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각(天一閣) 이야기

여추우(余秋雨)의 중국문화답사기

(미래M&B 간)

1. 어찌된 일인지 천일각과 나 사이에는 항상 이상한 거리감이 있었다. 이치대로라면 나는 학자이고, 천일각은 책을 모아둔 건물이며, 게다가 천일각은 영파(寧波)의 성내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영파 사람인 내가 자주 방문했어야 당연한 일일 터였다. 그러나 나는 여태까지 그곳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1976년 여름, 영파에서 요양하고 있던 나는 어린 시절의 스승이신 성종건(盛鐘健) 선생님 댁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줄곧 나를 데리고 천일각에 들러 책을 구경시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당시에는 수속이 번잡했고 책을 읽고 싶은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다음으로 미루고 말았다. 나중에 내 병세도 호전되고, 영파시 문화예술계의 여러 친구들이 정기적으로 나를 초청해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갈 때마다 시간이 촉박해 천일각에 들를 여유가 없었다.

요즘도 영파를 며칠간이라도 여행하고 돌아온 상해의 보통 사람들은 거의 모두 천일각에 대해 한마디씩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런데도 주로 천일각에서 소장하고 있는 진본을 영인한 서적을 연구할뿐더러, 천일각의 변천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는 오히려 그곳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으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1990년 8월 나는 또다시 영파에서 강의를 할 기회가 생겼다. 강의가 다 끝난 그날 나는 우물쭈물하며 나를 초청해준 이에게 한 가지 요청을 했다. 나를 초청해 준 이는 다름 아닌 영파시 문화국 부국장 배명해(裵明海) 선생으로 천일각을 관장하는 이였다. 그는 천일각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나의 말에 깜짝 놀라면서, 즉각 그 다음날 직접 나와 함께 천일각으로 가보자고 말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태풍이 몰려와 폭우가 쏟아지고 도시 전체가 거센 바람에 뒤흔들리는 듯했다. 이튿날 오전 약속대로 우리는 천일각에 도착했다. 정문 주변은 마치 우물을 파놓은 듯 온통 물구덩이였고, 정원 곳곳은 도랑이 되어 흙탕물이 흐르고 있었다. 폭풍우에 여지없이 떨어진 나뭇잎은 이리저리 나뒹굴고, 벽돌로 만든 담벼락에도 축축한 습기가 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천일각의 경비를 서고 있는 이는 노인네였다. 비바람이 거센 날씨에 문화국 부국장이 그것도 외빈과 함께 천일각을 방문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그는 황급히 우산을 마련하고 청소부가 신던 장화를 빌려와 우리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정원에 물이 너무 많이 고여 있었기 때문에 한 발자국 떼기가 무섭게 장화 속으로 물이 들어가고 말았다. 아예 신발을 벗어 버리는 게 편안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명해 선생과 나는 바지통을 걷어 올리고 진흙탕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에 젖어 온몸이 싸늘한 상태에서 맨발로 진흙탕을 걷자니 더욱 한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나와 배선생은 서로 의지하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장서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천일각에 가까이 다가서는 일이 도대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천일각 바로 앞까지 다가선 우리는 더욱 강한 비바람이 마지막 장벽처럼 가로막아 잠시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대로 일반 학자들은 천일각에 들어가서 책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 내가 천일각에 들어가기 위해 하늘의 주재 하에 엄격한 의식을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이 건물을 세운 이가 역경(易經)에 나오는 “천일생수(天一生水)”에서 뜻을 따온 것으로 물의 힘을 빌어 불을 끈다는 의미를 지닌다. 역대로 장서자들의 가장 골치 아픈 일 가운데 하나는 바로 화재였다.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를 방지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난생 처음 천일각을 방문하는 날, 하늘은 나에게 ‘천일생수’의 진정한 의미를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나에게 지극한 경건함으로 하늘의 의식을 맞이하라는 명령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상함을 버리고 참관을 하는 식의 유유자적함도 벗어던진 채 심지서 신발을 신고 성전을 밟지 않도록 허리를 구부리고 무릎을 굽혀 부들부들 떨며 그 앞으로 다가오게 한 것이다. 오늘 나 이외에는 다른 참관자들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범상하지 않은 일이 아니겠는가?

2. 그렇다. 그곳은 서적을 모아둔 곳일 뿐이다. 그러나 그곳은 실제로 이미 극단적인 어려움과 비애를 지닌 문화적 기적이 되었다.

