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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4 21:14:0577 
이지린의 고조선연구 해제(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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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린의 《고조선연구》

대륙고조선 역사를 찾아낸 북한의 역사학계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은 1949년 평양에서 발간하던 학술지《역사제문제(歷史諸問題)》에 《조선의 고고학에 대한 일제 어용학설의 검토(상·하)》라는 논문을 실었다. 다음은 그 글의 일부다.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에 성공하자 그들의 소위 역사학자들은 조선역사에 대해서 이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들이 입증했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란 과연 어떠한 것들인가? 첫째 서기 전 1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약 5백 년 동안 한(漢)나라가 오늘의 평양을 중심으로 낙랑군이 설치하여 식민지로 삼았다는 것이요, 둘째 일본이 가야라는 식민지를 건설하여 신라, 백제와 함께 남조선을 분거하고 있었다는 것이요....」

해방 후 역사학이 나아갈 길
이 글은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일제의 식민사학이 두 이론으로 되었다고 분석한 글이다. 하나는 낙랑군이 서기전 108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5백여 년간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평양설”이다. 이는 한사군이 북한지역에 있었다는 “한사군=한반도설”의 핵심이다. 다른 하나는 가야가 임나라고 주장하는 “가야=임나설”이라는 것이다. 이 글은 북한학자들이 해방 직후에 북한 역사학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남북한을 막론하고 해방 후 역사학계는 조선총독부가 만든 식민사관 이론을 해체하고 1차 사료에 근거를 둔 새로운 역사관을 만들어애냐 했는데, 홍기문의 글은 북한 학계가 이 문제 대해서 올바른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북한 역사학이 형성된 계기는 1946년 7월 3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김일성위원장이 남한에 파견원을 보내 역사학자들을 초청한 일이었다. 이 초청에 응해 박시형, 김석형 전석담 같은 사회경제사학자들, 즉 맑시스트 역사학자들이 월북했고,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였던 역사학자 백남운도 얼마 후에 월북했다. 이들을 주축으로 1947년 2월 17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내에 ‘조선역사편찬위원회(이하 역사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위원회는 “가장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사상에 의거해서 조선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옳게 표현”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고대부터 오늘날까지’라는 시기의 연속성과 관점의 일관성은 역사학의 가장 기초라는 점에서 시기별로 칸막이를 친 남한의 역사학계와 비교된다.
위원장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투옥되었던 이청원이 맡았다. 이청원은 최익한의 사위였는데, 최익한은 조선말기 영남 유림의 거두이자 파리장서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곽종석의 제자이자 사회주의자였고, 1938년부터 동아일보에 “여유당전서를 독(讀)함”을 연재했던 다산 정약용 연구전문가였다. 역사위원회는 1948년 10월 2일 관할기관을 교육성으로 이관했는데, 위원장은 교육상 백남운이 겸임했다. 위원회에는 백남운, 박시형, 기성현, 김광진 등의 역사학자들과 도유호 같은 고고학자들, 그리고 홍명희, 한설야, 이기영 등의 문학가들과 여러 정치가들도 동참한 범국가적인 위원회였다. 이 위원회의 기관지가 홍기문이 글을 실은 《역사제문제》였다.
