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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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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43. 萬石張叔(만석장숙)


  만석군(萬石君)의 이름은 분(奮)으로 그의 부친은 조나라 사람이다. 석은 석(石)씨다. 조나라가 망하자 온(溫)1)으로 옮겨 살았다. 고조가 항적을 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하다가 하내를 지날 때는 석분의 나이는 당시 15세의 소년이었다. 석분은 소리(小吏)가 되어 고조의 시중을 들었다. 고조는 말을 나눌 때 공손하고 예의가 바른 태도를 견지했던 석분을 매우 총애했다. 고조가 석분에게 물었다.

「네 집에는 누가 또 있느냐?」

「홀어머니 한 분이 계시는데 불행히도 실명하셨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여 동생이 모시고 있습니다. 여동생은 거문고를 잘 탑니다.」

「너는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

「온 정성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고조는 석분의 여동생을 불러 미인(美人)으로 삼고 석분은 중연(中涓)2)에 임명하여 올라오는 글과 알현을 청하는 일을 맡아보도록 했다. 이어서 그의 집을 장안성이 척리(戚里)3)로 옮기도록 했다. 그것은 그의 여동생이 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관직은 효문제 때 많은 공로를 쌓아 태중대부(太中大夫)까지 올랐다. 문재나 학문은 없었지만 공손한 태도나 자신에게 엄격함으로는 그와 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문제 때 태자태부였던 동양후(東陽侯) 장상여(張相如)가 면직되어 새로운 태부를 뽑으려고 하자 사람들은 모두 석분을 추천했다. 석분은 태자태부가 되었다. 이윽고 효경제가 즉위하자 구경(九卿)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가 너무 예의가 바르고 겸손한 태도를 견지했음으로 경제는 그를 제후국의 상국으로 보냈다. 석분의 장자는 석건(石建)이고 차자는 석갑(石甲), 삼자는 석을(石乙), 사자는 석경(石慶)이다. 모두 품행이 바르고 부모에게 효성스러웠음으로 관직이 전부 다 2천 석으로 올랐다. 그래서 효경제가 말했다.

「석공과 그 네 아들이 모두 2천 석의 관리이니 남의 신하된 자로써 존귀함과 영예가 그 집에 모두 몰려 있도다!」

그리고는 석분에게 만석군(萬石君)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효경제 말년, 만석군이 상대부의 신분으로 노년을 이유로 들어 관직에서 사퇴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신년이 되면 대신의 자격으로 조정에 나가 하례의식에 참가하기 위해 궁궐문을 지나갈 때는 만석군은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가다가 황제의 거마를 보게 되면 길에 엎드려 경의를 표했다. 자손들 중 비록 소리의 직위라 할지라도 집에 와서 인사를 올릴 때는 만석군은 반드시 조복을 챙겨 입고 그들을 대하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자손들 중 잘못을 범한 자가 있으면 책망하지 않고 곁방에 들어가 앉아서 밥상을 받아도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여러 아들이 서로 꾸짖다가 가장 연장자가 육단(肉袒)으로 한사코 사죄하며 자기의 과실을 회개하면 그때서야 비로소 죄를 용서했다. 자손들이 성인이 되어 관모를 쓴 자가 곁에 있으면 쉴 때도 반드시 관모를 쓰고 지내며 단정하고 삼가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동복(童僕)들과도 즐겁게 보냈으나 근엄한 태도는 잃지 않았다. 황제가 하사한 음식을 가끔 집으로 보내면 석분은 반드시 엎드려 머리를 땅에 대고 받은 후에 먹었다. 그가 상을 당했을 때는 애통해 함이 매우 깊었다. 자손들도 역시 그의 가르침을 존중하여 석분과 같이 행동했다. 만석군의 집은 효성과 근신으로 군국에서 이름이 나서 비록 질박한 태도로 생활하는 제노(齊魯) 지간의 유생(儒生)들일지라도 결코 미칠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건원(建元) 2년 기원전 141년, 랑중령 왕장(王臧)이 유가의 학설을 두둔하고 도가의 학설을 폄훼했다는 이유로 죄를 얻었다. 유가들의 글이 문장은 꾸밈이 많지만 질박하지 않다고 생각한 황태후는 지금 만석군의 집안은 말없이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여겨 만석군의 장자 석건을 랑중령으로 막내 석경을 내사(內史)로 삼았다.