중국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문명화한 민족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은 놀랍게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상형문자를 창조했으며, 죽간과 백서을 발명했고, 이후 연이어 종이와 인쇄술을 발명해 이를 널리 전파시켰다. 이 모든 창조는 신속하게 책의 보급을 촉진시켜 위대한 화하문명을 널리 알리는 데 활용되었다. 그러나 야만적인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남에 따라 약한 죽간이나 얇은 종이는 부단히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한없는 우매함은 더욱 시시때때로 부서지기 쉬운 지혜를 삼겨버리고 말았다. 중국 민족은 문자와 인쇄술을 발명한 만큼 당당하게 수많은 책들을 보유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제대로 보존할 수 없었기에 결국 중국 땅에서 책이란 언제나 진귀하고 낯선 괴물인 양 취급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민족의 정신은 오랜 세월 내내 혼란스런 상태에서 스스로 일어설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도대체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느 것으로 가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으며, 또한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옳은지 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이 민족을 위해 책에 모든 것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분명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책만 있다면 아득할 정도로 유구한 역사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며, 방대한 민족을 응집시킬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이 광활한 대지에 영원히 문명의 불씨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문인, 학사들이 평생토록 힘들게 책을 베끼고, 책을 소장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서생들의 경우 평생토록 과연 얼마나 되는 책을 소장할 수 있었을 것이며, 기껏 얼마간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수 세대를 내려가면서도 이를 잃어버리지 않고 제대로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인가? 옛말에 “군자의 은택(恩澤)도 다섯 세대를 지나면 단절된다”는 말이 있다. 공명이나 재물, 전답이나 건축물조차 이러할진대 몇 상자의 책이 어찌될 것인가를 논해서 무엇하리!

물론 궁궐에야 많은 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대 이전에는 이른바 문화적인 의미에서 장서의 규격에 합당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으며, 또한 매번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과연 제대로 계승되어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하면 역시 단언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할 때, 역사는 장서라는 막중한 일을 일부 특수한 인물에게 기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특수한 인물이란 우선 반드시 오랜 세월 관직 생활을 통해 풍족한 재산을 지니고 있어 널리 책을 수집하는 데 조금도 불편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관직 생활을 하여 사방에 흩어져 있는 여러 판본의 책을 수집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외에도 그러한 인물은 명석한 관리자로서 적절한 지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며, 장서를 위한 건축물을 건설하는 일부터 서가의 설계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배려를 할 수 있어야 하고, 대출 규칙부터 방화를 위한 조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주도면밀하게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만 한다. 또한 시간을 초월해 좀 더 심도있는 계획으로, 후대 사람들이 자신이 모은 책을 어떻게 잘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미리 안배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처럼 까다롭고 힘든 조건을 한 몸에 갖추고 있어야만 비로소 고대 중국의 장서가로써 제대로 된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부족한 점은 있으나 이러한 조건에 어느 정도 합당한 장서가들이 몇 명 존재했다. 그러나 몇 세대 지나지 않아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라가고 장서들은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의 이름을 길게 나열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그들이 소장했던 서적들은 거의 유실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들의 이름을 나열한다는 것은 결국 성과 없는 노력의 흔적을 조합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은 실현한 듯했으나 끝내 실현할 수 없었던 비극적인 염원을 드러내는 일일뿐이다.

단 한 명이라도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단 한 명일지라도, 그는 앞서 말한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들을 더욱 엄격하게 갖추고, 관리와 보존 그리고 계승과 연관된 갖가지 세부사항을 꼼꼼하게 마련해 거대한 중국에 장서루(藏書樓)를 한 곳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한 곳, 오로지 한 곳에! 하늘이시어, 가련하고 또 가련하도다. 중국, 중국 문화여!

그런데 마침내 그런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천일각의 창건자인 범흠(范欽)이었다.

청대 건가(乾嘉 : 건륭제와 가경제) 연간의 학자 완원(阮元 : 1764-1849)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범씨는 천일각으로 명대부터 지금까지 수백 년에 이르는 동안 해내(海內)의 장서가로서 홀로 우뚝 서있다.

이는 다시 말해 명대부터 청대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광활한 중국문화계에 잔존한 일부 서적 문명이 마침내 한데 결집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되었다는 뜻이다.

명나라 이전의 오랜 역사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겠다. 또한 명대 이후라도 수집되지 않은 서적에 대해서는 역시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우리는 오로지 이 장서루에 머리 조아려 고마움의 뜻을 전하고자 할 따름이다. 천일각이 중국 민족의 영락해 버린 정신사에 자그마한 안식처를 마련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할 뿐이다.

