)과 고릉군(高陵君)은 소양왕의 동모제였다. 양후는 승상이 되고 세 사람은 모두 장군이 되어 봉읍을 갖게 되었으며 또한 태후의 후원으로 그 집안의 재산은 왕실보다 더 부유했다. 이어서 양후가 진나라 장군이 되어 한나라와 위나라의 경계를 넘어 제나라의 강읍(綱邑)과 수읍(壽邑)를 정벌하여 자기의 봉읍인 도(陶)의 관할을 넓히려고 했다. 범수가 이 사실을 알고 상서를 올렸다.

「신이 듣기에 영명한 군주가 정치를 행하는 방법은 공이 있는 자에게는 상을,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직책을, 몸을 아끼지 않고 노력을 열심히 하는 자에게는 후한 봉록을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공을 많이 이룬 자에게는 작록을 높여주어야 하고 여러 대중들을 잘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그 관직을 높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능한 사람은 그러한 직책을 감당할 수 없고 유능한 사람들 역시 자기의 재능을 감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신다면 원컨대 행하시어 그 다스리는 도를 더욱 이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신의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신을 오랫동안 잡아두시는 일은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속담에 ‘용렬한 군주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고 싫어하는 사람에게 벌을 주나, 영명한 군주는 그렇지 않고 공을 세운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상을 주고 죄를 짓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형벌을 내린다.’고 했습니다. 오늘 신은 형틀을 받을 수 없는 가슴에, 부월을 받을 수 없는 허리를 갖고 있는 아주 미천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어찌 감히 의심스러운 일로 왕으로 하여금 시험토록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신이 천민의 신분으로 가볍게 욕됨을 입는 바는 참을 수 있으나 신을 추천한 사람의 대왕께 대한 변하지 않는 충성심까지 중시하지 않는 행위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신은 주나라에는 저액(呧砨)이 있었고, 송나라에는 결록(結綠)이 있었으며 위나라에는 현려(縣藜)가 초나라에는 화박(和璞)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 네 가지 보물들은 모두 흙에서 생겨난 것들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솜씨 좋은 공인들도 처음에는 몰라보고 버려졌다가 결국 천하의 명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성왕이 버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신은 또한 듣기에 가문을 흥성하게 하는데 능한 인재는 나라 안에서 찾아야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인재는 천하의 제후국들로부터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천하의 영명한 군주가 있으면 제후들이 함부로 인재들을 얻지 못해 자기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영명한 군주들이 자기의 영예를 나누어 그 인재들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의사는 병자가 죽을지 살지를 알고 있으며 성군은 일의 성패에 밝아 이가 되면 행하고 해가 되면 버립니다. 또한 의심스러우면 일단 조그맣게 시험해 봅니다. 비록 순임금이나 우임금이 살아 돌아온다 해도 이 원칙만은 바꿀 수 없습니다. 말이 지극한 곳에 이르게 되면 신은 감히 그것을 글로 올리지 못하며 말이 또한 천박하면 들으실만한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저의 뜻한 바가 대왕께 전달되지 않은 이유는 제가 어리석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신을 천거한 자의 말이 천박하여 신을 말을 쓸 수 없기 때문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신은 원컨대 대왕게서 유람하시고 남은 시간을 소신에게 나누어 주시어 대왕의 얼굴을 한 번 알현케 해주십시오. 한 마디 말로 대왕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부월의 형을 달게 받겠습니다.」

진소양왕이 읽고 크게 기뻐하며 왕계에게 사과하고 수레를 보내 범수를 불러오게 했다.

그래서 마침내 진왕을 별궁에서 접견할 수 있게 된 범수는 궁중으로 들어가 복도에서 길을 잃어버린 체하고 궁녀들이 다니는 영항(永巷)으로 들어섰다. 이윽고 진왕이 왕림하자 분노한 환관들이 범수를 쫓아내며 말했다.

「대왕께서 납시오.」

범수가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진나라에 무슨 왕이 있단 말인가? 나는 진나라에 오로지 태후와 양후만 있다고 들었을 뿐이다.」

범수는 일부러 큰소리로 외쳐 진소왕의 마음을 격노케 하려고 했다. 이윽고 별궁에 당도한 소왕은 범수가 환관들과 다투고 있는 소리를 듣고 즉시 영접하고 사과했다.

「과인이 마땅히 몸소 선행의 가르침을 오래 전에 받았어야 했습니다만 의거(義渠)6)의 일이 급하여 과인이 아침저녁으로 태후를 뵙고 지시를 받아야만 했었기 때문이었소. 지금 의거의 일은 모두 끝이 났으니 과인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시간을 낼 수 있었고. 과인은 어리석고 총민하지 못하니 삼가 주빈의 예로써 가르침을 청하겠소.」

범수가 답례를 정중하게 예를 행하고 사양했다. 그날 범수가 소왕을 접견하는 모습을 본 진나라의 군신들은 모두 놀라 얼굴을 정색하고 옷매무새를 바로 해서 숙연한 자세로 임했다. 진왕이 좌우의 사람을 물리치니 궁중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진왕이 무릎을 꿇고 범수에게 가르침을 청하며 말했다.

「선생께서는 과인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겠소?」

범수가 그저 「예, 예」 만을 연발하자 진왕이 다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선생은 과인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겠소?」

범수가 다시 「 예, 예」 만을 연발하자 진왕이 다시 무릎을 꿇고 청하기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다시 진왕이 꿇어앉아 말했다.