 석건이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되었으나 만석군은 여전히 병치래 없이 건강했다. 랑중령이 된 석건이 5일마다 휴가를 얻어 부친에게 문안인사를 다녔다. 그때마다 작은 방으로 들어가 아무도 몰래 시자에게 부친의 안부를 묻고 친히 부친의 내의를 빨고 요강을 깨끗하게 씻어 하인에게 주며 만석군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도록 당부했는데 늘상 그랬다. 랑중령이 된 석건은 할 말이 있으면 사람이 물러가게 한 후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했는데 그 태도가 매우 간절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의론에 있을 때는 마치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조용했다. 이로 인해 황상은 석건을 매우 예를 갖춰 존중했다.

만석군은 거처를 능리(陵里)4)로 옮겼다. 한번은 내사 석경이 술에 취해 집에 올 때 외문 밖에서 수레에서 내리지 않고 탄 채로 그냥 들어왔다. 만석군이 듣고 식사를 하지 않았다. 석경이 걱정하여 육단으로 죄의 용서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종형과 형 석건도 함께 육단을 행하자 만석군이 석경을 책망하며 말했다

「내사는 신분이 귀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여문(閭門)에 들어서면 마을에 사는 장로들은 모두 도망가 숨는데 내사는 수레에 앉은 채 태연하니 원래 그래야 하는가?」

이어서 석경을 용서했다. 그 후로는 석경과 다른 아들들은 이문에 들어설 때는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서 집에 들어왔다.

만석군은 무제 원삭 5년 기원전 124년에 세상을 떠났다. 장자인 랑중령 석건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해 했는데 지팡이에 의지해야만 비로소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1년 후에 석건도 역시 세상을 떴다. 여러 자손들도 모두 효성스러웠으나 석건이 가장 심했고 만석군보다 더했다.

석건이 랑중령이 되었을 때 어떤 일에 대해 상주문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그 일에 대해 내려온 황제의 회신을 읽고 말했다.

「내가 글을 잘못 썼구나!말 마(馬)는 원래 꼬리가 다섯 개인데 오늘 보니 네 개 밖에 없어 한 개가 부족하구나. 황상께서 책망하시면 죽어야 하겠구나!」

그리고는 매우 두려워했다. 위인이 삼가고 신중하기가 비록 이와 같이 작은 일이라도 그랬다.

만석군의 막내아들 석경이 태복의 신분으로 황제가 타는 수레의 마부가 되어 출행 나갔을 때 황상이 수레에 앉아서 앞에 말이 몇 마리가 있냐고 물었다. 석경이 채찍으로 말의 수를 가리켜 직접 센 후에 손을 들어 말했다.

「여섯 말이옵니다.」

형제들 중 석경이 가장 예절을 까다롭게 행하지 않아 사귀기가 쉬웠는데 그래도 삼가하기를 그와 같이 행했다. 후에 석경은 제나라의 상국이 되었는데 제나라 사람들은 모두 만석군의 집의 행실을 앙모했다.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제나라에 치세가 오게 했음으로 제나라 사람들은 그를 위해 석상사(石相祠)를 세웠다.

무제 원수(元狩) 원년 기원전 122년, 태자를 세운 황제가 군신들 중에서 태부를 뽑았는데 당시 패군(沛郡)태수로 있던 석경을 태자태부로 임명했다. 그리고 7년 만에 어사대부로 승진했다.

무제 원정(元鼎) 5년 가을,승상이 죄를 얻어 파면되자 황제가 조명을 어사에게 내렸다.