3. 범흠은 명대 가정(嘉靖 : 1522-1566) 연간 사람이다. 27세에 진사에 입격한 후 여러 곳에서 관리 생활을 했다. 북으로는 섬서(陝西), 하남(河南), 운남(雲南), 동으로는 복건(福建), 강서(江西) 등 그가 관리 생활을 하면서 거친 곳이 적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관직이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이니 결코 말단 관리는 아니었던 셈이다. 이러한 그의 경력은 서적을 모을 수 있는 재정적 토대와 수납 공간을 마련하는 데 충분한 여건이 되었다. 문화 자료가 대부분 흩어져 있고, 또한 이 방면에 제대로 된 문화시장조차 없었던 당시에 관직은 그 자체로 서적을 수집하는데 중요한 방편이 될 수 있었다. 그는 관직을 옮길 때마다 그 지역의 공.사 판본을 수집하는 데 열심이었다. 특히 다른 장서가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거나 그들이 결코 쉽게 구할 수 없는 각종 지방지, 정치관련 서적, 실록, 역대 과거 시험에 급제한 선비들의 목록, 명대 각 지방의 관리들이 각인한 시문집 등 원래 쉽게 유실될 수 있는 여러 서적들을 두루 수집했다. 이는 단순히 수집에 대한 열의나 재산이 있다고 해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 그는 공무가 없는 여가를 이용해 취미로 서적을 모은 것 같지만 사실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업이 바로 서적을 수집하는 일이었으며 관직이 오히려 부업인 셈이었다. 어쩌면 그에게 관직은 서적을 수집하는 데 필수적인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가치 판단은 이러했으며, 역사에 대한 거시적 판단 또한 이러했다. 마치 당시 역사가 중국 장서가를 진정으로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에게 중국 땅 곳곳을 다닐 수 있는 관직을 부여해 그로 하여금 그 임무를 행하도록 지지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공무는 하루 종일 귀찮을 정도로 많았을 것이다. 사건 심리, 탐관오리 탄핵, 하부 관리들의 업무 조정, 재정적 인 문제 해결, 관가의 위엄을 세우는 일, 조정이나 민간에 나름의 명성을 유지하는 일 등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중량을 하나로 다 합친다고 해도 저녁 무렵 하급 관리가 전해 주는 얇은 남색 보자기를 전해 받고, 그 자신의 의도대로 수집해 온 고서들을 다시 작은 상자에 정리하는 일보다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귓가에는 조심스럽게 구해온 책의 책장 넘기는 소리가 관리의 행차를 알리는 소리나 고함소리보다 더욱 크게 울렸을 것이다.

범흠의 선택은 최근 들어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명제와 직접 연관된다. 이는 건전한 인격에 기반을 둔 문화적 양지(良知), 바꾸어 말하자면 문화적 양지에 기반을 둔 건전한 인격에 관한 것이다. 만약 이러한 것이 없었다면 그처럼 중도에 뜻이 껶여도 실망하지 않고, 보통 사람들이 중시하는 것은 경시하되 오히려 보통 사람들이 경시하는 것을 중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정치 생활에 있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당시 조정은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황친(皇親) 곽훈(郭勛)에 의해 죄지우지 되었는데,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장형에 처해져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후 다시 벼슬길에 나선 그는 여전히 강직한 성품으로 아부할 줄 몰랐다. 한번은 감히 간신 엄씨의 가족에게 맞선 적이 있었다. 엄세번(嚴世藩)이 그를 제거하려고 했으나 엄의 부친인 엄숭(嚴嵩)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하며 아들을 말렸다. “ 범흠은 곽훈에게도 맞섰던 사람이야, 네가 그를 탄핵하면 오히려 그의 명성만 더 높여줄 뿐이다.” 결국 당시 세도를 떨치던 엄씨 일파도 강직한 범흠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년의 일화에서 엿볼 수 있다시피, 장서가로 성공한 범흠은 인격적인 면에 있어서도 역시 강건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범흠은 그의 주변에 있던 다른 장서가들과 분명 대조적이다. 당시 범흠과 막역한 사이였던 서예의 대가 풍방(豊坊) 역시 장서가였다. 그의 글씨가 범흠보다 뛰어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예가 동기창(董其昌)은 그와 문징명(文徵明)을 함께 일컬어 ‘ 묵지동호(墨池董狐)※라고 불렀다. 풍방이 중국 고대 서예사에서 찬란한 성좌를 차지한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그는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역시 범흠을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가 쓴 ’오경세학(五經世學)‘을 보면 과연 범흠이 이런 수준의 책을 써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그는 순수한 학자이자 예술가로서, 너무나 천진하고 열정적이었다. 또한 세속과 거리가 멀어 전후 사정을 전혀 고려치 않고 그저 마음먹은 대로 자신의 뜻을 펼치면 그뿐이었다. 처음에는 그 역시 마음을 굳게 다지고 집안의 전답을 팔아 귀중한 서첩을 비롯한 여러 전적들을 구입했다. 당시는 범흠이 아직 천일각을 세우기 이전으로, 그때 풍방은 이미 상당한 고서를 소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학자일 따름이었다. 말끝마다 그를 스승이라고 부르며 문하생을 자처하는 이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쫓는 데 혈안이 된 모리배들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는 장서를 위해 건축물에 어떤 소방시설을 해야 하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결국 말년에 이르렀을 때 그가 수집한 전적의 60퍼센트는 다른 이들이 훔쳐간 꼴이 되었고, 일부는 화재로 불타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는 남은 전적 대부분을 범흠에게 팔고 말았다. 범흠에게 풍방이 지닌 예술적 재능은 부족했지만 그처럼 인격적으로 지나친 결함 ( 세속 물정에 전혀 무지할 정도로 순진함)을 지니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범흠은 준엄한 이성적 판단으로 풍방과 같은 이들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 양지(良知)를 제련해 일종의 청량한 사회적 행위로 변화시킨 것이다. 이상 두 사람을 비교해 본다면, 범흠의 사회적 인격이 보다 강건한 셈인데, 결국 이런 인물만이 문화사업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건대 순수한 예술가나 학자들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두뇌회전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업을 능숙하게 처리하기에 부족한 것 같다.