「선생께서는 결코 과인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으려고 하십니까?」

그때서야 범수가 입을 열어 답했다.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신은 듣기에 옛날 주문왕(周文王)을 만난 태공(太公) 여상(呂尙)은 신분이 위수의 강변에서 낚시를 하던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이때 두 사람 사이는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여상이 문왕에게 유세하자 문왕은 여상을 태사(太師)로 받들어 수레에 같이 태우고 궁궐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여상의 말에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로써 문왕은 여상으로 인해 공업을 세우고 결국 천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문왕이 여상을 소원하게 대하여 그로 하여금 마음속의 깊은 뜻의 말을 하도록 하지 않았다면 주나라는 천자의 자리에 올라 덕을 베풀 수 없었으며 문왕이나 무왕도 왕업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타지에서 온 외국 출신이라 대왕과는 관계가 소원합니다. 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두 대왕의 일을 바로 잡고자 할 뿐이나 또한 대왕의 골육간의 일이기도 합니다. 원컨대 어리석지만 충성을 바치고자 하나 대왕의 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대왕께서 세 번이나 물으셨으나 제가 감히 말씀을 드리지 못했음이 신이 두려워하여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신은 오늘 대왕의 면전에서 말씀드리고 내일은 뒤에서 주살당할 것도 알고 있으나 신은 감히 피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왕께서 신의 말을 믿고 행하실 수 있다면 죽음도 걱정하지 않겠으며, 도망치는 처지가 된다고 해도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몸에 옻을 칠하여 나병환자가 되거나 산발을 하고 미치광이가 되어도 신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오제(五帝)와 같은 성군들도 결국 죽었고, 삼왕(三王)과 같은 성왕들도 죽었으며, 오패(五覇)와 같은 현군들도 역시 죽었습니다. 또한 오획(烏獲)7), 임비(任鄙)8)와 같은 천하장사들도 죽었고, 성형(成荊)9), 맹분(孟賁)10), 왕경기(王慶忌)11), 하육지(夏育之)12) 등과 같은 용사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더라도 진나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신이 크게 원하는 일이나 어찌 죽음을 걱정하겠습니까? 오자서(伍子胥)는 자루 속에 숨어서 소관(昭關)13)을 탈출한 후에 밤에는 길을 가고 낮에는 숨으면서 능수(陵水)14)에 이르렀으나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머리를 조아리고 어깨를 드러낸 채, 배를 두드리고 피리를 불며, 오나라 저자거리에서 걸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나라를 일으켜 합려를 패자로 만들었습니다. 신으로 하여금 오자서처럼 계책을 다함으로써 유폐되어 죄수로 잡혀 종신토록 대왕을 못 본다 한들 신의 계책이 실행될 수만 있다면 어찌 신이 그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기자(箕子)는 몸에 옻칠을 해서 나병환자처럼 보였고 접여(接輿)15)는 산발하여 미치광이처럼 행해했으나 그런 행위는 모두 그들 군주를 위해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일 신으로 하여금 기자와 같은 행동을 하도록 해서 그것으로 현명한 군주를 보좌토록 한다고 하면 신에게는 크나큰 광영입니다. 어찌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겠습니까? 신이 오로지 두려워하는 바는 신이 죽은 후에 천하의 재사들이 제가 충성을 다하고도 죽임을 당하는 사실을 보게 되면 그로 인해 입을 봉하고 발을 싸맨 채 발길을 멈추어 아무도 진나라에 들어오지 않게 되는 일입니다. 현재 대왕께서는 위로는 태후의 위엄을 두려워하시고 아래로는 간신들의 마음에도 없는 말에 미혹되어 구중궁궐 깊은 곳에 거처하시면서 좌위의 근신들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종신토록 미혹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사악한 자들을 분별할 수 있게 도움을 줄만한 사람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게는 종묘사직이 복멸되고 작게는 대왕의 신세는 외롭고 위태롭게 되니 신은 이를 걱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릇 당하는 일이 곤궁하게 되거나 욕됨을 받게 되거나 혹은 죽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라면, 신은 그것들을 전혀 두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이 죽고 진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면 신은 현명하게 생을 살았다는 이름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왕이 다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말을 하시는 것입니다. 무릇 진나라는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의 나라에, 과인은 어리석고 불초합니다. 다행히 선생께서 이곳에 수고를 마다하고 왕림하심은 하늘이 과인으로 하여금 선생으로부터 은혜를 입게 하여 선왕들의 종묘를 보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과인이 선생을 통해 천명을 전해 받게 됨은 하늘이 선왕들을 총애하여 과인을 고립시켜 버리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이 어찌 그와 같단 말입니까? 일이란 크고 작은 것에 구별이 없으며 위로는 태후에서 아래로는 대신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니 추호도 과인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범수가 소왕에게 절을 올리자 진왕도 따라서 같이 맞절을 행했다. 다시 범수가 입을 열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막힌 견고한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 북에는 감천(甘泉), 곡구(谷口)의 험지가 있고, 남으로는 경수(涇水), 위수(渭水), 우측으로는 농서(隴西), 촉(蜀), 좌측으로는 동관(潼關)과 함곡관(函谷關)이 외적을 막아줍니다. 용맹스러운 군사들로 이루어진 분격(奮擊) 100만, 전차 천승의 병력으로 세가 유리하면 나라 밖으로 나아가 공격하고 세가 불리하면 나라 안으로 들어와 지키면 됩니다. 이는 왕업을 이룰 수 있는 지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부족 간에 일어난 싸움에는 겁을 내고, 나라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는 용감하니, 더불어 왕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지세의 이로움과 용감한 백성들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무릇 진나라 병사들의 용감함과 많은 수의 전차와 기병들로 제후들을 다스리는 일은 마치 한로(韓盧)16)가 절름발이 토끼를 사냥하는 경우와 같아 패왕의 공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군신들 중 아무도 그 일을 행할 직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현재 진나라가 관문을 닫은 지 15년이 지났음에도 감히 군대를 내어 산동을 엿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바로 양후(穰侯)가 진나라를 위해 계책을 내지 않고 불충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대왕의 계책에도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

진왕이 다시 무릎을 꿇고 말했다.

「과인의 잘못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좌우에 몰래 엿듣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범수는 감히 공실 내부의 일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먼저 외부의 일에 대해 언급하면서 진왕의 기색을 살펴 기회를 보기로 했다. 범수가 말했다.

