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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6-15 15:58:295531 
전숙열전(田叔列傳) 44. 전숙, 전인(田仁), 임안(任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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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열전44. 田叔·田仁·任安(전숙·전인·임안)


전숙(田叔)이라는 사람은 조나라 형성(陘城)1) 출신이다. 그의 선조는 제나라 전씨들의 후예다. 전숙은 검술을 즐겨했고 황로학을 악거공(樂巨公)으로부터 배웠다. 전숙이라는 위인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청렴했으며 이를 스스로 즐겨하며 여러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했다. 조나라 사람들이 전숙을 조나라의 상국 조오(趙午)에게 천거하자 조오는 조왕 장오(張敖)에게 전숙을 천거했다. 조왕이 전숙을 랑중(郞中)으로 삼았다. 몇 해가 지나는 동안 조왕은 전숙이 정직하고 청렴결백한 사람으로 현능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미처 그의 자리를 옮겨주지 못했다.

한 7년 기원전 200년, 진회가 대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가 친정하여 죽이고 조나라 땅을 지나가게 되었다. 조왕 장오가 몸소 상을 바쳐들고 음식을 내오는데 그 태도가 매우 공손했으나 고조는 두 다리를 벌려 앉으면서 조오에게 심한 언사를 퍼부었다. 당시 조나라 상국 조오 등 십수 명이 보고 모두 화가나서 조왕을 찾아가 말했다.

「극진한 예를 다하여 황제를 받드는 우리 왕을 황제가 대하는 태도를 보았습니다. 신 등은 청하건대 란을 일으키겠습니다.」

조왕이 손가락을 깨물에 피를 흘리며 말했다.

「선부가 잃은 나라를 폐하께서 찾아주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시체에서는 구더기기 끓고 있을 것이오. 공들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이오? 다시는 그런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마시오!」

관고(貫高) 등이 듣고 말했다.

「우리 조왕은 장자라 남에게 입은 은덕을 배반할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만 비밀리에 서로 모의 하여 황제를 시해하기로 모의했다. 그러나 그들의 모의가 발각되자 한나라 조정은 조칙을 내려 조왕과 반란을 주도한 조나라의 신하들을 모두 체포하도록 했다. 조오 등은 모두 자살했으나 관고 만이 홀로 죽지 않고 체포되었다. 그때 한나라 조정이 조서를 내려 말했다.

「조나라에 감히 왕을 따라 나선자가 있다면 3족을 멸하리라!」

그러나 맹서(孟舒)、전숙(田叔) 등 10여 명만이 적생의 수의를 입고 스스로 머리를 깎고 차꼬를 차고 왕실의 가노라고 칭하면서 조왕을 따라 장안에 들어갔다. 관고가 일의 전말을 분명하게 밝혔음으로 조왕 장오는 석방되었으나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선평후(宣平侯)로 강등 되었다. 장오가 황제에게 전숙 등 10여 명에 대해 선처를 부탁했다. 황제가 모두 불러 이야기를 나누어본 결과 당시 한나라 조정의 관리들 중 아무도 그들과 비교해서 뛰어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황제가 기뻐하여 그들을 모두 군수나 제후들의 상국으로 임명했다. 전숙이 한중(漢中) 태수로 재직 중에 고후가 죽자 여씨 종족들이 일으킨 란을 대신들이 주살하고 효문제를 옹립한 사건이 일어났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문제가 전숙을 소환하여 물었다.

「공이 천하의 장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소?」

「신이 어찌 장자라는 칭호를 감당하겠습니까?」

「공이 장자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오.」

전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운중(雲中) 태수 맹서(守孟)야 말로 장자입니다.」

그때 맹서는 흉노가 대거 장성을 넘어 침입해와 약탈했는게 그 중 운중이 더욱 심했다는 이유로 태수직에서 면직된 상태에 있었다. 황제가 말했다.

「선제께서 맹서를 운중태수로 임명하여 10여 년을 두고 보셨는데 흉노가 한 번 침입하자 맹서는 굳게 지키지도 못하고 또한 전사한 사졸들이 수백 명이었소. 장자가 어찌 그 부하들을 죽일 수 있단 말이오? 공은 무슨 이유로 맹서를 장자라고 말하는 것이오?」

전숙이 머리를 땅바락에 부딪치며 말했다.

「그래서 맹서를 장자라고 했습니다. 무릇 관고 등이 모반을 일으켰을 때 황제께서 조칙을 내려 조나라에 만약 조왕 장오를 따르는 자가 있다면 삼족을 멸하겠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맹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차꼬를 찬 채로 조왕이 있는 경사로 들어와 몸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어찌 자신이 죽음을 면하고 운중태수가 될 줄 알았겠습니까? 한과 초가 서로 대치했음으로 사졸들이 모두 지쳐있는 정황 하에서 흉노 모돈(冒頓)이 북이(北夷)를 새로이 정벌하여 복종시킨 여세를 몰아 우리의 변경을 침범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명을 발하지 못하고 있을 때 사졸들은 서로 다투어 성에 의지하여 죽을 힘을 다해 아버지를 위한 자식처럼, 형을 위한 동생처럼 싸웠음으로 전사자가 수백 명이 발생했습니다. 맹서가 어찌 병사들에게 억지로 싸움을 하라고 시켰겠습니까? 그래서 맹서를 장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황제가 탄식했다.

「아, 현능한 맹서여!」

황제는 맹서를 불러 다시 운중태수로 삼았다.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 전숙은 법에 저촉되어 관직을 잃었다. 양효왕이 자객을 시켜 오나라 상국 원앙(袁盎)을 살해하자 경제가 전숙을 불러 양나라에 가서 사건의 진상을 알아오라고 시켰다. 전숙이 그 일에 대한 구체적인 내막을 알아가지고 돌아와 고하자 경제가 물었다.

「양왕이 그 일을 저질렀는가?」

전숙이 대답했다.

「진은 죽어 마땅합니다. 양왕이 그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황상께서는 양왕의 일을 지나치게 추궁하지 마십시오.」

「어쌔서요?」

「지금 만일 양왕을 주살하지 않는다면 한나라의 법은 유명무실해지고 만일 법대로 양왕을 주살한다면 태후께서 식사를 해도 맛을 느끼지 못하고 또한 침상에 누워도 편안한 마음을 갖을 수 없으니 이는 폐하의 우환이 될 것입니다.」

전숙을 대현이라고 생각한 경제는 그를 노나라 상국으로 삼았다.


