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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4-21 17:25:422708 
주나라 간사
운영자

1.주(周)의 시조 후직(后稷)




이름은 기(棄)다. 유태씨(有邰氏)의 딸인 그의 어머니는 이름이 강원(姜原)으로 제곡(帝嚳)의 정비(正妃)였다. 강원이 들에 나가서 거인의 발자국을 보자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즐거워지면서 그것을 밟고 싶어졌다. 그녀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으니 마치 아기를 가진 듯 배 안이 꿈틀거렸다. 달을 다 채워서 아들을 낳았는데 불길하게 생각되어 비좁은 골목에 버렸다. 그러나 말이나 소가 지나가면서 갓난아이를 모두 피하고 밟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아이를 수풀 속에 옮겨놓았으나 그때는 산 속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또다시 장소를 옮겨서 얼어붙은 강 위에 버렸으나 날짐승들이 날개로 아이를 덮고 깃을 깔아주었다. 그래서 그것을 신기하게 여긴 강원은 아이를 데려다가 키웠다. 처음에 아이를 버리려고 생각하였으므로 '기(棄)‘라고 부른 것이다.

기는 어린 시절 출중하여 큰 인물의 기개가 있는 듯했다. 그는 놀이를 하면서도 삼과 콩을 잘 심었는데, 그가 심은 삼과 콩은 모두 잘 자랐다. 성인이 되자 더욱 농경에 힘써 토지의 특성을 살펴서 곡식을 심어야 할 곳에 농사를 지으니, 백성은 모두 본받았다. 요임금이 이러한 소문을 듣고 기를 농사(農師: 지금의 농림부장관에 해당)로 등용하자 그는 세상 사람들을 위해 유익한 일을 행하여 공을 세웠다.

요임금은 기를 태(邰)에 봉하고 후직이라고 칭했으며 따로 희씨(姬氏) 성을 하사하였다. 후직이 흥성한 시기는 요(堯), 순(舜), 우(禹) 의 시대였고, 모두 미덕을 지녔다.




2. 후직(后稷)에서부터 고공단보(古公亶父)까지의 계보




후직 - 부줄(不茁) - 국(鞠) - 공류(公劉) - 경절(慶節) - 황복(皇僕) - 차불(差弗) - 훼유 - 공비(公非) - 고어 - 아어 - 공숙조류(公叔祖類) - 고공단보(古公亶父)




3.고공단보(古公亶父)

고공단보가 후직과 공류의 사업을 다시 익히고 덕을 쌓고 의를 행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받들었다. 훈육(薰育) 융적(戎狄)이 고공단보를 공격하여 재물을 요구하자 그들에게 재물을 내주었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이 다시 공격하여 땅과 백성을 요구 하자 백성들은 모두 분개하여 싸우고자 했다. 그러자 고공단보는 "백성이 군주를 옹립하는 것은 자신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오. 지금 융적이 우리를 공격하는 까닭은 우리의 땅과 백성 때문이오. 백성이 나에게 속하든 그들에게 속하든 무슨 차이가 있겠소? 백성 들이 나를 위해서 싸우고자 한다면 이는 그들의 아버지나 아들을 죽여가면서 그들의 군주가 되는 것이니, 나는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소"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사병을 거느리고 빈을 떠나서 칠수, 저수를 건너고 양산을 넘어서 기산 아래 정착했다. 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고 다시 기산 아래 고공단보에게 모두 귀순했다. 그 이웃나라의 사람들도 고공단보가 인자하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순했다. 이때 고공단보는 융적의 풍속을 개량하고 성곽과 가옥을 건축하고 읍을 나누어 그들을 살게 했으며, 오관유사(五官有司)를 설치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두 노래하며 그 덕을 칭송했다.

고공단보에게는 장남인 태백(太伯)과 차남인 우중(虞仲)이 있었다. 그의 아내 태강이 낳은 막내아들 계력(季歷)은 태임(太任)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태강과 태임은 모두 어진 부인이었다. 태임이 창(昌)을 낳았을 때 성스러운 길조(전설에 의하면 창이 출생할 때 붉은 새가 단서(丹書)를 물고 방으로 날아들었다고 한다.)가 있었다. 그러자 고공단보는 "나의 시대에 큰 사업을 일으킬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창에게 해당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태백과 우중은 고공단보가 계력을 옹립하여 창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것을 알고는 둘이서 형만(荊蠻)으로 달아나서 문신을 하고 머리털을 짧게 자르고서 왕위를 계력에게 양보했다.




4.공계(公季)

고공단보가 죽고 계력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공계이다. 공계는 고공단보가 남긴 정도를 잘 닦고 성실하게 의를 행했으므 로 제후들이 그에게 순종했다.