「무릇 양후가 한(韓)과 위(魏) 두 나라 영토를 넘어 제나라의 강(綱)과 수(壽) 두 고을을 공격하려고 하는 행위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군사를 적게 보내면 제나라를 이길 수 없고, 많은 군사를 보내면 군비가 많이 들어 진나라에 막대한 손실을 끼칩니다. 대왕의 뜻을 추측해 보건대 진나라는 소규모의 군대를 보내는 대신, 한과 위 두 나라로부터 협조를 구해 군사를 얻으려고 하는 생각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오늘 이웃하는 나라와는 친하고 그 너머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는 공격하려고 하니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 계책이 생소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옛날 제민왕(齊湣王)이 남쪽의 초나라를 공격하여 적군을 격파하고 그 장수를 죽여 제나라 강토를 천여 리나 넓혔다고 했으나 얼마 후에는 결국 한 자의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제나라가 땅을 원하지 않아서이겠습니까? 그것은 형세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나라가 국력을 낭비하여 피폐해지고 군신들이 서로 화목하지 않게 된 것을 본 제후들은 군사를 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하여 크게 무찔렀습니다. 장수들은 욕됨을 입고 병사들은 피로에 지치자 그들은 그 책임이 누구 때문이냐고 제왕에게 물었습니다. 제왕이 모든 일이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대신들이 듣고 란을 일으키자 전문은 나라 밖으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제후들의 공격을 받은 제나라가 크게 패하게 된 것은 초나라를 공략하여 한과 위 두 나라만 살찌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소위 적에게 군사를 빌려주는 행위이며 도적에게 양식 공급하는 격입니다. 그래서 대왕께서는 원교근공(遠交近攻) 책을 행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면 왕께서 얻는 땅이 비록 한 치가 되었건 한 자가 되었건 그것은 바로 대왕의 소유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웃한 나라의 땅은 버려두시고 먼 곳을 공격하려고 하시니 그것은 잘못된 계책인 것입니다. 옛날 중산국(中山國)의 땅은 사방 5백리에 달했는데 조나라가 혼자 힘으로 공격하여 자기 땅으로 만들어 공업을 이루고 이름을 높였으며 이익도 같이 누렸습니다만 천하의 어느 나라도 능히 조나라에 시비를 걸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과 위 두 나라의 위치는 천하의 중심이 되는 곳에 있습니다. 왕께서 패자를 칭하고 싶으시다면 필히 중원의 제후국들과 친교를 맺어 천하의 중추를 장악하신 다음 그 위세를 이용하여 초(楚)와 조(趙)를 제압하셔야 합니다. 초나라가 강하면 조나라와 친하시고, 조나라가 강하면 초나라와 친선을 맺어야 합니다. 초와 제 두 나라가 진나라에 붙게 되면 제나라는 두려워하게 됩니다. 진나라를 두려워하게 된 제나라는 필시 겸손한 말과 많은 폐백을 바쳐 진나라를 받들 것입니다. 제나라가 진나라 편에 선다면 한과 위 두 나라의 왕들을 포로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위나라와 우호를 맺으려고 생각한 지는 이미 오래 되었으나 위나라에 변란을 빈번히 일어나 과인이 우호를 맺을 사이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위나라와 친교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왕께서 겸손한 말과 많은 폐백을 보내 위나라를 받들겠다고 하십시오. 위나라가 행하지 않으면 다시 땅을 떼어주고 뇌물을 주어 매수하십시오. 그래도 행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것을 핑계로 군사를 보내 정벌하십시오.」

「과인은 선생의 명을 받들어 따르겠습니다.」

진소양왕은 즉시 범수를 객경으로 임명하고 군사의 일을 맡겼다. 마침내 진소왕은 범수의 계책을 채용하여 오대부(五大夫)17) 관(綰)을 장수로 삼아 위나라를 공격하여 회(懷)18)를 함락시켰다. 2년 후에 다시 형구(邢丘)19)를 점령했다.

객경이 된 범수가 다시 소왕에게 상주했다.

「진나라와 한나라의 지형을 살펴보건대 두 나라의 땅은 서로 교차하여 마치 수를 놓은 모습과 같습니다. 한나라는 진나라에게 있어서 마치 나무에 슬어 있는 좀과 같고 사람으로 말하면 뱃속에 있는 큰 병과 같습니다. 천하에 아무런 변란이 없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천하에 변란이 발생하면 진나라에 있어서 한나라보다 큰 근심이 어디 있겠습니까? 대왕께서는 한나라의 일을 먼저 수습하십시오.」

「내가 오랫동안 한나라를 진나라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나 한나라가 말을 듣지 않았소. 어떻게 해야 한나라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한나라가 어찌 진나라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군사를 발하여 형양(滎陽)을 공략하여 공(鞏)과 성고(成皐)로 통하는 길이 막으십시오. 또한 북쪽으로는 태항산의 산길을 끊어 상당의 군사들은 남하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대왕께서 한 번 군사를 일으켜 형양을 공격한다면 한나라는 세 조각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나라는 필시 망하게 되는데 어찌 대왕의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만약 한나라가 대왕의 말을 따른다면 아마도 패업도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훌륭하신 계책입니다.」

이어서 소왕은 사자를 뽑아 한나라에 보냈다. 범수가 하루가 다르게 소양왕과 가까워졌음으로 반복해서 몇 년 동안 여러 번에 걸쳐 범수의 계책을 채용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기회를 얻은 범수가 소왕에게 말했다.

「신이 산동에 살고 있을 때 제나라에는 맹상군 전문이 있고 제왕(帝王)이 있었는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진나라에는 태후(太后), 양후(穰侯), 화양군(華陽君), 고릉군(高陵君), 경양군(涇陽君)에 대해서만 들었지 진나라에 왕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왕에게 있고, 능히 나라의 이해를 따지는 것도 왕에게 있고, 생사여탈을 결정하는 것도 왕에게 있습니다. 오늘 날 태후께서 정사를 전단하시고도 왕을 쳐다보지 않으시며, 양후는 외국에 사자의 임무를 띠고 다녀와도 복명하지 않습니다. 화양군과 경양군 등은 사람을 쳐서 죽이면서도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또한 고릉군은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서 왕께 아무런 청도 올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4명이나 되는 귀인이 있는 나라치고는 위태롭지 않은 나라가 아직 있었는지는 신은 알지 못합니다. 이 사귀(四貴)를 신하로 둔다는 것은 소위 말해서 왕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즉 권세가 어찌 기우려지지 않겠으며 어찌 정령이 왕에게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신은 듣기에 나라를 잘 다스리는 군주는 안으로는 그 위엄을 공고히 하고 밖으로는 그 권력을 무겁게 한다고 했습니다. 양후는 왕의 엄중한 권력을 장악하여 제후들의 일을 전단하고 호령합니다. 또한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천하의 제후들에게 보내어 맹약을 맺을 뿐만 아니라 적국을 토벌하고 다른 나라를 공격하여 아무도 감히 양후의 말에 거역하지 못합니다. 전투를 벌려 승리를 한 결과 얻은 이익은 모두 자기의 봉지인 도(陶)에 속하게 하고 나라의 폐백으로는 제후들을 구슬립니다. 싸움에 패하면 백성들로 하여금 원한을 쌓게 하여 그 화를 사직에 돌아가게 합니다. 옛 시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나무에 열배가 너무 많이 달리면 가지가 다치게 되고

가지가 상하게 되면 나무의 밑둥이 상하게 되도다!

또한 나라의 도성이 너무 크면 나라가 위험에 빠지고

신하의 지위가 너무 존귀하게 되면 군주는 낮아지도다!

