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연의

 

   
 
한국사
1. 선사
2. 고조선
3. 삼국
4. 남북국
5. 고려
6. 조선전기
7. 조선후기
8. 일제
9. 공화국
10. 통사
· 오늘 :  217 
· 어제 :  173 
· 최대 :  2,389 
· 전체 :  1,519,443 
 
  2020-07-04 22:25:5927 
니계상(尼谿相) 참(參)
운영자
니계상 참

기본정보

참(參)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니계상(尼谿相)이라는 관직에 있던 자이며, 니계상은 니계라는 지역 또는 집단을 대표하는 존재로서 위만조선의 재상과 같은 직책으로 추정된다.
생몰년: ?-기원전 99년.

일반정보

참(參)은 위만조선(衛滿朝鮮) 말기의 재상과 같은 직책인 니계상(尼谿相)으로서 한(漢)과의 전쟁 중 사람을 시켜 주전론자(主戰論者)인 우거왕(右渠王)을 살해하고 한(漢)에 투항함으로써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전쟁이 끝난 후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 6월 획청후(澅淸侯)에 봉해졌다.

전문정보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서(漢書)』 조선전을 인용하여 위만조선(衛滿朝鮮)과 한(漢)의 전쟁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기원전 109년 한(漢) 무제(武帝, 기원전 141-기원전 87년)가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위만조선 정벌에 나서자, 위만조선의 니계상(尼谿相)이라는 관직에 있던 참(參)은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등과 함께 화친을 주장하였다. 노인과 한도(韓陶) 그리고 왕협(王唊)이 먼저 한군(漢軍)에 항복하였고, 니계상 참은 자객을 보내 우거왕을 살해한 후 한군(漢軍)에 항복함으로써 위만조선은 멸망으로 치닫게 되었다.

니계상(尼谿相) 참(參)에 대한 해석에서 후한의 응소(應劭)는 니계(尼谿)와 상참(相參)을 구분하여 이계를 별도의 인명으로 보아 두 사람으로 읽었다. 조선후기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권2 위만조선 원봉(元封) 2년조의 주(註)에서는 “예(濊)”를 니계의 반절음(反切音)이라 하여 “예”로 해석한 바 있다. 그러나 『사기(史記)』 권20 건원이래후자연표(建元以來侯者年表)에는 “조선니계상(朝鮮尼谿相)”이라는 기록이 있어 니계는 대체로 지명(地名)으로 이해되고 있다.(이병도, 1976) 위만조선에 있었던 복수의 상 중 니계상은 “니계의 상”이라는 특수한 칭호가 부여되어 조선상과 명칭을 달리 하고 있다. 이는 니계집단이 고조선을 구성하던 중심 집단과 차이가 있었거나 또는 위만조선국의 권력구조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있었던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니계상은 니계라는 지역 또는 집단을 대표하는 존재로 생각된다.(노태돈, 2000)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니계상을 관직명(官職名)으로, 참은 이름으로 보는 입장에서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르면 조선상은 중앙의 장관이고, 니계상은 지방의 장관이라 하여 상의 관료로서의 성격이 강조된다.(이병도, 1976) 그러나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상(相) 한도(韓陶)・니계상 참을 모두 중앙의 중요 직책의 장이라고 보거나(김정배, 1986), 이계상은 지방에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중앙에 진출하여 상(相)이라는 관직을 받아 활동한다고 보는 견해(이종욱, 1993)는 관료로서의 니계상에 주목하고 있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하고 있으나, 중앙관직으로 파악하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또한 최근에는 니계상을 후국(侯國)지역에 파견된 상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에 따를 경우 상은 군주에 의해 통제되는 관료집단의 장으로 파악된다.(김남중, 2004)

“상(相)”이 위만조선의 권력구조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음은 위만조선 당시 인물로 이름이 전해지는 7명 중 4명이 상이었다는 점과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된 후 행해진 논공행상에서 상 2명과 상의 아들 1명이 열후(列侯)로 봉해진 점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노태돈, 2000) 원래 군주의 가신(家臣)에서 출발한 중국의 상은 전국시대에 이르러 백관의 장으로 국정을 총괄하는 수상(首相)의 직이 되었다.(김광수, 1994) 위만조선의 상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설치된 것으로 보이지만 같은 시기에 여러 명의 상이 존재하여 정원이 1명이었던 중국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성격에 있어서 중국의 상과 같이 관료적인 존재가 아니라 수장(首長)적인 존재였다. 상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는 수장이지만 조정에서는 왕의 신하로 복무하였다.(노태돈, 2000) 위만조선의 국가구조는 이주민 집단인 왕권과 토착계의 제 부족집단의 타협적 결합에 의해 성립된 것이었다. 따라서 위만조선의 지배집단은 중국식 “상”직을 도입하여 위만 이전 본래의 조선부족들을 지배구조 안으로 편입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발전단계는 아직 관료체제가 성숙될 수 있는 단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상의 실제 내용은 여전히 옛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김한규, 1980)

