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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8-11 12:58:368796 
중국의 군사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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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군사제도




1. 동주(東周)-춘추(春秋)시대



군사제도를 언급하기 앞서, 어쩔 수 고대중국의 시대 구분에 관해서 조금 설명드려야 할 것 같네요. 앞글에서 말한 주(서주)나라에서 기원전 841년 수도인 호경에서 당시 왕인 여왕( 王)의 폭정에 시달린 국인(수도의 백성들)들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이 사건은 서주의 멸망의 전조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 중국사에서 역사적 연대가 정확해진다는 점입니다(다시 말해 그 이전 시기의 연대는 추정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튼, 여왕 다음 왕인 선왕(宣王)때 잠시 중흥의 기미가 보이다가, 유왕(幽王)때에 서북쪽의 이민족인 견융(犬戎)이 침입해 호경이 함락되면서, 유왕이 죽는데, 이로서 서주는 멸망합니다(BC 771).



유왕이 죽자 여러 제후들이 유왕의 아들인 의구(宜臼)를 옹립해 평왕(平王)으로 삼고, 도읍을 동쪽인 낙읍으로 천도하는데(BC 770), 이 시기를 동주(東周="말" 그대로 동쪽의 주나라란 뜻입니다)라고도 하며, 혹은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라고도 합니다. 춘추전국시대는 다시 둘로 나뉘는데, 춘추시대와 전국시대가 그것입니다. 춘추시대란 명칭은 노(魯)나라의 역사서인 『춘추(春秋)』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춘추시대는 편의상 동주(東周)가 성립된 BC 770년부터 시작하지만, 그 하한선은 학설에 따라 좀 차이가 납니다. 일반적으로 중원지방의 진(晉)나라가 한(韓), 위(魏), 조(趙)의 세 나라로 쪼개진 BC 403년으로 보는데, 여기서도 편의상 그렇게 서술하겠습니다.



동주 혹은 춘추전국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강력한 중앙권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동주 자체가 서주가 멸망하고 난 뒤 제후들의 도움으로 성립된 사실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군사제도를 설명드릴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어려움이기도 하는데, 중앙의 제도가 허명만 갖고 있는 상태에서 그런 군사제도를 설명해봐야 춘추시대의 군사제도를 어떠했는가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춘추시대에는 각 제후들이 힘을 키우면서 서로가 패권을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내세운 명분이 존왕양이(尊王攘夷)입니다. 즉, 천자인 주나라 왕을 모시는 척 하면서 천하를 호령하는 형국이었습니다. 사실상 주나라 왕은 천자로서 명분상 존중을 받기는 했지만, 제후들을 제어할 실질적인 무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때의 군사제도는 각 제후국들에서 일어난 개혁정치와 패업( 業)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춘추오패(春秋五覇)와 개혁

춘추오패란 춘추시대에 강력한 개혁정책과 부국강병정책으로 패업을 달성한 5제후를 일컫는 말이자, 춘추시대의 당시 부국강병책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패(五覇="패(覇)는" 백(伯)과 같은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서 짱이란 뜻입니다^^)를 누구로 보느냐는 사서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납니다. 대체로 제 환공(齊 桓公), 진 문공(晉 文公), 진 목공(秦 穆公), 초 장왕(楚 莊王)은 공통적인데, 경우에 따라서 송 양공(宋 襄公)이나, 오왕 합려(吳王 闔呂), 월왕 부차(越王 句踐)을 들기도 합니다.



1) 제(齊) 환공(桓公)

제 환공과 제나라 개혁의 중심인물인 관중(管仲), 포숙(鮑叔)과 관련된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는 다 아실 것입니다. 여기서는 제나라 군사제도 개혁에 관해서는 언급하겠습니다. 제나라 군사제도 개혁의 핵심은 군사제도가 정치 행정제도의 개혁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 더욱이 제 환공 때 관중에 의한 개혁이 중요성을 갖는 것은 일련의 그 개혁작업의 구체적 내용들 즉, 정치,행정,세제의 개혁이 군사적 개혁과 맞물리면서 전체적 국가제도 개혁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그 이후의 춘추전국 시대의 여타 개혁 및 변화에서 가장 선진적이자 전형적인 모범을 보여줬다는 사실입니다.



관중의 개혁은 『관자(管子)』라는 책에 가장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형식상 『관자』는 관중의 개혁 전반에 대해서 다루면서 관중 살던 당시(BC 7세기경)에 쓰여진 듯 하지만, 실제로는 전국시대 후기에 법가(法家) 계열의 학자들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료로서는 역시 신뢰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책의 가치가 무시될 정도는 아닙니다.(『관자』는 한국사에서도 중요한데... 조선(朝鮮)이란 명칭이 제일 먼저 언급되는 책이 바로 『관자』입니다) 『관자』에 나오는 개혁의 핵심은 소위 "삼국오비제(三國五鄙制)"로 요약됩니다.



"삼국오비제"에 따르면, 제나라 영토를 도읍을 중심으로 지역(國都)과 그 주변지역(郊外)으로 나눕니다.