전숙이 노나라 상국으로 부임하자 백성들이 스스로 찾아와 상국에에게 노왕이 그들의 재산을 탈취해갔다고 송사를 제기한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전숙은 그 중에 우두러미 20여 인을 붙잡아 곤장 50대를 치고 나머지는 손바닥을 20대를 때린 후에 화를 내며 말했다.

「노왕은 그대들의 주인이 아니던가? 어찌 감히 그대들의 군주를 비난하는가?」

노왕이 듣고 크게 부끄러워하며 그의 부고에서 돈을 꺼내 상국에서 변상하도록 했다. 그러자 전숙이 말했다.

「왕은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고 다시 상국에게 보상하라고 하니 이것은 왕은 악행을 행하고 그의 상국에게는 선행을 행하라고 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제가 대신 백성들에게 보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왕은 자기 자신이 직접 백성들에게 모두 보상했다.

 노왕은 사냥을 좋아했다. 그래서 상국 전숙은 항상 호종하여 사냥터가 있는 원림(苑林)에 들어갔다. 노왕은 번번이 상국에게 관사에 쉬라고 명했다. 상국이 사냥터에 나와서는 늘 햇빛을 쪼이며 노왕이 사냥터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왕이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 공관에 들어가 쉬라고 했지만 상국은 끝까지 폭염 속에서 기다리면서 말했다.

「왕께서 사냥터에서 햇빛에 쏘이고 이슬을 맞으며 지내는데 내가 어찌 홀로 관사에 들어가 편히 쉴 수 있겠는가?」

노왕은 결국 그 일로 인해 오래 걸리는 사냥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전숙이 관직에 있다가 죽자 노왕이 백금의 황금을 주어 그의 제례에 쓰드록 했다. 어린 아들이 받지 않으며 말했다.

「백금의 돈으로 부친의 명성을 훼손시킬 수 없습니다.」


전숙의 아들 전인(田仁)은 신체가 건장하여 대장군 위청(衛靑)의 사인이 되어 여러 번 흉노 정벌전에 참가했다. 위청이 전인을 천거하자 전인은 낭중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녹봉이 2천 석인 석승상의 장사(長史)2)가 되었다가 관직을 잃었다. 그 후에 황제가 전인을 시켜 삼하(三河)3)를 몰래 조사하도록 시켰다. 동쪽을 순행한 황제는 전인이 조사하여 보고한 안건이 모두 이치에 맞았음으로 기뻐하여 그를 경보도위(京輔都尉)4)에 임명했다. 한 달 뒤에 다시 사직(司直)5)으로 자시를 옮겨 태자의 사건6)에 연루되어 죄를 얻었다. 그때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태자와 싸웠던 승상7) 유굴리(劉屈釐)8)가 사직 전인에게 명하여 성문을 닫고 지키라고 했으나 전인은 태자를 성문 밖으로 놓아주었다. 이에 형리에게 전인을 잡아 사형에 처하게 했다. 일설에는 장릉령 차천추(車千秋)가 전인이 군사를 일으켰다고 고변하여 전인의 일족이 멸족되었다고 했다. 형성(陘城)은 지금의 중산국(中山國)의 경내에 있다.


태사공이 말한다.

공자가 ‘ 머무르고 있는 나라가 어디이건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에 관한 말을 듣는다.’라고 했는데 이는 전숙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의를 생각하여 현능한 사람을 잊지 않았으며 주군의 미덕을 드러내고 과오를 덮었다. 그와 나는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그를 함께 논평했다.


저선생(褚先生)이 말한다.

내가 랑의 신분이었 때 전인이 임안(任安)과 서로 친했다고 했다. 임안은 형양(滎陽) 출신이다. 어렸을 때 고아가 되어 빈곤하게 살았음으로 남을 위해 수레를 끌다가 어떻게 해서 장안에 들어오게 되어 머물며 하급 관리의 자리나마 구했으나 기회가 닿지 않아 결국 스스로 호적을 만들어 무공(武功)에 정착했다. 무공은 부풍(扶風)9)의 서쪽 경계에 있던 작은 고을로 골짜기 입구는 촉(蜀)으로 통하는 잔도(棧道)가 가까이 있었다. 임안은 무공이 작은 고을이기 때문에 호족이 없어 지위를 쉽게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곳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임안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구도(求盜)와 정부(亭父)10)와 정부(亭父)가 되었고 후에는 정장(亭長)11)이 되었다. 임안은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냥을 나가서 잡은 사슴이나, 꿩, 토끼 등을 사람들에게 분배하고 사냥할 때의 맡은 일도 노인과 어린아이 및 장정들을 어렵고 쉬운 것을 구분하여 안배했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했다.

「아무 근심이 없구나! 임소경은 평등하게 분배할 줄 알고 지략이 있도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모이게 하니 참석한 자기 수백 명이었다. 임소경이 그들에게 물었다.

「아무개는 어째서 오지 않았소?」

사람들은 모두 그가 사람을 그렇게 빨리 인식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후에 그는 삼로(三老)12)에 임명되었으며 다시 친민(親民)13)에 천거되어 삼백석(三百石)의 관리14)에 임명되어 백성들을 다스렸다. 후에 황제가 출행했을 때 공장(共帳)15)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음으로 파면되고 말았다.

후에 대장군 위청(衛靑)의 사인으로 들어가 전인(田仁)과 만나게 되어 두 사람이 같이 위장군 문하가 되어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 모두 집이 가난했음으로 대장군의 가감(家監)에게 비위를 맞출 수 있는 돈이 없었다. 그래서 가감은 그들을 사람을 무는 사나운 말을 기르게 했다. 두 사람이 같이 침대에 누워 잠을 자다가 전인이 조용히 말했다.

「가감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그러자 임안이 대꾸했다.

「장군도 사람을 볼줄 모르는데 어찌 가감인들 알 수 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위장군이 두 사람을 이끌고 평양공주(平陽公主)16) 집을 방문했다. 공주의 가령(家令)은 두 사람과 기노(騎奴)들을 방석 하나에 앉혀 밥을 먹게 했다. 두 사람은 허리의 칼을 뽑아 방석을 잘라 떨어져 앉아서 먹었다. 공주의 가노들이 이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싫어했으나 감히 책하지는 못했다.