최근 니계의 위치가 제(齊) 땅의 임치(臨淄) 지역일 가능성을 언급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니계상 참이 한에 투항한 후 봉해진 획청이라는 지역은 『한서보주(漢書補注)』에 의하면 제군(齊郡) 임치현(臨淄縣)으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임치이며 이 지역에 치수(淄水)의 지류인 획수(澅水)가 있어 이 일대를 획청으로 보았다. 그리고 한대의 제후호는 관련 지역에 사여(賜與)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위만조선의 최상층 세력들이 발해만(渤海灣) 일대의 제(齊) 지역과 태산(泰山) 하동(河東) 지역에 제후로 봉해진 사실과 니계가 이미 기원전 5세기경에 제의 지명으로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위만조선의 정치적 영역의 범위가 현재의 산동반도의 제 지역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투항 후 자신들의 정치적 영역에 제후로 봉해졌다고 상정하면 니계는 곧 획청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다.(조법종, 2006)

『사기(史記)』 권20 건원이래후자연표(建元以來侯者年表)와 『한서(漢書)』 권17 경무소선원성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에 의하면 참은 한(漢)에 투항한 후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 6월 획청후(澅淸侯)에 봉(封)해졌으나, 11년만인 천한(天漢) 2년(기원전 99) “도망한 조선포로를 은닉했다는 죄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혀 병으로 죽었다.(坐匿朝鮮亡虜下獄病死)” 기후(幾侯)로 봉해진 장(長)이 “조선의 모반을 획책한(使朝鮮謀反)” 죄로 매에 맞아 죽임을 당한 사실과 더불어 획청후 참에 대한 상기의 기사를 통해 적어도 기원전 105년에서 기원전 99년 사이에 한의 군현 통치에 대한 조선인의 모종의 반항이 있었으며, 이 사건에는 왕자 장과 니계상 참 등이 깊이 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한의 4군이 설치된 지 불과 7년이 경과되지 아니하여 한의 군현통치가 조선인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것을 추정케 하며, 그러한 반발은 한에 대한 항전을 포기하고 한에 의한 군현지배를 초래한 당사자인 투항자들과 깊이 관련되어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조선의 신하들이 투항한 이유는 그들이 한의 군현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해가 상반된 이주세력인 왕실과 토착세력인 신하들이 미숙하게 결합된 위만조선의 모순이 한의 침공으로 촉발된 것이라고 파악하였다.(김한규, 1980)