「만석군은 선제께서 존중했던 대신이며 그의 자손들은 모두 효성스럽다. 이에 어사대부 석경을 승상에 명하고 목구후(牧丘侯) 봉한다.」 그때 한나라는 남쪽으로는 남월(南越)과 동월(東越)을 토벌했으며, 동쪽으로 조선을 치고 북쪽으로는 흉노를 멀리 쫓아냈으며, 서쪽으로는 대완을 정벌하는 등 중국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천자가 해내를 순수(巡狩)하면서 상고 시대로 전해 내려오는 신사(神祠)를 수리하고 복원했으며,태산에 올라 봉선을 올리고 예약을 일으켰다. 공실의 비용이 부족하게 되어 상홍양(桑弘羊)5) 등은 재원을 찾아 나섰다. 왕온서(王溫舒)6)와 같은 관리들은 법을 엄혹하게 적용했으며 아관(兒寬) 등은 문학을 받들었다. 그들은 모두 구경(九卿)의 자리에 올라 정권을 교대로 차지하며 승상의 결제를 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승상이 충직하고 언행을 삼가했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승상의 자리에 9년 동안 있으면서 잘못된 바를 고치게 할만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일찍이 황제의 근신 소충(所忠)과 구경 함의(咸宣)의 죄를 황제에게 치죄토록 청하려고 했으나 복죄시키지 못해 오히려 무고했다는 죄로 벌을 받고 속죄한 일이 있었다.

무제 원봉 4년 기원전 107년, 관동에 가근이 들어 2백만 명에 달하는 유민이 발생했는데 그 중 호적이 없는 자가 40만 명이었다. 공경들이 조정에서 의논하여 그들을 변경으로 옮겨 귀양 보낼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황제는 늙고 또한 신중하기만 승상과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내 승상에게 휴가를 주어 집에서 쉬도록 하고 안건은 어사대부 이하의 관원들이 의논하여 주청을 올리도록 했다.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해 이를 부끄럽게 여긴 승상이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이 경은 총애를 받아 승상의 직을 맡았으나 원래 둔하고 어리석어 나라를 다스리는데 보필하지 못했습니다. 성곽은 무너지고 창고는 비어 수많은 백성들이 유민이 되어 떠돌고 있으니 그 죄는 마땅히 부질(斧質)로 참수형에 해당하나 황상께서는 법대로 차마 치죄를 못하셨습니다. 원컨대 승상과 후의 인장을 돌려드리오니 저의 해골을 돌려주시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저로 하여금 현능한 자의 진로를 막는 행위를 피하게 해 주옵소서.」

천자가 회신했다.

「창고는 이미 비었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유랑하고 있다. 그런데 승상은 그들을 변경으로 옮기자고 해서 민심은 동요되어 불안해 하고 있어 위태하게 만들었소. 그런데 승상은 자리에 물러가려고 하니 그 어려움은 누구에게 떠맡기려고 하는 것이오?」

황제가 문서로 석경을 책망하자 석경은 매우 부끄러워하며 다시 승상의 업무를 보았다.

 석경은 법률을 운용함에 용의주도하고 세심하여 조심하고 삼가했지만 백성들을 위해 어떤 원대한 계획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3년 후인 태초(太初) 2년 중에 석경은 승상의 직으로 재직 중에 죽었다.  시호는 염후(恬侯)다. 그의 후사는 가운데 아들인 석덕(石德)이 이었다. 석경이 석덕을 사랑했음으로 항제가 석덕을 후사로 삼고 그의 후작을 대신하게 했다. 석덕은 후에 태상(太常)7)이 되었다가 죄를 연좌되어 사형에 해당했으나 속죄금을 물고 서인이 되었다. 석경이 승상의 자리에 막 올랐을 때는 만석군의 자손들 중 관리가 되어 2천 석의 자리에 오른 자만 13명이나 되었다. 석경이 죽은 후 점점 죄를 짓고 쫓겨나기 되어 효성과 근신하는 가풍은 더욱 쇠미해졌다.


건릉후(建陵侯) 위관(衛綰)은 대국(代國) 대릉(大陵) 출신이다. 위관은 수레 위에서 펼치는 곡예로 랑이 되어 문제를 모셨다. 연공(年功)이 쌓여 중랑장이 되었다. 위인이 충성스럽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으나 다른 재주는 없었다. 효경제가 태자 시절 좌우의 측근들을 불러 함께 음식을 먹는데 위관만은 병을 칭하고 가지 않았다. 문제가 죽을 때 효경제에게 특별히 당부했다.