우선 제나라의 수도를 중심으로 지역(國都)을 사(士 ; 여기서 士는 후대의 "선비", 혹은 "문인"의 의미가 아닙니다. 원래 "사"라 전문적 직업군인이거나 군인이 될 수 있는 계층을 의미합니다)와 농(農) 계층을 구성된 15향(鄕)과 공(工), 상(商) 계층으로 구성된 6향(鄕)을 구분지었습니다. 이 향(鄕)은 다시 연(連)-이(里)-궤(軌) 순의 행정구역으로 구분했습니다. 이런 향(鄕) 중심의 행정구역의 기반에서 군사제도를 새로 편성합니다. 궤-이-연-향-국 순서의 행정단위를 바탕으로 여기에 각각 오(伍)-소융(小戎)-졸(卒)-족(族)-군(軍) 순서의 군제를 편성합니다. 그리고 각 가정(호(戶)라는 단위로 부릅니다)에서 1명의 장정을 차출합니다. 오(伍)는 5명, 소융(小戎)은 50명, 졸(卒)은 200명, 족(族)은 2,000명, 군(軍)은 10,000명의 병력이 됩니다. 이렇게 각 호에서 차출된 병사들은 대개 같은 오나 소융에 배속되어 동향출신들이 군의 최소단위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의 군사들은 강한 단결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최상급의 행정단위인 국은 3개로 나눠지므로, 삼국제(三國制)가 되는 것입니다.



교외(郊外)지역은 국도(國都)를 중심으로 한 동서남북의 사방에 5개의 비(鄙)를 분할되며, 이 비는 읍(邑)-졸(卒)-향(鄕)- 현(縣)-속(屬)의 행정단위로 구성됩니다. 여기서도 국도처럼 동일한 행정단위를 바탕으로 한 군사적 편제가 이뤄집니다.



이렇게 행정단위를 새로 설정하고 그 바탕위에서 군제를 편성하는 것은, 종래의 씨족적 혈연공동체가 붕괴되면서, 여기에서 농민층이 방출되어 나왔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즉, 관중의 개혁은 당시의 시대적 여건의 변화에 따라 새로이 행정제도를 개편함과 동시에 군사제도도 개편한 것이었고, 이것은 병력원을 확대시키고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혁신적인 부국강병책으로 제 환공이 패업을 달성하게 된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씨족제의 해체와 농민층의 방출로 대표되는 현상은 당시의 전반적 사회 추세였으며, 다른 나라들의 개혁들도 이런 사회적 배경을 충분히 활용한 것이었습니다.




2) 진 문공(晉 文公)




춘추시대 지도



중원지역의 황화중류에 자리한 진(晉)의 개혁정책은 진 문공때부터가 아니라, 그 윗대인 헌공(獻公)-혜공(惠公)대에도 계속되어 오다가, 문공 때 비로소 패업을 달성할 정도로 공고화되었습니다. 문공은 우선 군대의 핵심인 사(士)계층에게 국가의 공전(公田)을 지급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안정시켜 줍니다. 이들 농민층을 "삼행(三行)"으로 불리는 보병부대로 조직합니다. 이것은 사(士) 계층은 안정된 자작농으로 육성하여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면서, 전시에는 이들은 병력으로 충당하여 군세를 확장시키는 2가지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진은 이렇게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남쪽의 초(楚)나라와 그 유명한 성복(城 )에서 일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명실공히 패자가 됩니다.



진의 군제개편에서 눈여겨 볼 것은 지속적인 토지개간사업이나 구획정리 등으로 생산력으로 증대시키고 견실한 자작농을 육성하여, 이들을 군대의 주축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후대의 군제개혁 작업에 하나의 모범이 되는 정책이 됩니다.



3) 노(魯)의 세제개혁

노나라는 제나라와 진나라 사이에 있는 소국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노나라에서는 강력한 외국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자위력이 필요했습니다. 노나라는 이러한 불리한 대외 정세에 대처하면서, 씨족공동체 해체와 소농민층의 방출이라는 사회적 환경변화에도 처리해야 하는 이중의 고민을 안고 있었는데, 이것을 노나라는 세제(稅制)개혁으로 해결합니다.



노나라의 세제개혁을 언급하기 전에 당시 경제의 핵심인 토지제도에 대해서 잠깐 언급해야겠습니다. 춘추시대 초까지 토지는 대체로 제후같은 귀족층이 소유한 공전(公田)과 일반 농민층의 소유의 사전(私田)으로 구성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농민층들은 자신의 사전을 경작하면서, 동시에 귀족 소유의 공전을 경작해서 그 생산물을 조세로 바치는 노역지대(勞役地代)가 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자신의 노동력을 세금으로 바친다는 것은 근대와 전근대를 구분짓는 전형적인 지표입니다.



당시까지는 노나라 뿐만 아니라 대부분 나라에서 노역을 지대로 바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토지의 생산성이 증대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농민층들은 자신의 사전에서는 열심히 경작하지만, 공전의 경작은 등한시 하게 됩니다. 또 인구가 증가되면서, 씨족 공동체에서 방출되어 나온 개별적인 농민층의 등장은 공동작업인 공전(公田) 경작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노역지대에 기반한 공전제는 점차 그 실효성을 상실하게 되는데, 그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실물지대(實物地代)를 거두는 것입니다. 즉, 토지의 생산량에 따라 생산량의 일부를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노나라에서는 노 선공(宣公) 11년에 토지 생산량에 따라 일정량의 조세를 거두는데, 이것이 중국역사상에 최초의 실물세로 평가받습니다. 실물세가 등장한 뒤 3년 후인 성공(成公) 원년에는 구갑제(丘甲制)를 시행합니다. 구(丘)는 의견차이가 있지만, 대개 150호(戶)의 농민층을 단위로 하여, 각 구의 단위마다 군사(甲) 비용을 부담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의 세제 개혁은 당시의 사회적 변화를 수용하여, 불합리한 세제를 개편함과 동시에 군비증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2. 전국시대