후에 황제의 명으로 위장군의 사인 중에서 랑을 뽑게 되었다. 장군은 사인들 중 부유한 자를 골라 그들에게 안장과 마구에 강의(絳衣)와 옥구검(玉具劍)을 갖추게 한 후에 궁궐로 데려가 고하려고 했다. 그때 마침 현능한 대부라고 이름이 높은 소부(少府)18) 조우(趙禹)19)가 위장군에 집에 들리자 위장군은 천거하려는 사인들을 불러 그에게 보였다. 조우가 차례로 몇 가지 질문을 해 봤지만 10명 중 한 사람도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지략을 갖춘 자가 없었다. 조우가 위장군에게 말했다.

「장군의 문하에는 반드시 장군이 될만한 동류의 사람이 있다고 나는 알고 있습니다. 옛말에 전하기를 ‘그 주인 된 사람을 알 수 없으면 그가 부리는 사람을 보고, 그의 아들을 알 수 없으면 그가 사귀는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지금 조명을 따라 장군의 사인을 천거하라고 한 이유는 이 일로써 장군께서 능히 현능한 문무(文武)의 인사들을 얻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장군께서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만 뽑아 천거하려고 하시는데 그들은 모두 지략이 없어 마치 비단 옷을 입혀 놓은 나무인형과 같은 자들입니다. 장차 어찌하려고 하십니까?」

그리고는 조우는 위장군 집의 100여 명에 달하는 사인들을 모두 불러 차례로 물어 전인과 임안 두 사람을 얻고서는 말했다.

「오로지 이 두 사람만이 쓸만 하고 나머지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자들입니다.」

두 사람이 가난한 사실을 알고 마음이 편치 못하여 불만족스러웠다. 조우가 가자 위장군이 두 사람을 불러 말했다.

「두 사람으 각자 알아서 마구, 안장 및 강의를 새로 준비하도록 하시오.」

두 사람이 대답했다.

「집이 가난하여 마구를 살 돈이 없습니다.」

위장군이 화를 내며 말했다.

「지금 그대 두 사람은 스스로 자기 집이 가난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내가 그대들을 천거하려고 함에도 앙앙불락하며 나에게 무슨 선심이라고 베풀듯이 하는데 어째서인가?」

위장군은 부득이 황제에게 부책(簿冊)만을 만들어 고했다. 이윽고 위장군의 사인을 접견한다는 황제의 조명이 내리자 두 사람이 황제 앞으로 나아가 뵈었다. 황제가 직접 묻자 두 사람은 서로 양보하여 상대방을 칭찬했다. 전인이 먼저 말했다.

「손에 북채와 북을 들고 군문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사대부들로 하여금 전투에서 기꺼이 죽을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제가 임안에 못 미칩니다.」

임안도 전인을 평가했다.

「무릇 혐의를 판결하고 시비를 가리며 관리를 다스려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하는 마음을 먹지 않게 하는 능력은 제가 전인보다 못합니다.」

무제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훌륭하다.」

황제는 임안을 북군을 감호(監護)하게 하고 전인은 하상(河上)으로 보내 변방의 둔전과 곡식을 감독하도록 시켰다. 이로써 두 사람의 이름은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에 임안은 익주자사(益州刺史)20)가 되었고 전인은 승상부의 장사(長史)로 승진했다. 전인이 서장을 황제에게 올렸다.「천하의 각군 태수들 대부분이 법을 어겨 사리를 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삼하(三河) 지역이 더욱 심합니다. 이에 신은 먼저 삼하를 조사하여 밝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삼하의 태수들은 모두 궁중 내의 귀인들에 의지하고 있거나, 삼공(三公)과 친척관계에 있어 두려워하거나 거리끼는 바가 없습니다. 마땅히 먼저 삼하의 지역을 바로잡아 천하의 간사한 관리들에게 경종을 울려야 할 것입니다.」

당시 하남과 하내 태수는 모두 어사대부 두주(杜周)21)의 부형자제(父兄子弟)들었고,하동태수(河東太守)는 승상 석경(石慶)의 자손들이었다. 그때 석씨들은 9명이 2천석의 고관 자리에 있어 바야흐로 권세와 존귀함이 한창 때였다. 전인이 황제에게 상서를 올려 여러 번 이 일을 고했다. 이에 어사대부 두주와 석씨들은 사람을 보내 전소경(田少卿)에게 사죄하며 말했다.

「우리들이 감히 다른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컨대 소경께서는 무고하여 우리를 더럽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전인은 이미 삼하 지역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삼하의 태수들을 모두 체포하여 형리에 넘겨 사형시켰다. 전인이 경사에 돌아와 복명하자 무제가 기뻐하며 전인은 능히 권세가 있거나 강포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승상부의 사직(司直)에 임명했다. 이로써 전인의 이름은 천하를 진동시켰다.후에 태자의 거병사건이 일어나자 승상 유굴리(劉屈釐) 가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나와 사직이었던 전인에게 성문을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 전인은 태자가 황제와는 골육지친일 뿐만 아니라 부자지간의 일에는 너무 깊이 간여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서 태자의 일행으로 하여금 여러 능침(陵寢)이 있는 곳을 통과하게 했다. 당시 감천궁(甘泉宮)에 머물고 있던 황제가 어사대부 포승지(暴勝之)를 보내 승상을 책망하도록 했다.

「무슨 이유로 태자를 풀어주었는가?」

승상이 포승지를 통해 고했다.

「성문을 지키던 사직이 명을 위반하고 성문을 열어 태자를 놓아주었습니다.」

이어서 황제게 서장을 올려 사직의 죄를 묻기 위해 체포할 수 있다고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전인은 형리에게 넘겨져 사형에 처해졌다.


그때 임안은 북군의 사자가 되어 호군하고 있었다. 태자가 수레에 서서 북군이 지키는 남문 밖에서 임안을 불러 부절을 주고 군사를 출동시키라고 했다. 임안이 부절을 받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성문을 닫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무제는 임안이 거짓으로 부절을 받았다가 태자에게 붙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임안이 북군의 돈을 관리하는 말단 관리의 부정을 적발하여 태형을 쳐서 모욕을 준 일이 발생했다. 그 관리가 서장을 황제에게 올려 임안이 태자에게 부절을 받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고했다.

「원컨대 저에게 정예한 군사를 주시기 바랍니다.」

서장을 받아 읽어 본 황제가 말했다.