또 한 사람 범흠과 비교할 수 있는 장서가로 그의 조카이기도 한 범대철(范大澈)을 들 수 있다. 범대철은 어릴 적부터 숙부의 영향을 받아 여러 가지 면에서 범흠을 많이 닮았다. 예를 들어 관리로써 능력이 매우 뛰어나 여러 차례 해외에 사신으로 파견된 적이 있으며, 책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학문도 뛰어나 책에 대한 문화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수집한 책들 중에는 매우 중요한 진본들이 들어 있었다. 그의 장서 취미는 숙부에게 비롯된 것이었다. 숙부의 영향 속에는 긍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번은 그가 범흠에게 책을 빌리고자 했는데, 범흠이 그다지 내켜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에 기분이 상한 범대철은 마음속으로 자신도 장차 장서루를 세워 숙부를 능가하겠노라고 생각했다. 결국 수년간의 노력 끝에 그 역시 장서루를 세우게 되었다. 그는 숙부를 초청할 때마다 일부러 책상 위에 진귀한 전적들 펼쳐 놓아 마음대로 열람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범흠은 그저 담담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장서가로써 숙부와 조카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조카는 물론 제법 그럴 듯하게 모양새를 갖추어 놓기 했지만 그가 책을 수집하게 된 동기가 문제였다. 결코 그는 속좁은 자신의 기질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장서루를 세우고 숙부가 가지고 있지 않은 판본을 수집하는 것으로 그는 마음의 기쁨을 얻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후학이 세운 장서루는 몇 세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세상의 이치대로 끝내 흐지부지 사라져 버렸지만, 천일각은 괴이한 힘으로 여전히 꿋꿋하게 그 자리에 버티고 서있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범흠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초월적인 의지와 애호 그리고 초월적인 재주와 정감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한 의지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지력이 장시간에 걸쳐 표현되면, 사람들은 문득 지나치게 냉담하다거나 엄격하다는 느낌, 심지어는 인정미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바로 이러한 의지력에 의해 천일각은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동호(董狐)는 춘추 때 진(晋)나라의 사관이다. 당시 진(晋)나라 군주였던 영공(靈公)이 성장하여 황음무도하고 정사를 전혀 돌보지 않자 당시 상경의 직분으로 국정을 맡고 있었던 조돈이 적극 만류했다. 그러나 영공은 오히려 조돈을 살해하려고 하였다. 조돈은 이를 알고 국경으로 도망쳐서 사태를 관망하였는데 그 때 당진의 중군원수가 되어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그의 조카 조천이 도원(桃園)으로 가서 영공을 죽이고 조돈을 불러들였다. 조돈은 다시 당진의 상국 자리에 복귀하게 되었다. 조돈 밑에서 사관을 하고 있던 동호가 사서에 ‘조돈이 그 군주를 시해했다’라고 적어 후세 사가의 모범을 보였다. 공자도 춘추에 사가의 표상이라고 기록했다. 이후로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역사를 기록하는 행위를 동호직필(董狐直筆)이라고 했다.

4. 장서가들에게 가장 번거로운 일은 바로 그들 이후, 즉 후대에 일어날 모종의 사태들에 대비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흠이 직면한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이러한 의지력이 변하지 않도록 가족들에게 전해 주느냐는 것이었다. 천일각의 비장한 역사는 범흠이 세상을 뜬 이후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범씨 일가에게 천일각을 보존하는 사명이 과연 영광스러운 일이었는지 아니면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진 고역이라고 말해야 하는지는 정말 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80세 고령까지 장수를 누렸던 그 역시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큰아들과 둘째 며느리 (둘째 아들은 이미 사망한 후였다.)를 불러 유산 문제에 대해 마지막 말을 전했다. 범흠은 유언에서 후손들이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난제를 남겼다. 유산을 둘로 나누어 한 쪽에게는 은 만 냥을 주고, 또 다른 쪽에게는 장서루를 준다는 유언이었다. 후손들은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참으로 이상한 유산 분배였다. 은 만 냥은 그 즉시 사용할 수 있으나, 천일각은 유지하기 위한 막중한 부담 이외에도 자신들의 개인 소유물이 될 가능성이 전무한 것이었다. 이미 범흠의 일생은 후세 자손들에게 익히 알려진 바였기에 천일각의 장서는 결코 매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처럼 많은 장서를 보관하기 위해서 매년 막대한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범흠은 왜 장서와 은 만 냥을 공히 둘로 나누어 똑같이 배분하지 않았을까? 왜 권리와 의무를 그토록 철저하게 나누어 후대에게 선택을 강요해야만 했을까?