木實繁者披其枝(몰실번자피기지)

披其枝者傷其心(피기지자상기심)

大其都者危其國(대기도자위기국)

尊其臣者卑其主(존기신자비기주)

최저(崔杼)20)는 그 군주인 제장공(齊莊公)을 활로 쏘아 그의 넓적다리를 맞추어 죽이고, 요치(淖齒)21)는 제민왕(齊湣王)의 몸에서 뽑아낸 힘줄로 묘당의 대들보에 목을 메달아 하루 밤을 세워 죽였습니다. 또한 이태(李兌)22)가 조나라의 정사를 맡았을 때 주보(主父) 무령왕(武靈王)을 사구(沙丘)에 감금하여 100일 만에 아사시켰습니다. 오늘 제가 들으니 진나라의 정사는 태후와 양후가 전단하고 고릉군, 화양군, 경양군 등이 도우니 결국 진나라에는 왕이 없고 단지 요치나 이태와 같은 부류들만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상주(夏商周) 세 왕조가 망한 이유는 군주들이 정사를 모두 다른 사람에게 맡겨놓고 자신은 술을 마시고 사냥을 하러 분주하게 돌아다녀 정사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사를 군주대신 맡아 보는 자들은 현인들을 시기하고 재사들을 질시했으며 아랫사람들을 조정하여 군주들의 눈과 귀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일을 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것만을 이루고 그 군주를 위해서 계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군주들은 깨닫지 못하고 나라를 잃게 된 것입니다. 오늘 위로는 5천 호 이상의 봉읍을 가진 대관들로부터 아래로는 전하의 좌우 측근에 이르기까지 상국의 사람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오로지 대왕이 혼자 몸으로 조정에 임하시니 신이 왕을 위해 가만히 걱정하는 바는 얼마 후에는 아마도 진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왕의 후손이 아니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

소왕이 듣고 매우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말했다.

「잘 알았습니다.」

소왕은 곧바로 태후를 폐하고 양후를 축출하고 고릉군, 화양군, 경양군은 관 밖으로 옮겨 살게 했다. 진왕은 범수를 진나라의 상국으로 삼고 양후가 갖고 있던 상국의 인을 거두고 그로 하여금 봉읍인 도(陶)로 가서 살게 했다. 그리고 관리들을 시켜 양후의 이사를 돕기 위해 수레를 제공하라고 명했는데 양후의 재물을 싣기 위해 동원된 수레는 천 대가 넘었다. 이윽고 양후의 이사짐이 관문에 이르렀을 때 관을 지키던 관리들이 그 재물들을 검사한 결과 이상하고 기이한 보물들은 왕실보다 많았다.

진왕은 범수를 응(應)23)에 봉하고 응후라는 봉호를 내렸다. 그때가 진소양왕 41년으로 기원전 266년이었다.

 

범수가 진나라의 상국이 되었지만 진나라에서는 그의 이름을 장록으로 불렀기 때문에 위나라는 장록이 범수인지 모르고, 단지 범수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위나라는 진나라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동쪽의 한과 위 두 나라를 정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가(須賈)를 진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위나라에서 수가가 사자로 진나라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범수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떨어져 헤진 옷을 걸쳐 입고 사람의 눈을 피해 몰래 객관으로 들어가 수가를 만났다. 범수를 본 수가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

「범숙은 여전히 무양하셨는가?」

「그렇습니다.」

수가가 미수를 띠우며 다시 말했다.

「범숙이 진나라에 온 목적은 유세를 하기 위해서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수는 옛날 위나라 상국에게 죄를 얻었기 때문에 도망쳐 왔을 뿐입니다. 어찌 감히 유세할 생각을 하겠습니까?」

「범숙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남의 집에 품팔이를 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가가 불쌍하게 생각하여 그를 머물게 하고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면서 말했다.

「범숙의 어려움이 어찌 이와 같단 말인가?」

수가는 즉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옷 중에서 솜으로 누빈 두루마기한 벌을 범수에게 주었다. 그리고는 수가가 범수에게 물었다.

「진나라 상국에 장(張) 성을 갖은 사람이 새로 임명되었다고 하는데 범숙은 혹시 들은 바가 있는가? 내가 듣기로는 진왕에게 총애를 받아 천하의 관한 일은 모두 장상국이 결정한다고 했소. 오늘 나의 일은 모두 장상국의 의중에 달려 있다고 하겠는데 범숙은 혹시 장상국을 잘 아는 사람을 알고 있는가?」

「소인의 주인 되는 노인께서 장상국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 주인과 함께 이 사람도 장상국을 접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대부를 위해 장상국을 뵐 수 있도록 저의 주인께 청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내가 타고 온 말이 마침 병이 나고 다시 수레의 차축이 부러져 네 마리의 말이 끄는 큰 수레가 아니면 위나라의 사자 신분에 밖으로 결코 나갈 수가 없소!」

「제가 대부를 위해 말 네 마리가 끄는 큰 수레를 주인 노인에게 빌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범수가 돌아가 사마(駟馬)가 끄는 큰 수레를 가지고 와 수가를 태우고 자신은 마부가 되어 진나라 상부(相府)로 향했다. 이윽고 상부가 멀리서 보이자 범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수레를 피해 몸을 숨기는 모습을 보고 수가가 괴이하게 생각했다. 수레가 이윽고 상부의 옆문에 당도하자 범수가 수가를 향해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먼저 들어가 대부를 위해 상국에게 고하겠습니다.」

수가가 문 앞에서 말고삐를 잡고 오래 동안 범수로부터 기별을 기다리다가 문을 지키는 사람에게 물었다.

「얼마 전에 들어간 범숙이 아직 나오지 않은데 어찌 된 일인지 아십니까?」

문지기가 대답했다.

「범숙이라는 사람은 이곳에 없소.」

「그 사람은 바로 나와 같이 수레를 타고 와서 상부 안으로 들어 간 사람이오.」

문지기가 대답했다.

「그 사람은 장록 상국이시오.」

수가가 대경실색하여 자기가 범수에게 속임을 당했음을 알았다. 그는 곧바로 웃통을 벗고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문지기에게 자기의 죄를 상국에게 전해주기를 청했다. 그러자 범수가 나타나 화려한 장막을 치도록 한 다음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을 불러 접견했다. 차례가 된 수가가 범수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자기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말했다.