「이는 세상 물정에 노련한 관리로다! 거병한 태자를 보고 앉아서 승패를 관망하다가 이기는 쪽을 따르려고 하는 두 가지 마음을 품고 있는 자로다. 임안은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음에도 내가 항상 살려주었다. 오늘 다시 속이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참으로 불충한 자로다!」

임안을 형리에게 넘겨 사형에 처하게 했다.무릇 달이 차면 기울고 사물이 성하게 되면 쇠하게 됨은 천지 간의 법칙이다. 나아갈 때만 알고 물러날 때를 모르며 오래도록 부귀한 지위에 있게 되면 그것이 빌미가 되어 화가 미친다. 따라서 범려(范蠡)가 월나라에서 벼슬과 작위를 사직하고 월나라를 떠나 그 이름이 후세에 전하여 만세토록 잊혀지지 않고 있으니 어찌 그를 지혜를 따를 수 있겠는가? 후세 사람들은 진퇴를 결정할 때는 이를 경계로 삼기 바란다.


<전숙열전 끝>


주석

1) 형성(陘城)/ 지금의 하북성 무극현(無極縣) 동북으로 당시의 정식 지명은 고형현(苦陘縣)이었다.

2) 장사(長史)/ 한 대의 승상부 속관으로 승상을 도와 구경(九卿)의 일을 조정했다. 승상부에 속하는 관리의 장으로 녹봉은 천석이다..

3) 삼하(三河)/ 하남(河南), 하동(河東), 하내(河內) 삼군을 말한다. 하남군은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 동쪽, 하동군은 산서성 하현(夏縣) 서북, 하내는 하남성 무척(武陟)현 서남이다.

4) 경보도위(京輔都尉)/ 한나라 때 황도 장안과 그 12개의 속현을 묶어 내사(內史)를 두었으나 한무제 태초 원년 기원전 104년 경조윤으로 개칭했다. 경조윤(京兆尹)의 관할 구역에 군사와 치안에 관한 일을 관장했다. 녹봉은 2천 석이다.

5) 사직(司直)/ 한무제 원수(元狩) 5년 기원전 118년에 설치한 관직으로 승상을 보좌하여 관리들을 감찰하고 범법자를 검거하는 책임을 맡았다. 승상의 속관 중 직급이 가장 높았다. 녹봉은 2천 석이다.

6) 태자의 사건/ 무고(巫蠱)의 란을 말한다. 승상 公孫賀의 부인이 황제를 저주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을 환관 강충(江充)이 조사 책임자가 되면서 평소에 사이가 나빴던 태자 유거를 모함하자 유거가 강충을 죽여 일어난 란이다. 이 사건으로 태자와 태자의 아들을 포함하여 연루되어 살해된 자가 4만 명에 달했다.

7) 원문은 좌승상이나 서한 초기 설치한 좌.우 2명의 승상을 두던 제도는 한문제 2년(전178) 한 명의 승상으로 통합되었고 또한 태자의 란을 진압한 당시의 승상은 유굴리 였다. 좌승상은 승상의 연문(衍文)이다.

8) 유굴리(劉屈釐)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90년에 죽은 서한의 대신이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아들로 일찍이 탁군(涿郡) 태수가 되었다가 한무제 51년, 정화(征和) 2년(한무제 51년) 그의 처가 한무제를 저주한 무고죄(巫蠱罪)에 연루되어 그의 일족과 함께 요참형에 처해졌다.

9) 부풍(扶風)/ 한나라 때 장안을 포함한 수도 주위에 설치한 행정구역 중 하나로 위성(渭城) 이서를 관할하는 우부풍(右扶風)의 준말이다. 장안을 관할하는 경조윤(京兆尹), 장릉(長陵) 이북을 관할하는 좌풍익(左馮翊)과 함께 삼보(三輔)라고 했다.

10) 구도(求盜)와 정부(亭父)/ 도적을 쫓아 체포하는 일을 하는 정(亭)의 하급관리고 정부는 정의 일반 업무를 보는 하급관리다.

11) 정장(亭長)/ 진(秦)나라가 제정한 말단 지방행정조직으로 한나라가 답습했다. 매 10리 마다 정(亭)을 설치하고 그 책임자인 정장에게 치안과 소송사건을 관장하게 했다. 한나라를 창건한 한고조는 산동성 패현(沛縣)의 사수정(泗水亭)의 정장 출신이다.

12) 삼로(三老)/ 매 10정을 묶어 향(鄕)이라 했는데 향에는 현에서 지명하는 삼로 한 명을 두어 향민들의 교화를 담당하게 했다.

13) 친민(親民)/ 향읍의 일을 관장하는 지방관리로 백성들을 교화하여 선으로 이끄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史記會注考)

14) 삼백석(三百石)의 관리/ 한나라 제도에 만 호 이상 고을의 현령의 녹봉은 천 석에서 육백석이고 만 호 이하의 현령은 오백 석에서 삼백 석이었다. 즉 임안은 만 호 이하의 현령에 임명되었음을 말한다.

15) 공장(共帳)/ 즉 공장(供帳)으로 황제가 출행할 때 소요되는 장막과 휘장 등을 공급하는 일이다.

16) 평양공주(平陽公主)/ 한경제의 장녀이고 한무제의 누이다. 원래는 양신장공주(陽信長公主)라고 불렀으나 조참(曹參)의 증손 평양이후(平陽夷侯) 조시(曹時)에게 출가하여 평양공주라고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일찍이 무제에게 이연년(李延年)을 천거하고 다시 무제에게 원래 자기 집에서 노래부르는 가희였던 위자부(衛子夫)를 무제에게 보여 후에 황후가 되게 하였다. 조시가 악질어 걸려 별거하다가 무제의 조칙으로 대장군 위청(衛靑)에게 개가했다.

17)강의(絳衣)와 옥구검(玉具劍)/ 한나라 때 궁궐을 지키고 황제를 호위하는 숙위(宿衛)들이 입는 아주 진한 붉은 옷을 말하고 옥구검은 칼집의 입구와 칼자루에 옥으로 장산한 검을 말한다.


18) 소부(少府)/ 전국시대 때 시작된 관제로써 진한(秦漢)이 답습했다. 진한 때의 9경 중의 한 명으로 산과 바다, 소택지에서 나오는 수입 및 황실에서 운영하는 수공업을 관장하여 황제의 사적인 재산을 관리하는 장관이다. 녹봉은 중2천석이다.