홍기문의 글은 해방 후 북한의 역사학계가 걸어야할 학문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제는 한국 강점 후 한국사를 크게 축소했다. 일제의 한국사 축소는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한국사의 시간을 축소하는 것으로 단군을 허구의 인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사의 공간 축소로, 대륙과 반도, 해양에서 진행된 한국사의 무대에서 대륙과 해양을 삭제해서 반도사로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의 북쪽에는 한사군이란 중국의 식민지가 있었고, 남쪽에는 임나일본부란 일본의 식민지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중추원 산하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조선반도사》를 편찬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한국사 상(像)을 해체하고 한국사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 해방 후 남북 역사학계의 공통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한사군 위치 논쟁
북한의 역사위원회는 1948년부터 1950년 6·25전쟁 직전까지 만 2년이란 짧은 기간에 《역사제문제》를 18집이나 간행했다. 정세호가 1950년 《역사제문제》16호에 ‘고조선에 대한 일고찰’을 실었고, 정현은 17호에 ‘한사군고(漢四郡考)’를 실었다. 두 사람은 고조선이 한반도 북부에 국한된 작은 나라가 아니었고, 고조선의 서쪽 강역은 지금의 북경 부근까지 이르렀다고 보았다. 그 후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1~2천 리의 서쪽 땅을 빼앗긴 이후 지금의 대릉하(大陵河)와 요하(遼河) 사이까지 밀렸다는 내용이었다. 한사군도 당연히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요동지역에 있었다고 보았다. 정세호는 이 논문에서 이미 방대한 중국 고대 사료를 인용해 낙랑군이 지금의 평양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북한에서는 1950년 이미 중국 고대 사료를 근거로 한사군의 위치가 평양이라는 일제 식민사학을 뒤집기 시작한 것이었다. 북한의 이런 역사인식은 정세호가 위 논문에서 인용한 것처럼 국어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백연 김두봉과 단재 신채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정세호는 위 논문에서 “백연 김두봉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면서 요동군 양평(襄平)의 위치를 지금의 태자하(太子河) 서안에 있었다고 본 것이나 정현의 ‘한사군고’에서 “신채호는 패수를 지금의 요녕성 해성현에 있는 헌우락(軒芋樂)이라고 했는데, 참으로 탁월한 고찰방법이다.’라고 높인 것이 이를 말해준다. 요동군 양평이 과연 태자하 서안인지, 이 시기에 패수의 헌우락인지 아니면 그 서쪽의 대릉하나 하북성 난하(灤河)인지는 더 연구해야할 주제이지만 남한 역사학계가 해방 후 백연 김두봉은 말할 것도 없고 단재 신채호도 그 이름 석자만 남기고 그의 학설은 일체 검토도 없이 모두 폐기시키고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같은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을 스승으로 떠받은 것과는 사뭇 다른 역사관 계승모습이 북한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일제식민사학의 두 축인 ‘낙랑군=평양설’, 즉 ‘한사군=한반도설’과 ‘임나=가야설’을 폐기하고 민족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학설로 대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낙랑군=평양설’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논쟁은 주로 문헌사료를 토대로 역사를 연구하는 문헌사학자들과 역사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전개되었다. 문헌사학자들은 중국의 고대 문헌사료를 근거로 고조선의 강역이 지금의 하북성 일대까지 걸쳐있었고, 낙랑군은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과학원 산하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소장이었던 고고학자 도유호는 1960년 ‘고고학상으로 본 고조선에 대한 과학 토론회’에서 “고조선 국가의 영역은 오늘날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일대이며 그 북계를 이룬 패수는 청천강이다.”라고 주장했다. 고조선이 평안남도 일대에 있던 소국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자라고 모두 도유호의 견해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이 토론회 때 중앙역사박물관 관장 황궁은 “고조선의 강역을 압록강 이남만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요하 일대도 고조선의 강역이다.”라고 주장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고고학 연구실 소속의 전주농, 정찬영 등은 도유호의 반도고조선설을 지지했지만 중앙역사박물관의 황욱, 백연행 등은 문한사학자들의 대륙고조선설을 지지했다. 이 문제를 두고 북한 고고학계가 둘로 갈라졌다.

고조선에 관한 과학토론회
이 문제에 대한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고, 과학원 역사연구소는 1961년 6월 21일부터 9월 21일가지 3개월 동안 7차례에 걸쳐 집중적인 ‘고조선에 관한 과학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에서 과학원 원사 백남운, 과학원 고전연구실장 이상호, 언어문화연구소 교수 정열모 중앙당학교 조선사 강좌장 임건상, 김석형 등의 문헌하학자들은 모두 고조선과 낙랑군이 모두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여러 문한 사료에 고조선과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기사가 다수 나오는 상황에서 요동설이 당연하다고 본 것이다.