「위관은 장자이니 잘 대해야 할 것이다.」

이윽고 문제가 붕어하고 경제가 서자 일 년이 넘도록 옛날 일로 위관을 책망하지 않았다. 위관은 더욱 조심했다.

상림원으로 나가 사냥을 즐겼던 경제가 중랑장으로 있던 위관을 불러 참승(驂乘)으로 삼았다. 궁으로 돌아와 위관에게 물었다.

「경은 오늘 참승이 된 이유를 아시오?」

「신은 단지 수레를 모는 사졸로써 다행히 쓰임을 받아 연공으로 중랑장으로 올랐을 뿐이라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태자 시절 그대를 불렀는게 그때는 오지 않았소. 그 이유가 무엇이었소?」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몸이 아픈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황제가 검을 하사하자 위관이 말했다.

「선제께서 신에게 하사하신 검은 모두 6개나 됩니다. 이에 더 이상 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검이란 사람들이 서로 주기도 하고 바꾸기도 하는 물건인데 경은 아직도 그 검을 모두 갖고 있소?

「아직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황제가 그 여섯 개의 검을 가져오라고 해서 살펴봤는데 모두 여전히 칼집 속에 있었는데 한 번도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 그는 부하인 랑관에게 잘못이 있으면 항상 그 죄를 대신 받고 다른 장군들과는 다투지 않았다. 공이 있으면 항상 다른 장군들에게 양보했다. 황제는 그가 청렴하고 충성스러우며 사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하간왕(河間王)의 태부로 삼았다. 이윽고 오초(吳楚)가 반란을 일으키자 위관을 불러 장군으로 삼아 하간국의 장병들을 이끌고 오초를 공격하도록 했다. 싸움에서 공을 세운 위관은 중위(中尉)가 되었고 3년 후인 효경제 전원6년인 기원전 152년, 다시 군공으로 건릉후(建陵侯)에 봉해졌다. 。

그 다음 해에 황제가 율태자(栗太子)8)를 폐하고 태자의 외삼촌 율경(栗卿)을 주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위관은 장자라 율태자의 일당을 차마 치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황제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 쉬게 하고 질도(郅都)를 시켜 율씨들을 체포케 하여 치죄토록 했다. 율태자의 일이 마무리되자 황제는 교동왕 유철(劉徹)을 태자로 세우고 위관을 불러 태자태부로 삼았다. 그리고 몇 해 후에 위관은 어사대부가 되었다. 그리고 5년 후에 도후(桃侯) 사(舍)를 대신하여 승상이 되었으나 조정에서 상주하는 일은 단지 직분에 속하는 것에 한했다. 처음 관리가 되어 직위가 승상에 이르는 동안에 한 번도 훌륭한 계책을 올린 적이 없었다. 천자는 그런 위관이 돈후하여 어린 태자를 보좌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존중하고 총애하여 하사한 상이 매우 많았다.

승상이 된지 3년 후에 경제가 죽고 무세가 섰다. 건원(建元) 연간에 경제가 병들어 자리에 누었을 때 여러 관리들이 연루된 옥사가 발생했다. 그때 무고하게 벌을 받은 자가 많았던 이유는 위관이 승상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면직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위관은 죽고 그 아들 위신(衛信)이 그 뒤를 이었으나 후에 주금(酎金)9) 사건에 연루되어 후(侯)의 작위를 잃었다.


새후(塞侯) 직불의(直不疑)는 남양(南陽) 사람이다. 랑이 되어 문제를 모셨다. 직불의와 같이 방을 쓰던 동료가 휴가를 얻어 집에 갈 때에 실수로 같은 방을 쓰던 다른 동료의 황금을 가지고 갔다. 이윽고 주인이 황금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직불의를 의심했다. 직불의는 자기가 가져갔다고 사죄하고 시장에서 황금을 사서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고향에 다녀온 사람이 돌아와서 황금을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황금의 주인이 대단히 부끄러워했다. 이 일로 인해 직불의는 장자라고 칭해지게 되었다. 문제가 그 일을 칭송하여 얼마 후에 태중대부로 올렸다. 조정에서 조현을 올릴 때 어떤 사람이 그를 폄하하며 말했다.