아마도 이러한 유산 분배 문제에 관해 범흠은 수십 년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다. 사실상 이 문제는 범흠 스스로 자신에게 낸 난제였다. 만약 그의 후손 가운데 전혀 뜻도 없고 의지도 없는 이가 이 험난한 장서 사업을 맡게 된다면, 그가 평생에 걸쳐 마련한 모든 것이 그의 생명과 더불어 사려져 버릴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젼혀 이치에 맞지 않는 유언을 통해 진정 장서에 뜻을 둔 후손이 자신의 유업을 이어받아 결코 이익을 도모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만약 자신이 임종하기에 앞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유언을 전한다면 그 허점이 몇 세대가 지나면서 몇 배로 불어나 결국 다른 장서가들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는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은 만 냥을 받겠다는 후손을 비난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진심으로 이 역사적 고역을 계승할 믿음이 없음을 인정한다면, 이는 이미 죽음의 문턱에 선 자신의 병상 앞에서 전혀 진실되지 않은 맹세를 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범흠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수십 년간 바라고 있던 바로 그 소리를 듣고 싶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사신(死神)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후손들의 눈빛을 직시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었다.

큰아들 범대충(范大沖)이 즉각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장서루를 이어받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아울러 자신의 전답 일부를 세를 주어 거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장서루를 보존하는 비용으로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끝도 한도 없는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 범대충 역시 그의 부친과 동일한 유언을 할 것이고, 장서루를 이어받은 그의 아들은 또한 범대충과 동일한 유언을 남길 것이다. 한 세대 후의 유언은 그 전 세대의 유언보다 더 엄격해야 한다. 장서에 대한 원초적인 동기는 점점 더 멀어지고 가족들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니, 어떻게 하면 후대 수많은 갈래의 범씨 가문 사람들이 모두 선조 범흠의 규칙을 어기지 않도록 할 것인가? 그야말로 한번 생각해볼 만한 난제 가운데 난제라 할 수 있다. 당시 세대를 이어 계승될 수밖에 없는 모든 문화사업은 일단 가문의 후손들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가문이 후세로 이어지는 일은 그 자체로 끊임없는 분열과 소외 그리고 자립의 과정이 아닐 수 없다. 후대의 후손들에게 평생의 노력을 강요하는 강제적이 명령을 소용토록 하는 것은 분명 개인의 자유로움에 어긋나는 일이다. 또한 이미 수백 년이 지난 이후의 후손에게 오래 전 알 수 없는 어떤 조상의 의지와 욕구를 그대로 답습하라고 요구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씨의 후손들이 굳건히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해온 것을 보면, 분명 그들에게 천일각의 장서루는 거의 종교적인 숭배 대상처럼 여겨졌음을 눈치챌 수 있다. 그들은 그저 황공하게 자신의 임무를 부여받고 성실하게 보호하고 관리했을 뿐, 도대체 왜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전혀 묻지도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 오늘날의 사고 습관에 따른다면, 범흠과 그 후손의 위대한 업적을 높이 평가해, 분명 범씨 후손들은 누대에 걸쳐 모두 각별한 문화적 자각을 한 사람들이었다고 추측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내부로는 도저히 좋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심리적 갈등과 가족간의 분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장서루 아래에서 수백 년간 살아야만 했던 그들 후손들에게 진정 동정이 가지 않을 수 없다.

후손들은 아마도 호기심이 생겼을 것이다. 저 건물 안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도대체 어떤 책들이 있는지 한번 빌려 보고도 싶었을 것이다. 친지, 친구들이 빈번하게 이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가족 대대로 받들고 있는 이 비밀스러운 장소를 한번 볼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범흠과 그 계승자들은 이러한 가능성을 일찍부터 간파했으며, 또한 이러한 조그만 일에 의해 장서루가 파괴될 수도 있다고 예견했다. 이에 그들은 예방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가족들 간에 엄격한 처벌을 만들어 놓았다. 처벌 내용은 당시 상황에서 가장 굴욕적이고 혹독한 것이었으니 바로 조상님의 제사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한 것이었다. 이러한 처벌은 가족 내부의 혈통관계에 있어서 일종의 ‘엘로우카드’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곤장이나 채찍으로 태형을 당하는 것보다 더욱 엄한 벌이었을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처벌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아무 이유도 없이 천일각에 들어간 자는 제사에 세 번 참석할 수 없으며, 사사로이 친구들을 데리고 들어가 서가를 열람하면 1년 동안 제사에 참석할 수 없고, 장서를 외부나 다른 성을 가진 사람에게 빌려줄 경우 3년 동안 참석이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장서를 저당잡혀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는 경우에는 영원히 가문에서 내쫓아 평생토록 제사에 참석할 수 없도록 했다.