반면 고고학자 도유호는 유물사관 기대어 평양설을 주장했다. 그는《문화유산》3월 호에 실은 ‘신천 명사리에 드러난 고조선 덕널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고조선을 논하는 마당에 먼저 문제로 되는 고고학적 자료는 바로 고조선 유물이다. 그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기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평양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고조선 유물이라면서ㅓ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선 유물이 전연 보이지 않는 고장에서 중국 갈래의 유물을 들고서 어기가 고조선자리라고 하여서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다”라고 반박했다. 도유호는 “누가 아무리 무어라고 하던 간에 낙랑군의 소재는 처음부터 평양에 있었다.”라고 ‘고조선의 중심지=낙랑군=평양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도유호는 알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 시기 이지린이 《고조선연구》의 제8장 ‘고고학의 유물을 통해서본 고대 조선문화의 분포’에서 요녕성 서쪽 조양에서 고조선의 유물인 청동검이 출토되었다면서 “조양에서 발굴된 청동검의 사용자는 고대 조선인이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쓴 것처럼 일부 유물들을 가지고 반도고조선설을 주장하는 것은 이미 근거가 무너진 것이었다. 게다가 북한은 1963년 중국과 ‘조·중고고발굴대’를 조직했고, 이듬해 요동반도 남단 여순과 대련에서 고조선 무덤인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을 발굴했다. 그후 중국의 요녕성은 물론 하북성과 내몽골 일대까지 고조선의 표지유물인 ‘비파형동검’ 등이 다수 쏟아질 줄 알았다면 도유호도 일찌감치 손을 들었을 것이다.

북경대학에 유학간 이지린과 고사변학파(古史辨學派)의 고힐강(高頡剛)
북한하계에서 고조선의 강역과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던 1958년 이지린은 북경대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와세다대학 출신의 이지린은 해방 후 과학원 역사연구소 고대사연구실에 근무했고, 1959년 《역사과학》5호에 ‘광개토왕비 발견 경위에 대하여’를 발표한 역사학자였다. 그가 어떤 경로를 거쳐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북경대 유학은 그간 그침 없이 전개되던 고조선 논쟁을 정리하기 위해 북한당국과 학계가 마련한 회심의 한 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지린이 북경대에서 학위를 받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경대 지도교수가 고사변학파(古史辨學派)의 중심인물인 고힐강(高頡剛 : 1893~1980)이었는데,  그는 ‘낙랑군=평양설’을 지지하는 중화사학자(中華史學者)였기 때문이었다.
고사변학파는 1920~30년 대 중국의 신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유명한 학파였다. 이 학파는 중국인이 그간 습관적으로 받아들였던 숱한 역사적 상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옛것을 의심해서 가짜를 판별한다[의고변위(疑古辨僞)].”라는 말로 상징되는 고사변학파는 고힐강, 전현동(錢玄同 : 1887~1939)과 후에 북경대총장을 역임하고 중화민국의 중앙연구원원장이 되는 호적(胡適 : 1892~1962) 등이 중심이었다. 전현동은 한자를 폐지하고 로마자 식의 병음자모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해서 중국인들에 큰 충격을 주었던 급진파 역사학자였다.
고사변학파는 중국고대사의 숱한 문적들은 유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심지어 공자가 쓴 《춘추(春秋)》마저도 공자가 아닌 노나라 사관들이 집단으로 쓴 것이라고 보았다. 고힐강은 ‘전현동 선생과 고대 사서(史書)를 논하다[與錢玄)同先生論古史書].’에서 고대사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시대가 뒤로 갈수록 전설 속 고대사의 기간이 더욱 길어진다.”는 것이다. 주(周)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오래된 전설상의 인물은 우(禹)였는데, 공자 때에는 요순(堯舜)으로 끌어올렸고, 전국시대에는 다시 황제(黃帝), 신농(神農)씨로 끌어올리고, 진나라 때는 삼황(三皇)이 나오고, 한(漢)나라 이후 반고(盤古)가 등장한 것이다. 시대가 뒤로 갈수록 거꾸로 앞으로 간다는 설이다.
