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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12 15:06:196736 
진시황의 최후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
양승국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좌승상 이사(李斯)와 그의 막내 아들 호해(胡亥)를 대동하고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를 비롯한 막료와 태감(太監)의 호위 아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통일제국의 순행길에 나섰다.


황제의 대부대가 함양(咸陽)에서 출발해서 무관(武關)을 나와서 단수(丹水)와 한수(漢水) 유역을 지나 장강(長江) 연안을 끼고 회계산(會稽山)에 올랐다. 진시황은 회계산에서 대우(大禹)에게 제사를 지내고 자기의 공적을 돌에 새겼으며, 또한 당시 중국 동남 변경지역에 남아있던 씨족 사회의 혼인 풍습과 남녀의 음란한 현상에 대해 일침을 가하여 “ 태평 성세를 위해 천하에 교화의 풍을 계승하여 민속을 정리하도록 하라!”라는 교지를 내리고, 이를 돌에 새겨 만 백성들이 깨닫도록 했다. 회계산을 떠난 진시황은 뱃길을 이용하여 낭야(琅邪)에 당도했다. 진시황은 방사(方士) 서불(徐巿)의 말을 듣고 궁노수(弓弩手)와 함께 교어(鮫魚 : 상어)를 잡으러 바다로 나아갔다. 대어를 잡은 진시황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차서 낭야대(琅邪臺)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했다. 그 때 문득 몸이 불편함을 느낀 진시황은 그의 행렬을 서쪽으로 돌려 환궁하도록 명했다. 진시황의 행렬이 평원진(平原津 : 지금의 산동성 평원현 서남쪽의 옛 황하의 나루터)에 도달했을 때 그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때는 태양이 작열하는 한 여름이었다. 더위에 시달리는 시황제와 그의 군대는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서쪽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이사와 호해는 마음이 불타는 듯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시황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신음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 했다. 죽음의 신이 그의 곁에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진시황 일행이 하북 지역에 있는 사구평(沙丘平 : 지금의 하북성 평향현(平鄕縣))에 이르렀을 때 이미 운명의 시간이 닥쳐왔다는 것을 감지한 진시황은 이사와 조고를 불러 유서를 작성하게 했다. 유언의 내용은 북방에서 흉노족을 지키고 있던 태자 부소(扶蘇)에게 함양(咸陽)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는 것이었다.


이사와 조고는 황급히 조서를 지어 진시황에게 보여주었다. 떨리는 손으로 옥새를 이사에게 전하면서 진시황이 겨우 입을 열어 말하기를 시작했다.


“ 속히 사자를 파견하여 부소를......”


미처 말을 끝맺기고 전에 진시황은 숨을 거두었다. 거대한 대륙의 중국 정치 무대에서 온갖 역정을 다 겪으며 천지를 개벽시킨 위대한 인물, 진시황이 끝내 찬란했던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때 나이 50세, 스스로 시황제라 칭한 지 겨우 12년만의 일이었다.


진시황이 죽은 뒤 승상 이사는 새로운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선왕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선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비밀에 부쳤다. 시황제의 죽음은 이사 자신과 호해와 조고, 그리고 몇몇의 시종 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이사와 조고는 비밀리에 계획을 세운 뒤,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진시황의 시신을 온도가 조절되는 온량거(轀輬車)에 실었다.


수레에 휘장을 치고 평상시처럼 음식과 물을 집어넣도록 했으며, 신료들이 상주하는 일에 대해서는 호해와 중거부령인 조고, 그리고 이사가 대신해서 처리했다. 이들을 제외하고 다른 신료들은 그 누구도 진시황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 신구 정권이 교체하는 위험한 시기에 직면하여 이사는 조고에게 속히 부소에게 조서를 보내 함양으로 돌아와 상례를 치르고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하라고 재촉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시 조고는 딴 속셈이 있었다. 결국 그의 강요와 뀜에 빠진 이사도 또한 진시황의 유언을 변조하는 데 찬성했고, 태자 부소와 대장군 몽염(蒙恬)에게 검을 보내어 자살하도록 명령하고 진시황의 막내아들 호해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사구(沙丘)의 음모(陰謀)’이다.