여기에서 매번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불편한 사건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가경(嘉慶 : 재위 1796-1820) 년간 영파(寧波)의 지부(知府)였던 구철경(丘鐵卿)에게 전수운(錢繡芸)이란 외질녀가 있었는데 천성적으로 시서(詩書)를 좋아하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줄곧 천일각에 올라가 책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구철경이 범씨 집안에 매파를 보내 그녀는 범씨 집안으로 시집을 가데 되었다. 혹 현대인들은 도대체 이 아가씨가 책과 결혼을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에게 시집을 가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며 질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 혼인이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돈이나 권세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책을 좀더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선뜻 시집갈 것을 결정한 이 처녀의 마음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그녀는 범씨 집안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다. 비로 자신이 범씨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으나 여전히 천일각에는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과, 더욱이 범씨 문중에서는 가족들 가운데 여자는 이곳에 올라갈 수 없도록 규정해 놓았으며 게다가 그녀와 혼인한 범씨는 당시 장서각을 이어받은 이의 방계에 속하던 사람이었다. 결국 천일각에 올라가 책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그녀는 그저 우울하게 한평생을 살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오늘 고개를 들어 천일각을 바라보는 내 가슴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다름아닌 전수운의 우울한 눈빛이었다. 이 정도면 문학작품 하나쯤은 나올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는 일반적인 혼인의 비극을 다룬 작품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인문주의적 풍토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던 중국 봉건사회에서 한 여인이, 강인하면서도 또한 나약한 모습 그대로 자신의 문화적 갈망을 위해 평생 맴돌아야만 했던 모습을 그린 것일 터이다.

범씨 가족의 입장에서 볼 때 천일각의 출입을 금지하고 책을 열람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조그만 틈만 개방하더라도 결국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원히 그곳의 출입을 제한하고 책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장서루의 존재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로 인해 범씨 일가는 매우 곤혹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범씨 일가는 가족이 얼마나 많이 늘어나든지 일단 천일각의 문을 개방하는 일은 범씨 일가 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곳의 열쇠와 서가의 열쇠는 각기 나누어 관장했으며, 완벽하게 하나의 고리처럼 연결되도록 했다. 만약 한 쪽이라도 오지 않는다면 그 어떤 장서도 열람할 수 없었다. 또한 각각의 관할을 맡은 가족은 나름대로 효과적인 부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범씨 일가의 모든 이들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종국적으로 하나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들에 의해 첩첩이 막혀 있는 천일각은 도대체 어떤 소용이 있는 것일까?

바로 이때 전혀 예상이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대학자로 명명이 있는 황종희(黃宗羲 : 청대 초기의 사상가이자 사학자, 1610-1695)가 장서루에 올라 책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범씨 일족 모두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황종희는 나와 고향이 같은 여요(余姚) 사람으로 범씨 가족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었다. 따라서 규칙대로라면 장서를 열람하기는커녕 천일각을 방문하는 것조차 허락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황종희는 이미 학문은 물론이고 인품과 기개에 있어서도 당시 사상계나 학술계에서 찬사와 존경을 받고 있던 거인이었다. 몰론 범씨 일가도 그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당시는 정보나 소식을 전당하는 수단이 낙후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소식을 듣거나 새로운 정보가 전달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황종희의 경우는 달랐다. 그의 거사는 남들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특출나고 반향을 일으킬 만한 일이어서 조정과 민간에 신속하게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의 부친은 본래 명말 동림당의 주요 인물로 위충현(魏忠賢)의 환관 집단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위충현이 자살하고 환관집단이 수세에 몰리자, 19세의 황종희는 조정으로 달려가 의분에 가득 차 정적의 수염을 뽑아 부친의 위패 앞에 바치고, 부친을 고문한 형리를 송곳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 끝내 도망친 자를 쫓아가 죽임으로써 완대성(阮大鋮)에게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인심을 후련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후 청나라 군사가 남하하자 두 명의 남동생과 고향의 젊은이들로 ‘세충영(世忠營)’을 조직하여 용감하게 청왕조에 항거했다. 그러나 그들의 항거가 실패로 끝난 후 황종희는 학술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학술활동에 전념한 그는 민족의 도의와 도덕적 인격을 학문 속에 융화시켜 사람들을 계도하고자 했다. 이리하여 그는 중국 고대 학술사에서 제일가는 사상가이자 사학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는 한창 공부하던 시절 이미 소흥(紹興)에 있는 유(紐)씨의 ‘세학루(世學樓)’와 기(祁)씨의 ‘담생당(淡生堂)’에 들러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제 마침내 천일각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그 역시 범씨 일가의 엄격한 규칙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천일각에 도착했다. 때는 강희 12년으로 1672년이었다.