앞서 말했듯이 전국시대는 황화중류 지역의 진(晉)나라가 조(趙), 위(魏), 한(韓)의 세나라로 분열되는 시기(BC 453)부터 시작하여 진(秦)의 전국통일로 막을 내립니다. 전국시대의 군사제도를 따로 취급해야 하는 것은 전국시대의 사회적 변화가 춘추시대 때 나타나는 변화의 흐름과 동일한 맥락 속에서 이뤄진 것이긴 하지만, 그 변화의 폭과 속도가 매우 급격해졌다는 것과 그로 인해서 군사제도와 전쟁양상도 춘추시대와는 아주 다른 양상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전국시대 각국은 강력한 부국강병책과 상호 적대적인 영토확장 전쟁을 펼쳐왔습니다. 그 와중에서 전쟁의 승리를 거두고 살아남기 위해 지속적이며 광범위한 사회개혁을 시행합니다. 이 사회적 개혁을 변법(變法)이라 부르며, 개혁에 성공하여 주변 소국을 병합한 강력한 7 제후국을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칭합니다. 이 와중에서 더 이상 천자로서, 종주국으로 주(周) 왕실은 완전히 그 현실적 힘을 상실했으며, 제후국들도 주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는 상황이 초래됩니다. 남은 것은 오로지 강력한 국력에 의해 타국을 무력으로 겸병(兼倂)하기 위한 전쟁이었으며, 이것은 다시 더 혁신적인 개혁을 가능케하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전국시대 지도



전국시대의 군사제도 또한 각국의 상황을 개별적으로 살펴봐야 하는데, 그러면 글이 어쩔 수 없이 자꾸 군사제도의 변화보다 그 변화를 가능케 했던 사회적 개혁을 설명하고, 또 각국의 개혁상황도 설명해야 하므로(앞서 춘추시대를 그렇게 설명하다가, 글이 쫌 딴데로 샌 느낌이 자꾸 들어서... ^^;;), 여기서는 개괄적인 군사제도와 전쟁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전국시대 군사제도의 가장 큰 특징이자, 상-주-춘추시대를 거쳐오면서 변화해온 군사제도의 그 역사적 귀결은 징병제와 상비군제로 요약됩니다. 춘추시대의 군사제도 앞서도 언급했지만, 일반적으로 군(君), 경대부(卿大夫) 등의 귀족층이 자신 휘하에 혈연적, 지연적 관계로 묶여있던 족인(族人)과 사속인(私屬人="말" 그대로 사적으로 주종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잍컫는 말입니다)으로 구성된 군대가 근간이었습니다.

제 환공의 개혁에서 나온 것처럼, 전 백성들을 일관적인 지방행정에 포섭시키고 이들을 대상으로 군대를 구성하는 방식은 춘추시대의 기준으로 보자면 오히려 혁신적인 방식이자 가장 선진적인 형태였습니다.

당시의 전쟁양상이 거마전(車馬戰)이 여전히 주된 방식인 이상, 군대의 주력은 전차를 부담할 수 있었던 왕실을 비롯한 상위 지배층이었습니다. 이들이 가장 주력이 되는 동시에 더불어서 일반 평민과 노예들을 보병으로 삼아 징발하였는데, 군사작전이나 기타 노역에 동원시켰습니다. 그래서 주-춘추시대의 전쟁에서 각 국의 병력규모를 표현할 때는 만승지국(萬乘之國)이니, 천승지국(千乘之國)이니 하면서, 전차의 규모로 군세를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 생겨난 것입니다. 또 이들 전투는 대개 하루 이틀만에 끝났고, 또 회전(會戰)도 1차의 접전에 그치는 경우가 다수였습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것은 바로 군현제(郡縣制)로 대표될 수 있는 새로운 지방행정제도가 각 국에 도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전국시대는 앞서 말했듯, 전쟁의 목적이 타국을 무력으로 병탄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각국은 그 어느때보다 국가의 생존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되었으며, 또한 동시에 진행된 철제농기구 보급에 의한 사회적 변화(사회적 생산력의 증대) 또한 새로운 제도의 도입필요성을 제기하게 된 것입니다. 각 국은 치열한 전면전을 벌였고, 이러한 전쟁양상은 국가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대안이 바로 지방제도를 군현제로 중앙집권적인 군현제로 재편하는 것이었습니다. 군현제로 전국을 편성하면서 비로써 각 국은 모든 백성에 대한 일률적인 통제와 수취가 가능해졌고, 이는 군사제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즉, 군현제를 단위로 하여 군사제도가 개편되는 것입니다.

군현은 징병의 지역적 단위가 되었으며, 주된 징병대상자는 15세(16세라는 설도 있는데.. 하한선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 편입니다)에서 60세까지의 농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전과는 달리 일단 군사 규모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보통 춘추시대 제후국들의 군사력을 천승지국(千乘之國)이라 표현합니다. 말 그대로 전차 천대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죠. 액면 그대로 한 제후국의 전차규모를 천대라 가정한다면, 전차부대는 3천명이 됩니다. 거기다 제후들이 징발한 일반 평민과 노예들이 그 3배수라 가정해도 한 제후국의 주력 군대는 대개 1~2만명 정도였다는 말이 됩니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테지만.. 여튼 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군대규모는 보통 십만단위가 넘어갑니다. 『전국책(戰國策』이란 역사서에는 진(秦)이나 제(齊), 초(楚)같은 강국들의 군세를 "대갑백만(帶甲百萬)"이라 표현합니다. 물론 허풍섞인 말이지만(『전국책』 자체가 전국시대 유세객(遊說客)이나 종횡가(縱橫家)들의 말을 주로 모아놓은 책이라 구라가 심합니다...), 그 정도로 군세의 규모가 엄청나게 늘어났으며, 또한 대갑(帶甲 ; 갑주(甲胄)를 걸쳤다는 의미입니다)이라 표현되는 보병이 완전히 군대의 주력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당연히 그 보병들은 군현제 하에서 국가가 작성한 호적(戶籍)에 의해 파악된 농민들로부터 징발된 군사입니다.