부소와 몽념이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리느라 행렬은 일부러 정형(井陘 : 지금의 하북성 정형현(井陘縣))에서 구원(九原 :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포두시(包頭市)) 쪽으로 크게 북상한 다음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함양으로 향했다. 긴 여정과 무더위로 진시황의 시체가 부패하여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사와 조고는 시체 썩는 냄새를 가리기 위해 소금에 절인 생선 몇 수레를 가져다가 시황의 시신을 싣고 있던 온량거 곁에다 두었다. 그들의 행렬이 함양으로 들어섰을 때 마침내 부소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이사와 조고는 정식으로 진시황의 죽음을 공포했다. 부패하여 이미 썩어 문들어진 진시황의 시신을 그 해 9월 여산(驪山) 진시황릉에 매장하고 호해가 2세황제로 등극했다. 조고는 승상에서 낭중령으로 승진되고 이사는 승상직을 계속 유지했다.


조고의 사주로 호해는 등극하자마자 제일 먼저 부소를 추종하던 장군 몽염에게 독주를 내려 죽이고, 이어서 6명의 공자와 10명의 공주들을 체포하여 두현(杜縣 : 지금이 삼서성 서안시 동남 쪽)으로 압송한 다음 차례로 죽였다. 다시 12명의 공자를 함양으로 압송하여 길거리에서 참수한 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그 밖의 황실의 종친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살하고 어떤 사람들은 도망가다가 어림군에게 피살당했다. 화근을 철저하게 뿌리뽑기 위해서 호해는 조정에서 이견을 가진 신료들을 차례로 모두 죽였다. 마지막으로 조고의 유혹으로 자신의 등극을 도왔던 이사마저 함양의 시내에서 요참(腰斬) 형에 처해 죽였다.