뜻밖에도 범씨 일가는 모두 황종희의 출입에 동의했고 서고 안에 있는 모든 장서를 세세하게 살펴보아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 이는 분명 범씨 가문의 문화적 품격을 검증할 수 있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역대로 장서가는 사상. 학술계나 사회.정치계에서 공히 그다지 높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들을 위해 그들이 생명처럼 소증하게 지켜온 것을 모두 내놓았던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선택과 결단으로 말미암아 누대에 걸친 장서가의 집안으로써 그들의 인격은 무엇보다 찬란한 빛을 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물쇠가 하나 둘씩 차례대로 열렸다. 분명 1672년은 천일각에 특별히 찬란했던 한 해였을 것이다.

황종희는 천일각에서 장서 모드를 열람한 뒤 그 중 널리 유통되지 않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고 <천일각장서기(天一閣藏書記)>를 따로 편찬해 세상에 남겼다. 이로 인해 천일각의 장서루는 대학자의 인격과 깊은 연관을 맺게 된 것이다.

그 이후 천일각에는 진정한 대학자에게는 개방이 허락되는 새로운 규칙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 규칙 또한 매우 엄격하게 실행되었기 때문에 그 후 약 200년 동안 장서루에 오르도록 허락을 받은 학자는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이름은 모두 중국 문화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비록 드러날 기회는 많지 않았지만 천일각은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 봉건가족의 혈연계승 관계와 사회.학술계의 전체적인 수요가 첨예하게 대립될 때, 장서가들은 쉽게 조화될 수 없는 진퇴양난의 곤경에 처하는 경우가 흔하다. 여전히 장서 보존에 치중해 후세에 전수하는 데 힘쓸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가치를 존중해 세상에 내놓을 것인가의 문제에 직면한다는 뜻이다. 천일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장 엄격한 선택을 통해 극도의 제한 속에서 개방을 허락하는 것은 마땅한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엄격하게 전국 학술계를 대상으로 선택을 한다는 것은 한가족의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이러한 문제는 새로운 방향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풀게 되었다. 건륭(乾隆)황제가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을 결정한 후의 일이다. 건륭황제는 교지를 내려 각성마다 현존하는 책들을 수집하도록 명하는 한편 각 장서가들, 특히 강남의 장서가들에게 적극적으로 책을 헌납하도록 요구했다. 천일각에서는 진귀본 600여 종이 헌납되었는데 그 중 96종은 <사고전서>에 수록되었으며 370여 종은 목록에 남게 되었다. 건륭은 천일각의 공헌을 극찬하며 여러 차례에 걸쳐 포상을 내렸으며, 새로 건설할 남북 주요 장서루의 구조를 천일각을 본떠 설계하도록 했다.

범씨 일가가 헌납한 책은 대부분 황실에 귀속되어 되돌려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로써 천일각은 더욱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국가급 백과전서에, 그것도 황제가 정한 장서루에 보관되어 오랜 생명을 이어가게 되었다. 일찍이 여러 문장에서 건륭황제가 <사고전서>를 편찬하기 위해 천일각의 책을 헌납토록 요구한 것은 천일각에 엄청난 재난이 아닐 수 없었다고 언급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때마다 너무 지나친 언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서의 의미는 궁극적으로 널리 유포하여 두루 읽게 만드는 데 있다. 단순히 '소장하는 것'에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황제의 명에 의해 국가적 사업으로 책을 편찬하면서 천일각의 진귀한 전적이 대폭 동원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가의 범주에서 소장하던 것이 행정적인 절차를 거쳐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디었다. 이는 천일각이 큰 성공을 거두었음을 뜻하는 것이자, 범흠이 대성공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5. 세월이 흘러 천일각도 마침내 중국 근대 사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유서깊은 장서루 역시 새로운 경험을 시작한다.

태평군(太平軍)이 영파(寧波)로 진격해 들어왔을 때, 그 지방의 도둑들이 난리를 틈타 벽을 허물고 책을 훔쳐갔다. 그들은 훔친 책을 폐지에 해당하는 값을 쳐서 종이 공장에 팔아 넘겼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어떤 이가 다시 종이 공장에서 비싼 돈을 물고 일부를 사들었으나 그마저 화재로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이후 천일각의 운명을 예시하는 하나의 조짐이 되었다. 이제 천일각이 직면하게 될 문제는 이전처럼 어떤 학자에게 장서루를 개방할 것인가 여부에 대한 논란 정도가 아니었다. 절도! 이제 도둑질이 바로 천일각 장서루의 가장 큰 적수가 된 것이다.