둘째, “시대가 뒤로 갈수록 전설상 중심인물에 대한 내용이 확대된다.”는 것이다. 공자 때의 순임금은 ‘다스리지 않고도 다스려지는[무위지치(無爲之治)]의 성군이었지만 맹자 때에는 효자의 모범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1926년《고사(古事)변》제1권을 출간한 이래 1941년의 7권까지 35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들의 새로운 역사학 연구방법론은 사마천 이래 이른바 ’중국을 위해 치욕의 역사는 감춘다.‘는 ’위한휘치(爲漢諱恥)‘의 춘추필법으로 중국의 사가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했던 화(華)와 이(夷)의 역사를 새롭게 밝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1970년대 중국의 낙빈기(駱賓基)가 청동기에 쓰인 글자를 연구해 쓴 《금문신고(金文新考)》등을 통해서 중국고대사가 이(夷)의 역사임을 밝힌 것처럼 중국고대사의 진실에 다가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힐강은 끝내 ‘위한휘치(爲漢諱恥)’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을 벗어나지 못한 중화주의 역사가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차지하고, 만주와 몽골을 중국본토에서 분리시키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을 제창하고 ‘중국본토론’을 내세우자 고힐강은 1936년 ‘변강연구회(邊疆硏究會)’를 창립해 이에 맞섰다. 일제의 ‘중국본토론’은 만주, 몽골과 조선 등은 중국의 영토가 아니니 중국은 본토에 대해서만 통치권을 가진다는 이론이었다. 곧 일제가 이미 차지한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와 몽골을 차지하겠다는 이론인데, 고일강은 이에 맞서 만주, 몽골 등은 중국사의 강역이란 논리로 맞섰다. 고힐강은 1939년 2월 자신이 주간을 맡고 있는 《변강주간(邊疆周刊)》에 ‘중화민족은 하나’라는 글을 게재해 여러 민족들의 혼합으로 중화민족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공산당에서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이 하나의 중화민족이란 논리로 소수민족의 강역을 중국영토라고 우기는 국가이념의 토대도 고힐강이 만든 것이었다. 고힐강은 또 운남에서 발행하던 《익세보(益世報)에 서“‘중국본부’라는 명칭을 빨리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평론에서 중국인들이 중화와 이민족을 나누는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을 비판했다. ‘중국본부’라는 용어를 쓰면 일제가 만주와 몽골을 낚아채갈 것이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이는 중국의 고대사료가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던 고사변학파의 자기부정이기도 했다. 고사편학파를 주도할 때는 유학사관이 왜곡한 고대사를 의심하자던 고힐강은 막상 한중 고대사에 이르자 철저한 중화사관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좋게 말하면 애국적 중화역사가가 된 것이지만 이지린이 《고조선연구》에서 여러 중국의 역사학자들을 대국주의 사가라고 비판한 것처럼 대국주의 사가로 전락한 것이었다. 고힐강은 위만조선의 도읍이 대동강 남쪽에 있었고 따라서 낙랑군도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평양설’을 주장했다. 그래서 고힐강은 북한에서 온 유학생 이지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지린의 북경대 박사논문
역사는 사료로 말하는 학문이다. 보다 정확히는 사료를 바탕으로 과거를 재구성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학문이다. 이지린은 지도교수 고힐강이 ‘낙랑군=평양설’을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만 자신의 학문에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고조선에 대한 그의 학문 체계는 혼자 세운 것이 아니라 김두봉, 신채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해방 후 북한 역사학계를 이끌던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함께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이지린은 북경대에 유학 올 때 이미 중국의 수많은 고대사서들에 ‘고조선=대률설’과 ‘낙랑=요동설’이 숱하게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북한 역사학계에서 이지린을 북경대에 보낼 때 필요했던 것은 새로운 학문적 성과가 아니라 북경대박사라는 ‘학문적 권위’였을지도 모른다.