진제국이 무너지고 또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 경악할 만한 피의 역사도 세월 속에 묻혀갔다. 후대 사람들은 당시 조정 안팎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튀기고, 폐부를 찢는 듯한 처참한 비명소리가 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그 일이 있고 난 다음 2200년 후인 1976년 10월 어느 날, 진릉(秦陵) 고고학발굴대(考古學發掘隊)의 대원들이 진시황릉 동쪽에서 17기의 순장묘를 발견함으로써 전혀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옛날의 비참한 살육의 현장이 만인에게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그 분묘의 형태와 내용을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 탐사대원들은 그중 8개의 묘에 대해 발굴 작업을 단행했다. 묘의 매장 구조는 모두 경사진 갱도가 나있는 갑(甲) 자 형태였다. 그 안에는 경사로가 있는 네모난 형태의 관곽(棺槨)을 묻은 갱혈(坑穴)인 광(壙) 묘가 2기가 있었고, 역시 경사로가 있는 네모난 형태의 광(壙)에 동실(洞室)이 있는 묘 6기가 있었다. 묘의 독특한 형태로 보아 묘지의 주인이 황실 종친이나 귀족, 또는 대신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진나라의 경우 일반 평민은 이런 묘도(墓道), 즉 경사로가 있는 무덤에 묻힐 수 없었기 때문에다. 무덤 안에서 발견된 거대한 관곽(棺槨) 또한 평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순장묘 안에서 흐트러진 유골들과 기이한 물건들이 발견됨으로써, 당시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유골은 하체 부분이 관 옆의 황토에 묻혀있고, 두개골은 곽실의 두상(頭箱)※ 덮개 위에 올려져 있는 상태였다. 또 어떤 시체의 두개골은 곽실 밖에 놓여 있었는데, 그 나머지 뼈들은 관 안에 놓여 있는 경우도 있었다. 더욱 특이한 것은 어떤 시체는 몸과 사지가 서로 분리되어 아무렇게나 관 안에 처박혀 있었고, 두개골만 관 밖의 흙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자세한 조사를 통해 머리뼈의 오른쪽 이마 위에 부러진 구리 화살촉이 꽂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매장 전에 화살을 맞은 것이 분명했다. 발굴된 8기의 묘 가운데 결국 한 기에서는 유골을 찾을 수 없었고, 단지 검 한 자루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든 현상을 종합해 볼 때 묘의 주인들은 대부분 살해당한 뒤에 사지가 찢겨져 매장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묘의 주인들이 황실 종친이나 귀족들이었다는 근거는 독특한 묘의 구조 외에도 무덤 안에서 대량의 금, 은, 구리, 옥, 칠기, 비단 따위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은으로 만든 두꺼비로, 입 안쪽에 ‘소부(少府)’라는 두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이는 이 장례 기물이 진나라 소부 즉 중앙의 구리 주조관서인 소부에서 제조된 뒤에 묘의 주인이 그것을 소유한 것임을 나타낸다. 이런 진귀한 기물들 또한 당시 평민들이 소유하거나 구경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호해가 빚어낸 역사의 참극을 연상시킨다. 난잡하게 어질러진 유골들은 피살당한 공자, 공주, 또는 황실 출신 대신들의 것으로, 정상적인 죽음으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과학적 검증의 결과, 이 일곱 구의 유골은, 20세를 전후한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한 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30세 전후의 남자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나이의 남자가 일제히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더욱둑 주의를 끄는 것은 묘실 안에서 묘를 팔 때 난방을 위해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숯이 나왔다는 점이다. 이는 모두 묘를 파던 시기가 동절기였음을 보여 주는 것인데 호해가 공자, 공주, 신료들을 살해하도록 명령했던 시기 또한 늦겨울이나 이른봄의 추운 계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이처럼 참혹하게 학살된 후 결국 진제국도 파멸할 수밖에 없는 길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진시황이나 호해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진시황의 폭정과 가혹한 형벌, 그리고 노역과 지나치게 긴 병역 때문에 백성들이 이에 반발 해 제국을 멸망의 길로 인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은 물론 진나라를 패망하게 한 중요한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 하윤곤(賀潤坤)이 말한 대로 ‘ 진나라가 망한 근본 원인은 호해가 왕위를 찬탈한 뒤 모든 것을 도리에 역행해 끌고 갔기 때문이고, 진나라 통치 집단의 모순과 분열을 조성해 통치 역량을 나약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볼 수도 있겠다.


만일 호해가 왕위를 계승한 뒤, 힘써 정치를 하고 진나라 사회의 모순들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면 그렇게 빨리 나라가 와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조정 내부 관료 집단의 단결과 이익을 보호했다면 설사 봉기가 일어났다 해도 이를 막아낼 충분한 역량이 있었다는 말이다. 예컨대, 당시 진나라의 장수 장한(章邯)이 몇 십만에 달하는 여산(驪山)의 죄수들을 무장시켰다면 주장(周章)의 농민 봉기군을 대패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북쪽 변경에서 국방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던 대장군 몽염과 그의 30만 정예병이 장한과 합세하여 공동으로 봉기군에 대처했다면 유방이나 항우의 대군도 함곡관(函谷關)이나 무관(武關)을 넘을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함양으로 진격해 진나라를 패망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역사는 다시 재현될 수 없다.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진나라가 급속해 패망했다는 사실뿐이다. 모든 가설은 역사 앞에서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또한 역사는 미래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진시황 능묘에서 발견된 17기의 순장묘는 후세 사람들에게 이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통해 생활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이치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민족에 이롭고 또한 자신에게도 이로운 것이다.


▶두상(頭箱) : 겉널인 곽(槨)과 안널인 관(棺) 사이의 공간을 말하는데, 시신의 정수리 부분의 공간을 두상(頭箱), 발 쪽의 부분은 각상(脚箱), 양쪽 옆구리 쪽의 것은 변상(邊箱)이라 한다.





< 출전 : 일빛 출판사 간 부활하는 군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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