19) 조우(趙禹)/ 서한의 대신으로 지금의 섬서성 무공시(武功市) 서남 태(斄) 출신이다. 현의 말단 관리인 좌사(左史)의 신분으로 경사로 불려가 조정의 관리가 되었다가 청렴함으로 승진되어 영사(令史)가 되어 승상 주아부(周亞夫)를 모셨다. 무제 때 직급이 태중대부로 올랐고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법을 엄격하게 집행한 혹리로써 장탕과 함께 율령을 제정했다.(혹리열전)

20) 자사(刺史)/ 한무제 원봉 5년(전 106) 전국의 행정구역을 13자사부로 나누고 매 주마다 자사를 두어 관할지역의 관리들을 감찰하게 했다. 봉록은 600석으로 군의 태수보다 낮았다.

21) 두주(杜周)/ 태어난 해은 알 수 없고 기원전 94년에 죽은 한무제 때의 혹리다. 자는 장유(長孺)다. 자금의 하남성 남양시(南陽市) 서남 경내의 두연(杜衍) 출신이다. 원봉(元封) 2년(전109년) 정위(廷尉) 직을 맡았던 혹리 장탕(張湯)의 속관인 사(史)가 되었다. 무제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어사중승(御史中升)이 되었다. 옥사를 다스릴 때 법에 의하지 않고 오로지 황제의 뜻에 부합했음으로 장탕의 후임으로 정위가 되어 옥에 갇히는 백성들이 날이 갈 수록 늘어나 10만 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천한(天漢) 2년 (전99) 정위의 직에서 물러나 집금오(執金吾)로 자리를 바꾸었다. 천한 3년 도적을 소탕하고 상홍양(桑弘羊) 등의 사건을 처리하는데 공을 세웠다고 해서 어사대부로 승진시켰다. 후에 자손들은 모두 관리가 되고 자신은 삼공의 작위를 누리며 재산은 수만 관에 달했다.



보임안서(報任安書)

- 사마천이 임안에서 쓴 편지 -


사마천이 자신의 친구인 임안(字:少卿)에게 보낸 유명한 서신이다.이 서신은 [한서(漢書)]의 [사마천전(司馬遷傳)] 및 [문선(文選)] 권41에 수록되어 있다. 사마천이 낭중(郎中)의 벼슬에 오르면서 같은 직위의 이릉(李陵)을 만나게 되었고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이릉이 죄를 지었을 때 이를 변호하다 황제에게 미움을 사 투옥되었다. 궁형의 치욕스런 형벌을 받고 다시 태사령(太史令)이 되어 발분하여 사기를 완성시킬 무렵, 옛친구 임안(任安)이라는 장수가 황제와 태자간의 무고(巫蠱)의 난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게 되자 임안에게 보낸 서한이 보임안서(報任安書 :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라고도 한다.) 사마천은 형을 받은 후 그 동안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불만과 울분의 심경을 서한에서 오히려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비장하게 서술하고 있다. 미국의 사기연구학자 버튼 윗슨은 이 서한의 작성연대에 관해 거론되고 있는 두 개의 설에 대해 補論으로 언급하고 있음이 흥미롭다. (박혜숙 역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 한길사 1995년.p247~253 참조)보임소경서는 구절구절이 현대인의 인생사와 생활사를 꿰뚫어보는 듯한 생생한 인간들의 감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쳐가고 있다.