이지린은 1960년 12월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위한 구두시험을 치렀다. 고힐강은 자신이 쓴 《고힐강일기》8권에서 “이지린은 자신의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서 한사군의 위치를 우리나라의 동북쪽으로 보고 패수를 요수로 보았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지린은 단순히 민족적 자존심 때문만이 아니라 중국의 수많은 문헌사료를 바탕으올 고조선사를 연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고조선의 강역이 고대 요동에 걸쳐있었다는 대륙고조선설이었다. 고힐강은 이지린의 결론으 반박할만한 사료적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고힐강이 일기에서 “조선의 유학생을 위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4사(史)의 동이전을 세밀하게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나도 적지 않은 수확이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지린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나서야 대륙고조선설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자료를 들여다보았다는 뜻이다. 4사란 《사기》,《한서》,《삼국지》,《후한서》등 중국 고대의 4개 역사서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한국고대사의 진실을 말해주는 사료들이 풍부하다. 그 사료들은 대부분 고조선사를 비롯한 한국의 고대사가 대륙을 무대로 전개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고힐강은 이지린의 논문에 대한 평가서를 대학당국에 제출했는데, 먼저 이지린이 고대 조선족이 현재 중국영토에 광법위하게 존재했고 그 중심을 요서와 요동일대라고 주장했다고 서술했다. 고힐강은 이지린의 논문이 “문장이 번잡하고 중첩되어 견해 파악이 어려워 설득력이 떨어진다.”, “자의적이고 견강부회적으로 역사를 해석했다.”, “객관적연구를 표방했으나 민족주의적 속박에 사로잡혀 있다.”는 식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고힐강의 비판은 대부분 총론에 불과했다. 구체적인 비판으로 예를 들면, “기자와 그 후예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기(箕)를 왕(王)을 의미하는 조선어 ‘검’과 관련되었다고 본다.”는 것 등 지엽적 것에 불과했다. 고힐강은 이지린이 고조선 관련 현존 자료의 95%를 읽었다고 시인한 것처럼 이지린이 고대 4사는 물론 《관자》,《산해경》,《전국책》,《진서(晉書)》,《구당서》,《수경주(水經注)》등, 수많은 중국사료와 명청시대 학자들의 연구결과까지 인용하면서 고조선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 것을 반박할 사료가 없었다. 고힐강은 1961년 9월 29일 자 일기에 “오늘의 시험은 사실상 형식적인 것이다. 국제적인 우호관계를 위해서 그 결점을 지적하지 않고 반드시 통과시켜야했다.”라고 말했다. 이지린의 견해를 반박할 수 없었던 자신의 학문적 한계를 애써 정치적인 결정 때문으로 희석시키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 토론회에 등장한 이지린
이지린은 1961년 8월~9월 평양에서 열린 ‘고조선의 생산력과 국가형성에 대한 토론회’애 참석했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이 이미 북경대에서 통과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에 그의 참석은 큰 관심을 끌었다. 이 토론회에서 이지린은 그간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해고, 과학원 원사 백남운은 “고조선은 압록강 이북과 요서, 요동지방에서 찾아야하며, 점차 동쪽으로 옮겨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이지린의 견해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 토론회는 북한 학계가 해방 직후부터 전개하던 숱한 고조선 관련 논쟁에 마침표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1962년 이지린의 박사학윈 논문인《고조선연구》가 출간되면서 북한 학계의 고조선사에 대한 정리는 일단락되었다. 고조선의 강역에 관한 이지린의 핵심논리는 서기전 5~4세기 경까지는 고조선의 강역이 지금의 하북성 난하부터 압록강 북부까지 걸쳐져 있었다가 서기전 3세기 경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1~2천 리의 강역을 빼앗긴 후 요녕성 대릉하까지로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낙랑군 또한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 정리했다.
이지린의《고조선연구》가 간행되면서 북한학계에서 ‘낙랑군=평양설’은 자취를 감추었다. 중국의 방대한 문헌사료는 물론 중국에서 출토된 여러 고고학 사료들을 가지고 고조선의 강역이 때로는 중국 하북성까지 걸쳐 있다가 요녕성으로 후퇴했다고 논증했는데, 평양 부근의 일부 고고학 유물들, 그것도 일제의 조작설이 만연한 고고학 유물들을 근거로 ‘낙랑군=평양설’을 펼치는 주장은 더 이상 학문적으로 설 자리가 없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조선연구》8장의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본 고대 조선문화의 분포’에서 니지린은 중국 요서, 요동지역의 고고학 발굴결과까지 광범위하게 정리했다. 중국 요녕성 지역에서 발둘괸 여러 유물들을 가지고 고조선 강역이 지금의 요서지역가지 차지했다고 주장했다. 방대한 문헎사료는 물론 다양한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대륙 고조선설과 한사군 요도얼을 주장하는데 평양부근에 한정된 그것도 일제의 조작설이 만연한 고고학 자료만을 근거로 반도 고조선설과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는 도유호 등의 논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이처럼 북한학계는 거의 15년 이상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거쳐 ‘낙랑군=평양설’룰 무너뜨렸다. 남한학계가 지금까지 이 문제데 대한 논쟁다운 논쟁 한번 하지 않고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낙랑군=평양설’을 100년 전에 확립된 ‘정설’이라고 우기는 사실에 비춰보면 이채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남한 학계가 보인 행태가 전체주의적 태도라고 비판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임나=가야설’도 폐기한 북한학계