각국간 전쟁이 치열해지고 또 빈번해지면서 전쟁에 즉각적인 대응을 위한 상비군(常備軍) 제도가 나타납니다. 상비군은 이전부터 직업적 군인계층이던 사(士)계층 뿐만 아니라 농민층에서도 재능이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구성했는데, 주로 왕성에 주둔하면서 중앙군이 됩니다.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당연히 왕과 왕성에 대한 수비와 호위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이 상비군과 해당 군현에서 징발된 군대를 합쳐 대응하였습니다.



한편, 전쟁의 구체적인 양상 또한 변화하는데, 전국시대의 전쟁목적이 타국의 영토를 빼앗는 것이기에, 각지에 성(城)의 구축이 활발하게 늘어납니다. 춘추시대에 주로 왕성이나 주요 전략거점에만 성을 쌓던 것에서 벗어나, 타국과 인접한 각지에 성을 쌓고, 또 험준한 산세를 따라 긴 장성(長城)을 구축하기도 합니다. 특히 장성의 구축은 북방의 호(胡)라 불리는 이민족과 접경하고 있던 진(秦), 조(趙), 연(燕)나라에서 활발하였는데, 진시황이 쌓았다고 하는 장성은 이 삼국의 장성을 이어서 수축(修築)한 것입니다. 각 국간 영토전쟁이 일상화되면서, 공성전을 염두에 둔 무기류의 발달도 두드러집니다. 운제(雲梯)나 충차(衝車)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더불어 강력한 철제무기가 무기류의 핵심으로 이루게 된 것 또한 전국시대 특징 중 하나입니다.



전국시대의 국가는 중앙집권화되면서, 국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정부가 군대의 관한 모든 사무(징발(徵發), 선발, 통제)를 하나의 체계로 통일시켰습니다. 군의 총사령관은 왕이 직접 임명, 파면하고, 군대를 발동할 때에도 호부(虎符)라 불리는 부절(符節)을 갖고 있어야 했습니다.(호부는 청동이나 철, 대나무 등으로 만듭니다. 모양을 주로 호랑이(虎) 모양으로 만들어서 호부라 부릅니다). 익히 알 듯이 호부를 둘로 쪼개 반은 국왕이 갖고, 반은 국왕이 파견한 사신이나 사령관에게 주어서, 이 둘이 합쳐봐야만 군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이것은 군대 같은 무력조직이 완전히 국왕의 통제권 안에 귀속된 것으로, 동양 전근대 국가의 무력통제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전쟁이 치열해지고 규모가 확대되는 전국시대에는 거의 모든 군사적 측면에서 수요의 증대를 가져왔는데, 전문적이고 순수한 무장(武將)이 출현하는 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직업적 군인계층이나 뛰어난 무장들은 그 이전에도 보였지만, 전국시대의 그들은 그 이전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전국시대 초만 해도 위(魏)나라의 이회(李회),나 진(秦)의 상앙(商앙), 초(楚)의 오기(吳起) 등은 출장입상(出將入相)이란 말로 표현되듯, 일이 생기면 사령관으로 출정하였다가 다시 내정으로 들어와서는 재상(宰相)의 역할을 하여 민정(民政)과 군정(軍政)를 동시에 총괄하였습니다. 그러나 전국시대 중기 이후로는 손빈(孫 ), 염파(廉頗), 악의(樂毅) 같은 순수한 무장이 출현합니다.



전국시대의 잦은 전투와 무장의 출현은 군사에 관한 전반적인 이론을 체계적으로 수립할 필요성을 만들어냈습니다. 이것은 전쟁의 이론과 작전, 편제에 대한 연구를 전문적으로 할 집단을 만들어냈으며, 이들이 바로 병법가(兵法家)라는 집단입니다. 그들의 구체적인 성과물이 오기의 『오자(吳子)』, 손빈의 『손자(孫子)』, 사마양저(司馬穰저)의 『사마법(司馬法)』같은 전문 병법서(兵法書)입니다.




잠시 특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조(趙) 무령왕(武靈王)이 흉노의 기마전술을 도입한 것입니다. 조나라는 북방에 호(胡)와 접경하고 있는터라, 항상 호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조의 무령왕은 중원의 전투방법으로 기마전을 주로 하는 호와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본격적으로 기마전술을 중원에 도입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복장까지 기마에 편리한 호(胡)의 그것을 도입하였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기마부대가 있었고, 또 말이 전장에서 유용한 도구로 쓰인 것은 분명하지만, 진정한 의미로 군대의 핵심으로서 기마전술과 기마부대가 정착된 것이 이때가 최초였습니다.










3. 진(秦)




일단 진(秦)나라를 따로 잡기는 했는데, 이렇게 서술하는게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네요. 진(秦)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하기는 하였으나, 얼마 안되서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성립되는 것은 다 아시는 사실인데... 문제는 진(秦)이 그 역사적 의의와 별개로 너무 빨리 멸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진(秦)나라가 갑자기 출현한 것도 아니며 춘추시대부터 계속 성장하면서 국가체제를 완비해왔던 터라, 진이 통일했을 때는 이미 거의 완벽할 정도로 국가체제가 완성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한(漢)나라 초기의 거의 모든 제도는 진(秦)나라의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게 됩니다. 또한 그 때문에 대부분의 현대에 쓰여진 역사책에는 진(秦)과 한(漢)을 하나로 묶어 서술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거의 십중팔구 다 그렇게 서술합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요....