「이 수가는 범상국께서 갖은 능력을 발휘하시어 지극히 높은 자리에 올랐을 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후로는 저는 감히 천하의 서적을 논하지 않겠으며, 또한 천하의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 수가는 가마솥의 끓은 물에 삶겨져 죽을죄를 지은 적이 있었습니다. 청컨대 스스로 호맥(胡貉)의 땅으로 들어가 이족의 무리들에게 섞여 살고자 합니다. 이 수가의 생사는 오로지 상국의 처분에 있사옵니다.」

「네 죄가 몇 가지나 되는 알고 있는가?」

「저의 죄는 이 몸의 머리털을 뽑아 세어도 모자랄 만큼 많습니다.」

「너의 죄는 세 가지다. 옛날 초소왕(楚昭王) 때 신포서(申包舒)가 초나라를 위해 싸워 오군을 물리쳐 공을 세우자 초왕은 그를 형(荊) 땅의 5천 호에 봉했으나 포서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것은 신포서의 조상 묘가 형 땅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수의 선인들을 모신 묘가 역시 위나라에 있음에도 그대는 옛날 이 수가 다른 마음을 품고 제나라와 몰래 통하려 했다고 위제에게 참소했으니 그 죄가 하나이고, 위제가 나를 변소 간에 버려두고 욕을 보일 때에 그대는 간하여 그만두게 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둘이다. 다시 내 몸에 술 취한 취객들에게 오줌을 싸도록 내버려 두었으니 그 죄가 셋이다. 그러나 내가 그대를 죽이지 않음은 제포지련(綈袍之戀)으로 옛날 우정이나마 잊지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범수가 접견을 마치고 궁궐로 들어가 소왕에게 고하고 수가의 죄를 용서하고 자기나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수가가 범수에게 작별을 고하니 범수는 크게 잔치를 벌려 제후왕들의 사자를 모두 초청하여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준비시켰다. 그리고는 수가를 당하에 앉혀놓고 좌두(莝豆)24)를 담은 그릇을 그 앞에 가져오게 한 다음 묵형(墨刑)을 받은 죄수들로 하여금 수가의 양쪽 겨드랑이를 붙잡아 마소처럼 강제로 먹였다. 그리고는 수가를 향해 고했다.

「너는 나를 위해 위왕에게 고하라! 위제의 목을 나에게 곧바로 바치지 않으면 대량(大梁)을 도륙할 것이라고!」

수가가 위나라에 돌아가 위제에게 범수의 말을 전했다. 위제가 두려워하여 조나라로 도망쳐 평원군25)의 처소에 숨었다.

진나라의 상국이 된 범수에게 왕계가 찾아와 말했다.

「일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고,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임금께서 갑자기 붕어하시게 되는 일은 알 수 없는 첫 번째입니다. 또한 상국께서 갑자기 관사를 버리고 초야로 돌아가게 되는 일은 알 수 없는 두 번째 일입니다. 또한 제가 어느 날 갑자기 도랑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알 수 없는 세 번째입니다. 왕께서 붕어한 후에 상국께서 이 왕계를 천거하지 못했음을 한탄하시더라고 그때는 역시 어찌할 수 없으니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상국께서 갑자기 관사에서 물러 난 후에 이 왕계를 천거하지 못했음을 한탄하시더라도 그때는 어찌할 수 없으니 그 두 번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왕계가 길을 가다가 도랑에 빠져 목숨을 잃어 상국께서 신을 왕께 천거하지 못했음을 한탄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는 그 세 번째입니다.」

범수가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으나 즉시 궁궐로 들어가 진왕에게 말했다.

「왕계의 충성스러운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신이 함곡관을 통과하여 진나라에 출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대왕의 어진 성덕이 없었다면 어찌 신이 능히 존귀한 지위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저의 관직은 상국에 이르고 작위는 열후(列侯)의 대열에 섰습니다. 그러나 저를 천거한 왕계는 여전히 알자(謁者)에 있으니 그가 신을 진나라에 데려와 대왕의 신하로 만든 뜻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소왕이 왕계를 불러 하동(河東)26)의 태수로 임명하고 3년 동안 상계(上計)27)를 행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다시 정안평(鄭安平)도 범수의 목숨을 구한 공을 기려 장군으로 임명했다. 범수는 가재를 털어 옛날 자기가 곤궁하게 살 때 도와준 사람들에게 보답했다. 비록 한 끼의 밥이라도 얻어먹은 은혜는 반드시 보답해주고 아무리 하찮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그 원한을 갚았다[애자필보(睚眦必報) 일반필상(一飯必償)].

범수가 진나라 상국이 된지 2년째 되는 해는 진소왕 42년으로 기원전 265년이다. 그 해에 동쪽의 한나라를 공격하여 소곡(少曲)28)과 고평(高平)을 점령했다.

한편 위제가 조나라로 도망가 평원군의 처소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진소왕은 범수를 위해 기필코 원수를 갚아주려고 했다. 그래서 거짓으로 좋은 뜻의 국서를 써서 평원군에게 보냈다.

「과인은 군의 높은 의기를 듣고 존경해 왔습니다. 군과 함께 포의의 친교를 맺고 싶으니 다행히 과인의 나라로 왕림해 주시면 군과 함께 10일을 기한으로 음주를 즐기도록 하겠습니다.」

평원군이 진나라를 두려워했으나 편지의 내용이 진왕의 본심인줄 알고 진나라에 들어가 진소왕을 만났다. 진소왕은 평원군과 함께 며칠 동안 음주를 즐기다가 이윽고 말했다.

「옛날 주문왕은 여상을 얻어 상보(尙父)로 호칭하며 태공에 봉했습니다. 또한 제환공은 관이오(管夷吾)를 얻어 중보(仲父)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범군(范君) 역시 과인에게 숙부와 같은 분입니다. 지금 범군의 원수가 군의 집에 숨어있다고 하니 군께서는 사람을 보내 그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오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과인은 군을 진나라 관문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작정입니다. 」

「귀한 신분일 때 친구를 사귐은 몸이 천하게 되었을 때 도움을 받기 위해서이고 부유할 때 친구를 사귐은 가난하게 되었을 때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위제는 이 사람의 친구로써 비록 그가 제 집에 있다한들 결코 내줄 수 없는데 하물며 신의 집에 있지도 않는데 어찌 그의 목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

진소왕이 국서를 써서 조왕에게 보내 말했다.