「불의의 용모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래서 형수와 몰래 종을 통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 처리해야 합니까?」

직불의가 전해 듣고 말했다.

「나는 형이 없습니다.」

그는 말만 했을 뿐이지 끝까지 그 일을 확실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오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불의는 2천 석의 장군으로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경제 후원년 기원전 144년 어사대부가 되었다. 천자는 오초의 반란군을 진압한 공을 사서 직불의를 새후로 봉했다. 무제 건원 연간에 승상 위관(衛綰)과 함께 죄를 지어 면직되었다.

직불의는 노자의 학설을 공부했음으로 그가 부임한 새로운 곳에서일할 때도 전임자처럼 하고 오로지 다른 사람이 자기가 한 일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할 뿐이었다. 그는 또한 명성을 세우기를 좋아하지 않았음으로 사람들은 그를 장자로 여겼다. 불의가 죽자 아들 직상여(直相如)가 그 작위를 물려받았다. 손자 직망(直望)은 주금(酎金)의 일에 연좌되어 후의 작위를 잃었다.


랑중령 주문(周文)은 이름이 인(仁)이다. 그 선조는 원래 임성(任城) 사람이다. 그는 의사로써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경제가 태자 시절 사인(舍人)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연공이 쌓여 점차적으로 직위가 올라 효문제 때 태중대부가 되었다. 황제의 자리에 막 오른 경제가 그를 랑중령으로 삼았다.

주인(周仁)이란 위인은 신중하고 입이 무거워 무슨 일이던 입밖으로 발설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헤진 옷을 기워 입고 떼에 찌든 속옷을 입고 다니며 결코 빨아 입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경제의 총애를 받았다. 경제가 침실에 드나들며 후궁에서 비밀스러운 희극을 볼 때도 주인은 항상 황제 곁에 있었다. 경제가 붕어하자 주인은 여전히 랑중령이었으나 끝까지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때때로 다른 사람들에 관해 물었다.

「황제께서 스스로 살피십시오.」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헐뜯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경제가 친히 그의 집에 두 번이나 방문했다. 주인은 후에 그의 집을 두 번이나 양릉으로 옮겼다. 황제가 하사한 물품이 심히 많았으나 그는 항상 겸양하며 감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후와 군신들도 그에게 뇌물을 바치려고 햇으나 그는 끝까지 받지 않았다.

무제가 서자 선제의 신하라는 이유로 중책을 맡겼다. 주인이 이윽고 병으로 면직되자 주인은 2천 석의 고관의 신분으로 노년을 이유로 은퇴했다. 자손들도 모두 고관의 자리에 올랐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장숙(張叔)은 이름은 구(歐)로 안구후(安丘侯) 장열(張說)의 서자다. 효문제 재위시 형명학에 밝다고 해서 태자를 받들게 되었다. 그러나 장구가 비록 형명학에 밝기는 했으나 위인이 장자라 경제 때에 이르러 존중되어 항상 구경의 반열에 있었다. 이윽고 무제 원삭 4년 기원전 125년 어사대부 한안국(韓安國)이 면직되자 조칙으로 장구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장구가 관리가 된 이래로 남을 처벌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성실한 태도로써 관직에 임했다. 그의 속관들은 그를 장자로 여기며 감히 그를 속이지 않았다. 황제가 그에게 처리하고 옥사를 넘기려고 하면, 그가 능히 사양할만 하면 받지 않았고, 사양할 수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받아 처결하면서 해당자의 면전에서 결옥 문서를 읽어준 후에 봉함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그의 사람 사랑하기는 이와 같았다. 장숙이 노년으로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음으로 벼슬에 물러나기를 청했다. 그래서 천자는 책서(策書)10)를 특별히 내려 면관시켜 상대부의 봉록으로 퇴직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집은 양릉에 있었고 자손들은 모두가 고관이 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공자가 일찍이 말씀하셨다.「군자는 말을 하는데는 어눌해야 하고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고 했다. 만석(萬石)、건릉(建陵)、장숙(張叔)과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들의 가르침은 엄숙하지 않고도 이루어지고 엄숙하지 않고도 다스려진 것이다. 새후는 참으로 교묘했으며 주문은 지나치게 공손했음으로 군자들이 그들을 비난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행은 위선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만을 봤을 때는 군자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만석장숙열전 끝>

  

주석


1) 온(溫)/ 지금의 하남성 온현(溫縣)이다.