소경족하(少卿足下)지난 번에 보내주신 편지에서 저에게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고 인재를 천거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시는 뜻이 너무도 간절하였습니다. 아마도 제가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속된 사람들의 말에 따른다고 생각하시고 책망하시는 듯합니다만 저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비록 보잘것 없는 존재이기는 하나 군자들의 가르침만은 거듭 귀에 담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저 자신은 비천한 처지에 빠진 불구자입니다. 행동을 하기만 하면 남의 비난을 받으며, 더 나아지고자 하나 도리어 더 나빠질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홀로 울울하고 절망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습니다. 속담에 말하길 '누구를 위해 하는가, 누구더러 들으라고 하는가 했습니다. 종자기(種子期)가 죽고 난 후 백아(伯牙)는 두 번 다시 금(琴)을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행동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하여 화장하는 것입니다. (士爲知己用, 女爲說己容)그러나 저와 같은 사람은 신체가 이미 망가졌으니 아무리 수유(隨候)나 화씨 (和氏)의 구슬과 같은 재능이 있고 행동은 허유(許由).백이(伯夷)와 같이 개결(介潔)하다 할지라도 끝내 영예를 얻지 못할 것이며, 도리어 남의 비웃음이나 당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기에나 족할 따름입니다.당신의 편지에 대해 마땅히 답을 올려야 했지만 마침 황제를 좇아 동쪽 지방을 다녀 왔으며 또 제 개인적인 일에 쫓겼습니다. 만나뵌 지가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 너무나 바빠서 저의 속마음을 아뢸 수 있는 틈이 잠시도 없었습니다. 지금 소경께서는 불측의 죄를 안고 게시는데 만 1개월이 지나 형을 집행하는 12월이 임박하였습니다. 저는 또 천자를 좇아 옹(雍)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혹시라도 갑자기 당신께서 차마 말 못할 일을 당하시고 저는 끝내 저의 분만(憤만)을 가까운 사람에게 말할 수도 없게 된다면 당신의 혼백은 영원히 가고 저의 한(恨)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의 고루한 생각을 대략이나마 말씀드리고자 하며, 오랫동안 답장 올리지 못한 것을 허물치 말아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제가 듣건대, 자신의 몸을 수양하는 것은 지(智)의 표시이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은 인(仁)의 실마리이며, 주고 받는 것은 의(義)가 드러나는 바이며, 치욕을 당하면 용(勇)을 결단하게 되며, 뜻을 세우는 것은 행동의 목적이라고 합니다. (修身者智之府也, 愛施者仁之端也, 取予者義之符也, 恥辱者勇之決也, 立名者行之極也) 선비는 이 다섯을 갖춘 후에야 세상에 몸을 의탁하고 군자의 대열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利)를 탐내는 것보다 더 참혹한 화(禍)는 없으며 마음을 상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런 슬픔은 없고, 선영(先塋)을 욕되이 하는 것보다 더 추한 행동은 없으며 궁형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습니다.형(刑)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을 비교하고 헤아린 바는 없으나, 한 세대 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옛날 위령공(衛靈公)이 환관인 옹거(雍渠)와 수레를 함께 탔기 때문에 공자는 그 곳을 떠나 진(陳) 나라로 갔습니다. 상앙이 경감(境監)의 주선을 받아 군주를 알현하자 조량 (趙良)이 한심하게 여겼습니다. 조담(趙談)이 군주의 수레를 함께 타자 원사 (袁絲)가 안색이 변하였습니다.이처럼 옛날부터 사람들은 환관과 관게를 가지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대개 중간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도 일이 환자(宦者)와 관련이 되면 기분을 상하지 않음이 없는데 하물며 강개한 선비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지금 조정에 아무리 사람이 없다고 한들 저같이 궁형을 받고 살아남은 사람 더러 천하의 뛰어난 인물을 추천하라고 하겠습니까.저는 선친이 물려주신 사업으로 인해 군주의 수레바퀴 아래에서 벼슬하면서 죄 받기를 기다린 지 20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생각컨대, 위로는 충성을 바치고 믿음을 다하여 훌륭한 계책을 세우고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칭송을 들으면서 현명한 군주를 모시지도 못하였고, 다음으로 또 정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고 결여된 것을 메우며 어질고 재능 있는 자를 추천하거나 초야의 숨은 선비를 조정에 드러나게 하지도 못했습니다.밖으로는 또 전쟁에 참여하여 성(城)을 공격하고 들에서 싸움하여 적장의 목을 베거나 적군의 기(旗)를 빼앗은 공도 없습니다. 아래로는 오랫동안 공로를 쌓아서 높은 지위, 후한 녹을 얻어 종족과 우인 (友人)들에게 광영과 은총을 가져다준 적도 없습니다. 저는 이들 넷 중에서 하나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조정에 구차하게 용납되어 아무런 일도 한 바가 없음이 이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저는 외람되이 하대부(下大夫)의 대열에 끼어 외정(外廷) 에서 말단 의론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당시 올바른 기강을 이끌어 내지도 사려(思慮)를 극진히 하지도 못하고, 지금 이지러진 몸으로 소제나 하는 천한 노예가 되어 용렬하고 어리석음 속에 빠져 있는데 이제서야 머리를 들고 눈썹을 펴서 시비를 논한다면 조정을 가벼히 여기고 동시대의 선비를 치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아아, 저와 같은 인간이 이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嗟乎! 嗟乎! 如僕, 尙何言哉! 尙何言哉!)또한 일의 본말은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려서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정신을 자부하였지만 자라서는 향리에서 어떤 칭송 도 받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행히 주상께서 선친의 연고로 저의 얕은 재주나마 받들어 궁궐 안을 드나들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릇을 머리에 인 사람은 하늘을 볼 수 없듯 (戴盆何以望天) 한마음으로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인사(人事)를 닦을 겨를이 없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빈객과의 사귐을 끊고 집안의 일도 돌보지 많고 밤낮으로 미미한 재능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저의 직무를 다하여 주상께 총애받고자 힘썼읍니다만 결국 나의 뜻과는 전혀 달리 크게 잘못되기에 이르렀던 것이지요.저는 이릉(李陵)과 함께 문하시중으로 있었지만 본디 서로 친밀하지는 않았습니다. 취향이 각기 달라서 함께 술을 마신 적도 없고 친밀한 교제의 즐거움을 나눈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 사람됨을 살펴보니 스스로를 지키는 뛰어난 선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모를 모시는 것은 효성스럽고 선비들과 사귀는 것은 신의가 있으며 재물에 대해서는 청렴하고 주고받음에 공정함을 지키고 상하의 분별함에 있어서는 겸양하였고 공손하고 검약하며 남에게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의 위급함에 몸을 바칠 것을 항상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본디 마음속에 쌓아둔 바는 일국 (一國)의 큰 선비로서의 기풍이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대저 신하된 자로서 만 번 죽는다 해도 자신의 생명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는다 는 생각으로 나라의 위그함을 구하려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뛰어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행한 일이 하나가 마땅치 안흔다 해서, 자신의 몸을 보전하고 처자를 보호하는데에 급급할 뿐인 신하들이 서로 뒤이어 그의 잘못을 지어내어 모해하였으니 저는 진실로 마음 속으로 통분히 여겼습니다.또 이릉이 지휘하고 있었던 보병은 5천 명이 채 되지 않았는데 오랑캐의 땅에 깊숙히 들어가 왕정(王庭)을 활보하였고 마치 호랑이 입에 미끼를 들이대듯 강한 오랑캐에게 마구 도전하여 억만의 군사를 맞이하였습니다. 선우(單于)와 싸움을 계속한 지 10여일 만에 죽인 자는 반이 넘었고 오랑캐는 사상자를 구조할 수도 없었습니다. 털옷을 입은 흉노의 군장(君長)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으며 모두 그 좌우의 현왕(賢王)을 소집하고, 활 쏘는 사람을 모두 불러내어 온 나라가 함께 이릉의 군대를 공격하여 포위하였습니다.이릉의 군대는 천 리에 걸쳐 싸우면서 물러나 화살은 다하고 길은 막다른 곳에 이르렀으며 구원병은 오지 않고 병졸의 사상자는 쌓이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릉이 한번 외쳐 군사를 위로하면 군사들은 몸을 일으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피로 얼굴을 씻고 눈물을 삼키며 다시 맨주먹을 불끈 쥐고 칼날을 무릅쓰며 북쪽을 향해 죽음으로 적과 싸웠던 것입니다.이릉이 아직 적에게 함락되지 않앗을 때에 군사(軍使)가 와서 보고를 올리자 한의 공경(公卿) 왕후(王侯)들은 모두 축배를 들며 황제를 축수했습니다. 그후 며칠 뒤에 이릉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 때문에 황제는 음식도 들지 않고 조의(朝議)에서도 불편한 기색이었습니다. 대신들은 근심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저의 비천함을 헤아리지 않고 주상(主上)의 슬픔과 번뇌를 보고는 저의 어리석은 충성을 다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제가 생각컨대 이릉은 평소에 부하들과 어려움도 함께 하고 작은 것도 나누어 가져 병사들이 죽음도 마다지 않게 하였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 할지라도 그보다 더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몸은 비록 패했으나 그 뜻을 보건대 장차 적당한 기회를 얻어 한에 보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일은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만 그가 적을 무찌른 공은 역시 천하에 드러내기에 족한 것 입니다.저는 이러한 생각을 갖고 아뢰고자 했으나 아뢸 길이 없었는데 마침 주상께서 하문(下問)하셔서 곧 이러한 뜻으로 이릉의 공적을 말하여 주상의 생각을 넓혀 드리고 다른 신하들의 비방의 말을 막아보고자 하였습니다.그러나 제 생각을 다 밝힐 수 없엇으며 주상께서는 제 뜻을 이해하지 않으시고 제가 이사장군(貳師將軍)을 비방하고 이릉을 위해 유세한다고 여기셨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하옥되었고 정성스런 저의 충성을 끝내 밝힐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황제를 속였다는 죄로 마침내 하급관리의 재판에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저의 집은 가난하여 형벌을 면할 수 있을 만큼의 재물이 없었고 사귀던 벗들은 아무도 나를 구하려 하지 않았으며 황제 좌우의 측근인물들은 나를 위해 한마다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몸은 목석이 아닌데 오직 법리(法吏)와 마주하여 깊이 감옥 속에 갇혀 있으니 누구에게 내 사정을 하소연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소경께서도 직접 겪으신 것 입니다. 저의 처지가 어찌 이렇지 않겠습니까. 이릉은 살아서 항복함으로써 그 가문의 명성을 무너뜨렸고 저는 또 거세 되어 잠실(蠶室)에 던져져서 거듭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아아, 이런 일이란 속인들에게 상세히 말하기 용이한 것이 아닙니다.