그러나 한(漢 = 여기서는 전한(前漢))나라가 진나라의 제도를 이어받긴 했지만, 한나라 나름대로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따로 써야 겠습니다. 또 진(秦)의 군사제도가 어떻게 구축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이후 전한과 후한의 군사제도를 이해하는데 편리할 것 같네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면서 시행한 지방제도는 완전한 군현제(郡縣制)입니다. 앞 글에서 말했듯, 군현제와 그로 인한 중앙집권화는 전국시대에 있어서 거대한 흐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특이한 점은, 다른 나라들은 즉 왕족이나 귀족 같은 특정 인물에게 특정 지방의 지배권을 맡기는 봉건제(封建制, 혹 분봉제(分封制)라고 하기도 합니다)도를 같이 썼지만, 진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진이 통일하고 나서 잠시 봉건제를 병용(倂用)하자는 주장이 제기 되기도 했지만 무시되고, 완전히 전제적(專制的)이며 중앙집권적인 권력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것이 지방제도상으로는 완전한 군현제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군현제의 바탕에서 농민들을 군사로 편제한 것은 이전의 전국시대와 동일합니다.



군현제를 바탕으로 중앙집권적인 정부가 모든 백성들을 파악하고, 또 그것을 토대로 개병제와 징병제를 실시한 것은 이후에도(그 이후의 왕조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계속됩니다.



진나라의 군사제도 상 특징은 이전에는 자료가 미비해서 잘 알 수 없었던 구체적 군사제도의 여러 측면, 특히 징발과 편성, 지휘, 계급 등 세부적인 곳에서도 그 실체가 잘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중앙의 조직 중에서 병권을 전담하고 있는 관료로서 태위(太尉)가 있었습니다. 태위의 기원은 전국시대 무관직(武官職)의 하나인 위(尉)에서 시작합니다. 위는 지금도 일반적인 벼슬이란 뜻으로 사용되는데, 고대에는 무관(武官)을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단순한 위(尉)에도 도성방어 책임을 맡은 도위(都尉), 승상(丞相) 등을 군사실무적으로 보좌하던 국위(國尉)란 직책이 있었습니다. 이 직책들이 진의 통일이후 관제를 정비하면서 태위로 발전되어 모든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직책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태위는 승상(丞相), 어사대부(御史大夫) 등과 합쳐서 삼공(三公)이라 불렸으며, 진의 최고 관직이었습니다. 이런 제도는 한나라때까지 이어집니다.



구경(九卿)이라 불리는 중앙 고위관직 중에서 무관직을 살펴보면, 위위(衛尉)와 낭중령(郎中令)을 들 수 있습니다. 위위는 궁정의 경비를 담당했고, 낭중령은 황제의 호위를 담당했습니다.



군현제에서 군사제도는 더욱 뚜렷히 실체가 드러나는데, 그 특징은 민정과 군무를 분리했다는 점입니다. 진이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었습니다. 군(郡) 아래에는 현(縣)을 두고, 그 하부조직으로 향(鄕)-정(亭)-리(里)를 설치했습니다.



군의 장관으로는 군수(郡守, 한나라때는 태수(太守)라 부르기도 합니다)가 있었지만, 군사관련 사항은 군위(郡尉)란 직책을 따로 두어 전담토록 하였습니다. 즉 특정 군 내에서 군사를 징발, 훈련, 동원시킬 때는 군수가 아닌 군위가 담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가 감시, 견제토록 하여 반란 등을 상호예방하는 역할을 하며, 또한 특정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황제의 전제권력을 가능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현(縣)도 기본적으로 이와 같습니다. 현의 장관으로는 령(令)이나 장(長)이 있었는데, 인구 1만호(戶 = 1호가 4~5명이라고 계산하면, 1만호의 현은 지금기준으로 봐도 인구 4~5만의 소도시입니다) 이상의 큰 현에는 령을, 그 이하의 작은 현에는 장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현령이나 현장도 민정만 관장하고, 군사나 사법업무는 현위(縣尉)가 전담했습니다. 향(鄕)의 치안은 유격(遊擊)이 담당했고, 정(亭)에서는 정장(亭長)이 맡았습니다(잠시 새지만, 나중에 한(漢)을 세운 유방(劉邦)의 젊은 시절 관직이 정장이었습니다). 리(里)에는 감문(監門)이라는 직책을 두었습니다. 적어도 군현까지의 지방관직은 모두 황제가 임명했으며, 이렇게 황제를 중심으로 최말단의 지방조직에까지 일관된 통치체계를 세움으로써 황제가 전제권력을 갖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렇게 중앙부터 최말단의 지방까지 무관직이 있었지만, 특별한 군사행동이 필요할 때는 굳이 직책에 구애되지 않고 특정인에게 장군(將軍)으로 임명해 군사권을 주었습니다.












진나라가 강성하게 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군공작(軍功爵)이란 제도 때문에 강력한 군대유지가 가능하게 된 것도 있습니다. 진이 통일하기 이전, 전국시대에 진나라에서는 상앙(商앙)의 계획에 따라 강력한 변법을 추진하는데, 그 개혁조치 중 하나가 군공작 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즉 군사적 공로(軍功)에 따라 작위(爵位)를 주었는데, 이것을 20등작(等爵)이라 부르며 이것에 따라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게 했습니다. 자신의 작위에 따라 가옥이나 복식, 토지 등을 수여하고 또 이 규정을 엄격히 시행함으로써, 전장에 나간 군사들에게 용감히 싸우도록 매력적인 유인책을 준 것입니다. 작위는 오직 군공(軍功)에 의해서만 받을 수 있었고, 종실이라도 작위가 없으면 공족(公族)의 일원이 될 수 없었으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작위에 따라 어느정도 경감이 가능한 특권을 주었습니다.

한나라 때에 가면 작위의 의미가 퇴색하며 심지어 작위를 매매하기도 했지만, 이런 식의 유인책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며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20등작은 숫자가 높은수록 높은 작위입니다.