「대왕의 동생이 진나라에 있고 범군의 원수 위제는 평원군의 집에 있습니다. 대왕께서 사람을 시켜 그의 목을 곧바로 진나라에 보내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과인이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를 토벌하겠습니다. 또한 대왕의 동생은 결코 우리나라 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조나라의 효성왕(孝成王)이 군사를 풀어 평원군의 집을 포위하고 위제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위급하게 된 위제가 밤을 도와 도망쳐 조나라 상국으로 있던 우경(虞卿)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조왕을 결코 설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우경은 상국의 인장을 풀어놓고 위제를 데리고 도망쳤다. 두 사람이 도망치다가 제후들 중 아무도 급한 처지의 자기들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발길을 다시 위나라의 대량성으로 돌려 신릉군의 도움을 받아 초나라로 달아나려고 했다. 신릉군이 그 소식을 들었으나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두 사람에 대한 접견을 주저하면서 말했다.

「우경은 어떤 사람인가?」

그때 후영(侯嬴)이 곁에 있다가 말했다.

「사람이란 원래 다른 사람에 의해 인정을 받기도 어렵고, 또한 다른 사람을 제대로 아는 일도 역시 쉽지 않습니다. 대저 우경이 짚으로 엮은 신발을 신고 어깨에 초립(草笠)을 걸치고 먼 길을 걸어 조나라에 들어와 조왕을 한 번 알현하자 조왕은 그에게 백벽(白璧) 한 쌍과 황금 백 일(鎰)을 하사 했습니다. 다시 두 번을 알현하자 그를 상경(上卿)으로 삼고 세 번을 알현하자 마침내 재상의 인장을 주고 만호의 읍에 봉했습니다. 그 일을 당하여 천하는 앞 다투어 우경을 알려고 경쟁했습니다. 이에 곤경에 처한 친구 위제가 도움을 청하자 막대한 녹봉과 존귀한 작위를 아까워하지 않은 우경은 주저하지 않고 상국의 인장을 풀어놓고 만호의 식읍을 버려둔 채 미행(微行)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곤궁한 처지에 빠진 선비를 돕는 일이 더욱 급하다고 여겨 모든 것을 버리고 공자를 찾아온 우경을 공자께서 ‘우경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사람이란 원래 다른 사람에 의해 인정을 받기도 어렵고, 또한 다른 사람을 제대로 아는 것도 역시 쉽지 않다’고 한 했습니다. 」

신릉군이 매우 부끄러워하며 손수 수레를 몰고 가서 두 사람을 맞이하려고 했다. 그때 위제는 신릉군이 처음에 자기의 접견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하여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조왕이 듣고 결국 사람을 보내 위제의 목을 잘라 진나라에 보냈다. 진왕은 즉시 평원군을 석방하여 조나라에 돌려보냈다.

진소왕 43년 기원전 264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분형(汾陘)29)을 점령하고 하수의 강안인 광무(廣武)30)에 성을 쌓았다.

5년 후인 기원전 259년, 진소왕이 응후의 계책을 받아들여 반간계로 조나라의 관리들을 매수하자 조나라는 마복군(馬服君) 조사(趙奢)31)의 아들 조괄(趙括)을 조나라의 대장으로 삼아 염파(廉頗)를 대신하도록 했다. 이로써 진나라는 조나라의 대군을 장평(長平)에서 크게 무찌르고 그 여세를 몰아 한단을 포위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무안군과 틈이 벌어진 응후는 그를 모함하여 죽였다. 그리고 정안평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조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안평이 조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자 그가 거느린 2만의 군사들과 함께 조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응후 범수가 그 일로 석고대죄(席藁待罪) 했다. 진나라의 법에 추천한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었을 때는 본인도 그 사람과 똑 같은 죄를 받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응후는 삼족이 멸하는 죄를 얻게 된 것이다. 진소왕은 응후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을까 걱정하여 나라 안에 포고령을 내렸다.

「감히 정안평의 일을 거론하는 자가 있다면 정안평과 같은 죄로 다스리겠다.」

그리고는 응후에게 음식 등의 물품들을 더욱 많이 하사하여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했다. 그리고 2년 후에 응후의 천거로 하동태수로 있던 왕계가 제후들과 내통한 사실이 발각되어 그 죄로 주살되었다. 그 일로 해서 응후는 날이 갈수록 불안하게 되었다.

이에 소왕이 조정에 임하여 탄식하자 응후가 진언했다.

「신은 듣기에 ‘ 군주의 마음에 걱정하는 바가 있으면 신하는 욕됨을 입고, 군주가 욕됨을 입으면 신하는 죽음으로써 그 죄를 씻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대왕께서 조정에 임하시어 근심하시니 신은 감히 죄를 청하옵니다.」

소왕이 대답했다. 「내가 들으니 초나라의 강철검은 그 칼날이 예리하다고 하나 가수와 배우들의 재능은 매우 졸렬하다고 했소. 대저 강철검의 칼날이 예리하다는 것은 무사들이 용기가 있음을 말하고, 가수나 배우가 졸렬하다는 것은 그 사려가 원대하다는 말이오. 무릇 깊고 원대한 사려로 용감한 무사들을 다루니, 나는 초나라가 우리 진나라를 도모하지나 않을까 두렵소. 무릇 일이란 평상시에 준비하지 않으면 갑자기 생긴 변화에는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소. 지금 무안군 백기도 이미 죽어 없고 정안평 등은 나라를 배반하여 적국에 붙어 나라 안에는 훌륭한 장수가 없고 밖으로는 적국이 많소! 그래서 내가 걱정하는 것이오.」

소왕이 좋은 말로 응후를 격려하고 했으나 응후는 여전히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채택이 소문을 듣고 진나라에 들어왔다.

태사공이 말한다.

한비자가 말하기를 ‘소매가 길어야 춤을 잘 추고 밑전이 많아야 장사를 잘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 말이 진정으로 옳음이여! 범수와 채택은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일체변사(一切辯士)다. 그러나 백발이 되도록 제후들에게 유세를 행하고 다녀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은 그들의 계책이 졸렬해서가 아니라 유세를 행한 나라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떠돌이 유세객이 진나라에 들어와 서로 경상(卿相)의 자리를 주고받으며 공업을 천하에 널리 빛낸음은 강하고 약한 기세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비들에게는 또한 우연한 만남이 있는 법이니 두 사람과 같은 현자들이 많음에도 모두가 뜻을 얻지 못한 경우를 어찌 숫자로 세어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두 사람이 곤궁한 처지에 빠져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마음이 격분되어 발분할 수 있었겠는가?

- 채택열전으로 계속 -

1)알자(謁者)/춘추전국시대 군주의 측근에서 명을 전달하는 근시를 말한다. 진한(秦漢) 시대에는 랑중령(郞中令)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광록훈(光禄勋)으로 바뀌었다.

2)삼정(三亭)/ 위나라 변경에 있었던 역참이다.