저의 선친은 할부(割符)나 단서(丹書)를 받은 공적도 없었습니다. 천문과 역법에 관한 일을 관장하여 점쟁이나 무당에 가까웠으며 본디 주상 께서 희롱의 대상으로 여기시며 악공(樂工), 배우의 부류로 기르셨고 세속 의 사람들이 경멸하는 바였습니다. 가령 제가 법에 굴복하여 주벌(誅罰)을 받는다 할지라도 아홉마리 소 중에서 털오라기 하나 없는 것 (九牛亡一毛)과 마찬가지일 따름이니 저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그리고 또 세상에서는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사람과 동일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며, 다만 내가 지혜가 궁하고 죄는 너무나 커서 면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죽었다고 여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평소에 세워놓은 바가 그렇게 여기게끔 만드는 것입니다.사람이란 본디 한 번 죽을 뿐이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기도 하고 어떤 죽음은 터럭만큼이나 가볍기도 하니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 다른 까닭입니다(人固有一死, 死有重於泰山, 或輕於鴻毛 用之所趨異也) . 사람에게서 최상의 것은 선조를 욕되이 하지 않는 것이며 그 다음은 자신을 욕되이 하지 않는 것, 그 다음은 자신의 도리와 안색(顔色)을 욕되이 하지 않는 것, 그 다음은 자신의 언사(言辭)와 교령(敎令)을 욕되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그 다음은 몸이 속박되어 치욕을 당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죄수복을 입고 치욕을 당하는 것, 그 다음은 손발이 묶이고 매질을 당하여 치욕을 받는 것, 그 다음은 머리를 삭발당하고 쇠고랑에 얽매이어 치욕을 받는 것, 그 다음은 신체가 훼손되고 발이 잘려 치욕을 당하는 것이요, 최하가 부형(腐刑)으로서 가장 극형인 것입니다.전하는 말에 이르길 "형벌은 상대부에게까지는 미치지 않는다" (刑不上大夫)고 했으니 이 말은 선비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힘쓰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사나운 호랑이가 깊은 산중에 있을 때는 온갖 짐승들이 두려워하지만, 함정에 빠지게 되면 그 호랑이도 꼬리를 흔들며 음식을 구걸하는 것이니 (猛虎處深山, 百獸震恐, 及其在穽檻之中, 搖尾而求食) 이것은 점차 위세에 눌려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에다 선을 긋고 감옥이라 하여도 형세는 들어갈 수 없게 되고, 나무를 깎아 형리(刑吏)로 삼아도 이러쿵저러쿵 거기에 대꾸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벌을 받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손발을 얽어 판목(板木)이나 새끼줄에 묶이고 살갗을 드러내어 매질을 당하며 감옥속에 갇혔을 때에 옥리(獄吏)를 보면 머리는 땅에 닿이고, 감옥을 지키는 노예를 보면 마음은 두려워 숨이 막힐 지경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형세가 위세에 눌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고도 치욕을 당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뻔뻔스러운 것이며 사람들이 어찌 그를 귀하게 대접하겠습니까.서백(西佰)은 백작이었지만 유리에 갇히는 몸이 되었고 이사(李斯)는 재상이었지만 다섯가지 형벌을 다 당하였습니다. 회음(淮陰)은 왕이었지만 진(陳)에서 묶이는 신세가 되었고, 팽월(彭越).장오(張敖)는 남면 (南面)하여 왕 노릇을 하였으나 감옥에 갇혀 죄를 받았습니다. 강후 (絳侯)는 여씨(呂氏)들을 타도하여 권력이 오패(五覇;五伯)를 능가하였 으나 청죄(請罪)하는 방에 갇혔고, 위기후(魏其侯)는 대장(大將)의 몸 으로 붉은 죄수복을 입고 목과 수족에는 고랑이 채워졌습니다. 계포 (季布)는 주가(朱家)에 의탁해 목에 칼을 쓴 노예가 되었고, 관부(灌夫) 는 거실(居室)에서 치욕을 당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왕후장상의 지위에 이르렀고 명성은 이웃나라에까지 알려졌지만 죄를 입어 판결이 내려졌을 때에 자결함으로써 스스로 결단하지는 못했습니다. 오욕(汚辱) 에 처할 수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러한 상황에서 어찌 치욕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이런 견지에서 말한다면 용기와 비겁, 강인함과 나약함은 형세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이상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저 사람이 법에 의해 처벌되기 전에 일찌감치 스스로 결단하지 못하고 차츰 전락 하여 태형을 당하기에 이르러서야 절개를 지키려고 한다 해도 이는 늦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 사람들이 대부(大夫)에게는 형벌을 내리는 것을 어렵게 여긴 까닭은 아마도 이때문인 듯합니다. 대저 살기를 애쓰고 죽기를 싫어하며 부모를 생각하고 처자를 돌보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의리에 격발되기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으니 그것은 부득이한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불행히도 일찍이 부모님을 잃었고 가까운 형제도 없으며 홀로 외로이 살아왔습니다. 소경께서 보시기에 제가 처자에 대해서는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또 용기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절개를 위하여 죽는 것도 아니며 비겁한 사내라도 의(義)를 사모하면 어떤 행동이라도 힘쓸 수 있습니다. 제가 비록 비겁하고 나약하며 구차히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나 거취(去就)의 분별 또한 잘 압니다. 어떻게 몸이 속박되는 치욕 속에 자신을 밀어넣기에 이르겠습니까?또한 저 천한 노복이나 하녀조차도 능히 자결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저와 같은 사람이 어째서 자결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고통을 감내하고 구차하게 더러운 치욕 속에 있으면서도 마다지 않는 까닭은 제 마음 속에 다 드러내지 못한 바가 있어, 비루하게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경우에 후세에 문채(文彩)가 드러나지 않을 것을 한스러이 여겨서입니다. 옛날부터 부귀하였지만 이름이 마멸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탁월하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비상한 인물만이 일컬어질 따름입니다.