북한의 김석형은 평양에서 발행하던 《역사과학》1963년 1월 호에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실었다. ‘낙랑=평양설(한사군=한반도설)’과 함께 조선총독부 역사관의 또 한 축이었던 ‘임나=가야설’을 비판한 논문이었다. ‘가야=임나설’의 진원지는 일본 메이지시대 한국을 점령해야 한다고 논리를 편 정한론(征韓論)이었다. 정한론자였던 나카 미치요[那珂通世 : 1851~198]가 도쿄제국대학 출신들이 주축인 ‘사학회’에서 만들던 《사학잡지(史學雜誌)》1896년 판에 실은 ‘가라고(加羅考)’에서 임나(任那)를 가라라고 주장한 것이 이 설의 효시다. ‘임나가 가야임으로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옛날 역사의 복원이다.’라는 논리다. 그런데 김석형은 위 논문에서《일본서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등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아니라 이들 나라들이 일본 열도 내에 진출해서 세운 소국이자 분국이라고 주장했다. 임나는 가야가 아니라 나라 근처 오카야마에 있었다고 보았다. 일본인 학자들도 일부 극우파를 제외하고는《일본서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등을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돠 같은 나라라고 볼 수 없다는 데 동의하던 상황에서 나온 이 논문은 일본 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지린의《고조선연구》와 김석형의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는 북한학계가 1962~3년 도에 이미 조선총독부 역사관의 두 축인 ‘한사군=한반도설’과 ‘임나=가야설’을 완전하게 무너뜨렸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반면 남한학계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이 두 문제에 대해 단 한번의 제대로 된 논쟁이나 토론 없이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이론을 조금 변형시킨 채 이른바 ‘정설’이라고 우기고 있다. 북한학계에서 거의 60여 년 전에 치열한 논쟁과 고증으로 폐기시킨 ‘낙랑군=평양설’이 아직 정설이다. 게다가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인 ‘가야=임나설’은 학계의 정설이라고 주장한다. 자기모순과 이율배반이 식민사학의 특징이다.
2016년 《역사비평》은 봄호와 여름호에 《한국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 비판》이란 특집기사를 거듭 실어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역사학을 ‘사이비역사학’으로 매도했다. 그 내용은 결국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으로 조선총독부에서 확립시킨 식민사관의 되풀이에 불과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 보수언론에서 이들을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이라고 추겨 세웠고, 여러 진보언론들도 뒤질세라 학술면을 대거 할애해서 이들의 주장이 마치 새로운 연구라는 듯 대서특필(그 경위는 이주한 등 저《매국의 역사학자, 그들만의 세상》2017, 만권당에 자세하다.)했다. 이 ‘무서운 아이들’은 한 언론과 인터뷰하면서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질문에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우리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 바뀔 가능성이 없다고 보면 된다.”라고 단정지었다. 북한학계에서 60여 넌에 폐기시킨 조선총독부학설이 남한학계의 ‘제대로 된 학자’들에게는 부동의 정설이라는 것이다. 북한학자들의 눈에 남한의 역사학자들과 역사학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식민사관 카르텔과 분단사학
이 시점에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왜 언론들까지 식민사학자들처럼 팩트를 조작하면서 식민사관을 지키려고 애쓰는가 하는 점이다. 진보언론에서 발행하는 한 주간지의 편집장은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지금까지 북한지역에서 진행된 고고학발굴 결과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 2600여 기의 낙랑고분이 확인됩니다. 옛 사서의 기록과 이 성과를 근거로 한국의 고대 사학자들은 대부분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인근으로 비정합니다. 이것이 ‘일군의 학자들’ 눈에는 견디기 힘든 ‘식민사학’의 잔재로 비친 것이지요.」
북한에서 해방 후 2600여 기의 낙랑군 고분을 발굴한 결과 ‘낙랑군=평양설’을 확정 지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이것은 북한학계의 주장을 180도 거꾸로 뒤집어 전달한 것이다. 북한의 역사학자 안병찬은 ‘평양일대 낙랑유적의 발굴정황에 대하여 : 《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에서 “이 기간에 평양시 낙랑구역 안에서만 해도 2600여 기에 달하는 무덤을 발굴한 결과 낙랑군 무덤은 단 한 개도 찾지 못했다.”라고 발표했다.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라《삼국사기》에 나오는 낙랑왕 최리의 낙랑국의 유적으로써 한나라 무덤과는 완전히 다른 우리민족 고유의 무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거꾸로 뒤집어 독자들을 호도한다. 몰라서 그랬다면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독자들에게 사과해야 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사과는 없다. 식민사관 카르텔과 함께 언론도 불신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남한사회에서 식민사관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가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사례들이기도 하다.