1. 공사(公士) 2. 상조(上造) 3. 잠뇨(簪뇨 = 이 "뇨"자는 거의 안쓰는 글자인데.. 옷 의(衣)받침에 새 조(鳥)를 얹은 글자입니다) 4.불경(不更) 5.대부(大夫) 6.관대부(官大夫) 7.공대부(公大夫) 8. 공승(公丞) 9. 오대부(五大夫) 10. 좌서장(左庶長) 11.우서장(右庶長) 12. 좌경(左更) 13. 중경(中更) 14. 우경(右更) 15. 소상조(少上造) 16. 대상조(大上造= 혹은 대량조(大良造)) 17. 사거서장(駟車庶長) 18. 대서장(大庶長) 19. 관내후(關內侯) 20. 철후(徹侯 = 한나라때 가면 통후(通侯)라고 부르는데, 그건 한무제(漢武帝)의 이름이 철(徹)이라 피휘(避諱)해서 그런 것입니다)



진의 징병제를 실시하고, 그 대상은 일반 백성(주로 농민)이란 언급은 했습니다. 이들 백성은 성년, 정남(丁男)이 되면 의무적으로 역(役)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역은 트게 요역( 役)과 군역(軍役)입니다. 이 역에 관한 것은 학자에 따라 상당히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렇지만 대충 설명드리자면, 우선 매년 1개월간 국가에 대해 복역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을 경졸(更卒)이라 합니다. 또한 일생 동안 자신의 호적이 등록된 군(郡)에서 1년간 병역을 지며, 수도나 변경에서 또 1년간 군역을 졌는데(이런 걸을 '수(戍)자리 선다'라 합니다) 이것을 수졸(戍卒)이라 했습니다. 자신이 군역을 지는 동안 생활은 자비부담이 원칙이며, 또 자신이 빠짐으로 인해서 생기는 노동력 손실을 보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군역은 상당한 힘들고 버거운 것이었습니다.



간단하게 셈을 해보자면.... 진대의 인구를 2천만명으로 추산하는데, 그중 청장년의 남성인구는 크게 봐도 전 인구의 30%를 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가에서 징발대상으로 삼은 인구가 6백만 가량정도 인데....



극단적으로 계산해보면, 흉노공격과 만리장성 수축에 동원된 수가 30만, 오령(五嶺) 지역의 방어에 50만, 죄지은 형도(刑徒)로서 아방궁과 진시황릉(당시에는 여산묘(驪山廟)라고 불렀습니다) 공사에 70만, 기타는 각종 노역에 동원되어 최소 200만이 각종 국가의 공역(公役)에 동원되었는데, 이런 상태에서 국가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유지한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옛부터 학자들이 진나라 멸망의 원인을 과중한 세금과 노역(勞役)에 있다고 본 것 또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4. 전한(前漢)




진(秦) 말의 농민반란 속에서 반란군 우두머리 중 한사람인 유방(劉邦)이 초(楚) 패왕(覇王)인 항우(項羽)를 격파하고 세운 정권이 다들 아시는 한(漢)왕조입니다. 초(楚)와 한(漢)이 천하를 쟁패하기 위한 초한전쟁에는 역사적으로나 군사상 중요한 전투가 많고, 또 희대의 명장인 한신(韓信)과 뛰어난 참모이자 책사인 장량(張良) 등의 이야기 등등.. 참 읊을 게 많습니다. 예전에 초한전쟁을 한번 읊어 보려다가 유방만 소개하고 사실상 그만둔 일도 있고... 좀 찝찝하네요..(아~ 미안시러바라... 차라리 말을 말걸...) 유방이 세운 한왕조는 기원후 9년 왕망이 정권을 빼앗아 신(新)이란 나라를 세움으로서 일시 멸망하지만, 다시 한 종실의 후손인 유수(劉秀)가 내란을 평정하고 다시 한(漢) 왕조를 세우는데, 역사에서는 앞의 한을 전한(前漢) 혹 서한(西漢)이라 하고, 뒤의 한나라를 후한(後漢) 혹은 동한(東漢; 동한의 수도인 낙양이 서한의 수도인 장안에 비해 동쪽에 있어서 이렇게 부릅니다)이라 부릅니다. 여기서는 전한과 후한을 구별하겠습니다.







한나라는 초기에 거의 모든 제도를 진의 그것을 답습했습니다. 그래서 군사제도 또한 진(秦)나라의 군사제도와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방제도를 재편하는데 있어서는, 진(秦)이 내부 반란에 대해서 중앙군을 도와줄 종실의 우군 세력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긴 전란 도중 전공을 세운 공신들을 우대하기 위한 조치로 봉건제(封建制 = 분봉제(分封制))를 군현제와 같이 썼습니다. 그래서 한나라의 지방제도의 특징을 군국제(郡國制)라 부릅니다. 즉, 군현제를 기반으로 하되, 공신이나 종친을 특정지역에 왕으로 봉해 황실을 보위케 했습니다. 분봉제를 채택하면서 초한전쟁에서 공이 큰 공신들을 왕으로 봉해주었는데, 대표적인 사람들이 한신, 팽월, 경포 등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의 고조(高祖) 때 다 반역사건에 휩쓸려 주살(誅殺)되었고, 그 이후로는 종실 즉 유(劉)씨만을 제후왕으로 삼았습니다. 이 군국제와 중앙집권적 관료체제가 한나라 전반기를 특징지울 수 있는 점입니다.



중앙의 무관직은 대개 진(秦)나라 때와 거의 같습니다. 즉, 군정에 관한 최고장관은 진나라 때처럼 태위(太尉)입니다. 태위가 승상, 어사대부와 함께 최고 3관직인 삼공(三公)을 구성한 것도 같습니다.