5.문왕(文王), 서백 창(西伯 昌)

공계가 죽자 아들 창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서백으로, 서백은 후에 문왕이라고 불렸다. 서백은 후직과 공류의 사업을 따르고 고공단보와 공계의 법도를 본받아 오로지 어진 정치를 행하고 늙은이를 공경하며 어린이를 사랑했다. 그가 어진 사람에게는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고 낮에는 재사를 접대하기에 식사할 겨를도 없었으므로 재사들은 대부분 서백에게 몰려들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고죽(孤竹)에서 서백이 노인을 우대한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서백을 따랐다. 태전, 굉요, 산의생, 육자, 신갑대부등이 모두 가서 그를 따랐다.

숭후호(崇侯虎)는 은나라의 주(紂)에게 서백을 모함하기를 "서백이 선과 덕을 쌓으므로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기울어지니, 장차 임금께 불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주는 마침내 서백을 유리에 가두었다. 굉요 등이 이 일을 거정하여 유신씨의 미녀, 여융의 문마, 유웅의 구사를 다른 여러 특산물들과 함께중의 총애를 받는 비중을 통해 주에게 바쳤다. 주는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한 가지 물건 만으로도 서백을 석방시키기에 충분한데, 게다가 이토록 많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에 서백을 사면 시키고 그에게 궁시(큰 활과 작은 활)와 부월(큰 도끼와 작은 도끼)을 하사하여 서백에게 주변 제후국을 정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리고는 " 서백을 비방한 자는 숭후호이다"라고 말했다. 서백이 낙하 서쪽의 땅을 바치며 주에게 포격형(기름 바른 기둥 아래 불을 질러놓고, 죄인에게 그 위를 걸어가게 하여 미끄러지면 불에 타죽게 하던 형벌.)을 없애주도록 청원하자. 주는 그것을 허락했다.

서백이 남몰래 선행을 하였으므로 제후들은 모두 그에게 와서 공정한 판결을 청했다. 이때 우(虞)와 예(芮)의 사람들에게 송사가 있었는데, 양자가 해결하지 못하자 주나라로 찾아갔다. 그들이 주나라 경내에 들어서보니 농부들이 서로 밭의 경계를 양보하고, 백성들의 풍속은 모두 연장자에게 양보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우, 예의 사람은 채 서백을 만나기도 전에 부끄러워하며 "우리처럼 싸우는 것은 주나라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바이니, 가서 뭐하겠는가? 부끄럽게만 될텐데..."라며 그냥 되돌아가서 서로 양보하고 헤어졌다. 제후들이 이 소문을 듣자 "서백은 아마도 천명을 받은 군주인가보다"라고 말하였다.

이듬해 서백은 견융(犬戎)을 정벌하고, 그 다음해 밀수(密須)를 정벌했다. 다음해에는 기국(耆國)을 쳐서 무찔렀다. 은의 조이가 이러한 소식을 듣자 두려워 주에게 고하였다. 그러나 주는 "내게 천명이 있지 않은가?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다음해 서백은 우를 정벌했다. 그 다음해에는 숭후호를 정벌하고 풍읍을 건설하여 기산 아래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서백은 약 50년간 왕위에 있었다. 아마도 그가 유리에 갇혀 있을 때 '역(易)'의 8괘를 더하여 64괘로 만든 것 같다. 시인들은 서백이 천명을 받아 왕으로 칭해진 때는 바로 우와 예의 송사를 해결한 해라고 말하였다. 그후 10년이 지나서 그가 붕어하자 시호를 문왕이라고 했다. 서백은 법도를 개정하고 정삭을 제정했다. 그는 고공단보를 추존하여 태왕(太王)이라고 했고, 공계를 높이어 왕계(王季)라고 했는데, 이것은 대개 주(周)의 왕업이 조부인 태왕 고공단보로부터 흥했기 때문이다.




6.무왕 발(武王 發)

서백이 붕어하고 태자 발이 즉위하였으니, 이 이가 바로 무왕이다. 무왕이 즉위하자 태공망(太公望 : 성은 강(姜), 씨(氏) 는 여(呂), 이름이 상(尙), 민간에서는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부른다. 제(濟)에 봉해졌다.)을 사(師 : 군사참모)로 삼고 주공( 周公 : 이름은 단(旦), 문왕의 아들, 무왕의 동생, 곡에 봉행져 노공(魯公)이 되었으나, 임지로 가지 않고 무왕을 보좌하였다. 무왕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했다. )을 보(輔)로 임명했으며 소공(召公 : 문왕의 서자, 召에 봉해져 소공이라고 불린다. 연(燕)의 시조.)과 필공(畢公 : 이름은 高, 문왕의 아들. 필에 봉해짐)등은 왕을 보자하며 문왕의 위업을 배우고 확대하게 하였다.