낙랑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이화여대교수 오영찬은 “1900년 대까지 북한은 평양일대에서 2600여 기의 무덤을 추가로 발굴하였다. 북한학자들은 이 무덤을 마한의 유적이라고 해석하다가 최근에는 고조선의 후국(侯國)이었던 낙랑국의 유적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평양일대 무덤들은 낙랑군 유적이 분명하다(한국고대사학회 편 《우리시대의 한국고대사》주류성)”이라고 주장했다. 북한학계에서 여러 근거를 들어서 평양일대의 무덤들이 ‘낙랑군’ 무덤이 아니라 우리민족 고유의 무덤양식이라고 발표한 것을 부정하려면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냥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의 연구결과를 180도 뒤집어 호도하는 언론과 북한의 발표내용을 무조건 믿을 수 없다는 학자들, 식민사관이 민족분단을 숙주 삼아 기생하는 ‘분단사관’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사례들이다.
그런데 ‘식민사관’ 즉 ‘분단사관’은 급기야 민족과 민족주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악성종양으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해방후 실증주의로 분장한 남한의 식민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역사학을 ‘신민족주의 역사학’이라고 자칭해왔다. 그러다가 조선총독부 학설을 추종하는 자신들의 실체가 드러나자 민족과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노선으로 수정했다. 그러자 뉴라이트는 물론 일부 짝퉁 진보들도 여기에 대거 가담해서 민족과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드문 좌우합작 전선을 형성했다. 뉴라이트들은 민족을 20세기에 탄생한 상상의 공동체라면서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1948년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과 같은 해 9월 9일 건국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통일해야 할 아무런 당위성이 없게 된다. 민족이란 동질성이 없다면 두 나라가 왜 통일되어야 하는가?
일부 짝퉁진보들은 한국의 민족주의가 마치 침략주의라도 되는 것처럼 민중을 호도한다. 이들은 유럽의 민족주의 역사를 한국 민족주의에 무비판적으로 등치시킨다. 유럽은 중세 기독교가 지배하던 코즈모폴리턴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면서 민족국가가 나타났고, 곧바로 제국주의로 전환했다. 그래서 유럽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동양에서는 일본이 이런 제국주의적 민족주의 즉 국수주의의 길을 걸었다. 한국 민족주의는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지린의 《고조선연구》에서 거듭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한국민족은 20세기에 생긴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고대부터 존재해왔다. 또한 한국 민족주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민족주의이자 아나키스트인데서 알 수 있듯이 배타적 침략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족 간의 평등을 주장한 평등적 민족주의였고, 침략에 저항하는 해방의 민족주의였다. 민족 내부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절대적 자유와 평등을 주장했던 인간해방의 이념이었다.
프랑스의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1886~1944)는 나치와 사우다 총살당한 레지스탕스이자 《봉건사회》를 쓴 고대와 중세의 역사에 정통한 역사학자였다. 그는 단재 신채호와 여러 면에서 흡사하다. 마르크 블로크가 프랑스 민족주의 역사학자라면 신채호는 한국 민족주의 역사학자였다. 1936년 여순 감옥에서 옥사한 신채호나 1944년 나치에게 총살당한 블로크나 모두 제국주의에 맞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마르카 블로크는 프랑스에서 훌륭한 역사학자이자 실천적 지식인으로 추앙받는 반면 단재 신채호는 남한의 뉴라이트 계열 역사학자가 공개 학술대회 석상에서 ‘신채호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라고 모독해도 아무도 항의하지 않을 정도로 모멸의 대상이다. 남한에서 단재 신채호의 역사관을 계승한 강단사학자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입으로는 단재를 존경한다면서 학설, 즉 행동은 이병도를 추종하는 분절적 사고가 횡행한다. 반면, 북한 역사학계는 앞서 인용한 것처럼 단재 신채호의 역사관을 받아들이고 높게 평가한다. 남한사회가 경제적으로는 북한사회보다 풍요한지는 몰라도 정신세계는 한없이 빈곤하다.