(한나라는 관직의 상하등급을 1년에 받는 녹봉의 양으로 표시했습니다. 최고 3관직인 삼공은 1만석, 구경(九卿)은 중(中)2천석, 2천석, 1천석 이런 순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뭐 1만석을 받거나 2천석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실제 수령액은 훨씬 작았는데, 그저 관직 고하의 표시의미로 그렇게 부릅니다. 그리고 중앙 및 지방의 고위급 관직은 2천석을 기준으로 봅니다. 2천석 정도면 군 태수(太守)의 등급입니다.)



태위는 초기에는 그런대로 운영되었습니다. 실제 황제가 친정(親征)을 나갈 때가 아니면, 대규모 군사행동의 최고 책임자는 태위가 맡았습니다. 그러나 무제(武帝) 이후로는 상황이 바뀝니다. 무제는 자신만의 전제적인 권력을 차지하려 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가장 우선적인 것은 무력의 독점적인 소유입니다. 무제 때 한나라의 여러 사회제도가 변화를 겪는 것도 이와 연결되는 일입니다. 무제 때는 태위의 명칭을 대사마(大司馬= 주나라의 최고무관직이 사마(司馬)였다는 것을 상기해보시면 명칭 변경이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로 바꾸고 대장군(大將軍)이란 칭호를 더해주기도 했습니다. 원래 대장군(혹은 장군)은 특정 군사행동을 해야할 때가 있을 때 황제가 임명한 일종의 임시 총사령관이었는데, 무제 이후로는 하나의 관직처럼 정착됩니다. 태위는 1만석급 관직입니다.

대장군 아래로는 전(前), 후(後), 좌(左), 우(右)장군의 관직이 있었지만, 이 장군직들은 상설화된 관직은 아니었으며, 전쟁에서 각 장군들이 담당할 전장구역에 따라 붙여지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표기(驃騎)장군, 이사(貳師)장군 같은 관직도 나타나지만, 이것은 관직이라기 보다 황제가 특정한 무장 개인에게 내려준 칭호이자 별칭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들 중 후대에 가서는 완전히 하나의 관직으로 정착된 예는 있습니다. 대장군이 대사마 앞에서 하나의 관직처럼 되었을 때는 역시 마찬가지로 1만석의 관직이었습니다.



태위 이하의 무관직 또한 진(秦)과 대체로 같습니다. 구경(九卿)이라 불리는 고위 장관급 관직 중 무관인 직책에는 위위(衛尉)가 있습니다. 진나라의 관직 그대로지요. 위위는 4대 황제인 경제(景帝) 때 명칭이 중대부령(中大夫令)로 바뀌었다가 얼마 안되어 다시 본래 명칭으로 환원되었습니다. 위위의 가장 큰 임무는 궁성수비입니다. 위위는 중2천석의 관직입니다.

또 무관관직으로 역시 진나라때와 같은 낭중령(郎中令)이 있었습니다. 위위가 궁성수비에 중심을 둔 것이라면, 낭중령은 황제숙위에 중점을 둔 친위부대입니다. 낭중령은 무제 때 명칭이 광록훈(光綠勛)으로 개칭됩니다. 낭중령은 상당히 많은 속관(屬官)을 두었는데, 그 휘하에 광록대부(光祿大夫), 태중대부(太中大夫), 의랑(議郞), 중랑(中郞), 시랑(侍郞), 낭중(郎中) 등의 관직이 있었습니다. 낭중령도 중2천석 관직입니다.

이 외에 중위(中尉)라 불리던 관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중위는 집금오(執金五)라고 개칭되었는데, 황제가 출행(出行)할 경우 경호의 역할을 하면서, 수도지역에 대한 방위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한의 군사조직은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앙군은 수도인 장안(長安)을 수비하는데, 남군(南軍)과 북군(北軍)으로 나누어집니다. 남군이 궁성(宮城)과 주요관서의 호위를 담당한 반면, 북군은 수도의 그 주변지역을 일컫는 삼보(三輔)의 방위를 담당했습니다. 이 중에서 남군은 위위(衛尉)가 통솔하였고, 북군은 중위(中尉)가 통솔하였습니다. 남북군은 그 정확한 병력수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각각 2만 내외였다가 무제 이후로 각 1만명 정도로 준 것 같습니다.

남군이 궁성내 경비라는 제한적 목적의 군대라면, 북군은 수도지역을 방어하는 핵심군사력이기 때문에, 무제 이후로 북군의 군사력이 크게 확장됩니다. 초기에는 1천 여명 정도 인 것으로 여겨지는데, 무제 때에 확장되어 일종의 특수부대로서 8교(七校)가 창설되고 각 교는 교위(校尉)가 통솔했습니다. 중루(中壘), 둔기(屯騎), 보병(步兵), 월기(越騎), 호기(胡騎), 호분(虎賁), 사성(射聲), 장수(長水)가 바로 8교 입니다. 이 중에서 호기와 장수는 흉노에서 투항한 병사들로 조직된 기병부대이며, 나머지는 삼보지역에서 특별히 선발, 모집된 인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의 수는 많아야 1만명 정도로 여겨지지만, 장기복무하면서 수도 장안에 주둔하였기에 전체적인 전투력의 측면에서는 남군을 훨씬 능가하였습니다.(참고로 교(校)란 하나의 군영(軍營)이자, 전체 군(軍)의 한 부대를 의미합니다).

무제 때는 군사력 증대가 눈에 띄는데, 이 때 창설된 특수한 부대로서 기문군(期門軍)과 우림군(羽林軍)이 있었습니다. 이들 군대는 1천여 명 내외로 군사력이란 측면에서는 그다지 큰 역할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 대다수가 황제에 대한 친종(親從)과 숙위(宿衛)를 담당하였기에 이들 군대가 가지는 정치적 함의는 컸습니다. 또한 종군(從軍)하다 죽은 자의 자손을 택해서 우림군에서 키우면서 이들을 군사로 양성했는데, 이를 우림고아(羽林孤兒)라 부르며, 역시 황제 숙위의 역할을 맡겼습니다.