3)호(湖)/ 함곡관(函谷關) 서쪽 편에 있던 고을 이름이다.

4)양후(穰侯)/ 전국 때 진나라 대신으로 시호(諡號)는 양후(穰侯)다. 초나라 사람으로 진소양왕(秦昭襄王)의 모후인 선태후의 이부(異父) 동생이다. 혜왕(惠王), 무왕(武王) 때부터 중책을 맡아 진나라의 정사를 돌봤다. 무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 형제들이 진왕의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었다. 위염이 소양왕을 진왕의 자리에 올렸다. 소양왕 2년 기원전 305년 무왕의 동생인 서장(庶長) 장(壯)이 반란을 일으키지 위염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진압하고 장(壯)과 그를 따르던 대소 신료와 공족들을 살해하고 무왕의 부인을 위나라로 쫓아냈다. 이후로 위염의 위세는 진나라를 진동시켰다. 소양왕 7년 기원전 300년 진나라의 재상에 임명되었으며 15년 기원전 292년 지금의 하남성 등현(鄧縣)인 양(穰)에 봉해지고 다시 지금의 산동성 정도(定陶)를 더하고 양후(穰侯)라는 봉호를 받았다. 전후로 4번에 걸쳐 진나라의 재상을 역임했으며 한 번은 조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일찍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세 번이나 위(魏)나라를 공격하여 하내(河內)에 있던 크고 작은 성 60여 개를 점령했으며 위나라에 압박을 가하여 하동(河東)의 땅 400리를 진나라에 바치게 했다. 위나라의 도성 대량성을 포위했으며, 조(趙)와 위(魏) 두 나라 연합군을 화양(華陽 : 지금의 하남성 신정(新鄭) 북)에서 대파했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공격하여 강(剛)과 수(壽) 등의 땅을 점령하여 그의 봉지인 도읍(陶邑)의 영지를 넓혔다. 백기(白起)를 발탁하여 대장으로 삼았다. 한 때 그의 권력이 강해지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무수히 많았으며 그의 사가의 부는 왕실보다도 더 컸다. 결국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발호하다가 소양왕 41년 기원전 266년 재상의 자리에 파직되었다. 다음 해 선태후가 죽고 그는 봉읍인 도읍(陶邑)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었다.

5)진소양왕 19년 기원전 288년 소왕이 스스로 서제(西帝)라 칭하고 위염을 제나라에 사자로 보내 제민왕을 동제(東帝)라 칭하자고 했다. 이에 소대(蘇代)가 제민왕에게 유세하여 제호를 버리라고 권하자 제민왕은 제호를 버렸다. 이에 진소양왕도 제후들의 반발을 두려워해서 제호를 버렸다.

6)의거(義渠)/ 고대 중국의 이민족 이름으로 서융(西戎)의 일족이다. 지금의 감숙성 서북의 경수(涇水) 일대에 분포되어 살았다. 춘추 때 스스로 왕호를 칭하고 진나라와 매년 충돌하여 싸움을 벌렸다. 진소양왕 37년인 기원전 270년에 비로소 진나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의거왕과 통정한 선태후가 의거왕을 감천궁으로 유인하여 살해하고 후에 군사를 일으켜 의거를 멸한 일을 말한다.(흉노열전)

7)오획(烏獲)/ 전국시대 진무왕(秦武王 : 재위 기원전 311-307년) 때의 대역사로 능히 구정을 들 수 있었다. 진무왕을 대력사과 함께 힘내기를 즐겨 했기 때문에 임비(任鄙), 맹열(孟說) 등과 함께 높은 관직을 받았다.

8)임비(任鄙)/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88년에 죽은 전국시대 진나라의 무장에 대력사다. 장사인 진무왕이 힘겨루기를 좋아했음으로 자신을 스스로 천거하여 진무왕의 총애를 받았다. 진소양왕 때 상국 양후(穰侯)가 그를 한중태수로 천거했다. 진나라 사람들은 저리질(樗里疾) 같이 ‘ 힘에는 임비이고 지혜는 저리’라고 칭했다.

9)성형(成荊)/ 춘추 때 위나라 용사다.

10)맹분(孟賁)/ ① 춘추때 위(衛)나라 사람으로 <사기정의>에 의하면 그가 일단 노하여 고함을 치면 그 소리에 하늘이 움직였다고 했다. <시자(尸子)>에 「맹분은 물속에서는 교룡(蛟龍)도 피하지 않고, 산속을 다닐 때는 흉포한 호랑이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②전국 때 진무왕의 호위 무사였던 맹열(孟說)이다. 태어날 때부터 용력이 있어 평소에 산 소의 뿔을 뽑았다고 했다. 그는 오획(烏獲)과 함께 용력으로 제후들 사이에 이름이 있었다. 진나라 왕으로 즉위한 진무왕이 용사들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각지의 용사들을 이끌고 진나라로 들어가 높은 벼슬을 받았다. 무왕 4년 기원전 307년 무왕이 주나라에 들어가 구정 들기 시합을 맹열과 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죽었다. 이에 그 죄를 추궁 받아 살해되고 그 종족은 멸족되었다.

11)왕경기(王慶忌)/ 오왕 료(遼)의 아들 경기(慶忌)를 말한다. 용력이 있었으나 합려가 보낸 자객 요리(要離)에 의해 살해되었다.

12)하육지(夏育之)/ 춘추 때 위(衛)나라 출신의 력사다. 천균(千鈞), 즉 10톤의 무게를 들 수 있다고 했다. 후에 노나라 대부 신수(申繻)에게 살해되었다.

13)소관(昭關)/ 지금의 안휘성 함산현(含山縣) 북의 소현산(小峴山)에 있었던 춘추시대 초나라와 오나라 사이의 관문이다.

14)능수(陵水)/ 율수(凓水)의 다른 이름으로 장강 강변도시 무호시(蕪湖市)와 태호(太湖)로 통하는 하천이다.

15)접여(接輿)/ 춘추 때 초나라의 은사(隱士). 성은 육(陸)이고 이름은 통(通)이다. 접여(接輿)는 그의 자(字)이다. 일부러 미친 척하여 세상을 피해 다녔으며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지어먹는 것을 해결했다.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 “ 楚狂接輿(초광접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공자(孔子)가 그의 나이 62세 때인 초소왕(楚昭王)이 재위하던 기원전 488년에 초나라에 들렸을 때 접여는 공자가 타고 지나가던 수레 옆에서 공자를 비웃으며 노래했다. 공자가 마차에서 내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 했으나 그가 급해 몸을 피해 달아났음으로 이야기를 나룰 수 없었다.