이지린의《고조선연구》를 해역하면서 느낀 것은 북한의 역사학자들은 해방 직후부터 자신들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1960년 대 초반에 일제 식민사관은 말할 것도 없고 ‘대국주의 사상’, ‘대국주의 사가’ 등의 용어로 중화패권주의 사관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나아가 중국의 대국주의적 봉건사가들과 조선의 사대주의 사가들의 학설이 일치한다고 비판 것도 새로웠다. 지도교수인 고힐강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맥(貊)은 흉노(匈奴)’라는 그의 설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학문적 기개 앞에선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남한과 북한을 막론하고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면 갖게 되는 필연적 역사관이지만 그 시기가 1960년 대 초반이었던 것이다.
남한의 역사학자들은 광복 70년이 넘은 아직까지도 일본인의 눈, 그것도 일본 극우파의 눈으로 한국사를 본다. 근·현대는 진보라면서도 조선 후기는 나라를 팔아먹은 노론의 관점으로 보고, 고대는 조선총독부의 관점으로 본다. 이런 분절적 사고를 극복해야 민족의 정신이 바로 설 것이다.

대륙 고조선사의 진실을 찾앴다는 사실에 감탄
이지린의《고조선연구》를 해역하는 동안 1960년 대 초반에 이런 방대한 사료를 근거로 대륙 고조선사의 진실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한 학계가 ‘낙랑군=평양설’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면서 일체의 토론을 배제한 채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정설로 떠 받드는 동안 북한 학계는 숱한 연구와 토론을 거쳐 ‘낙랑군=평양설’을 무너뜨린 것이 1960년 초반이라는 사실에 닿으면 역사학자의 한 사람으로써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의 U.M 부틴은 이지린의 《고조선연구》에 자극받아 방대한 《고조선》을 썼다고 알려져있다. 반면 대륙고조선설을 주장한 윤내현 교수는 1980년 대 초에 안기부의 조사까지 받았다. 강단사학자들이 윤내현 교수가 이지린의《고조선연구》를 봤다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신고했기 때문이다. 앞선 언론의 팩트 조작과 함께 남북분단이 남한 식민사학계를 지탱하는 가장 큰 숙주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다.l
이제 남한의 역사학과 북한의 역사학이 민족을 매개로 서로 소통해야 할 때가 되었다. 반민족사학에 맞서는 민족사학과 분단사학에 맞서는 통일사학의 체계를 세울 때가 되었다. 물론 남한의 민족사학자들과 북한 사학자들의 역사관에도 서로 다른 점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역사를 우리의 관점으로 보자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기 때문에 이런 큰 틀에서 민족의 동질성을 확대하고 그것을 토대로 교류를 증진함으로써 통일의 길로 나가야한다고 본다.
그간 《고조선연구》영인본은 나와 있었지만 대부분의 문헌 사료가 한문 그대로 인용된 탓에 한문에 밝은 극소수 독자들 외에는 읽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필자는 《고조선연구》를 해역하면서 가능한 원문을 찾아 확인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원문을 찾을 수 없었던 일부 사료는 《고조선연구》에 실린 사료만을 토대로 해역했다. 이 과정에서 번역상의 오류나 사료 인용상의 오류가 나타난다면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오류를 지적해주면 곧바로 수정할 것을 약속드리면서《고조선연구》가 우리 학계의 고질병이 된 친일 매국사관, 친중 사대사관을 청산하고 우리의 관점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는 한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뉘가 없다.

조선건국 4351년(2018년) 9월 마포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서재에서
천고(遷固) 이덕일 기

이덕일이 해역한 《이지린의 고조선연구》에서 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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