문왕은 갇힌 몸이 되어 [주역(周易)]을 연역하였고 중이(仲尼)는 곤란한 처지를 당하여 [춘추(春秋)]를 지었습니다. 굴원(屈原)은 쫓겨가서 [이소(離騷)]를 섰고, 좌구(左丘)는 실명한 뒤에 [국어(國語)]를 지었습니다. 손자(孫子)는 발이 잘리고 [병법(兵法)]을 편찬하였고 여불위(呂不韋)는 촉(蜀) 에 유배되어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지었으며 한비(韓非)는 세상에 [세난(說難)] [고분(孤憤)]을 저술하였으며 [시경(詩經)]의 300편 시는 대개 성현이 발분(發憤)하여 지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가슴속에 맺힌 바가 있어 그 하고자하는 바를 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후세의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줄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좌구와 같이 눈이 없고 손자와 같이 발이 잘린 사람은 끝끝내 세상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물러나 서책(書冊)을 써서 자신의 분한 생각을 펴고 이론적인 문장을 세상에 남겨 자신을 드러냈습니다.저도 감히 겸손치 못하게도 무능한 문장에 스스로를 맡기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천하의 산실(散失)된 구문(舊聞)을 수집하여 행해진 일을 대략 상고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패흥망(成敗興亡)의 원리를 살펴 모두 130편을 저술하였습니다. 저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고를 다 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는데, 나의 작업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저는 진실로 이 책을 저술하여 명산(名山)에 보관하였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촌락.도시에 유통되게 한다면 이전에 받은 치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만 번이나 주륙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지혜로운 사람에겐 말할 수 있지만 속인에겐 말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빈천한 무리 속에 사는 것은 쉽지 않고 소인배들은 비방의 말이 많습니다. 제가 말을 잘못하여 이런 화를 만나 거듭 향리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되이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부모님의 산소 앞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비록 백세(百世)의 세월이 흘러도 저의 수치는 너무나 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애가 끊어지는 듯하고 집안에 있으면 망연자실하여 무엇을 잃은 듯하고 집을 나서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를 못합니다. 이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땀이 등줄기를 흘러 옷을 적시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금 후궁(後宮)에 있는 신하에 불과하니 어찌 스스로를 깊은 바윗골 속에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월을 좇아 부침하고 때에 따라 처신하며 미혹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지금 소경께서는 저에게 훌륭한 인물을 밀어주라고 충고하시지만 그와 같은 일을 저의속 뜻과는 어긋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금 비록 스스로를 가다듬고 아름다운 말로 스스로를 꾸미고자 한들 아무런 유익함도 없을 것이며 세상에 믿어지지도 않고 치욕이나 얻기에 알맞을 것입니다. 죽을 날을 기다린 연후에야 옳고 그름은 판명되는 것입니다. 글로써 뜻을 다 전할 수는 없고 저의 고루한 생각을 대략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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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10-08-25
[일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49. 이광(李廣)

열전49. 李廣(이광) 1277. 勇于當敵(용우당적), 적을 만나면 용감했고 1278. 仁愛士卒(인애사졸), 휘하의 군졸들을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랑
운영자 10-06-16
[일반] 오왕비열전(吳王劉濞列傳) 46

열전46. 吳王劉濞(오왕유비) 오왕(吳王) 비(濞)는 고제(高帝)의 형 유중(劉仲)의 아들이다. 고제 7년 기원전 200년, 천하를 평정한 고
운영자 10-06-15
[일반] 계포란포열전(季布欒布列傳) 40

열전40. 季布欒布(계포란포) 계포(季布)는 초(楚)나라 출신이다. 의기와 협객으로 초나라에서 이름이 높았다. 항우에 의해 장수가 된 그는 한왕을
운영자 09-08-20
[일반] 장석지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 42

열전42. 張釋之馮唐(장석지풍당) 장정위(張廷尉)의 이름은 석지(釋之)이고 도양(堵陽)1) 사람이다. 자는 계(季)다. 그는 장중(張仲)이란 형과
운영자 10-06-13
[일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45-1. 편작

열전45-1. 편작(篇鵲) 1257. 扁鵲言醫(편작언의), 편작은 의술을 말하여 1258. 爲方者宗(위방자종), 의자(醫者)들의 종주(
운영자 10-06-15
[일반]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45-2. 창공 순우의(淳于意)

열전45-2. 창공(倉公) 순우의(淳于意) 태창공(太倉公)은 제나라 태창(太倉)1)의 장(長)이었다. 임치(臨菑) 사람으로 성은 순우(淳于) 씨이고
운영자 10-06-15
[일반] 전숙열전(田叔列傳) 44. 전숙, 전인(田仁), 임안(任安)

열전44. 田叔·田仁·任安(전숙·전인·임안) 전숙(田叔)이라는 사람은 조나라 형성(陘城)1) 출신이다. 그의 선조는 제나라 전씨들의 후예
운영자 10-06-15
[일반]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43

열전43. 萬石張叔(만석장숙)   만석군(萬石君)의 이름은 분(奮)으로 그의 부친은 조나라 사람이다. 석은 석(石)씨다. 조나라가 망하자 온(溫)1)
운영자 10-06-15
[일반]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56

열전56. 서남이(西南夷) 1310. 唐蒙使略通夜郞(당몽사략농야랑) 당몽(唐蒙)을 사자로 보내 야랑(夜郞) 국과 통호하고 1311. 而邛
운영자 10-08-26
[일반]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57

열전57. 사마상여(司馬相如) 1313. <子虛>之事(<자허>지사) <자허부(子虛賦)>에 실린 일과 1314. <大人>賦說(<
운영자 10-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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