지방군의 편제는 전체적으로 역시 진(秦)나라 때와 동일했습니다. 지방제도가 군국제였다고 하지만, 행정단위인 군(郡)과 국(國)에서 지방군의 편제는 다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무제 때 이후로는 대부분의 제후국이 소멸하고 혹 남아있더라도 1~2현의 부세(賦稅)를 징수하는 정도에 그쳤기에, 실제로는 군사제도상으로는 봉국(封國)이 가지는 의미나 구분은 소멸하였습니다. 군(郡)의 최고 군정담당관은 2천석 관직인 도위(都尉, 혹은 군위(郡尉))였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에서는 민정을 맡은 군태수와 군정을 담당한 도위가 상호 견제하는 제도였지만, 한나라에서는 도위는 군태수의 직접적인 규제를 받았습니다.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있으면 황제의 사자가 태수에게 가서, 태수가 가진 호부(虎符)와 맞춰본 후에야 태수가 도위에게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또한 매년 8,9월에는 태수가 도위를 대동하고 그해 징발된 군대의 사열을 받았는데, 이것을 도시(都試)라고 했습니다.

원래 도위는 1군에 한사람이 임명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무제 이후로 군사적 필요성이 증대되면서, 중요한 군(郡)에는 여러 사람의 도위(都尉)가 임명되었습니다. 이 도위 가운데, 특이한 것이 속국도위(屬國都尉)의 존재인데, 이들은 변경의 이민족이 한나라에 투항했을 때 그들을 관리하기 위해 둔 직책입니다. 그래서 명목상 속국도위는 군태수의 관할 아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앙의 전속국(典屬國)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이 속국도위의 대부분이 흉노족을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속국도위가 통솔하는 병력은 주로 기병으로, 이들은 대흉노전쟁에서 큰 역할을 합니다.



일반 군현에서 동원되는 자들은 대체로 일반 농민층이었고, 그들이 또 병역과 요역이 합쳐진 형태의 역을 지었다는 점에서는 진나라 때와 동일합니다. 징병 시작연령은 초기엔 17세, 나중에 20세, 23세였고, 면역 시점은 60세였다가 56세로 줄어듭니다.(그렇지만 대충 20~60세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근대의 동양에서는 징병연령 거의 이와 같습니다) 복무기간이 2년인 점 또한 진나라와 동일합니다. 1년은 재관(材官="보병)," 기사(騎士), 누선(樓船)의 병종에 따라 소속군현에서 지방경비를 담당했는데, 이를 정졸(正卒)이라 합니다. 1년은 둔졸(屯卒)로서 수도나 변방에서 복무했는데, 수도 장안의 남북군에 선발된 자를 위사(衛士)라 부르며, 변방에서 수자리를 서는 것을 수졸(戍卒)이라 했습니다. 병역 대신 일정액의 돈을 지불하고 면제받는 것이 합법적으로 가능하였는데, 즉, 돈을 내어 다른 사람을 사서 병역에 충당케 하는 것입니다. 이를 과경(過更), 혹은 갱부(更賦)라 불렀습니다. 위의 2년외에도 매년 갱졸(更卒)에서 1개월 간 각종 노역(勞役)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무상노역 및 징병제는 일반 농민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고된 것이었습니다. 동원될 때 비용이 자비부담인데다, 역시 빠진 노동력에 대한 어떤 반대급부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징병(徵兵)에 의한 동원말고도 한(漢) 대의 특징은 모병제(募兵制)가 실시되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모병제가 한나라 때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전국시대에도 모병제의 초기형태로 볼 수 있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고대 모병제의 시초라 볼 수 있는 것은 한나라 때이며, 그 대표적인 부대가 앞서의 8교입니다. 그 밖에 분명(奔命), 항건(伉健) 등의 모병에 의한 부대가 보입니다. 모병제가 나타난 이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무그 발생 시기가 한 무제때라는 점을 우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앙군의 주력이자 수도방위부대로서 남북군은 징병에 의해 구성된 군대라는 측면에서 몇가지 한계를 가졌습니다. 우선 그들 전투력의 질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남북군에 배치되는 위사들은 지방의 군현에서 올라온 자들 중에서 특별히 선발한 자들이었지만, 1년이란 기간은 개개인의 전투력을 증대시키기엔 부족한 시간이었습니다. 또 1년만에 바뀐다는 점에서 황제에 대한 어떤 절대적인 충성심을 유도해 낼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모병제를 도입할 실시할 경우, 필요한 병력을 비교적 대량으로 신속히 모집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병제를 실시할 경우, 결국 그 군대를 유지할 재원이 문제가 되는데... 안 그래도 잦은 외정(外征)으로 재정문제에 직면한 상황에서 대규모 모병은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무제(漢武帝) 때 나온 소금과 철에 대한 국가전매제도 등의 재정혁신책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 대의 병종은 대체로 3가지라 여겨집니다. 앞서도 나온 재관(材官), 기사(騎士), 누선(樓船)이 그것입니다. 재관은 보병이고, 기사는 기병, 누선은 수군입니다. 재관은 일반 군현에서 대량으로 동원된 병종인 반면, 기사는 말이 있어야 하고 또 기마(騎馬)에 관한 특수한 재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흉노와 변방의 군현과 수도지역에서 주로 충당되었습니다. 누선은 수군이라 그 특수성 때문에 주로 해안의 군현이나 장강(長江), 회수(淮水)를 끼고 있는 군현에서 충당되었습니다.



출처 : http://www.militaryreview.com/?inc="boardList&sno=1&dbno=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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