참고문헌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김한규, 1980, 「衛滿朝鮮關係 中國側史料에 대한 再檢討」『論文集』8, 부산여자대학교.
김정배, 1986, 『한국고대의 국가기원과 형성』, 고려대학교출판부.
이종욱, 1993, 『고조선사연구』, 일조각.
김광수, 1994, 「古朝鮮 官名의 系統的 理解」『歷史敎育』56.
노태돈, 2000, 『단군과 고조선사』, 사계절.
김남중, 2004, 「衛滿朝鮮의 王權과 地方統治體制」『韓國古代史硏究』33.
조법종, 2006, 『고조선고구려사연구』, 신서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馳>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彘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船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幷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唊)[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唊)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위만조선)
魏滿朝鮮
前漢朝鮮傳云 自始燕時 <嘗>略得眞番朝鮮[師古曰 戰國時 (燕)<國>始略得此地也] 爲置吏築障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師古曰 浿在樂浪郡] 屬燕 燕王盧綰反入<匈>奴 燕人魏滿亡命 聚黨千餘人 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稍役屬眞番朝鮮蠻夷及故燕齊亡命者 王之 都王儉[李曰 地名 臣<瓚>曰 王儉城 在樂浪郡浿水之東] 以兵滅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師古曰 孫名右渠] 眞番辰國 欲上書見天子 雍閼不通[師古曰 辰謂辰韓也] 元封二年 漢使涉何諭右渠 終不肯奉詔 何去至界 臨浿水 使<馳>刺殺送何者朝鮮裨王長[師古曰 送何者名也]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 天子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襲功殺何 天子遣樓船將軍楊僕 從齊浮渤海 兵五萬 左將軍荀彘 出遼討右渠 右渠發兵距嶮 樓船將軍將齊七千人 先到王儉 右渠城守 規知樓船軍小 卽出擊樓船 樓船敗走 僕失衆遁山中獲免 左將軍擊朝鮮浿水西軍 未能破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 因兵威往諭右渠 右渠請降 遣太子獻馬 人衆萬餘持兵 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 謂太子已服 宜<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 遂不渡浿水 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 圍其西北 樓船亦往會 居城南 右渠堅守 數月未能下 天子以久不能決 使故濟南太守公孫遂往正之 有便宜將以從事 遂至 縛樓舡將軍 幷其軍 與左將軍 急擊朝鮮 朝鮮相路人 相韓陶 尼谿相參 將軍王唊[師古曰 尼谿 地名 四人也] 相與謀欲降 王不肯之 陶唊路人皆亡降漢 路人道死 元封三年夏 尼谿相參 使人殺王右渠來降 王儉城未下 故右渠之大臣成己又反 左將軍使右渠子長 路人子最 告諭其民 謀殺成己 故遂定朝鮮 爲眞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위만조선
『전한서(前漢書)』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처음 연(燕)나라 때로부터 일찍이 진번(眞蕃)·조선(朝鮮)을 침략해서 얻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전국(戰國)시대 때에 연(燕)이 처음으로 이 땅을 침략해서 차지했다고 한다], 관리를 두어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고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하였다. 한(漢)이 일어났을 때에는 멀리 있어 지키기 어렵다고 하여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여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를 삼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낙랑군(樂浪郡)에 있다고 했다],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에 들어가자 연(燕)나라 사람 위만(魏滿)은 망명하였는데, 무리 1천여 인을 모아 동쪽으로 요새를 넘어 도망하여 패수(浿水)를 건너 진(秦)의 옛 빈 땅에 있던 위 아래의 장새에 살았다. 점차 진번(眞蕃)·조선(朝鮮)의 만이(蠻夷)와 옛 연(燕)과 제(齊)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왕이 되어 왕검(王儉)[이(李)는 지명이라 했고, 신찬(臣瓚)은 왕검성(王儉城)이 낙랑군(樂浪郡)의 패수(浿水) 동쪽에 있다고 했다]에 도읍하였다. 병사의 위력으로 그 변방 소읍을 침략하여 복속시켰고, 진번(眞番)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니 사방이 수천 리였다.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 우거(右渠)[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손자의 이름이 우거(右渠)라고 했다]에게 이르렀다. 진번(眞番)․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했으나 막아서 통하지 못하였다[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진(辰)은 진한(辰韓)을 이른다고 했다].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한나라는 섭하(涉何)로 하여금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지만, 끝내 천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 섭하가 가서 경계에 이르러 패수에 다다르자 마부를 시켜 자신을 호송하는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섭하(涉何)를 호송하는 자의 이름이라고 했다]을 찔러 죽이게 하였다. 곧 패수를 건너 요새로 달려 들어가 마침내 보고하였다. 천자가 섭하를 임명하여 요동(遼東) 동부도위(東部都尉)로 삼았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습격하여 섭하를 살해하였다. 천자는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보내 제(齊)로부터 발해(渤海)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병사가 5만이었다.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을 나와서 우거(右渠)를 치니, 우거가 병사를 내어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막았다.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의 7천인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王儉)에 이르렀다. 우거는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누선(樓船)의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나가서 누선을 치니, 누선이 패해 달아났다. 양복은 무리를 잃고 산속으로 도망하여 사로잡힘을 면했다. 좌장군(左將軍)은 조선의 패수(浿水) 서쪽 군대를 습격하였는데, 깨뜨리지 못하였다. 천자는 두 장군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위산(衛山)으로 하여금 병(兵)의 위력으로써 가서 우거를 타이르게 하였다. 우거는 항복을 청하고 태자(太子)를 보내어 말을 바치겠다고 하였다. 무리 만여 인이 무기를 쥐고 바야흐로 패수를 건너려 하는데, 사자(使者)와 좌장군은 무슨 변고가 있을까하여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미 항복하였으니 무장을 풀라고 하였다. 태자 역시 사자가 속일까 의심하여 마침내 패수를 건너지 않고, 다시 이끌고 돌아갔다. 천자에게 보고하니 천자가 위산을 목 베었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浿水)의 상군(上軍)을 깨뜨리고 곧 전진하여 왕검성 아래에 이르러 그 서북쪽을 웨워싸고 누선도 가서 (군사를) 합쳐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견고하게 지켜서 여러 달이 되도록 함락시킬 수 없었다. 천자는 (전쟁이) 오래 결말을 보지 못하자, 옛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보내어 치게 하되, 편의를 따라 처사(處事)하게 하였다. 공손도가 와서 누선장군을 잡아가두고 그 군사를 합쳐, 좌장군과 함께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조선상로인(朝鮮相路人), 상한도(相韓陶), 니계상참(尼谿相參), 장군왕협(將軍王唊)[안사고가 이르길, 니계(尼谿)는 지명(地名)이고, 네 사람이라 하였다]이 서로 모의하고 항복하고자 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였다. 도(陶)와 협(唊)과 노인(路人)은 모두 도망가 한 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기원전 112) 여름에 니계상참은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으나 왕검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거의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또 배반하였다.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노인의 아들 최(最)를 시켜 그의 백성들을 타일러 성기를 모살하게 하였으므로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4군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컨텐츠진흥원 전재
목록
4714
[] 니계상(尼谿相) 참(參)