문왕 9년(문왕이 9년에 붕어하였으나 무왕은 문왕의 연호를 계속 채용하였다.), 무왕이 필에서 제사를 올리고 동쪽으로 가서 군대를 사열하고 맹진(盟津)에 이르렀다. 그는 문왕의 목주(나무로 만든 위패)를 만들어 중군(中軍)의 수레에 실었다. 무왕은 자신을 태자(太子) 발이라고 칭하고서 문왕의 명을 받들어 정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무왕은 사마(司馬), 사도(司徒), 사공(司空), 제절(諸節)에게 "우리 모두 정중하고 조심스럽게 일합시다. 성실하게 노력합시다! 나는 무지하지만 선조께서 덕이 있으시어 미천한 이 몸이 선조의 공적을 받았소. 상벌제도를 바르게 세워 공적을 보장하겠소"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군사를 일으켰는데, 군사인 상보(태공망)가 각 제후들에게 "그대들의 사병을 모아 배를 띄워서 출동하시오! 나중에 도착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오!"라고 호령하였다. 무왕이 강을 건너서 중류에 이르자 흰 물고기가 왕의 배로 튀어올라, 무왕은 몸을 굽혀서 집어들어 제를 올렸다. 강을 다 건너자 불덩이가 하늘에서 떨어지더니, 왕이 머무는 지붕에 이르렀을 때 까마귀로 변했는데, 그것들은 붉은 색이었고 까악까악 하고 울었다. 이때 기일을 정하지 않았어도 맹진에 모인 제후는 800명이었다. 제후들이 모두 "주는 정벌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으나, 무왕은 "그대들은 아직 천명을 모르니, 정벌할 수 없소!"라고 하고는 병사를 이끌고 되돌아갔다.




2년이 지나자 주(紂)는 혼란스러움과 포학함이 더욱 심해져서, 왕자 비간(比干)을 죽이고 기자(箕子)를 감금했다는 소문이 들렸다.그러자 태사(太師) 자(疵)와 소사(少師) 강(强)은 은나라의 악기를 품고 주(周)나라로 달아났다. 그러자 무왕은 제후들에게 "은의 죄가 무거우니 이제는 어서 정벌하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문왕이 남긴 뜻을 받들어 융거(戎車) 300대와 용사 3000명, 갑사(甲士) 45000명을 이끌고동으로 가서 주(紂)를 정벌했다. 11년 12월 무오일에 군사들이 모두 맹진을 넘었고 제후들이 전부 모였다. 그들은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싸우자고 다짐하였다. 무왕은 곧 태서(太誓)를 지어 많은 병사들에게 고하였다. "지금 은나라의 왕 주는 단지 자기 부인(달기)의 말만 듣고 스스로 천명을 끊었으며, 삼정을 훼손하게 하고 그의 왕부모제를 멀리하였고, 마침내 선조의 음악을 저버리고 음란한 노래를 만들어 올바른 소리를 어지럽혀 자기 부인만 기쁘게 하였소. 이에 이 사람 발은 삼가 천벌을 집해하려고 하오. 그대들이여, 노력합시다! 두 번 세 번 다시 행하지 않도록!"




2월 갑자일의 동틀 무렵, 무왕은 아침 일찍 상나라 교외의 목야에 이르러 맹세하였다. 무왕은 왼손에 황색 도끼를 쥐고 오른손에 흰색의 모를 들고 지휘하며 말하였다. "멀리서도 와주었소, 서토(西土)의 사람들이여! 자 나의 제후들이여! 사도, 사마, 사공, 아려, 사씨, 천부장, 백부장, 그리고 용, 촉, 강, 모, 미, 노, 팽, 복의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창을 높이 들고 방패를 줄마추고 창을 치켜드시오! 선서하겠소."라고 하며 선서하였다.

선서가 끝나자 집결한 제후들은 전거(戰車)가 4000대였고, 그들은 교외의 넓은 들에 도열하였다.

주(紂)는 무왕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70만 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무왕에 대항하게 했다. 무왕은 사상보에게 100명의 용사를 이끌고 치사(도발)하게 하고 대졸을 주의 대오로 돌격하게 했다. 주의 군대가 비록 수는 많았지만 모두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무왕이 빨리 쳐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주의 군사들은 도병(창을 거꾸로 하는 것)하여 싸우면서 무왕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무왕이 돌격하자 주의 병사는 모두 무너지고, 그들은 주를 배반했다. 주는 성으로 다시 도망쳐들어가서 녹대에 올라 보석이 박힌 옷을 뒤집어 쓰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다. 무왕이 커다란 백기를 들고 제후들을 지휘하니 제후들이 모두 무왕에게 절하였고, 무왕이 제후들에게 읍(揖)하자 제후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무왕이 상나라의 도성에 이르자, 상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교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왕은 군신들로 하여금 상의 백성들에게 "하늘이 행복을 내려주었도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상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재배하며 머리를 땅에 조아리자, 무왕 역시 답례했다. 무왕은 드디어 성으로 들어가서 주가 죽은 장소에 이르렀다. 그는 직접 주의 시신을 향해서 화살 세발을 쏜 후, 마차에서 내려서 경검으로 시신을 치고 황색 도낄로 주의 머리를 베어 커다란 백기에 매달았다. 다시 주의 애첩인 두 여자를 찾아가니, 두 여자는 모두 이미 목을 매어 자살한 뒤였다. 무왕은 또 화살 세 발을 쏴 검으로 치고 흑색 도끼로 목을 베어 작은 백기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무왕은 성을 나와서 다시 군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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