16) 한로(韓盧)/ 한나라 산의 검은 색의 용감한 사냥개

17)오대부(五大夫)/ 전국 때 진나라가 군공에 따라 수여하는 20 등급 중 아래로부터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작위로서 세읍(稅邑) 300호를 받아 조세를 거둘 수 있고 죄를 짓게 될 경우 사면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18)회(懷)/ 지금의 하남성 무쳑현(縣)으로 춘추 때는 정나라 땅이었다가 전국 때 위나라 땅이 되었다.

19)형구(邢丘)/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이다.

20)최저(崔杼)/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46년에 죽었다. 강성(姜姓)으로 씨(氏)는 최(崔)이고 이름은 저(杼)이다. 제나라 공족 출신으로 식읍이 최읍(崔邑)이었기 때문에 씨로 삼았다. 제영공 8년 기원전 574년 대부 고약(高弱)이 로(盧)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최저가 영공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그 공으로 최저는 경(卿)에 임명되었다. 영공이 태자 광(光)을 폐하고 공자아(公子牙)를 새로운 태자로 세웠다. 이윽고 영공이 죽자 최저는 공자아를 죽이고 태자광을 불러들여 제나라 군주로 앉혔다. 이가 제장공(齊庄公)이다. 이 공으로 해서 최저는 제나라의 정경(正卿)이 되었다. 후에 장공이 자기의 처와 사통하자 시해하고 장공의 동생 저구(杵臼)를 세웠다. 이가 제경공(齊景公)이다. 최저는 스스로 제나라의 우상(右相)이 되고 경봉은 좌상(左相)이 되어 제나라의 국정을 전단했다. 제경공 2년 기원전 546년 최씨 집안에 란이 일어나자 그 틈을 타서 경봉이 최씨들을 멸족시켰다. 최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호는 무자(武子)이다.

21)요치(淖齒)/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284년에 죽은 전국시대 초나라 장수다. 도치(悼齒) 혹은 탁치(卓齒)라고도 한다. 기원전 284년 연나라가 삼진(三晋) 및 진(秦)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를 공격할 때 그는 초왕의 명을 받고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했다. 제민왕은 요치를 제나라 상국에 임명했다. 제민왕이 5국 연합군에 쫓겨 거(莒)로 들어오자 요치는 제민왕의 다리에서 힘줄을 뽑아 대들보에 메달아 죽이고 제나라 영토와 재물들을 연나라와 나누어 가지려고 했다. 제민왕을 모시던 왕손고가 이끄는 거성의 백성들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22)이태(李兌)/ 전국 때 조나라의 대신이다. 무령왕이 작은아들 공자하(公子何)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이태를 조효성왕(趙孝成王)의 태부로 임명하였다. 무령왕이 조나라를 태자의 자리에서 쫓아낸 안양군(安陽君) 장(章)이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태의 반격으로 성공하지 못하자 무령왕이 묵고있던 사구궁(沙邱宮)으로 도망쳤다. 그의 뒤를 추격하여 사구궁으로 진입한 이태는 공자장을 잡아서 죽였으나 그 후환을 두려워한 이태는 사구궁을 포위하여 무령왕을 굶겨 죽였다. 효성왕은 이태를 사구(司寇)로 임명하여 조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23)응(應)/ 지금의 하남성 노산현(魯山縣) 동쪽의 고을로 춘추 때 초, 전국 때 한에 속했다가, 후에 진나라에 할양했다.

24)좌두(莝豆)/ 꼴에 콩을 섞은 말먹이용 여물

25) 평원군(平原君)/ 조나라의 공자 조승(趙勝)을 말한다. 봉지(封地)가 평원(平原 : 지금의 산동성에 평원현(平原縣) 경내)에 있어 평원군이라 했다. 무령왕(武靈王)의 아들이며 혜문왕(惠文王)의 동복동생이다. 혜문왕과 효성왕(孝成王)때 조나라의 상국을 역임했으며 천하의 선비들을 불러 모아 그 문하에 있던 식객의 수가 3천 명에 달했다. 조나라가 장평(長平)에서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크게 패한 후에 진나라 군사들이 한단을 포위하자 한단성 안의 백성들과 군사들이 지쳐서 형세가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평원군은 가산을 털어 백성들과 군사들을 독려하여 3년 동안 진나라 군사들의 포위공격을 막아냈다. 후에 위나라에는 사자를 보내 구원군을 청하게 하고, 자신은 빈객(賓客) 모수(毛遂) 등을 대동하고 원군을 청하기 위해 초나라에 갔다. 이윽고 위나라와 초나라가 원군을 동원하여 조나라를 구원하자 진나라는 한단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26)하동(河東)/ 황하의 동쪽지방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산서성 남부에 설치한 진나라의 군이름이다.

27)상계(上計)/ 지방관이 연말에 본인이나 부하관리들을 시켜서 관할 내의 인구, 재정과 양식, 도적과 옥사 등의 정황을 조정에 보고하는 일을 말한다.

28)소곡(少曲)과 고평(高平)/ 두 고을 모두 지금의 산서성 고평현(高平縣) 일대에 있었다.

29)분형(汾陘)/ 지금의 하남성 양성현(襄城縣) 동북

30)광무(廣武)/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동묵에 있는 광무산(廣武山)을 말한다. 동서의 두 봉에 각각 성을 쌓아 한나라가 황하로 통하는 길을 차단했다. 봉우리 사이의 계곡에는 광무간이라는 하천이 북쪽으로 흘러 황하로 들어갔다. 기원전 203년 초한 쟁패시 항우와 유방이 광무성의 동서 양쪽에 주둔하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설전을 벌린 곳이다.

31)조사(趙奢)/ 전국 때 조나라의 장군이다. 원래 세금을 걷는 전부(田部)의 하급관리로 당시 조나라의 권세가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의 가노들이 징세에 불응하자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가노들을 처형했다. 이에 조사의 사람됨을 알아본 평원군이 조왕에게 조사를 전부의 총책임자로 천거했다. 그러자 조나라의 재정은 튼튼하게 되었다. 후에 장군에 임명되어 조군을 이끌고 출동하여 기원전 270년 한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동하여 연여에 주둔하고 있던 진나라의 군사들을 물리치고 한나라를 구원했다. 그 공으로 조사는 마복군에 봉해졌다. 장평대전을 지고 조나라를 패망으로 이끈 조괄은 그의 아들이다.

32)일체변사(一切辯士)/ 어떤 경우에도 자유자재로 유세를 행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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