2) 중연(中涓)/ 청소를 담당한 관리다.

3) 척리(戚里)/ 한나라가 조성한 장안성 내의 외척들이 거주하던 동네다.

4) 능리(陵里)/ 지금의 섬서성 흥평현(興平縣)으로

5) 상홍양(桑弘羊)/ 대사농과 어사대부를 지낸 한무제 때 사람이다.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을 행하고 염철의 전매제도를 주창했다.

6) 왕온서(王溫舒)/ 중위(中尉)와 소부(少府)를 지낸 사람으로 법을 가혹하게 적용한 혹리로 유명하다.(혹리열전)

7) 태상(太常)/ 종묘(宗廟)의 의례(儀禮)를 관장했던 한나라의 구경(九卿) 중의 하나로 진나라 때 봉상(封常)으로 불리다가 한경제 때 태상으로 바꿨다. 봉록은 2천석으로 일반적으로 충효(忠孝)스럽고 몸가짐이 조신하고 덕이 높은 사람을 임명했다.

8) 율태자(栗太子)/ 경제의 폐태자 유영(劉榮)을 말한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147년에 죽었다. 그의 생모가 율비(栗妃) 였음으로 율태자라고 불렀다. 경제 전7년 기원전 150년, 태자의 자리에서 폐해져 임강왕(臨江王)으로 재직 중 3년 되던 해에 종묘의 빈터에 궁실을 지은 사실이 조정에 전해져 경사로 소환되었다가 옥중에서 자살했다.

9) 주금(酎金)/ 한나라 때의 제도로써 종묘에 제사를 올릴 때 제후들이 제사의 비용을 돕기 위해 헌남하는 금품이다.

10) 책서(策書)/ 황제가 신하에 내리는 사령장으로 식읍에 봉하거나, 벌을 내리거나, 관직을 면한다는 멸령을 적은 간책(簡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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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계포란포열전(季布欒布列傳)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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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09-08-20
[일반] 장석지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 42

열전42. 張釋之馮唐(장석지풍당) 장정위(張廷尉)의 이름은 석지(釋之)이고 도양(堵陽)1) 사람이다. 자는 계(季)다. 그는 장중(張仲)이란 형과
운영자 10-06-13
[일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45-1. 편작

열전45-1. 편작(篇鵲) 1257. 扁鵲言醫(편작언의), 편작은 의술을 말하여 1258. 爲方者宗(위방자종), 의자(醫者)들의 종주(
운영자 10-06-15
[일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45-2. 창공 순우의(淳于意)

열전45-2. 창공(倉公) 순우의(淳于意) 태창공(太倉公)은 제나라 태창(太倉)1)의 장(長)이었다. 임치(臨菑) 사람으로 성은 순우(淳于) 씨이고
운영자 10-06-15
[일반] 전숙열전(田叔列傳) 44. 전숙, 전인(田仁), 임안(任安)

열전44. 田叔·田仁·任安(전숙·전인·임안) 전숙(田叔)이라는 사람은 조나라 형성(陘城)1) 출신이다. 그의 선조는 제나라 전씨들의 후예
운영자 10-06-15
[일반]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43

열전43. 萬石張叔(만석장숙)   만석군(萬石君)의 이름은 분(奮)으로 그의 부친은 조나라 사람이다. 석은 석(石)씨다. 조나라가 망하자 온(溫)1)
운영자 10-06-15
[일반]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56

열전56. 서남이(西南夷) 1310. 唐蒙使略通夜郞(당몽사략농야랑) 당몽(唐蒙)을 사자로 보내 야랑(夜郞) 국과 통호하고 1311. 而邛
운영자 10-08-26
[일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57

열전57. 사마상여(司馬相如) 1313. <子虛>之事(<자허>지사) <자허부(子虛賦)>에 실린 일과 1314. <大人>賦說(<
운영자 1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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