1914년 설계위(薛繼渭)라는 도둑이 기적처럼 장서루에 잠입했다. 그는 낮에는 꼼짝않고 있다가 밤중이 되면 책을 훔쳤다. 그는 매일 대추를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리고 동편 담 밖에 있는 하천에 조그마한 배를 대고 훔친 책들을 실어 날랐다. 당시 천일각 장서루에 소장되어 있던 거의 절반에 가까운 장서를 도둑맞았으며, 이후 그 책들은 상해의 서점가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설계위의 절도 행위는 태평천국 당시 좀도둑이 행한 것과 질적으로 달랐다. 우선 수량 면에서 방대했을 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 이루어져 그 피해가 더욱 심했다. 게다가 마지막에는 상해의 서점들과 결탁해 서점상의 지시를 받기에 이르렀다. 근대 도시의 서점상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유서깊은 장서루를 잠식했다. 생각건대 이는 어떤 상징적 의미가 있는 듯하다. 장서루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생각해낸 범흠은 절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당시 대가족이 살고 있던 천일각에 도둑질을 하기 위해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범흠은 중국이 근대에 들어와 어떻게 변하리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근대 사회에 진입하여 시장의 일부 상인들이 원시 자본을 축적하면서 그 어떤 수단도 다 쓸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예상할 수 없었다. 이제 서가는 텅비고, 전수운이 평생을 애원하고 갈망하면서도 끝내 오를 수 없었던 장서루의 마루, 대학자 황종희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지나갔을 그 마루에는 도둑이 내뱉어 놓은 대추 씨 한 무더기만 남게 되었다.

당시 상무인서국(商務印書國)을 책임지고 있던 장원제(張元濟) 선생은 천일각에 재난이 닥쳤다는 소식과 함깨 일부 서적상들이 천일각 소장본을 외국인에게 매각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거액을 투자해 이를 구매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책들을 동방도서관(東方圖書館)의 ‘함분루(涵芬樓)’에 보관했다. 함분루는 천일각의 장서들을 소장함으로써 문화계의 명예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당대 적잖은 문화인사들이 이곳을 통해 영양을 흡수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이 모든 것도 일본 침략군의 손아귀에 한줌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 역시 수백 년 전 범흠 선생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가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썼던 주문인 ‘천일생수(天一生水)’가 효력을 상실한 것이다.

6. 그러나 범흠과 그 후손들의 문화적 양지가 현대에 들어와 그 찬란한 빛을 완전히 잃고 만 것은 물론 아니다. 장원제 선생 외에도 많은 이들이 천일각이라는 이 ‘위험한 건물’을 보호하고자 노력한 결과 완전히 폐허가 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현대 사회로 진입한 이후로 천일각에 관한 일은 이미 한 일가의 능력을 벗어나 사회적 사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1930년대, 1950년대, 1960-1980년대 까지 천일각에 대한 대규모의 수리와 보존 사업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이미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되었으며 영파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단골 방문코스가 되었다. 천일각의 장서는 여전히 정리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정보가 밀집되어 있고 문화적 소통 또한 지금의 편리한 현대에, 천일각의 장서는 전적에 실린 내용을 통해 이 사회에 지식을 제공한다는 점보다 일종의 고전문화에 관한 사업의 상징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불 수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통해 중국 문화의 보존과 계승의 험난한 역정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의 문화에 대한 갈구가 얼마나 애닯고 신성했는가를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 같은 이들은 본질적으로는 현대 문화의 창조에개 속한다고 불 수 있다. 그러나 유전인자로 볼 때 민족의 전통문화를 계승한 후손임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많든 적든 간에 천일각의 전통을 이어 더욱 번창시켜야 할 임무를 지니고 있다. 물론 범씨 일가의 입장에서 볼 때 타성(他姓)에 속하기는 하지만, 천일각의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여느 때보다 훨씬 느린 걸음으로 발을 떼고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내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그대 왔는가? 그대는 어느 시대의 중국 서생인가?’

여러 곳을 가 보았지만 이곳처럼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또한 편안하게 만드는 곳은 거의 없었다. 천일각의 나이든 판본학자가 비틀거리며 책상자를 들고 나와 내게 명각본(明刻本)을 보여주었다. 나는 <등과록(登科錄)>과 <상해지(上海誌)>를 펼쳐보았다. 거의 유일한 진본이었다. 만약 이러한 역사를 보존하고 있는 천일각 자체의 역사 또한 진일보한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배명해(裵明海) 선생이 <영파사화(寧波史話)>란 소책자를 건네주었다. 책에는 철각의 내력에 대해 자세하고 분명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내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도 있었다. 내가 볼 때, 천일각의 역사는 웅장한 장편 역사시를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 문학 예술가들은 언제쯤 자신들의 시야를 오래된 가옥과 정원으로 돌릴 수 있을 것인가? 언제쯤 범씨 가족과 그 밖의 여러 가족들의 수백 년간 이어온 영혼의 역사를 지금의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천일각-끝

(여추우의 중국문화유산답사기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