니계상 참 기본정보 참(參)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니계상(尼谿相)이라는 관직에 있던 자이며, 니계상은 니계라는 지역 또는 집단을 대표하는
운영자 20-07-04
[]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연구

질타·모함·의혹과 싸운 고조선 연구 30년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른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였다. 1980년대 초 윤내현
운영자 20-04-30
[] 이지린의 고조선연구 해제(이덕일)

이지린의 《고조선연구》 대륙고조선 역사를 찾아낸 북한의 역사학계 《임꺽정》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은 1949년 평양에서 발간
운영자 20-04-04
[] 한사군의 위치에 관한 중국사서의 기사

한사군의 위치에 관한 중국사서 목록 아래 1)~8)까지 ‘한사군 및 대방군이 존재하고 있던 시기에 작성된 모든 중국 고대사서’는 한사군 및 대
운영자 20-02-10
[]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는 북경에 세운 백두산 정계비! 전형배 21세기민족주의포럼 기획위원 전형배 | tongil@tongilnews.com
운영자 19-01-02
[] 우리 역사의 아쉬운 대목

우리가 만든 한자(漢字)로 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서기 414년 장수왕 때 만든 ‘광개토대왕릉비’이다. 거의 1600년 전 일이다. 나는 내
운영자 18-03-18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6. 중국은 왜 역사를 새로 쓰나?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동북공정으로 자신감 얻은 中…국가 차원 역사영토 확장 야심 <6>중국은 왜 역사를 새로 쓰나●거꾸로
운영자 18-02-22
[] 한사군의 교치(僑置)

한사군의 교치(僑置)에 관하여 (稽古諮) 1. 글 머리에 필자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나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아 역사에 관련
운영자 15-05-31
[] 북경시 대흥구(大興區) 삼합장촌(三合莊村)에서 발굴된 낙랑군 묘분

경화시보(京華時報) 기자 장연(張然) 일전에 기자는 북경시문물국(北京市文物局)의 고고학 관련인원이 북경시 대흥구(大興區) 황촌진(黃村&#
운영자 15-05-13
[] 한사군은 북경 일대에 있었다.

“중국 수도 북경-거대대륙 고조선 우리땅“ 심백강 박사“잃어버린 상고사 되찾은 고조선” 역사자료 대공개 정리/박정대 기자 민족문화연구원
운영자 15-03-19
[]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낙랑군樂浪郡의 위치 - 낙랑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문헌은 존재하지 않는다. - 낙랑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 『後漢書』 「光武帝
운영자 13-11-13
[] 연암 박지원의 한사군(漢四郡) · 평양(平壤) · 패수(浿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夏日記)·도강록(渡江錄)》) 「(전략)...... 애닯도다!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 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운영자 13-11-08
[]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나타난 우리나라 역사 발췌 번역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나타난 우리나라 역사 발췌 번역 1. 史記, 卷三, 殷本紀, 第三 箕子懼, 乃詳狂為奴, 紂又囚之. ……周武王遂斬
운영자 12-05-22
[] 중국학계는 왜 '기자조선'에 집착하는가

중국학계는 왜 '기자조선'에 집착하는가 [연합] 입력 2011.08.24 15:19 이성규 교수 '고조선, 중국사 편입 저의' "기자조선이 없으면 위만조선
운영자 11-08-26
[] 조선열전(사기)

朝鮮列傳第五十五 1. 朝鮮王滿者(조선왕만자), 조선왕 위만은 ▶조선 : 사기정의(史記正義)에 고려의 도읍은 평양성(平壤城)이며, 평양성은
양승국 06-08-24
1 [2][3][4][다음][맨끝]